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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賢 遺蹟地 巡禮
퇴계학 부산연구원의 연례행사로 유교단체인 퇴계학. 박약회. 담수회와 함께 3개 단체가 올해는 충남지역 현충사 맹사성 고댁 의암 민속마을 추사 김정희 고댁 충의사(윤봉길의사 기념관) 수덕사 새만금 방조제 이렇게 정하고 2010년 5월 19일 08:00 부산을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1. 현충사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1704년 충청도 유생들의 건의로 1706년 사당을 건립하고 1707년에 숙종임금이 현충사란 현판을 하사했다. 그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을 겸하고 있어서 철폐되었다. 일제시대 폐허가 된 것을 민족 지사들이 성금을 모아 1932년 6월 5일 현충사를 중건했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곳을 성역화하고 영역을 확장하고 고택을 정비 중건 하고 본전과 유물 전시관등 건조물을 세우고 조경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너무나 경내가 넓어 다보지 못하고 본전에서 참배하고 서명록에 서명하고 내려와서 고택을 둘러보았다. 500년이 넘은 옛 건물이지만 잘 보존 되어 있고 그 옛날 가족들이 사용하던 우물터의 맑은 물은 5백년 세월이 흘렀것만 너무나 맑고 물맛이 좋다.
이순신 장군은 전 국민들이 추앙하는 장군으로 임진왜란때 전라 좌수사로 남해안을 담당하여 왜선의 침노를 수없이 격파시킨 장군으로 왜적의 상륙을 막아내어 호남의 곡창을 지켰다. 이 큰 공을 시기한 원균의 모함으로 죄없는 죄인으로 조정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고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명량 해협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순국 하면서 까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왜적과 싸우라는 독려로 왜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매년 4월 28일은 현충사에서 나라에서 주관하여 충무공을 추모하는 제전을 올리고있다.
2. 맹사성 고택 맹사성 고택을 사적 19호로 지정되어 맹씨행단 이라 고도한다. 고택답게 입구에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포기가 이 고택의 오랜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댁 고택은 맹사성 아버지가 정난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 은거했으며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자사위다. 수백년간 여러 차례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당시에 심었던 큰 나무들이 고택의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유물 전시실에는 맹사성 선생이 남긴 서책과 많은 글씨 그림과 유품들을 돌아보면서 가계도가 크게 걸려있어 자세히 보니 선대의 조상이 맹자로 중국의 성씨로 귀화한 성씨다. 맹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좋은 환경을 찾아 3번이나 이사 했다는 유명한 말이 지금도 전해오지 않은가 (맹모 3천지교) 세계적인 명문가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구나 맹사성은 고려 때 (1359-1438)에서 조선조 세종때 까지 호는 고불 시호는 문정 본관은 신창이다. 10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시모 살이 한 효자로 효자문이 세워져있다. 세종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청렴결백한 공복으로 음율을 좋아했다. 아버지 맹희도 가 포은 정몽주와 동갑으로 포은이 희생당하자 한산으로 숨어들어 살았다.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여 태조 때 정려되고 삼강실록에 효로 실려있다.
영조때 (1756) 정절을 기려 忠孝世業淸白家聲이란 賜額을 내렸다.
3 외암 민속마을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자료 236호로 지정되어있다. 외암 민속마을은 예안이씨 집성촌으로 조선조 선조때 부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양반 마을이다. 성리학의 대학자인 이간 선생의 호도 마을 이름을 따서 외암 선생 이라한다. 이 마을은 고옥 격식을 잘가춘 마을로 기와집 초가집 담장등 생활모습이 옛날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다. 외암 민속마을 관람하고 온양시내로 나와 미리 예약한 청주 온천 호탤로 가서 각자 배당된 방에 여장은 풀고 식당으로 가서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자유 시간에 들어갔다. 호탤 방에서 피로를 풀고 22:00에 잠자리에 들었다. 4 20일 아침 05:30분부터 온천욕을 하고 온천수가 너무 뜨거워 탕에도 못들어 가고 사워만하고 나와서 각자 방으로 가서 소지품을 가지고 내려와서 08:00부터 아침 식사를 하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을 향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추사체를 남긴 서예대가로 벼슬로는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이나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도 유배 시에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심어 밖으로 못 나가도록 위리안치라는 형벌을 받고 유배생활을 했다. 선생은 경학 사학 금석학 문자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식한 지식인으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문도 고증하고 높은 학문으로 시 서 그림 전각 등에 뛰어나고 글에서도 추사체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루었다. 국보 세한도는 제주도에서 유배 살이 할때 제자 우선 이상적이 연경(북경)에서 서적을 구해다 주는등 온갖 정성으로 돌보아주는 사제의 정으로 그려준 세한도가 완당 최고의 명작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추사의 고택은 1700년대 증조부 김한신이 건립한 사대부가의 큰집으로 추사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였다. 선생이 공부하던 방에는 선생이 쓰신 추사체로 병풍을 만들어 세우고 공부하시던 당시의 모형을 만들어 관람객들을 보게한다. 관람객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기둥마다 추사체로 쓴 주련이 걸려있다. 문간체 사랑체 안체등 많은 건물들이 옛 영화를 알려 주는 것 같다. 넓은 경내에는 묘소도 있고 근래에 건축한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추사선생의 유품들이 잘 진열 되어있다. 경내 조경이 잘되어 공원같이 아름답다. 안내자 없이 갔으니 한가지 못보고 온것이 있어 아쉽다. 추사선생이 25살 때 아버지 따라 연경(북경)에 갔을 때 솔씨를 얻어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는데 이소나무가 천연기념물 백송이라한다 나는 백송은 밀양에서 보았기에 상상 할수 있다. 잎은 솔잎인데 나무 가지와 몸둥이 껍질이 소나무 껍질이 아니고 부드러운 잡목같이 좀 희다.
