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룻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 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룻기 강해 31번째 시간입니다. <신은 죽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찬송할찌로다! 하죠. 찬송하다, 는 바라크라는 동사입니다. 바라크라는 말이 찬송하다는 뜻도 있고요, 그리고 축복하다, 복을 주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복, 축복, 이런 말은 전부 이 바라크에서 온 말입니다. 바라크가 복을 준다는 건데, 축복하고 복을 준다는 건데 그 원래 의미는 뭐예요? 무릎을 꿇다, 찬송하다 라는 말이에요. 찬송은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라고 했죠?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게 복인 거죠, 사실은. 참된 복은 이겁니다.
인간은 복을 좋아하죠? 그런데 인간이 좋아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그 복은 우리끼리 멋대로 합의하고 멋대로 정한, 성경과는 관계가 없는, 복음은 아닌 겁니다. 인간들끼리 합의한 좋은 것, 그런 거죠. 그런데 그걸 오늘날 교회에서 그걸 주는 걸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죠. 그리고 또 그걸 강조하면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도 합니다. 그건 그 말이 자기 마음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들겠죠. 그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에 드니까 인간들의 참심, 즉 선과 악의 두 마음으로 볼 때 아, 이 세상에서 나를 건강하게 해주고 돈도 많게 해주고 출세하게 해주고 자식도 보게 해주고 이런 인간들끼리 말하는 그 복을 준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 몰려드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복은 바로 무릎을 꿇는 겁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거는 하나님 앞에 순복한다는 겁니다. 엎드린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주이시다, 라는 그 고백을 하고 무릎을 꿇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이게 복인 겁니다. 이 자체가. 피조물의 원래 자리를 찾는 것, 이게 복입니다.
그 자체가 복인데 우리가 그 바라크라는 말을 받아들고 이게 뭐지? 복이 뭐지? 하면서 국어사건으로 가버리니까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나를 즐겁게 하는 말들이 마음에 들어서 아, 이게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인가보다 하면서 교회에서 전부 그거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앉아서 그 말씀을 듣고, 듣는 걸 샤마라고 합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 순종도 샤마입니다. 모음만 조금 다른데 똑같은 말입니다. 자음이 같으면 같은 말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이것은 다 샤마이고 다 같은 말입니다. 내 말 좀 들어라! 들으면 뭡니까? 들으면 따라야 하는 거죠. 그 말이 담겨 있는 거죠. 전제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그걸 청종이라는 말로도 씁니다. 듣고 따르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 들음은 신약에서는 아쿠에라는 말을 씁니다. 들리는 것, 소식, 또 소문이라고도 합니다. 소문을 우리가 막 떠는 말, 이걸 원래 소문이라고 안 합니다. 소문은 바 소(所)에 들을 (聞), 해갖고 들은 것, 들리는 것, 이걸 소문이라고 해요. 이 들음, 들음이 신약의 용어로는 아쿠에고 구약의 용어로는 샤마인 거죠. 하박국 선지자가 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이 놀랐다고 하죠? 그 소문이 샤마, 샤마의 명사형 세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요.
예수님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시죠? 그게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들음은 아쿠에라고 하고 소문, 들은 것과 함께 가르친다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가르침. 예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가르쳐주시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들은 바 되고 그 들은 자는 그것을 따르는 겁니다. 이것이 바라크, 복의 원형인 겁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믿음을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오직 믿음뿐이다. 하나님밖에 없다. 다른 걸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순종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잘 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 부분에 오면 십중팔구는 옆으로 샙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복 주신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잘 가다가 끝이 달라지는 거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기도하라, 그래야 복 주신다. 그게 복을 받는 비결이다, 라고 합니다. 뭡니까? 사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복인데 이걸 해서 뭔가를 얻어내는 걸 복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목표는 뭡니까? 신앙의 목표는? 자기입니다, 자기. 자기를 신앙하는 자들이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그들이 신앙생활 하는 그 목표는 또 뭡니까? 나의 잘 됨. 나의 행복, 나의 높아짐, 나의 복. 이것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그 복들. 이걸 챙기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진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복음이고요.
그리고 인간의 복음이라는 건,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인간의 복음이라는 건 바꿔 말하면 마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 그 뜻을 순종하지 않을 때, 그 뜻과 같이하지 않을 때 그것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탄이라고 해요. 대적자, 사탄이란 말뜻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를 하고 그걸 목표로 해서 교회를 나가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대적자로 살고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한 신앙, 그거는 사실 우상숭배인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잘 돌아보세요. 그리고 인생 자체를 돌아보세요.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자기입니까? 온통 자기죠? 내 마음에 들어야 그것도, 하나님도 믿어주는 거죠. 맘에 들지 않으면 필요 없는 겁니다. 배척하는 겁니다. 우리 성경에서 많이 보잖아요? 그죠? 세상 종교들의 공통된 목표, 그것이 자기 행복이거든요. 나를 위한 신앙 이거는 우상숭배고요. 그 우상의 정체는 항상 자기인 겁니다. 자기, 자기 사랑, 그리고 자기 숭배. 모든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받들면서 살아갑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시스라는 사람이 나오죠? 이 사람이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다가 거기에 너무 반해서,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반해서 입맞춤하려다가 그것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걸 깨닫고 슬픔에 빠져서 자살합니다. 자기애, 자기도취라고 하죠. 나르시시즘, 이게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이 나르시시즘, 자기 사랑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된 인간들이 동일하게 갖고 있는 그 실존인 겁니다. 자기 사랑이, 인간들이 열심히 저지르고 있는, 열심히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것이 죄의 본질인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거. 이것이 죄에요. 그리고 죄의 성격은 전부 그겁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합치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합일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왜 남을 비판하고 미워합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자기와 맞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남을 미워하고 비판하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가 가장 사랑한단 말에요. 그런데 남이 자기를 자기만큼 사랑해줄 수가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비판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죄, 이 죄는 이런 형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모든 죄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합니까? 자기 사랑 때문에. 왜 과거의 상처 운운합니까? 자기 사랑 그것 때문입니다. 나의 결점이나 실수는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합리화시키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비판하고 손 가락질 하죠. 그 이유가 뭡니까? 자기 사랑입니다.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자기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마세요. 학대하고 자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 사랑의 잘못 된, 왜곡된 사랑에서 빠져나와서 진짜 사랑을 발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내가 완전하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내가 남보다 낫다는 환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걸 깨닫는 게 구원이고요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그 자각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하신 설교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잘 분별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올 한 해 무엇보다도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찬양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예배시간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찾으십니까?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생 하나님 앞에 드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 앞에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모든 결박이 풀어지고 자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는 내 삶의 거 어느 해 보다도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그러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여러분은 예배에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큰 복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죠.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모범적이고 신실한 설교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많이 듣던 그런 설교이기도 하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분별이 됩니까?
