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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남진 11차
동양 최대 석회암 굴을 바라 보면서
일시; 2011. 6.12(일) 4:30—15:40
구간;댓재..황장산..자암재..덕항산..구부시령..푯대봉..
..건의령..피재(삼수령) 24km
참여인원; 25명
2007년 1월, 무릎까지 빠지는 흰 눈을 헤치고 천왕봉을 향해 오르면서 시작한 백두대간 북진,
그 이듬해 7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진부령, 향로봉을 내려 서면서
이 길을 살아 생전에 다시 걸을까?....그때는 생각이 깊었었다.
은퇴를 하고 체력이 따라가면 60대 후반에 한번 더 하고 싶었던 것이 그때의 솔직한 심정 이었다.
물론 대간과 9정맥을 다 하고 나서 말이다….
시간은 빨라서 그로부터 4년을 넘고 5년째로 접어든다.
낙동 정맥을 마치고 다시 백두대간 남진을 결정 하던 어느 날, 당초의 언약이 어긋나서
다소 서운 하였지만 또다시 백두대간의 능선에 오를 생각을 하니 그 긴 여정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런 갈등의 시기는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다소 빨랐다.
회사 일이든 사적인 환경 탓 이든 그것은 한낱 핑계였고
산행은 그져 일상의 한 단편으로 생각하고 다시 끼여 들기로 작정 한 것이다.
햇빛을 등지고 오르던 북진과 달리
남진은 또 다른 풍광을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1000미터가 넘는 신록의 산 자락을 오르내리는 꿈을 꾼다.
당일 산행에 비하면 무박 산행은 구간도 길고 오가는 이동 시간도 많아
다시 천왕봉까지 이르는 여정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이번 구간은 특별히 이름난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능선과 계곡, 그리고 산촌에 묻혀있는 역사와 문화의 잔재는 보석과 같은 것이 너무도 많은 구간이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양 최대의 동굴 환선굴을 위시하여 무려 54개의 동굴이 산재된 곳,
고려 마지막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의 5대조에 얽힌 사연이 깃든 곳,
상고시대 밀직국이라는 어려운 지명과 함께 투박한 산촌의 자연마을 이름이 혼재하는 삼척을 지나고
낙동 정맥의 초입, 태백시 삼수령에 이르는 평탄한 구간으로서 전형적인 동고서저東高西低 구간이다.
전반적인 고도는 거의 전 구간이 1000m내외로서 그야말로 하늘 공원을 걷는 느낌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버스에 오르니 낮선 얼굴과 낮 익은 얼굴이 반반이다.
버스가 삼척에서 영경묘(태조 이성계의 5대 조모)가 있는 미로면 동산리를 거쳐
구 댓재길로 우회하는 바람에 다소 늦어 졌지만 댓재 정상은 쌀쌀한 바람이 맞는다.
서울 경기 보다는 서늘하여 역시 강원도라는 느낌이 피부에 닿는다.
원래 내생奈生이라고 하였다가 죽현 竹峴이라고 불렀으며 그후에 지금의 댓재라고하였다 한다.
고개 아래, 삼척 미로면 방향 골짜기 상단에 댓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일찍 도착한 다른 산악회 버스가 떠나고, SUV 로 도착한 또 다른 일행이 북진 준비를 하는 사이
25명의 조촐한 회원님들이 익숙하게 준비를 하고 출발이다.(4:30)
산악회 꼬리표를 입구에 메 달고 오랜만에 대간 길로 오른다.
주요 지점에 부착 하기로 하고 산악회 꼬리표15개를 준비 하였다.
산죽밭을 지나고 된 비알이 이어진다.
가뿐 숨을 몰아 쉬다가 한 두사람씩 옆길로 비껴 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일행은 수월하게 황장산 정상에 도착한다(975m, 4:45)
여기서 100여 미터 정도 진행을 하니 공터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이 곳이 지나온 황장산 표시석이 있는 곳 보다는 고도가 높게 나온다.
