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
하창식
교수로 부임한 지 38여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이번 2학기, 3학년과 4학년을 대상으로 두 과목 강의를 담당하였다. 코로나 19 상황으로 말미암아 1학기 때엔 대면 강의 대신 원격 수업을 진행하였다. 여름방학쯤 코로나 19 상황이 다소 진정되는 분위기가 되자 부분적으로는 대면 강의가 가능하다는 학교 방침이 전해졌다. 다만 감염 방지와 교수/학생 보호 차원에서 거리두기를 감안하여 강의실 수용 규모의 50% 이내 학생들의 수강만 허락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
이번 2학기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1982년 9월에 임용된 후 65세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학기가 아닌가? 그러니 마지막 학기 수업만큼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대면 수업을 진행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4학년 담당은 전공 선택 과목이었기에 학생 수를 30명 미만으로 제한하여 수강 신청을 받았다.
3학년 담당 과목의 경우에도 대면 수업을 간절히 원했으나, 교양 필수 과목인 탓으로 수강 인원이 50명을 초과하였다. 하지만 50% 이내 수강 원칙을 고려할 때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사용이 불가능하였다. 3학년 담당과목은 실습교육에 준하는 과목이라, 원격 수업과 대면 수업을 혼합하여 실시하기로 했다. 곧 이론 강의는 원격으로 실시하되 대면 수업은 조를 나눠 강의실 수용이 가능한 만큼의 인원만으로 제한하여 발표 수업을 진행하였다. 학생들 중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대부분의 강의가 원격 수업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부산 아닌 타지에 집이 있는 학생들은 내 과목만 대면 참석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30명 남짓 수강한 4학년 교과목 경우, 정말 심혈을 기울여 강의를 진행하였다. 지난 38년간의 어떤 수업보다 교재 준비에도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야말로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며 강의를 진행하였다. 12월 초, 드디어 마지막 강의가 끝났다. 학생들에겐 내 퇴임과 관련하여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지막 열정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를 진심 소망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다. 대학 강의 특성상, 한 학년 학생이 같은 교수의 수업을 연속 수강할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 4학년엔, 지난 3학년 1학기, 2학기, 4학년 1학기에 이어 네 학기에 걸쳐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 더 정이 가는 학생들이기도 했다. 마지막 수업을 끝낸 후 연구실에 돌아오니 그동안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4학년 강의를 끝낸 다음날 3학년 마지막 발표 수업을 진행하였다. 원격으로 이론 강의를 끝낸 후 중간고사를 치뤘다. 중간고사 기간 다음 주부터 조별로 발표 수업을 대면으로 진행하였다. 물론 발표가 끝난 조원들도 참석했지만, 사정상 참석하기 힘든 학생들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안내했기 때문에 강의실엔 기껏해야 이십 명 안팎의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마지막 조 학생들의 발표가 끝날 때 쯤 바깥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웬일로 이렇게 소란한가 싶었지만 수업중이라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그 발표에 대한 총평으로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총평을 끝내며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고 감사 인사를 하는 순간,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의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학과장 교수를 비롯하여 출장 중인 교수를 제외한 모든 후배 교수들, 내 연구실의 대학원생들, 학회장을 비롯한 몇몇 학과 간부 학생들, 어제 수업을 끝낸 4학년 학생 몇몇, 심지어 학과 조교들까지 강의실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칠판 위에 준비한 현수막을 걸었다. “교수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수막 아래 양쪽엔 “비대면 수업 종강”, “세상 대면 개강” 이란 문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학회장 학생과 학과장 교수가 축하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노란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 메모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액자를 내게 전해 주었다. 마지막 강의에 참석한 3학년 수강생 전원의 감사 인사말을 담은 것이었다. 아울러 강의실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스승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야말로 나의 마지막 강의를 축하해 주는 깜짝 파티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학과장 교수는 학생들에게 소감 한마디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울컥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모습을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38년 6개월의 교직 생활 중 다섯 분의 선배 교수들이 나보다 먼저 퇴임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동안 퇴임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이렇게 축하해 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기에, 당연히 내 마지막 강의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마무리하려고 했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후배 교수들에게도 그 전날까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그 깜짝 파티의 감동은 더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강의 시간과 수강 학생을 통해 학과장 교수가 마지막 강의 정보를 알아냈었나 보다. 3학년 마지막 강의 전, 학과장 교수의 귀띔을 받은 학회장과 내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현수막과 꽃다발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3학년 수강생들은 노란 하트 모양 포스트잇에 미리 감사의 인사말을 적어 학회장에게 보냈고 그것으로 액자를 만든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깜짝 파티를 준비해 준 학과장 교수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마지막 강의 축하식에 참석해 준 후배 교수들과 조교들, 학과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인생 헛산 건 아니었네‘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에 감동의 물결이 여울져 흘렀다. 연구실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마지막 강의에서 나를 울릴 뻔 했던 그 깜짝 파티의 감동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약력:
월간 『수필문학』 천료 등단 (2008),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 역임, 수필부산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작가회 부회장, 부산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 부산대학교 석학교수, 수필집 『와일드카드』, 『자서전 217쪽』 등.
왜요?