‘주여, 내가 예배시간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기 원합니다’. 라고 합니다. 이 주체가 누구입니까?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죠? 내가 예배시간에 변하기를 바란대요. 나의 변화는 또 예배시간에만 가능해진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 전에 뭐가 잘못된 거냐면. 교회가 이 예배당이라고 하는 그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교인들에게 심어준 것이 먼저 잘못입니다.
예배는, 성도가 교회에요. 교회고 성전입니다. 여기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산 예배.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그 산 제사, 산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당에 올 때, 교회당에 올 때만 내가 성전에 왔다는 그런 착각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이 산 예배를 드린다는 바른 인식을 심어주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내 교회, 우리 교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 하나님 당신 하나님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내 교회가 따로 있다고 해요.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니까요. 내가 교회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게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뭔가 충성심을 끌어내고 얻을 걸 더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요인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식의 인식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배라는 거는 삶 자체로, 산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내가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고 그래서 나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드리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건.
그리고 예배에 승부를 걸라고 하죠? 승부를 건다는 건 뭡니까? 뭔가 큰 걸 얻어내겠다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승리하겠다는 거죠. 이기고 지는 승부를 건다고 합니다. 근데 그 승부를 통해서 큰 복을 받겠다고 합니다. 완전히 뭐가 복인지 오해하고 있는 그런 설교인 겁니다. 성경을 국어사전식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아까 그 복에서 봤듯이.
그 대표적인 게 또 형통이라고 했죠? 형통. 찰라흐라는 거는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그 감옥에 있을 때, 그때 형통했다고 해요. 노예 생활할 때 형통했다고 하고 그거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발이 착고에 차이고 그래서 영혼이 그 쇠사슬에 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였지만,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그걸 성경에서는 형통했다고 하는 겁니다. 형통하다고. 그걸 찰라흐, 앞으로 나아가다, 발전하다, 인데 그걸 우리 말에서 형통이란 말을 채택을 한 거예요.
우리 성경이 어떤 식으로 번역됐는지를 잠시 이해를 도와드릴게요. 애초에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구약은 히브리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언어. 헬라어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이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세계공통어가 됐어요. 지금의 영어처럼. 그 말이 퍼져있었기 때문에 신약 때 당시가 로마 시대지만 언어는 그리스어가 공통어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대화를 국제적인 대화 소통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이 그리스어로 쓰여졌어요. 그 언어들이, 영어나 다른 많은 언어로 번역이 됐겠죠.
그중에 가장 대중적인 영어 성경이 중국으로 들여가 선교에 사용됐어요. 그렇게 그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우리나라에 온 거예요. 그 성경을 번역했어요. 그래서 어려운 말이 그렇게 많아요. 착고도 어렵지만, 뭐 헌화, 헌화는 보통 꽃을 바치는 건데 우리 성경에서는 막 시끄럽게 떠드는 걸 훤화라고 해요. 이거는 국어를 전공한 사람도 잘 모르는 말이에요. 이게 중국어를 번역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형통이란 말도 그런 과정에서 왜곡이 중첩되면서, 그러니까 언어라는 건 번역이 되면 될수록 살짝살짝 원어의 진의와 좀 다른 면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형통이니 복이니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된 겁니다.
또 크게 오해하는 대표적인 말이 부흥이죠?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회가, 교인 수가 늘어나거나 재정적인 면이 좋아지면 그걸 주로 부흥했다고 하죠. 부흥이란 말은 우리 성경에서 하박국서에 딱 한 번 나와요. 그런데 원어로는 많이 나와요. 근데 우리 한글로 ‘부흥’이라는 말 자체는 하박국서에 한 번 나와요. 그리고 이 부흥이란 말이 영어에서는 revive 그러니까 활기를 되찾다. 부활시키다. 이런 뜻이고요. 그리고 또 renew, 다시 새롭게 하다. 주로 이런 뜻으로 해석이 되는 말입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구절에 부흥이 들어 있죠. 보면요,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의 소문, 세마, 세마를 내가 듣고, 샤마하고 그리고 내가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거는 야레입니다. 야레는 아주 무서워서, 떨었다는. 아주 무시무시하게 놀랐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이 어디에 쓰였느냐면요,
(창 3:10) 아담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그때 하나님이 오실 그때 숨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할 때 그때 야레라는 말이 쓰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인다고 했죠? 하나님이. 죽고 또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한다 했는데 아담이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할 정도로 크게 놀란 상태인 겁니다. 그러니까 야레라는 말은 엄청나게 놀랐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이 정도로 놀랐다는 겁니다. 왜 놀랐느냐면, 이 하박국은 짧은 성경인데요, 한 장밖에 안 되는. 이 이스라엘 사회가 엉망진창이니까 하나님한테 하박국 선지자가 막 하소연을 합니다. 사회가 이 모양인데 하나님 왜 이걸 깨끗하게 해주지 않으세요? 저 엉터리 관리들 위정자들 이들을 왜 벌 주지 않으십니까? 하고 하나님한테 하소연을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면요,
갈대아 민족, 갈대아는 메소포타미아, 아브라함이 떠나온 것이 갈대아 우르죠? 그 지역이 바벨론입니다. 그 지역에 사는 갈대아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은 조금 황당하죠. 사회가 좀 엉망이어서 사회를 좀 개선시켜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나운 민족, 매 같고 표범 같은 그 민족, 독수리 같은 그 사나운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하박국이 너무 놀랐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살리겠다고 하는 그 참뜻을 깨달은 겁니다. 죽여서 살리겠다는. 거기에서 내가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큰일 난 거죠. 완전히 지금 다 죽게 생겼으니까 엄청나게 놀란 겁니다. 그런데 놀랍지만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당신의 일을 이 수년 내에 행하십시오, 라고 하는 겁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하라고 하는데요. 주의 일은 신약에서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라는 질문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죠? 하나님 일 뭡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죠?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합니다. 믿음이에요. 믿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게 우리의 일이고 그게 또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새 창조의 일을 해가시는데 그걸 이 삶 속에서 우리를 순복시켜 가시는 겁니다.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라고 하는데요. 수년이라는 말은 테레브라고 하는데 테레브는 한가운데고요. 샤마라는 말에는 해, 연, 이런 뜻이 있습니다. 몇 년도, 몇 년도 이런 말, 몇 달, 몇 달 이럴 때 샤마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 해들 가운데, 이걸 수년 내라고 번역을 했어요. 해들 가운데, 년도들 가운데. 그러니까 당신의 일, ‘그 일을 꼭 반드시 있게 해주세요‘ 라는 말에는 하야 동사를 또 쓰고 있습니다. 부흥케 하옵소서, 라는 이 말은 하야에요, 하야라는 동사에요. 하야는 뭐냐 하면 영어의 비동사 같은 거예요. 있다, 존재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그 일을 이 해들 가운데 있게 해주세요. 반드시 있게 해주세요. 이런 뜻입니다. 피엘 명령형이어서, 하야가, 피엘은 강조형이잖아요. 반드시 꼭 있게 해주세요.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샤나가 중요하겠죠? 이 년도들 가운데, 해들 가운데라고 했는데 이 해가 뭐냐? 샤나가 뭐냐? 이것만 알면 아마 자연스럽게 해석이 될 겁니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여기에서 평생이라는 말이 샤나라고 쓰여요. 샤나. 샤나의 복수형 샤님. 그러니까 샤나는 평생, 일생, 이런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 뜻을 여기에다가 대입해 볼게요.
