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에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령에 사인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상징적 그림자 속에 서 있습니다.…오늘날 시민들의 피부색이 관계되는 한 미국은 이러한 약속 어음에 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러한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 대신에 미국은 흑인들에게 “자금 부족” 이라고 낙인 찍혀 돌아오는 부도 수표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행의 정당성이 파산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거대한 기회의 금고들 속에 불충분한 자금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표를 현금화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우리는 미시시피 주에 있는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고 그리고 뉴욕에 있는 흑인들이 투표를 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한 결코 만족 할 수 없습니다. 노~! 노~! 우리는 만족하지 않았고 정의가 하수처럼 내려오고 공정이 시내처럼 힘차게 흐를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저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있는 이전 노예들의 아들들과 이전 노예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테이블에 함께 앉을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심지어 억압과 부정의 열러 무더운 사막과도 같은 미시시피 주가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바뀌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4명의 자식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내면적 인격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 |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비록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어렵다고 해도 “나에겐 아직도 꿈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왜 부도수표를 언급했을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100년 전 링컨은 어떤 약속을 했으며, 흑인들은 왜 그 약속이 부도났다고 강변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이다. 먼저 링컨을 세계의 위인으로 거듭나게 한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다시 기억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땅 한 뙈기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1863년 11월 19일 |
흥미로운 것은 킹 목사의 연설문 첫 문장이 링컨의 연설문을 모방했다는 점이다.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지금으로부터 87년 전(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으로 시작하고, “I have a dream!"은 100년 전에(Five score years ago)로 출발한다. 킹 목사가 링컨의 문장을 흉내 낸 것은 링컨의 무책임한 약속을 비웃는 심정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까닭이 아닐까하고 짐작해본다.
아무튼 세기의 명 연설문으로 꼽히고 있는 이 두 연설문을 비교해가며 링컨의 업적을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킹 목사가 왜 부도수표를 절규했는지 그 이유도 함께 추적하겠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과연 인권을 위한 것인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이 있은 뒤 약 100년 후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북전쟁 중인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헌납식에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문에서 분명히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영원하리라고 웅변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한 국민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보편적 상식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의 국민이라면 백인·흑인뿐 아니라 인디언, 중국인 등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링컨이 말한 국민(people)은 아무래도 백인(White)만을 뜻하고 있는 듯싶다. 백인만의, 백인에 의한, 백인만을 위한 정부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링컨의 본심이었던 같다.
링컨은 미국역사상 최대의 집단처형 명령서를 내린 장본인이다. 링컨은 노예해방에 서명한 1862년에 미네소타의 인디안 38명을 집단으로 사형에 처하는 군사명령에 서명함으로 인디안 집단 처형에 신기록을 세웠다. 이는 미국 내 최대 규모의 집단처형으로 기록되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인디언들이 그들이 속한 부족의 성직자와 정치 지도자들이었다는데 있다. 링컨은 인디언들의 저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링컨이 인디언에 대해 얼마나 냉정했고 가혹했는가 하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미국 산업자본주의의 팽창을 생각하며 미국의 앞날을 설계했던 링컨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의하면, 흑인 노예들은 해방이 되어 자본주의 미국 사회에서 산업근로자로 쓰여 져야 하겠지만 인디언들은 유용 가치가 거의 없어서 역사에서 지워져야 하는 인종으로 보았던 것이다. 아래는 링컨 대통령이 1862년 12월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 주둔 시비리 장군에게 다코타족 인디언들을 집단 처형하라는 처형 명령서 전문이다.
