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세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홍제천 넓은 바위 위에 서있다. '세검'이란 이름은 1623년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을 폐위하고자 인조반정을 모의하며 '검을 씻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곳 세검정에서 초고 종이를 씻는 '세초' 작업을 했다고 한다. 조선 실록 편찬이 완성되면 사초, 초고에 썼던 종이를 홍제천 시냇물에 씻어서 먹물을 빼고 넓은 바위 차일암 위에 말려서 재활용했다. 북한산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 홍제천과 차일암 넓고 평평한 바위는 '자연 파쇄기'였던 셈이다. 실록 문서의 기밀을 씻어서 지워 없애고 부족한 종이 물자를 재사용했다는 점에서 지혜가 보인다. 세초를 할 때는 세초연이라는 잔치를 벌여 실록을 편찬한 선비들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세초 작업을 했다던 그 차일암, 세검정에 오늘 오후에 다녀왔다.(서울 체류 첫째 날) 다닥다닥 인접한 건물들에 둘러싸였으나 홍제천과 차일암과 세검정은 그자리에 건재했다. 눈에 보이는 현대 건물들을 마음 속으로 모두 지우고 실록 초고에 쓰인 종이를 물에 씻어 먹물을 빼고 바위에 널어 말리는 장관을 상상해보았다. 홍제천 깨끗한 물에 검은 먹물이 섞이는 모습, 종이를 맞잡고 평평한 바위 위에 펴는 모습, 약한 햇볕과 순한 바람에 말리는 모습, 다 마른 종이를 걷어 정리하는 모습, 실록청 선비들이 술상을 차려놓고 즐기는 모습이 떠올랐다. 컴퓨터 파일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현대의 편이성과는 거리가 먼, 종이와 먹을 쓰고 일일이 씻어내고 말리는 노동을 거친 후 완성되는 옛 기록 문화에는 오늘날과 비견할 수 없는 고유한 멋과 품격이 있는 것 같다.
첫댓글 서울 계시나봅니다.
덕분에 씻어서 말리는 등속의 장면이 스쳐지나갑니다.
좋은 역사 강의 한 편 읽습니다.
예. 인접한 현대 건물들이 유적지의 풍광을 방해할 때는 상상의 눈으로 지우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