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90리, 서남쪽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 서울과는 6백리다.
건치연혁 본디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한무제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이름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뒤에 또 방어사防禦使로 바꿨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올렸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우리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다.
속현 연곡현 連谷縣 : 부 북쪽 30. 본디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예속시켰다. 우계현 羽溪縣 : 부 남쪽 60리. 본디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이며 옥당玉堂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 9년에 우리 부로 옮겨 붙였다.
진관 도호부 둘 : 삼척ㆍ양양. 군 넷 : 평해平海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현 둘 : 울진蔚珍ㆍ흡곡歙谷.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한 사람씩이다.
군명 예국ㆍ임둔ㆍ하슬라ㆍ하서량ㆍ명주ㆍ동원ㆍ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경흥ㆍ명원溟源ㆍ예국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사 기문에 있다. 철국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
성씨 본부 김ㆍ최ㆍ함咸ㆍ박ㆍ곽ㆍ왕 -임금이 내린 성인데, 그 뒤에 옥玉으로 고쳤다. 이 : 평창平昌. 원元 : 원주原州. 연곡連谷ㆍ명明ㆍ이ㆍ진陳ㆍ신申ㆍ장蔣. 우계 이ㆍ변邊ㆍ노盧ㆍ심沈ㆍ유劉 : 속續.
풍속 욕심이 적다. : 후한서後漢書에, " 그 지역 사람은 성품이 어리석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어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 후한서에 있다. 질병을 싫어한다 : 후한서에, "질병을 아주 싫어하여 사람이 죽으면 살던 집을 홀연히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하였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치며 면포를 만든다 :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핀다 :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펴 그 해의 풍ㆍ흉을 미리 안다." 하였다. 벌할 때는 우마를 받는다. : 후한서에, "촌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서로 벌하며 우마牛馬를 받는데 책화責禍라 부르며, 살인한 자는 죽음으로써 보상하게 한다.
도둑이 적고 보병으로 하는 싸움을 잘한다." 하였다.
학문을 숭상한다. : 다박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 놀이를 좋아한다. : 그 지역 풍속에 명철을 만나면 서로 맞이하여 함께 마시며,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끊임없다. 그러나 농사에 힘쓰지 않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다.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 구름 속에 개간한다. :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예의를 서로 먼저 한다. : 황희黃喜의 시에, "예의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을 말하리." 하였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이른 넘은 사람을 불러 경치 좋은 곳에서 위로한다. 판부사 조치趙菑가 의롭게 여겨 관가 돈으로 남은 쌀과 포목을 내 밑천을 만들고, 자제들 가운데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자를 가려 그 재물의 출납을 맡아 회비로 하도록 하고, '경춘경로회'라 이름하였다.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이른이면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한다.
형승 산줄기는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 이곡의 시에, "산줄기는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라 아득하게 가없어라." 하였다. 산수가 천하에 첫째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다." 하였다. 창해가 넓고 크며, 골짝이 천 겹이다. : 안축安軸의 기문에, "먼 데 있는 물은 창해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 겹이다." 하였다. 한 도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에 있다.
산천
오대산 五臺山 : 부 서쪽 1백40리에 있다.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 우리 세조대왕께서 12년에 관동에 행차하다가 이 동구에 보연寶輦을 머물고, 과거를 베풀어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 진화陳澕의 시에, "그해에는 그림 속 오대산을 보았는데,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만 골짝 물이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하였다.
대관령大關嶺 : 부 서쪽 45리에 있는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줄기가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 가를 차지한 게 몇 곳인지 모르나, 이 고개가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아흔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가 권적權迪의 시를 차운한 시에, "대관산大關山이 푸른 바다 동쪽에 높은데, 만 골짜기 물이 흘러나와 물이 천 봉우리를 둘렀네. 험한 길 한 가닥이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모두 몇 겹인지.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닭이 처음 우는 곳에 돋도다. 높은 낭떠러지에 붉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수에 씻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촉도난蜀道難을 지을 줄 아는고, 이태백이 죽은 뒤에는 권부자權夫子로세." 하였다.
보현산普賢山 : 부 서쪽 35리에 있다.
원읍현員泣峴 : 부 서쪽 41리에 있으며 대관령 산허리다. 세간에 전하기로, "어떤 원이 강릉 부사로 있다가 갈려 돌아가는데, 여기서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말미암아 원읍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길이 구산역으로 접어들자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하여 말이 가지 않는다. 앞 선 말 몰이꾼은 나무 끝으로 가고, 잔도棧道는 구름 끝에 걸리었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부여잡고 가는 길 다한 곳에 우주가 다시금 아득하여라." 하였다.
모로현毛老峴 : 부 서쪽 1백 25리.
독현禿峴 : 부 서쪽 1백 89리.
화비현火飛峴 : 부 남쪽 35리. 고개 흙이 검게 불 탄 듯하여 '화비'라 이름했다.
삽현 鈒峴 : 부 서남쪽 60리, 정선으로 가는 길이다.
월정산月正山 : 부 동쪽 6리.
화부산花浮山 : 부 북쪽 3리.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 : 부 서쪽 65리. 전하는 얘기에,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띳집과 길들이 죽 늘어섰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사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몰랐다." 한다.
소우음산所亏音山 : 부 서쪽 80리. 산속에 샘이 있고 가물어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해령산海靈山 : 부 동쪽 27리.
담정산淡定山 : 부 남쪽 32리.
사화산沙火山 : 부 북쪽 30리.
주문산注文山 : 연곡현連谷縣 북쪽 12리, 부와 42리 거리다.
바다 : 부 동쪽 10리.
견조도堅造島 : 부 동쪽 10리, 남천南川 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어구이다.
성남천城南川 : 부성 남쪽 1백 보에 있으며 물이 대관령에서 나온다. 여러 골짜기 물과 섞여 송악연松嶽淵ㆍ광제연廣濟淵이 되고,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금강연金剛淵 : 오대산 월정사 곁에 있으며, 부에서 서쪽으로 1백10리다. 네 면이 모두 반석이고 폭포는 높이가 열 자다. 물이 휘돌아 모여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를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건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를 씻어낸다. 월정사에 가서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나무가 사람을 매우 근심스럽게 한다." 하였다.
우통수于筒水 : 부 서쪽 1백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 한강의 근원이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강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바뀌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이 있는 것과 같으니 한강이라는 이름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방림천芳林川 : 부 서쪽 1백58리에 있다.
연곡포連谷浦 : 연곡현 동쪽 5리에 있으며, 부에서는 35리다.
오진梧津 :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주문진注文津 : 연곡현 북쪽 10리에 있으며 부에서 40리다.○ 이상 세 곳 포구는 모두 척후가 있다.
안인포安仁浦 : 부 동남쪽 25리에 있다. 예전에는 만호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 모시ㆍ활 만드는 뽕나무 -우계현에서 난다. 댓살[竹箭] -부 북쪽 증산甑山 및, 부 동북쪽 강문도江門島에서 나온다. 잣ㆍ오미자ㆍ자단향紫檀香ㆍ황양黃楊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ㆍ인삼ㆍ지황ㆍ복령茯苓ㆍ벌꿀ㆍ백화사白花蛇ㆍ물개[海獺]ㆍ소금ㆍ미역ㆍ참가사리ㆍ김ㆍ해삼ㆍ전복ㆍ홍합ㆍ문어ㆍ삼치ㆍ방어ㆍ광어ㆍ적어赤魚ㆍ고등어ㆍ대구어ㆍ황어ㆍ연어ㆍ송어ㆍ도루묵ㆍ누치ㆍ여항어餘項魚ㆍ순채ㆍ세조개.
성곽 읍성 :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1백8자이고, 높이는 40자다. 돌로 쌓은 곳은 둘레가 1백39자이고, 높이는 두 자다. 안에 우물 14곳, 못 둘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에 돌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1천7백82자고 높이는 9자다.
봉수 주문산봉수 : 북으로 양양부 양야산陽野山에 응하고 남으로 사화산에 응한다. 사화산봉수 : 남으로 소동산에 응하고 북으로 주문산에 응한다. 소동산所同山봉수 : 부 동쪽 7리. 남으로 해령산에 응하고 북으로 사화산에 응한다. 해령산봉수 : 남으로 오근산에 응하고 북으로 소동산에 응한다. 오근산吾斤山봉수 : 우계현 북쪽 20리. 남으로 어달산에 응하고, 북으로 해령산에 응한다. 어달산於達山봉수 : 우계현 남쪽 30리. 남으로 삼척부 광진산廣津山에 응하고 북으로 오근산에 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 : 성현成俔의 시에, "바다와 산 아름다운 경치 새해가 되어서, 봄빛이 봉호蓬壺 동리洞裏의 하늘에 가득하네. 오도鰲島에는 나는 새 위에 아지랑이 날고, 주루珠樓에는 저녁 볕 가에 노래와 피리로다. 한 줄기 시냇물은 천 집을 감싸 담을 이루고, 나무에 가득한 꽃은 십리 연기를 머금었네. 경포鏡浦에 개인 물결이 파랗게 일렁이는데, 목란木蘭배에 술 실어 신선을 끼고 노네"
○ "홍진紅塵에 분주하기 몇 해던가, 부절을 잡고 와 속세 밖에 노니노라. 흰 고갯마루는 우뚝하게 북극과 잇닿았고, 은빛 물결은 넓고 넓어 동쪽 끝이 아득하네. 푸른 소나무는 눈을 머금고 햇볕에 빛나고, 푸른 대숲에 바람이 잔잔한데 저물녘 연기가 감돈다. 추위가 두려워 술 한잔 기울이니, 이 몸이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나."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대관령 밖에 봄이 돌아와 또 한 해가 오니. 화창한 햇볕이 하늘에 걸렸네. 성에 가득한 복숭아ㆍ오얏은 봄바람에 피고, 들에 가득한 뽕나무와 삼은 곡우穀雨 무렵에 자란다. 푸른 풀 못에는 오리가 처음 놀고, 채색구름 누각에는 다시 연기가 섞였네. 성남城南에는 놀이꾼이 나날이 많아지는데, 검은 머리 불그레한 낯이 낱낱이 신선인 듯하여라."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동쪽으로 와서 나이 더했음을 탄식하지 마라. 아름다운 절후는 한식날이 가까웠네. 일천 집 누각 위는 노래와 피리 소리요. 꾀꼬리와 꽃은 10리까지 취하고 깨는 동안이라. 황정黃精 이삭이 새로 비에 젖었는데, 벽해에 곡괭이 가지고 연기를 파헤침 직하다. 일찍이 신선의 약방문을 공부 못해 후회로워라, 반생 동안 연화煙火 속에 신선 되기를 바랐노라." 하였다.
