6. '박종인의 땅의 역사' 충주편으로 tv조선 방영 2017년
중앙탑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이 탑이 있다. 신라 통일 후 100년 정도 후 신라 38대 원성왕(785~798)은 걷는 보폭이
똑같은 사람 둘을 뽑아 신라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걷게 한다. 두 사람이 만난 그 자리에 큰 절을 짓게하고 탑을 쌓는다.
충주시 중앙탑면이 바로 신라의 한가운데라 한다.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이다.
지금도 그 동리 사람들은 그곳을 '중앙'이라 부른다. 여기에 바로 중앙탑이 있다.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은 국보 제6호이다. 이것은 통일신라 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해서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이 중앙탑 옆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이 지역은
육로와 수로가 발달한 요충지이다. 이곳을 차지하면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인후(咽喉)라고
부르는데 땅은 넓고 사람들도 많아서 목구멍을 제대로 쥐지 않으면 땅을 지배할 수가 없다고 한다. 웬만한 인재 웬만한
고집쟁이가 아니면 이곳 충주를 통치하거나 지배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한때는 중원 땅이라고 불렀다 한다.
중원의 땅, 충주에서 만난 고집쟁이들을 살펴보자!!
우선 루암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곳엔 충주 누암리 고분군이 있다.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데 사적 제463호이다.
이곳 루암리의 고분군은 중원 땅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참으로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이곳 중원의 땅 주인은 백제였다고 한다.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346~375)은 평양까지 쳐들어가서 <고구려>고국원왕을
죽인다. 이때 중원은 백제의 영토로 확장된다.
100년 뒤, 고구려 장수왕(413~491, 고구려 20대 왕)은 한성 백제까지 쳐들어가서 개로왕을 죽여버린다. 바로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공주 땅<웅진>으로 천도하는 슬픈 처지가 된다. 그래서 이땅의 주인은 고구려가 된다.
이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맞서서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어 잠시 합동 작전을 펼친다. 그런 다음 이 땅의 주인은
신라 진흥왕이 신라 땅으로 복속한다. 이러한 상황을 루암리 230여개의 고분군이 모두 신라 진골 귀족들의 무덤이며 결국
신라 땅으로 복속할 때까지의 피비린내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한 문화는 1000년에서
8을 뺀 992년 만에 망하게 된다. 중원 땅은 결국 고구려 후손의 땅으로 돌아간다. 신라가 망하던 해, 신라의 한 고집쟁이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이 중원 땅에도 그 고집쟁이의 흔적이 있다. 천 년 전,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고개,
'하늘재'가 있는데 이 고개는 경북 문경시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미륵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던 고개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 왕 때 개척한 길이라 한다. "달라 왕 3년 해(156)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하늘재)이 길을 열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길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 고갯길은 신라의 한강 진출을 돕던 길이었으며 신라시대 군사 요충지였다. 하늘재를 넘어가면 큰 터가 나오는데 바로
충주시 미륵리 원터이다. 이곳은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다. 이 원터는 관급 여관이었는데 지리적으로 중요하였기에 세워진 여관인
셈이다. 하늘재는 예전에는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던 곳이었지만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완공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약 1000여 년 전 하늘재를 넘어서 중원 땅에 도착한 한 고집쟁이가 바로 마의태자인 것이다. 麻衣太子!!!
그는 신라 56대 경순왕(신라의 마지막 왕)의 첫째 아들의 실제 이름은 김일이었으며 그는 경순왕에게 "어떻게 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라고 고하고는
「 태자(太子)는 종묘(宗廟)에 곡(哭)을 하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입고 있던 비단옷이
부끄러워 찢어버리고 대신 삼베옷을 입고, "고려가 주는 양식을 소·돼지처럼 먹고 사느니, 차라리 신라(新羅) 사람으로
칡뿌리를 캐먹고 살겠다"며 끝까지 신라(新羅) 사람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자료화면 - 충주 대원지(사적 317호)가 있는데 이는 충주시 수안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굴사원 터이다. 마의 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세운 절이라 한다. 절의 귀부에는 보통 유머코드를 심어 놓는데 이곳 절의 귀부는 비석이 없고
어깨부위에 유머코드를 심어 놓았다. 새끼 거북이 두 마리를 어깨에 새긴 것이다. 동양 최대의 석조 귀부이라 한다.
