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만회고택에서 조부이신 홍기의 삶과 인물 교류 시문 독립운동등을
남기신 간찰과 유집등의 흔적을 통해서 미흡하나마 알아보고자 합니다
(정리하면서 하나둘 써내려 갈 것임)
자만창 순우 홍기의 유집내용을 읽어 보면서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와 일제에 비혐조적으로 우거하거나 학생들을 가르키거나 시를 교류하거나하던 분들입니다(명월루에서 지어졌던 시편만도 1000편정도라는데 다 분실해 안타가움을 더함)
이제 대체로 많는 것들을 파악(물론 해석은 않됨)한 만큼 아래 것들을 수정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나와서 처음 볼 때와 차이가 납니다 간찰도 쓴 것 일부만이 나오며 받은 것은 하나도 해석되지 않음
1)유춘옹(무실 정제집 매형)매화시에 차운 강산에 바람이 들끌어 구멍에서....서한의 맹세함께하니 아교처럼 굳었네
2)백초헌 이문중에 지나간 환란으로 산전이 벽해됨을 만났을 때 공이 아니면 누가 오늘을 이루었을꼬
3)태고정 만산옹의 계획이 때를 만났다(만산이 망미대를 쌓고 곽면우등과 울분을 달래던 홍기의 외가 외숙은 강필로 독립운동가)
4)이원보의 성동우장(영주문화원발간 성동수창록에 기록됨 독립운동가 김정호의 문인
5)정산 김동진 만사 영주 독립운동가며 뇌헌 김흥락문인:김흥락은 (정재의 문인) 권상익도 문하 독립운동가 많이 배출 외로운 충정은 남관(옥에 갇힘)에야 비로서 알겠고
5-1염암 류연귀(한들) 영남유림이 침침해져 어두운 빛이 서늘해지니 홀로 외로운 촛불로 휘황한 빛을 밝혔네
6)범암 유연즙 만사 전주유씨 학자 김흥락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 후진교육 시문에 능함 범암집(무실에서는 의병활동참여이나
자료미비로 등록되지 못함)안동소파록에 의병활동 서기로 참여한 기록 나옮(영남을 지켰네)
7)추강 지섭만사 진나라 방망이와 조나라 비수가 복수에는 고금이 같은데 매운 기개가 허공에 올라 하늘에 하소연했네(의열단)
8)강래참봉어른 만사 망건과 머리털 의젓하게 간직하고 승화해가다(춘양)
9)취송족조 덕영(해저)만사 우리 유림이 겁계에 걸려 초수의 슬픔있었는데 옛모습 보전했네 남쪽감옥은 멀리멀고 북망산은 깍아 지른듯삼형제가 응당풀릴 날이 있을 것이나 구원에서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삼형제라함
경학 시동 희주 재공 만수 덕영(김흥락문인)의자 한식(구속되지 않아 이차유림단에 고등경찰요사에 나옮 심산유고에도 나옮) 직영의 자헌식 (건국애족장)
***이부분에서 삼형제가 응당 풀릴 날이 있을 것이나라고함(삼형제는 만식 헌식 기식임) 해저참판댁 계로 헌식과 헌식의 아들 창신은 독립운동가(이부분에 대한 연구 필요함) 덕영은 바래미 계보(좌장) 홍기로 내려감
10)정와 강공올림(호가 만산으로 대원군이 하사 이조참의 북청부사 이하규의 3남이며 홍기의 외숙으로 1903년 통정대부 중추원의관 도산서원장 역임 곽종석과 망미대 쌓아놓고 조석으로 올라 국권회복의 일념을 담은 시를 읊어 천지가 어지러운 가운데 양맥을 회복하기 어려운 가운데
11)유연귀(무실 전주 유씨) 대륙이 혼란하고 가라앉아 한줄기 양맥이 끊어지려하는데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거칠게 물리침
11_1)강해 문중 젊은 이들이 형을 받거나 옥에 갇히거나
12)답 송공산 준필(성주 출신 독립운동가)문화에 날로오는 제자들 가운데 지결을 받들어 우리당의 책임을 맏을자가 있는지?
곽종석 장영석 심산등과 파리장서에 함께 참여 성주출신독립운동가 심산유고에도 나타남 심산 곽종석등과도 교류 일제치하 일기를 기록함 여기서 명월루에서 파리장서 초안을 만들었다고 함(연구부분)
13)하희문 중환 독립운동가 남호(해저)와 김창희의 주손(김창희의 흔적도 많이 나타남(심산유고 비밀경찰요사 신간회 민립대학 봉화청년연합....))
