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혹은 시간 때우기의 일환으로 고려사에 도전해보았는데 생각보다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은 드라마 몰 빵입니다.
드라마 '무인(mbc, 2012)'을 1-20회까지는 숨도 안 쉬고 보았는데, 21회
부터 김 준(김 주혁)과 최 송이(김 규리)의 러브라인이 실종되면서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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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타임입니다. 머릿속에 기억들이 날아가 버릴까봐 기억을 기록한
생각입니다. 고려사는 34대, 474년이니 조선왕조500년과 비슷합니다.
신라의 천년은 대단한 일입니다. 고려는 성리학이라는 유교 이념이 자리
잡기 전까지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였습니다. 왕건은 29명의 호족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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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정략결혼을 하였어요. 물론 당시 호족은 독립적 세력이었습니다.
고려 초기는 조선처럼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지방을 다스리는 중국의 제후국 같은 위치의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어요.
고려는 강력한 왕권 국가가 아니었고 유연하면서도 자주적인 나라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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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동생을 왕비로 맞이하고 사촌과 결혼 하는 등 혼인에서도 족내혼이
성행했으니 말입니다. 고려가 외교면 에서는 고조선부터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실리와 자주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역대 최고로 봅니다.
'서 희' 외교 담판으로 동북9성을 얻었고 거란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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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송나라와 소원해지지만 곧 정상화 돼요. 윤관이 여진족을 칠 때
부족장들을 불러 술에 취하게 한 뒤 그들을 치는 모습은 통쾌했어요.
송나라가 고려에게 거란을 함께 치자고 할 때도 단칼에 중립외교를 펼친
것도 맘에 듭니다. 거란의 3차례의 침략 동안 피난을 하면서도 잡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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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생명력이나 몽골에 7차례 30년 동안 결사항전 하는 것, 우 왕 때
명나라를 치러 5만의 군사를 출병 시킨 것들은 존경할 만한 것들입니다.
고려의 왕위 계승은 부자 승계 보다 오히려 동생에게 물려주는 모습이 많아요.
무신정권100년 억눌려 왔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무신 중에 최 충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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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카리스마 있었어요. 고려는 역을 세습했어요. 과거제도도 광종 때
만들어졌지만 음서가 대부분으로 아버지 잘 만나면 그냥 아무 걱정 없이
관직에 올랐어요. 사찰에는 승군들이 한몫을 했습니다. 이 의방 죽일 때도
스님이 등장해요. 무신 집권기에는 민란이 10년간 75회가 발발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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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세금 착취에 따른 농민 반란입니다. 세금은 몽골에 바칠 진상품
때문입니다. 세금착취에 대한 농민반란으로 망이 만소 이의 ‘명학소의 난’
을 일으켰고 만적은 노비해방운동을 벌이다 죽습니다. 당시 화폐는 쌀로
생필품과 교환했을 것입니다. 군역은 60세까지이었어요. 몽고 칭기스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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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때 고려가 힘들었고 그후 테빌리칸까지 100년간 속국을 살게 됩니다.
속칭 부마국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황실이나 원종이후로 충렬왕
부터 왕의 휘호에 '충'자를 붙여야했어요. 이때 생겨난 '고려장'은 선조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제가 확인한 최토의 보릿고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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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 왕이 등극하고 신돈의 자식이라며 쫓겨나긴 했지만
나름대로 여성들의 재가에 자유가 있었고 학자들은 남녀의 지위가 거의
평등했다고 봅니다. 왕도 재가한 여성과 결혼을 합니다. 4대 광종-17대
이종까지 170년을 암흑기로 덮어놓고 18대 의종부터 24대 원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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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년의 히스토리를 펼쳐보게 된 것은 큰 수확입니다. 남은200년의 역사를
펼쳐볼 행운을 기대하면서 긴긴 기다림의 시간을 '무인(mbc)' '무인시대(kbs)'
와 함께 보내게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대 태조(918-943)
신라의 문무 왕에 이어서 2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한 왕 건은 골품제를
유지해서 백제의 지배층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 신라와 다르게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왕권 안정을 위한 호족 포섭을 위해 29명의 아내를 거느렸습니다.