두 마리의 거북이를 새겨 넣은 것은 매우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 이곳 미륵 대원사에는
5층 석탑도 있고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도 있다. 이 입상은 갓을 쓰고 있고 몸에는 이끼가 끼지만 얼굴
부위에는 전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또 다른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이 미륵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쪽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는 덕주사가 있는데 마의태자 여동생 덕주 공주가 만든 절이라 한다. 그 덕주사에는 마애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을 석조여래입상이 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마애불과 석조여래입상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마의 태자가 걸어온 루트도 이상하다. 지명과 전설이 말해주는 그의 북상루트를 보면, 경주 -> 안동 (용두산의 봉우리는 '태자리'
산 정상 바윗돌은 '마의 대'--> 충주(미륵대원사지) --> 양평(용문사,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마의 태자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 -->
홍천(지왕동 : "왕이 당도했다"라는 뜻이라 함) --> 인제(김부-마의태자의 또 다른 이름-김부대왕각(태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 인제 갑둔리(군사가 주둔했다는 뜻) 5층석탑('김부 가족의 영원을 빈다'는 의미) --> 인제엔 마의 태자 사당과 추모비가
있다.
결론은 마의 태자는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게 아니다. 요새마다 자신의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모아서 신라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금강산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 그 꿈을 시작했던 자리가 바로 하늘재를 넘어서 충주의 월악산
밑에 있는 미륵대원지이다.
가던 길 멈추고 - 김해강(金海剛)
-마의 태자 묘를 지나며
골짝을 예는
바람결처럼
세월은 덧없이
가신 지 이미 천 년.
한(恨)은 길건만
인생은 짧아
큰 슬픔도 지내다니
한 줌 흙이러뇨.
잎 지고
비 뿌리는 저녁
마음 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 아파
천고(千古)에 씻지 못할 한
어느 곳에 멈추신고.
나그네의 어지러운 발끝에
찬 이슬만 채어.
조각 구름은
때없이 오락가락하는데
옷소매를 스치는
한 떨기 바람.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막대 짚고
고요히 머리 숙이다.
우륵 : 탄금대에는 또 다른 고집쟁이가 있다.
탄금대라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언덕이란 뜻이다. 신라는 가야를 정복한 후 상류 집단을 각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우민정책을
펼친다. 그때 음악가 집단이 중원 땅으로 집단 이주한다. 그 무리중에 <우륵>이라는 악사가 있었다. 그는 현재 고구려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힌다. 우륵은 중원 땅에서도 가야금을 놓지 않고 꾸준히 탄금대에서도
가야금을 연주한다. 우륵의 가야금이 좋아서 그 소문이 신라 왕실까지 전해진다. 진흥왕이 불러서 연주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은 음악을 신라 궁중 음악으로 삼았다. 신하들이 "어찌 망한 나라의 음악을 우리의 궁중 음악으로 삼을 수가 있단 말입
니까!"라고 말하니 진흥왕의 대답은 "나라가 잘못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이로써 우륵의 음악은 궁중음악인
'대악'으로 발전한다. 강제 이주를 당하고 난 후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혹은 고집이 사라진 가야의 음악을 신라의 음악으로
부활시킨 힘이 되었다.
신립 : 임진왜란 당시 조선육군 사령관인 신립은 어두운 얼굴의 고집쟁이이다. 이 어두운 다른 고집쟁이가 탄금대에 흔적을
남긴다. 그는 이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신립은 명장으로서 북쪽 오랑캐를 상대로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을 야전 사령관으로 중원 땅으로 선조는 보낸다. 왜구를 상대할 수 있는 최고의 적지는 바로 주흘산에 있는
문경새재였다. 문경새재는 목이 좁은 외길이며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문경새재를 버리고 신립은 배수의 진을 치고 탄금대
벌판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워야 승산있다고 판단한다. 모든 부하들과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신립은 말을 듣지 않았다.
