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두드리며 읽는 이유는-- 나만의 책 읽는 방식(정독을 위한)으로
茶經강설(煮茶學) [十之圖](p373)에서
"로빈슨 H.M. Robinson의 독서과정 [SQ3R 방법]"에 준해서 응용한
나만의 학습방식으로 먼저 두드리며 읽고, 원문 올리며 읽고, 오타 수정하며 거듭 읽기로.)을 다시 응용해
(정독하기, 다시읽기, 거듭읽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나무라시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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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우리 교육
정지용에서 천상병까지
정지용, [향수]와 [다알리아]의 이미지.
조지훈, 멋과 지조
신석정, 목가적인 참여시인
긴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
신동엽, 민족적 순수와 반외세
박용래, 눈물과 결곡의시인
박봉우, 조국이 곧 나의 직업
임화, 역사의 격랑 속에 침몰한 혁명시인
권태응, 헐벗은 아이들이 가슴에 별을 심은 시인
이육사, 변형된 자화상 - 초인
오장환. 낭만과 격정의 민중시인
김영랑, 쓸쓸함가 애달픔
이한직, 우수와 허무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
박인환,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한용운, 사랑의시인, 민족의시인, 구원의시인
백석, 눈은 맞고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
신동문, 살을 통한 시의 완성
유치환, 남성적 그리움과 호방한 울부짖음
박목월, 자연, 생활, 향토.
김수영, 앞을 향해 달리는 살아 있는 정신
천상병,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이 마음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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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동. 엽
민족적 순수와 반외세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와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이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문
1
부여를 찾는 젊은이들이나 대학 생들이 백제의 유적지와 함께 만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신동협 시인의 시비가 서 있는 나성터 금강(백마강)기슭과
시내 동남리에 복원되어 있는 생가가 그곳이다.
시비는 비스듬히 강을 향해 서 있는데
앞면에는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로
시작하는[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우리강토와 겨례의 쓰라린 역사와 욕된 현실속에서 민족의 비원을 노래한
시인 신동엽은1930년 8월 부여고을 동남마을에서 태어났다.
전주사범과 서울 단국대학에서 수학하고 충남 주산농고와 서울 명성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일생을 시작에 전념하겠다." 운운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박병규가 쓰고, 설계는 정건모, 조각은 최종구가 한 이 시비는
그가 작고한 다음해인 1970년 4월 7일 동료문인들과 후배시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운 것이다.
한데 시비는 시원한 주위의 풍광과는 다르게 고단해 보인다.
바로옆에 '반공애국지사 추모비'가 높다랗게 서서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대선을 전후해서 반공주의자들의 표를 의식, 급조됐다는 비석이다.
하긴 시비가 고단해 보이는 것이 반드시 그 탓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들리는 바로는 처음에는 시비를 그가 나고 자란 부여읍내가 내려다 보이는 부소산에 세우려했다 한다.
그것이 일부 과격한 반공주의자들의 6.25기간 중의 별것도 아닌 행적을
문제로 삼은 반대에 부딪혀 부득이 지금의 자리로 나앉았다는 것이다.
생가는 시내 복판인 동남리에 있다.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미망인 인병선 시인이 되사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 놓았다.
복원 당시는 신동엽 시인이 살던 때 그대로 초가였으나 이제는 기와로 바뀌었다.
해마다 이엉을 새로 해 이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체 전가지만 해도 이 집은 아흔이 넘은 신 시인의 부친 연순웅이 살면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했다.
노옹으로부터 시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일화를 듣는 생가방문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옹의 작고 후 별채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면서 그런 감동은 없어졌지만,
순례자들이 발길은 여전히 잦다,
방명록에는 부산에서 온 문학도와 제주도에서 온 수산업자가 함께 이름을 적고 있다.
국회의원의 이름도보이고 영화배우의 이름도 보인다.
신동엽 시인의시적 명성이 그만큼 보편화되었다는 증좌다.
그에 대한 빨갱이 시비도 이제 잠잠해지려나 보다.
실제로 그에게서는 빨갱이 시비가 잘 날이 없었다.
살아서도 그랬고 작고한 뒤에도 그랬다.
그것이 첫번째로 구체화되었던 것이 [진달래 산천] 시비가 아니었나 싶다.