“이 인생 가운데 당신의 일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당신의 일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그 믿음, 그것이 우리의 인생 중에 드러나게 해주세요. 뜻이 되죠? 그리고 오히려 더 정확한 뜻인 겁니다. 부흥케 해주세요, 라는 거는 맞지가 않아요. 하야는 그냥 비동사라니까요. 있게 해주세요, 존재하게 해주세요. 나타나게 꼭 있게 해주세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인생 가운데 주의 일, 예수 믿는 일, 그것이 반드시 우리 인생 중에 나타나게 해주세요. 나 좀 구원해주세요!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부흥케 해주세요, 하고 교회마다 부흥회니 뭐니 이런 걸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이 부흥이란 말이 나왔다고 했죠? 갈대아 사람들이 우리를 다 죽이러 오는 이때, 그때 이 하박국 선지자가 놀라고 떨린 마음을 가지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의 일이 반드시 나타나게 해주세요. 우리 인생 중에. 그럼 뭐예요?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예요? 이스라엘을 죽이는 겁니다.
나를 죽여주세요! 나를 죽이고 믿음 주세요! 그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 의인이라고 하는 자는, 성도라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걸 기도하는 겁니다.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나에게 필요한 거 주세요. 라는 그런 유치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 주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나 중심으로 사는 이 인생 끝장내주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그 믿음 주세요. 그 인생 살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좀 구원해주세요. 이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내 안에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니까요. 하나님은 그 믿음만 보신다니까요. 여러분이 이 세상 다하고 하늘나라 가면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하나님이 뭘 보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고 이 일도 했고 저 일고 했고 아무리 좋은 거 많이 만들고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해도 그 믿음 없으면. 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사니까. 하나님은 오직 그 믿음만 보시니까. 예수 믿는 그 믿음만 보시니까. 그 믿음 있는지, 없는지, 이것만. 우리가 갖고 갈 건 믿음 밖에 없는 거예요.
믿음은 뭐예요? 어떻게 해야 나타난다고 했죠? 내가 부인 될 때. 내가 죽을 때. 그 성경의 일관된 흐름 속에 이 하박국의 내용도 다 들어있는 겁니다. 생뚱맞게 우리를 잘 되게 해주세요, 부흥하게 해주세요! 이런 말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부흥케하소서. 이 말씀의 참 뜻. 나 죽이고 예수 주세요. 믿음 주세요. 하나님 믿는 그 믿음으로 갈 수 있게 나를 해주세요. 그래서 나를 제발, 나좀 구원해주세요, 라는 그 간절한 소망이 이 ‘부흥케하소서‘에 들어 있는 겁니다.
결국은 나 죽여주세요. 갈대아 사람들 오면 나를, 이 표범 같고 독수리 같은 사람들이 오면 다 죽을 텐데, 그렇지만 죽여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믿음 주신다고 하니 두렵고 떨리지만 그거 주세요,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동안에 보면 외적들이 굉장히 많이 쳐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뭘로 보셔야 되느냐면, 성도로 봐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에요. 교회. 이스라엘로 교회로 대입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도고 교회라면 나로 대입해서 보시면 돼요. 민족이지만, 역사 속에서 민족이지만. 그러면 그 대적들이 하나님이 보내는 회초리로 쓰이는 거에요. 하나님이 보내는 거예요, 그 대적들을. 대적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죽여가는 거예요.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가는데 하나님이 그쪽으로 가지 말라. 모압쪽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쪽은 내가 지키는 데다. 그래서 비켜가게 하시죠.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모압을 어떻게 해요? 모압을 들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들어서 이스라엘을 정복해버리게 합니다. 대적을 하나님이 기르신다니까요. 기르고 보호하셨다가 이스라엘을 치는 회초리로 삼으시는 거예요.
