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내엔
우리 동네 앞엔 맑은 개울이 있다. 곧게 뻗어 자라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내라 부른다. 냇가 둔치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며 내와 동화되어 생활한다. 그 내는 쇠백로 한 마리가 주인이다. 지난 해 봄. 여러 놈이 찾아와 여름을 나고 가을 오자 떠났는데 못생긴 쇠백로 한 놈은 낙오자가 되어 차가운 개울을 지켰다.
윤기 날아가 버린 흰털은 우중충하고 뒤통수에 매달린 댕기머리도 힘없이 축 처져 있다. 서리병아리처럼 힘없는 날개를 엉벌려 엉거주춤 서서 벌벌거리는 모양이 가여웠다.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걱정 되어 날마다 지켜보게 되었다.
어떤 땐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데도 한 시간여 전에 보았던 그 자세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을 기색이다. 먹이도 시원찮은지라 헛되이 힘을 쓰지 않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그러나 잠시 들린 겨울새 오리들은 사람들 오가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꽥꽥 소리치며 퍼덕이는 놈, 빙빙 돌아다니는 놈, 연신 물구나무서기로 먹이를 찾는 놈들은 모두가 활기 넘치고 있다.
처음엔 내 가운데의 갈대 섬 주위에서 놀던 오리들이 사람들과 친숙해지자 냇가까지 찾아든다. 어떤 놈들은 코앞에까지 다가가도 여유 만만하다가 갑자기 푸드덕 날아올라 깜짝 놀라게도 한다.
크고 작은 오리들 찾아와 아이 어른 반기며 구경하는 재미 더하여 냇가 둔치길 산책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들 발길을 잡아두는데 조심성 많은 쇠백로는 먼발치 물속에서 불안하다.
냇물은 말라 좁아진 터에 오리들이 심란하게 바닥을 휘젓고 다니니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물고기를 찾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가끔은 물속을 거닐며 머리를 갸웃갸웃 거리다 날개 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간신히 물고기를 쪼아 목을 길게 늘려 삼키곤 했다.
앞산 까치들이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더니 냇바닥 돌밭에 떼 지어 내려와 깍깍 짖어대며 이리 폴짝 저리 폴짝 짝짓기 행사가 요란하다. 냇둑의 능수버들 가지 끝이 푸릇해지더니 양달엔 냉이 쑥이 파릇하고 꽃다지 국수뎅이가 쬐끄만 꽃눈을 밀어 올린다.
둔치의 축구장 족구장 농구대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 쿵쿵 내닫고 소리치며 봄을 재촉한다. 햇살 따사로이 내려앉은 누런 잔디밭엔 젊은 청춘들의 사랑에 겨운 눈빛이 뜨겁다. 남을 의식 않고 기대앉은 모양이 예쁘다.
몇 해 전. 장마를 대비한다며 땅 미는 차가 냇바닥을 논배미처럼 평평하게 골랐다. 검정말 말즘 붕어마름 따위 수초와 냇바닥 섬에서 자라던 어린 갯버들과 갈대숲이 짓뭉개졌다. 물길 없어진 냇바닥엔 피라미가 팔딱이고 백로들이 덥석덥석 집어먹는 것을 보았다.
냇바닥에 쌓인 흙을 파내지 않으려면 파헤치지 말라고 관계기관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그 후론 냇바닥을 정리하는 일이 없더니 물길 열리어 섬들이 생기고 언덕 만들어져 여뀌 방동사니 소리쟁이 지칭개 갯버들 따위의 크고 작은 풀들이 자리했다. 생명력 강한 갈대는 빈자리 없이 뻗어나가 뿌리박더니 싹 곧게 세워 청정한 갈대밭을 이루었다.
장마가 만든 깊고 낮은 물길엔 물고기들이 모여들고 철새들도 많이 찾아 한 계절을 나곤 간다. 어떤 놈들은 갈대숲에 둥지를 틀어 새끼를 쳐서 기르기도 했다.
버드내 옆 오량산엔 새들의 사랑의 노래가 한창이다. 먹이를 찾을 때 위험을 알릴 때 사랑을 나눌 때 그 빛깔을 달리하는 음색은 인간들의 그 것에 비해 음악적 예술성이 뛰어나다.
터줏대감 까치들의 사랑싸움이 시끄럽더니 질세라 직박구리 놈들의 목청은 더 요란하다. 아카시아 향기에 묻어 온 뻐꾸기가 굴참나무 꼭대기에서 꽁지를 깝죽대며 울어댄다. 한 발 늦게 찾아온 노란 꾀꼬리는 가지가지 색으로 목청을 뽐내며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사일 잘도 날아다닌다. 두 발 늦은 파랑샌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개개거리며 신고하더니 까치가 버린 둥지를 차지한다.
날 더워지자 겨울 철새들 떠나 쇠백로 혼자 냇갈 지키는 줄 알았는데 물오리 서너 마리가 가끔 눈에 띈다. 쇠백로처럼 허약해서 고향으로 못 날아가진 않은 듯 한데 말이다. 한 동안 보이지 않다가도 어떤 날엔 물살을 가르곤 했다. 기후의 변화 탓인지 철새들이 철을 잊고 눌러 사는 놈들이 늘고 있다.
봄볕 깊어지고 냇물이 불어나자 깊은 곳에 모여 있던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어 여울목을 오르내리며 활기차다. 쇠백로 활동폭도 고기들 따라 넓어졌다.
한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고집스럽게 서있어 지켜보는 이를 지루하게 하던 놈이 목을 길게 세워 성큼성큼 걷다간 배의 깃털이 물에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두리번거리며 물고기를 찾는데 열중이다.
