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김 현 균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가장 최근에 출간된 갈락시아 구텐베르크 판(版) 전집에 실린 것만 총 3,500쪽에 이를 정도로 매우 방대하다. 또 그가 대표적인 정치 시인인 동시에 아방가르드의 일면을 대변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의 경향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그 광활한 시의 바다로 흘러드는 크고 작은 지류는 결코 메마른 적이 없어 손쉬운 일반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몇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도 있지만, 그의 시는 순환적일 뿐만 아니라 심오한 내적 통합성을 지니고 있어 전체 작품에 대한 고려 없이 각각의 시기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그의 시편들은 연대기적으로 단선적 진화를 해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끝없이 감싸 안으며 풍성해지는 변증법적 순환의 과정에 놓여 있다. 시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시 세계는 삶이 끝나는 순간 그의 마지막 말이 완성한 ‘한편의 긴 순환시’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드리게스 모네갈은 시인을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로 명명한 바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그러했듯, 그의 시는 항해와 귀향이라는 시집 제목처럼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면서도 어김없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한 유고시에서 그는 “세상에 파블로 네루다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멍청한 게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이처럼 쉼 없이 ‘지금-여기’의 나를 되묻는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고인 물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던 영원한 여행자였다. 그렇다면 네루다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알랭 시카르는 다양한 테마를 관통하는 네루다 시의 일관성을 “무한한 인간의 시도”에서 찾는다. 네루다에게 ‘무한한 인간’이란 시간을 정복하고 순간을 포착해 물질 속에 그 감정을 영속시키고자 하는 존재다. 그의 초기 시는 이러한 시도와 좌절로 특징지어지며, 그 이후의 시들은 그 좌절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네루다 비평-오독의 역사
정치가 사회의 여러 문화적 욕구를 압도해버리는 상황에서 ‘문학의 정치화’와 ‘문학의 탈정치화’를 경쟁적으로 요구하는 문학 풍토가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해 왔다. 라틴아메리카문학 전체가 안고 있는 딜레마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요구 사이에서 네루다의 시는 “서구의 언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초현실주의 작품의 하나”로 제시되거나 현실 참여적 정치시의 뛰어난 예로 평가받아 왔다. 전자의 입장에 선 비평은 스페인내전 이후 네루다의 시에 나타나는 산문정신을 타락한 시의 형태, 데카당적 징후라는 굴레를 씌워 폄하하고, 후자의 입장에 선 비평은 탈역사성을 이유로 1936년 이전의 시를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이러한 평가의 극단적 양극화와 함께 네루다 시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오독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실 초현실주의적 수사법과 사회시의 간결성, 고독의 시인과 인간적 연대의 시인이 공존하는 유기적 복합성이야말로 입장의 차이를 떠나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요체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동안 우리의 정치상황과 순수/참여 논쟁,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등 숱한 이념적 논제에 휘둘려온 문학계의 현실과 맞물려 네루다는 왜곡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네루다의 스탈린세계평화상과 노벨문학상 동시 수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산주의 세계와 자유주의 세계에서 그의 시가 동시에 찬양되고 비판받는 것도 이 오독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문학을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으로 보느냐, 독자적인 예술의 하나로 보느냐의 문제는 문학이 봉착할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다. 시와 정치의 관계도 문학의 사회성과 예술성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순수주의’ 개념에 따라 시는 정치적인 것에 복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랫동안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따르면, 시의 기능은 실천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의 변혁을 위해 복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시의 영속성을 기대하는 관점과 결합된다. 제한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요소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의 본질적인 영속성에 저해되므로 보편적인 테마, 즉 죽음과 고뇌, 사랑, 고독 등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첨예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시의 본질에 있어서도, 현실적인 맥락에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결국, 시에서 ‘시적인 것’의 본질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조건에 토대한 정서적 의사전달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사회정치적 양상을 주된 테마로 하는 정치시가 다른 분야의 시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쟁점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시집의 하나가 라틴아메리카의 대서사시로 불리는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다. 