○ 정수강丁壽崗의 시에, "임영臨瀛 옛 마을이 몇 천 년이던가, 지역이 동남으로 열려 바다를 당기었네. 산천은 예전대로 눈앞에 들고, 누각은 중수되어 구름 곁에 솟았네. 집집이 선비는 삼동三冬에 공부를 하고, 곳곳마다 풍년 드니 만 집에 연기로세. 이것은 임금의 교화를 펴는 사또의 힘이라, 나는 이제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노라." 하였다.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기쁜 일 많은 임영에는 세월이 절로 가니, 화려한 경치는 봄철에 가장 좋다네. 향긋한 묵은 술맛은 금 항아리 안에 있고, 채색 오리 봄 소리는 옥경玉鏡 가에 있노라. 한길의 꽃은 붉기가 비단보다 더하고, 천 집 버들은 푸르러 연기와 같구나. 도원桃源은 다만 진나라를 피한 무리일 뿐이요, 동쪽 바람에 경포대의 신선놀이보다 못하다." 하였다.
누정 운금루雲錦樓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강릉부는 본디 예국의 터다. 한나라에서 4군을 설치하면서 임둔이라 하였고, 고구려는 하서량이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명주라 일컬었다. 고려 초기에는 동경을 설치하였다가 그 뒤에는 하서 또는 경흥이라 불렀고, 충렬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던 바, 강원 한 도에서 큰 부다. 지역이 바닷가라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으며, 가끔 신선이 남긴 자취가 있다. 임영이라 부르는 건 대개 봉영蓬瀛과 겨누는 것이리라. 습속이 맑고 간이簡易하며, 인심이 순박하여 예스러운 기풍이 있다. 성화成化 정유년에 부사 이공李公이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두어 달도 못 되어 정사가 크게 다스려졌다. 예전에 객관 남쪽에 운금루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수리하지 않은 지가 십 오륙 년이나 되었다. 공이 개연히 중건할 뜻이 있어서 조금 동북쪽으로 옮겨 고쳐 지었는데, 여러 집 위에 우뚝하게 솟아났다. 누 남쪽에는 못이 있어 연을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이 있고 섬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그 훌륭한 경개는 기이하고 특별하다고 할 만하였다. 하루는 후의 아들 부정副正 덕숭德崇을 보내 내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 그런데 일찍이 가정稼亭 이 선생의 동유기東遊記와 근재謹齋 안상국安相國의 관동와주關東瓦注를 읽어보니, 강릉에서 가장 좋은 명승지는 경포대ㆍ한송정寒松亭ㆍ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문수대文殊臺라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선배의 풍류 또한 돌이킬 수 있었다. 한송정 거문고 곡조는 중국까지 전해졌고, 박혜숙朴惠肅ㆍ조석간趙石磵의 경포대 놀이는 지금까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호종단胡宗旦이 물에 비석碑石을 빠뜨린 것도 또한 기이하다. 나는 일에 얽매여 한 차례 돌아볼 짬을 얻지 못하고서, 동쪽으로 임영을 멀리 바라보고 와유강산臥遊江山하는 흥취만 허비한 지가 오래였다. 이번에 기문 지으라는 명을 받고 기꺼이 말한다.
내 들으니, 누의 높이가 공중에 높게 솟아 비바람도 아랑곳없고, 누의 크기는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다 한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부상扶桑을 휘어잡고, 양곡暘谷을 당길 듯하다. 풍악楓岳이 등에 있고, 오대산이 겨드랑에 있다. 바다 위 여러 봉우리는 푸르게 뾰족뾰족 옹기종기 노을 아득한 사이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털이나 실같이 보인다. 아침 볕과 저녁노을이 사시로 바뀌는 것과, 온갖 경물이 변하는 천 가지, 만 가지 형상은 한두 가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오직 운금雲錦이란 이름으로 현판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찍이 소자첨蘇子瞻의 하화시荷花詩 연꽃을 보니, 하늘 베틀에 구름 같은 비단이라는 말이 있으니, 내 어림하건대 아마 여기에서 따온 것이리라. 그 못에 파란 물이 넘실거리고 연꽃이 한창 피어서, 붉은 향기와 푸른 그림자가 서로 비치고 둘리어, 바람ㆍ비ㆍ달ㆍ이슬에 깨끗하게 서 있는 것과, 맑아서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는 기이한 모습과 특이한 태도가 기상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그 덕을 논한다면 줄기 속은 통하고 밖은 곧아서, 군자의 기상인데 주자의 <애련설愛蓮說>에다 설파하였다. 그러하니 이 누에 놀고 쉬며 오르내리는 사람은 특히 술잔으로 이렁저렁 세월을 허비하는 것만은 아닐 테다.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벗이어서 또한 물物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게 할 만한 것이라. 이미 물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면, 어찌 깨끗한 벗으로만 그칠 뿐이겠는가.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그러하니 위에 말한, 경포대ㆍ한송정ㆍ사선정四仙定ㆍ풍악산ㆍ오대산 등 모든 눈에 와 닿고 마음에 느껴지는 어느 것이 인자ㆍ지자의 쓰는 바이며, 나의 심성을 닦는 데 모두 도움이 된다. 후가 이 누를 중건하는 게 어찌 뜻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내가 보지도 않고 억지로 말하면 거짓에 가깝지 않을까. 뒷날에 만약 몸이 한가하여 관동지방에 유람하고 싶은 나의 소원을 이루게 된다면, 마땅히 황학黃鶴을 부르고 백운白雲을 부여잡고 이 누에 올라 글을 읊어 나의 할 말을 마치리라. 이후의 이름은 신효愼孝이고 자는 자경自敬이며, 전성全城에 이름 있는 씨족이다. 여러 번 주와 군을 맡아 명관으로 이름이 났다." 하였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운금루 앞 운금대에서 취해서 보니, 구름 같은 비단이 못에 가득 피었네. 세상에 어찌 천 년토록 사는 방법이 있으랴, 날마다 피리와 노래에 휩싸여 술잔을 기울이게나." 하였다.
○ 성석인成石因의 시에, "붉은 다락이 높게 솟아 지대池臺를 눌렀는데, 만 송이 연꽃이 차례로 피네. 날 저물녘에 솔솔 바람이 한번 스치니, 맑은 향기가 은은하게 금잔에 든다." 하였다.
