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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요한계시록 2장 1절~11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칙서, 첫 번째 일곱 가지 시리즈(인, 나팔, 대접이 이 뒤로 이어집니다)는 일곱 '편지' 또는 '칙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지는 다음의 패턴에 따릅니다.
(1) 왕과 같은 저자(그리스도)는 자신의 1장에 나오는 말로 묘사합니다.
(2) "내가 아노라" 라는 말이 교회의 상태에 대한 긍정적 진단과 부정적 진단의 첫머리를 이룹니다.
(3) 위로와 명령이 진단에서부터 나옵니다.
(4) 편지 전체의 말씀을 듣고 주의하라고 모든 교회에 명령합니다.
(5) "이기는 자"에게는 복이 약속되며 이는 21장에서 22장의 마지막 환상을 예고합니다.
2:1~7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에베소교회는 교리적 경계심과 인내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았으나 사랑의 상실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도시의 역사적인 건물은 아르테이스 신전이었고 이 도시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대추야자 나무였습니다.
1절에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이르시되', 예수님은 일곱 별을 붙잡으신 온 나라의 왕이시며 온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이 말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는 표현을 반영하며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왕의 칙령을 소개하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3대 교회가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3대 교회 중의 하나로 꼽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와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3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지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길어봐야 몇 주일 혹은 몇 달 정도 머물다가는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았고, 따라서 너무나도 급하고 바빴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는 3년이나 머물렀습니다. 그 후에 에베소 교회는 바울을 대신하여 디모데가 목회를 했고, 사도 요한이 말년에 그곳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4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너의 처음 사랑", 이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에베소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의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해석은 에베소의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려서 긍휼어린 '처음 행위'를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둘 다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훌륭해 보이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거짓 교사의 처단을 위하여 심사니 징벌이니 하고 신경을 쓰는 동안에 성도들 간에 사랑이 식어지고 의견 차이로 분열과 파쟁이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많은 수고하고, 또 영적인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형제들에게 가지는 사랑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사랑, 즉 일을 감당할 때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런 사랑이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성도들 간에 사랑이 식어지고, 교회는 냉랭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요일 4:20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5절에서 "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는 가까운 미래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그들이 교회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그리스도가 그들을 배도한 이스라엘 처럼 취급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6절에서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 이는 분명 기독교의 이단적인 분파지만 신약이나 성경 외의 증거에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분파는 아닙니다. 그들은 선지자 발람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우상 숭배와 성적인 음행에 참여하게 했으며 아마도 반 율법주의적인 방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 위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면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영지주의적 이단으로서 율법 무용론, 영혼의 무죄설, 무도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율법 무용론이란 지금은 신약 시대로서 은혜 가운데 사는데 구약의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지금도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금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게 되고,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니골라 당은 영혼 무죄설을 주장했습니다. 육체는 더럽고 영혼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육체를 더럽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니골라 당은 무도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즉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든지 쾌락을 누리든지 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7절에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승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의 목표입니다. 유다의 사자는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서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승리하셨습니다. 자신의 증언을 고수하는 신자들은 용과 짐승을 이깁니다.
'생명 나무', 에덴동산에서 이 나무에 다가가는 것과 이 나무가 순결한 자들에게 약속된 영생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금지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새 에루살렘에서 다시 나타나며 그 뿌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로 적셔지고 그 열매는 끊임없는 양분의 원천이 되며 그 잎사귀는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등장하는 그 성의 백성들에게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된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던 나무로서 그 과실을 먹으면 영생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화염검으로 그 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과실을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베소 교회의 당시 형편
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거짓 교사들에 대처하는 당부, 에베소 교회에서 디모데의 최소한 한 가지 목표는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가르침에 대처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주어진 정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관심사는 거짓 선생들의 정체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의 효과였고 그 효과는 사도의 가르침의 목표와 직접적으로 대조되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의 결과는 '변론'과 '헛된 말'인 반면 참된 가르침의 결과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거짓 가르침의 초점은 탈선과 방황을 초래한 반면 참된 가르침의 초점은
변함없는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율법과 관련해서 거짓 가르침의 옹호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반면" 참된 가르침의 옹호자들은 정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사도요한 기념 교회)
6세기에 지어진 사도요한 기념교회는 주후 37-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의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오랫동안 에베소 교회 감독으로 있었으며 이곳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도요한의 무덤.
이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요한은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제자들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십자가 형태의 무덤을 파 그곳에 누웠고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고 합니다.
요한의 책의 저작 년도를 추적해 보면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인 주후 70년 이전에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거주합니다 70년 이후의 에베소교회에서 요한복음이 저작되었습니다. 이후로 90년 이전에 에베소교회에서 요한일서.이서.삼서를 기록한 후에 밧모 섬으로 끌려가고 주후 94~96년에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다. 이 후에 풀려나 에베소교회로 돌아와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주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8절~11절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왕이신 예수님에게 어떤 책망도 받지 않으며 예수님은 그들이 박해를 견뎌낼 때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로마 시대의 서머나 (오늘날의 이즈미르)는 대지의 어머니 신에게 바친 신전과 티베리우스(주후 1세기)와 히드리아누스(2세기)에게 바친 속주의 황제 숭배 신전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8절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부활의 생명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신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속자로서 이미 "비방"을 당하고 있고 곧 "죽도록" 박해에 직면하게 될 한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9절에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은 육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리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는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교회의 대적들은 '자칭 유대인'이라 말하겠지만 그들은 그 이름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없습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은 그와 정반대로 그들은 사탄의 회당에 속해 있습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계보가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로 정의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부요하지 않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러하신 주님께서 “내가 네 환난을 안다”고 하십니다. 환난은 신앙을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박해를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다 이것을 이기었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순교자를 내기까지 하면서 굴하지 아니하고 이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갚아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네 궁핍을 안다”고 하시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궁핍”은 박해 받은 결과로 당하는 곤핍한 생활을 말합니다. 이렇게 궁핍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내색도 아니하고, 굴하지도 비굴해지지도 아니하고 신앙을 지킨 것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서머나교회에 핍박이 가해지면서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팔 수 없게 되고, 일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교회도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형편이 다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킨 서머나교회는 “실상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한 것은 축복 중에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서머나교회와 반대 현상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놓여있는 교회들이 너무 많습니다. 1970년 대부터 교회가 부흥되면서 무속종교가 들어와 사라졌던 구약의 모세 율법인 십일조가 부활하면서 십일조등 헌금 많이하면 복받는다 등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여기에 개방적 신학이 들어와 종교다원주의(WCC) 등 대배교의 길에 들어섭니다.