14)용천비석 세우는 날에 지금 산하가 다르고 인륜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후손들의 조상추모하는 정성 뿐이 아니다
(중요한 의미 지녀)***비석을 세우는 일들 서원...이 민족정기와 관련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뜻
15)최형부 순겸 (강릉인 대사간 복하의 후손으로 전간재의 문하인이며 부모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6년동안 묘를 지킨 효자로 여묘할 때 호랑이가 묘 옆에 와서 우물을 팠다고 전해짐(유고집) 방죽이 터져 흰 하늘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다리자 천하에 도가 없는데 문을 닫고 스스로 본분을 지켜(나라 잃으매 우거한 행태로 나타남)
16)권은필 상용 닭실 의병대장 권세연 아들 방문(소수서원장 역임 손자인 봉화문하원 원장이었던 권정환씨에게서 심산이 명월루를 여러번 방문하여 창수시회만도 여러번 개최함 당시 부친이신 권상용씨와 함께 왔다함) 채산 권상규옹은 권연하의 둘째 아들
권세연이 의병대장시 홍기의 친 삼촌인 김진림(해저)은 내방장역임(안동소파록참고)홍기의 장인인 유연박은 참모 역임
두분 다 홍기의 절친한 벗임 권연하는 태림(해저)과 교류함
17)안종훈 작년 여름 한 열흘 감옥에 갇힌 것이 부끄럽고 두려우며 옛날에 함께 고초를 격은 까닭에 감히 이에 뒤늦게 제기하는 것입니다 김충식(해저,감역댁 건영아들,주사) 족조는 식구 수십명을 이끌고 만주로 이거함(김충식 가계도는 희주 재익 달수 건영(건국훈장 만인소소수)의 아들 충식? 연구과제)
****1922년 문중 논의 홍기를 문중 대표로 추대함
18)답 안죽농 순한 녹동서원을 새로 세워 선비들을 깨우치고 힘쓰게 하니(휼륭한 선인들의 서원건립과 관련된 일들을 민족정기를 세우는 것으로 본듯)
19)소석 권태영 영주 소석정 건립 현재 없어짐 (영주문화원에서 간행 성동수창록에 실려 가장 많은 시가 수록됨(남호는 나보다 먼저 돌아와)독립운동가들이 함께 함 봉화 민립대학참여
20)김중백 영우 대륙이 혼란하여 인륜이 모두 무너져 내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2-1)이 기대에게 답함 주계군의 정려기문 부탁(주계군은 태종의 2째 아들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고모부였던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고 성종을 면대 귀양보냄 연산군10년 갑자사화시 그의 모함으로 아들 형제와 함께 피살됨
21)드림 답함 권성후 명섭 집에 아이가 감옥에 갇힌 일은 크게 근심할 일 아니지만(태극단 학생독립운동주도 4명 순국 광주의거에 비견됨
춘번 권명섭은 유곡출신 독립운동가이자 학덕 또한 높아
충제개암 칠봉 행적등 우환을 더불어 함께 한 의리
22)내종형 강경곡 대지가 어지럽고 온갖 냇물이 거꾸로 흘려 우리나라가 양맥이 회복할 길 없고
23)내종형 강달원 필 (춘양 강필 만산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유곡의 두 어른의 초상은 우리당의... 유곡의 독립운동가 권상익외
우리 겨례가 전어도 아니고 솔개도 아닐진데 가뭄에도 세금을 징발함(극한 재해)
어찌 연못이나 하늘에 살겠습니까?
정와 강공 만산의 유집은 볼 만한 것은 삭제당해
우리숙부(만산)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뜻은 저버릴 수 없습니다 춘번 권성후 명섭형(곽종석의 제자로 파리장서 참여 학덕도 높아 홍기와 교류함)은 앞서 허락함 나머지는 만나서 말씀드림(?)
곽면우등과 망미대에서 시를 읊으면서 나라일은 한을 달래던 만산이 남긴 유언? 춘번(퇴계학맥의 계보가 권상익 권명섭으로)
이부분도 연구필요할 듯
희당 탁여 한식(해저)은 오랜질병(심산유고 만사와 비밀경찰요사등으로 보아 참여한 것으로 보이나 구속되지 않아서)
석창 김창순(해저)은 이사감(안부전함 로 아는 사이들) 옥천이거 김환기의 편지(심산 아들)옥천 것임 연관성은?
(춘양과 청암정(닭실 종가)은 홍기의 고모댁 외가로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곳
24)손덕부 후익(많은 서신들 오감) 심산과 사돈간으로 심산의 든든한 역할 가장 어려웠던 이차유림에서도 해저와 후익등이 실제적인 역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저7천원 춘양 강필2,000원도 홍자기자의 설득(이나 역할을 더한 것으로 보여(공식기록 강필2000 남호2000원 4천원
해저는 8명이 주도 홍기외 실금액 5000원 모금 전해오는 얘기) 전달함
공식기록은 12500원이나 실제로는 약3만원정도로 알고있음(자세한 것은?)
가)시국의 형상이 막히고 험한 것이
나)심산의 아들 찬기를 사위의 반열로 거두어 주시니
다)심산의 병세 걱정 방문 계획
라)며늘 아이가(손응교) 아들을 안고 왜의 금품을 물리쳤으니
마)명월루 방문 바래미에 몇번 방문함
(심산유고에서 손덕부와의 서신에는 동강종가의 신주를 생가 고향인 바래미 생가로 옮겨서 혈연끼리 오손도손
살기를 가족들에게 당부한 기록 또한 나온다(심산의 집은 명월루터이며 심산의 생가 큰 집격은 명월루임)
이제까지 바래미가 정신적이자 물질적으로도 지주 역활을 해온 것으로 바래미에 대한 믿음을 나타냄
바)심산옹의 기록은 없앨 수 없는데 기록하지 않으려 할테니 덕부형이 말을 지어 기록하고 듣는 대로 말을 지어 보충하고
정능이 형과는 이웃하니(풍산 김씨 오록 종손 홍기의 누이동생의 시가)
탁여 한식 바래미 독립운동참여 구속기준이라) 순도창순 옥천이주(전부 함께 서로 안부할 만큼 잘 다는 뜻)
순도 창순도 심산에서나 홍기의 글에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토끼굴 같은 세상 보내신 경능 창백의 제문(심산의 사촌 독립운동가 바래미)을 손후익이 써서 홍기에게 보냄
(심산의 제문(닭실과 해저등은 주로 홍기를 통해서 보내짐)
심산의 둘째 아들의 행방?
심산옹이 일어나 걷는다
청구의 모임(향산 이만도)
심산옹의 태복조문
25)이탁 찬극
1890-1720 진성인 자는 찬극 호는 우석 예안 하계 거주 퇴계의 13세손 종조이신 이만도 이만규에게 수학 경사자집에 정통 사칠휘편 경사주편 2책 서술 유도의 구현 후학을 교육 도산대학 설립 뜻 이루지 못함
문집5권 석학 순도 족숙은 홀아비 옥천사람
채산옹(권상규로 의병대장 권세연의 둘째아들로 석학) 몇 수의 시를 지으니
청량유록을 사양하나 지으라하니(홍기의 청량유록의 탄생비밀인 듯) 잃어버리고 몇편이 남아
유교대학의 규모와 절목의 자세함은?
