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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화승총의 세계사(5)
작성자 : 손상익
3번의 도입기회를 놓친 조선 화승총
참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조선은 대항해시대 당시 화승총을 도입하여 국산화 할 수 있는 기회를 3번이나 막닥뜨렸으나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 기회만 살렸어도, 조선은 어쩌면 일본보다 먼저 화승총으로 무장했거나 혹은 대등한 시기에 전력화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네덜란드 사람과 한 사람의 일본인이 그 기회를 만들었던 주인공이다.
박연 혹은 벨테브레의 화승총
일본의 타네가시마 섬 화승총 전래보다 16년이나 빠른 1627년 인조임금 때,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무역선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승선했던 일부 인원이 제주도 해안에 상륙했다.
선원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와 히아베르츠(Gijsbertz,D.) · 피에테르츠(Pieterz,J.) 등 3명은 식수를 구하러 제주도 해변에 올랐다가 제주 관아 병졸에게 체포됐으며 1628년 한양으로 압송됐다. 당시 서구 무역선은 총과 포로 무장했고 선원 대부분은 총포 전문가였다. 벨테브레는 1626년 중무장 상선 홀란디아(Hollandia)호에 승선하여 아시아에 왔다가 우베르케르크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제주도에 상륙한 3명의 네덜란드인은 당연히 화승총을 휴대했다.
한양에 잡혀온 3명의 홍모이(紅毛夷: 붉은 머리털의 오랑캐)는 오군영에서 화포제작을 담당했던 훈련도감에 배치돼 서구의 총포를 제작하고 조선군 사격 훈련을 지도했다. 동서양의 확연한 문화차이에도 불구하고 3명의 네덜란드인은 조선 사회에 훌륭히 적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조선군으로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등 영웅적인 발자취까지 남겼다.
임진왜란 당시 벨테브레는 왜군 포로를 감시·통솔하고 명나라가 끌고 온 홍이포(紅夷砲)를 복제생산 해냈으며 화포운영 훈련까지 담당했다. 벨테브레는 박연(朴淵 혹은 朴燕)이라는 조선이름으로 개명하고 귀화하여 조선 여인과 혼인,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리프(De Rijp)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전신상 기념조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의
모습은 조선에서 살았던 박연의 형상을 나름대로 묘사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행색이 이상하다.
기록에 따르면, 박연은 큰 키에다 노랑머리 푸른 눈의 전형적인 서구인이었다. 한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지낼 정도로 건장했으며 마치 도인처럼 점잖은 언행으로 선과 악, 길흉화복의 세상이치를 이웃에게 설파했다고 전한다. 또 조선에 귀화하기 전 동양의 각국을 여행했던 경험과 항해와 관련된 기상관측 등을 즐겨 이야기했던 것으로 미루어 박연의 남달랐던 조선 사랑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다.
효종임금 4년인 1653년에는 동족인 네덜란드인 하멜(Hamel,H.) 일행이 똑같은 경로로 제주도 용머리해안에 표류하자 박연이 직접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으며 이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는 일을 지휘했다. 하멜 일행이 한양 군영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들을 감독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문화와 풍속을 가르쳤다.
박연은 죽어서 조선 땅에 묻힐 때까지 조선군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조선의 국방을 염려했고 조선의 총포 개량에 노력했다. 화승총은 비교적 간단한 기계작동 방식이어서 벨테브레 같은 총포전문가라면 당시 조선사회가 엔간한 기계제작 인프라만 갖췄어도 충분히 복제 생산해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더욱 안타깝다.
조선인으로 귀화하고 수십 년 여생을 조선인으로 살았던 화승총 전문가로부터도 조선은 끝내 화승총 한 자루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멜과 화승총
벨테브레 일행 3명의 제주도 표류와 거의 흡사한 경로로 26년 뒤인 1653년 7월에 제주도 산방산 아래 용머리해안에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닿았다. 이번엔 표류가 아닌 선박자체의 난파였다.