교회가 클수록 봉헌 찬송, 봉헌 기도 등에 열심이며 마치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아니라 헌금을 잘하라는 식의 예배입니다. 그라고 목회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한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참혹한 십자가 형으로 성도들과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럼 구원이 쉬울까요?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이 탐심에 빠져있고, 신자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물질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지고, 복음은 왜곡되고 뒤틀어 집니다. 이는 목회자와 신자들의 대량 실족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주님께서 택하신 모든 성도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숫자는 적을 것입니다.
10절에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서머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환난은 짧겠지만 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은 해방의 순교로 끝날 것입니다.
'생명의 관' 즉 영생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시는 승리의 월계관입니다.
서머나 교회 폴리캅의 순교
예수님 승천 후부터 제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를 사도시대, 제자들의 제자들이 교회 지도자로 활약하던 시대를 교부시대 내지 속사도 시대라 부릅니다. 속사도 시대의 중요한 교부들로서는 사도 바울의 제자로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클레멘트(클레멘트를 로마 천주교에서는 2번째, 혹 4번째 교황으로 주장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전혀없습니다).
안디옥교회 감독이었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제자로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 그의 제자로 안디옥 교회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를 손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수하에서 공부하여 사도들과 그 후 세대를 연결하는 사람이라고 역사가 브루스는 말합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에 대한 순교기록을 서머나 교회가 빌로멜리움 교회에게 보낸 편지 형식입니다. 혹자는 빌립보교회에 보낸 기록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정확하게 어떤 빌립보교회에 보낸 것인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빌립보란 지명을 가진 곳이 로마제국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폴리캅에 대한 순교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것은 신약성경 밖에서 쓰인 기독교 순교 기록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순교 기록은 명백하게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사건 후 오래되지 않아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 기록은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에 대한 박해, 체포, 심문, 그리고 처형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어 사본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 10세기경의 것으로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후기 사본은 폴리캅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대조시켜 놓은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폴리캅은 주후 80년 경 태어나 150~165년 경 86세로 순교한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폴리캅은 신약시대 이후 널리 알려진 첫 순교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써 사도들에 의해 아시아의 서머나(Smyrna)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받았습니다. 또한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만난 사람과 그 후 세대를 연결해주는 속사도 시대의 대표적 주요 사람입니다.
“나는 복된 폴리캅이 앉았던 자리와 가르쳤던 자리, 그가 드나들던 장소, 그의 모든 행동과 외모, 사람들 앞에서 행한 설교를 당신에게 묘사할 수 있다. 그가 요한과 주님을 본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인용하였으며, 주님과 그가 행한 기적과 가르침에 관해 그들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폴리캅은 '로고스'(말씀)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 들었듯이, 모든 것을 성경과 일치하여 말하였다.”
그의 제자요, 안디옥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에 빠진 장로 플로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친히 목격한 자신의 선생 폴리캅에 대해서 위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의 저서들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이 편지의 핵심은 '그리스도론'입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그는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에게 굴복한다.”
폴리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속죄의 죽음과 이신칭의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에까지 이르렀다.”(1.2) “너희는 인간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1.3) 선언한다.
자칫 인간이 당하는 박해나 고통이 업적으로 여겨져서 구원에 이르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폴리캅은 바른 신앙을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두려움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경박한 헛소리와 수많은 오류를 물리쳐야 한다.”(2.1)라고 말합니다.
폴리캅은 나아가 부활하시고, 영광의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 만물의 주관자, 만유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이웃을 심판하거나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삶,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2.3)
폴리캅은 자신이 강조하고 권면하는 성도의 거룩한 삶과 의가 그 어떠한 인간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특히 빌립보교회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감독이라는 자리에서보다는 같은 성도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목회자 폴리캅의 겸손을 보게 됩니다.
폴리캅은 성도 각자가 바울 서신을 읽고 깨달을 때, “저마다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한 삶으로 가르침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성직주의가 아닌,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가 외친 만인사제설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폴리캅에게 중요한 근거한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11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죽음에 직면에서도 신실함으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서머나교회, 약속에 참여하지만 뒤로 물러남에 대한 경고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과거의 박해들이 견뎌낸 인내를 고려하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상속받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인내'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말에 대한 기다림은 곧 끝날 것이고 '의인'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며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된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노는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자신을 그들과 연관 지으면서 '뒤로' 물러가는 행위는 멸망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지만 믿음은 구원, 즉 영혼("생명")의 보존으로 귀결된다고 정의합니다.
혹 설교에 참고하면 에베소와 서머나 두 편으로 나누어도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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