신증) 박시형朴始亨의 기문에, "임영은 예국 터다. 예전 명도溟都며, 삼한 때는 북빈경이었다. 고려 동원경이라 불렀는데, 이는 신라 태종太宗 5대손 주원공周元公이 도읍하여 여러 대로 살았던 까닭이다. 그 뒤에는 명주목, 또는 도독부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호都護에다 대大자를 붙여 구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 고관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사대부 누구나 그곳에 한번 가서 평소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인걸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 집대성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구경하기에 좋기는 이곳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 가운데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이라 현판 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이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는 한송寒松이며, 북쪽으로 호수 가까운 누대는 경포다. 이것이 모두 명승의 으뜸이다. 손님을 시중드는 자리에서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강산에 취미를 붙이고 우주에 눈을 들어 회포를 헤치고 기상을 펴는 곳이다. 운금의 높은 누는 예전에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계미년에 관사를 고쳐 지으면서 좁고 작다 하여 동쪽으로 터를 넓혀, 추녀를 크게 하므로써 누는 드디어 없어졌다. 그 뒤로 중건하지 않은 지가 15년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운금이라는 이름만은 있고 누는 없어졌다. 매양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의 무더위나, 연꽃이 향기로울 때나, 봄바람 가을 달에 대숲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때에 누대와 정자에 유람하여 회포를 펼 만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배의 제영題詠조차 높은 다락에 묶어 두어 부르고 화답하는 자가 없으니, 시인 재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성화成化 을미년 겨울에 전성全城 이신효李愼孝가 이 고을 원으로 왔고, 통판 월성月城 최연崔演이 보좌하게 되었다. 일으킬 것과 없앨 것이 있으면 모두 시행하니, 다스림의 덕화가 흡족하여 뭇사람이 칭송하였다. 부임한 지 한 해가 되자 온갖 퇴폐하였던 것이 아울러 일어났다. 시들고 병들었던 민생이 모두 밭 갈고 우물 파서 마을이 편안하니, 관리는 할 일이 없었다. 후가 드디어 옛 누를 중건할 뜻이 있어 방백邦伯 감사 김양경金良敬에게 사유를 갖추어 말하여 허가를 맡았고, 안상 관후安相寬厚가 김상金相의 후임으로 와 비용을 도와주었다. 이에 객관 북쪽에 터를 잡아 가시덤불을 불태우고, 높낮이를 재며 물러서서 보니, 기이한 형상이 완연히 하늘이 낸 듯하였다. 이에 노는 사람을 모으고 구실아치를 부리며 관에서 공급하였다. 이해 7월에 일을 시작하였는데, 겨우 일곱 달이 되자 아로새긴 기와와 채색한 서까래가 갑자기 우뚝 솟았다. 깊이는 여섯 발쯤이고 옆은 네 발이 조금 넘는데, 아마 하늘이 그곳을 숨겨 두었다가 그 사람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 물物의 흥함과 폐함은 때가 있는 것이니, 이 누가 헐리고 객관이 되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관사의 화려함이 예전 규모보다 훨씬 나음을 알았을 뿐이요, 풍류의 아름다운 흥과 운치는 이 누가 없어짐으로써 좌절된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그 뒤 15년이라는 오랜 시일을 지나, 이후가 옴으로써 비로소 복구되었는데 지세의 웅장함과 규모의 거룩함이 전날의 누각보다 몇 배가 되니, 이야말로 어찌 흥하고 폐함이 때가 있으며, 또 그 사람을 기다려서 흥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는 대대로 벼슬한 집 자손으로 일찍부터 시와 예로 가르침을 받았고, 맑은 덕과 행정 솜씨로 장한 명망이 있음이 오래였다. 그리고 본디부터 기이한 경치를 좋아하여 마음은 속세 밖에 놀아 시원하게 공중의 바람을 타고 노니는 신선의 기상을 숨길 수 없었으니, 바로 옛사람의 이른바 좋아하는 것이, 산수 사이에 있어서 마음속에 스스로 얻은 것이니, 그의 풍류와 고상한 뜻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니, 즐거운 마음을 뽐내 송사를 꾸며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원한다. 송頌에 이르기를, '악양岳陽에 누 있으니 동정호洞庭湖가 눈앞에 있고, 등왕滕王이 각閣을 지으니 형려荊廬가 안개처럼 벌여 섰다. 높은 데서 낮은 곳에 임하였고 공중에 솟아 바람을 탄 듯한데, 누각이 아니면, 이런 경치 있을 것인가. 대관령 밖 형승은 임영부臨瀛府가 독차지하였다. 운금雲錦의 높은 누각이 뛰어나게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는데, 그것을 없애고 객관을 지으면서 터마저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호수와 산이 조롱하고 꽃과 대도 부끄러워하였다. 우리 이후는 하늘이 낳은 영재였다. 깨끗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조를 지닌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었다. 그의 풍류와 문장은 옛사람과 겨루어도 양보할 데가 없다. 금당琴堂에 일이 한가하니, 호기로운 마음이 났다. 이에 기이한 터를 잡으니, 없어졌던 누각이 다시 통창하였다. 웅장하고 아름다움이 예전 규모보다 곱절이었다. 귀신이 가만히 와서 도와주는 듯하다. 구실아치들은 자식이 아비 일 돕듯 몰려왔고 한 푼 돈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일곱 달이 지나자 벌써 일손을 떼었다. 좌우로 보니 산천의 기상이 천 가지, 만 가지였다.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숨겨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공사를 마치니 절후는 중양重陽(9월 9일)이었다. 이에 고을 늙은이를 불러 술잔을 권했다. 이어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활과 살이 베풀어졌다. 술잔과 상이 낭자하고, 퉁소와 북소리가 뚱땅거렸다. 이에 낙성하니 즐거움이 다함 없다. 빈객이 취하고 배부른 것은 오직 덕으로써 함이었다. 모두 말하되 우리 후를 생각하여 잊지 못하겠다. 우리 후가 정사하여 우리를 구휼하고 우리를 애무하였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가 오직 이후를 믿고 산다. 누가 소신신召信臣 한 나라 공경公卿으로 선정을 베풀어 소부召父의 칭을 받음 아비라 하던가, 우리 후가 아비이고, 누가 두시杜詩를 어미라 하던가, 우리 후가 어미이다. 우리 후가 지은 누는 감당 나무 짝하리.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리기를 바라노니, 수하시어 우리 향토를 보호하소서. 우리의 말은 아첨이 아니라, 오고(五袴, 선정을 베풀어 살기 좋다는 뜻)인 노래로다.' 하였다." 하였다.
○ 성현의 시에, "능파선자凌波仙子가 요대瑤臺에 기댔는데, 취한 듯 붉그레한 얼굴에 보조개 방싯, 비록 이것이 정이 없고 말도 못하나, 경성傾城할 풍골風骨이 술잔을 권하네." ○ 우거진 나무들이 양대涼臺를 감쌌는데, 땅에 가득한 짙은 그늘 빽빽하여라. 관청의 문서가 나날이 적어지고 동헌 뜰이 고요한데, 때때로 상비象鼻를 당겨 경배瓊杯를 만든다." 하였다.
의운루倚雲樓 : 객관 남쪽에 있다. 여절당勵節堂 : 객관 서북쪽에 있다. 고을 사람이 여기에서 조운흘趙云仡을 위해 제사하니 이른바 생사당生祠堂이라 한다. 한송정 寒松亭 : 부 동쪽 15리.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ㆍ돌 아궁이[石竈]ㆍ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 악부樂府에 한송정곡寒松亭曲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이 곡조를 비파琵琶 바닥에 써 둔 것이 물결을 타고 강남지방으로 떠밀려 갔으나, 강남 사람은 그 글 뜻을 몰랐다. 고려 광종光宗 때 우리나라 사람 장진산張晉山이 강남에 사신으로 갔더니 강남 사람이 그 글 뜻을 물었다. 진산은 시를 지어 풀이하기를, "달 밝은 한송정 밤이요, 물결 고요한 경포의 가을이라, 슬피 울며 오가니, 모래 위에 갈매기는 신의가 있도다." 하였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네 선인이 일찍이 여기 모였을 때, 객은 맹상군孟嘗君의 문전 같았더니라. 구슬 신발은 지금엔 구름처럼 자취도 없고, 푸른 소나무는 불타고 남지 않았네. 신선을 찾아 빽빽하던 푸른 숲 생각하고 옛일을 추억하며 황혼에 섰노라. 오직 차 다리던 샘물만이 남아, 예전 그대로 돌 밑에 있다." 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먼 옛날 신선놀이 까마득한데, 푸르디푸른 소나무 홀로 서 있다. 다만, 샘 밑에 달이 남아 비슷하게 형용을 상상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외로운 정자가 바다를 임해 봉래산 같으니, 지경이 깨끗하여 먼지 하나 용납않네. 길에 가득한 흰 모래는 자욱마다 눈[雪]인데, 솔바람 소리는 구슬 패물을 흔드는 듯하다. 여기가 네 신선이 노닐던 곳, 지금에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여라. 주대酒臺는 기울어 풀 속에 잠겼고, 다조茶竈는 내 딩굴어 이끼 끼었다. 양쪽 언덕 해당화는 헛되이 누굴 위해 지며 누굴 위해 피는가. 내가 지금 경치를 찾아 그윽한 흥취대로 종일토록 술잔을 기울이네, 앉아서 심기가 고요하여 물物을 모두 잊었으니, 갈매기들이 사람 곁에 날아내리네." 하였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옛 땅에 인가는 멀고, 차가운 조수만이 해문海門을 두드린다. 천 그루 소나무는 이미 넘어졌어도, 눈망울 같은 두 우물이 아직도 남았다. 새 날아가니 모래톱 고요하고, 갈까마귀 빙빙 도는데 산에 해가 저문다. 돌아가려다가 다시 머물러, 잠깐 흰 구름 밑에 섰노라."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오로지 좋은 경치만을 찾을 양으로, 옛 성문을 일찍 나섰다. 선인은 가도 송정松亭은 있고, 산에는 석조石竈가 묻혀 남아 있네. 인정은 예와 지금이 달라도, 경치는 아침이요 저녁이로다.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말만 듣고 근거 없다 했을 것이다." 하였다.
○ 고려 이무방李茂芳의 시에, "정자가 소나무 산기슭에 의지했는데, 동쪽으로 바라보니 바다는 끝없다. 지경이 고요하니 신선 자취 있고, 모래 밝은데 새 발자국 남았네. 빗돌에는 이끼 무늬 푸르고, 돌에는 비 맞은 자국이 어둡네. 한 움큼 되는 샘이 마르지 않으니, 천지의 뿌리에서 솟아나오네." 하였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옛 선인이 거닐던 곳에, 다투어 사모하여 객이 문간을 메우네. 약을 만들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차 다리던 아궁이만 홀로 남았네. 항아리 속에 해와 달이 한가한데, 세상일은 아침저녁 동안이어라. 머리를 돌려 유적을 찾으니, 오직 소나무만이 절로 뿌리 박았네." 하였다.
경포대 鏡浦臺 : 부 동북쪽 15리에 있다. 물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 같다.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똑 같다. 서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가에 선약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포 동쪽 어귀에 판교板橋가 있는데 강문교 江門橋라 한다.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며, 섬 북쪽에는 5리나 되는 모래밭이 있다. 모래밭 밖은 창해 만 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다. 또한 경호鏡湖라 하기도 하며, 정자가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와 세조께서 순행하다가 여기에 어가를 멈추었다.
○ 안축의 기문에, "천하의 형체가 있는 물건은 모두 이치가 있으니, 크게는 산과 물, 작게는 주먹만 한 돌, 한 치만 한 나무라도 그렇지 않은 게 없다. 그러므로 유람하는 사람은 이런 물건을 보고 흥을 느끼므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로써 누대와 정자를 짓게 되는 까닭이다. 형체가 기이한 것은 겉으로 나타나므로 눈으로 구경하게 되는 바이며, 이치를 찾자면 미묘한데 숨겨 있어 마음으로 얻는 바이다. 눈으로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는 데는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가 모두 같이 그 한쪽만을 보게 되며, 마음으로 미묘한 이치를 깨치는 것은 군자만이 그러하여 그 모두를 즐거워한다. 공자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 이것은 그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면서 한쪽만 보는 걸 말한 게 아니고, 대개 미묘한 이치를 깨쳐 그 모두를 즐김을 말한 것이다.