2대 혜 종(943-945)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침입했던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10대 어린
나이부터 왕권을 따라서 전장을 누빌 정도로 강인한 모습을 보였지만
심성이 착해서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다가 암살의 위협으로 조울
증을 앓았으며 공포에 떨다가 2년 만에 붕어하게 됩니다.
3대 정종(945-949)
야심이 많은 성격으로 정략결혼을 했던 신명순성왕후는 당시 강력한
호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배후의 든든한
기반으로 반대 세력을 숙청해서 힘을 약하게 만들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죄의식을 느끼다가 일찍 붕어하고 말았습니다.
4대 광종(949-975)
호족들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 한반도 최초의 과거제 실시, 신하들의 공복 색깔을
제정 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후원하던
평주 박 수경 일가를 몰락시킬 정도로 호족을 견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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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경종(975-981)
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대규모 호족을 숙청하는 과정 때문에 불안한
유년기를 보낸 경종은 전시과라는 제도를 통해서 신하들에게 토지를 지급
했으며 합법적으로 보복을 허용하는 복수 법을 허용하면서 호족부터
일반 백성까지 고려에 큰 피바람을 몰고 오게 됩니다.
6대 성종(981-997)
유교식 예법을 도입하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불교 폐단을 개선한
성종은 중앙정부 재편성을 통해서 국가 제도의 기틀을 잡았지만 최 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서 과거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세습하는 문벌귀족 사회를 초래하게 됩니다.
7대 목종(997-1009)
서경 우대, 인재 등용, 외교, 전시과 개정 등 긍정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문제가 되었고 동성애적인
성향으로 남자들을 곁에 두고 여자에게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도 선정왕후 유 씨 한명만 있었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8대 현종(1009-1031)
아버지 왕 욱은 왕 건의 8번째 아들, 왕 욱의 어머니는 신라의 신성왕후
김 씨로 고려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가진 현종은 출생의 비밀 때문에 절에
숨어있었지만 강조의 정변으로 왕이 된 이후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
내고(강 감찬 귀주대첩) 나라를 안정시킨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9대 덕 종(1031-1034)
아버지 현종의 승하로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덕 종은 고려서 최초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는 등 선정을 펼치며 고려의
태평성대를 이끌어 나갔지만 재위한지 3년 만에 병석에 누웠고 동생인
평양군 왕형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19세의 나이로 붕어합니다.
10대 정종(1034-1046)
거란의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군사력을 보강하며 거란의 침입을
막고 이후에는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강성 국으로 위상을
떨치지만 정종이 재위하는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서 정신
적으로 부담이 됐는지 재위 12년 29살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11대 문종(1046-1083)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꾀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법을
개정,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고려의 조세 제도 완성, 무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등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전쟁이 없어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하지만 문벌 귀족의 힘이 크게 강해진 시기입니다.
12대 순종(1083-1083)
아버지 문종의 죽음으로 너무 슬퍼해서 그랬을까? 태자로 28년 동안
있었던 순종은 원래도 약했던 몸이 즉위한 이후에는 더 악화돼서 3개월
만에 부왕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13대 선종(1083-1094)
이 시기의 고려는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거란과 송나라의
관계에서 당당한 자세를 보였으며 그전의 명군들이 나라를 잘 이끌고
제도를 안정화 시켰기 때문에 가뭄이나 한파와 같은 기상이변을 제외
하고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14대 헌 종(1094-1095)
선종의 아들로 병약한 몸으로 재위한지 1년 만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붕어했습니다.