중무장 상선의 포수였던 하멜(Hendrik Hamel: 1630-1692)과 36명 선원이 몽땅 제주목사 이원진이 이끈 군졸에게 체포되었고 10개월간 제주 감옥에 갇혔다. 하멜 일행은 그들의 동족이자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박연)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사회에 적응하려 들지 않았고 감옥 탈출을 시도하는 등 기회만 닿으면 도망가려 애썼다.
난파한 다음해 봄에 조선 조정은 이들을 구슬리려 한양의 박연을 제주도로 급파해 통역을 맡기고 한양으로 압송해 효종임금을 알현시켰으나 하멜 일행은 끝내 “일본으로 송환해 달라”고 우겼다. 조선 군부는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강제 배속시키고 박연이 회유해가며 서구의 신무기 총포개발을 맡겼다. 그러나 워낙에 심드렁한 하멜이어서 그 진도는 기대난망이었다.
당시 효종 임금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은밀한 북벌계획을 진행 중이어서 하멜 일행을 이용해 서구의 총포를 복제 제작하려했고 조선 조정의 하멜 회유가 눈물겹게 이어졌으나 하멜 일행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하멜은 비밀리에 찾아가 조선 탈출과 네덜란드 귀환을 요청했다가 뒤늦게 조선 군부에 발각돼 처형될 위기까지 몰렸다.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이 도망갈 궁리만 하자 신무기 개발을 포기, 훈련도감에서 내쫒고 조선 상륙 3년만인 1656년 3월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으로 이관하고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 보냈다.
조선군의 엄격한 감시로 유배 생활하던 하멜은 흉년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구걸행각에 나섰고 전라병영 절도사 구문치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초가집과 텃밭을 주어 하멜 일행은 7년간 그곳에서 자립해 먹고살았다.
1653년에 또다시 흉년이 들자 하멜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씩 분산 배치했다. 전라좌수영에 배치된 하멜은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고 1666년 동료선원 7명과 함께 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는데 성공했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에서 일본 바쿠후와 접촉, 조선 조정과 협의가 이루어져 나머지 네덜란드 억류 선원도 1667년에 석방돼 나가사키로 건너왔다. 하멜 일행은 1668년 마침내 동인도회사 상선을 얻어 타고 조국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하멜은 화승총이 아쉽던 조선에 실망만 안겨준 채 조국으로 돌아간 그해 억울하게 조선에 억류됐던 세월을 금전으로 보상받기 위해 자신의 감금사실을 조목조목 열거한 ‘네덜란드선박의 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와 첨부 부록 ‘조선기행문’(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을 출판했다. 우리에게 ‘하멜 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책이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 사회 시스템 전반에 걸친 속살이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된 책이다.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 배상을 위한 보고서였던 ‘하멜 표류기’는 엉뚱하게도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조선이라는 나라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네덜란드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일본이 유럽의 조선 직통 무역항로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네덜란드는 1,000톤급 대형 무역선 코레아(Corea)호를 새로 건조하여 조선과 직항 무역 항로를 트려했으나 왜국 바쿠후가 중간에서 길길이 날뛰고 훼방 놓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에서 출생했다.
이 비구상 전신상 기념조각도 호린험에 세워져 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번성하며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을 왕성하게 벌였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하멜도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에 취업하여 포수(砲手)로 승선하고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로 건너가 서기(書記)가 되었다. 1653년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에 승선하여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 헨드릭 하멜 일행이 승선하였던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의 복원모습.
상선이 표착했던 제주도 용머리해안 입구, 하멜기념비 부근에 설치돼있다.