권중철 봉화민립대학 간부(부집행위원장)참여
26)이인길 이고 이동흠 설송체의 대가 하계 퇴계후손이며 의병대장인 향상 이만도의 손자 심산과 함께한 기암 이중업의 아들
실명까지한 여성독립운동가 김동삼의 딸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락의 아들(추월 한수정의 서체주인) 동생인 이종흠도 독립운동참여 삼촌 또한 참여 3대 8명의 독립운동가 배출집안 심산 독립운동에 참여(직계3대 8명)
감옥에서 돌아와 어머니 김락을 살핀다
문집간행(손후익 이동흠 김홍기 김태섭, 김보림(해저,희소→재선→우수→윤영<이만손사위>→보림→창식/감천댁)창돈과 함께간찰 약25통 민립대 명신전) 외 많은 분들이 문집간행을 많이함)서로 교류한 장소가 되는 듯(우수는 병인양료시 척사 소모사 역임
1933년 딸을 남산종택 장세명의 며늘이로 출가시킴(인동남산종택의 재산을 거들낸 세명이 독립운동가인 홍기의 딸을 며늘이로 맞이함? 또 한가지 친동생인 장세명은 심산의 맞사위인 장세형의 친아우)
손덕부 후익 집에 묘방이 있어 기록해 보낸다함
26-1)이고 이동흠
가장 많는 편지 왕래 홍기와는 사돈(약 받은 것만 80편 이상의 서신왕래)
김락의 둘째 사위가 바로 무실 정재주손임
김락을 매개로 내압 김동삼 임청각 무실등으로 다시 이어져
27)-1)이원조 시3편 보내옮(시의 교환들이 심산 뿐 아니라 무척 많아)이찬극 형에게 말하여
27-2)권 덕부 노선 하계 이서방 안부들어 닭실 사돈댁인 듯
교남지 간행소 문중일 맏아함
27-3)323 류의찬 동시에게 드림 장인인 유연박의 안부 물음(유연박의 아들로 독립운동*자료미비로 미등록됨)
27-4)류동시(의병참모이자 파리장서에도 서명한 류연박의 아들 ) 류연박은 만주로 망명한 류인식 김대락 이상룡등100명 이과정에서 류연박은 1919년 임동명 수곡리 한들의 정재종택을 협동학교로 무상제공 협동학교 유연박의 아들로 참여함
류지호도 의병활동에 참여하나 기록 미비로 독립운동가로 되지는 못한듯(안동소파록에는 서기로 나옮) 류연박은 홍기의 장인 홍기의 할아버지 친동생인 진림(해저)은 내방장으로 참여함(류연박과 동급으로 유연박이 서열 2위급 내방장은 서열3위급)류동시는 홍기의 처남 유연박의 상과 안부 받은 서신30통
안동의병은 각문중의 지원하에 이루어진 가장 큰 의병
1948 청구비(이만도의 비석)건립고유 손덕부의 고유문
1943 요증 문중과 당내 젊은이들이 횡액에 걸린자가 30명(해저,학생운동 김정진 김창엽 김만기 김창돈 독서회 민립대학 신간회 봉영청년동맹등이 바래미 주도로 이루어짐외 노동운동 참여 사건등....인듯)혹은 풀려나고 혹은 갇혀있어
(이것은 일제 말기에도 바래미 젊은 이들이 학생운동 신간회등으로 집단적으로 항거 감옥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한 것을
젊은 이들의 원귀등으로 표현하는 것임) 이적은 마을 의성김가86가구(타지포함 약100가구 에서 부락마을 전가구가 독립운동에 매진했음을 증명하는 사례 아닌가함)
27)장치극 세명(인동 남산종택 여헌종택으로 인동장씨 실질 종가)홍기의 사돈 편지 약30통이며 당시 친동생인 세형은 심산의 사위이며 독립운동가인 홍기를 사돈으로 맞이한 세명은 막대하던 인동장씨 남산종택의 재산을 다 말아먹었다고 난리남
정황은 가는데 증거가 없다함 하도 가난해져서 종손인 철수는 외가인 명월루에서 학교다녀
세형은 서신 많음 심산의 사위임(간찰11통) 내용이 어떠한지 궁금?
28)김정능 태섭(풍산 오록 종손) 유곡의 춘번형이 방문하여(춘번은 유곡의 권명섭으로 역시 독립운동가이며 학덕도 높아)곽면우 문인(만주 이거 독립운동가 많음 만주로 서신 교환한 곳은 이쪽이 아닌가함) 김태섭은 손후익과 이웃함(대구 남산)
29-1)족조 순부 수응
족조 순도 홍기는 청암정 고모를 곡하고 노일종숙을 잃어
403공산 어른의 빈소가 거두어 졌는지라 집사가 스승으로 모시던(송준길의 문하임) 스승의 법맥
29-2)이창길 종흠(이고 이동흠의 동생)독립운동가 동문의 달관과 서하의 실명(김락의 실명)
29-3) 김학선 사민 민립대학 안부편지
29)김덕연 용호 청산어른(권상익 닭실 독립운동가)는 우리당이 가히 곡할만한 일 닭실 파리장서와 이차유림에도 참여 이중업의 부탁으로 손문에게 보내는 이차장서 씀 (창수시회에 청산으로 호를 표시함)
30-1)족조 이경건 이회 황(김황 김우림)곽종석의 문인으로 심산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심산의 유고시에도 심산의 행적을 정리하신 분으로 천고당의 후손 10년전 명월루로 부자가 방문하였으며 신고당 문집5권을 명월루에 보내줌
탁여한식 돌아가심
천유당공의 묘갈문은 홍기가 수정한 흔적이 나옮
뽕밭이 바다로 변하는 변고를 겪음에
30-1)일가)낙산재 차운(김해에 있는 듯 우리집안의 기록 빼껴보냄(김해부사 대의 기록인듯)
30)1929년족숙 귀서 창락 성주 독립운동가 감옥에서 나온지 며칠되었다 심산의 조섭은 어떠한지 성주출신 병문안 계획
30-2)김둔번 문헌록 어렵다 과장됨
30_3)족조 공필 보림(해저,민립대학)명신록 간행추진 갈천공의 사행은 적어서 보낼 것이다 도촌에는 아직 통기하지 못함
31)족숙 회부 창근(해저)드림 독립운동가 바래미 절친
심산과의 서신은 1936년 이후 편지로 대부분 생가고향의 희성과 택동 팔오헌과 개암등을 서로 상의하고 칠봉과 천유당공등의
일도 상의하여 문중일등에 대해서도 상의함을 보임
32)심산에게 드린 편지 (5편인데 1936년 이전기록들은 나오지 않음 아마 대부분 그러할 듯합니다)