특히, 총 15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 고독한 섬(나)에서 광장(우리)으로의 이행과 개인주의와 고독에 대한 연대성의 승리를 눈부시게 형상화한 제2부 「마추픽추 산정」은 일체의 논쟁을 무화하는 예술적 높이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스페인내전, 고독한 섬에서 광장으로
지상의 거처로 대표되는 네루다의 초기 시는 자신 속에 유폐된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이 불가능할 때 나와 타인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로 대체되고 구체적 현실과 단절된 내면지향의 유폐 체험이 시작된다. 이 시기의 시를 지배하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부차적인 차원으로 밀어내는 모더니즘 미학으로 자아와 세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며 끝없는 고뇌의 뿌리는 현실의 본질적이고 항상적인 오류와 인간 조건에서 비롯된다는 비관적 세계 인식이 두드러진다. 저항이 이루어지지만 어찌할 수 없는 피투성(Geworfenheit)의 조건에 저항하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저항이며, 세계와 자아의 변화를 향한 몸짓―주로 글쓰기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탐닉으로 드러난다―은 언제나 참담한 좌절로 귀결된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고 토로하면서 존재론적 불안을 드러낸다. 이처럼 네루다는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며, 그 결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까지 자아를 확장하지 못한 채 ‘홀로 있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비인간화된 예술’의 주된 양상인 이러한 자기 고립적 체험은 시인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삶의 시기, 즉 타인과의 소통이 철저히 차단되었던 극동에서의 절대고독의 시기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네루다의 초기 시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실체로서의 객관 현실에 대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 끝없이 해체되는 세계에 대한 결정적인 이미지가 내포된 눈부신 시행 “흘러가며 부서지는 강”은 이 시집의 철학을 응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는 초기 시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스페인과의 만남이었다. 1934-1936년에 네루다는 한 목소리로 지상의 거처에 찬사를 보냈던 27세대 시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스페인 문화계와 조우한다. 당대의 스페인은 제2공화정의 불안정한 시기였으며, ‘순수와 혁명’은 공화정 시대의 스페인 문화계를 규정하는 패러다임이었다. 이때 이미 시적인 순수는 점차 무게를 더해가던 역사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시 내부에 더 깊숙이 유폐되고자 하는 시인의 바람은 스페인내전(1936-1939)을 통해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1930년대의 시대적 위기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달리의 <내전의 예감>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파시즘의 폭풍이 유럽의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 전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여겨지는 스페인내전은 세계를 파시즘과 반파시즘 진영으로 양분하고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존재방식을 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스페인내전에서 네루다는 절친한 벗이었던 가르시아 로르카와 미겔 에르난데스를 잃는다. “개개의 인간이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함으로써 한 시대의 역사가 변혁될 수 있다고 믿어진 최후의 시대”로 혁명과 반혁명이 예리하게 충돌한 이 고뇌의 순간에 네루다는 역사를 끌어안기 위해 고독과 절망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변했고 그의 시도 변한 것이다.
이 시는 1934년에 씌어졌다. 그때이래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가! 내가 이 시를 쓴 곳인 스페인은 지금 폐허다. 아! 단지 한 방울의 시나 사랑만으로 세계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면. 그러나 투쟁과 결연한 가슴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네루다에게 이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 자유에 복무하지 않는 일체의 창작은 반역을 의미했으며, 정치적 앙가주망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 된다. 이제 “양귀비로 뒤덮인 형이상학” 대신 “거리의 피”를 노래하는 그의 시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관철시키고 불의에 맞서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당신의 시는 왜
당신 조국의 땅, 나뭇잎들, 거대한 화산들에 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와서 거리의 피를 보라,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피를 보라
거리에 뿌려진!
