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릉(獻陵) 3대 태종(太宗),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헌릉(獻陵)은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이다.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仁陵)과 함께 있어 한데 묶어서 헌인릉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는 동구릉 건원릉에 홀로 있고 정비 신의왕후 한씨는 개성(齊陵)에, 계비 신덕왕후 강씨는 정릉(貞陵)에 각각 홀로 묻히었으며, 2대 정종 부부는 나란히 묻혔으되 역시 개성(厚陵)에 있어 볼 수 없으니 3대 태종 부부가 묻힌 헌릉(獻陵)이야말로 우리가 왕릉답사하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임금과 왕비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또한 처음으로 부부를 나란히 모신 정종의 제릉과 태종의 헌릉이 쌍둥이처럼 닮았다하니 자세히 들여다 볼 일이다.
<헌인릉.... 헌릉이 오른편에 있어 다행이다. 왼편 인릉은 국정원에 붙어 있어 불편하다.>
ㅇ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르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5월 16일 함흥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 되었다. 이방원까지는 왕족으로서가 아니라 무인(武人)가문에서 태어났기에 평민의 이름을 쓰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세자 자리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에게 돌아가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1398년(태조 7) 8월 정변을 일으킨다.
이방원은 형제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계비 강씨는 2년 전에 이미 죽었고 태조 이성계는 병환중임) 이복동생들인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귀양보내 살해하니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방원의 형인 영안군(방과)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큰아들 방우는 죽고 없었음)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정비 신의왕후 소생 동복(同腹)형제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1차 왕자의 난에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은 박포가 이방원의 넷째 형 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방간과 방원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방원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방간은 유배됨으로 마무리 되고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방원은 그해 2월 왕세제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었다.
1400년 11월 11일 정종이 왕세제 태종에게 선위했다. 정종이 왕권을 넘기려 하니 세제인 태종이 울면서 받지 않았으나 임금이 권유해 부득이 받아들였다. 태종이 둘째형인 정종에게 왕권을 이어받은 것이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지켜본 태조는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한다는 뜻을 전하니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태조도 어쩔 수 없는 왕위 계승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5년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고, 17년 10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 폐지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처럼 태종 이방원은 이복형제와 친형제의 피를 뿌리고 왕위에 올랐다. ☞ 1367~1422(56세). 재위기간 17년10개월 : 1400. 11월(34세) ~ 1418. 8월(52세)
ㅇ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의 불화
태종이 왕이 되자 형님 문종이 상왕이고 아버지 태조는 태상왕이다.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이 못내 못마땅하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미워하는 이성계.. 태종3년(1402)에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 아버지 태조가 배후 조종으로 의심받는다. 계비 아들 방석의 원수가 아니라 아버지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한 반란이라는 說도 있다.
아버지 이성계를 부정하는 방원의 행보가 시작된다. 그 첫 순서는 불교탄압이다. 건국이념으로 숭유배불을 지향하긴 했지만 태조는 독실한 불자다. 2대 정종도 마찬가지다. 개국 초 정도전 등이 척불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태조의 의지가 굳어 실현되지 못하였다.
1400년 11월,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궁중의 인왕상을 대궐 밖으로 옮겨버린다. 인왕상은 환관 등 궐내에 거주하는 이들의 예불 대상이었다. 궐내 도량법석도 폐지시킨다. 1402년 4월, 사찰의 토지를 군대에 예속시킨다. 이 소식을 들은 태상왕 이성계가 노발대발하며, 사찰의 토지를 되돌려주고 스님들을 억압하지 말 것이며,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태종은 불교 탄압을 일시적으로 접는다.
그러나 1403년 6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사찰의 토지를 몰수한다. 1404년 12월, 사간원의 건의로 부녀자들의 사찰 참배 금지, 1405년 8월, 폐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국가에 귀속, 11월에는 전국의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혁파한다.
1406년 2월, 수백 명의 스님들이 대궐 앞에 마련된 신문고를 치며 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탄압의 강도를 높여 교단 내에 남겨둘 사찰, 스님, 노비, 전답의 수량을 규정하고 종단도 축소시켜 조선 전역에 총 242개 사찰만 남는다.
