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신 (소설가, 문학평론가, 언론인) 연보
1969년 육군 제2군단 군악대 제대
1985년 노동부 현상공모 소설「흔적」당선 영화화
1993년 <전남동부신문> 편집국장
1993년 <광장신문> 발행인
1994년 순천 강남문학회 창립 초대회장
1996년 순천문인협회 고문
1996년 순천시민 교양강좌 각 동 순회 강의
1999년 서울예신대 문창과 졸업(비평문학 전공)
2001년 순천시 여성문화회관 문예창작반 강사
2001년 전남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
2001년 새천년민주당 순천시지구당 부위원장
2003년 순천 청암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교수
200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남위원장
2004년 한국문인협회 순천지부장
2004년 순천문화원 이사
2004년 순천시 책 한 권 하나의 순천 도서선정위원장
2005년 순천문화예술회관 운영위원
2005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2005년 <중앙매일> 편집국장
2006년 월간『문학세계』평론 부문 등단
2008년 <대한매일> 논설위원
2008년 <서남일보> 문화부장
2009년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2009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2009년 중앙문예지 편집위원 겸 심사위원
2010년 <시민일보> 전남 동부권 취재본부장
2011년 <동부투데이> 발행인
당보(黨報) 편집위원장 언론특보
현상공모 노동부 장관상 수상
소설「시묘」로 전남문학상 수상
황희문화상 문예 부문 대상 수상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공로상 수상
■ 저 서:『 흔적』『방황의 계절 엿 먹어라』『시인과 머저리』외 다수
■ 칼 럼 집 :『 우리가 사는 순천(順天)』『추억(追憶)을 만드는 일』
■ 정치평론 :『 진리(眞理)는 평범(平凡)함 속에 있다』
■ 문학평론 :『 수필(隨筆)과 잡문(雜文)의 의식구조(意識構造)』
문학(文學)에 마음 잡힌 일생(一生)
지방의 소도시에서 유년을 보낸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옛날이야기를 좋아했
다. 마을 앞에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동네 어른들이(특히 여자
분들이) 저녁 식사 후에 부채를 손에 들고 나무 밑으로 모여들곤 했다. 그리고
누군가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꺼내곤 했는데 모두 귀를 곤두세우고 밤이 이슥
한 줄 모르고 듣곤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녁을 물리치고 나면 누군가 정자나무 밑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즉, 나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른들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나는
귀찮아도 그를 따라 마을 앞의 정자나무 밑으로 가면 어김없이 남녀노소의 어
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 솜씨는 타고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이야기의 소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고2쯤 됐을 때 문학에 길을 들이고 있었다. 문학을 흠모하게 된 동기야
어쨌건 학교 공부는 뒤로한 채 문학에만 매달렸다. 그러니까 세계 명작은 그때
거의 읽어치운 뒤였으니 이야기 소재 고갈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물론 그 후로도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는
데 그 당시의 독서가 나에게는 지금껏 큰 재산이 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 후반이니 술을 먹지도 않고 담배도 태우지 않고 그 총명한 머리로 수많은
명작들을 읽어 갔으니 나이 든 지금까지도 생생할 뿐 아니라 문학 강의를 할
때 나의 큰 교재도 되고 인용의 핵심이 될 때가 많았다.
내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에도 문학과는 늘 함께했다. 1960년대 말의 논산 훈
련소는 그야말로 배고픔의 상징이었는데 낮에 학과 교육을 갔다가 돌아오면 꽁
보리밥에 시레깃국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전달이 왔다. 중대본부로부
터 였는데 불려 가보니 기간병들의 휴식 시간에 옛날이야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분위기를 살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어갔고 훈련을 가르치
는 기간병들은 나의 이야기에 밤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훈련을 끝마치고 강원도 ○○보충대를 거쳐 ○○군단에 배속되었다.
그 당시에는‘군예대’라는 곳이 있었고 장병들의 위문을 주로 담당했으며 정훈
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곳을 배치받았다.
나는 그곳에서 연극 대본을 쓰고 더러는 주인공 역할도 하며 순회 공연을 했
는데 우리 관할인 사창리 ○○사단, 명월리 ○○사단, 화천의 ○○사단 등을
순회하였다. 또, 오음리 7보단에서는 월남파월 장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그곳도 단골이었다.
나는 틈틈이 창작을 했으며 문예지에 발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34개
월 16일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
이후에도 나름대로 창작을 해 가면서 진로를 모색해 가던 중 욕심대로 나는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선택하고 비평문학을 전공해서 나름대로 깊이 있는 소
설 쓰기의 접근을 시도했다.