33)여 심산458 보내주신 시편은 읊어보고 심산이 시를 보냈다는 얘기며 여러사람의 시편과 함께 부치겠습니다(시편교류)
3분의 만사전달
락기(해저,암정댁)종군에게 유사를 배껴보내라
일지와 공의 행장 강호린 찬술
혜은공 희성에 대해서는 (생가로 심산6대조)
심산에게 보낸 편지내용 중 무신년 1728년은 영남이 원통함을 밝히는 날에 이진동씨와 함께 의논하고 주선해서
크게 넉넉함을 받들었고 임자년1732(?영조 16년)년 조정에 가서 호소할 때 삼계서원의 수석으로서 영남에 통문을 내어 대사를
일으켰습니다(만인소 얘기임) 의병활동의 시발이되는 영남만인소
1792년 영남만인소(일차)
(바래미 좌장과 생가 주손역활로 주로 심산과의 문중 대표격으로 심산과 끝까지 함께함)
손덕부 안부
심산생가의 종손으로 역활과 심산이 생가고향에 대한 생각을 였볼수 있음
***바래미 주도의 만인소였음
472 찬기감옥생활
자부가 아들을 안고 왜의 금품을 물리쳐
형기종군이 아내 맞이함
수응씨와 함게 묘소성묘 인동남산에서 이틀 머물러 혜은부군 묘지문
혜련(경능창백의 호 심산4촌)종숙이 종숙의 처소에 들릴 것이다(연락책 많이함)
477 편지로 고반동으로 이주 계획말씀하셨는데 괜찮은 곳인지요?
478다만 일가가 함께하여 즐겁게 살자는 뜻은 일찍 부탁한 말씀이 있었으니 가히 마음속에 맺어두지는 않겠습니다
중덕이 돌아옮에 은혜로운 편질를 받아(중덕으로 보낸편지) 중덕과 중소편으로 편지들을 보낸듯(중소로 된 편지는 있음)
곁에서 부지하여 도우는 사람이 없다하니 민망스럽습니다
칠봉선조등의 지문 상의(칠봉과 동강등에 대해서도 상의함을 봄)
평은비의 용두머리(팔오헌 선조) 신도비 상의(문중대표로 상의하여 팔오헌 신도비) 당시 팔오헌 신도비 지문 유함
찬기의 죽음에 대한 편지
1936년 이전의 편지들은 남기지 못해서 그당시 상황을 보는 듯
심산이 보내온 시도 드린 시편도 간찰도 있었음인데 심산은 여러번의 창수시회까지 열었는데 실리지 않은 점과 생가의 위치에 있었던 해저와의 간찰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는 점들은 이해하기 어려워
문중대표로서 생가 실질 종가로서 심산과 교류함을 보여줌
심산도 생가로 홍기도 혈족으로 생각함을 엳볼수 있음
닭실로간 고모의 가사집에는 우리 심산할배로 불려
33-1)원암 이원보(성동수창록 영주 발간 박제형 하겸진등의 파리장서 멤버들 참여
독립운동가 김정호의 문인(영주사람 광복후 국토분단을 개탄 세상과 인연 끊고 독서전념 일정치하 30년간을 기록한 일지)현재유고 남김)
34)소백산 유람기 27인 참여 시을 써서 권은필이 소수서원에 맏겨둠 2편은 소수서원지에 실려있음
(2편의 시를 보면 암울했던 시국을 한탄하는 구절이 항상 들어 성동수창 멤버 이원보(독립유공자 김동진 문하 권은필은 의병대장 권세연 아들이며 소수서원장 역임)외
참으로 아름다운 시글들입니다 우리는 남의 것만 좋은 줄 알지 자기가 가진 보물들을 알아보지 못해 그냥 묻혀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발굴하여 책으로만 발간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한번 읊어보고 지어보고하는 것들이 의미있지 않을까(이 시편들은 우리가 찿아야할 시편들임)
소수서원지에 노원철수(서원훼철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만인소를 격려)
p544
백운동
소백산 한가한 구름 중천엔 갠달
무릉선생 애당초 만산앞에 열었네
녹음 짙어지고 꽃은져 봄이 또 지나가도
백운동은 천년세월 변함이 없에
이수응(명춘) 김순도(창순) 김홍기(순우) 벗들과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백운동에 머무름
p557
물과 달 시원하고 원우 우뚝한 곳
십년만에 찿으니 감회 새롭네
백운동 구름 속에 경자바위 여전하고
뜰안 풀에는 문 밖의 향기 들려오네
세상은 짓밟혀서 풍우속에 어둡고***소백산27명 권상용에게 소수서원에 맞겨둠(권상용은 의병대장 권세연 아들
유자는 쇠잔하여 백발만 성성한데
죽계 마르지 않고 연화봉 고고하여
p562 강순오 김순도 중두순우 홍기와 더불어 운자내에 읊음
죽계 시원한 물소리 서원에 가득하고
초목 돌아보니 참된 빛을 입었네
현가는 갑짜기 천년의 가락이 끊어졌어도
변두는 여전히 백세의 향기 품어오네
옛날분 보이지 않고 구름만 아득하여
홀로 밝은 달빛 아래서 슬퍼하였네
지금 세상 비바람 몰아치는 때***************홍자기자 교우들의 간찰과 시는 이런 구절들이 많아
백발에 서로 만나니 뜻이 깊어라
587퇴계선생 시에 차운(노원 철수
연화봉푸르고 흰구름 이는 곳
주계구곡 찬시내 층층 깊이 들어가네
옛날부터 동방은 예악을 숭상하여
지금까지 영남선비 안자.증자를 배운다네
거울 같은 연못에는 물고기 활발하게 놀고
절벽 높은 산등성이에는 봉황 날아 오르네
천년 갠달은 끝없이 밝아
봉래산 그바닥까지 훤히 비추네
경자바위 김철수
당시에 불교숭상 실로 비통한 일
유언비어 일으켜 세상을 속였는데 경자 한 글자 씀에 만고를 깨우치니
푸른 하늘 밝은 태양 아래 돌은 의심할 것이 없네
퇴계시에 차운함
취한대
죽계구곡 머리에 암벽 가파르고
퇴도옹 만든데 옛모습 그대로네
고운 나무 봄 풍광 속 저녁비 걷히고
경렴정 달빛찬 이내 씻어가네
동방의 예악 지금 어디에 있던가
남국의 현가 홀로 보전하였네
경자 하나로 만세를 일깨워
사람마다 성인과 현인을 희구하네