내가 관동지방을 유람하기 전에 관동의 형승을 평론하는 자는, 모두 국도國島와 총석叢石을 말하고 경포대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다. 다음 태정泰定 병인년에 지금 지추부학사 박공 숙朴公淑이 관동에서 절월節鉞을 잡았다가 돌아와 내게 말하기를, '임영 경포대는 신라 시대에 영랑 선인들이 놀던 곳이다. 내가 이 대에 올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에 참으로 즐거워하였고, 지금도 생각에 남아 잊을 수 없다. 누대에 정자가 없어 비바람을 만나면 유람하는 자가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고을 사람에게 일러 대 위에다 작은 정자를 지으니, 그대는 나를 보아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박공의 본 바가 여러 사람의 말하는 바와 같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감히 망령되게 평론하지 못하고, 한번 유람하고 나서 기문 짓기로 하였다. 이번에 내가 다행히 왕명을 받들고 이 지방을 진수하게 되어,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를 두루 보았다. 저 국도와 총석의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진실로 사람 눈을 놀라게 하나, 이는 기이한 형상의 물체일 뿐이었다. 그 뒤에 이 대에 오르니, 담담하게 한가롭고 넓게 트이어 기괴한 형상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 없고, 다만 멀고 가까운 산과 물뿐이었다. 앉아 사방을 돌아보니, 먼 데의 물은 푸른 바다가 넓고 질펀한데 아득한 물결이 출렁거리고, 가까운 데의 물은 경포가 깨끗하고 맑아 바람 따라 넘실거린다. 먼 데 산은 골짝이 천 겹인데 구름과 노을이 아련하며, 가까운 데 산은 봉우리가 십리인데 초목이 무성하다. 늘 물새와 갈매기가 떴다 잠겼다 하며, 대 앞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다. 그 봄가을 연기와 달이며, 아침저녁으로 그늘졌다 갰다 하여 때에 따라 바뀌는 기상이 일정하지 않은바, 이것이 이 경포대 경치의 대략이다.
내 오랫동안 앉아 가만히 보다가 막연히 정신이 집중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지극한 멋은 한가하고 담담한 가운데 있고, 속세를 떠난 생각이 기이한 형상 밖에 뛰어나서, 마음에 홀로 알면서 입으로는 형용할 수 없음이 있었다. 그러한 뒤에 박공朴公의 좋아한 바가 기괴한 물체에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말하는 이치의 미묘한 것임을 깨달았다. 옛적에 영랑永郞이 이 대에 놀았으니, 반드시 좋아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박공이 좋아한 것도 영랑의 마음과 같은가. 박공이 고을 사람에게 이 정자를 짓도록 하니, 고을 사람이 다, '영랑이 이 대에 놀았으니 정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 년이나 지난 뒤에 정자는 지어 무슨 소용이랴.' 하고, 마침내 풍수가의 꺼리는 말로써 고하였다. 그러나 공은 듣지 아니하고 역군을 독촉하여 흙을 깎다가 정자 옛터를 발견하였다. 주추와 섬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고을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감히 딴 말이 없었다. 정자 터가 이미 오래되어 까마득하고 묻히기까지 하여 고을 사람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니, 이 일을 보면 영랑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전날에 내가 박공의 말을 듣고 그 단서를 알았으나 이번에 이 대에 올라서 그 자세한 것을 되새기고, 그로써 정자 위에 쓰노라." 하였다.
○ 앞사람 안축의 시에, "비 개니 가을 기운 강성江城에 가득하여 조각배 띄워 흥취를 푸노라. 지역은 항아리 속에 들어오는데 티끌은 못 오고, 사람이 거울 속에 노는데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워라. 연파煙波에 백조가 때때로 지나가고, 모랫길엔 나귀가 천천히 간다. 뱃사공아 노를 빠르게 젓지 마라. 깊은 밤에 외로운 달 밝은 것 보기를 기다려라."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대를 쌓아 벽포碧浦에 임했으니, 유람하는데 시간 오래됨을 어찌 사양하리. 부서지는 물결은 노래하는 부채를 움직이고, 상서로운 바람은 춤추는 소매에 불어오네. 옥진玉塵 들고 하는 이야기는 은하수를 기울인 듯, 은잔에 술은 바닷물결처럼 넘실거리네. 알지 못하겠네 선인의 마음이, 지금과 옛적 서로 통할는지." 하였다.
○ 이곡의 시에, "붉은 깃발에 옹위 되어 화성火城에 돌아오니, 사신의 놀이가 인정에 알맞았다. 야복野服을 입으니 수수하여 좋고, 시편詩篇은 선배를 따름이 기쁘구나, 긴 여름 해에 바람 쐬려 난간을 부여잡았고, 깊은 밤에 달빛을 따라 배 가는 대로 맡겨둔다. 호수 가운데 어찌하면 경치를 독차지하여, 미친 객 미친 이름이 사명四明을 이을고."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어떤 사람의 시가 사선성謝宣城만 하리, 고상한 놀이가 속된 정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노라. 좋은 술이 비었는가 병이 아주 눕고, 맑은 강은 비단 같으니 시구가 이루어지네, 강락康樂이 산에 오르던 흥취를 겸할 수 있고, 지장知章이 말 타고 가던 것은 반드시 하지 못한다. 달 밝은 거울 같은 호수에 한 구비 남았으니, 내일은 벼슬을 그만두고 배를 타리라." 하였다.
○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박혜숙 신朴惠肅信이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참인데, 부윤 조석간趙石磵 운흘云仡이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박은 슬피 생각하며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고을에 경포대가 있는데 형승이 관동에서 첫째이다. 부윤이 안렴사를 맞이하여 뱃놀이하면서, 몰래 홍장에게 화장을 곱게 하고 고운 옷을 입게 하였다. 별도로 배 한 척을 준비하고, 늙은 관인으로서 수염과 눈썹이 희고, 모습이 처용과 같은 자를 골라 의관을 정중하게 하여, 홍장과 함께 배에 실었다. 또 채색 액자에다, '신라 적 늙은 안상安詳이 천 년 전 풍류를 아직 못 잊어, 사신이 경포에 놀이한다는 말 듣고, 꽃다운 배에 다시 홍장을 태웠노라.'라는, 시를 적어 걸었다. 노를 천천히 저으며 포구에 들어와서 물가를 거니는데, 거문고 소리와 피리 소리가 맑고 또렷하여 공중에서 나는 듯하였다. 부윤이 안렴사에게, '이 지역에는 옛 선인의 유적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차 다리던 아궁이가 있고, 또 여기에서 수십 리 거리에 한송정이 있고, 정자에 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으며, 지금도 신선의 무리가 그 사이에 오가는데,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때론 본 사람도 있소. 그러나 다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갈 수는 없으오.' 하니, 박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처럼 아름답고 풍경이 기이하나, 마침 정황이 없소.' 하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배가 순풍을 타고 눈 깜박할 동안에 바로 앞으로 왔다. 노인이 배를 대는데 얼굴 모습이 기괴하고 배 안에는 홍기紅妓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가냘프게 너울거렸다. 박이 놀라서 말하기를, '필연코 신선 가운데 사람이다.' 하였다. 그러나 눈여겨보니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한껏 즐긴 다음 놀이를 마쳤다. 그 뒤에 박이 시를 보냈는데, '소년 적에 절節을 잡고 관동을 안찰 할 때, 경포대 놀이하던 일 꿈속에도 그리워라. 대 밑에 다시 배 띄우고 놀 생각 있으나, 붉은 단장과 늙은이가 비웃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 유사눌柳思訥의 시에, "기이한 경치 이야기를 듣고 내 말[馬]이 동쪽을 갔더니, 그해의 즐기던 놀이 그림 속일세. 지금 바로 배 타고 가고 싶으나, 대 위에는 석간옹石磵翁이 없으리."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대관령이 공중에 솟아 여러 산의 아비인데, 새끼 산이 동쪽으로 줄기줄기 뻗었네. 줄기가 갈라져 호수를 감쌌는데, 푸른 멧부리 흰 물결이 서로 머금고 뱉는다. 펀펀한 호수 십리인데 물결 고요하니, 거울 빛이 경대에서 나온 듯 갈매기 날아와 눈을 차니, 봄바람에 흰 날개가 펄럭인다. 대는 푸르러 오도鰲島를 덮었는데, 지는 해 무지개 다리엔 사람 그림자가 거꾸러졌다. 긴 길 바다에 임했는데, 들 해당화는 찬란하게 푸른 풀에 비친다. 물결은 아득하게 큰 바다에 잇닿았는데, 구름 돛은 만 리에 부상扶桑 끝이네. 부상은 어디인가 갈 수 없고, 용퇴龍堆와 신각蜃閣은 멀리 서로 마주했네. 기이한 구경 훌륭한 경치 어디에 짝 있으리. 이 세상 안에서 제일이 되리라. 동정호洞庭湖와 운몽택雲夢澤은 공연한 이름일 것을, 제인齊人이 자랑하고 초인楚人이 풍치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우리. 선인의 놀이는 이미 먼 세월 구름만이 아득한데, 바람 맑고 달이 밝아 빈 강에 가을이네. 시인과 묵객이 몇이나 오갔나, 해마다 술 싣고 봄놀이가 많았네. 내 걸음은 바로 늦은 봄 3월이라, 산꽃이 어즈러이 떨어져 붉은 비 쏟아지네. 시를 지어 옛일을 생각하고 긴 휘파람 부니, 맑은 바람이 슬슬 불어 푸른 나무 흔드네." 하였다.
해송정海松亭 : 경포대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바라보인다.
○ 이구李玖의 시에, "풍진 속에 모자를 젖혀 썼으니, 동서로 헤매는 동안 머리 희었네. 누에 올라 더위를 피하였더니, 경치를 보니 문득 가을이던가. 물고기는 뛰다가 숨기도 하고, 제집 찾는 새는 느리게 난다. 신세를 생각하고 홀로 섰는데, 산 기운이 한창 피어오른다." 하였다.
쾌재정快裁亭 : 부 동쪽 9리에 있으며, 곁에 이끼 낀 빗돌이 있다. 예전에 병사를 주둔시키던 곳이다.
취원대聚遠臺 : 부 동쪽에 있다.