스페인내전의 체험은 가슴속의 스페인에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반파시즘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이 시는 네루다 최초의 정치시로 기록되며, 뚜렷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 개념이 명확한 어조로 제시되고 있다. 지상의 거처에서 세계를 카오스로 규정했던 시인은 이제 인간적 유대를 통해 카오스적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하고 모순투성이 인간 세계에 문학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인간적 유대와 소통의 가능성, 시의 유용성이 부정되었던 지상의 거처의 ‘비인간화된’ 시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누구를 위해 이 차가운 맥박을 찾았는가,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기댈 곳 없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기를 잃었던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이처럼 자신의 존재방식과 타인의 존재방식 사이의 연관성을 인식하면서 처음으로 네루다의 세계 개념에 역사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내전을 통해 눈뜬 의식은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 직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결코 잠들지 않는다.
마추픽추 방문: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하다
스페인내전을 통해 정치와 역사의식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네루다의 시에서 라틴아메리카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네루다가 가슴에 품고 있던 칠레 역사의 재해석보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더 절박한 문제로 비춰졌던 것이다. 그러나 네루다가 여행을 통해 가난과 저발전, 착취의 양상을 직접 체험하면서 라틴아메리카 현실이 시의 주요 테마로 떠오른다. 특히 마추픽추와의 만남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1943년 멕시코 주재 총영사를 역임하고 귀국하는 길에 마추픽추를 방문하는데, 이 방문을 통해 네루다는 “칠레인이자 페루인이요, 아메리카인임”을 느끼고 영광스러운 유적 사이에서 “노래를 계속하리라는 신앙고백을 발견”하게 된다.
마추픽추의 유적을 보고 난 후에, 놀라운 고대문화들도 보잘것없이 생각되었다. 방치된 잉카의 탑들이 보여주는 고고한 장엄함에 비하면 인도는 덕지덕지 분을 칠한 왜소하고 볼품없는 신들의 전시장 같았다. 이제 나는 이 위대한 문명과 나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 땅을 밟고 있다면 우리도 아메리카 공동체의 숭고한 노력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고 우리의 무지와 침묵은 죄악일 뿐 아니라 패배를 연장시키는 것이다. 귀족주의적 세계주의는 우리와 관계없는 민족의 과거를 존경하게 만들었고 우리자신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
이처럼 수 세기 동안 안데스 산맥에 묻혀 있던 경이로운 잉카 유적과의 만남은 네루다의 인식지평이 아메리카 전체로 확장되는 결정적 전기가 된다. 이 시기는 1936년에 시작된 그의 정치활동이 한층 구체화된 때이기도 하다. 1945년 3월, 그는 칠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칠레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 참여를 구체화한다. 1946년 대통령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지지를 받던 곤살레스 비델라 후보의 홍보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1948년 좌파정당의 노선에서 벗어나 억압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을 펴던 비델라정부에 맞서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하의 상원연설을 한다. 같은 해 2월 면책특권이 박탈되고 지명수배가 내려진 후 1949년 2월말에 안데스산맥을 넘어 탈출에 성공하기까지 도피생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통해 네루다는 프롤레타리아적 대의명분을 가진 참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의 문학가들이 네루다를 처음 만난 것도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최초로 네루다를 만난 한국작가는 칠레의 시인과 동갑내기 월북 작가인 상허(尙虛) 이태준이었다. 이태준의 마지막 저서로 추정되는 위대한 새 중국에 따르면, 1947년 월북한 상허는 북한 문학예술총연맹 부위원장 자격으로 1951년 10월 베이징의 북경반점(北京飯店)에서 열린 건국 2주년 기념 아시아문학좌담회에 참가하여 네루다를 만나게 된다. 네루다는 1951년 5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 몽골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다. 중국에서는 1949년에 이미 네루다의 시집이 발간되었고, 네루다 전기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51년에는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네루다 시집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정확한 출판 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위대한 새 중국이 발간된 1952년을 전후해 네루다의 시가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네루다에게 큰 관심을 보였던 이태준은 위대한 새 중국에서 “이 분은 미국 자본가들 밑에 피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칠레 광산노동자들 속에서 시를 써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벌써 미국이 앞으로 파쇼의 길을 걸을 것을 예견하여 미국 청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많은 시를 썼으며, 미제와 자기 나라 반동정권의 갖은 박해 속에서 세계평화를 위하여 싸워온 시인의 하나다”라고 소개한 뒤, “이 네루다의 중요 시편들은 중국에서도 번역되었는데, 이 좌담회가 있은 다음 날 네루다는 중국어판 자기 시집 한권에 내 이름을 한문으로 그림 그리듯 써서 보내주었다”고 적고 있다.
