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사회적 발달단계와 자아정체감
에릭슨 [Erik Homburger Erikson, 1902.6.15~199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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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와 자아정체감
- 프로이트의 세계를 확장시킨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
사람들은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는가? 사람들의 사회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성 발달 단계 연구와 청소년기를 정체감 혼란, 정체감 위기라는 말로 표현하며 우리에게 알려진 심리학자가 있다.
바로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를 주장한 에릭슨(1902~1994)이다.
그는 1902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덴마크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유태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친구들 곁에서 아이를 기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에릭슨의 어머니는 혼자서 에릭슨을 키우다가 데오도르 홈부르거라는 유태계 소아과 의사와 재혼했다.
에릭슨의 어머니와 의부는 유태인이었지만, 에릭슨은 친아버지를 닮아 유태인과는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키도 크고 북유럽 사람처럼 금발에 눈이 푸른 그는 덴마크인을 더 닮았기 때문에 유태 소년들 사이에서 ꡐ이교도ꡑ(비 유태인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런 왕따 경험들은 후에 에릭슨이 정체성 위기와 혼미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에릭슨 다른 심리학자들과는 달리 에릭슨은 고등학교 이상의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독일 칼스루헤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다. 에릭슨은 고대사와 미술 과목에 소질이 있었다.
졸업 후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에릭슨은 집을 떠나 유럽 횡단 여행을 했다. 일 년 후, 학교를 떠나 방황하던 그는 칼스루헤에 있는 한 예술학교에 등록해서 예술가라도 학교에서 배울 바가 있다는 것을 잠시지만 수긍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학교에 흥미를 잃고 뮤니히에 있는 유명한 둔스트-아카데미라는 예술학교로 떠났다.
이 년 후에는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옮겼으며, 얼마 동안이지만 그는 일광욕을 즐기거나 화랑을 방문하는 등 아무런 목적 없이 이탈리아 전역을 방황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에릭슨을 괴팍스럽다거나 병적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며, 자신을 찾고자 노력하는 방황하는 예술가로 받아들였다.
방황을 끝낸 에릭 선생님 에릭슨은 1927년 스물다섯 살 때 비엔나에 있는 조그마한 미국 유치원의 교사가 되었다.
고등학교 동창 피터 블로스는 뜻하지 않게 에릭슨을 유치원 교사로 초청했다.
그것을 계기로 에릭슨은 직업도 없이 방황하던 방황기를 끝내게 되었다.
어린이 연구소로 알려진 그 학교는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는 부모들의 자녀를 위해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가 세운 것이다.
에릭슨의 어린 학생들 중 몇몇은 자신들에 대해 정신분석을 했는데, 마침내 에릭슨도 그들과 함께 정신분석에 가담했다.
에릭슨이 정신분석을 처음 접한 것은 비엔나 근처의 한 산악 온천장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처음 프로이트 가족을 알게 되었고, 결국 비엔나 정신분석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우수한 후보자로 뽑히게 되었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에릭슨은 안나 프로이트와 어거스트 에익혼의 지도로 정신분석 훈련을 계속 받았는데, 이 교육은 비엔나의 마리아 몬테소리 교사 협회에서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받은 교육 이외에 에릭슨이 받은 유일한 공식적인 고등 교육이었다.
하버드 심리학 연구소 연구원 1929년 에릭슨은 그 당시 안나 프로이트가 운영하는 실험학교의 무용 선생님인 캐나다 여인 조안 세르슨과 결혼했다. 1933년 에릭슨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가서 덴마크 시민권을 다시 얻어 그 나라의 정신분석 교육기관 설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히틀러의 출현으로 파괴되었고, 그들 가족도 유럽을 떠나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미국 보스턴에 정착을 했으며, 거기서 에릭슨은 그 도시 최초의 아동분석가가 되었다.
그 지역에는 아동분석가가 없었기 때문에 에릭슨의 활동은 곧 널리 알려졌고, 에릭슨은 마침내 그 지역의 첫 아동분석가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다음 이 년 동안 보스턴에서 개업을 했고 일 년 동안 하버드 의대에서 신경정신과의 심리학 연구원으로서 임상 및 학술직을 맡았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 박사 과정에 등록했으나 몇 달 뒤에 취소했다.
보스턴에 있는 동안 에릭슨은 하버드 심리학 연구소에서 TAT 투사 검사의 창안자인 헨리 머레이와 잠시 일하기도 했다.
학위 없는 하버드 대학 교수 1936년에서 1939년까지 에릭슨은 인간관계 연구소와 예일 대학교 의대 정신과에 재직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연구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에릭슨은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8년에는 수(Sioux) 인디언들이 어떻게 그들의 자녀를 양육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남부 다코다(South Dakota)에 있는 파인리지 부락으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또한 시간을 내어 다른 인디언족인 유록 어부들을 연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해안을 여행하기도 했다. 에릭슨은 프로이트가 손대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바로 상이한 문화적 여건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생활과 정상 아동들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1939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아동분석 연구를 다시 시작했고, 1942년까지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있었다. 바로 그 대학에서 그 유명한 아동 지도에 관한 종단적 연구에 참여했다.
에릭슨은 프로이트가 밝혀 내지 못한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하는 정상적인 아동들의 삶을 찾아 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사회에 공산주의자들이 많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한 매카시 시대였던 1949년에 몸담고 있던 캘리포니아 대학 당국과 갈등을 일으켰다.
대학 당국은 모든 직원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 선서를 요구했다. 하지만 에릭슨은 개인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는 충성 서약서 서명을 거절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대학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 후 1960년까지 매사추세츠의 오스틴 릭스 센터에서 수석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이후에 에릭슨은 정식 학위를 받은 적은 없지만 하버드 대학에서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프로이트의 세계를 확장시킨 심리학자 다른 자아심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에릭슨은 자아의 발달과 기능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어떤심리학적 현상이라도 반드시 생물학적, 행동적, 경험적, 사회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릭슨은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한 발달을 강조하고, 정상이나 건강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며, 정체감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개인의 성격 구조를 설명하려고 문화적, 역사적 요인을 결부시키려고 노력했다.
에릭슨은 문화와 역사가 성격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이것은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중요한 심리학적 문제를 진일보해서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특히 에릭슨의 ꡐ인간 발달의 여덟 단계ꡑ에 대한 논의는 성격 이론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에릭슨은 그의 대표 저술 중 하나인 "정체성:청년기의 위기라는 책에서 청년기 정체성 위기와 극복 과정을 잘 보여 주었다. 에릭슨은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구 자세는 그를 하버드 대학 교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심리학을 확장시킨 그의 기여는 그를 20세기를 빛낸 심리학자에 포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격동의 사춘기를 잘 극복하고, 자신의 경험을 잘 승화시켜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었던 에릭슨은 1994년 그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이론은 지금도 세계 곳곳의 강의실에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저서> 아동기와 사회(1950), 정신분석과 역사의 연구(1958), 청년:변화와 도전(1963), 정체성:청년과 위기(1968), 간디의 진실(1969), 장난감과 이성(1977), 성인기(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