정상은 숲으로 둘러 쌓여 있고 이른 아침 탓인지 조망은 생각 할 수도 없지만
동쪽 하늘은 뿌옇게 하나 둘씩 열리고 있다.
황장산(975m)
속이 붉은 색갈을 뛴 적송이 오래되면 속이 누렇게 변하는 까닭에 황장목黃腸木이라 하였으며
황장목은 궁궐의 건축과 왕실의 관을 짜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황장목이 많이 자라는 산을 황장산이라고 봉산封山(입산금지) 하였으며
이곳 황장산은 지금은 소나무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황장목이 훨씬 더 많은 또 다른 황장산(1.077.4m)은 백두대간 문경 구간에 있다.
완만한 내리막길과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무명봉, 지도상으로 1,015m봉우리에 도착한다(5:00)
이곳도 전망이 없기는 마찬 가지다.
비슷한 지형이 이어 지면서, 1,011m봉우리를 지나고 (5:10)
삼각점이 설치되어있는 봉우리를 이어서 만난다 (1,059m) (5:30)
이정표로 역산을 해 보니 지나온 댓재까지 3.1km이고 1 시간이 소요된 만큼 큰 오르내림이 없다.
또 다른 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려오는 비탈, 툭 터진 곳에 좌측 방향으로는
준경묘 4.8km라는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준경묘에서 올라 오는 산꾼들이 많은 탓인지 웃 자란 풀 사이로 길은 오롯이 잘 나있다.
먼 발치로 줄줄이 이어지는 능선과 깊은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첫 전망이 트이는 곳이다.
준경묘, 영경묘
좌측 삼척시 미로未老면, 이곳 산 아래 활기리 능곡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의 아버지 양무 장군의 무덤인 준경묘가 있고 지근 거리에 부인의 묘도 있다.
조선 개국을 합리화 하는 용비어천가 첫 장에 등장하는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으로 이어지는
해동육룡海東六龍… 중에서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전주 산성 별감과 사이가 나빠져서 처가인 삼척으로 피해왔다.
목조 이안사는 부친이 죽자 이곳에 장사 지내고 이어서 모친이 죽자 삼척시 동산리에 장사 지냈다(영경묘).
(지금은 그묘가 준경묘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그리고 나서 운명같이 산성 별감이 삼척으로 부임하자 추종자와 함께 함경도로 이주해서
여진족의 벼슬을 하였다 한다.
준경묘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 될 정도로 금강송이 잘 가꾸어져 있다.
가슴까지 자란 억새와 잡초, 싸리 나무를 헤치고 능선에 이르니
넓은 풀밭 사이로 이름모를 들풀과 나무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초록 화원을 이루고 있다.
바람은 솔솔, 산들 바람에 소나무 가지가 가볍게 춤추고 귀밑을 스치는 바람이 간지럽다. .
능선 곳곳에 자란 취 나물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이어지는 전나무가 빼곡히 늘어서 있는 구간은 바라 보기만 하여도 시원스럽다.(6:00)
완만한 구간을 내려 서다가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불쑥 나타나는 임도, 큰재에 도착한다(6:05)
도로 포장을 위해서인지 길은 굳게 다져져 있다.
광동 이주 고냉지 채소 단지에서 시작하는 이 길은 광동호에서 댓재로 오르는 길로 이어져서
삼척으로 드나들기에 편리한 길이 될 것이다.
차단기를 넘어 채소밭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온통 민들래와 이름 모를 들풀로 빼곡하다.
밭 가장 자리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눈이 흠뻑 내린 겨울에는 저 나무가 유일하게 방향을 가르켜 주었는데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반갑다.
가장 자리를 따라 올라서니 오래 된 물탱크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1058.6m)
뒤돌아 보니 두타산 정상도 아련하다.
물탱크가 서 있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좌우, 건너편 산 비탈까지 온통 채소밭으로 개간된 곳이다.
1988년 산아래 광동리에 댐이 건설 되면서 주민들이 이곳 귀네미골로 이주하여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는 곳이다.
채소밭에는 아직 파종을 하지 않은 탓인지 히뿌연 비료(?) 와 함께 인분 냄새가 코를 찌른다.