15대 숙 종(1095-1105)
주화도감을 만들어서 해동통보, 삼한통보 화폐를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자신의 조카 자리를 빼앗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으며 북벌을 시도하면서 잦은 전쟁으로
국력을 소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6대 예종(1105-1122)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경연을 한국사에서 처음
시행했으며 문벌귀족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무과를 설치하고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운영해서 과거제도에 힘을 실어주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모습으로 송나라에서는 최고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17대 인종(1122-1146)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문제로 지배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결국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고려의 전성기가 무너지던
시기로 인성은 좋았지만 고려가 쇠퇴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나마 김 부식에게 명해서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18대 의 종(1146-1170)
초반에는 문신을 견제하고 무신을 키우려는 모습을 보이나 싶었지만 말년
에는 향락과 사치를 즐기며 무신정변을 일어나게 만들어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들고 고려 왕조의 태평성대를 무너지게 만든 왕으로 이
의민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9대 명종(1170-1197)
무신정변으로 의 종과 태자가 쫓겨나면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명종은
사실상 아무런 힘이 없는 허수아비와 같았으며 군부(정 중부)에 의해서
옹립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을 제거한 무신 최 충헌에 의해서 폐위되고
맙니다.
20대 신종(1197-1204)
왕위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최 충헌이 명종을 내쫓고 53살의 나이에 왕이
된 그는 맏형과 셋째 형을 자신들 마음대로 옹립했다가 폐위시킨 반란
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최 충헌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최 충헌과
그의 측근들의 직위를 올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21대 희종(1204-1211)
최 충헌과 흉적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해 폐위되고 맙니다.
22대 강종(1211-1213)
1197년 9월, 최 충헌이 부왕 명종을 폐위시키면서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지만 1211년 12월 자신을 죽이려다 실패한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강종을 다시 불러서 왕으로 추대했는데 즉위할 당시 나이는 60대로
이미 늙고 병들었으며 당시 정권은 최 충헌이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23대 고종(1213-1259)
고종 4년인 1216년부터 몽골이 고려로 침입하기 시작했고 당시 고종은
최 씨 일가에 끌려 다니면서 굴욕을 맞봐야 했는데 그나마 이 시기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초판했습니다.
24대 원종(1259-1274)
마지막 고려의 천자로 원 간섭기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나마 자치권을 지켜
내서 다시 한 번 고려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군주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25대 충렬 왕(1274-1308)
73세의 나이로 고려 국왕 34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지만 처음으로
묘호가 없는 국왕으로 부왕 시절 원나라에게 굴복하고 충렬 왕 자신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간섭은 더 심해졌지만
고려의 문화를 지키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6대 충선 왕(1298-1298, 1308-1313)
고려인과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고려인이 아니라 몽골 인으로
성장했지만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7대 충숙 왕(1313-1330, 1332-1339)
고려 역사에서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충혜 왕과 개혁으로 유명한 군주
공민왕의 부왕으로 원나라에게 매번 끌려 다니긴 했으나 원나라에 보내는
세공을 삭감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28대 충혜 왕(1330-1332, 1339-1344)
사람을 숙청하거나 죽이지는 않았지만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던 왕으로
심지어 장모와 새어머니를 겁탈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원나라 황에게 청하여 폐위되고 귀양을 가는 도중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했고 고려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29대 충목 왕(1344-1348)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 덕녕 공주의 섭정을 받으며
개혁을 위해 착실하게 치적을 쌓았지만 재위 4년 만에 병에 걸려 승하합니다.
30대 충정왕(1349-1351)
고려사에 의하면 폭군으로 전해지며 향년 16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 당했습니다.
31대 공민 왕(1351-1374)
왕이 된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하면서 원이 쇠퇴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1356년 병신정변을 통해서 반원 정책을 펼쳐나갔지만 우유부단한 성격과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숙청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32대 우 왕(1374-1388)
혼란하던 시기에 왕이 되어서 음주 가무와 여색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던
우 왕은 이 성계 일파에게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으며
아들과 함께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합니다.
33대 창 왕(1388-1389)
아버지 우 왕이 폐위를 당하자 이성계의 반대 세력인 조민수와 이색이 8살
아이를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지만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 왕일뿐이었습니다.
34대 공양 왕(1389-1392)
창 왕을 폐위하고 이 성계 일파는 그를 선양의 도구로 쓰려고 하지만
공양왕은 왕 씨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과 나라
모두를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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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기술이 미비하고 잦은 자연재해로 고생하던 고려는 조선과 비교해서
자주적인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17대 인종 이후 원나라(몽고)의 간섭을
받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까지 암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려왕조에 대한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전부 유실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북송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자료만 남았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5.000 역사에서 통사가 500년이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2021.3.11.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