師問 南泉 知有底人 向什麽處去 泉云 山前檀越家 作一頭水牯牛去 師云 謝和尙指示 泉云 作夜三更月到窓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물었다.
“있음有을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저 산 아래 시주 집에 한 마리 물소水牯牛가 된다.”
“화상께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대사가 말했다.
“엊저녁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었다.”
“있음有을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있음有을 아는 사람’이란 곧 '없음無을 아는 사람'이고, 이 깨달음의 일, 곧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중도中道를 꿰뚫어 본 사람을 일컫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곧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空이요, 공은 곧 존재의 바탕이니, 모든 존재는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 눈에 보이는 바로는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어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선禪의 기초로서 서서히 눈으로, 귀로 익혀 나가야 한다.
여하튼 중도를 아는,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데, 남전대사는 '산 아래 시주 집의 한 마리 물소水牯牛가 된다'고 말한다. 문수,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 한산과 습득이 이빨을 갈며 암소 흉내를 내는 격이다. 수고우水牯牛는 보통 덥고 물이 풍부한 곳에서 기르는 물소로서, 중국 남부지방, 동남아 등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우리나라는 풍토가 맞지 않아 키우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남전대사는 도인道人은 실제로 죽어서 암소가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까?
선禪은 본질상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다고 하므로, 혹시 남전이 나중에 죽어 물소가 되어 여태까지 시주한 집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허물은 없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하다간 선사들의 몽둥이세례를 받기 십상이다.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라면 '산 아래 시주 집'이란 우리 마음을 뜻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그러면 뒷말은 우리 마음에 한 마리의 물소, 곧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들어섰다, 즉 반야 지혜의 깨달음이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선사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선사로 대변되는, 중국 선종 5가 가운데 하나인 위앙종의 문을 연 위산선사도 이 수고우를 소재로 하여 설한 바가 있다. 위산이 어느 날 법당에 올라 설하기를, “노승老僧이 백 년 후, 산 아랫마을의 시주 집에 한 마리 수고우가 되어 있으리니, 왼쪽 옆구리에 다섯 자를 쓰되 ‘위산승 아무개潙山僧某甲’라 하겠다. 그때를 당해서 이 위산승潙山僧을 수고우라 부르겠느냐, 수고우를 위산승이라 부르겠느냐? 필경에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 하자, 앙산선사가 나와서 예배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위산선사가 앞으로 백 년이 지난 뒤에 물소로 태어나겠다고 다짐하고, 그 물소 옆구리에는 '위산승 아무개' 라고 찍혀 있을 것이라고 하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실제 그렇게 태어났는지 확인해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위산이 그렇게 태어날 경우 그 수고우를 위산승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 법문은 지금의 나는 위산이 아니고 이름을 위산이라 할 뿐이고, 미래의 물소도 물소가 아니라 이름을 물소라 할 뿐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내가 없다는 무아 無我의 눈으로 보면 현재 보이는 모습은 본질상 전혀 그 실제 모습이 아니고 거짓된 모습이란 뜻이다. 백 년 후에 위산이 물소가 되어 있을 때 그 물소를 어찌 다만 물소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렇다고 위산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는가?
위 위산의 법문에 대답을 해본다면 '사위는 백 년 원수이다.'라고 하겠다. 옛날에는 딸의 남편인 사위가 너무 사랑스러워 백년 손님이라 했는데, 요즘은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장모도 사위를 원수처럼 바라본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말의 뜻을 알아채면 위산선사의 말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또한 앙산선사가 나와 예배하고 물러난 뜻도 드러날 것이다.
위 문답에서 조주도 스승의 뜻을 알고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리는데, 남전선사는 '엊저녁 한밤중에 달이 창을 비추었다'라는 서정시 같은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아마도 남전선사가 보기에 제자인 조주의 수행 경지가 나날이 깊이를 더하여 조주의 마음의 창窓에 밝은 달이 휘영청 솟아올라 천지를 비출 때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했을 것이다. 즉, 조주의 자성自性이 열매를 맺어 원숙해지는 경지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출처:신본지풍광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swc9105/80190806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