하창식
이제 막 초등학교 입학한 외손녀 이야기이다. 이른 하교 시간에 맞춰 저녁이 될 때까지 그냥 놀리기 무엇해서 미술 학원과 영어 학원에 보내고 있다. 원래 과외란 걸 좋아하지 않는데다 적어도 대학 졸업 때까지는 오랜 기간 공부에 시달려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학업에 시달려야하는 아이들이 가련하다. 학원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어린 시절 아니면 언제 놀이를 즐길 수 있겠냐는 생각이 많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우리 생각대로만 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웃들 중엔 아예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엄마들이 많다. 비용도 만만찮은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처질까 두려워서란다. 고학년이 되어 영어를 배우면 남들보다 많이 뒤처질 것 같아 딸아이와 상의 끝에 이제라도 영어 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집사람 혼자서 쌍둥이 둘의 오후 시간 동안 내내 아이들 돌보기도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두 군데 학원을 보내고 있다.
손녀들이 딱해 보였지만 아무튼 3월 둘째 주부터 영어 학원 수업이 시작되었다. 영어 기초반이다 보니 a부터 시작해서 알파벳 순서로 하루에 한 자씩 배우나 보다. 1시간 수업이다. 귀가 후 저녁을 먹고 나면 숙제를 해야 한다. 그날 배운 첫 글자의 알파벳이 같은 단어 4개 정도를 읽고 쓰는 숙제이다. 이를테면 a 경우 사과(apple), 도끼(axe), 개미(ant), 악어(alligator)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a와 b를 배울 때는 두 알파벳 발음과 우리말 발음(아, 또는 브)이 비슷해서 어려움이 없었는가 보다. 알파벳 c를 배우고 온 날, 4개의 기본 단어는 고양이(cat), 컵(cup), 차(car), 그리고 컴퓨터(computer)였다. 숙제를 하는데 두 손녀 중 한 손녀가 “왜요?”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진다. c는 ‘ㅅ’ 발음이 나는데 c가 들어가는 단어들은 왜 ‘ㅅ’ 발음이 아니라 ‘ㅋ’로 발음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다음날 d가 들어간 단어들, 곧 강아지 (dog), 의자(desk), 인형(doll), 오리(duck)를 배울 때는 오히려 더 쉽게 이해를 했다.
우리가 처음 영어를 어떻게 배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손녀의 그 “왜요?”라는 질문을 받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들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들에 대해 “왜?”라고 묻는 그 신선함, 그리고 순수함에 적이 감탄하였다. 물론 반강제적으로 그렇게 외워야 된다며 윽박질러(?) 겨우 d로 넘어가긴 했지만, 이런 교육방식이 과연 맞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별 생각 없이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신비로움과 의문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호기심과 순수함으로부터 아이들의 창의성이 계발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그런 일상의 소소한 사실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그런 강압적이고 주입식으로 지식을 축적해 온 우리 세대 어른들이 창의성이 부족한 이유 중의 하나가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훈련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연구년을 보내면서 함께 간 내 아이들을 미국 학교에 보낸 적이 있다. 우리 초중등 교육과는 적지 않게 다른 그들의 창의적 교육방식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경험을 언젠가 글로 발표한 바 있다. 세계 과학 올림피아드에서 줄곧 최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성적은 평균적으로 또래 미국 학생들에 비해 뛰어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수학 및 과학 성적은 미국 대학생들에게 뒤처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암기식, 주입식 교육방식이 단기간 성과에 효과적인 데 비해 자발적이며 창의적 교육방식은 장기간의 실력 향상에 효율적임을 시사한다.
비단 학교수업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겐 모든 것이 호기심 천국일 테다. 언젠가 우리나라 신호등 체계를 처음으로 접한 조카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국제결혼으로 캐나다에 살고 있던 이종사촌의 아이들이 사촌을 따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의 20년도 더 된 옛날이다. 초록, 빨강, 노랑, 그리고 좌회전 신호등이 공중에 떠서 긴 팔 지지대 아래로 줄줄이 매달려 있는 자기 나라와는 다른 신호등 체계가 무척 신기했나 보다. 공중에서 옆으로 나란히 매달려 있는 우리나라 신호등 체계를 보고 한 달 체재 기간 내내 궁금해 했다. “저렇게 옆으로 나란히 매달린 건 왜지요?”하고 바깥나들이를 할 때마다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무렴, d, e, f, k, s, t 등등, 그 알파벳을 포함한 단어들의 발음은 알파벳 발음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슘(cesium), 센터(center) 같이 ‘ㅅ’으로 발음되는 단어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왜 유독 c로 시작되는 단어들만 대부분 ‘ㅋ’로 발음될까?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12년간 영어를 배우고, 40년간 교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영어 교재를 읽고 영어 논문을 써왔지만, 평생 ‘ㅅ’으로 발음되는 c가 다른 알파벳과 달리 왜 ‘ㅋ’로 발음되는지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우리에게 손녀가 c를 배우면서 자못 진지하게 던지던, “왜요?”라는 질문은, 우리의 교육방식 문제는 물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손녀의 질문을 받으면서 나도 의문이 들었다. 왜 ‘c’가 들어가는 단어는 진짜 대부분 “ㅋ”로 발음되지? 라틴어 영향인가? 아무튼 나에게 언어의 근원에 대한 과제를 툭 던져 준 손녀가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첫댓글 회장님의 마지막 강의가 참 감동적입니다.
그동안 애쓰셨고 수고하셨습니다.
노란 포스트잇의 감사를 드립니다.
국장님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 가슴이 뭉클 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마지막 강의 제자들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손녀이 왜! 가 우리 교육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늦게 댓글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