내 인생 중에 대적이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어요. 하나님이 지키고 기른 그 대적들이 여러분을 인생 중에 칠 겁니다. 계속 칠 거예요. 하나님의 회초리로, 도구로 사용될 거예요.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멀리 있는, 아주 멀먼 뭐 관계도 없겠지만, 주로 가까운 사람이겠죠. 그 대적들을 하나님이 보내요. 일로도 보내고 사람으로도 보내고. 보내서 치는 겁니다. 그 치는 목적은 죽이는 거예요. 죽여서 다시 살리는 것. 그리고 죽여서 그 믿음 갖게 하는 것. 성경은 이런 맥락, 이런 일관된 흐름이 있어요. 이 흐름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제 설교가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영적인 게 아니냐? 이런 사람들도 사실 있긴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주로 목사님들인데요. 이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영적이라는 말, 그럼 영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뭘로 보겠다는 거예요? 영적이 아닌 건 육적인 건데 나의 어떤 그런 생활, 나의 어떤 행복 이런 것 중심으로 보겠다는 겁니까? 그럼? 하나님 말씀은 영적으로만 봐야 돼요. 육적으로 보면 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은 하나니 중심, 영이 하나님이죠? 성령. 하나님 중심으로 봐야 하는 거예요. 인간 중심으로 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각이 가미되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항상, 아까 그 대형교회 목사님처럼 열심히 예배드립시다. 그래야 복 줍니다. 이런 인간적인 바램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하는 말이 영이다, 하시죠? 그리고 생명이다, 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는 말이 영이야, 생명이야.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이 영이에요, 성령. 프뉴마. 그걸 영으로 안 보면 뭘로 보겠다는 거예요? 영으로만 봐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다, 하시죠. 프뉴마, 성령. 살리는 것은 영이에요, 성령. 그리고 육은 무익하니라. 육적으로 보면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이 성경을 나의 어떤 생활, 나의 어떤 그런 유익, 이런 중심으로 보면 망하는 겁니다.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얼마나 많이 봤어요? 이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인간의 말입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의 복음으로 볼 때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건 오히려 죽음의 말이 되는 거예요.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이라는 말, 이것도 역시 중국어를 번역하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의문, 이거는 율법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영과 율법인 의문 이거는 완전히 서로 다른 걸까요? 의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거라고 해요. 영은 또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그죠? 하나님의 그 참된 말씀, 영과 죽이는 그 율법, 의문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냐? 하면, 아닙니다. 사실은 같은 거예요. 같은 성경이에요.
(요일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계명이니 이 옛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다
지금 이 말씀이 전부, 우리가 먼저 받은 건 옛계명이죠? 근데 그 말씀이 사실은, 내가 새로 얘기하는 새 계명은 새로 주는 것이 아니라 옛계명을 깨닫게 해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 옛계명, 너희의 들은바 그 말씀, 같은 거라는 거예요. 근데 이거를 인간이 깨닫지 못하니까 선과악의 두 마음으로 보니까 전부 어떤 생활을 위한 그런 지침서로 보았던 겁니다. 이것이 그렇게 보면 의문,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이것은. 그런 분명한 시각에서 그것을 보아야만 이것이 제대로 보이고 그것이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같은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죽이는 의문도 되고 살리는 영도 되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하죠? 오늘 본문에서. 기업 무를 자, 고엘, 고엘이고요. 그리고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거는 로 히시비트라는 말은 샤바트, 샤바트는 쉬다, 안식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싸바트가 나왔죠? 싸바트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싸바트 샤바트. 조금 모음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말이에요. 쉬다, 안식, 안식하다, 다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라는 말은 쉬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그런 뜻입니다. 그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라는 이 말은 다소 빗나간 해석이기도 해요. 계속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엘, 기업 무를 자를 쉬게 하지 아니하셨다, 하는 겁니다. 고엘은 누구라고 했죠? 우리가 여러 번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네게 쉬게 하지 아니하셨다‘, 이렇게 할 때 이 ’네게‘ 라는 말이 조금 어색해집니다. 그러면, 네게 라고 했을 때 여기 ’너’라는 일인칭 단수 앞에 레 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이 전치사는 소유격으로도 쓰이고, 뭐 뭐의, 라는. 그리고 역격, 누구누구에게, 그리고 목적격, 뭐 뭣을, 이라고.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전치사에요. 근데 이거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문장 속에서 결정하게 돼 있어요.
예를 들어 시편을 보면 다윗이 많이 썼다고 하죠? 그래서 다윗이 썼다고 하는 시편은 ‘레 다비드‘ 이렇게 돼 있어요. 소유격, 역격, 목적격으로 쓰인다고 했으니까, 레가. 해석에 따라서 다윗의 시, 라고도 할 수 있고 다윗에게 바친 시, 가 되기도 하고요. 다윗을 위한 시, 이런 뜻이 되기도 해요. 레 다비드라는 말이.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다윗의 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다윗의 시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다윗에게 바친 시가 될 수도 있어요. 이거는 굉장히 큰, 백년 동안 끌어오는 학계의 논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레라는 말 이걸 ’네게 쉬지 아니하셨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너를 위하여 쉬지 아니하셨도다‘ 이렇게 해석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업 무르는 자, 우리의 고엘, 기업 무르는 자 고엘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도죠, 고엘. 그러니까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고엘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형의 역할을 이 성경 속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우리의 어떤 모형이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도 하고 우리의 모형이 되기도 했죠? 그런 겁니다. 그 의미가 항상 두 가지 이상으로 나타나요. 성경에서는. 그걸 자 보셔야 해요.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신다고 하죠? 싸바트, 싸바트하지 않고, 쉬지 않고 싸바트,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모습이 복음서에 나타나죠?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죠?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매우 흥분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건 아버지께서 지금 일하시니까 나는 쉴 수가 없어, 나도 일 해야 돼. 이런 뜻은 아니고요. 내 아버지께서 지금 일하시는 게 내가 지금 일하는 거다. 같은 거라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 이게 뭘까요? 무슨 일일까요? 여기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라고 했는데 일하시니, 라는 말은 에르가조마이, 라고 하고요. 이거는 일하다, 창조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뭐예요? 창조의 일이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고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 바로 창조의 일. 창조의 일을 지금 하나님이 하고 계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일을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그러면 창조는 이미 태초에 했으니까 지금 하시는 창조? 그런 뭐라는 거예요? 이거는 새 창조라고 합니다. 새 창조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 그걸 새 창조라고 해요. 근데 이 새 창조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면요, 역창조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건 유일한 있음. 유일한 존재, 하나님만 유일한 존재죠? 그 하나님이 은혜로 이 아무것도 없는, 토후와 보후라는 이 텅빈 그 세상에, 수면 위를 운행하신다고 하시죠? 운행하다는 말을 라하프라고 합니다. 라하프는 덮다, 라는 말이에요. 이거 덮으실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 할 때 하나님의 신은 성령이에요. 르와흐. 성령이 운행하신다는 말이 덮는다는 말이에요. 이걸 덮을 때 창조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언약이 역사 속에서 펼쳐질 때는 거꾸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의 그 묵시, 계시가 역사 속에서는 오히려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파괴되는 모습으로.