Text of Order to General Sibley, St. Paul Minnesota
"Ordered that of the Indians and Half-breeds sentenced to be hanged by the military commission, composed of Colonel Crooks, Lt. Colonel Marshall, Captain Grant, Captain Bailey, and Lieutenant Olin, and lately sitting in Minnesota, you cause to be executed on Friday the nineteenth day of December, instant, the following names, to wit [39 names listed by case number of record: cases 2, 4, 5, 6, 10, 11, 12, 14, 15, 19, 22, 24, 35, 67, 68, 69, 70, 96, 115, 121, 138, 155, 170, 175, 178, 210, 225, 254, 264, 279, 318, 327, 333, 342, 359, 373, 377, 382, 383]. The other condemned prisoners you will hold subject to further orders, taking care that they neither escape, nor are subjected to any unlawful violence. Abraham Lincol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On December 6 1862 |
다음 차례로 중국인 노동자의 예를 보자. 미국은 원주민 학살, 흑인노예 학대 외에도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혹사했다. 멕시코전쟁(1846-8)을 통해 빼앗은 캘리포니아에서 1849년 금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되었다. 이 소문을 아편전쟁(1839-42)의 승리 전리품으로 영국이 점령한 홍콩을 통해 중국에 퍼트렸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떼돈을 벌수 있으리라 생각한 중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시작하여, 1851년 즈음에는 25,000명이 미국에 도착하였다. 금광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은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혹사당하였다. 이 공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1주일 이상을 근속하는 인부가 10명중에 1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 노동자들은 중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 부설공사에 대부분 투입된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유니온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의 두 철도 회사에 철도 부설공사를 발주하였다. 오하마 시에서 서해안까지 관통하는 대륙간 횡단 철도의 부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화강암 터널 관통 공사 등 난공사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강행된 무리한 일정이었다. 건설 당시 10t 넘는 중국인 유해가 바다 건너 중국으로 보내졌다는 슬픈 얘기도 전해지고 있으며, 눈사태로 깔려죽는 중국인 인부가 1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끔 노출되어 집단 백골로 변한 채 발견되곤 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목숨을 건 위험한 공사에 대한 평균 임금은 월 35달러밖에 안됐다고 하며 이 돈은 겨우 생활을 꾸려나갈 정도의 액수였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철도 공사가 완공 되자마자 약 25,000명의 중국 철도 인부가 즉시 실직 당했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인종차별마저 극심하였다.
대륙횡단철도 공사장에서 노역하고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
백인 노동자들은 불경기로 인한 그들의 실직이 저임금의 중국인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인들의 테러 행위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졌지만 당시 법정은 중국인의 소송은 아예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접수되고 백인의 분명한 잘못의 증거가 있어도 무조건 중국인을 패소시켜 중국인에겐 최소한의 방어 기회조차 박탈했다.
만민이 평등하다고 선언한 미국 헌법을 인용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중국인 노동자들에겐 전혀 관계없는 먼 꿈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전쟁이 아니다
다시 노예해방문제로 돌아가자. 링컨은 1862년 9월 22일에 노예 해방 선언(영어: Emancipation Proclamation) 초안을 발표했다.
현재 미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주의 일부의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줄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상술한 1월 1일에 여전히 미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들과 주의 일부 지역이 있다면 이들 지역을 선포에 의해 지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주 또는 주민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이 투표하여 선출한 대의원들을 성의를 가지고 미국 의회에 파견하고 있다면 이를 뒤엎을 만한 다른 증언이 없는 한, 그 주와 주민은 미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통령인 나,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정부의 권위에 대한 실제 무장 반란 시에 미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그리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합하고 필요한 조치로서, 1863년 1월 1일부터 그 이후 100일 동안, 미국에 대항해 반란 상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주와 주의 일부 지역을 반란주로 지명하는 바이다. (반란 주 및 지역의 명칭 생략) 상기 권한과 언급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상의 반란주로 지정된 주와 주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육군과 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상기자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다. 나는 자유가 선언된 상기의 노예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폭력 행위를 삼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경우에 적합한 임금을 벌기 위하여 충실히 노동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그리고 본인은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국 군대에 입대하여 요새, 진지 및 기타부서에 배치되고, 모든 종류의 선박에도 배치될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그리고 진실로 정의를 위한 행위이며 군사상의 필요에 의하여 헌법에 의해 보증된 이 선언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인류의 신중한 판단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
이 선언서에 의하면 링컨이 선언한 노예해방의 목적은 군사상의 필요에 의한 조치였으며 그 대상도 북군이 점령한 여러 주의 노예는 대상에서 제외하고 북군에 대해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다. 북군의 승리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실제 북부인들에게 이 선언은 남북전쟁에 대한 도덕적 이상을 부여했고 많은 이들이 미국 독립 전쟁 때와 같은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남부인들은 노예제도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고향을 지키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북부의 부당한 탄압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였으나 링컨의 선언으로 인해 수많은 흑인들이 탈출하게 되었으니, 남부의 군사 및 경제적 기초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 효과를 기대한 링컨의 의도가 제대로 적중한 셈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그 후 1865년의 제13헌법 수정에 의해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
아무튼 남북전쟁이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물론 의도가 무엇이었던 전쟁의 와중에서 승리를 위해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겸허히 칭송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후 그리고 수정헌법 발표 후 노예해방이 진실로 이루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앞 글 킹 목사의 예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미국보다 먼저 노예해방을 실행한 나라들
무엇보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이 마치 흑인노예를 처음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내세우며, 링컨대통령을 영웅화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미국의 행태다. 과연 미국이 최초로 노예들의 해방을 선언한 나라일까?