또 1920-30년대 한국문학사의 한 축이 됐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좌장이자 해방 이후 북한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는 민촌(民村) 이기영은 그의 자서전 태양을 따라에서 네루다와의 만남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언급하고 있다. 네루다와의 만남은 그가 ‘조쏘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1952년 12월 고골 서거 100주년 기념제전 참가 차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에 체류 중이던 네루다는 스탈린세계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하고 있었다. 민촌은 “가을의 푸른 하늘빛이라 할가. 이른 얼음 풀린 강물빛이라 할가. 유달리 파란 눈빛이 영채롭게 비타고 콧마루가 날카로운 그는 예리하고 무자비한 시어로 미제의 심장을 찌르는 반제혁명투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반제투사로 혁명시인으로 세계 진보적 작가들 속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라고 칠레 시인을 소개하고 있다. 민촌은 당시 네루다와 만난 자리에서, 그가 칠레 대통령과의 교분을 내세우자 자신과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 자랑삼아 이야기했다고 회고했다. “파블로 선생! 세계의 이름난 작가들 모두가 자기 나라 수반들과 친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수령과는 친교관계라기보다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내가 조국을 떠나올 때 우리 수령께서는 먼 길을 떠나는 나의 여행길을 염려하시며 나의 여비까지 손수 관심해 주시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평양을 출발할 때 김일성이 그에게 선물했다는 회중시계를 자랑삼아 내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네루다가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작가다”라고 그를 부러워하면서 “김일성 주석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 일화는 자서전의 제목이 암시하듯, 김일성 찬양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기영, 이태준 외에 한설야도 기행문에서 네루다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한설야 역시 경향문학을 대표하는 월북 문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산주의 지식인이었던 네루다는 1950년대에 우리의 좌파 작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모두의 노래: 라틴아메리카의 대서사시
네루다의 역사의식이 아메리카적 구체성을 획득하는 이 시기의 산물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대서사시로 일컬어지는 모두의 노래다. 이 서사시는 네루다의 전 작품에서 역사의 영향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정치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볼리비아에서 사로잡혀 처형된 체 게바라의 유품 중에 끼어있었다는 이 시집은 1959년 쿠바혁명으로 구체화된 혁명의 시대를 예고한 예언서와도 같은 존재였다. 주요 모티프는 아메리카의 역사이며, 시인은 아메리카의 위대한 자연에서 칠레 해안의 구체적인 자연에 이르기까지, 또 위대한 역사적 신화에서 일상적인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과 역사적 진실의 기록자로 나타나고 있다.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인 1400년의 원주민 문명에서부터 마지막 수록시인 「나는 살리라」가 쓰인 1949년에 이르기까지 “중간 중간 산맥이 끊어진 아메리카의 지리”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배반의 역사를 가능한 한 모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칠레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시인은 이제 전통 미학이 시인에게 부여하는 특권과 ‘저주’의 징후를 몰아내고 지상의 거처의 파괴된 세계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시의 탈신비화를 수행한다. 1954년 칠레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그는 노동자로서의 시인과 노동으로서의 글쓰기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미학, 구체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근접한다.
시인은 “작은 신”이 아니며, 천상의 불을 탈취하지도 않았고, 암수양성이거나 사악한 특별한 종족에 속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노동자다. 이 직업이 다른 직업들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다.
