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 영웅 찰스 린드버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인전에도 나올 법한 이 인물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탄치 않고 범상치 않은 관계와 사건들로 얼룩져 있다.
'화폐전쟁'을 읽다가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 미국의 금융정책을 비판하는 인용문에 그의 이름이 등장해 궁금증이 생겨 그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보니 인용된 글은 린드버그의 아버지인 하원의원 '찰스 린드버그 1세'의 말이었고, 그는 의원시절 내내 국제금융에 적대적인 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August_Lindbergh
찰스 린드버그의 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특히 그는 은행과 통화정책, 금융세력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다. 아들 린드버그가 어렸을 때 이혼해서 이후 아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의 정보는 별로 없지만 우드로 윌슨의 금융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은 '화폐전쟁'에도 인용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월스트리트 조사위원회를 발족하는데 앞장섰으며 모건과 같은 은행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한다는 발언까지 서슴치 않았다.
연방준비은행과 이를 소유한 은행가들은 가벼운 금리조작을 통해 왔다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시장가격이 조금씩 기복을 보이게 할 수 있으며, 금리 변동을 크게 함으로써 시장 가격 파동을 가져올 수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금융 상황의 내부 정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장차 일어날 변화를 사전에 다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정부도 이런 특권을 준 적이 없었다. 소수 특권계층만 갖는 가장 기이하고도 위험한 시장 정보의 선점이었다.
이 시스템은 민간 소유이며, 출범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돈을 이용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데 있다.
그들은 언제 경제공황을 촉발해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언제 경제위기를 끝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찰스 린드버그. 하원의원
he wrote Banking, Currency, and the Money Trust, and in 1917 he wrote "Why is Your Country at War?"
이런 글을 발표한걸로 보아 당대 이미 국제유태자본의 실태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 같이 아들 린드버그와의 연관성은 부자관계 외에는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단서를 찾은 것은 찰스 린드버그의 '단독 비행'이 J.P 모건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뜻밖의 사실이다.
이 내용은 '금융제국 J.P 모건'이라는 책에 언급되었다.
http://en.wikipedia.org/wiki/Dwight_Morrow
모건 은행의 주요 멤버인 드와이트 모로가 친구 사이였던 당시 대통령 쿨리지 정부로부터 항공기 전투에 관한 개발연구 임무를 부여받고 일하던 중 찰스 린드버그의 소문을 듣고,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이 모금한 후원금을 모두 갚아주었을 뿐아니라 그보다 많은 후원금을 제공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결과적으로 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는 미국의 영웅이자 미국 항공시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드와이트 모로의 사업에 더없는 동반자가 되었고, 그의 사위까지 되었다. 모로가 멕시코 대사에 부임했을 때는 모건가의 충신이라는 점 때문에 멕시코인들의 반감이 거세었을 때, 린드버그가 동행함으로써 완전히 환영일색으로 전환하는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가족인 모건 가의 입장과 다르게 반전주의의 입장을 고수했다. 오히려 린드버그는 2차대전 중 헤르만 괴링의 초청으로 독일 공군 '루프트 바페'를 시찰하고 그들의 기술력을 찬양했으며, 심지어 사후에 독일에서 사생아를 3명이나 두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1939년 유럽에 전쟁이 시작됐으나 미국인들은 참전의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동에 넘어가 전쟁에 뛰어들었던이전 경우처럼 이번에도 전쟁에 연루될 수 있다고 미국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첫째 '국토방위'를 핑계로 미국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둘째, 차근차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전쟁에 연루를,
셋째, 우리가 실제로 충돌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계획 했습니다.
물론 이 계획은 그들의 강력한 'Propaganda(선전)'의 힘으로 위장되고 지원되었습니다.
극장들은 곧바로 전쟁의 영광을 묘사하는 영화로 가득 채워지고,
뉴스 기사는 타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이용하여 연방의회의 권한 제한과 대통령과 그 임명자들의 '독재적 절차 선점'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공포 작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과 편견이 조국을 파괴로 이끄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 찰스 린드버그 2세
일설에 의하면 전쟁 전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린드버그가(그는 게르만 계통이다.) 괴링의 음모에 유인되어 독일에서 자녀를 갖게 된 일로인해 독일과의 전쟁을 반대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드와이트 모로가 사망하고 6개월 뒤 시골에서 은둔하던 린드버그의 아들이 유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브루노 하우프트만이라는 목수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사형 직전까지 혐의를 부인했으며 단지 공범을 도왔을 뿐이라고 증언했지만 공범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사형된다. 이 사건으로 하우프트만이 독일인이었던 관계로 독일인들에 대한 미국내 반감이 확산되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amiselin?Redirect=Log&logNo=150002426149
이후 유럽으로 떠난 린드버그의 행적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록펠러 재단 출신의 프랑스인 생리학자와 함께 장기를 몸 밖에서 살아있게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만큼이나 특이한 이력이 많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49939
화폐전쟁의 한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겨 이것저것 조사하다보니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나열한 근거들로부터 린드버그가 과연 누구였는지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의외로 수수께끼가 많은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는 모순되고 베일에 가린 삶을 살았으면서도 20세기 역사의 중심에 근접해 있던 자임에 분명하다.
첫댓글 예전에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 그런데... 비행사가 의료기술 개발과 의학 논문 발표를?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ㅋㅋㅋ 정말 수수께끼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