1985년 노동부 현상공모에 소설을 응모하여 장관상을 받고 나의 소설이 영
화화되면서 화려한 글쓰기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지방의 소도시에는 방송국이 없었다. 방송 중계소라는 게 있었고 삐
삐선이라는 전선을 이용해서 각 가정에 중계되었고 밤 12시면 애국가와 함께
사라지곤 했었다. 그런 암울한 시기에 나는 현상공모에 당선되어 상금도 타고
장관상은 물론 영화까지 만들어졌다는 데 대단한 자부심도 느꼈었다.
그때 영화감독이신 김병기 감독이 <5학년 3반 청개구리>라는 영화를 끝내고
나의 소설을 영화화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 전에 나를 부르셨다. 즉,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가 잘 알 것이므로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상세히 설명한 뒤 모래내 갈비집에서 밤늦
도록 이야기꽃을 피운 기억이 새롭다.
내가 서울 생활 16년을 하면서 나름대로 인맥을 쌓았다고는 하나 막상 원고
료 수입으로 생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미아리 서라벌예대 밑 북
선동에 미련이 남아 선뜻 다른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러자니 술도 마시게
되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으나 이따금 향촌미련(鄕村未練)에 울기도 하였다.
가자! 고향으로 가야 한다. 고향에 가서도 얼마든지 소설은 쓸 수 있고 발표
도 할 수 있다. 고향으로 가자!
당시 신세훈 선생님은『자유문학』을 하셨고 2층이 사무실이고 아래는 중국
집이었던 기억이 난다. 김병총 선생님은 그 후에『자유문학』에 계셨는데 내가
귀향의사를 밝히니 잘한 선택이라며 다독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써서 발표했는데 그 당시『문예사조』김
창직 선생님, 『문학21』안도섭 선생님, 현재『지구문학』의 故진을주·김시원
선생님,『 한맥문학』의故원영동선생님들과문학적끈을놓지않았다.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소문
이 돌자 27만의 소도시에선 그
냥 화제가 되었다. 그 당시는 문
인협회도 없었고 그러자니 글
쓰는 문인이 누군지도 모를 때
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사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말하자
면 직원으로 특채를 하고 싶은
데 그것도 편집국장 자리라며
소설가인 나를 유혹했다. 나는 우선 의식주가 급한 불이어서 면담에 응하고 만
나 보니 소설 써서 벌어들인 이익보다 훨씬 높은 대우에 아래로 부하 직원이
수십 명이나 되고 흔히 말하는 끗발 좋은 자리라는 귀띔에 승락하고 돌아왔다.
사실 어느것 하나 문학과 다른 것이 있을까마는 신문기사가 소설이며, 칼럼
이 수필이었다. 즉, 베이컨의 수필 쓰기 형식이 사회적 수필인데 천태만상의
글쓰기인 셈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선배들도 언론에 종사했던 이력의 소유
자가 부지기수라는 걸 늦게야 알게 되었다. 또, 문인은 고지식해서 타협을 불
허하는 고집이 있는데 나 역시 언론중재위원회에 회부되어 불려간 일이 부지
기수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문예창작 강의를 제의받는다. 시에서 운영하는 여성문
화회관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과감히 신문사에 사표
를 내고 자리를 옮겼다. 한 학기에 약 25명쯤 됐는데 거기에서 문학 강의를 하
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개강을 할 때 25명이던 인원이 며칠이 경과한 후에는
31명으로 늘었다.
나름대로 흥미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 강의 시간에 세계명작인『죄와 벌』이
랄지『부활』등을 설명해가고 진실한 사랑의 본질을 규명해가는 과정에서는 울
기도 울리기도 했으며 시에서 한하운의 슬픈 운명을 설명하고 그의 시「어머
니」또는「보리피리」를 설명할 때면 강의실은 훌쩍이는 소리에 더는 강의를 잇
지 못할 때가 흔했다.
이후 어느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나의 삶 자체가
문학적이어야 하고 문학이라면 기꺼이 몸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터라 시에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도 나는 언론과 글쓰기를 수없이 반복해 오다 보니 70이 넘어버렸다.
이따금 월간『문학세계』에서 신인문학상을 시상하는 곳에 가면 대선배이신 도
창회, 이수화 선생을 만나 뵈는데 내 나이는 그 선배님들에 비하면 아직 젊은
나이 같은데 이 말 들으시면 서운해 하실까 우려된다.