화승총의 복제생산이 시급했던 조선 입장에서 보자면 하멜의 조선 표류 14년은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조선의 회유를 거부한 네덜란드 포수 하멜이나, 난파 선원하나 제대로 조선 편으로 만들지 못한 조정도 문제가 있었다. 안타깝지만, 대항해시대의 조선 화승총 생산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
김충선 혹은 사야가의 화승총
임진왜란 때 22,800명 왜군 2번대를 지휘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우선봉장(右衛門)은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五郞: 1571-1642)였다. 21살의 노부타네는 3,000명 왜군 화승총(鐵砲)부대를 지휘한 지휘한 장수로 부산에 상륙하여 송상헌이 지키던 동래성으로 진격한 바로 다음날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 앞으로 귀순의사를 밝힌 편지를 보냈다. 서찰의 앞부분은 이렇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閤下: 고위관직 존칭)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도 싸우지 않았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조선 조정이 깜짝 놀랐다. 화승총 정예부대 왜군장수가 자신의 부하들이 조선의 여자와 어린아이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에 대한 염증과 명분 없는 전쟁의 회의를 느껴 “난 비겁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의 부대는 절대 약하지도 않았다. 허나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휘하 화승총수 500명과 함께 귀순한 사야가(沙也可)는 객관적인 정황을 모두 꿰맞춰 볼 때 하라다 노부타네의 또 다른 이름임이 분명해졌다. 일본은 자신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야가의 조선귀화 사건을 치욕으로 여기고 관련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한편 일본 쪽의 사야가 집안을 말끔히 날조삭제한 뒤(그가 조선으로 출병하여 귀국하지 않았다는 기록까지는 삭제하지 못함), 1960년대까지도 “그런 장수는 일본에 없다” “조선의 날조다”며 철저히 오리발 내밀었다.
귀화이후 사야가는 즉각 조선군 신분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선조 임금은 사야가에게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보임했다. 사야가는 곽재우 의병부대와 함께 싸웠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경상우병사 김응서 휘하 장수로 울산성을 공략하는 등 78회나 전투에 참여해 승전했다. 조선의 바다를 이순신이 지켰다면 육지에는 김충선 장군이 있었다.
도원수 권율의 주청으로 사야가는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서하며 선조 임금이 친히 김해 김씨 본관을 사성(賜姓)하고 김충선(金忠善)이란 조선이름까지 하사했다. 김충선은 이때부터 화승총에 관한 지식을 조선 군부에 적극 이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직접 공방을 만들어 화승총 제작과 염초 제조 기술을 조선군부에 전수하고 그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사를 직접 훈련시켰다는 기록도 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북쪽 변경에서 청나라 오랑캐의 침입이 잇따르자 자청하여 국경방어 임무를 맡아 10년간 복무했고 그 공로로 정2품 자헌대부의 상급인 정헌대부(正憲大夫) 품계를 받았다. 인조임금 때인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도 토벌군에 참여,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하사한 토지)를 받았으나 그 땅을 한양 오군영 수어청 운영을 위한 둔전(屯田)으로 기부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자원해서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전투에 출전, 오랑캐 500여 명을 사살할 공로를 세웠으나 결국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말자 김충선은 대성통곡하며 대구 달성군 가창면의 우록동(友鹿洞)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결혼하여 우록동에 정착하여 농사짓고 향리 주민교화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642년 71살 나이에 세상을 떴다.
▲ 김충선 초상.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조선 땅에서 살았다.
대표적인 자손으로는 제4공화국 시절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씨를 꼽을 수 있다.
김충선 혹은 사야카(さやか)가 귀화하여 조선인으로 조선 땅에 살았던 햇수는 50년이나 된다. 일본 뎃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전문가였던 김충선이 조선제 화승총 제작에 성공하고 대량생산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어 매우 안타깝다.
다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일본과 달리 당시 조선의 산업기반은 형편없었다. 선비를 우대하고 그 아래로 농사꾼을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라 여기던 철통같은 유교적 신분제도 아래서, 쇠붙이 두들기는 대장장이는 아무리 걸출해도 천민 대우받던 사회분위기였다. 소프트웨어가 구비됐던 김충선이었어도 제철과 야금(冶金) 철제 단조 기술 등 고단위 하드웨어가 절대 부족했던 조선의 처지에서 화승총 국산화는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조선 군부는 임진 왜란이 끝나고 10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된 화승총을 만들지 못했다. 선조 임금 때는 물론 북벌을 진행했던 효종 임금 시대마저 비싼 값을 치르고 왜국 화승총을 수천 정씩 수입, 조선군을 무장시켜야만 했다. 여러모로 가슴 아픈 조선의 화승총 도입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계속 - (6) 백두산 범포수의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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