먼저 유럽의 경우를 보자. 러시아는 미국의 1863년의 노예해방선언보다 140년이나 앞선 1723년에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포르투갈에서는 102년이나 앞선 1761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프랑스는 좀 늦게 혁명 후인 1794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불행하게도 피로 이룩한 공화국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수많은 침략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켰다. 그는 노예 제도를 부활시키는 반인륜적인 죄악도 저질렀다. 프랑스는 1848년에서야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그 외 유럽 각 국의 노예제도 폐지 연도는 다음과 같다. 프러시아(독일) 농노제 폐지(1807년), 스페인(1811년), 비엔나(1815년), 그리스(1822년), 스웨덴(1847년)
다음은 미국의 이웃나라 중남미의 경우다. 아이티는 미국 보다 59년이나 앞선 1804년에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멕시코는 53년 앞선 1810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기타 중남미 몇 나라의 노예제도 폐지 연도는 다음과 같다. 칠레(1823년), 우루과이(1830년), 볼리비아(1831년), 아르헨티나(1853년), 페루(1854년), 베네수엘라(1854년), 쿠바(1862년)
미국은 노예제도 폐지에 관한한 선진국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대단히 늦은 시기까지 노예해방을 저지시킨 나라였다는 뜻이다.
노예에 대한 링컨의 시각
링컨의 노예 해방선언이 흑인노예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것인지, 단지 정치·전략의 수단에 불과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선 그의 글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해야할 것이다.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인식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링컨-더글러스 논쟁(Lincoln-Douglas Debates)이다. 이 논쟁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운동 때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인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그에게 도전한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준주(準州:아직 주의 지위를 갖지 못한 개척지역)에 노예제를 확대하는 문제 등을 놓고 7차례에 걸쳐 벌인 토론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더글러스는 선거에선 이겼지만 민주당 전체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반면에 링컨은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공화당의 대의명분을 명확히 전달한 대변자로서 갈채를 받았다. 더글러스와의 논쟁 중 주목할 만한 링컨의 발언이 있다.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백인종과 흑인종 간의 사회적 평등을 초래하는 어떠한 방법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나는 흑인들을 투표권자나 배심원으로 만든다거나 혹은 공직에 앉게 한다든가 또는 백인과 결혼하도록 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다른 종족 간에는 신체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두 종족은 영원히 사회 정치적으로 평등한 조건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적어도 대통령이 되기 전의 링컨은 분명히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대통령이 된 후 노예에 대한 인식은 변했을까? 대답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링컨은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연설 때 “나는 현재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주들에 대해 노예제도에 관해 직·간접적으로 관섭할 의도가 없다. 그렇게 할 법적 근거도 없고 나 또한 그럴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링컨은 노예문제가 전쟁의 이유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노예 제도의 폐지는 농업에 종사하던 흑인 노예들을 산업 사회에 적합한 공장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 남북전쟁의 결과 법적으로는 흑인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었으나, 흑인의 지위가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이 제16대대통령에 취임하고 약 1년 후인 1861년 4월 12일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 4개월이 지난 1862년 8월 22일, 당시 영향력이 컸던 뉴욕 트리뷴지 편집장 호리스 그리리(Horace Greeley)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링컨은 다름과 같이 쓰고 있다. “이 투쟁에서 나의 최고의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 제도를 존속시키거나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또한 일부를 해방시키고, 나머지 노예를 남겨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대통령인 링컨의 글은 노예 해방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지 않았고, 연방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12일에 시작되었다. 링컨대통령의 노예 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1863년 1월 1일)은 남북전쟁이 시작된 뒤 약 2년 후에 발표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노예 해방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고 약 1년이 지난 1863년 11월 17일에 링컨대통령은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였다. 유감스럽게 연설문 어디에도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의 인권, 복지나 대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대통령인 링컨의 글과 행동들을 살펴보면, 노예해방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지 않았고, 연방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링컨이 지키려는 연방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가 원했던 연방은 공업지역으로 값싼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북부 중심이었을까 아니면 농업지역으로 흑인 노예들을 무임금으로 부려먹어 많은 재산을 모아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던 남부 중심이었을까? 물론 표면적인 슬로건은 남북이 모두 이익을 얻는 연방이었을 터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남북전쟁 당시 연방을 탈퇴한 남부연합에 속했던 주가 현재 가장 먹고 살기 어려운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앞 번호 순서는 연방탈퇴 순서이다.