814 추사가 권이제 돈인에게 명월루 현판의 주인인 영상을 한 이제 권돈인은 닭실인으로 서출신이라서 닭실에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함 영삼임에도 (이것은 들은 얘기로 사실 확인 안한 것임)
노원 철자 수자(남호고택)소수서원 무실 명월루와 제문 시문외에도 많은 곳에서 등장함
많은 활동이 이루어진듯(제문에도 알아주는 ) 노원의 시는 그냥 밝고 경쾌하고 물 흘러가는 듯한다 한데 홍기와 벗 27분들의 시는 풍진과 어두운 그림자를 한 구절 씩 섞어서 그 시대의 한들을 표출하고 잇다
35)갑계서 환란과 경사에서 효도와 우애 이름과 행실
35-1)묵재 이선생 정려 중건기 주계군 고모부인 임사홍을 탄핵 귀양보내 갑자사화시 임사홍에게 부자피살됨
35-2)학은기 쌍벽당인 듯?
36)천유당공묘 개갈시 고유문(이항 김우림의 선조 의성 김가 김황으로 나옮 파리장서의 주역이며 심산의 유고도 정리한 주역
36-1)천유당공 묘에 상석을 놓을 때 고유문 후손 김황
36-3)학정공 고유문
37)효산처사 김공 창훈<족보 337,표림 희직(수찬)후손,중종가 진춘>창 뇌사 (연구필요함)
우리 유학이 시국에 도움되지 않아서 신학문장려 서당 나라망함에 순국한 선열들을 본받지는 못할 망정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어머니를 잃는 자식을 버려두고 만주로 가서 후학을 기르겠다 가산을 정리 가족을 남겨둔채로 요하건너 훈춘에 여러 학교 설립
가기전에 홍자기자에게 한마디 신청(만국의 풍진에 빈한한 선비) 검토공(팔오헌 성구의 백형인 성후후손,표림 희직) 후손 자개산 노곡리
이부분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
--희직을 검토군이라 한 것은 홍문관 교리가 경연 ( 임금에게 강의 하는 자리 ) 의 검토관을 겸직하기 때문에 표림공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
38)문암처사 손덕부 후익 뇌사(심산의 며늘이인 손응교는 성주에서 오페라의 주인공이며 아들을 않고 일본의 청탁을 물리쳐
39)기려수필 발문 권상익 곽종석 김흥락등과 교류 독립운동가 매헌야록과 더불어 독립운동기록사의 양대산맥
홍자기자에 발문의뢰 그 큰 일을 감당하지 못함 사양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남겨 그 아들이 발문을 받아감
교류인물들로 보아 이미 할아버지의 활동사를 잘알고 계셨던 것으로 해석됨
40)
문암처사 손덕부 후익 뇌사 1930년 명월루 방문 해돌림을 보지 못하고 서거
41)안종훈 뇌사 1919년 파리장서로 영호남이 갇히는 곤액 파리장서시 규당공과 함께 갇힌듯 (호남인)규당공의 손자 1926년 명월루 방문10여일 머물러(파리장서에서도 감옥에 갖히었으나 서명하지 않아서 10여일정도 갖혔던 것으로 보임
***파리장서를 보면 중요하며 실제로 일할 분들은 서명하지 않는 분들이 많아 실제로 유림대표들을 심방하며 대의를 강론하고 서명받는 일을 주선하다라고 하며 실제 주도적인 일을 했음을 나타낸다
(심산유고를 보면 뜻 맞는 몇사람이 명월루를 방문해 다음날 권상원장을 맞이하여 권상원장이 안동과 예안은 우리가 책임 질것이다라고 나옮) 그리고 채산옹과 보훈처 서훈록에 보면 대표들을 심방 서명 받는 일을 했음이 나타나)
42)김군직애사 김정호의 아들, 김정호는 영주 독립운동가 김흥락 문하 갇힌 아버지를 모셔서 감옥에 아침 저녁으로 살피는 것은 37세 애사 김동진의 지극한 사랑 받음(홍기) 김군직은 명월루에 자주 들려
43)정와 강공 제문(만산)우국충정의 신하 이조참의 하규의 3자 독립운동가 대원군과 친함 곽면우등과 망미대에서 울분 달래
44)류연암 연귀 제문 무실 정재집 대지가 어둠에 빠져 문을 닫고 스스로 본분을 지켜 후손을 가르켜(퇴계 학덕)
(영남학파의 남명조식 퇴계이황 김성일 김흥락 남한조 정제무실 대산 이상정....의 정통맥 바래미는 정재와 대산 이상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석학)
45)쌍평 김공 익수제문 상전벽해 덧 없는 세상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음(창씨반대와 단발반대 유학을 지키며 소극적인 반일과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일본과 타협하는 유림등 3가지로 구분됨) 두월쪽인 듯 김홍기의 사돈댁(민립대학참여)
45-1)이종형 이계옹 무호제문 초초암 후손 김흥락문하 지금 천지가 닫히고 청산의 귀신 울음이 다 젊은이의 넋인데
45-2)박주사 영택제문 귀신이 넓고 높은 집을 엿보아 상전이 벽해됨(예천)
46)권 성후 명섭 제문 우리 유림 갖혔으니 1919년 형의 말 화살처럼 처음 마음 지키는 분 드물었습니다
채산(권상규 당대석학 닭실 권연하 2째 아들)옹과 더불어 회포를 함께 합니다
47)김학선 사민 산과들에 곡하는 젊은 원귀(해저마을의 젊은이들이 일본에 항거로 감옥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하고 일부 여러분들은 형이 확정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거문적인 독립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사례임
김학선 사민은 두월 출신으로 간찰 약 20통이상 (봉화 민립대학 참여)당시 두월은 봉화에 속함