아무튼 문학만 안고 살아온 나의 한평생이지만 후회도 없고 행복한 삶이었
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의 심정을 표현한 졸작 시(詩) 한 편을 소개하며 맺는다.
서생(書生)의 삶
재벌은 저승 갈 때
돈을 두고 가는데
가난한 서생(書生)은
글을 두고 가야겠네
이승에 머물다 간
내 흔적이 돈이라면
훔치고 빼앗고
속여서 모아둘걸
물질에 집착해선
선비의 삶 아니기에
노잣돈 한 푼 없이
글만 두고 가려 하네
<대표작품>
그 남자
이 재 신
주말 오전. 역전 광장 한편에 관광버스 한 대가 정차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30분쯤 됐는데 이따금씩 4·50대 중년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차에 오르기도
했다. 기사는 좀 지루했음인지 차에서 내려 허공을 향해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편 건널목에서 중년 여인 하나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아담한 등
산용 배낭을 짊어진 채 버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등산객
같지 않은 차림새였다. 짙은 화장에 그런대로 부티나는 유명 메이커 옷을 차려
입었는데 잘 어울렸다.
그녀가 승차하자 차내의 승객 20여 명이 일제히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
고 남성들은 나름대로 침을 삼키며 그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그
녀가 자리에 앉자 동석을 하게 된 중년 사내는 웬 떡이냐 싶어 연신 그녀를 곁
눈질했다.
이내 승객이 40여 명 가까운 정족수를 채우자 손목시계를 본 운전기사는 천
천히 차를 움직였다.
약 10분여를 달리자 버스는 시가지를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달렸고 버스 안
은 여기저기서 잡담으로 웅성거렸다. 그때 버스기사가 마이크를 잡고 차내의
승객에게 하루의 스케줄을 말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할 이 버스는 9시 30분 정시에 출발하여
18시에 출발 지점에 다시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불편하신 점이나 등산코
스에 관한 질문이 있으신 분은 기사에게 문의 바랍니다.”
“지금 행선지가 어딥니까? 그리고 식사는 어찌 되는가 궁금합니다.”
“자세히 모르고 승차하신 분들이 간혹 있어서 간략하게 말씀 드리지요.”
버스기사는 보편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운전에 집중하는 눈치였다.
기사의 말을 빌리면, 보물은 진흑 속에 묻혀 있는데 역시 오늘의 등산 코스
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좋을 것이라 했다.
“저… 여사님은 등산 자주 오십니까?”
함께 앉은 중년사내가 옆에 앉아 있는 미모의 여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자주 오진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가끔 와요. 선생님은요?”
“저도 산을 무척 좋아합니다. 마치 어머님의 젖무덤 같은 포근함에 매료된다
고나 할까요.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골짜기마다 등성이마다 사연과 전설을
머금고 있어서 항상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자연의 산물인 인간이 산을 동경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선생님은 전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하하하하하 전직이 없습니다. 현직이 있을 뿐이지요.”
“그럼 현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어요?”
“두서없이 잡일을 하면서 세월을 죽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재미있으시네요. 그리고 인생을 멋있게 즐기시는 것 같아서 부럽기까지 하
고요.”
그러나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사내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인생을 멋있게 즐긴다는 말 속에는 여유도 포함될 것인데 사내에게
는 여유란 사치스러운 것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인 여유를 비롯해서 마음의 여
유까지를 말할 것인데 여유란 사내의 삶 속에선 찾기 어려운 단어였다.
사내가 정색을 하고 여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이들은 몇이나 되십니까?”
“딸 하나 있는데 결혼해서 살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버스는 이윽고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어서고 있었다.
“약 15분간 정차하겠습니다. 볼일들 보시고 오십시오.”
사내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오니 커피 자판기 앞에서 긴 머리를 휘
날리며 종이 커피잔을 들고 서 있는 그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
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 곁으로 걸어갔다.
“커피라면 저 안에서 편하게 마시고 나올 수가 있는데 왜 이런 노천에서 드
십니까?”
그녀는 검은 눈을 애교 있게 흘기며,
“맛으로 마시는 것보다 분위기를 더 좋아해서요. 가을바람 불어오는 거리에
서 봉지 커피 한 잔이 얼마나 낭만적인가요.”
사내가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근처 나무의자에 걸터앉자 여인도 천천히 의
자에 와 사내 곁에 앉았다.