5 충의사 (윤봉길 의사기념관) 충의사는 1968년 윤봉길 의사의 위업을 길이기 위해 후세에 길이 보존하고자 건립했다. 기념관에는 유물 58점이 보물 568호로 지정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인 4월 29일을 전후해서 문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생가인 광현당과 농촌 부흥 운동을 하고 야학회를 열고 독서회를 열던 부흥원이다. 윤봉길 선생은 파평 윤씨로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고 일제 교육을 배격하고 자퇴했다. 그후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21년부터 성주록의 오하서숙에서 사서삼경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을 마치고 농촌 부흥에 전력을 다 바쳤다. 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를 창립하고 운영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30년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글을 남기고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다 일경에 잡혀 45일간 구류 되었다 풀려 나와. 중국 대련을 거쳐 청도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다가 상해로 가서 안공근 집에 숙소를 정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다가 김구선생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이 한몸 바치겠다고 각오를 호소했다. 32년 이봉창의 일황 폭살에 실패하자 일본은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중국과의 싸움에서 일본이 이기자 일본은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 기념회를 연다는 것을 알고 김구선생의 주관하에 김홍일 장군이 만들어준 폭탄을 가지고 한참 식이 진행 될때 윤봉길 의사가 연단을 향하여 폭탄을 던졌다. 일본군 사령관과 상해거류 민단장이 폭사하고 많은 일본군 장성들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잡혀 군사재판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6 수덕사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다. 창건 년대는 정확하게 모르나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등으로 보아 백제시대 건립되어 현대까지 여러번 중수된 기록이 있고 선종의 수도장 이라 한다. 1308년에 준공된 대웅전은 국보 49호로 정면3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경사진 지형에 계단식으로 대웅전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건물이 배치되어있다. 전시관에는 많은 유물이 보관 전시 되어있는데 특히 관세음보살 탱화가 많다 그중에도 고려불화로 유명한 수월관음보살도를 재현 했는데 어떻게나 큰지 바로세우지 못하고 4.50도 정도로 누운 상태다 이 보살도를 그리는데 2년 걸렸다고 하니 가히 그 크기와 정교함을 짐작 할것 같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많은 연등이 걸려있고 준비에 한창 바쁘다. 수덕사 관람을 마치고 내려와서 상가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세만금 방조제를 향해 1시간 30여분 넓고 넓은 호남평야를 달렸다.
7 새만금 방조제 19년에 걸친 국가적이 대역사 끝에 방조제가 완공되어 일반 시민들이 갈수 있는 방조제 도로가 생겼다. 방조제의 길이가 39km 폭이 300m 도로의 끝이 안보인다. 세계에서 제일 큰 방조제라고 하니 차로 달리면서 바다 쪽이야 산이 없으니 바다만 보이지만 육지 호수 쪽을 보아도 얼마나 넓은지 산이 안보인다. 백리길 먼-길이다. 중간에오니 전만대가 있어 내려서 사방을 구경했지만 섬 말고는 산이 안보이니 얼마나 넓은지를 상상하리라 이 호수를 매립 한다고 하니 어디서 그 많은 토사를 운반해 올까? 상상이 안간다. 우리나라의 토목기술 정말 놀랐다. 다시 출발하여 수문이 2곳 있는데 중간 수문에 내려 수문을 구경하는데 그 거대함에 놀랐다. 설물 시간인가 수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 물 흐름이 강에 대홍수가 나서 빠른 속도로 흘러 가는것 같다.
유속이 빠르고 요동치는 물결의 거대한 움직임에 인공인가 무슨 신의 힘인가 머리가 멍멍해진다. 이공사가 끝나는 날에는 우리국토의 지도가 바뀌겠고 그 넓은 땅을 잘 이용하여 이 나라의 경제가 크게 향상되어 국부가 크게 향상 될 것 같다. 방조제 구경을 마치고 17:00부터 귀가길에 올라 어디인지 모를 내륙 고속도로 로 달려오다 보니 마이산도 보이고 어디인지 알수 없는 도로를 수 시간 달려오니 진주가 나온다 그래도 쉬지 않고 진영까지 와서 국수로 요기를 하고 부산에 도착하니 22:00다 아로써 이번 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귀가했다. |
첫댓글 선생님 내려 주신 귀한 옥고 감사합니다
선인들이 사셨던 고택과 유적지를 순례하고 왔습니다 더운날 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