1592년 4월 27일 왜군 2만 명이 문경새재에 도착하였다. 왜군의 장군인 고니시 유끼나가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이는 필시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서 춤을 추웠다고 한다. 결국 조선 육군 8000명은 전사하였다.
징비록에 의하면, <요새를 버리고 평지에서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았겠는가?!>로 개탄의 글을 쓰고 있다.
왜군이 탄금대를 치고 정확히 9일 뒤에 일본 적장은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과해 한양으로 입성하였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터무니 없는 작전이라고 논펑하고 있다.
탄금대 절벽 중에는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은 또 다른 절벽이 있는데 몇몇의 소수 병사가 여기에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운다.
뒤에는 <달천>이 흐르고 도망갈 곳은 없다. 이에 신립장군은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활을 너무 쏴서 뜨거워지니까 절벽 밑을
열두 번씩 내려가서 식히고 왔다고 해서 열두대라고 명칭된 곳이다. 신립은 결국 이곳 절벽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곳엔 신립의 충절을 기리는 탑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임경업 장군(1594~1646) : 우직한 명장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임충민공 충렬사가 충주시 단월동에 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명장이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북방 오랑캐를 대항해서 큰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무관임에도
훗날 남쪽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에 군수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푼 사람이다. 하지만 명청 교체기에 당쟁 혹은 권력 싸움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려 버린다.
병자호란(1636년 12월) 이후 임경업 장군의 적은 오직 청나라 뿐으로 간신배의 모략으로 곤장을 맞고 사망한다. 훗날 명장과 충신의
뜻이 부활해서 숙종 23년(1897년) 사당이 세워지고 임경없의 명예를 회복한다. 임경업을 죽게하고 그의 등에 칼을 꽂은 이는 바로
김자점이다. 그는 임경업 장군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에 씌우고 승승장구했던 사람이었다. 김자점(1588~165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조선 3대 간신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3대 간신은 유자광, 임사홍, 김자점이다. 임경업은 김자점에 의해
비참하게 옥사를 하게 된다. 그는 대명의리를 고집하다가 옥사하게 되었다.
박팽년(1417~1456) : 충주시 신니면에서 태었다.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절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박팽년은 우리가 보통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기억할 뿐인데 잠시 살펴 보기로 한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학자의 일원으로 한글 창제에 관여한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으면 집현전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사람이며 만물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에 박팽년은 휩싸인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단종 보좌 세력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이을 철퇴로 때려 죽였으며 2년 뒤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린다. 이에 집현전 학자들은 가만있지를 않았다. 박팽년
등 6명의 신하들은 계유정난을 무위로 돌리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세조도 보는 눈이 있어서 박팽년을 회유하고
곁에 두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다음의 내용을 보자!
"그대를 나의 신하라 여기라!" --> "못 부르겠다!" --> "그대는 이미 나의 녹을 먹는 나의 신하이지 않는가!" --> "아니다!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이에 세조는 다른 사람을 시켜 지금까지의 아뢰는 글과 박팽년 집창고를 가서 확인해보니 상소문에는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로 되어있었고 창고를 압수 수색해보니 세조 정권이 준 월급봉투와 녹봉이 그대로 쌓여있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세조는 박팽년을 고문하고 집현전을 파해버렸고 경연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6일이었다.
그래도 세조는 박팽년이 아까워 옥살이하고 있는 박팽년을 대리인 김자점(박팽년을 세조에게 고자질한 사람)을 시켜
<하여가>를 불러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박팽년의 화답가는 이러했다고 한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다심이야
별할 줄이 있으랴
라고 화답했던 것이었다.