“가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누구나 시인묵객이 되니 말이에요.”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 때 가을이 멋있고요. 쓸쓸하고 허전하고 한없이 외로
운 사람에겐 형벌의 계절이겠지요. 낙엽이 흩날리고 외기러기 울며 날고 별빛
이 쏟아지는 밤에 성당의 종소리라도 은은히 울려보십시오. 그것이 낭만 가득
한 멋있는 계절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요, 선생님!”
손목시계를 보면서 두 사람은 의자에서 일어나 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벌써 사람들은 모두 타고 있었으며 사내와 그 여인이 제일 늦게 승차했고 차
에 오르자, 버스는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차내는 조금 조용해졌고 어딘지 모를 행
선지를 향해 버스는 숨 가쁘게 달렸다. 이내 그 여인도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고 있었다. 사내는 그냥 놔두기로 했다. 곤히 잠든 걸 보면 등산
온다는 이유로 아침 일찍 일어났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피곤도 할 것이었다.
차는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조금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버스기사는 지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분이 기대하셨던 등산 코스 아래입니다. 이제 차를 세우면 천천히 내리
셔서 제가 하는 당부의 말씀을 들으신 후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차는 지리산 아래 조금은 여유로운 주차장에 정차했다. 승객은 하나
둘 차에서 내렸고 사내와 그녀 역시 하차한 뒤 버스 곁에 서 있었다.
“에~~! 다 내리셨지요? 자기와 함께 오신 분이 오늘 하루 파트너입니다. 그
러니 떨어지면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산을 오르신 후에 15시 정각
까지는 이곳에 다시 모이셔야 합니다. 물론 그 시간에 동승할 수 없을 때는 차
가 출발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등산 중 안전사고가 있을 시는 저의 휴대폰
으로 연락 바랍니다. 저의 휴대폰은 0*0-0022-0033입니다. 이상입니다. 올
라들 가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와 그녀도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
르기 시작했다.
산은 비교적 가파르고 험했으나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려선지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한참을 오르자니 더러는 힘들어 뒤로 처지는 사람도 있었고 숨을 몰아
쉬는 측도 있었다. 사내도 그랬지만 여인도 많은 등산 경험이 있는 듯 비교적
거뜬히 오르고 있었다.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힘들지 않으신가요?”
“힘들죠. 저도 사람인데요. ”
“그래도 참 잘 타시는 것 같습니다. 초보는 아니시고요?”
“초보는 아니지요. 그러나 숙련된 산악인은 아닙니다. 그냥 꽁무니에 따라다
닐 정도지요.”
가을이 내려앉아 떡갈나무 잎들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보니 티 없이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한 조각 남으로 흐르고 있었다.
옆을 보니 그녀도 곁에 서 있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 폭의 그림처럼….”
“선생님은 고운 것,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사시는 것 같아요. 그러잖아요. 개
눈에는 뭐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자비로움만 보인다잖아요.”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실이에요.”
두 사람은 연인처럼 낙엽이 많이 쌓인 곳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사내가 입
을 열었다.
“하루는 길다면 긴 시간인데 아직 우리는 정상적으로 통성명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묻지마 산악회>의 회칙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
을것같은데요“.
“맞아요. 선생님 말씀에 동감이에요.”
“그럼 신분을 밝히죠. 저는‘현명한’이라 합니다. 나이는 56세고요. 물론 순
천이 집이고요. 가족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출가시키고 현재는 아내
와 단둘입니다.”
“너무 구체적이신데요. 호호호호호 그런데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를 말씀 안
하셨어요.”
“아, 그런가요. 한평생 아내의 도움으로 살면서 뚜렷이 하는 것 없이 여기까
지 왔습니다.”
“이제 제 차례군요. 저도 순천입니다. 아이들이 둘 있고요. 남편이 조그마한
건설회사를 하다가 5년 전 병사(病死)했습니다. 아이들은 저도 모두 출가시키
고 혼자인 셈이지요.”
말이 끝나가기 전에 그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제가 이봉자입니다. …아, 그러세요. 네, 감사합니다만 제가 써둔
작품이 없어서 준비를 한 다음에 보내드리면 안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사내는 궁금해졌다.
“혹시 글 쓰시고 계세요?”
“그냥 문단 주변만 맴돌고 있습니다. 딱히 글 쓴다 말할 수도 없고요.”
“그러고 보니 오늘 참 행운을 얻었습니다. 옛말에, 도둑과 하룻길을 가면 월
담하는 법을 배우고 글 쓰는 선비와 하룻길을 가면 하늘천 따지를 배운다고 했
습니다. 오늘 운 좋게도 문인과 함께 하루를 가게 됐으니 얼마나 행운입니까.
