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梁氏)는 제주양씨(濟州梁氏) : 남원양씨(南原梁氏) : 충주양씨(忠州梁氏) 등이 널리 알려졌다.
양씨는 모두가 제주양씨에서 분관되어 있는데. 제주도에 분파된 토박이양씨를 제양(濟梁) 육지에 널리 퍼져있는 양씨를 육양(陸梁)이라 한다. 이 중에서 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다.
《己未 大同譜》서문에 양씨는 1587년 제주양씨와 남원양씨가 처음으로 합보(合譜)하기 시작한 이래, 여러 차레에 걸쳐 대동보(大同譜)를 간행 함으로서 동조동원(同祖同源)으로 서의 단합을 과시 하고 있다.
따라서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도 양관(兩貫)이 합보(合譜)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모든 양씨의 시조는 탐라(耽羅) 개국설화의 삼신인(三神人)중 한 사람인 양을라 (良乙那)다. 제주삼성(濟州三姓)인 양(梁), 고(高), 부(夫)씨 에서 시조 삼신인(三神人) 은 맏이가 양을라(良乙那), 둘째가 고을라(高乙那), 셋째가 부을라(夫乙那)이다.
그 중에도 양씨(梁氏)와 고씨(高氏)의 집안은 삼신인 서열을 놓고 서로가 맏집 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해왔다. 태 고적엔 제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어느날 한라산 북쪽 기슭 땅 속에서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나왔다. 이곳이삼성혈(三姓穴) 이라 불리는 모흥혈(毛興穴)이다. 이때가 단군창업 과 동시이다. 세 사람이 탄생 시기는 당의 요(堯) 9년이라고 구보(舊譜)에 실려 있으나 유사이전(有史以前)의 일이라 고증 할수는 없다. 삼신인은 짐승을 사냥해 고기를 먹고 살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해에서 이상한 나무상자가 떠 내려왔다. 가서 여러 보니 무지개 빛 광채 속에 아리따운 세 처녀와 오곡의 씨앗, 그리고 가축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삼신인은 세 처녀와 각각 결혼을 했다. 그러나 세 집이 함께 살 수 없어 영토를 정하기로 했다. 삼신인은 활을 쏘아 자신들이 정착할 비옥한 농토를 정했다.
첫번째 화살이 꽂힌 제 1도(徒 ; 현 제주시 1도동)에 양을라(良乙那)가, 두번째 화살이 꽂힌 제 2도에 고을라(高乙那)가, 그리고 제 3도에 부을라(夫乙那)가 각각 살았다.
그 후 양을라(良乙那)는 탐라국(耽羅國)을 창건해 개국왕(開國王)으로 군림 했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 108세 6년에 고자견(高自堅)에게 양위 하니 그때가 서기 912년 이었다. 탐라건국 이래 3천245년 동안을 통치해 왔던 것이다.
처음으로 육지에 진출하게 된 것은 선외가(先外家: 시조할머니)인 벽랑국: 탐진(碧浪國: 耽津 앞바다의 한 섬인데 마한시대에 속한 72개국 중의 한 나라)을 자주 내왕하던 과정 에서 가까운 탐진에 상륙, 그 곳에서 해로를 따라 지금의 광산 양과리(光山 : 良瓜里)에 상륙 정착 하면서부터이며, 이곳은 양씨 선대(先代)의 개척지 이자 거육양씨(居陸梁氏)의 뿌리를 내린 태(胎) 자리이다.
이로부터 신라 첨해왕(沾解王) 3년 양부(梁夫)가 이찬(伊湌)이 되었으며 미추왕(味鄒王) 2년에 서불감(舒弗邯)과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23간이나 겸직했었다.
이어서 양질(良質)은 미추왕(味鄒王) 20년 일길찬(一吉湌)이 되었고 22년에 괴곡성 (槐谷城)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양씨는 원래 양(良)자를 성자(姓字)로 쓰다가 신라때 양(梁)으로 개성(改姓) 했다고 전한다. 양을라(良乙那)의 후손 양탕(良宕)이 신라(新羅) 진흥왕 20년에 광순사(廣巡使)로 신라를 예방하니 진흥왕(進興王)은 많은 상과 작록 (爵祿)을 내리고 양(梁)이란 성으로 고치게 했으며, 이미 일찍부터 진출했던 선대(先代) 부터 양(良)과 양(梁)을 같이 쓰고 있던 때 였다.