이 시가 1959년 신구문화사에서 출간한 [52인시집]에 실리자 (같은 해 조선일보에 먼저 발표했던 시다)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 잠이 들었죠"란 대목을 가지고
이것이 빨치산을 미화한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 시인이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시비는 문공부로까지 번져 마침내 문공부는 이시의 해석을 조지훈, 구상 등 원로시인들에게 의뢰했다.
다행히 보수주의자들이면서도 이들은 비유며 상징 등 시의 특권을 들어 이 표현을 옹호함으로써
신동엽 시인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끝내 그이 시집(창작과 비평사 간[신동엽전집)])은
유신체제 아래서 불온문서로 붉은 줄이 그어져 판금이 되고 말았다.
길가엔 진달레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살이 뛰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피고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진달래 山川] 전문
찬찬히 뜯어 읽어 보면 이 시를 고발한 시인의 눈도 당달봉사만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다느니,
장총을 버려 던진 채 잠이 들었다느니,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느니,
과수원에서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보고 왔다느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불온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다만 이 시에서 동족상잔에서 오는 갈등이나 잘못된 역사에 대한 분노 또는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굳건한 의지 같은 것은 읽지 못하고 기껏 발치산에 대한 칭송 정도로 읽는다는
그 폐쇄성이, 시대적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가증스러울 뿐이다.
불온하다는것도 그렇다,정치권력의 폭력 아래 살면서 불온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때까지의 우리 시는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
우리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는 분단, 끊임없이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 외세,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전쟁의 위협, 이어지는 권력의 횡포 따위를
우리 시는 모른체만 해옴으로써 독자로부터 외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 즉 외세, 분단, 민주화 등의 문제를 처음 시에 끌어들인 것이야말로
신동엽 시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의 시가 여원히 살아 있을 수 있는 비결인 터이다.
불온하다는 비판은 이제는 오히려 명예스러운 찬사가 되고 말았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문
이 시 역시 검열자의 눈으로 보면 불온하기 짝이 없다.
당시 체제가 금기시하던 분단현실에 대한 비판이 있고 외세에 대한 반대가 있기 때문이다.
반전적인 정서와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찬미 같은 것도 체제쪽에서 보면 수상하기 작이 없는 것이다.
보다도 "겁데기는 가라"는 화두 자체가 못마당했을 터이다.
콤플렉스가 심한 그들(그들이야 말로 겁데기가 아니고 무엇인가)은
이 말이야말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다들였을 터이다.
한편 이 시는 신동엽 시인이 메시지만 강하고 그밖의 시의 방법에는 등한한 시인이라는
일부의 평가를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다.
행가름과 쉼표, 마침표를 이용한 호흡의 완급, 리듬의 강약의 방법은 실로 절묘하다.
뿐 아리라 짧은 행 속에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이 담겨져 있다.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로 반전 정서를 표현한 대목도 빛난다.
쇠붙이이가 무기의 뜻으로 우리 시에 등장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리라.
"중립의 초레청 앞에 서서"는 통일의 방법에 대한 그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것일 터이다.
물론 아무도 못하던 말이다.
죽산 조봉암이 단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고 해서 사형을 당한 것이 불과 7. 8년 전의일이었으니까.
2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그가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줄곧 시골에 살았고,
내가 뒤늦게 우리 시를 읽으면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찾아냈을 대 이미 그는 고인이 돼있엇다.
나는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1년 뒤에 있은 시비 제막식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에 대한 여러 추억담을 들으믕로써 차츰 그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먼저 작가 남정현 씨가 있다.
그 자신 [분지(糞地)]라는 소설 속에서 남형의 현실을 똥으로 가득한 땅으로 표현,
외세문제를 소설 속에서 처음 제기한 작가다.
둘 다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다방에서 만났다.
신동엽 시인은 좋은 사람들을 사귀기를 아주 좋아했다,
언젠가 서로 힘이 될 때가 온다고 믿고 있엇다는 것이다.
그가 굳이 야간학교(명성여고)의 교사를 고집하는 것도 다 뜻이 있는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야간학교 교사가 보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대서다,
그러면서도 트인 사람이었다는 것이 남정현 씨의 인물평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어울리기를 꺼리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무렵의 정신 있는 젊은 시인 작가들은 대체로 문학단체에 대하여 냉소적이었다.