○ 조운흘의 시에, "성 동쪽 취원대에 걸어 오르니, 들 복숭아 산 살구가 성에 가득 피었다. 세상이 시끄러워 한창 일이 많은데, 묻노니 봄빛이 어디서 왔나." 하였다. 어풍루馭風樓 : 곧 부성 동쪽 문루다.
신증) 척번대滌煩臺ㆍ청백당淸百堂 : 모두 객관 서쪽에 있다. 허리대 許李臺 : 부 남쪽 25리에 있다. 바닷가에 펀펀하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백여 사람이 앉을 만하다. 허종許琮과 이육李陸이 함께 사명을 띠고 여기에 와서 놀았으므로 이름하였다.
○ 이육의 시에, "완악한 모습이 몇 겁 티끌을 겪었는고, 물 위에 하늘로 솟아 홀로 바닷가에 섰다. 상서尙書의 붓 아래엔 강물을 쏟는 듯, 대장 깃발 곁엔 해와 달이 열렸네. 그때 난정蘭亭에는 성한 일이라 전해오고, 천 년 적벽은 기이한 재사才士 힘입었다. 어찌 알랴 길가에 평범한 돌이, 이제부터 허리대라 이름 높아질 것을." 하였다.
학교 향교 : 부 북쪽 3리에 있다. 동쪽 모퉁이에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으며, 사람 사이에 연적암硯適巖이라 부른다.
○ 고려 김승인金承印이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화부산花浮山 밑에다가 처음으로 학사學舍를 창설하였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에, "내가 젊었을 때, '강릉의 풍습이 문학을 숭상하여 그들 자제가 겨우 어버이의 품을 벗어나면 곧 향교에 들어가 배우고, 시골 구석구석 마을까지 선비들의 위의가 엄숙하고 조용함은 모두 글을 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겼다. 성화成化 임진년 봄에 내가 시어사侍御史로서 시원試院에 참여하였는데, 유생 서너 명이 있었다. 얼굴에 고기古氣가 있고 의관은 남루하나, 그들의 강설은 매우 정미하고 익숙하였다. 물으니 모두 강릉 사람이었다.
그 뒤 14년이 지나서 절월節鉞을 잡고 관동에 오게 되었다. 처음 임영관臨瀛館에 가서 고을 이졸의 예를 받은 다음, 여러 학생을 불러서 경서의 뜻을 물으니 마음속에 성현의 뜻을 통한 자가 거의 수십 명이었다. 또 제목을 내 문예를 시험하도록 하였더니, 시부詩賦와 의의疑義에 합격한 자가 또 50여 명이었다. 이에 또 지난 임진년 시원에서 강하던 자의 학업이 그 유래가 있음을 알았다. 이튿날은 향교에 나아가 선성先聖께 배알한 다음, 물러나서 부사 이인충李仁忠ㆍ전 승지 박시형朴始亨ㆍ도사 류양춘柳楊春ㆍ교수 최자점崔自霑 등과 의논하고, 역말을 달려 보내 조정에 아뢰기를, '강릉은 대관령과 바다 사이에 멀리 있으나, 이곳 사람은 예의를 익히고 시서를 외우니, 실상 우리 동방의 추로鄒魯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고을 향교에는 대성전과 동무東廡ㆍ서무西廡가 있사온데 오랜 세월에 허물어지고 위태하며, 재사도 비좁아 학생을 수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고쳐 넓히지 않으면 장차 무너져서 버티기 어려울까 염려되오며, 강독하는 자들 또한 편안히 거처하지 못할까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방에 걱정이 없어, 우리 부와 삼척 두 진의 병졸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냅니다. 이 두 진의 병졸을 이용하여 봄여름으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웠다가, 가을ㆍ겨울이 되거든 집을 짓게 하여 옛것을 새롭게 하며, 좁은 것을 넓혀 학도들을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윤허를 받은 다음, 곧 군졸을 나누어서 재목과 기와를 모으게 하였다. 일이 되어갈 무렵에 마침 날이 가물어 그쳤다가 그의 완성은 다음 사람에게 미룬 채, 나는 갈리게 되었다.
그 뒤 9년 만에 서울에서 최교수崔敎授를 만났는데, 최도 역시 벼슬이 갈려 사간원 정언이 되었었다. 최의 말이, '강릉은 나의 고을입니다. 우리 향교가 중수된 것은 공의 힘입니다.' 하기에, 나는, '아니요, 내가 완성하지 못하고 갈렸으니, 내게 무슨 공이 있겠소.' 하니, 최는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완성하는 그날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계획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이 비록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 자재는 이미 공이 있을 때에 이루어 놓았습니다. 을사년 겨울 공이 갈려 간 다음 해에 대성전과 동무ㆍ서무를 지었고, 또 다음 해에 동재ㆍ서재ㆍ강청을 지었고, 전사청典祀廳ㆍ제기고祭器庫ㆍ교수아敎授衙ㆍ유사방有司房까지도 모두 일신하게 하였습니다. 또 다음 해에 남루南樓와 앞 행낭, 모두 70여 칸을 지었는데 향교로서 크고 화려한 게 비할 곳이 없습니다. 이어서 완성한 관원은 부사 이평李枰 판관 신승복愼承福이요, 기와 굽는 것을 감독한 자는 함영창咸永昌, 집 짓는 것을 감독한 자는 김보연金普淵이며, 목수는 안해심安海深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당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다음 사람인들 어떻게 이 일을 완성하였겠습니까. 여기에서 배우고 여기에서 먹는 자는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문학을 숭상하는 풍습이 이에서 더욱 떨치리니, 이것은 그 사적事蹟을 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찌 한 말씀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 말하기를, '아, 내가 무슨 공이 있어 감히 말하리오마는, 대저 인재가 많고 학교가 성하진 것은 사문斯文이 아니면 오는 세대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역원
대창역大昌驛 : 부 동쪽 5리에 있다.
안인역安仁驛 : 부 남쪽 20리에 있다.
목계역木界驛 : 부 서남쪽 50리에 있다.
고단역高端驛 : 부 서쪽 60리에 있다.
횡계역橫溪驛 : 대관령 위에 있으며 부에서 60리다. 지대가 매우 높고 서늘하여, 매해 겨울이면 눈이 두어 길이나 쌓였다가 다음 해 3월이라야 비로소 녹는다. 8월이면 서리가 내리므로 주인은 오직 패랭이 꽃과 귀리를 심는다.
○ 정추鄭樞의 시에, "한낮인데도 계정溪亭엔 음기가 엉기고, 사시로 서리가 위세를 부리네. 봄인데도 나무에 잎 없음이 괴이하더니, 사람들이, '가지 끝엔 밤마다 얼음 언다.' 말하네." 하였다.
진부역珍富驛 : 영 서쪽에 있으며, 고을 치소에서 백 리다. ○ 권적權迪의 시에, "옛 역 이름이 진부인데, 진부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눈이 무더기 지니 산에 옥玉이 가득하고, 버들이 스치니 길에 금이 많아라, 시내에 잉어는 붉은 비단이 뛰는 듯, 마을 연기는 푸른 비단을 흩는 듯하다. 눈앞에 두 호장은 귀밑머리가 은실처럼 빛나네." 하였다.
대화역大和驛 : 영 서쪽에 있다. 고을 치소에서 백50리다.
방림역芳林驛 : 영 서쪽에 있다. 고을 치소에서 백70리다.
동덕역冬德驛 : 부 북쪽 42리다.
낙풍역樂豐驛 : 우계현羽溪縣 동쪽 5리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명사鳴沙에 말 가는 대로 천천히 돌아오는데, 시내 바람이 비를 몰아 옷을 적시네. 정자 앞 흐르는 물은 바다와 가까운데, 산 밑에 있는 콩밭엔 모종이 드물다." 하였다.
임계역臨溪驛 : 우계현 서쪽 40리에 있다.
신증) 성현의 시에, "편편한 모래톱이 바다에 닿았는데, 돌아갈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해라. 푸른 대는 뒷집을 막았고, 푸른 숲은 판교板橋를 가렸네. 연기 낀 언덕에는 송아지 몰아가고, 풀 우거진 들판엔 샘물을 멀리 끌어왔네. 뻐꾸기는 절기를 알고, 은근하게 곡식 심기 권하네." 하였다. ○ 이우李●의 시에, "눈雪 빛이 창틈에 드니 촛불이 무색해지고, 달은 솔 그림자에 채[篩]쳐서 서쪽 처마에 일렁인다. 밤이 깊어 산바람이 부는 줄 알겠으니, 담 밖의 대나무에 우수수 소리 나누나." 하였다.
운교역雲橋驛 : 영 서쪽에 있으며, 고을 치소에서 1백90리다.
구산역丘山驛 : 부 서쪽 20리에 있다. 정자가 있는데 사람을 서쪽으로 전송하는 곳이다.
○ 조운흘의 시에, "구슬 같은 두 줄기 눈물이 옥잔에 떨어진다. 양관陽關 세 가락에 전송할 때여라. 태산이 평지 되고 바닷물이 말라야, 이별하는 눈물이 구산에서 없어지리." 하였다.
홍제원洪濟院 : 부 서쪽 5리, 사화루使華樓가 있다.
제민원濟民院 : 부 서쪽 28리.
대령원大嶺院 : 대관령 위에 있다.
독산원禿山院 : 부 서쪽 90리.
인락원人樂院 : 부 서쪽 1백 20리.
인부원人富院 : 부 서쪽 1백 39리.
자인원慈仁院 : 부 서쪽 1백 40리.
장연원長淵院 : 부 서쪽 1백 40리.
무응구리원無應仇里院 : 부 남쪽 75리.
장수원長壽院 : 우계현 서쪽 28리.
대제원大濟院 : 우계현 서쪽 43리.
송현원松峴院 : 우계현 서쪽 70리.
신증)교량
누교樓橋 : 부 남쪽 10리. 강문교江門橋 : 부 북쪽 12리, 경포 입구에 있다.