광동 이주 단지 고냉지 채소 밭(귀네미 골)
귀네미골은 무릉도원으로 넘어가는 어귀에 있는 골짜기라고 정감록에서 지시 하였다.
채소밭 우측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귀네미골이 시야에서 사라질때 즈음
아침 식사를 위해 기다리는 선두와 조우한다.(6:50)
식사를 위해 앉은 자리에서 방초님이 더덕을 발견하고 세 뿌리나 캔다.
참으로 이상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더덕이다.
그 잎 모양이 어린 싸리 나무나 철쭉의 잎과 비슷하지만 넝쿨이 이어져서 자세히 보면 구분이 쉽다.
그러나 큰 줄기와 무성한 잎에도 불구하고 뿌리의 크기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시장에서 사서 먹는 더덕은 도무지 무취이다.
그러나 새끼 손가락 만한 산 더덕은 그 냄새가 아주 진하고 독특하다.
식사 후 내려서는 비탈에서 앞선 회원님들이 숲속으로 하나 둘씩 사라진다.(7:25)
본격적으로 나물 산행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넓직한 안부, 자암재에 도착하니 아름드리 참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파란 풀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아름답기 그지 없다.(7:35)
어떤 지도에는 이곳을 장암재라고도 표기 하였다.
안부 우측은 광동 이주 단지로 이어지는 도로로 떨어지고
좌측으로는 환선굴 1.7km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봉우리를 치고 올랐다가 내려서는 공터에는 무릎까지 자란 쑥이 빼곡하고
그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도상으로 헬기장 이지만 웃 자란 들풀로 보아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7:50)
이어지는 오르막길, 이마에 맺힌 땀이 눈썹위로 떨어질 때쯤 환선봉(1,080m)에 도착한다(8:10)
큼직한 표지석 뒤 동쪽으로 10여 미터를 진행을 하니 대이리 동굴 지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건너편 능선과 산 비탈은 칼날 같은 바위가 이어져 있고
그 중턱 철 계단 끝자락이 환선굴 입구로 짐작이 된다.
날씨가 맑은 날은 삼척 시가지와 동해까지 조망이 된다고 하지만 오늘은 시야가 선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발아래 이곳 저곳의 절벽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표지석 주변에서 건네는 방초님의 막걸리 한 사발이 목젓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간다.
발이 불편 하지만 한번도 탈출을 하거나 일행에서 뒤로 쳐진적이 없던 말 없는 남자,
거의 매 주말 산행을 한다고 한다.
환선봉에서 내려다 본 대이리 골짜기와 철 계단 끝 부분 환선굴 입구(하얀 지점)
환선幻仙굴,
처녀가 선녀로 환생하였다는 전설과,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해 환선굴에 들어갔으나
되돌아 나온 스님은 없어서 이 스님 또한 환선하였다는 설이 있다.
환선굴 초입 대이리 골말에는 중요 민속 자료로 지정된 약 300년 된 굴피집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향하면 동해 바닷가 삼척시 근덕면에 살해치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 무시한 지명이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간성에서 2년간 귀양을 살다가 삼척으로 옮긴지 한달만에
이성계가 보낸 사람에게 목이 졸려 목숨을 잃었으며 근처 궁촌에 조성된 무덤은 가장 큰 것이 공양왕,
그 옆은 2 명의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 무덤이라고 전한다.
궁촌 또한 왕이 피신해 머물던 곳 이라는 지명이다.
공양왕 능은 이곳을 포함하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 금수리등 세곳이다.
공양왕이 교살된 후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 머리만 가져가고, 몸은 이곳에 묻었다는 설,
간성에 있는 무덤은 공양왕의 최 측근 홍문관 박사출신 함 부열이 왕의 시신을 수습해
간성으로 옮겨 묻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세종 실록에는
“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고양시 원당의 능을 공식으로 인정 하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 떨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에 오금이 저리지만
가장 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굵은 로프가 그나마 위안이 된다.