세조가 보낸 바로 그 김자점은 처음엔 사육신의 거사 계획에 동참했다가 두려움을 느끼고 세조 곁에서 달라붙어 고자질하고
거사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다음에 세조의 대리인이 되어서 회유작전에 나섰던 앞잡이의 이름이 바로 <김질>이다. 이 집안
의 내력은 참으로 놀랍다. 김질(1422~1478)은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하여 사육신 사
건을 일으키게 하였다. 190년 뒤, 누명을 쓰고 죽은 임경업 장군을 모략질 한 자가 바로 김질의 고손자도 똑같은 짓을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간신의 집안은 그 DNA가 전달되는 모양이다. 서울 광화문 군기시터에서 사육신을 참혹한 형벌로
찢어죽였다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군기시터는 현재 프레스센터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다.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다.
삼족을 멸했고 삼대를 멸했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산 사람도 가만두지 않았다. 역모사건이 마무리 된 후, 석달이 지나서
세조 왕조실록에 보면, 세조 2년 음력 9월 7일 기사를 보면, 매우 많은 여자 이름이 등장한다. 서글픈 이름들이다. 자신의 남편,
오빠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희생됐던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영의정 정인지의 것으로 넘겨지고, 유성원의 아내 이치와 딸 댓되는
좌승지 한명회에게 주고, 사육신을 고자질한 김질도 충신들의 여자들을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죽음과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 사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자료화면 -- 대구 광역시 달성군 육신사(六臣祠)는 충의의 상징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다. 6개의 귀부와 비석이 있다. 박팽년의 후손들이 육신사를 관리한다. 삼족, 삼대가 사라진 역적에게 어떻게
후손이 있길래 이리도 위패를 모시며 기릴 수 있었을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한 집안의 관비로 끌려갔다. 여종도 임신 중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노비는 딸, 둘째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다. 그 때 서로 아기를 바꾼다. 둘째 며느리가 낳은 아들은 여종의
아들로 박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박팽년의 후손만 남아서 지금까지 대를 잇고 있다. 백팽년의 후손이
터를 잡고 사는 마을을 '묘골 마을'이라고 부르며 박팽년의 박씨 가문의 박씨는 '묘골 박씨'라 현재 칭한다.
숙종 때에 이르러 여섯 역적은 충신으로 완벽하게 복권된다. 백팽년만 빼고 다섯 육신은 자손이 없다. 백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어느날 제사를 마치고 꿈을 꾼다. 꿈속에서 서원 밖에서 다섯명의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할어버지와 같이
돌아가신 사육신 분들이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 함께 제사를 지냈고 서원에 함께 배향된다. 박계창은 음식을 더 차려 부랴부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꿈을 꾼 후, 하빈사(河濱祠)를 세운 뒤사육신을 함께 모셨다 한다. 숙종 20년에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하셨다고 한다. 1869년 흥선 이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는 정책을 썼고 1874년 4월 초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운,
유응부를 죽음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킨 여섯 사내라고 명한다.
김시습 : 1435(세종 17)∼1493(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인 그는 계유정난 이후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에 포함하고 있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숙종 때 노량진의 백사장에 군사훈련을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봉분을 만들라고 했다. 바로 노량진의 사육신 공원에 모셔졌다. 거기엔 유성원과 하위지의 허묘를 만든다.
입석마을의 장준석씨 : 충주시 기금면 용정리 입석마을엔 또 한 명의 고집스런 사람이 산다. 1979년 2월 24일 150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비석이 하나 있다. 그 비석의 이름이 충주 고려비(국보 205호)이다. 고구려 석비로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비석 하나로 유명하게 된 입석마을이다. 고구려 관리가 신라 주민들을 소집했다는 내용이
담겨져있다. 고구려가 중원 땅을 차지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 비석을 발견하기까지 고집스런 사람이 바로 충주 문화재
애호가 모임인 예성 동호회 모임인데 바로 장준석씨인 것이다. 이 비석 이후 공부를 더 해서 충북대 사학과 교수로 재임하였고,
지금은 충북 문화재 원장이다. 양희은의 「상록수」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