불우 상원사上院寺 : 오대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건문建文 3년 봄 정월 신미일에 계운啓運 신무神武 태상왕太上王 전하께서 내신 판내시부사內臣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신 권근을 불러 전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강릉부 오대산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것이 옛적부터 드날렸음을 듣고, 원찰을 세워서 착한 인과를 심고자 생각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운설악雲雪岳이라는 늙은 중이 이 산에서 와 고하기를, 「산속에에 사자암이 있었는데, 나라의 비보사찰裨補寺刹입니다. 대臺 남쪽에 있었는데, 대에 오르내리는 자가 모두 거쳐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창건한 지 오래되어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으니, 보는 자가 마음 아파합니다. 진실로 이 암자를 중건한다면 여러 사람의 흔쾌함이 딴 곳보다 반드시 곱절일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곧 공인을 보내 중건하였다. 세 칸은 부처를 봉안하고 중이 머무는 곳이며, 그 아래쪽 두 칸은 문과 목욕간으로 만들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지세가 적당하므로 거기에 알맞게 하고자 하여, 사치하거나 크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공사를 마친 다음, 그해 겨울 11월에 임금이 몸소 와 낙성하였는바, 대개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추념하고 후세에까지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의 은덕에 젖고 유명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을 써서 오랜 후세까지 알게 하라.' 하시었다.
신 근이 적이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데, 그 설법은 매우 광대하다. 그러므로 한나라 이래로 군주로서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태상왕 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질로써 천운에 응해 개국하시어 동방을 보유하고 유신維新하는 정사를 베푸시니, 어진 은택이 깊고 두터우며 자손을 위해 남긴 법과 드리우신 복이 지극하다 하겠다. 번거로운 정무를 싫어하시어 사왕嗣王에게 전하시고, 불법에 전심하시어 부지런하게 받들고 믿으시어 깊고 높은 산꼭대기의 옛터까지 찾아 이름 있는 절을 건립하시되 천 리 길도 멀다 않으시고 옥지玉趾를 수고롭게 하여 임금이 친히 오시니, 숲과 골짜기는 빛이 더 나고 칡덩굴도 광채가 나니 이 산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분이 이 산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 오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창업하신 임금이시고 태상왕의 존귀한 몸인데 멀리 승여乘輿를 움직여 친히 임어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산골 늙은이들은 이 일을 한없이 일컫고 이 산의 소중함을 더할 것이다. 마땅히 헌원씨軒轅氏가 구자산具茨山에 놀던 것과, 주목왕周穆王이 요지瑤池에 갔던 일과 아울러 아름다움을 무궁토록 칭송하리라." 하였다.
관음암觀音菴 : 오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 부 동쪽 해안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에, "사람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석상은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조胡宗旦朝가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龜趺만이 남았다 한다." 하였다.
○ 정추의 시에, "고요한 밤에 풍경 소리 반공에 울리는데, 단청한 불전에 등불이 붉다. 노승이 우통于筒 물을 즐겨 말하는데, 지수智水와 어느 것이 묽고 진한고."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와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소나무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나무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 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하였다. ○ "유인幽人이 보산寶山 속에 편히 쉬며, 한 줄기 향연으로 임금을 축수한다. 천녀天女가 꽃을 흩어 향기가 땅에 덮였고, 야신夜神이 나무를 쪼개니 그림자가 공중에 어른거린다. 처마끝 달빛은 붉은 기둥에 흐르고, 베개 가 구름은 푸른 헌함을 스쳐간다. 한밤중 동창에 객이 놀라 잠 깨니, 해가 바다에서 솟구치어 붉은빛을 쏜다." 하였다.
염양사艶陽寺 : 화부산花浮山에 있다. 이곡의 중수기가 있다. 금옹사金甕寺 : 오대산에 있다. 이첨李詹의 중수기가 있다. 흥원사興原寺 : 담정산淡定山에 있다.
월정사月精寺 : 오대산에 있다.
○ 정추의 시에,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 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였다.
수정암水精菴 :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우통물 근원에 수정암이 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서 참선하여 도를 깨쳤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으로서 수도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머물기를 즐겨 한다." 하였다.
등명사燈明寺 : 부 동쪽 30리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쇠줄친 길이 벽련봉碧蓮峯을 둘렀는데, 겹 누각 층층대가 공중에 솟았다. 그윽한 나무는 그늘져서 여름을 맞이하고, 늦은 꽃은 고움을 남겨 봄의 조화를 돕는다. 봉간鳳竿 그림자는 천 봉우리 달에 걸렸고, 어고魚鼓 소리는 만 구렁 바람에 전한다. 고상한 사람이 눈 오는 밤에, 화로 재 헤쳐 불 피우던 것이 생각난다." 하였다.
○ 김돈시金敦時의 시에, "절이 창파를 눌러 멀리 아득한데, 올라 보니 바다 복판에 있는 듯하다. 발을 걷으니 대 그림자가 성기면서도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여울 소리가 낮았다가 높다. 경루經樓에 밤 고요한데 향불이 싸늘하고, 객탑客榻에 달 밝은데 갈건葛巾이 서늘하다.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 없음이 못내 서글퍼, 종일토록 정신없이 구복口腹 위해 바쁘다." 하였다.
지장사地藏寺 :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 서쪽 백보 지점에 있다. 여단 : 부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 화부산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황사에 합쳤다. 대관산신사大關山神祠 : 부 서쪽 40리에 있다.
고적 창해군滄海郡 : 한무제 원삭元朔 5년에 예국濊國 임금 남려南閭가 조선을 배반하고 요동에 가서 붙었으므로,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었으나 수년 뒤에 없앴다. 동루東樓 : 용지사龍池寺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대관령 동쪽은 천하에 드문 경치이니, 명주溟州 고목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네. 새벽에 말 타고 절 찾아갔다가, 빈관賓館에 돌아오니 해가 기우네. 누에 오르니 달빛이 눈 같고, 쇠 피리 한 소리에 산이 찢어지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니 시름에 겨워, 묻노니 천 년 동안에 달은 몇 번이나 둥글었나, 밤 깊어 사방에 인적이 드문데, 까마귀 깍깍 티끌도 고요하다. 별빛은 반짝반짝 달과 겨루고, 은하는 천고에 빛이 환하다. 환한 빛이 사방에 임했는데, 뜬구름이 덮으려니 마음 아파라. 어찌하면 긴 칼로 창공에 기대볼까. 고래 같은 물결이 한없이 아득하네. 화부산은 꾸불꾸불 무성한 빛이어라. 김유신 장군은 참 영웅일세, 천 년토록 우뚝하고 기이한 공이여." 하였다.
○ 고려 김태현金台鉉의 시에, "절월節鉞을 잡고 난간에 기대 한 해를 보내는데, 바라보이는 것은 온통 흰 갈매기 가득한 하늘이네. 서쪽으로 돌은 멧부리 구름 밖에 솟았고, 동쪽으로 일어나는 물결은 해의 가장자리에 부서진다. 새벽 모습은 버들잎에 이슬이 깨끗하고, 저문 자취는 댓가지에 연기가 짙다. 다만, 몸이 임영관臨瀛館에 있는 까닭으로, 약은 짓지 않아도 뼈는 벌써 신선되었다." 하였다.
○ 윤혁尹奕의 시에, "신령이 승지를 숨겨, 몇 천 년 만에 백 척 높은 누가 반공에 솟았다. 붉은 기둥은 멀리 창해 속에 떠 있는 듯, 푸른 처마는 높게 흰 구름 가를 스친다. 가을은 성곽 무성한 나무에 깊고, 해는 들판 담담한 연기에 진다. 아전이 가고 뜰이 비어 아주 깨끗한데, 낮은 소리로 달나라 항아嫦娥를 부르고 싶다." 하였다.
예국고성濊國古城 : 읍성 동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4백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우계산성羽溪山城 :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부에서 61리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51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보현산성普賢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7백7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석정石井 : 모두 한송정 곁에 있으며, 네 선인仙人이 놀이할 때 차를 달이던 도구였다.
양어지養魚池 : 세상에 전해오기로, "한 서생이 유학하면서 명주溟州에 왔다가, 자태가 아름다운 양가 여자를 보았는데 제법 글을 아는 것이었다. 서생이 매양 시를 지어 부추기니, 그 여자가, '부인네는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습니다. 학생이 과거에 뽑히기를 기다려 어버이 말씀이 있으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서생은 곧 서울에 돌아가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 여자는 못에 고기를 길렀는데, 고기들이 그 여자의 기침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몰려와 먹이를 먹었다. 그 뒤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여자는 고기에게 먹이를 주면서, "내가 너희를 기른 지가 오래이니, 나의 뜻을 알 것이다." 하며, 비단에 적은 편지를 던졌다. 큰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면서 그 편지를 삼키고 유유히 사라졌다. 서생이 서울에 있으면서, 하루는 부모에게 드릴 찬을 장만하기 위해 고기를 사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고기 뼈를 가르다가 비단에 적은 편지를 발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곧 비단 편지와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바로 그 여자 집에 가니, 신랑이 벌써 그 집 문에 와 있었다. 서생이 편지를 그 여자의 집에 보이니, 그 어버이도 이상하게 여기며, '이것은 정성이 고기를 감동하게 한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것이 아니다.' 하고 그 신랑을 보내고 서생을 맞이하였다." 한다. 개운루開雲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연못 복판에다 대를 쌓았고 대 위에 다락을 세웠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뜰 위에 풀빛이 파릇파릇한데, 버들 그늘진 관도가 깨끗하기도 하다. 누구네 집 남은 꽃이 떨어지는가, 조각조각 바람 따라 말굽에 든다." 하였다.