눈 덮힌 겨울에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어서 매우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10여분을 내려서서 안부를 지나고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올라 고만 고만한 봉우리를 지나니
넓직한 안부가 나타난다.(8:45)
왼쪽으로는 환선굴, 오른쪽으로는 예수원으로 떨어지는 방향이다.
환선굴에서 올라오는 철 계단이 위쪽으로 설치 되어있다.
산행 중 자주 만나는 예수원은 1965년 성공회 대천덕 신부가 덕항산 서쪽에 세운
노동과 기도를 함께하는 수도 공동체이다.
태백 시내에 본원이 있고 매봉산 오름길에 있는 목장과 농장도 대간꾼들의 눈에 익숙하다.
다리쉼을 하려고 털썩 주저 앉으니 주변에는 온통 취나물이다.
쉴 틈도 없이 모두들 분주하다.
휴식후 10여분의 오름길 끝에 덕항산 정상에 닿는다.(1072.5m, 9:10)
삼각점과 함께 조금만 표지석이 서있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을 제외 하고는 조망은 그져 그렇다.
덕항산은 하사미와 삼척시 신기면과의 경계에 솟아있는 산으로서 옛날엔 덕메기산으로 불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항산이 되었다. 옛날 삼척사람들이 이 산 목재를 넘어오면 펀펀한 땅 「덕」이 많아
화전(火田)을 많이 하였기에 「덕메기산」이라 하였다. 「덕이 한 산중턱 이상의 편편한 땅을 이르는 말이다.
덕항산은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되어있고 산아래 삼척쪽에 유명한 환선동굴(幻仙洞窟)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군데의 석회동굴이 있는 산이다.
산의 동쪽은 험한 벼랑으로 되어 있고 산의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특이한 산이다.
내려서는 안부에는 미역취가 무성하게 자라서 또 한번 허리를 굽히게 한다.
안부를 지나고 짧은 봉우리를 거쳐 넓직한 안부, 구부시령에 도착한다. (9:35—9:50)
참외와 사과, 방울 토마토와 과일들을 꺼내 먹으면서
삼척과 도계읍 사이 오십천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에 잠시 피곤을 잊는다.
구부시령九夫侍嶺
이 고개 아래 산골에 아홉 남편을 섬긴 아낙네가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삼척군지에는 아홉 구비가 있는 고개 라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구부시령을 떠나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그러나 이미 산 나물에 재미를 느낀 탓인지 능선 이곳 저곳을 오르는 발걸음이 한 없이 느리다.
10여분 만에 첫 봉우리(10:10, 지도상 1055m로 추정)를 지나고
두번째 봉우리(10:40, 1,013m)를 지난 능선에서 또다시 다리쉼을 한다. (10:55--11:05)
만사 OK님의 흑임자 속 쑥떡도 맛있고, 사돈댁(?)의 시원한 참외는 껍질째 먹어도 달고 시원하다.
다솔방님은 다음부터는 냉수에 그냥 타서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가지고 오라고
여성 회원에게 주문하면서 프리마가 있는 일회용 커피는 몸에 좋지 않다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바람은 다소 잦아 들고 따가운 햇볓 때문에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물을 계속 들이킨다.
별 특징 없는 봉우리를 지나고 등로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내려서는 비탈에는
취 나물이 온 사방에 깔려있다.
하물며 단풍 나무잎을 닮은 단풍 취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아니하고 지나친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엄나무 잎에는 그 모습이 비슷한 단풍취가 많이 섞여 있다고 한다.
하나 둘씩 따는 도중에 더덕 한 뿌리를 발견한다.
새끼 손가락 만 하지만 그 냄새가 진하다.
마주치는 쑥 대장님 왈, 오늘은 초보들도 더덕을 다 케는데 회장 체면이 말씀이 아니라고 한탄을 한다.
웃음이 오가는 도중에 일행은 정상(997.4m)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11:25)
잡목지대를 지나고 오르내림을 몇 차례 진행 하다가
철조망을 쳐 놓은 농장을 한 흔적이 있는 안부에 내려선다.(12:10)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 기둥에 누군가 흑색 잉크로 한세령이라고 써 놓았다.