관아에 의해 몰수된 노비는 총 8만 명, 몰수된 전토는 총 6만 결이 넘는다. 11개 종단이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도종, 총남종, 시흥종 7개만 남는다. 고려 이후 지속적으로 실시되던 승과(僧科)와 승계(僧階)도 폐지해버린다.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과 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에는 마지못해 원찰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생전에 원찰을 세우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ㅇ 큰 아들, 양녕과의 불화
태종은 조선 역대 왕 중 최고의 야심가, 지략가, 정력가다. 카리스마가 있는 국왕이다. 태종은 부인이 10명이다. (9대 성종이 12명, 11대 중종이 12명, 15대 광해군 10명) 자녀수는 12남 17녀 도합 29명이다.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하여 왕자의 난을 2번이나 치루고 왕에 오른 이방원. 태종 5년(1404) 11세의 큰 아들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적통 장자로 왕권을 계승하고 왕권을 지키려는 의도를 거스르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외척 세력의 발호를 방지하고자 원경왕후의 남동생 4명(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을 처형했다. 양녕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 자연스럽게 외삼촌인 그들과 친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세자의 위세를 은근히 업고 조정의 실세로 행세했다. 그들을 차례로 유배 보내고 자진(自盡)토록 했다.
그런 그의 큰 아들, 세자 양녕이 기행(奇行)을 일삼는다. 기행의 도를 넘어 만행(蠻行)이다. 10여년 이상 제왕 수업에 공을 들였지만 세자는 시정잡배를 넘어서 주색잡기가 지나치다. 친인척의 애첩을 건드리는 세자로 인해 부왕의 권위가 말이 아니고 세자의 일탈이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으며 폐세자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심지어 아버지 태종에게 편지를 보내 아바마마는 부인도 많고 아이들도 많은데 자식인 저는 기생첩 하나 두어도 문제가 되느냐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유구무언이 된다.
아버지 이성계에게 한 불효와 불충, 왕이 되려고 뿌린 핏자국들, 왕이 된 이후에는 왕권을 지키려고 또 뿌려야했던 핏자국들이 이렇게 악귀가 되어 돌아오는가 싶었다.
결국 태종 18년(1418)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다. 나이 25세, 세자가 된 지 15년만이다. 1418년은 태종 재위 마지막 해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세자를 폐할때 통곡으로 하교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태종의 고민이 보인다.
1418년(태종 18) 태종은 52세에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지 두 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에는 관여하다가 1422년(세종 4) 5월 10일 연화방(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패륜아 큰아들 양녕으로 속이 썩을대로 썩은 태종에게 불세출의 성군, 셋째아들 세종이 있으니 이 또한 드라마틱한 일이다.
ㅇ 원경왕후 민씨
원경왕후 민씨는 4남 4녀를 생산했지만 태종 이방원과 그리 화목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왕이 되기 전 그녀는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내조자였으며 방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 번 능력을 발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 민씨의 도움이 컸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기에 사병을 거느린 왕족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며 군 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서,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이방원을 불러내어 집으로 오자 갑옷을 입혀주고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거사 하게 하고 자신의 친형제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돕도록 하여 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의 후궁이 많은 것은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한 책략이었지만 민씨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불평하고 투기하였다. 4명의 처남이 처형된 이후 민씨와의 관계는 더욱 나빠지고 오만불손을 서슴지 않아 폐비의 위기까지 이르렀으나 태종은 후일을 걱정하여 끝내 폐비시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부부의 정이야 식었겠지만 원경왕후는 태종 곁에 누워 바싹 붙어 있다. 지금 이들은 돌아 누워 있을까. 마주 보고 있을까.
ㅇ 헌릉 (獻陵)
헌릉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원이봉(同原異封) 쌍릉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형님인 정종의 후릉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구조라고 하는데 역시 박자청의 작품이다. 원래 헌릉은 조선시대 서울성곽 둘레(18 Km)보다 큰, 조선왕릉중 가장 큰 능이었다고 한다.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분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헌릉의 참도는 신도와 어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았으며 정자각에 오르는 동계(東階)등이 생각보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되어 있는 모습이다.
<헌릉 전경... 단정한 느낌이다.>
<홍살문을 들어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신도와 어도의 구분없이 소박해보인다.>
<정자각에 이르러 참도는 장대석 축대에 바로 붙지 않고 약간 떨어져서 꺾어져 돌아간다.>
<정자각에 오르는 동쪽계단 역시 소박하게 간소화 되었다.>
<정자각 뒷문을 통해 바라본 능침....>
헌릉 정자각 북서측의 소전대는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이 소전대는 2008년도에 정릉 약수터에서도 발견되어 정자각 북서측으로 옮겨 놓았다.
<서쪽계단... 제관이 내려가서는 왼쪽에 보이는 소전대에서 축문을 불사른다고 한다.>
<소전대.... 건원릉과 정릉, 그리고 이곳에서만 볼수 있다.>
<정자각을 나와 능침으로 돌아가는 신도... 다른 릉보다 뚜렷하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 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 공간과 능침 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능침에 올라 내려다 본 전경.... 큼직한 비각과 정자각, 멀리 홍살문까지 차분하고 깔끔해보인다.>
<태종릉과 원경왕후릉이 나란히 위엄있게 자리 잡았다... 혼유석과 장명등을 각각 세웠다.>
<왕릉....>
<왕비릉....>
봉분 앞 장명등 앞에 넓적한 판석이 깔려있는 점이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데 이것은 세종이 죽은 아버지 태종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자 만든 자리라고 한다. 혼유석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 형식이다.