물 속 돌멩이를 툭툭 발길로 건드려보는가 하면 냇바닥을 쿵쿵 구르기도 하다가 날갤 펴고 이리 저리 물위를 낮게 날아 물고기를 쫓고 몰아내어 사냥하는 영특함에 넋을 빼앗겨 한동안씩 바라본다.
쇠백로 혼자 지키던 냇가엔 백로 왜가리 한 마리 두 마리 날아들어 이곳저곳에 자리한다. 쇠백로의 외로움은 덜하겠으나 먹이 경쟁은 치열해졌다.
해갈도 안 되는 봄비가 한 두 차례 가늘게 온 뒤 한 달여 가물고 있다. 매년 거르지 않는 봄 가뭄이 올해도 시작이다. 해가 높아가고 열기는 불끈대며 봄을 몰아낸다.
냇바닥 누런 갈대밭엔 억센 싹들이 물길 말라버린 냇바닥까지 기운차게 뻗어댄다. 마디마다 뿌리 내려 쏙쏙 솟아오른 갈대대공들이 빽빽하게 어우러져 묵은 갈대 누런빛을 얼른 덮어버린다.
개나리 진달래가 화들짝 피어 놀라게 하더니 벚꽃 우르르 몰려와 남녀노소 가림 없이 가슴가슴 쥐어뜯어 뒤흔들어 놓곤 휑하니 가버린다. 봄바람의 충동질엔 고목도 움찔 깨어나거늘 봄바람에 상처 깊다한들 누가 피할 손가. 잔인한 달 4월이 화사함을 마냥 뽐낼 것 같더니 화무십일홍이라 한 순간에 무너진다. 아! 맨몸으로 나아가 맞은 그 생채길 어이할꼬?
볼품없던 쇠백로의 깃에 윤기 오르고 길게 뽑아 세운 목은 기웃기웃 분주하다. 벚나무 오리나무 굴피나무 참나무 어린잎들이 한 낮 더운 기운에 몽땅 피더니 꽃 허물어진 생채길 신록으로 얼른 감싸 안는다.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의 사랑 놀음으로 냇가는 시끌하다. 특히 진홍색으로 치장한 간다리(피라미 수놈)놈들의 짝짓긴 유별나다. 안상무인(眼下無人)이라 지켜보는 날 완전무시하고 현란한 몸놀림으로 암놈을 짓누른다. 강제 집단 성폭력이 난무한다.
냇바닥의 돌들이 드러나게 냇물이 마르고 있다. 물길이 좁아지자 먼발치에서 사냥하던 백로들은 물고기를 따라 코앞에까지 덤벼들어 이리 뛰고 저리 날며 어렵지 않게 물고기들을 쪼아낸다.
냇물 쫄아들어도 피라미들 산란은 쉼이 없다. 간다리들 물 텀벙 이는 소리 더욱 요란한데 백로들 떼거리로 달려들어 잔치를 벌인다.
“허-이, 허-이!”
팔을 휘휘 내저어 백로를 쫓아내는 할아버지. 물괴기 다잡아먹는다며 돌멩이와 수초 모아 보의 물구멍을 막으며 물을 가두려 애쓰신다.
“내가 이 동래에 사는디 이렇게 말느긴 평상 처으며”
보 막아 물 모으고 논배미 물꼬 높게 낮게 매만지며 이웃 논도 돌보시던 어르신을 만났다. 소나기 올 땐 거름기 섞인 흙탕물이 아까워 논으로 몰아넣고 네 논 내 논 없이 논두렁 구멍 막으며 물을 아끼던 허리 굽은 우리의 할아버지시다.
오량산 그림자 내리자 파란 잔디밭엔 사람들 하얗다. 삼겹살 타는 냄새가 시장기를 몰고 온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들과 어울려 쇠주가 연신 돌아간다. 배드민턴 셔틀콕을 쳐 올리는 젊은이들, 웃통을 벗은 아저씨, 다슬기 줍는 아주머니, 멱 감는 아이들, 낚싯대 펼친 강태공 모두가 한가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고마움보단 생업에 불편함만 따지는 도시인들. 쇠백로 먹이 사냥이 흥미 있을 뿐 타들어 가는 농민 맘 몰라라다. 작년엔 백년만의 폭설이 농민들 마음 짓누르더니 올핸 봄 가뭄이 그 맘을 태우는 줄 알기나 할까?
소리내기 어렵고 낯선 따불유티오가 애프티에이가 순박한 농민할아버지들을 화나게 해 과수밭을 갈아엎고 모낸 논 트랙터로 뭉개도, 몸을 불살라도 멀거니 바라볼 뿐 감정이 없다.
오랜만에 봇둑 넘치게 비가 왔다. 갱변 풀들 싱싱 자라고 그 속에 어린 곤충들 날로 살 오른다. 물속 피라미 모래무지 참종개 돌고기 새끼들이 반반하게 깔려 반짝반짝 활기차다.
이번 비로 풍성해진 산 속, 풀 속, 물 속, 하늘 속. 그 속만큼 세상 속 살림도 인심도 넉넉해 지거라. 여름나려 찾은 백로가, 겨울나려 들른 오리가 눌러 앉았다. 인연 먼 두 놈이 버드내 터줏대감 자릴 놓고 다툼이나 했음. 물신에 붙잡힌 초조한 맘 옹졸한 행동거지 잊게 시리.
버드내 여울 곳곳엔 백로가 지키고 오리들이 그 사일 오르내리며 훼방을 하지만 소 닭 보듯 싸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