어느 출판사의 등산 지도에는 한의령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우측 능선은 온통 개간을 하고 과실수를 심었던 흔적이고
그 아래 계곡은 잘 가꾸어진 비탈 밭의 이랑이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다.
지도상으로 우측 삼밭골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푯대봉까지 이르는 등로는 다소 지루하다.
능선을 향해 경사로를 오르다가 봉우리를 지나고 내려 서기를 여러 번,
앞서가던 방초님이 넓직한 고사리 밭을 발견하고 사진기를 꺼낸다.
고사리 밭은 온통 산 비탈 하나를 다 차지하고 바람에 일렁이면서 이리 저리 쏠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한동안 바라 보다가 우측 큰 봉우리가 푯대봉임을 짐작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능선에 자리한 푯대봉 갈림길, 수많은 꼬리표가 나무 가지에 메달려 반긴다.(12:55)
베낭을 두고 지근 거리에 있는 푯대봉에 도착한다.
큼직한 화강암에 쓰여진 표지석 옆 산불 감시탑을 뭉클님이 올라서서
전망이 기가 막힌다고 올라 오라고 한다.
세상에 공짜 구경이라면 가리지 않는 성미인데, 하나 둘씩 올라선 철탑의 조망이 과연 끝내준다.
가야 할 방향 매봉산 자락으로는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 지다가
건의령을 지나고 나서는 높은 봉우리가 겹겹이 서있다.
좌측으로는 산 자락에 펼쳐진 리조트 시설이 눈에 들어오고
지나온 방향으로는 첩첩 산군이 가로 막아서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구부시령에서 푯대봉 까지는 봉우리가 수 없이 많았지만
웃 자란 나무에 의해 전망도 없고 삼각점도 봉우리 이름도 없어서 좀체 구분이 안 되는
답답하고 지루한 구간이다.
매봉산 천의봉 방향
지나온 대간 산군山群
푯대봉(1099.9m)
일제시대 토지 측량을 위해 산 봉우리에 삼각기점을 잡은 푯대를 설치한 이후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난 이곳에는 삼각점과 함께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있으며
주변에서 꽤 높은 봉우리이다.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영월 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과 평창에도 있다
푯대봉에서 내려서는 완만한 등로는 줄기가 하얀 참나무들로 빼곡하다.
등로에 나뒹구는 조그만 나무 토막을 밟고 미끄러져 엉덩 방아를 찟는다.
빼곡히 늘어선 한얀 줄기의 나무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쭉쭉 뻗은 아름다운 소나무로 이어진다.
차량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소나무 사이로 민가가 하나 둘씩 눈에 들어 오더니 불쑥 터진 공간, 한의령에 도착한다.(1:25)
안내도에는 한의령이라고 쓰여있고 건의령이라고도 부른다고 부기附記 되어있다
2008년 북진을 할 때는 이 지점은 비 포장 고개마루였으나
지금은 터널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간이 공원을 조성하여 놓았다.
건의령巾衣嶺
태백시 상사미동에서 도계읍 점리, 눌구리로 내려가는 고개로서
여지도서(建衣嶺), 문헌비고 여지고와 산경표(建儀嶺), 대동지지(巾衣嶺), 1/50,000지도(한의령寒衣嶺)에는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건너편 숲 속에서 앞서가던 일행이 다리쉼을 한다.
피재 내려서기 전에 나물 봉지를 베낭에 넣고 아무일 없듯이 내려 서자고 한다.
고개에 있는 가게집이나 농사철에 방문 차량이 많아 매봉산 출입을 통제하는
감시 요원들 눈에 띄면 좋을 것이 없다고 회장님이 당부를 한다.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하지만, 어이 없게도 준비 한 오미자.솔잎 술을 집에 두고 와서 후회 막심하다.
피재까지 남은 6km를 무슨 힘으로 갈 것인가 ?