그 대표적인 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거예요. 그런 형태로, 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 창조의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걸 역창조라고 하는데 이 역창조의 과정으로 새 창조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이 그 본을 보이셨어요. 그러면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한 그 성도들은 어떤 과정을 겪어야겠어요? 당연히 예수니 따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잖아요?
이 세상에서 흥하고 부흥하고 높아지고 잘 되고 이런 과정을, 열심히 뭔가를 쌓고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니라 털리고 자꾸 털리는 거예요. 자꾸 낮아지고 죽고 해서 결국은 아, 나는 안 되는군요? 하나님이 전부군요? 이거 깨닫고 죽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이걸 역창조라고 해요. 이때 죽으면, 이 역창조가 끝나면 그게 새 창조에요. 그 과정, 그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성도들에게 당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겠죠? 그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이 역사, 인생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니까 진짜 같고 너무 실제적이고 감각적이지만 이것들은 결국은 곧 소멸될 거예요. 금방 끝납니다. 그걸 성경에서 거듭거듭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죠? 근데 그게 잘 믿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지만 그러나 눈과 귀가 열린 자들은 그 종말을 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하죠? 그 아들, 무드셀라, 이 아이가 죽으면 내가 심판을 보게된다, 라는 뜻이라고 했잖아요? 무드셀라가. 그리고 그 아들은 또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에요. 가장 오래 산 인물 무드셀라? 뭐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신다는 겁니다. 참으신다는 걸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 나이 속에 또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겁니다. 깨닫고. 그것이 성도가 이 인생 속에서 할 일인 겁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 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고 하죠? 이 신은 죽었다는 그 말은 인간의 보편적인 죄 성인 겁니다. 그것이 한마디에 담겨 있는 겁니다. 신은 죽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하죠.
신이 있는 건 다 알아요. 신이 죽었다는 말 속에는 신의 존재 자체도 부정한 건 아니죠? 신이 있어. 있긴 있는데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 신은 나에게서 부정된다는 거죠. 신은 죽을 수 없으니까. 나에게서 거절되고 부정됐다. 나에게는 그 신 필요없다! 그 선언이 신은 죽었다는 말의 참뜻인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믿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선언인 겁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은혜를 떠난 역사, 인생 그것이 어떠한지 그 실체를 우리에게 인생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 이걸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새 창조의 일은 바로 이 일 하는 겁니다. 인생에서 뭔가를 쌓고 잘 되게 하고 높아지고, 이거 아니라니까요. 이거는 끝나는 세상이라니까요. 여기는 곧 끝나는 세상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영원을 함께 사는 그 백성들에게 뭘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가르쳐주게 돼 있어요. 너희는 원래 죽은 흙인데, 마른 뼌데, 죄인 중의 괴순데 내가 은혜로 살리는 거야. 그리고 너희는 나만 의지해야 돼. 그래야 살아! 이거 가르쳐주시겠죠.
그래야 그 나라가 다시 완전히 섰을 때 반역도 없겠고 오직 순종하는 그런 자들의 나라, 요동치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니까요. 그런 큰 그림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보라, 이 시간을 살아보라고 택한 백성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겁니다. 선악과 입에 물려서. 왕 노릇 해보라고. 죄인 노릇, 마귀 노릇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진짜 왕이 누군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여기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근데 예수님 오셨을 때 나 의인이에요! 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다 죄인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왔는데 자기들이 예수님과 관계없이 이미 착한 자로 살고 있다는 거예요. 나 착하다, 의인이다, 이러고 있단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 저 세리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착한 사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뜻과도 맞지 않고 이건 완전히 절도고 강도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독사의 자식아! 하는 그런 욕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고 싶으신 거, 결국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내 아들의 피로 너희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들겠다,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만 인생에서 그걸 깨닫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그 반대 걸 깨닫죠.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고. 원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밟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높아지고 유명한 자 되려고 살고 있죠. 용사가 되고.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겁니다. 거의 없을 거라는 겁니다.
세상을 벗하는 게 당연한 이 세상에서 거기에 살던 이 성도가 이 세상과 이 땅에 대한 부정을 하게 되고 그거로부터 떠나게 되는 분리를 경험하게 되겠죠? 이걸 깨닫게 되면.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정말 바라봐야 할 것은 따로 있구나. 이걸 알게 됐을 때 이 세상에서 시각이 떠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그 분리가 반드시 성도에게는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 분리가 쪼개짐이고 환난으로 성도에겐 감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살던 자가 말씀의 검에 의해서 혼과 영과 골수가 찔러 쪼개지듯 쪼개지면서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이걸 깨닫는데 이걸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환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지고 병이나고 사고가 나고, 누구나 다 하는 그런 걸 고난이라 하는 게 아니라. 물론 성도는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그 하나님의 견인 속에서 그런 일을 더 자주 겪기도 하죠. 또 그런 일이 생긴다하더라도 성도는 그걸 감사로 은혜로 깨닫는 그런 실력을 갖추게 되겠죠. 성도만 이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 역사와 인생은 창세전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한 재로이고 소품이고 이걸 깨닫는 겁니다. 이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겁니다.
그 환난과 고난의 삶, 이 말씀으로 성도를 부수고 죽여가는 그 역창조의 과정을 성도는 반드시 통과하고 그래서 새 창조,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되어가는 겁니다. 검에 찔리고, 말씀의 검에 찔리고 철장에 맞아서 나라는 그 자아가 박살이 날 때, 죄인 중의 괴수로 내려갈 때, 죽을 때 그 자리에서 부활이 있는 겁니다. 그 새 창조,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그 온전한 희생과 수고에 의해서, 그 말씀에 의해서만 완료될 수 있다는 걸 확증해 보이는 게 이 역사고 인생인 겁니다. 그걸 성도는 이 인생을 살면서 분명하게 깨달아갑니다. 그거 하라고 이 세상에 보낸 겁니다. 그거 깨달으라고. 그거 깨달으라고 이 세상에 보내서 살게 하는 겁니다. 모든 만물과 제도 속에 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넣어서 이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대적을 보내시기도 하시고 또 결혼을 시키기도 하고 그 결혼 속에 담긴 복음, 그리고 자녀를 낳게도 하고. 그 자녀 속에 담긴 아들, 제라, 씨, 생명의 말씀의 씨, 진리의 씨 그거 깨달으라고 주는 겁니다. 모든 것들이 다 진리가 담겨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로 비롯됐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씀에 의해서, 예수에 의해서만 완료될 수 있다는 걸 확증해내는 게 이 인생과 세상, 역사의 존재의 이유니까요. 나 중심, 내 행복과 내 구원 중심의 신앙은 그래서 잘못 된 신앙입니다. 인간이 선악 판단의 주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모든 게 다 인본주의로 율법주의로 간다고 했죠. 절대로 이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하는 그 구원, 그 승리를 거저 전가받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송하는 그런 존재로 지어진 겁니다.