네루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을 수용했고 모두의 노래에 정치적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해도 그의 시는 단순한 프로파간다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네루다는 하나의 정형화된 틀에 갇히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창조자였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현실세계와 인간의 본능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보이는 네루다의 복합적 시 세계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파적 리얼리즘’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작가의 개성이라는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자서전 자서전-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겨드랑이 밑에 이론을 끼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 위에 쏟아 부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거쳐 스페인내전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리얼리즘으로 향하였지만, 한 순간도 자신의 창조적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은 자유로운 예술혼의 소유자였던 네루다는 분명 “리얼리즘 그 너머를 꿈꾼 리얼리스트”였다. 시인 자신의 말대로,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이기만 한 시인 역시 죽은 시인”이다.
당시의 암울했던 세계는 네루다에게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네루다는 위기의 시대에 맞서고 역사적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독특한 방식을 의미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이 물음에 응답한다. 현실인식을 위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주관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차별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시인은 상상력과 현실, 객관성과 주관성의 놀라운 결합을 성취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고 객관적이며, 탈인격화되지 않은 정서적 울림을 유지하는 시적 자아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결국, 시인은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포괄하는 총체적 현실의 해석자를 지향한다. 이처럼 아메리카의 역사에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인 시적 자아의 주관성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시인의 의도는 시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광대한 영속으로서의 역사 개념을 통해 심오한 아메리카의 뿌리를 노래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역사를 살아 있는 것, 즉 과거로부터의 발전적 지속체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의 담지자로 승화시키고 있다. 네루다가 물질의 중심 방향으로 규정했던 ‘영원성’의 구체적인 형식은 바로 역사의 운동이다.
1940년대에 중요해 보였던 몇몇 사실들은 오늘날 역사적 가치 평가의 척도에서 중요성을 상실했으며, 모두의 노래는 때때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조차 거부할 정도의 초보성과 도식성을 드러낸다. 네루다의 역사인식은 브레히트의 경우처럼 마르크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당대를 지배했던 냉전논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가령, 스페인과 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준엄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만, 소련을 위시해 프랑스, 영국 등 스페인을 제외한 유럽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향적인 역사 이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요하는 역사물이나 연대기라기보다는 ‘역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네루다의 상상력 속에서 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시각은 다소 단순화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시인은 지배자들의 공식적인 역사에 대항하여 역사에서 소외된 이름 없는 민중들을 아메리카 역사의 주인으로 세우는 ‘역사 다시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231편 1만 3,000행에 이르는 수록 시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할 데 없는 웅대한 비전을 드러낸다. 결코 낮은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었던 이 시기의 네루다는 신념 없이는 예언할 수 없으며 아메리카는 광기 없이는 정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이었다. 장대한 역사적 구도 속에 아메리카 역사의 구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이 시집이 성취한 탁월한 민중적 서정은 그가 휘트먼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최고의 서사 시인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추픽추 산정」: ‘나’의 노래에서 ‘우리’의 노래로
시는 시적 자아를 통해서 시인이 우리에게 세계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 의사전달 행위다. 이 시적 자아는 노래하는 대상에 따라 상이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즉, 서정시에서 테마와 시적 자아 간의 관계 가능성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서정시에서는 시적 자아가 환기하는 정서, 혹은 정서적 체험에 무게중심이 놓이므로 소설에서와 같은 성격 전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추픽추 산정」에서 자아는 평면적 인물이 아니다. 실존적 고뇌로부터 개인적 진실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의 상실감에서 연대성을 통한 사회적 가치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시적 자아의 진화과정이 제시된다. 즉, 12편으로 이루어진 시는 후반부로 가면서 개인의식의 표현보다는 민중의 대변자로서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됨으로써 개인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로 확대되는 성장소설적 구조를 보인다. 이 가변적인 자아는 ‘타인’과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또 다른 축인 과거/현재와 교차하는 시의 복잡한 구조를 가져온다.