48)남호공 제문(바래미 독립운동가) 공과 일초(김창근)옹 그리고 내가 유곡의 교정하는 자리에 갈적에... 망건과 머리털을 온전하게 하여 돌아갔습니다 지난번 우리 유림 같은 배를 타 운촌부군과 노원은 한퇴지 맹약
(단발을 하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킴을 의미함)
49)족숙 운서 창익(송암 경헌→범동→희승→호영→창익/섯밭댁,용하)제문 명월루에서 얼마나 많은 시를 읊고 즐기며 시제를 돌려가며 화답하니 궁산각치우의 오음이 서로 펼쳐졌습니다(선비들의 필수품으로 보이며 그당시 특히나 암울했던 시기를 맞이하여 더욱 더 성행한듯 )
남호는 식었으며 석창순도는 옮겨가 일초족숙은... 땅가득히 총칼에 다친죽음 귀신울음이 젋은이들의 원통한 넋입니다
(해저가 이차유림이후에도 젊은이들이 독서회사건 학생운동등으로 약 30명이 끌려가 매타작과 고문등에 힙 쓸린 것을 두고 나타낸 것임)
신묘생 동갑계 시첩
명월루에서 홍 기자가 여름에는 창수시회를 개최했으며 읊어진 시만도 1000편이 넘어간다함
(지어진 시를 함께 명월루에서 합창하면 선계에서 노니는 듯했다함
창수시회에서는 심산 창숙은 우로 개칭 우가 야우 구우등으로 등장(판정을 받아야함 연구대상 창수시 자체가 연구대상임)
해사 김정호 또한 등장하며(해사와 야우가 창수시회에 나란히 등장)
심산의 장남인 한기(독립유공자 순국)심산의 아들 편지봉투도 등장합니다(편지내용도 흩어져있던 것에서 발견함)
당대 유명 시인들과의 서신교류.....
어떤 형태로던 우리민족을 생각하고 참여를 하시던 분들이 주를 이루어
시편은 통채로 잃어버려 아쉬움이 남아 각 문집이나 유관 고택들을 대상으로 복원할 예정임
창수시에 대부분 홍자기자의 경우 백하(소백산 태백산하란 뜻 )라고도 표기하여 현재 남은 창수시편도 누구의 것인지가 판별이 어려워
50)족조 심원 준림(해저) 시국을 슬퍼하고 창칼에 다친 상처 가득하고
(이번에 발견한 홍기의 조부인 태림의 친동생 안동소파록 의병 내방장인 치헌 진림 밑에서 함께 공부함)
******태림은 정재문인으로 나오는데 의병 내방장 홍기는 진림에게 수학함
51)족조 침랑공 묘갈명(독립운동가)녹명첩을 거두자 창차 헤아릴 수 없어 겁내고 피하나 이것은 나의 뜻이다(후손 전 민정당 대변인 김중위(영남만인소 와은 한동후손,대산 이상정 관련)
52)모헌처사 이공행장 퇴계13세손 홍기의 이종형제로 채산 권상규 일초 김창근 김홍기 초초암 고택태생 이만도 선행이 자세한 칭찬 사례요초
53)망실 유인 전주 류씨(유연박의 딸 1897년 부부연(의병활동 유연박 참모 내방장 진림)부친상1900년 모친상 1905년 상당함 빚을 갚음에 장롱과 경대를 팔아서 갚아 혼사가 의병활동 당시에 이루어져 우연일가? 그당시 내방장 진림 참모 유연박 해저는 500원을 의병활동에 지원함 이와 유관할 듯
54)종증조 성균 죽남공유사 안동죄수 건수의 2째아들
55)고유공유사 한식(해저,시사가 어지러워 피비린네 나는 티끌이 천지에 가득하여 돌아갈곳이 없다 선왕의 옛의관을 보전하여 한식은 이차유림에 참여 비밀경찰요사 등장 심산유고도 구속되지 않음)
56)경암(해저)공유사 김흥락 문인 우리나라를 합병하여 종묘사직이 망함으로부터 비분 강개 의리를 지킴 의례준칙이란 것이 나오자 왜황에게 글을 보내 오랑케가 인륜이 없음을 꾸짖으니 이로써 누차 비방 당해 후손 독립운동가 덕기
산정 이중권 청산 권상익 기수 이수춘등과 교류(이부분도 연구)
57)김만기 심산의 4촌인 경능 창백의 아들로 (해저,감옥생활)이나 노동운동으로 기재되어 독립운동가에서는 누락 신간회에도 참여함
독서회 학생운동 일본의 징용에서 병영을 탈출 일본군과 유격전을 치름과 신간회 민립대학건설 노동운동등
어느 집 하나 나서지 않은 집이 없으며 또한 대부분 많은 분들은 명월루 홍자기자에게서 교육을 많이 받았음
특히나 홍기의 아들 정진은 대규모 조직과 앞으로 군사조직 까지 갖추어서 일본에 항쟁할 조직까지 많들 었으며 어린학생들이
한결 같이 목적이 무엇이나 조선의 독립이다를 외치며 한분의 낙오자 없이 당당하게 말해 4분이 고문으로 순국함
만사
석학 권상규 벗의 만사(의병대장 권세연후손)
창근만사 독립운동가이며 절친한 벗
창숙 만사
권상규 뇌사
아동흠 뇌사
장세형 뇌사(심산 맞사위)
창숙뇌사
중욱 뇌사(김홍기의 명월루 출신으로 고대총장이 일본군을 탈출하던시기 동지들과 탈영하여 탈영한 곳이 중국군이라
능력을 인정 받아 중국군 장교로 임명되어 일본에 항거함 덩신장군 휘하에서 유격전치룸
김정진 홍기의 아들로 광주 학생의거에 비견되는 대구상업고등학교의 태극단사건을 주도 독립운동가
(정진에 관한 기록은 옥중서신외 유관자료 완전히 확보됨
기타 부분의 호와 성함 그리고 몇 백통의 받은 편지들은 길림성에서 누구를 만나라는 편지와
많은 분실한 편지들을 초서등이라서 더욱이 해석하기 어려워 무척이나 많았던 토지매매문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쓰레기통에 버려(문중 대표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함)
외에도 이육사가와도 교류를 나타내는 원일형(독립운동가)에 대한 걱정(독립운동가 서한집)원일의 편지봉투도 나와
남한우(지례)북순우라는 투철한 실천 선비정신으로 심산과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 일차파리장서에서부터 더 어렵다는 이차유림단사건의 주도적인 역활을 하며 그 후로도 그의 삶는 가르키고 우리것을 지키면서(단발령과 창씨 하지 않음)우리의 의복을 끝까지 갖추고