성도는 내 영광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그래서 칭찬을 받으면 괜히 기뻐지고 비판을 받으면 막 슬퍼지고 괴로워지고 화가나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게 내 영광 찾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내 영광 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고 찬송하는 자인 겁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죠? 본문에서. 여기서도 그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라는 말도 좀 생뚱맞은, 그 이전에 우리가 공부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도 역시 카라, 라는 동사가 쓰였어요. 카라는 부르다, 선포하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니팔 동사로 쓰였어요. 동사 변화가 있는데. 이거는 수동태로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불려져라, 선포되라,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질 것이다. 미완료니까. 불려질 것이다, 선포될 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근데 이스라엘 중에서 원어는 그의 이름이라고 해요. 여기 우리 성경에는 아이의 이름이라고 했죠? 원래는 그의 이름이에요. 영어 성경에는 전부 his name이라도 돼 있어요. 그러면 그의 이름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 성경의 번역자들이 아이의 이름이라고 의역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이게 맞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면요.
이 문장 속에서 보면 그 앞에서 나온 거에도 아이는 없어요. 아들을 낳았다는 건 바로 앞 구절에 있죠. 아이가 나오는 게 아니라 기업 무를 자, 고엘이 나옵니다. 그리고 또 여호와가 나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라기보다, 여호와는 이미 이름이니까. 고엘의 이름,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이 선포될 것이다, 불려질 것이다! 이게 더 적절합니다. 지금 룻기 기자가 절묘하게 성경 독자들을 시험하고 있어요.
우리의 고엘, 그게 누구라고 했죠? 예수 그리스도죠? 우리가 부르고 선포해야 하는 이름. 역시 우리의 구세주인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거죠. 오늘 본문 14절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요,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새로 정리한 번역이에요) 오늘날 너를 위하여 기업 무를 자가 쉬지 않게 하셨도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선포될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됩니다.
해석이 우리 성경과 완전히 다르죠? 그러니 인본주으로 보느냐 신본주의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천지차이로 바뀌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천지차이입니다. 하늘과 땅. 하늘로 가느냐? 땅으로 가느냐? 이런 차이가 인본과 신본의 그 차이입니다.
이 해석을 보면 아이의 이름과 고엘의 이름이 완전히 상반된 이름이죠? 아이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한다는 건, 사실 아이는 뭐예요? 나의 확대, 확장이라고 했죠? 자아의 확장. 자기 확대. 그러니까 아이가 잘 되는 게 내가 잘 되는 거야, 라고 다들 생각하잖아요, 그죠? 아이가 잘 되고 유명하게 되고 이거는 뭐예요? 내가 높아지는 거예요, 세상에서. 그런 해석이 되느냐? 아니면 나의 구세주인 고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느냐? 이거는 완전히 정반대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혹시라도 이게 맞나 싶어 걱정하는 분이 있을까봐 다시 한 번 설명을 해드리면요, 이거는 간단한 문장입니다.
카라라는 동사가 앞에 있어요. 그건 선포하다, 부르다,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그의 이름이라는 말이 있고요. 그 뒤에 이스라엘에서, 라는 전치사와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이 선포될 것이다‘. 아주 간단해요. 어려운 문장이 아닙니다. 그 그의 이름이라고 된 말은 쉐모라고 해요. 쉠이 이름인데 뒤에 삼인칭이 붙어서 그의 이름, 삼인칭 소유격이 붙어서 그의 이름이 된 겁니다. ’아이‘ 는 조금 더 멀리 13절에 있고요. 그리고 같은 13절 바로 앞에 여호와와 고엘밖에 없는데 여호와의 이름은 이미 나와 있는 거니까 고엘, 고엘의 이름을 선포해라. 이것이 적절한 겁니다.
만약에 아이의 이름으로 읽히길 원했다면 룻기 기자는 당연히, 그 앞에 있는 아들을 낳았다는 건 벤이라고 해요. 벤을 아들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름이라는 말을 썼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 앞에 (이건 상식입니다) 그 앞에 다른 삼인칭, ’그의’ 에 해당되는 고엘이 있기 때문에. 그냥 아이의 이름을 의도하고 그렇게 썼다면 이건 잘못 쓴 게 되는 거예요. 룻기 기자는 반드시 (?) 하벤이라고 썼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이 이름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이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길 바란다? 이건 아닌 겁니다. 이거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희망사항인 거죠. 인본주의적인 희망입니다.
대학시험 때 되면 교회마다 기도회가 열리죠? 또 그와 비슷하게 전국 각지의 절에서, 기도발 잘 받는다는 그런 절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또 그걸 또 헬리콥터를 타고 쫙 산마다 돌잖아요? 촬영하면서. 부모님들이 막 절하고 이런 모습들을 우리가 시험 때마다 봅니다. 자식들이 우상이 되고 생명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녀들 주신 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거죠. 그런데 그 뜻, 구원의 복음을 깨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녀가 남보다 경쟁력을 높여서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남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만 골몰하고 있는 거예요. 또 그걸 교회에서는 그게 하나님의 영광 높이는 일이래요.
물론 열심히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성공하고 출세하지 말라는 얘기도 절대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일을 주께하듯이 최선을 다해야 해요.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과 내가 함께 동행하고 있다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일이거든요. 내가 열심히 하고 있어서 그것이 남이 보거나 안 보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영광이 되는 일인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지금 제가 얘기하는 거는 기독교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는 그런 종교,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걸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라는 우상을 높여주는 그런 종교가 사실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은 영락없이 나를 높여주고 잘 되게 하는 그런 책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이 해석이 아이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길 바라노라,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이 그 인본주의 시각을 가진 번역자에 의해서 채택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렇게 보면 의문이 되고 이렇게 보면 영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율법이 되고 이렇게 보면 은혜의 책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는 신비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사람의 욕심으로 보느냐? 하나님의 뜻으로 보느냐. 이걸 분명하게 봐야 합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이 번역도 달라지고 해석도 달라지고 그리고 설교도 달라지고 다 달라지는 겁니다. 완전히 천지차이. 하늘과 땅 차이가 되는 겁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드릴게요.