양지(良志)는 신라 성덕왕 때 전후의 고승(高僧)으로서 도력(道力)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누란(累卵)이 위기에 처했던 국란을 타개하기위해 대불사(大弗事)를 이르키고 신라 예술의 극치를 이룬 국보급의 걸작품과 성서등을 많이 남겨 놓은 바, 석장사(錫杖寺) 발굴로 천 3백년 만에 재회하는 일품들이 각계에서 소개되고 있다.
양수(良首)는 무열왕 때 이방부령(理方府令)으로서 60여조에 달하는 대법전(大法典) 을 제정하는 대과업을 완성했고, 양신(良臣)은 문무왕 때 무장일길찬(武將一吉湌)하므로 공훈을 많이 남겼다. 양순(梁洵)은 통일신라 신문왕 5년, 신라국학에 수학, 장원 급제하 고 한라군(漢拏君)으로 봉해져 세습 함으로서 제주로 득관(得貫)하고 제주양씨의 중시조 (中始祖)가 되었다.
양섭천(梁涉川)은 성주왕자작(星主王子爵)이 되어 세습되었으며, 탐진(耽津)을 거쳐 신라로 진출한 이유는 탁라(乇羅)를 탐라(耽羅)로 개칭, 양(良)과 양(梁)을 동용하게 되 었다. 양씨(梁氏)가 남원으로 분적하게 된 시기는 신라 경덕왕 16년이다. 양우량(梁友諒) 이 왕실에 큰 공훈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함을 받아 남원을 관적으로 했으며 이때부터 제주와 남원의 양관(兩貫)이 생겼고 뒷날 충주(忠州)가 분관돼 삼적(三籍)으로 나뉘었다.
제주(濟州)는 고려 태조(太祖) 때 탐라성주(耽羅星主) 양구미(梁具美)를 중시조(中始祖) 로 하는 성왕공파(星王公派)로 분파되었다. 남원은 고려성종(成宗) 때 태조 왕건의 증손녀 (曾孫女) 사위인 병부낭중동궁시강학사(兵部郎中東宮侍講學士) 양능양(梁能讓)을 계세조 (系世祖)로 삼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원종 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양주운(梁朱雲)을 계세조(系世祖)로 삼는 용성군파(龍城君派)의 양파(兩派)로 나뉜다.
로 하는 성왕공파(星王公派)로 분파되었다. 남원은 고려성종(成宗) 때 태조 왕건의 증손녀 (曾孫女) 사위인 병부낭중동궁시강학사(兵部郎中東宮侍講學士) 양능양(梁能讓)을 계세조 (系世祖)로 삼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원종 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양주운(梁朱雲)을 계세조(系世祖)로 삼는 용성군파(龍城君派)의 양파(兩派)로 나뉜다.
충주(忠州)는 고려 태조 때 통합삼한대장군(統合三韓大將軍) 양능길(梁能吉)을 계세 중시조(系世中始祖)로 삼고 있다. 제주(濟州)는 원(元)의 지배를 받을 때는 원나라에 예속 되었다가 환속하는 등 여러 변천을 걲었으며 조선조 세조 12년 안무사(按撫使)로 고쳐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牧使)로 고치고, 진(鎭)을 두었다. 1946년도(道)로 승격하였고 1955년 제주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남원(南原)은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신라 문무왕 대 신라의 영역으로 하였고 신문왕 때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을 두고 남원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 때 부(府)로 고치고, 한때 대방군(帶方郡)이 였다가 후에 남원으로 고쳤다. 조선조에 이르러 도호부 (都護府)가 되었고, 1896년 남원군이 되었다.
신라통일 후 혜공왕조(惠恭王朝) 상대등(上大等)을 지낸 양양상(梁良相), 애장왕조 (哀莊王朝)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양양열(梁良悅)과 문성왕조(文聖王朝)의 시중(侍中) 양양순(梁良順)과 진성여왕조(眞聖女王朝) 도원수양양길(梁良吉)을 비롯하여 고려 개국후 의 벌역(閥歷)과 의용(儀容)은 끝닿을 줄 모르는 성세(盛勢)를 지속시켜나가고 있다.