과거/현재라는 종축과 자아/타인이라는 횡축이 교차하는 시의 구조는 텍스트의 담화를 두 구역으로 분리한다. 첫 다섯 편의 시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의 개인사, 즉 “텅 빈 그물처럼” 방황하며 현실과 인간존재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괴롭게 투쟁했던 삶의 단계를 노래한다. 이러한 방황 뒤에 시적 자아는 아직도 “눈먼 사람처럼” 현혹된 채 인간의 세계로 돌아온다. 사물의 중심으로의 여행은 인간의 대지와 그 허망한 봄으로의 불가피한 회귀로 귀결되는 것이다. 회귀의 표현은 자연과 인간사회 사이의 대조적인 존재방식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된다. 이러한 대조의 결과로서 시2의 말미에서는 자연에서 통찰한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광맥”을 찾아 인간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물음이 제기된다. “인간이란 무엇이었나?” 결국, 자연세계의 연속성과 인간세계의 불연속성의 대조의 결과로 제기된 문제는 해답 없이 시적 자아의 패배로 귀결되며, 마추픽추에서의 계시적이고 거의 신비적인 체험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삶의 열쇠를 찾지 못한다. 시4-5에서 자아는 인간 고독의 맨 밑바닥에 도달한 후에(“빵도, 돌도, 침묵도 없이, 홀로, / 내 자신의 죽음으로 죽어 나뒹굴었다”) 시6에서 상징적인 마추픽추 등정에 착수한다.
그때 나는 대지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잃어버린 밀림의 거친 잡목 덤불 사이
마추픽추, 너에게로,
돌층계로 이루어진 고도(古都),
마침내, 잠든 옷 속에 대지를 감추지 않은
것의 거처.
막다른 골목에서 길이 열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는데, 시적 자아는 도시의 건설자들을 통해 타인의 죽음과 그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인식에 도달한다. 등정이 끝났을 때, 마추픽추의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돌과 말로 이루어진 영원”; “그 많은 삶 뒤에 온 돌로 이루어진 삶”), 마추픽추 유적은 눈부신 성소가 된다. 시적 자아는 마추픽추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고 집단적인 인간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영원화할 수 있는 가능성, 즉 거짓된 죽음/진정한 죽음이라는 대립관계의 해소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국, 개인주의적인 과거와의 결정적 단절을 의미하는 마추픽추 등정을 통해, 시적 자아는 고독과 개인적 죽음의 무의미함에 등을 돌리고 집단적 죽음의 계시를 통해 역사의식에 도달한 것이다. 이처럼 네루다의 초기 시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를 통해 고독하고 절망적인 자아의 고뇌를 묘사하면서 시작된 시는 고뇌의 답이 마추픽추의 잉카 유적을 매개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결국 과거/현재의 이분법을 통해 자아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회상이 이루어지는 1구역(시1-5)은 전체 구조 속에서 자아의 공고화라는 현재의 순간을 고양하기 위한 변증법적 대립항의 의미를 지닌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2구역(시6-12)은 유적에 대한 성찰을 통한 원주민 세계의 상상적 재건과 함께 시작된다. 특히, 시9에서는 동사의 절대적 부재 속에 마추픽추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이루어진다. 이미지와 메타포가 숨 가쁘게 이어지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시의 서두에서 제기된 인간의 문제가 잊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깨뜨리는 물음을 통해 다시 근본적인 문제, 즉 이 시의 진정한 대상인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돌 속의 돌, 인간아,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대기 속의 대기, 인간아,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시간 속의 시간, 인간아,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이어 시인은 역사적 진실의 뿌리를 찾기 위해 잉카의 유적 속에 감춰진 인간의 고통에 주목한다. 구체적으로 ‘배고픔’이라는 단어에 응축된 궁핍의 개념이 죽음의 개념을 대체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환기시킨다.
땅에 묻힌 아메리카여, 역시, 그대 역시, 그 맨 밑바닥
쓰린 내장 속에, 독수리처럼 배고픔을 간직했더란 말이냐?