한데 신동엽 시인은 애서서 팬클럽에도 가입하고 그 모임 다위에 열심히 나갔다.
"언젠가 다 소용될 때가 있을 거야" 남정현 씨는 당시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70년대 중엽 유신반대투쟁이 받아지면서 동료문인들의 협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신동엽 시인에게 역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박봉우 시인(작고)은 신동엽 시인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9년 신동엽 시인의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대지)]가
조선 일보에 입선했을 때 예심을 본 것이 박봉우 시인이다.
투고시 가운데서 이 시를 발견한 박봉우 시인은 흥분했다.
"굉장한 장시입니다, 문단이 감짝 놀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본심 심사자에게 장담했다
하지만 본심 심사자들은 이 장시에게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 시단의 다른 시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군데 빼고 고치고 하는 조건으로 입선을 시켰다.
"심사하는 사람들이 무식해서" 이것이 박봉우 시인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수상식 날 나타난 신동엽 시인을 보니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은 완전히 촌놈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그날 박봉우 시인은 그를 제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재웠다.
혼자서는 도저히 여관을 찾아 들어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대학도 이름을 잘못 알고 찾아갔다가 귀찮아서 그냥 그 학교 원서 사 가지고 온 인간이랑께"
문학평론가 구중서 교수도 신동엽 시인과 가깝게 지낸 사이일 뿐더러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의 시를 널리 알리는데 일조을 한 사람이다.
체수가 작으면서도 대범하고, 겉으로는 유순해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강한 사람, 이것이 그의 신동엽 시인에 대한 인물평이다.
그는 신동엽을 알려면 [鍾路五衡]를 읽어 보면 된다고 말한다.
그 시에 그의사람 됨됨이가 다 나타나 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에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가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肥科廣告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鍾路五衡] 전문
이 시의 화자도 그이지만 시에 등장하는 동대문을 묻는 소년도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도 말하자면 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듣고 보면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는
그 소년의 등허리의 고구마들도 어쩐지 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나는 이들이 그에 관한 얘기를 통해서,
또 그의 시를 통해서 신동엽 시인과 가까워졌고, 시비와 생가도 찾게 되었다,
황석영 작가, 염무웅 교수와 동행한 적도 있고,
구중서 교수와 동무가 된 적도 있고, 미망인인 인병선 시인을 따라 간 적도 있다.
인병선 시인, 구중서 교수와 함께 생가를 찾아가 일박을 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훨훨 탄다.
삼십년 전 신혼 살림을 차렸던
깨끗하고 도배된 윗방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시인의 아내는 옛날로 돌아가
집 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닥불 옆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굵고 붉은 낱말들이여
-- 졸작 [시인의집] 전문
시인의 집은 곧 시인이 태어난 집이요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다.
한동안 남의 소유가 되어있던 것을 인병선 시인이 되사서 옛날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짚, 풀 생활사 박물관을 설립했을 뿐더러 이제 짚. 풀 문화연구에 일가를 이룬
인병선 시인이 그 일에 대해서 쓴 감동적인 시가 있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러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말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 인병선[申東譁-시끄러울 화>生家] 전문
3
그의 생가를 들른 다음 그가 말년에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조국(祖國)]을 읽는다면
그이 시의 정서가 되고 있는 민족적 순수성과
반외세가 현재성을 갖고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江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는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 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들고 眞珠코걸이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설?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 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놓았을 때도
그 벽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南北平野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기로 더럽혀빈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 [조국]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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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용 . 래
눈물과 결곡의 시인 ~ 다음 페이지에서 계속 ~
첫댓글 먼저 두드리며 읽었습니다 - 아직 수정 전이라 오타- 많습니다 양지바랍니다.
잠시 후 오타- 수정하며 거듭읽기 합니다.
여러 오타- 수정하며 거듭읽기를 지금합니다 -
모르는 한자는 언제까지나 숙제합니다 혹여 오타- 있으면 양지바랍니다.
차례에서 누락된 부분 [오장환. 낭만과 격정의 민중시인] 지금 보충합니다 - 깊이 죄송합니다.
지금도 다시 읽으며 띄어쓰기와 여러 오타-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