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트라에서 사용된 산스크리트 단어들은 번역을 더 명확하게 해주는 어떤 구절을 사용해야 명확한 용어로 적절하게 번역될 수 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분명한 명료함은 고요한 치타를 통해서 따라온다.” 여기서 관련된 생각은 “제한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의 순수성의 개념이고, 그러므로 순수한 영적 깨달음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혼이 모나드 혹은 영과 접촉하는 것은 결과이고, 이 접촉으로 얻은 지식이 육체 두뇌로 전달된다.
이것은 요가 실천의 매우 진보한 단계에서 그리고 마인드 물질이 완전히 고요할 때 가능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러내듯이 알게 된다. 삿트바 (리듬)만이 현현하고, 라자스 (활동)와 타마스 (관성)가 지배되서 통제된다. 여기서 삿트바는 요기가 그 속에서 활동하고 기능하는 형태의 리듬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들이 물질의 세 가지 특질 (구나)의 최고를 표현할 때만, 최고 측면 혹은 영적인 측면이 알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라자스가 통제할 때만, 두 번째 측면이 알려진다; 타마스가 지배할 때만, 가장 낮은 측면이 알려진다. 요기가 최고 사마디 상태 속에 있을 때 요기의 체들의 상태와 물질의 타마스 측면 사이에 흥미로운 유추가 있다. 리듬 있는 (삿트바적) 움직임이 너무 완전해서 보통 사람 눈에는 가장 조밀한 질료의 관성적 (타마스적) 상태의 승화 상태인 정적 상태가 성취된 것으로 보인다.
우즈의 번역본에서 다룬 다음 주석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불순함에 의한 흐릿함에서 자유로울 때, 그 본질이 빛인 사고하는 질료의 삿트바가 라자스와 타마스에 압도되지 않은 채 투명하고 꾸준한 흐름을 갖는다. 이것이 명료함이다. 이런 명료함이 초 반사적 균형 잡힌 상태 속에서 일어날 때, 그때 요기는 내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고요를 얻는다. (즉) 의도된 대상으로서 있는 그대로 사물을 갖는 그리고 (경험의 통상적인 과정의) 일련의 순서를 연속적으로 지나가지 않는 통찰력의 섬광 같은 비전을 얻는다 … 불순함은 라자스와 타마스의 첨가이다. 그리고 흐릿함을 구분짓는 특이성을 갖는 것이 바로 더러움이다. 명료함은 이것으로부터 자유롭다.” (p. 93)
그는 (수련을 통해서, 요가의 수단을 따르고, 명상에서 끈기를 통해서) 모든 형태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자신과 무형을 동일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그는 그의 존재의 심장에 있는 지점에 도달하였다. 순수한 영적 깨달음의 그 지점에서부터, 그가 미래에 점점 더 일할 수 있다. 실천을 통해서, 그는 그 깨달음을 강화시키고, 모든 삶, 일 그리고 환경이 그가 관심 갖지 않고 지나가는 가장 행렬로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향해서 순수 영의 탐조등을 비출 수 있다; 그 자신이 빛이고 “세계의 빛”의 일부분으로 자신을 알고, “그 빛 속에서 그는 빛을 볼 것이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지금까지 실재라고 간주해온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거대한 마야를 꿰뚫어서 그 뒤로 가서 마야를 만드는 그 빛 속으로 들어갔고 이제 그에게 미래에 실수는 불가능하다; 그의 가치관이 올바르다; 그의 균형감도 정확하다. 그는 더 이상 기만에 당하지 않고 현혹에서 자유롭다. 이 점이 인식될 때, 고통과 기쁨이 더 이상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는 대아-인식의 지복 속에 잠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