오는 분과 연락닫는 분들에게 항상 우리민족정신을 고양하고 함양함으로서 일생을 심산과 함께 하여온
유교선비사상의 결정체 우리선조들의 만인소 디엔에이의 결정)
당신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평생동안 품었던 진림 고조부 친동생 할배와 아베
일본에 합방되자 바래미인들은 명월루에 모여서 일본에 항거하고 우리 교육과 일본에 협조하지 않을 뜻을 명백히 한다
막연히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산실로 알져진 명월루가 정말로 시인묵객 뿐아니가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느껴볼 수있는
곳이란 것이 증명된듯하다
해저는 그 당시기록으로 보면 총가구수 111가구에 의성김가들은 약86가구(아래참조)밖이다 내압에 비한다면 1/5밖일 뿐이다
약200년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온 벼슬과 역사
나라에 입은 은덕을 그대로 돌려드리고자 심산과도 약속한 거문적인 지원을 끝까지도 함께하며 3대째 공인받지 못한 분들 또한
전 가문이 독립운동 전선에 나셨으면 물론이며 한분의 낙오자 없었음도 물론이다
이로 인해서 후손이 절연된 집안
이주해 가신 집안
아직도 빈곤함 삶을 영위하는 집안등
그러나 긍지만으로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해저 바래미
이 휼륭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우리의 민속과 풍습
심산도 즐겨하고 할아머지와 우리 바래미인들이 좋아했던 시(창수)를 복원하는 것이야 말로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간찰이 나와서 국학진흥원에 맡기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나와서 재조명을 말한 것이며
그야말로 많은 것들이 드려나 물론 받은 간찰들은 하나도 번역되지 못하고 있어
초서라서 이것이 번역된다면 또한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지 않을까합니다
이것을 알고 보니까 집안들의 배경들 (실제의 집이란 배경과 가족관계로 이루어진 집안과 집들의 내력을 알아야 )
심산의 활동과 각집안과 문중의 그당시 활동들이 보이고
선비정신과 그당시 선비들의 삶들이 보입니다(이제까지 전문가분들의 서적을 본다면 집에 대한 것을 자세히 보지 않음으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들을 놓친 듯하며 심산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위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일 것입니다
과외 해저바래마(영남 유림의 요람)
1910년 한일 합방 111가구(의성김가86가구) 마을 유림의 본당인 명월루에 모여 절의를 지키기로 결의하면서 항일운동시작
일제의 유화정책에 유교사상을 꿋꿋이 지키기로 결의 2세교육을 학록서당에서만 시킴 반일의사표시
1919년 파리장서 초안이 명월루에서 쓰여졌다함(이부분은 연구대상)
청원서에 서명한 사실 드려나 60-70대 원로 6명이 끌려가 모진고문
물론 일차때에도 심산의 목적은 자금과 좌도를 움직일 방안이었음 이부분도 위를 참조
팔오헌 후손이자 만회고택계인 순흥 교자림자 집에서 바래미보다 많이 받아간 것으로 전해들었음
안동 영주의 친인척까지 고문과 매타작에 시달림 40대 8명이 주도(홍기 핵심 문중 대표역활)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았고(일본은 씨 )단발도 하지 않아(해방후에야 국법으로 깍으라면 깍겠다 김홍기 왈
신사참배도 하지 않아
1000통의 편지에도 김홍기 순우 만창만 있을 뿐이다
김홍기 김뇌식 김창근등 이차유림단)일차유림보다 더 어려웠음)논밭과 소를 팔아서 5000원 김지사께전달
김홍기는 김창숙의 지령을 김뢰식에게 전달했으며 김뢰식과 함께 강필(홍기의 외숙)을 방문해 강필을 설득 2000원을 다시 받아서 동래에 은거해 있던 김지사께 전달함(이것은 공식 기록)
홍자기자의 유집에 보면 우리당에서는 젊은 청년들 30명이 감옥에 갖히거나 젊은이의 원성이 편지글에 등장한다
(홍자 귀자의 유집에 자주등장하는 젊은이의 원혼과 고문에 시달리고 등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듯)
이와 학생운동 당시 김창엽과 김정진(태극단사건)
외에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지는 않았으나 이차유림단에 참여한 한식 김창희 노동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창백의 후손인 김만기 일본군을 집단 탈영하여 중국군 장교로 항일을 한 김중욱 심산에게 자금을 지원한 교림등
마을 전체가 사대에 걸쳐서 거문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가산이 탕진되고 ,교육을 제대로 못시키는 등,이주도 하고
후손이 끊기는 등
많은 고초로 지금도 어렵게 살아가
심산할배와도 항상 거문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지켜왔던 마을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가요