①사우스캐롤라이나(9위) ②미시시피(1위) ③플로리다(18위) ④앨라배마(6위) ⑤조지아(11위) ⑥루이지애나(7위) ⑦텍사스(8위) ⑧웨스트버지니아(5위) ⑨아칸소(2위) ⑩노스캐롤라이나(3위) ⑪테네시(9위)
이 자료는 2012년 10월 미국 인구 통계국이 발표한 자료다. 미국은 경제 침체로 인해 미국 50개 주 중 절반이 넘는 31개 주에서 전년(2008년)에 비해 빈곤율이 상승했고 빈곤율이 눈에 띄게 하강한 주는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미국 인구의 14.3%에 이르는 자그마치 4,290만 명이 연방 빈곤선 이하의 수입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빈곤율 면에서는 1994년 이래 최악이며, 빈곤 인구수 면에서는 51년 만에 최악이다. 특히 흑인과 히스패닉의 빈곤율이 각각 25.8%, 25.3%에 이르러 아시아인 12.5%, 백인(非히스패닉) 9.4%에 비해 빈곤율이 월등히 높다. 결국 미국의 빈곤 계충은 흑인과 히스패닉계이며 지역은 남부전쟁 당시 남부연합에 속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과연 우연일까?
노예해방 선언 이후의 법적 조치
새로운 자유의 탄생으로 알려진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 표현은 미국인들의 진심이 아니라 본심을 감추고 위장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2년 이상이 경과한 이후에 노예해방이 선언되었다는 점이다.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노예 해방을 주장한 북군이 승리한 뒤에 저지른 일들을 보면 보다 분명해 진다.
남북전쟁 전사자 수
|
북군의 사망자 수 |
남군의 사망자 수 |
전사 |
110,070명 |
94,000명 |
질병 이외 기타 |
250,152명 |
164,000명 |
(합계) |
(360,222명) |
(258,000명) |
남북전쟁 북군과 남군의 사망자 수 |
총합계 524,222명 |
위와 같이 1860년 당시 미국의 총 인구 31,443,321명의 1.7%인 524,222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면 반드시 흑인을 위한 정책이 뒤따라야 했다. 하지만 토지도 돈도 특별한 기술도 글을 읽을 수도 없는 흑인들을 위한 교육이나 복지 정책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여러 악법을 만들어 시민권을 얻은 흑인들의 투표를 막았다.
글 읽기 시험(literacy test), 투표하려면 흑인들은 200달러의 막대한 현금이 있어야 한다는 투표현금법(poll tax), 할아버지가 투표권이 있어야 선거권이 있다는 조부 조항(Grandfather Clause)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1880년대부터 시행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은 남부의 여러 주와 도시가 흑인들을 박해하고 차별하기 위해 제정한 흑백분리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짐 크로우 법은 흑인이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들과 같은 식당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 대법원은 여러 차례 짐 크로우 법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1896년에 나온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다. 이 판결은 철도회사가 백인 승객들이 타는 객차와 흑인 승객들의 객차를 분리하도록 허용했다. 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을 2대의 다른 객차에 분리해 태우는 것이 “분리되긴 하지만 똑같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또 1899년, 인종별로 다른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누군가의 권리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음의 통계를 살펴보자.
미국 인종별 학사 학위 이상 소유자 비율(%) 2010
아시아계 |
미국 시민 |
50.1 |
|
외국인 |
48.3 |
백인 |
미국 시민 |
37.6 |
|
외국인 |
29.7 |
흑인 |
미국 시민 |
25.4 |
|
외국인 |
16.3 |
히스패닉/라틴계 |
미국 시민 |
9,9 |
|
외국인 |
13,5 |
미국의 인종별 실업율 (%)
흑인(Blacks or African American) |
16.4 |
히스패닉/라틴계 |
12.2 |
백인 |
8.5 |
아시아계 |
6.4 |
(* 원주민 인디언은 아예 통계가 없음) |
차별로 인한 저학력과 빈곤의 악순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은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학대와 학살에도 만족하지 않고 이들의 주권회복, 조약이행, 토지반환 등 법적인 소지 자체를 아주 없애버리려는 사악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링컨을 노예해방의 아버지 혹은 인권 수호의 화신으로 알고 있는 것은 철저한 무지의 소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