하하하하하.”
“문인도 문인 나름이지요. 요즘은 하도 문인들이 많아서 구별이 어려워요.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아 그치겠지만 자신만이 최고라며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어요.”
“그래요. 이번『○○문학』가을호 발간사에 아주 정확히 적시되어 있는데 보
셨겠군요. 한 구절 소개하면, 자기가 최고의 문인이라 하고 다른 문인은 문인
도 아니라며 깔보고 낮게 평가하고 취급하며 자기도취에 빠져 씨부렁거리는
문인의 태도라고 꼬집고 일 년에 시 한 편, 수필 한 편 정도 쓰는 사람이 더 날
뛰며 시인입네 수필가입네 하며 명함을 거창하게 만들어 뿌리는 것을 신랄하
게 비판하고 있더군요. 참 우스워졌어요. ”
“선생님도 문외한은 아니시군요? 문단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아시는 걸
보면…….”
“독서에서 얻어진 지식 정도지요.”
“우리 문단 이야긴 그만해요 선생님. 재미없어요.”
“저는 재미있는데요. 그 범주에 속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죠?”
“앞으론 좋은 모습만 봐 주세요. 우리 문단사(文壇史)에 업적을 남기신 분들
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독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오늘이 있도록 해
주신 분들 말이지요.”
“전체적으론 맞는 말씀입니다만 저 위에서부터 아래 지역 문단까지 패거리
문학의 병폐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선거 때면 더욱 그러하고요.”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간혹 외롭다는 생각을 안 해 보셨어요?”
“저도 사람입니다. 감정도 있고요. 이 가을엔 정도가 좀 심한 편이지요.”
“사계절 중에 가을이 제일 싫어요.”
그리고 그녀는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교적 한적하고 숲이 우거진
곳에 3·40대의 젊은 남녀가 단풍이 물든 숲 속에서 진한 애정을 연출하고 있
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은 키스신은 애정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것을
본여인이,“ 어머선생님…”하며신음처럼사내의손목을잡았다.
사내는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면서, 혼잣말처럼“저를 부르시면 어쩌자는 겁
니까. 하하하하하하.”하며 오르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서야 모두들 하산했고 기사가 승객 수를 확인한 다음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역시 두 사람은 부부처럼 나란히 앉아 등산으로 피로한 육신
을 의자에 맞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운전기사의 다급한 목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앞뒤 타이어가 펑크가 났어요. 앞 타이어 한쪽 뒤 타이어 한쪽
이 펑크가 난 걸 보니 분명 누군가 해코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경우는 드물거든요. 차내에서 기다리시면 한 시간 내로 교환해서 출발하
겠습니다. ”
차내가 술렁거렸다. 투덜대는 사람, 큰소리로 욕을 하는 측도 있었고 더러는
조금 걸어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며 배낭을 매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난감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한 시간을 기다린다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았
다. 사내가 여인의 눈치를 살피는데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가요, 선생님. 여기서 근처 도시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데 다른 사람
들처럼 같이 가요.”
사내는 못 이기는 척 배낭을 찾아 짊어지고 차에서 내렸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인근 도시를 향해 걷고 있었다. 이따금 화물차들이 지나
가다가 손을 들면 태워 주기도 하고 그런 광경을 본 다른 사람들도 빈 차가 지
나가면 손을 들어 보기도 했다.
역시 두 사람도 지나가는 차마다 손을 들어보았는데 승합차 한 대가 운 좋게
섰다. 그때 모두들 승합차에 올랐다. 차에서 정중히 고마움을 표하고 인근 도
시까지 빨리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들이 목격된 건 그때였다.
도시에 들어서자 순천을 가야 할 등산객들이 하나둘 짝을 지어 모텔을 들어
가는 것 아닌가. 사내가 이해하기엔 어려웠다. 그때 곁에서 따라 걷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니까 쉬었다 가시려나 봐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듯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도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연인 사이도 아니고 자기 아내도 아
니고…….”