(삼상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이게 무슨 구절이냐 하면,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 부음을 하는 장면이에요. 사무엘이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으니까 베들레헴으로 가서 하나님이 선택한 새 왕을 찾아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받고 베들레헴에 갑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나와 있어요. 근데 사무엘상 16장 앞 부분에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걱정을 합니다. 사울이 이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나를 아마 죽일 겁니다, 이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또 뭐라고 하시느냐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암송아지를 끌고 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러 왔다고 해. 이게 뭐예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십니다. 정말 재밌죠? 그냥 하나님이 사울의 눈과 귀를 가려버리면 될 텐데 굳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이것도 뭔가 뜻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다 선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거를 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다,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광 신이다. 이렇게 해석이 가는 겁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거짓말은 나쁜 건데. 하나님이 어떻게 거짓말하냐? 이게 뭐예요? 이런 판단이 들었다면? 누가 중심이에요? (나), 그렇죠 내가 중심이 된 거예요. 내가 판단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거짓말을?’ 이 순간 나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인본주의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건 다 선이라니까요. 거짓말을 하셔도 되고 갓난아이까지 다 죽여도 돼요, 하나님은. 다 뜻이 있어요. 그 뜻은 다 좋은 뜻이라니까요.
이게 하나님 중심이고 인본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 신본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지만 이게 맞는 겁니다. 자존심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할 우상의 신전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데 기독교는 그걸 오히려 높여주겠다고 합니다. 그러고 있는 거죠.
죽어야 하는 그 진리는 가르쳐주지 않고 잘 됩니다, 성공합니다. 축복 주십니다. 이런 사탕발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느냐? 이 하박국에서 나온 그 왜곡된 부흥, 이것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모이면 그게 잘 된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절대 선이라는 거예요. 사람 많이 모인 걸 하나님은 부흥했다고 안 하세요. 그건 그냥 살이 찐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건 맞지만 사랑을 하는 방식은 인본과 신본이 완전히 다릅니다. 엉덩이 두드려주고 칭찬해주고 높여주고, 이게 아니라 나를 십자가에 달아 죽여 버리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참 사랑이에요. 왜? 그래야 진짜 좋은 그 복, 영원한 생명의 그 복을 줄 수 있으니까. 진짜 사랑은 이거라니까요.
잠깐 내 입에 달콤한 그거 주는 게 사랑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이에게 달콤한 사탕 주면 좋아하죠. 그렇지만 그 사탕이 이빨을 썩게하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거 많이 안 준단 말이에요. 그리고 잘 되라고 똑바로 하라고 회초리로 친단 말이에요. 그게 사랑이라니까요. 나와 관계없는 옆집 아저씨는 그런 거 계속 던저주고. 잘했다, 잘했다하겠죠. 그렇지만 진짜 부모는 사탕 뺏고 그리고 회초리 드는 거예요. 이게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걸 못 알아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저마다 내가 옳다고 하면서 진리를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미디어에 보면 넘치잖아요? 그거 들으면 다 맞는 거 같잖아요? 그렇지만 그게 아닙니다. 무엇으로 이 세상에 넘치는 그 진리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말씀, 그 말씀의 반석 위에 반듯하게 서야, 그렇게 서면 어떤 창수가 덮쳐도 나는 요동하지 않는 겁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가서 하나님이 시킨 대로 제사 지내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요. 그리고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에 부르죠.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보고 막 감탄합니다. 야, 과연 여호와의 기름을 부을만한 자로구나! 하면서 감탄을 해요. 아들들이 너무 잘 생겼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을 안 해주세요. 일곱 아들이 왔지만 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그래서 이게 다냐? 그러니까 이새가 말째가 하나 있긴 하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거죠. 양을 치고 있어서 못 온 게 아니라 아버지 이새가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으니까 얘는 아니겠지, 이러면서 너는 가서 양이나 쳐, 이렇게 보낸 거예요. 볼품이 없는 아이라는 겁니다. 어디 남들에게 내보일만한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이런 흐름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앞을 보면요, 하나님께 기각을 당한 그 사울, 그 사울 왕은 어떤 왕입니까? 아주 준수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다고 해요. 9장에 보면. 그리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다, 그래요.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잘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관점으로 보면 멋지고 키가 크고 그리고 능력이 출중한 그런 왕인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도 왕을 달라, 하면서 원한 왕이 바로 이런 왕입니다.
진짜 왕은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은 나의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진짜 왕, 우리에게 능력있는, 눈에 보이는 왕을 주세요! 달라고 떼를 쓴 게 사울 왕입니다. 바로 신은 죽었다! 하는 선언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회라고 하는 자들이.
이거 우리의 이야기인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왕.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고 풍채도 없는 왕.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죠? 진짜 하늘의 왕이 이 땅에 왔더니 선과 악의 두 마음으로 가치를 판단하면서 하나님처럼 살고 있던 인간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이 땅의 행복, 나의 이익, 내가 원하는 천국을 주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싫어버린바 되어서 그 왕을 거부하고 죽여버렸죠.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잖아요? 하나님 말씀이,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데 나는 그 왕 싫다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왜 내가 죽어야 하냐고? 내가 높아지고 싶은데 왜 나를 높여주지 않고 나를 죽은 흙이라고 하고 마른 뼈라고 하고 나를 비판하고 왜 날보고 죽으라고 하느냐? 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느냐 하면서 그 왕을 내가 거부하고 죽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내 안에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 그것과 내 뜻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합니까? 내 뜻, 내 자존심 높이고 내 천국 찾고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인 겁니다. 하나님의 대적자, 사탄이라니까요, 사탄. 대적자. 예수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다는 그 일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예수 죽인, 그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고 죄인 중의 괴수가 맞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죄인 중의 괴수가 분명한 거예요. 나도 신은 죽었다! 하는 그 선언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사울 왕처럼 내 눈에 멋지게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그 가치, 그것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스타들, 아이돌, 그들이 그렇게 사랑을 받고 숭배를 받는 겁니다. 근데 그 멋인 인본주의 왕 사울이 기각 당하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그 왕을 세우려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게다가 16장에 보면,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고 하시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당연히 고운 모양이 없어야 되는 게 맞죠?