<왕릉과 왕비릉 봉분앞에 깔려 있는 판석은 건원릉 앞에도 깔려있었다. 이후 다른곳에서는 볼수 없다고 한다.>
<팔각 장명등.... 태조 건원릉과 비슷한 모양인데 다소 날렵해보인다. 제릉, 정릉의 장명등은 사각형이었다.>
<혼유석... 정말 크고 무겁고 장대하다. 기계로 자른듯 단정하다.>
<5개의 고석... 역시 귀면이 새겨져 있다.>
<능침을 둘러 싼 석양, 석호가 다른 릉보다 곱절이 많은 2쌍, 4마리씩이다.>
<봉분 뒷쪽의 석호... 으르렁 거리는듯 하다.>
<문인석, 무인석도 다른곳이 하나씩인데 비하여 1쌍, 2개씩 세웠다.. >
<문인은 착한(?) 표정으로..... 무인의 퉁방울 모습이 재미있다.>
< 문인석, 무인석 뒤로 그들의 石馬가 줄지어 있다.>
태조 건원릉 못지 않은 위엄이 느껴진다. 병풍석을 둘러쌓은 능침의 봉분은 그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어쩐지 혼자서 둘러보기가 두렵다. 왕릉과 왕비릉을 연결한 난간석도 묵직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병풍석 자락에 깔린 돌기와 모양의 마감도 정말 기막힌 기법이다. 새삼 박자청이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진다.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 쌓은 모습...>
<병풍석.... 동구릉 건원릉이나 광통교에 묻히 정릉 병풍석과 비슷하다.>
<난간석과 연결 석주 역시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2개의 릉을 엮어서 연결한 모습이 흥미롭다.>
< 병풍석을 지탱해주는 인석... 옛것과 중간에 보수였는지 새로 해넣은것의 차이가 확연하다.>
<헌릉 뒷쪽, 잉 부분에 올라 바라본 전경....>
능원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다.
<비각... 외양만 보아도 무척 커 보인다.>
<왼쪽 원래의 신도비는 귀두가 날아가고 없고 전체적으로 오래되어 식별이 어렵다. 오른쪽이 새로 세운 신도비>
후에 아버지 태종 곁에 안장됐던 세종은 여주로(英陵), 할아버지 곁에 묻히려던 문종은 동구릉(顯陵)으로 천장했다.
태종우(太宗雨) 태종 말년 극심한 가뭄으로 온 나라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고 한다.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염려가 되어 “내가 죽으면 마땅히 상제께서 비를 내리시도록 청하여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 주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바로 비가 내려 오랜 가뭄이 풀렸다고 하며 그 뒤부터 태종이 승하한 날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항상 비가 내렸으므로 이를‘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종우는 20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년(선조 24)부터 멈췄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태종의 전쟁에 대한 경고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나름의 방식으로 조선 초기 왕조의 기틀을 닦은 왕을 기억해왔다.
<혼유석 바닥 돌을 하전석이라 하는데 헌릉의 왕릉 하전석에 생긴 네모 홈... 태종우인지 빗물이 고여 있다. >
폐세자 양녕 이야기 원경왕후 국상 당시 세종은 임금이고 태종은 상왕이며 양녕은 이천으로 유배되어 있었다. 세종은 형 양녕을 참례시키고 싶었지만 아버지 태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이제 태종의 국상을 당해보니 이번에는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양녕을 불러들여 장례에 참여시킨다.
양녕은 동생 충녕(세종)이 왕이 된 후에도 유배지를 벗어나 함부로 돌아다니고 난잡한 행태를 멈추지 않아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형님에 대한 극진한 우애와 예우를 견지하며 수십 차례 올라온 탄핵 상소를 끝내 거부했다.
그런 양녕대군이 노년에 세조 편에 서서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내쫓는데 앞장섰다. 아이러니 한 일이다. 그는 천수를 누려 1462년(세조 8년)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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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개인적인 태종에대한 생각을 달리하게된 계기가 헌인릉답사였습니다.
다시 여유롭게 더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꼼꼼한 기록과 사진들,,, 당시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 처럼 떠올리게 합니다... 복습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네여... 감사합니다...^^
항상 역사의 단편적인 모습에 치중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서 감사해요, 전생에 무슨 인연들이 있었기에 이런 공부를 할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함을 느낌니다.무료하게 나이듬을 탄식할게 아니라 바른 가치관을 가진 할머니로 변화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역시!지혜로운 인물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