이처럼 유적에 대한 예찬 뒤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제시된다. 고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멈춘 자아는 아메리카의 근원적인 진실의 저장소인 유적에게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회복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내 오늘 잊게 하라, 바다보다 넓은 이 행복을.” 이제 시인이 선택한 시간구조에는 과거를 위한 공간이 없다. 모든 것은 미래로 향한다. 그래서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노동을 통해 남겨 놓은 역사적 진실이 중요성을 지니며, 여기에서 과거는 단지 역사로 태어남으로써만 의미를 획득한다. 시적 자아는 유적 앞에서 한 개인의 죽음의 초월은 타인을 통해서, 즉 마추픽추에 묻혔다가 다시 발견된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인식에 이른다. 자아는 이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역사적 투쟁 속에서의 구원이라는 “물에 잠긴 진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며 억압받는 자들의 대변자로의 변신을 향해 모든 시행이 집중된다.
비라코차의 아들, 석공 후안이여,
초록별의 아들, 추위를 먹는 후안이여,
터키옥의 손자, 맨발의 후안이여,
나와 태어나기 위해 오르자, 형제여.
시적 자아가 함께 오르자고 부르는 사람들, “그의 말과 피를 통해 말”하게 될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그 영속적인 미를 창조한 노동자들이다. 여기에서 시적 대상인 노동자는 개별화되고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구조적 문제가 그를 매개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들의 개인성은 집단성의 형식 아래 표현되며 집단적 주인공 ‘후안’으로서의 전형성을 갖는다. 모든 노동자들은 예외 없이 ‘후안’으로 불리는 것이다. 고리키의 정의에 따르면, ‘후안’은 맨발로 추위를 먹고 돌을 쪼는 노동자라는 특정 계급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제시하는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이름을 통해 극복되었을 때 개인성은 이미 파편화된 기호가 아니다. 1구역에서 소외된 인간을 특징지었던 분열은 마침내 자아가 탐색의 중심에 놓았던 “파괴될 수 없는 것”의 차원인 인간의 삶의 융합으로 변모한다. 이 순간 이후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할 것이며, 이제 ‘나’는 개인적인 차원의 ‘나’가 아니라 자아와 민중의 경험의 총체를 의미하는 집단적 주인공 ‘우리’의 개념에 근접한다. 세월이 파괴하지 못한 유적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자아는 고도(古都)를 건설한 노동자들과 그들처럼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넝마와 눈물과 피에 새롭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그의 책무임을 깨닫는다.
내게 다오, 투쟁을, 강철을, 화산을.
그대들의 몸에 내 몸을 자석처럼 붙여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나의 피를 통해 말하라.
유적에서의 명상은 마침내 결정적인 열쇠, 즉 세계의 허망함도 과거의 영광도 아닌 “잊힌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달한다. 시적 자아는 이제 말 못하는 사람들의 대변자, 피억압자의 해방자가 되어 과거의 본질적인 삶을 복원시킴으로써 민중에게 현실 변혁과 미래건설의 영역을 되찾아 주고 있다. “기억의 심부름꾼”인 자아는 이제 시간의 바닥으로부터 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면서 오늘을 노래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장소에 있다. 아메리카의 사라진 사람들과 동일화되고 그들의 죽은 혀에 목소리를 부여했을 때, 자아는 무한한 시공간의 차원에서 예언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자아는 잉카 민중의 고통을 칠레, 더 나아가 아메리카 전체의 운명 가운데서 보고 또 이것을 세계 도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명의 일부로 파악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타인의 발견을 통해 자아 자신의 정체성과 시적 담화의 정체성이 회복되며, 그는 마침내 사회적 자아로 거듭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현재-미래-과거의 사회와 역사 속에 그 뿌리를 가지는 연속된 존재의 일부로서의 인간존재라는 이 시의 중요한 개념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과거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현재를 붙들고 그것을 역사를 통해 해석하려 한다. 네루다는 여기에서 역사와 밀착되고자 하나 역사가를 대체하거나 역사가와 맞서고자 하지 않는다. 