충절(忠節)을 지켜가며 항전(抗戰)을 지속시켰던 경산부장군(京山府將軍) 양양문(梁良文)의 뒤를 이어 고려조에서도 수많은 명신(名臣)과 인재(人材)를 배출시킨 명문으로 종문(宗門)
고려왕조 창업에 공훈을 크게 세운 양능길(梁能吉)의 벼슬은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 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성종조(成宗朝) 병부낭중(兵部郎中)을지낸 양능양(梁能讓)은 경학 (經學)에 조예가 깊어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송조(宋朝) 국가감에서 전례(典禮)와 경의 (經義)를 강론할 정도로 박식 하였고 송(宋)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당대의 석학 으로 문중을 빛내기도 하였다.
이 박에도 고려조 명신으로서는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堤學) 양중규(梁仲奎), 의종조(毅宗朝)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명종조(明宗朝) 상장군(上將軍) 양익경(梁翼京)과 대제학(大提學) 양동재(梁東材), 공민왕조(恭愍王朝) 대제학(大提學) 양한서(梁漢瑞), 충렬왕조(忠烈王朝) 대제학(大提學) 양우(梁祐)는 조선 개국 후 이태조가 대제학(大提學)에 추대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충신(忠臣)으로 동방의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존경과 추앙을 한몸에 받고 양문(梁門)에 빛이 되고있는 명현(名賢)들이다.
한편 조선조에 명실상부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위상을 폭 넓게 고양시키면서 문과 급제자 71명과 수많은 명신을 배출시켰다. 양성지(梁誠之)는 조선(朝鮮)6조 (世宗~成宗)에 걸쳐 충신으로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재임 중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집현전(集賢殿)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대사헌 (大司憲)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당대의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쇄신(刷新), 국방정책과 농경기술 혁신에 이르기까지 선정(善政)의 주초를 이루었다. 한편 홍문관(弘文館)과 규장각(奎章閣) 창설에 주역이 되었으며, 《조선도도(朝鮮都圖)》와《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편수(編修)》《눌재집(訥齋集)》《유선서 (諭善書)》《시정기(時政記)》를 포함해서《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삼강사략 (三綱事略)》등 주옥 같은 명저를 남긴 문양공(文襄公) 양성지(梁誠之)의 의용(儀容)과 괄목할 위업은 양문(梁門)의 자랑임을 떠나서 유구한 만만년의 정통문화 민족의 긍지로서 청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의 아우 양신지(梁信之)도 상장군(上將軍)에 오른 당대에 유명한 장신(將臣)으로 문중을 빛냈으며, 특히 나이40에 벼슬길에 올라 만학의 각고를 뿌리쳐가며 중종조 대사 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다음 이조(吏曺)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두루 역임 한 문양공(文襄公)의 손자인 연(淵) 또한 돋보이는 인물이다.
이 밖에도 청백리(淸白吏)에 록선 된 양관(梁灌), 당대에 호남의 거유(巨儒)로 존경받던 명종조(明宗朝) 대학사(大學士) 양산보(梁山甫)와 문명(文名)이 중국에까지 떨쳤던 선조조 (宣祖朝)에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낸 양희(梁喜) 고종조(高宗朝) 공조판서(工曺判書) 양현수(梁憲洙), 구 한말 구국항일 독립운동에 선봉장이 된 양상기(梁相基)와 양한규 (梁漢奎), 광복군정보국장(光復軍情報局長)으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백범(白凡) 주석(主席)과 노병회(老兵會)를 조직하고 조국광복에 주초가 된 애국지사 양기하(梁基瑕),기미년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양진백(梁甸伯)과 양한묵(梁漢默) 또한 상해임정 국무령 (國務領) 역임 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창간하고 항일독립 정신 고취와 제도에 힘쓰면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4년여의 피나는 옥고를 감내하면서도 조국의 자주독립성 발헌에 전렴한 독립운동가 이자 언론계 태두(泰斗)로서 추앙 받고 있는 양기탁(梁基鐸) 지사(志士)등의 명헌(名賢)들이 문중(門中)에서 한층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