“이것이 묻지마 산악회의 특징이겠지요. 그리고 현실 사회 속에서 비일비재
한 사실이에요. 너무 틀에 얽매인다는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해요. 시대가 변하
는데 전근대적인 사고(思考)만을 고집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사내의 손을 잡고 걸었다. 실로 사내는 묘한 생각에 휩싸였
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이 약속처럼 전개되고 있어서 더욱 사내의 정신을
혼란에 빠트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걸었을까. 눈앞에 모텔이란 간판이 도도히 서 있었고 여인은
그 간판을 지나기 전 잡고 걷던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무언의 의사 표시인 셈이었다. 모텔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여인의 마음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럴수록 사내는 더욱 힘차게 앞으로 걸어갔다. 모텔을 지나치자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빠지면서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나 사내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걸었다.
그때 여인이 생기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선생님. 우리 술 한잔하고 가요.”
사내는 내심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터라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어 대답했다.
“아, 그럴까요. 한잔 생각나는군요. 버스터미널도 근처에 있고 순천도 그리
멀지 않으니 그렇게 합시다.”
여인은 반색을 했다.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진 여인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등산을 취미로 삼은
동기에서부터 유독 가을이면 더 고독에 겨워하는 사연 등 주위의 허전함을 이
런 방법으로 메워간다는 고백이 술기운을 통해 발설되고 있었다.
허전함은 허전함을 낳고 그 처절한 외로움이 눈물로 변하여 형벌처럼 자신
을 포박한다는 말에서 여인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홀
로 되어 아이들 길러내고 이제 허리 펴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홀로의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가를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푸념처럼 뇌
까렸다.
“이제 일어납시다. 아쉬우면 순천에 도착해서 한잔 더 하시고 헤어지면 어떻
겠습니까?”
“그래요, 선생님. 아주 좋은 생각이세요. 그러잖아도 제가 몇 번 등산을 따라
와 봤는데 도착해서는 모두 한 잔씩하고 헤어집니다.”
사내는 의자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여인을 부축해서 술집을 빠져나왔다.
밤바람이 차갑게 볼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포도 위를 뒹구는 낙엽들이 가을
바람이 괴로운 듯 바람 따라 휘날리고 있었다.
여인은 사내의 팔에 의지한 채 비틀거리며 따라 걷고 있었다.
이내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뒤 순천행 버스에 올랐다. 차내는 비교적 승
객이 드물었다.
“기사님 ! 순천에 몇 시에 도착입니까?”
“20시 50분입니다.”
운전기사의 사무적인 대답을 들으면서 차창 밖에 시선을 묻었다.
사내 역시 취기가 조금은 올랐고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여인은 사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버스가 순천 시가지에 들어서자 사내가 여인을 흔들어 깨
웠다.
“다 왔습니다. 일어나세요.”
“벌써요? 참 빨리 왔어요.”
“피곤했었나 봐요. 아주 곤히 잠들었어요.”
“네. 선생님! ”
두 사람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버스에서 하차한 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는 신시가지에서 정차했고 어느 길거리 카페를 들어갔다.
“근데, 집에 일찍 들어가시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들어가야죠. 그러나 기분에 따라서 시간이 결정될 수도 있어서 딱히 몇 시
라고는 못 박을 수가 없어요.”
“아, 그래요. 그럼 적당히 한 잔씩하고 갑시다.”
이제 두 사람 앞에 놓인 술은 양주였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술잔을 채워 단
숨에 잔을 비우고 또 채우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양주 한 병이 바
닥을 드러냈다. 그때 혀 꼬부라진 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 내일 또 만나요. 제가 싫지만 않으시다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귀하신 등산 짝이신데… 그럽시다.”
“그럼. 약속하세요.”
“그냥, 편하게 만나요. 내일은 차를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그러시면 더욱 좋죠. 우리 둘만의 하루가 될 수 있으니까요.”
또, 양주 한 병이 나오고 몇 잔 마시자 여인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사내는 참 난감했다. 하는 수 없이 팔을 어깨 위에 올려메고 밖을 나오자 근
처에 모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끌다시피 모텔을 들어서자 보다 못한
모텔 여인이 밖으로 나와 함께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눕히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여인이 사내를 껴안았
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술로 인사불성이 된 사람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놀란 건 물론 사내였다.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등 뒤에서 고열을 토해내며 신음처럼 말했다.
“선생님, 오늘 밤 우리 함께해요. 멋있는 추억의 밤을 만들어요. 네? 선생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그러시면 샤워하시고 일찍 쉬십시오.”
사내는 천천히 여인의 포옹을 풀고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여인의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하리라는 가상적인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
모텔 문을 나섰다.
가을밤은 깊어가고 한 줄기 시원한 밤공기가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사내는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 날 아침 10시경 사내는 차를 몰아 팔마경기장 앞에 도착하니 그 여인이
서성대고 있었다. 우선 반가웠다. 지난밤의 일도 마음에 조금 서운한 감정으로
남아 있는 터라 정중히 사과를 하려던 참이었다.