이처럼 문학적인 풍부한 상상력이 역사 인식의 깊이를 더해주며 역사가다운 투철한 역사의식이 예술성의 심도를 더해주는 이 시에서 네루다는 상상력의 시인인 동시에 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결국 시인에 의해 창조된 허구적 자아를 통해 네루다의 역사 개념은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나’와 ‘우리’를 함께 아우르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철저한 역사인식과 상상력이 동시에 팽팽하게 상호작용하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잉카 시대의 역사가 아직도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이 시의 역사의식이자 시적 성취이다. 시인의 행복한 긍정대로, 마추픽추는 “아직도 살아있는 죽은 왕국”이 된다. 고고학적 발견은 1911년 미국의 인류학자 하이람 빙엄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진정한 발견, 즉 시적 발견은 1945년 시인 네루다의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가 아닌 ‘우리’를 지향하는 시인의 몸짓은 열여섯 살 소년 시인이 본명을 버리고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취하는 평범하지 않은 행위 속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시인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삶으로 이루어진 삶”이며, 전기적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글쓰기 속에서 모든 삶을 살 수 있는 변화무쌍한 상상의 자아를 통해 그의 노래는 ‘모두의 노래’가 된다. 다른 시에서 시인 스스로 노래했듯이, 풀숲, 살구나무, 낙엽송, 밀이 되는 것은 시적 자아가 과우테목,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산디노, 레카바렌 등의 역사적 인물과 이름 없는 무수한 라틴아메리카 민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이름은 그들, 죽은 이들과 같다.
나는 또한 라미레스요, 무뇨스요, 페레스요, 페르난데스다.
나는 알바레스, 누녜스, 타피아, 로페스, 콘트레라스로 불린다.
나는 앞으로 죽을 모든 이들의 피붙이다, 나는 곧 민중이다.
기본적인 것들에 바치는 송가에서 네루다는 이러한 시적 자아의 또 다른 가면을 ‘투명인간 invisible man’으로 부르고 있다. ‘투명인간’은 그의 새로운 시적 태도를 규정하는 중심 개념으로 연대성과 희망을 담보하는 집단 주체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시인 자신이 사물과 외부 세계의 노래를 전달하는 익명의 존재로 기능하는 보편적, 탈인격적, 객관적, 총체적 서정시에 대한 네루다의 의지를 표명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나의 삶 속에서
살고 내 노래 안에서
노래했으면 좋겠네.
……
나의 노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모아,
모든 이들과 함께 노래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노래라네.
‘나’의 존재를 투명하게 감추고 ‘나’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성은 자취를 감추며 시인의 노래는 이름 없는 민중들의 침묵의 언어와 결합한다. ‘투명인간’으로서의 시인 개념은 궁극적으로 총체적 현실인식의 추구와 맞닿아 있으며, 우리는 그 가장 완벽한 이론적 표현을 네루다의 1935년 선언 「순수 없는 시에 관하여(Sobre una poesía sin pureza)」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산(酸)에 의해 닳아지듯 손의 의무에 의해 닳아지고, 땀과 연기 배어있고,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일에 의해 끼얹어진 백합과 오줌 냄새 풍기는 그런 시를 추구한다. 옷처럼, 몸뚱이처럼 불순한 시, 음식물의 얼룩과 수치스런 태도를 가진 시, 주름살, 의견, 꿈, 불면, 예언, 애증 고백, 짐승들, 떨림,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세금이 들어있는 시.
아직 형이상학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쓴 이 글에서, 시인은 일상적인 삶, 인간 존재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경험에 대한 추구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지상의 거처에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네루다가 “인간의 손에 닳아진” 구체적인 시적 대상을 통해 집단적인 개념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구체적인 조건을 배제한 채 인간을 설명하려는 일체의 시도, 역사를 배제한 채 자연을 노래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불합리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 존재의 막연한 불순”이다. 삶과 세계의 총체적 반영을 추구하는, 다시 말해 인간과 세계의 모든 요소를 시 속에 담아내려는 시인의 열망은 형이상학적 관념론과 심미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사적 유물론의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이며, 이것은 모두의 노래의 이해에 있어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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