사동史冬부곡 : 부 남쪽 20리에 있다. 오홀烏忽부곡ㆍ조대산助大山부곡ㆍ소점蘇漸부곡ㆍ반곡소般谷所 : 부 동쪽 6리에 있다. 죽원소竹原所ㆍ영평수寧平戍ㆍ해령수海令戍 : 부 동쪽 10리에 있다. 화성수化城戍ㆍ사화수沙火戍 : 부 북쪽 20리에 있다. 철옹수鐵甕戍.
명환
신라 이사부異斯夫 : 내물왕奈勿王 4대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에 하슬라何瑟羅 군주軍主로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병하기로 꾀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으나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 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항복받는 것이 옳다 하여,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속이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아 밟아 죽이겠다."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진주眞珠 : 선덕왕善德王 8년에 사창沙滄 진주에게 이 지역을 진수하게 하였다.
고려 임민비林民庇 : 명주 원으로 와서, 도랑을 파서 전답에 물을 대었으며, 청렴하고 근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조정에 들어가서 태상부 녹사太常府錄事가 되었다.
안종원安宗源 : 공민왕恭愍王 때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 부사가 되어 나왔다. 박원계朴元桂 : 존무사存撫使로 있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려는데, 재상이, "강릉 사람은 원계가 존무사로 있는 것을 편하게 여긴다." 하여 그대로 눌러 있게 되었다. 백성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마지 않는다.
본조 조운흘 : 호는 석간石磵이다. 건국 초기에 부사가 되었다. 빈객 접대하기를 즐기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 지금까지 청백하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괴이한 짓을 좋아하여 경포액자시鏡浦額字詩 같은 등류가 많았다. 하루는 부 기생들이 석상에서 서로 희롱하여 웃는 것이었다. 석간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기생이 답하기를, "첩의 꿈에 사또를 모시고 잤는데 지금 여러 동무와 해몽하는 중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석간이 곧 붓을 들어, "마음이 영서靈犀같이 뜻이 서로 통했으니, 비단 금침을 함께 할 것까지도 없다. 태수의 풍정이 박하다 말아라. 먼저 가인의 꿈속에 들었도다." 하였다. 신유정辛有定 : 우리 태종 때 왜놈이 강원도에 침입하므로 유정에게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고, 그대로 강릉 부사로 삼았다. 청렴하고 어질며 민폐를 없애고 생계를 일으키니, 백성이 그 혜택을 사모하였다. 유량柳亮 : 영부사領府使로 있었다. 부의 백성이 그의 어진 정사에 감격하여, 조운흘ㆍ안종원ㆍ신유정과 함께 생사당을 짓고 제사하였다. 금유琴柔 : 세종 때 부사가 되었다. 순리循吏라는 칭송을 받았고 백성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사모하였다.
신증) 이신효李愼孝 : 부사가 되어 청렴하고 간편한 정사를 숭상하였다.
인물 신라 김주원金周元 : 태종왕太宗王의 손자다. 당초에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敬信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뒤에 주원을 명주군 임금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ㆍ근을어斤乙於ㆍ울진 등 고을을 떼어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자손이 이로 말미암아 부府를 관향으로 하였다. 김종기金宗基 : 주원 아들인데 대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김정여金貞茹 : 종기 아들이다. 비로소 조정에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고, 명원공溟源公으로 봉함 받았다. 김양金陽 : 정여 아들이다. 김명金明의 반란 때 신무왕神武王을 도와 사직을 안정시켰다. 벼슬이 시중겸 병부령兵部令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명원군 왕으로 봉하게 되었다.
고려 김상기金上琦 : 주원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존金仁存 : 상기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연緣이다. 성품이 명철하고 민첩하여 젊었을 때 과거에 올라 직한림원으로 있다가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기거사인 지제고 병부원외랑이 되었다. 요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왔을 때 인존이 접반하게 되었다. 하루는 함께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게 되었다. 눈[雪]이 비로소 개었고 말발굽이 땅에 부딪힐 적마다 소리가 났다. 맹초가 창唱하기를, "말굽이 눈을 밟으니 마른 우레가 동한다." 하였다. 인존이 그 소리에 따라 곧,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열화烈火가 난다." 하였더니, 초가 깜짝 놀라면서, "진실로 천재로다." 하였다. 벼슬은 수태부 문하시중까지 하였다. 김고金沽 : 인존 아우다. 풍채가 깨끗하고 고우며 문학으로써 세상에 저명하였다. 벼슬은 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수황崔守璜 : 과거에 올라 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의식이 모자라도 개의하지 않았다. 김진金縝 : 학업에 힘을 써서 과거에 올라 인종 때 동지추밀원사로 있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리에 궁궐이 불타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스스로 죽는 게 낫다." 하고, 문을 닫고 불 속에 들어가 죽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시호를 열직烈直이라 하였다. 왕순식王順式 : 우리 주의 장군이 되어 태조太祖가 신검神劍을 토벌할 때 순식은 명주에서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격파하였다. 태조가 순식에게 이르기를, "짐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더니, 그 이튿날에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것이 꿈의 감응이다." 하니 순식이 아뢰기를,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에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으므로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더니, 임금께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기이하게 여겼다. 최유崔濡 : 우리 부 구실아치로 사람됨이 거룩하고 풍채가 있었다. 19세 때 과거에 올라 교서 교감에 보임되었고 인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김천金遷 : 우리 부 구실아치다. 고종 말년에 몽골 군사가 침입하여 어미와 아우 덕린德麟이 사로 잡혔다. 그때 천은 15살이었는데,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사로잡힌 사람이 도중에 많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최복衰服을 입고 예제禮制를 마쳤다. 그 뒤 14년 만에 백호습성百戶習成이 원나라에서 와서 천의 어머니 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천은 어미가 북주 천로채北州天老寨에 있음을 알고 찾아가 보았다. 백금 55냥으로써 속贖을 바쳐 돌아오게 하였고, 그 뒤 6년 만에 덕린 또한 돌아왔다. 형제가 종신토록 효도를 다하니, 고을 사람이 돌을 세우고 효자리라 새겨 정표 하였다. 왕백王伯 : 본디 성은 김金이며 신라 무열왕 후손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올랐고 규정糾正을 거쳐 우사보右司補로 전직되었으나, 임금에게 귀염받는 사람의 첩이 고신告身을 서경署經 고을 원이 부임할 때 상신相臣ㆍ장신將臣ㆍ육경六卿들에게 고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참소를 만나 장을 맞고 귀양 같다. 충혜왕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전주로 돌아갔다. 김광을金光乙 : 주원 후손이다. 공민왕 때 찬화공신贊化功臣이란 호를 받았다. 명원부원군溟源府院君으로 봉하게 되었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최안소崔安沼 : 공민왕 때 순성 보리 공신 강릉군純誠輔理功臣江陵君으로 봉하게 되었다.
본조 김추金錘 : 광을光乙의 아들이며 벼슬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함부림咸傅霖 : 과거에 두 번 올랐으며, 개국공신으로 동원군東原君으로 봉하였다. 국조國朝에 8도감사八道監司를 지낸 사람은 부림뿐이며, 간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유창劉敞 : 개국공신이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다. 최이崔迤 :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최치운崔致雲 : 세종 때 과거에 올라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함우치咸禹治 : 부림 아들이다. 여러 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그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벼슬이 의정부 참찬에 이르렀으며 동원군東原君에 습봉襲封 되었다. 김자견金子鏲 : 과거에 올라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신증) 최응현崔應賢 : 치운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이성무李成茂 : 어머니가 병들어서 한겨울에 생선을 생각하므로, 성무는 아우 춘무春茂ㆍ선무善茂ㆍ양무良茂와 함께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생선을 구하였다. 그런데 얼음이 갑자기 풀리면서 고기가 뛰어 나왔다.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그의 자손을 복호復戶하였다. 양무의 아들 중원仲元은 과거에 올랐다.
신증) 박수량朴遂良 : 연산이 상기를 짧게 하는 제도를 시행할 때 수량이 어머니 상을 만났다. 그러나 수량은 3년 동안 최복을 입고 여묘하였으니, 지금 임금 3년에 정려하였다. 최응록崔應祿 : 아버지가 미친병에 걸렸다.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김씨 : 생원 최세창崔世昌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곡하고 울부짖으며 지극히 슬퍼하였고,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이씨 :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아내다. 남편 병이 위독하자, 이씨는 은밀히 선조의 무덤에 가서 분향하고 기도한 다음 칼을 뽑아 손가락을 끊고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이씨에게 작은 딸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크기가 대추만 한 약을 내려 주는 꿈을 꾸었더니, 남편의 병이 과연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닭 울기 전 새벽 날이 밝다. : 김극기의 시에, "모래 위로 몇 리를 가서, 곡구谷口의 외로운 성城에 이르렀네. 기러기 나는 밖으로 변성邊城 구름이 어둡고, 닭 울기 전에 새벽 날이 밝다. 물에는 차가운 거울 빛이 깔렸고, 솔에는 성낸 물결 소리가 부서진다. 사제沙提의 시구를 바치고자 하나, 재주가 이영李嶸을 압도할 수 없네." 하였다.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는다. : 앞사람의 시에, "손에 천상天上의 조칙을 받들고, 사신 수레를 명주溟州에 쉬었다. 일이 끝나 유막柳幕을 하직하고, 말을 몰아 문득 수레를 돌린다. 얼핏 들으니 바닷가는, 경치가 놀이하기에 족하다지. 놀기 좋아하는 마음 아직도 다하지 않아서, 흥을 따라 깊이 찾고자 한다. 북쪽으로 돌아갈 길을 잊고서, 남으로 가니 참으로 유유하구나. 언덕을 따라 돌층계를 지나고,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는다. 나무마다 검은 원숭이가 매달렸고, 물결마다 흰 갈매기가 펄럭인다. 이리저리 돌면서 마음대로 찾고 구경하니, 만 가지 형상이 눈을 흔들리게 한다. 네 선인이 지금은 어디에 있나. 다만 묵은 자취만 남았구나. 정자는 시내 어귀에 있고, 절은 고개 위에 솟았다. 걸음마다 속된 경계는 멀어지고, 구름과 노을만 사방에 둘렸네. 상쾌하게 해그림자를 넘어서서, 난새를 타고 봉산蓬山을 방문한 듯하구나. 문득 바라보니 나는 새 너머에 먼 멧부리가 푸르렀다. 오대산인 줄 물어서 알았는데, 공중에 푸른 용이 서린 듯하다. 문수봉은 깨끗한 거울이 둥글 하고, 백월봉은 맑은 물이 쏟아진다. 신심이 경건할 것 같으면, 소원은 낱낱이 이루어진다. 신령스런 지경에 가서, 성군의 천만세를 축원함을 어찌 사양하리." 하였다.