“일찍 나오셨군요!”
“저도 이제 막 도착했어요. 어제는 결례를 했어요.”
“술을 마시다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을 실수라 한다면 술 마시
는 분들은 모두 실수를 마시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그런가요. 그렇게 넉넉하게 봐주시니 부담이 덜하네요.”
“자! 타세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디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등산복 차림이 아닌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이브나 좀 하고 오지요.”
그녀가 차에 오르자 차는 가까운 광양 쪽을 향했다.
“선생님, 행선지나 알려주시고 납치하세요. 궁금하잖아요.”
“그런가요. 남해나 한 바퀴 돌고 오시죠 뭐.”
“좋아요. 저도 남해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그곳이 군 단위치고는 예향이죠?
한국소설가협회장을 지내신 정을병 선생님 고향이고 현재도 소설가협회 백시
종 이사장님도 그곳 출신이지요. 또, 한맥문학 김진희 회장님도 그곳이기도 하
지요.”
“역시 문인이시라 문인들의 고향을 좍…… 읽고 계시는군요.”
벌써 광양 제철을 지나고 있었다.
“이 나라 산업사(産業史)에 한 획을 그은 곳이 광양제철 아닙니까. 1982년에
처음 금호도라는 섬에 용트림을 했을 때 오늘을 예견할 수 없었지요. 故박태
준 회장님의 역작이기도 하지요. ”
“선생님은 참 여러 가지를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역사 공부 아닙니까. 일설에는 김종호 전남도지사가 자기 고향 광양을 추천
했다는 설도 있는데 미확인된 것이고 분명한 것은 현재 광양은 몰라도 광양제
철은 알고 있는 한국인이 많다는 겁니다.”
차는 남해대교를 지나 벚꽃나무가 헐벗고 서 있는 국도를 들어서고 있었다.
“배고프시면 말씀하십시오. 아니, 속이 아프시다든가 쓰리시면 말씀하십시
오. 어제 과음으로 휴유증이 있을 수도….”
“선생님! 놀리시기예요? 저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하하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한바탕 시원히 웃으며 차창에 시선을 묻었다.
차가 보리암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보리암에 대해서 아시면 말씀해주세요.”
“글쎄요. 별로 아는 게 없는데요. 신라 경문왕 3년(683년) 원효대사가 이곳
에 초막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
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보리암의 전설이라는 것이지
요. 또, 금산은 이렇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려고 백두산과 지리산에서
기도를 하였으나 효험을 얻지 못하고 다시 보광산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어
느 날 꿈에 보광산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어 주는 대신 보
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싸서 달라는 요구를 했대요. 이성계는 이를 수락하였고
이내 왕이 된 이성계는 산신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
로 감싸고자 했어요. 그러나 산 전체를 비단으로 싼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성계는 기지를 발휘하여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산으로 이름을 바꾸
었다고 전해옵니다.”
“아, 그랬군요. 참 재미있네요.”
“재미있었다면 백 원은 주셔야지요. 공짜 역사 공부가 어디 있습니까?”
“자요. 여기 백 원요.”
“하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달렸다. 그러자 또, 바다 건너에 노
도가 눈에 들어왔다. 『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 김만중을 설명하는 건 좀 학생
같다는 생각에 접기로 했다.
“여기가 구조항입니다.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보면 정답입니
다. 이 앞이 선창인데 선창을 벗어나면 60년대 식 골목에 선술집 미장원 여관
그리고 여인숙 등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픈 사연들이 많을 것 같
은데 낭만적인 생각만 들지는 않거든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인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애틋한 사랑이야기며 가슴 아픈 슬픈 이별 같은 것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주차시킨 뒤 골목을 들어섰다. 그리고 조금은
허름한 왕대포 간판이 쓰인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주인인 듯한 60대 초의 여인이 목례를 하며 두 사람을 맞았다.
“왕대포 한잔 주십시오. 그리고 안주는 서대회가 좋겠네요.”
주인은 알아차리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오래된 듯한 벽지에 시선을
쓸어내리며 말없이 술상이 나오도록 기다렸다.
한때는 뱃사람들의 삶에 애환이 서린 곳 같기도 했을 것이며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주인에게 고마운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후 주인아주머니는 쟁반에 회 무침과 막걸리를 들고 나왔다. 탁자에 내
려놓으면서,
“참, 보기 좋네예. 우리는 한평생을 살아도 부부간에 이렇게 놀러 한번 댕기
본 기억이 없다 아닙니꺼!”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내도 웃음을 빙긋이 웃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오래하셨습니까?”