어떤 산행기에 의하면 이 구간은 높은 봉우리 9개를 지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휴식 후 일어서는 다솔방님이 주머니에서 꺼낸 기기에서 음악을 틀고 산보 하듯이 걷는다.(1:35)
아…이 산중에서 “댄서의 순정”을 듣자니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
무념무상으로 힘들게 걷는 것보다는 소리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숲길을 거닐다가 우측으로 터진 바위로 올라서니 주변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우뚝 솟은 산 자락 아래로 넓은(?)밭이 개울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늘어진 산 자락과 개울물을 비껴서 민가는 이곳 저곳에 뛰엄뛰엄 흩어져 있다.
그 사이를 지나는 2차선 도로는 태백에서 정선으로 이어지는 국도 35번이다.
행정구역상 태백시 상사미동上士美洞의 한 촌락이다.
건의령 지나서 내려다 본 상사미동 골짜기
상사미동上士美洞,
태백시 하사미동, 상사미동을 거쳐 삼수재(피재)를 넘으면 태백 시내에 이른다.
사미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 하지만,
옛날 이 지방에서는 삼공蔘貢(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많이 하여서 삼 또는 사미라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며 또 다른 이야기는 상사미의 고직대 밑에 맑은 샘이 있어서 새미, 사미로 불렸다는 설,
이 골짜기에서 삼麻을 많이 길러서 사미로 변형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이어지는 길은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10여분 후에 임도를 가로 지르고 다시 오르는 등로 주변에도 소나무 숲은 계속 이어진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씩 봉우리 숫자를 헤면서 오르내린다.
9개를 넘어야 피재에 도착 하는데…….
그런데 봉우리 마다 이름도 표지석도 삼각점도 없어서 구분이 안된다.
심지어 산행 지도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건의령에서 노루메기에 이르는 이 구간도 참으로 지루하다.
장시간의 산행, 더더구나 산 나물을 채취 하느라 오르내려서 기운이 다 빠진 상태라서 더욱 힘들다.
진행중에 북진하는 일행을 만나서 서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한 동안 이어 지다가 우측 건너편 동쪽 산 비탈에 크게 조성된 공원묘지를 바라본다(2:40)
태백시립 공원묘지,
태백이 고향인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저리도 크게 조성 하였을까 만,
이곳은 한때 번창하던 탄광촌 태백에 거주 하던 이들의 영원한 쉼터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도 광부 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묻혔다고 하고
미망인은 도회로 나가 살고있는 자녀들의 요청도 뿌리치고 혼자서 이곳 태백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야 사람마다 서로 다르겠지만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눈 앞에 나타난 길고 긴 오름길, 좌우로는 여전히 취나물이 곳곳에서 손짓하는 중턱에서
뭉클님이 뱀을 발견하고 한동안 서서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뱀을 본다.
사람 소리가 나면 재빨리 도망을 가기 마련인데 무슨 연유인지 그져 느릿느릿 하다.
“온누리님, 뱀이 어떻게 기어 가지요 ?
내가 알기로 몸을 비틀어서 그 반발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직선으로는 잘 가지 못하고
몸의 일부, 또는 전부를 구불구불하게 비틀어서 그 힘으로 전진 하는 것이지요….
시골에서 자랄 때 많이 보았고 잡아서리……”
급경사 길에서 나무 계단을 오른다.
다행히 오름길은 짧아서 곧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그러기를 두 차례 더 하고 나서야
모처럼 발견한 삼각점(945m)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3:15—3:25)
또 다른 북진 일행을 사면길에서 만난다.
숲은 어두울 정도로 울울창창하고 피곤에 지친 탓인지 시야도 흐릿하다.
문득 밝은 공간이 나타나면서 노루메기로 알려진 시멘트 임도로 내려선다( 3:30)
구부시령에서 푯대봉, 그리고 건의령에서 노루메기 까지는 참으로 지루하고 힘든 구간이다.
이정표를 조금 더 많이 설치하고 지명이나 봉우리에 이름이라도 써서 세워 놓았으면 좋으련만...
노루메기
건의령에서 이곳에 이르는 동해시 도계읍 산골 마을은 옛 지형을 그대로 부른 곳이 많아서
양지말, 음지말, 돌밭, 물밭, 삼밭골, 고사리…..정겨운 이름이 너무도 많다.