땅이 부상扶桑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 이색의 시에, "땅이 부상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산은 장백산과 닿아서 여름인데 오히려 춥다." 하였다. 신기루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네. : 고려 송인宋因의 시에, "물결 소리가 땅을 움직여 베개에 와서 시끄럽고, 신기루가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다." 하였다. 길은 흰 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 정추의 시에, "길은 흰 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집은 까마귀 돌아가는 낙조 가에 있다." 하였다.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높은 영嶺은 하늘을 만질 듯 태산泰山인가 화산華山인가." 하였다. 흰 모래 푸른 대나무 물가의 섬은. : 앞사람의 시에, "깃발도 선명하게 물결에 비치니, 자고鷓鴣새가 놀라 날아서 해당화 떨어진다. 흰 모래 푸른 대 물가 섬은, 송교松喬 제자의 집인가 의심된다." 하였다. 고기 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 :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호해湖海에 벼슬살이하며 흐르는 세월을 느낀다. 은혜가 박하니 두 하늘 있다고 누가 말하나. 가을 원院은 제비 돌아간 뒤에 비었고, 저문 산은 날아간 갈까마귀 가에 멀다 베 짜는 깊은 골목에는 3경의 등잔이요, 고기 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로다, 경포와 송정松亭이 나를 머물게 한다면, 봉래섬에 다시 신선을 찾지 않으리." 하였다.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었네. : 권적權迪의 시에,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고, 풍악楓岳에 기후가 추워서 눈이 녹지 않았다." 하였다. 살구꽃 울타리 떨어지니 일천 집에 비가 오고. : 고려 송천봉宋天逢의 시에, "살구꽃 핀 울타리 일천 집에 비가 오고, 풀빛 냇가에는 십리에 연기가 끼었다." 하였다. 임영은 물에 떠있고 물은 하늘에 떠있다. : 박진록朴晉祿의 시에, "절월節鉞을 안고 풍속을 살핀 지 벌써 2년, 임영은 물에 떴고 물은 하늘에 떠있다. 벼슬살이는 금오金鰲 신선 있는 산꼭대기에 있는 듯하고, 시안詩眼 백조 나는 곳에 더욱 밝구나. 헌함과 문은 동해의 해를 일찍 맞이하고, 발과 깃발은 북산 연기에 반쯤 젖었네. 곁에 사람은 썩은 선비인 줄 알지 못하고, 서원西垣에서 세상을 즐기는 신선이라 이르리라." 하였다. 수루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하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수루戍樓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하고, 봉화烽火가 전하여 바다 산에는 낭연狼煙을 진압한다. 난간에 기대서 멀리 바라보매 삼신산이 아득하니, 도리어 세상 밖에 노니는 신선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기었다. : 황희黃喜의 시에 "맑디맑은 경포 물엔 새 달이 잠겼고,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겼다. 구름비단 연꽃은 못에 가득하고 경포대엔 대나무가 가득하니 티끌세상에도 해중海中 신선이 있다." 하였다. 큰 영에는 구름이 기러기 나는 변방에 연하고. : 유효통兪孝通의 시에, "부상扶桑의 해는 바다 물결 속에서 돋고, 큰 영에는 구름이 변방에 연했다." 하였다. 아득한 성은 말과 같고 : 하연河演의 시에, "까마득하게 성은 말[斗] 만하고 아득한 물은 하늘에 닿았다." 하였다. 바다 산이 모두 도화원 속일세. : 안성安省의 시에, "나라가 주州로 변한 햇수도 아지 못하겠는데, 예성 누관蕊城樓館에 또 가을 절후이다. 바다와 산이 모두 도원桃源인데, 무엇 하러 구구하게 신선을 배우려 하리." 하였다.
(팔영) : 김극기의 시다. 녹균루綠筠樓 : 나는 녹균루를 사랑하노니, 찬 소리가 항상 가을을 흔드네. 삐죽삐죽 칼날이 섰고, 사각사각 구슬이 운다. 아래에서 숙야叔夜가 취하기에 좋고, 사이에는 군유君猷가 지나가기에 알맞다. 부러워라 그대가 비바람 치는 밤에 베개에 기대서, 우수수하는 소리 듣는 것이. 작자 자신의 주註 : 소동파가 서군유徐君猷의 만장輓章 시에 "눈 온 뒤에 버들 심은 곳에 홀로 오고, 대 사이에 다니며 다시 차를 캐더니," 하였다. 한송정寒松亭 : 나는 한송정을 사랑하노니, 높은 풍치가 은하에 닿아 푸르다. 옥 깃대를 세운 듯, 구슬 비파를 울리는 듯하다. 푸른 꽃 순은 빗속에 더 빼어나고, 누른 꽃은 바람 따라 다시 향기롭다. 네 선인이 놀이하던 곳, 절경을 찾아 늙음을 위로한다. 경포대鏡浦臺 : 서늘한 경포대에 물과 돌이 다투어 둘렀네. 버들 언덕엔 푸른 연기 합쳤고, 모래 언덕에 흰 눈이 무더기 졌다. 고기는 상점象簟을 불며 가고, 새는 교반鮫盤을 떨어트려 온다. 선인은 아득하게 어디로 갔나, 땅에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 굴산종崛山鐘 : 용용舂容한 굴산동은, 범일선사梵日禪師가 만든 것이다. 보고 놀라서 마음이 당황하고, 진중하게 경례하며 눈물 흩뿌린다. 귀신은 다만 도道를 행하고, 새들은 발붙이기 어렵다. 그대는 행여 치지 말라, 동해에 어룡이 놀랄까 한다. 안신계安神溪 : 한 줄기 안신계, 깨끗하기 은하와 같다. 오직 비둘기가 물을 머금고, 다시 메기가 진흙을 토함은 없다. 달빛이 비치니 보탑寶塔이 빛나고, 연기가 덮이니 향휴香畦에 몽롱하다. 아련한 신선의 지경에, 가도 가도 길은 아득하여라. 불화루佛華樓 : 한 무더기 불화루에, 여가를 만들어 유람하였더니, 침향沈香 화로엔 구름이 아련하고, 찻잔에는 눈[雪]이 부글거린다. 헌함에 엎드려 황곡黃鵠을 엿보고, 멀에 임해서 갈매기와 친한다. 고요하게 진세와 떨어졌으니, 무엇 하러 신선을 다시 찾으리. 문수당文殊堂 : 고개 위 문수당은, 채색 들보가 공중에 솟았네. 조수는 묘한 소리를 울리고, 산 달은 자애 어린 빛이 흐른다. 구름은 돌 다락 가에 불어 나오고, 물은 소나무 길가를 씻는다. 앉아서 보니 숲 너머 새가, 꽃을 머금고 날아오네. 견조도堅造島 : 바다 속 견조도는, 높고 험해서 풀 한 포기 없다. 훌륭한 경계는 신선과 가깝고, 남은 자취는 부로에게 전해 온다. 멀리 귀양 와서 종을 치게 되고, 숨어 살며 도를 깨쳤다. 팔을 펴면 천 보가 넘는다는데, 이 말을 진정 누가 보증하리.
[증보문헌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관찰부를 두었다가 33년에 없애고 군으로 하였다. 효종 때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 6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대동지지]
방면 남일리면南一里面 : 끝이 10리. 남이리南二里 : 끝이 15리. 북일리北一里 : 끝이 10리. 북이리北二里 : 끝이 10리. 덕방德方 : 남으로 끝이 10리. 구경邱耕 : 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80리. 가자곡可資谷 : 위와 같다. 우계羽溪 :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90리. 임계臨溪 : 서남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20리. 성산城山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하동下洞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가남嘉南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화沙火 : 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 연곡連谷 : 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신리新里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 도암道巖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 내면內面 : 서북으로 처음은 1백 60리, 끝은 2백리. 대화大和 : 서쪽으로 처음은 1백40리, 끝은 2백리. 진부珍富 : 서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20리. 사각부곡史各部曲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선명소船名所 : 동으로 6리에 있다.
성지 청학산고성靑鶴山古城 : 산 동쪽에 있는데 둘레는 1천2백척이다. 고려 덕종德宗 3년에 명주성溟州城을 수리하였다. 안인포진安仁浦鎭 : 동남으로 20리에 있고 수군만호를 두었는데, 성종成宗 21년에 양양대포襄陽大浦로 옮겼다. 연곡포連谷浦ㆍ주문진注文津ㆍ오진梧津 : 남으로 90리에 있으며 이상 세 곳에는 척후斥候를 두었다.
창고 동창東倉 : 임계면臨溪面에 있다. 서창西倉 : 진부면珍富面에 있다. 우계창羽溪倉ㆍ연곡창連谷倉ㆍ대화창大和倉ㆍ내면창內面倉 : 1백30리에 있다.
토산 석이버섯ㆍ탱자ㆍ석종유石鍾乳ㆍ하수오何首烏 감자의 일종ㆍ참가사리ㆍ김.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 모두 오대산 상원암上元庵에 있는데, 선조 39년에 새로 인쇄한 사조실록思朝實錄을 이곳에 두었다. ○ 참봉 두 사람을 두었다.
묘전 집경전集慶殿 : 경주로부터 이곳으로 옮기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참봉 두 사람을 두었다. 인조 6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