이리하여 개암공파 전체로 중지를 모아서 전부 도난 당하고 유실된 자료이지만 일부 남은 간찰등이라도 한테 모아서 휼륭한 기록을 발굴해내고 국학진흥원에 맏겨서 해석해내고 해저 바래미의 역사를 다시쓰고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지 않을른지요
당시만해도 청백리로 욕심없이 살아온 바래미지만
워낙 벼슬이 많아서 형편은 어느곳 보다 좋았음은 사실인 듯한데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너무나 궁핍해진 우리 일가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떠나가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아쉬울 뿐인데 (사실 심산의 둘째 며늘이가 한말 일제시대는 그렇다하더라도 해방후에 끼니 때우기도 더욱 어려웠다하며 정통성을 세우지 못한 이승만시대에 더욱 핍박 받았다라고함 바래미 마을도 이승만의 타켓이며 경찰들이 마루 밑에서까지 감시하고 엳듣고 했다함 심산이 가장 많이 방문했기 때문 심산은 이승만에게 반기를 들면서도 명월루에서 일주일 기거함) 김 정진의 대화내용 참조
우리마을은 심산과의 인연으로 성대출신이 너무 많아서 성균관대 마을이라 불리기도함
이제 한분 두분 많은 분들이 귀향길에 오르니 이 또한 반가운데
(많이 귀향했으며 앞으로 더욱더 많이 내려올 것으로 보인다)
만사
김학선 사민 (민립대학 설립) 편지약20통이상
경능창백 김정호 동지로 규합
김보림
권태영 소석 영주에 소석정 지음 민립대학(성동수창록에 가장 많은 시가 실려
김창근 철친 민립대학 집행위원장
강필 민립대학(이차유림 자금2000원지원)홍기의 외숙
중욱 명월루출신 일본군에서 집단탈출 중국군에서 일본과 교전
김창희 뢰식의 아들은 신간회 민립대학 심산과의 자금전달과 지원상황 논의등........
김만기 창백의 아들로 신간회참여 노동운동으로 감옥생활
이동흠 만사설송체의 대가이며 이만도의 손자 이중업의 아들 김락의 아들 이종흠은 동생 삼촌도 시아버지는 김동삼
만산고택 강필
많이 분실했으나 남은 간찰등도 많아(약1000통) 초서등으로된 편지들 정말 당대의 뛰어난 글과 글씨들이다(명문가들)
또한 시편들이다
이를 전부 해석한다면 더 많은 좋은 자료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당시의 생활상과 사고등을 볼수 있는 자료적인 가치도 높다 판단함
끝으로 중복과 필요없을 듯보이는 것들은 가문과 혼맥 가문(집)등을 그때 그때 알고보는 것이 그당시의 전체적인
파리장서와 유림단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며 이것은 제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이런식으로 모으고 해서
유관기관(현재로선는 국학진흥원에 맞겨서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며
종전의 심산관련해서 발간한 책들도 여기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써내려간 책들이다
(예를 들면 해저 바래미에는 바래미보다 닭실에 가까운 촌수가 많은 집들이 많아) 그러니 심산도 마찬가지로 닭실을 고향 혈족으로 여겼음은 물론 일 것입니다
현재 이름으로본 유관간찰외(국학진흥원에 기탁된 500점은 제외된것임)
1)이동흠관찰80통 독립운동가 이중업아들이며 설송체의 대가 홍기의 사돈2)장세형 심산사위11통 장세명30통(남산종택의 재산을 탕진한 종손) 3)채상규(의병)3통4)권명섭 권상용외(유림단8통)외 닭실가30통5)강필외 만산고택50통유림단외 민립대 관련)6)김홍기30 7)김창백심산4촌 독립운동(2통)8)김환기(심산 맏아들 )9)손후익 8통 심산사돈 실질적인 일 많이함10)손덕부 제문 9)김원일 겉봉투1통(이육사형)원일에 대한 편지는 서한록에 실려있어10)김창희(김뢰식 아들로 신간회 심산자금전달 지원상황 전달 민립대학설립1통)11)김중문 독립운동가1통)13)김창순(독립운동가1통)14)소석권태영 성동수창 민립대설립 15)김우림 민립대학? 7통)12)정재종가 유연박1통 유연시 유연즙50통 김락의 사위16)손후익편지7통14)김보림 민립대학 위인전 편찬 30통
창수시회 야우와 구우 필적감정 필요함(창숙은 벽옹을 고쳐서 우로 씀)17)만주 이거 독립운동가 많이 배출한 김태섭 오록 종손70통18)김학선 사민 민립대학건설 25통 19)김창징 교림아들 2통 20)강호 강영등 민립대학 21)신억직 신간회 회장
22)권상원장1통23)김중문1통 24)
창수시회 해사(김정호의 호가 해사임 필적감정
청산이 등장함 청산은 독립운동가 권상익의 호임(창수시회)나머지의 호들은 알수없어서 앞으로 내용과 인물을 밝혀야함
(외에는 호등으로 판독 어려워)
19)중국 길림성에서 만나라외 중국등 편지14통)
20)심산편지3통 겉봉투1통
21)강국원1통(성동수창멤버 22)김홍기 편지는 약100통이상 서상교편지 3통 23)김정진의 옥중 홍기에게 보낸 서신 20통
22)송준필간찰1통 23)김창숙의 묘갈명(교위공의 묘갈명외 몇편)
약100통이상은 내용해석 전에는 분간하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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