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 사람들
서동근
골목길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른 아이 어우러진 웃음소리가 정겹다. 맑고 쾌청한 날 청주시 문화진흥재단이 주최하는 ‘집 대성동’ 나들이에 나섰다. 우암산과 당산 사이에 있는 대성동은 서쪽이 탁 트인 작고 아담한 동네이다. 도심은 온통 높은 빌딩과 아파트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이곳은 옛 모습 그대로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500년 역사를 품고 지역을 지켜온 향교가 있고 충북도청 관사로 쓰던 건물은 현재 청소년 문화원으로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랜만에 골목길을 걸어 본다.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잠시 자취 생활을 했다. 시골집을 떠나 도심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누님과 고등학생인 형의 자취방에 합류했다. 시골 생활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도시는 신세계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펐지만 다양한 문화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새로 접하는 환경과 경험들로 나도 이제 어엿한 청주 시민임을 자부했다.
학교에서 귀가 할 때면 여러 곳을 지나친다. 시장은 사람들의 북적임 속에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옷가게, 정육점, 건어물가게, 선술집 등 오가는 사람들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재밌다. 철공소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 제재소의 나무 켜는 소리 여러 소리가 어우러진 소음이 오히려 경쾌하다.
골목은 마치 미로 같다. 쭉 뻗은 일자 도로가 없다. 집 모퉁이를 돌 때마다 꺾고 꺾기를 반복한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각기 다른 소리가 있다. 개 짖는 소리, 풍금 치는 소리 아이의 자지러진 웃음소리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담을 넘나든다. 오가며 모르는 사람도 한결같은 이웃이고 서로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나는 밤이 좋았다. 전화국에서 늦은 시간 야근하고 돌아오는 누님이 사오는 ,향미집, 야키 만두는 어쩌다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간식이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늦은 밤 졸린 눈을 끔벅이며 시험공부라도 할 때면 골목에서 들려오는 ,찹쌀떡 메밀묵, 소리가 귀를 번쩍 뜨이게 한다. 실눈으로 흘낏 누님을 쳐다본다. 애써 눈을 피하려 하지만 감출 듯 웃는 누님의 미소는 천사의 얼굴 같았다.
옛날의 영화도 세월을 비켜갈 수 없나보다. 도청을 한 눈에 굽어보며 우암산 자락의 정기를 품고 있던 대성동도 점점 쇠퇴해 간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도로가 뚫리고 건물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보다 빠르고 편리한 효율을 쫒는다. 마을은 이제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았다. 명절 때나 특별한 향교 행사 때가 아니면 사람들 발길이 뚝 끊긴다. 정적만이 감돈다.
모처럼 골목에 생기가 돌았다. 가로수 나뭇잎도 산자락을 물들인 단풍잎도 형형색색 오색 물감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어찌 사람들이 피워내는 웃음꽃만 하랴. 가을 햇살이 따사한 골목길에 평상이 펼쳐졌다. 할머니들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수 전도 부쳐 내시고 고구마, 뻥튀기, 서랍속의 알사탕까지 아낌없이 내 놓는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을 챙기듯 웃음꽃이 핀다. 아이들도 덩달아 신바람이 났다. 길바닥에 금을 긋고 사방치기 하는 아이 딱지치기, 공기놀이 등 집에서 하던 p. c게임과는 다른 새로운 놀이에 호기심과 재미를 느끼나 보다. 어른들도 오랫동안 묻혀있던 동심이 발동하여 아이들과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티격태격 양보가 없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를 맡는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집들 사이로 길이 있다. 그 길엔 비단 사람만 다니는 길은 아니다. 인정이 오갔고 바람이 통했으며 개나 고양이도 다니는 길이다. 때로는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웃음을 전했으며 희망을 꿈꾸던 길이다. 오래도록 숨 고르던 대성동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에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많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뜻있는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작은 음악회, 마당극, 전시회 등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내와 천천히 걸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동네 맨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 좋은 집에 올랐다. 청주 도심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침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여 장관이다. 누가 석양을 지는 해라 하는가? 저녁 하늘을 물들인 빛이다. 사라짐, 쇠퇴, 소멸이 아닌 하루 끝자락의 여유이고 쉼이다. 새롭게 충전하는 휴식의 시간이다. 내일의 기약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추억은 과거 경험의 산물이다. 다양한 경험과 시. 공간이 쌓여 오늘을 이룬다. 너무 쉽게 과거를 잊고 앞만 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빛만 보고 뛰어 드는 불나방처럼 현실의 욕망을 쫓아 나를 돌아 볼 여유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골목에는 해가 저무는지도 모르는 채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 웃음소리가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본다. 대성동의 가을밤은 시나브로 익어가고 있다. 더불어 나도 천천히 익어 갔으면 좋겠다.
첫댓글 골목 묘사가 풍성합니다.
깔끔한 문장들이 글을 단번에 읽게 하는 힘을 주네요. 옛생각 떠올리며 잘 읽었습니다.
멋진 글입니다. 저도 덩달아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추억어린 향수에 젖어 봅니다.
글을 읽었는데 동요 고향의 봄 가사가 떠오릅니다.
"그 속에서 놀더언 때가 그립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서선생님 덕분에 시간여행을 하네요
겨울 밤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찹싸알떠억 메미일무욱 골목마다 떠들썩한 아이들 소리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보이는 듯 들리는 듯 합니다
대성동에서 혹시 무슨 행사가 있었나요? 알았으면 열일 제쳐놓고 쫓아갔을 텐데...
대성동 골목은 제가 어릴 때 놀던 곳입니다. 향교 마당은 우리들의 놀이터였지요. 내가 살던 집은 폐가가 되어 흉물스럽게 남아있답니다. ㅠㅠ
봄이면 도지사관사 진입로에 개나리가 울창했고 가을이면 플라타너스 잎을 주워모으는 재미에 푹 빠졌었지요.
지금도 가끔 혼자서 가보는 곳인데 이렇게 수필로 저의 추억을 소환해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