도계리, 세 갈래 길의 분기점에 있으므로 길가말(道邊村)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도계리가 되었다.
도계읍의 한내리에는 다람쥐 한숨고개(다람쥐도 올라와서 힘이 들어서 한숨을 내 쉬는 고개),
다름쥐 눈물고개( 저승골을 오를 때는 다람쥐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이 드는 고개.)라는
지명도 있다고 한다.
산이 높고 오르기가 얼마나 힘 들었으면 다람쥐에 비유 하였을까 만 그래도 웃음이 나온다.
우리 산악회가 밀직국 시절에 활동을 하였더라면
골짜기 마다 쑥맥골,도라지골,방초골,뭉클골,기분골,.….이라 하였을 것인데….
피재 400m를 알리는 마지막 이정표 옆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쉰다.
하늘로 치솟은 아름드리 황장목이 줄지어 늘어선 경사면을 지나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황장목은 원래 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지는 않지만 이 곳은 어쩐지 가지와 잎이 빈약하다.
삼수령三水嶺을 알리는 정자에 올라서 오십천五十川 계곡 방향을 잠시 내려다 본다.(3:40)
원래 이곳에는 피나무가 많아서 삼척의 선원이 배에 쓰는 피 나무 껍질을 이곳에서 많이 벗겨 갔으므로
피재皮嶺라 하였으나, 낙동정맥 구간 백병산에서 발원하고 이곳 삼수령에서 떨어지는 물과 합류하여
도계 삼척으로 이르는 동안 곡류가 심하여 오십번 꺽인다는 오십천,
그리고 한강과 낙동강 세곳으로 갈래친다 하여 태백시가 삼수령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같은 구간을 계절을 달리해서 찾으니 색다른 느낌이다.
주변의 조망은 추운 날씨에 비해서 겨울 산행이 더 좋은 것 같고,
신록이 온 산을 감싸는 여름 산행은 신선한 공기와 하늘의 정기를 받는다는 느낌이 앞선다.
더구나 산 나물의 묘미를 알고부터는 여름 산행이 더 좋게 느껴진다.
도착 하자말자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들이키고
미리 준비한 불고기, 족발, 홍어를 상추쌈에 싸서 마구 집어 삼킨다.
산행을 하면서 마지막 까지도 배가 고픈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로 허기를 느낄 정도로 배가 고프다.
그러나 오랜만에 한 백두대간,
1,000미터 높이에는 산 나물이 많이 자라고 청정 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
좋은 산 나물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벌 받는다(?)는 회장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느때 보다 땀을 많이 흘리고 물도 많이 마신 탓인지 몸은 가볍기 그지 없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 한준兪漢雋(조선 정조 시대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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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들어 그저 따라만 가기도 바빴는데 다시한번 세세히 느끼면서![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2.gif)
감했습니다.같은산이라도 계절마다 전혀 ![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랐슴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온누리님의 해박함과 놀라운 기억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합니다.....
아무래도 전 눈감고 다녔나봐요.....ㅎㅎㅎ
언제쯤 나도 사랑하여 전과 다르게 보이게 될까나.....
되새기고 다시 공부 잘하고 갑니다~~
지나온 길목마다 역사의 흔적과 전설들이 묻혀 있고 또 이어지겠지요. 기분죤의 길들이....
사진과 어우러진 생생한 기록들을 보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산행기의 종결자"가 분명합니다.
앞으로 쭈욱 즐거운 산행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대간길을 이어가는 수많은 봉과 고개들, 봉에도 사연들이 많겠지만 동,서,남 북을 서로 넘나드는 고개에 사연과 애환이 많이 깃든것 같군요. 댓재,큰재, 자암재, 구부시령,한의령, 삼수령,,,,,,,
다시 걷는 대간길.......댓재/피재....즐감하였습니다.....삼수령 단체사진 인원이 조금 줄긴 했지만..그래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쉬 내공이 묻어납니다^^누구의 소원이 풀어 졌다네요??...대간감상문글^
행복해 보이네요 나도가고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