“젊어서부터 했으니께네 오래됐지예!”
“돈도 많이 버셨겠어요?”
“그땐 그랬지예. 고기잡이 가서 한 보름씩 바다에 있다가 오머 그날 밤으로
술은 동나는 기라. 아가씨도 그날을 기다렸다가 진 빚을 없애고 그랬지예. 고
기 잡아 와서 간주한 돈으로 며칠씩 눌러 묵다가 또, 바다로 나가머 선창에서
서로 몬 떨어져서 끼안고 울고 그랬제!”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어쩌면 낭만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육체를 담보한다는 안타까운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묵묵히 미소만 짓던 여인이 말을 꺼냈다.
“그건 낭만이 아니라 아픔이었을 겁니다.”
“서로 눈이 맞아가 동거한 짝이 많습니다. 사는 기 별겁니꺼. 외로운 사람끼
리 만나 정들면 사는 기지예.”
“옳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야기를 지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 창성대교를 건너서 삼천포를 갈 겁니다. 그래서 사천을 들러 다시 순천
으로 돌아가면 아마 좋은 여행이 되시겠지요.”
차에 시동을 걸어 삼천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 이대로 헤어지는 거예요?”
말없이 곁에 앉아 있던 여인이 갑자기 침묵을 난도질했다. 종착지가 얼마 남
지 않았다.
“그럼 어디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한 사내가 원망스러운 듯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달려왔는데 벌써 순천을 들어서고 있었다.
사실 사내가 여인의 마음을 몰라서 외면하는 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
의 자존심도 넘치도록 세워주고 싶었으며 사내 또한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주
고 싶은 마음은 넘치도록 있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사나이의 마음을 여인이
조금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해는 어느덧 인제산을 넘고 있었다.
“간단히 차라도 한잔하고 헤어질까요?”
사내가 묻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도착하니 우체통에 우편물이 와 있었다. 사내는 습관처럼 발신지를 확
인했다. 그리고 서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다녀왔어요.”
그러나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방 안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50대 초반의
여인이 사내를 보고 미소로 맞아주고 있었다. 사내의 부인인 셈이었다. 부인은
약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사내의 도움 없
이는 목숨조차 연명할 수 없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을 떠먹이는 것도 사내
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불평불만 없이 아내의 시중을 즐겁게 들며 살고
있었다. 이따금 지루하면 산악회를 따라서 하루쯤 등산을 하곤 하는 게 유일한
사내의 외도인 셈이었다.
사내가 분주해졌다. 아내의 기저귀를 갈고 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씻은 다음
밥을 차려 아내 앞에 놓았다. 둘은 참 평화로웠다. 이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남해를 갔다 왔어요. 항상 가도 남해는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어.”
“혼자 다녀오셨어요?”
“아니지, 혼자서 뭐하러 가나 재미없게. 여자 한 분하고 함께 갔다 왔어요.
지난번에 등산에서 처음 만났는데 아마 시인(詩人) 같아. ”
“재미있었어요?”
“그냥 그랬어. 이담엔 당신 한번 데리고 갈게.”
두 부부는 말없이 밥을 먹으면서 사내가 생선이며 고기를 아내의 밥 숟가락
위에 올려주고 있었다.
며칠 뒤, 그녀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열 계집 마
다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도통 그 사내는 그녀를 여자로 보질 않은 묘한
사내였다. 수소문 끝에 사내의 집 근처 조그마한 가게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주인인 듯한 40대 후반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분은 뭐 하시는 분인지 아세요?”
“젊어서는 고위 공직자였어요.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반신불수가 된 이
후로는 오직 부인 곁에만 함께 있는 이 시대엔 흔치 않은 사람이지요.”
여인은 놀랐다. 전신의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했다.
“작년에는 순천시에서 주는 특별상을 받았는데 정말 부럽고 존경스러운 분
이세요.”
주인 여자는 자신의 일처럼 흥이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 집 영감탱이 같으면 어림 짝도 없어요. 아니, 누워 있는 마누라 몰래
바람피우느라 바쁠걸요.”
여인은 가게에서 소고기와 과일을 넉넉히 사서 사내의 집에 전해 달라고 부
탁한 뒤 가게 문을 나섰다.
초겨울 날씨라 바람이 차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