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동 김씨의 시조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으로
그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의 둘째 아들이 되며,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김방경장군을 중시조로 하여 문호를 열었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안동의 다른 명칭을 살려
상락 김씨,
화산 김씨,
영가 김씨,
고창 김씨,
복창 김씨
또는 선 안동 김씨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구안동 김씨는 역사적으로 볼 때 대체로 고려 말엽에서 조선 중기인 인조때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으며,
중시조 김방경의 고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다.
13파 중에서도
김영후의 손자들인 익달의 제학공파
사렴의 안렴공파
사형의 익원공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를 차지해
통칭 ‘제안익 3파’로 불리우며,
*김영후?
중시조로 김방경의 손자로써 우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이밖에 군사공파
대사성공파
도평의공파 등 3파가 그에 버금간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사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중시조 김방경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가문의 중흥을 일으켜 명실상부한 명문세도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그중 장남 선은 밀직사부지사
차남 흔은 찬성사
셋째 아들 순은 삼사판사
넷째 아들 윤은 밀직사지사를 지냈다.
인물로는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거하여 수차례에 걸친 이성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김사렴(김영후의 후손)이있다
김사렴은
문장에 능하여 공민왕 초엽 문과에 급제해 정몽주ㆍ이색과 함께 직간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끝내 이성계의 부름을거부했다
평소 그는 한양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신하로서 군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보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충절을 지키지도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을 뵐 것인가.
내가 죽은 뒤 심심산중에 묻어 봉토하지 말며
돌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후손은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때 자기 몸을 불사른 충성으로 충의가문의 명예를 더욱 빛낸 인물 중에
김제갑과 그의 조카 김시민ㆍ시약 형제가 유명하다.
김제갑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 모리의 군사가 쳐들어 오자 관ㆍ의병을 이끌고 싸웠는데 원주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시백과 부인 이씨와 함께 순절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1966년 강원도민에 의해 원주역전 광장에 그의 충렬비가 세워졌다.
또 그의 조카 김시민(1554∼1592)은
1578년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창원ㆍ진해ㆍ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는 왜적을
곤양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ㆍ곽재우 등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 십수교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ㆍ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왜군의 10월 공격에서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겨우 3,800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 끝에 3만여 명의 적을 사상하고 적탄을 맞아 사망했으나 적에게 비밀로 했다가 안정된 후 상을 치렀다.
후에 선무2등공신에 녹훈되고 영의정 및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무공이다
그외에도 정묘호란때 아들과 함께 순절한 김시민의 동생 김시약
광해군때 명군의 요청으로 참전한
후금(후에 청나라)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응하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김자점(1588~1651)이 효종때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반역의 가문으로
낙인 찍혀
정치적몰락의 길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백범김구가 유명하며
김구가 남긴글에도 김자점 이후 선조들의 삶이
노예와 같은 생활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ㅠ
본관으로 인구수 울나라 18위
첫댓글 이글은 제가 작성한 글이 아닙니다.
울 총무님이 며칠동안 작성한 글인데 경주김씨 댓글로 옮겨달라고 해서 옮긴 글입니다. ㅎ
한뿌리에서 내려온 역사가 유구하네!
재밋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