다윗은 잘 생기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그런데 어떨까요? 말째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이게 뭔 말이에요? 그러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하나님이 나는 외모 안 봐, 중심만 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애가 나오면 하나님이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신 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이런 상황, 이 흐름에 맞지 않는 이런 상황이 도대체 맞는 걸까요? 이걸 보면서 어, 하나님이 외모 안 보신다면서 외모 보시네요? 이런 의문을 가졌어야 해요. 이런 흐름을 붙잡고 가지 않으면, 맞겠거니, 하고 그냥 흘러가는 겁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인본주의적인 해석을 한 거예요.
그의 빛이 붉고, 라고 했는데 그의 빛이라고 해석된 후라는 말, 후라는 말은 그, 그것이란 지시 대명사입니다. 대명사에요. 그러니까 그가 붉고 이렇게 해석하면 되는 거예요. 시뻘겋다는 거예요. 태앙빛에 그을려서 맨날 햇빛에서, 들판에서 양 치다 보니까 얼굴이 다 탄 겁니다. 이라크사람들 보면 시뻘겋잖아요, 그죠? 그냥 얼굴이 붉은 거예요. 얼굴이 붉은 목동입니다. 그런데 쓸데 없이 빛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멋지게 빛나는 그런 뉘앙스를 준 겁니다. 그리고 눈이 빼어나고, 라고 하는데 빼어나고, 는 아름다운, 이런 뜻도 있지만 깨끗한, 이런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깨끗한 소년이다. 순수한 소년이라는 거예요. 간사함이 없고.
그리고 또 이사야서 33장 17절에 보면
(사 33:17)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그 영광 중에, 라는 말. 이 말이 요피라고 해요, 요피. 이 거는 야피, 야페, 빼어나다, 라는 그 말의 명사형이에요. 이 말은 뭐예요? 영광이라는 말로도 쓰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말로도 쓰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영광이 어디서 드러나죠? 하나님의 택한 자, 합한 자에게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아이는 나와 합한 자다. 내 뜻 드러낼 자다. 그 얘기하는 거예요. 잘 해서 합하다는 게 아니라 내 뜻을 앞으로 드러낼 거다, 라는 거죠. 그리고 순수한 소년이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소년이다, 라고 보는 게 일차적이고 그 뒤로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도 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얼굴이 아름답더라, 라고 하죠? 아름답더라는 말에는 토브에요. 토브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가 토브에요, 선.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그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아름답다‘ 는 그런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용모가 보기에 좋더라, 선하더라. 이 정도로 보면 되는 말인 겁니다.
’그가 얼굴이 붉고 그 순수한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나고 용모는 선하더라, 보기에 좋더라.’ 정도로 보면 되는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빛나고 빼어나고 아름답더라, 라고 인본주의적인 그런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이렇게 그 흐름 속에서 엇나간 인본주의적인 해석들이 사실 우리 성경에 많이 있어요. 그걸 흐름을 붙잡을 때 의심을 갖고 다 그럴 수는 없지만 이 원어를 확인해보면 십중팔구는 이것이 잘못 됐다는 게 확인이 됩니다.
이런 인본주의 해석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높여서 뭔가 선택받은 자의 자격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일들인 겁니다. 선택받은 자는 뭔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은혜로 받는 겁니다. 나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했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해요? 나는 의인 찾으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찾아서 회개 시켜서 구원하러 왔어. 라고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인생 속에서 나의 잘남, 나라는 우상을 반드시 깨버려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 전부, 이 바탕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자, 신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신에게 내가 죽을 것인가? 하늘로 가느냐? 아니면 땅으로 가느냐? 이 갈림, 이 갈림은 이 역사, 이 인생 이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탐심의 그 두 마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하난데 둘로 나눠서 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걸 에피뛰미아, 탐심이라고 했죠? 그걸 내 생활에 유리한 쪽으로, 이게 선이야, 이건 악이야 이러면서 계속 판다하는 그 두 마음으로 보면서 나에게 유리한 것만 끌어당기면서 이게 나를 잘 되게 해주는 나의 생명이야, 라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도 역시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밖의 어떤 다른 존재, 밖의 존재로 계시고 나는 그분 앞에 서는 바라보는 타자로, 절대 타자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바라보고 있으면? 대적자에요. 맞서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탄이에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그 안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다들 예수님을 내 밖에서 찾으니까 뭔가 예수님을 섬겨야 하고 그분을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강박증에 시달리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겁니다. 오늘날 온 교회, 온 교인,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달려가고 있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그 예수에 의해서 구원받은 나, 이런 이원적인 관계,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인간은 그 아들, 그 예수를 경외의 대상으로만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본주의에요. 잘 하는 것 같지만 이건 진짜 기독교는 아닌 겁니다. 그게 겸손한 것 같고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세요. 이스라엘이 내 장자라고 하십니다, 출애굽 때. 그래서 그 내 장자들이 모인 천국의 모임들 그걸 뭐라고 해요? 장자들의 총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장자인 겁니다. 맏아들이 머리고 우리도 모두 그 맏아들 아래 장자로써 그 지체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겁니다. 다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고 그걸 또 아들이라고 해요. 그 속에 완전하게 함몰이 되어야 되는 거지 그 예수를 내가 밖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아들, 생명의 씨 이걸 마음에 가져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내 안에 생명의 씨, 진리의 말씀을 담게 되면 그 진리가 하나님이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게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게 아니라 내가 죽는 나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여전히 자기의 왕 됨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또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야차들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은 전부 그 야차들의 나라인 겁니다) 그 야차들의 나라가 아니라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네요! 그거 깨닫고 내가 죽는 나라. 그 나라가 진짜 왕이 사랑으로 섬김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 천국인 겁니다.
그 천국을 지금 살아야 합니다. 먼 훗날에 죽어서 가는 그런 천국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그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맛보시길 축원합니다. 신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시고 영존하십니다. 죽어야 할 건 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