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평동의 유래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탄동이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남씨편을 합쳐서 탄리라 칭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 중대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성남출장소 수진지소와 탄리 일부를 병합하여 태평동이라 개칭하였다. 1975년 10월 태평1·2동으로 분동하고 1980년 9월 태평1동을 갈라서 태평1·3동으로 하였다.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고 1990년 1월 태평2동을 태평2·4동으로 분동하였다. 태평동 동명의 유래는 동 창설시 성남시청 자문회의에서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2. 취락과 세거성씨 태평동의 자연취락은 남씨편·숯골 등으로 불리운다. 남씨편엔 임진왜란 무렵 의령남씨 들이 부락을 이루기 시작하였는데 광주이씨·안동권씨·순흥안씨등이 사는 부락에 비하여 세도가 컸으므로 남씨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탄리는 숯골이라고 하는데 역시, 의령남씨의 집성촌이며 온양방씨의 세거지이다. 숯골의 지명은 설이 구구한데 첫째, 조선조 효종때 남씨 중에 칭의 7대손 남연 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조상을 정성으로 섬기고 효성이 지극하여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의 아호가 탄수인지라 그의 호를 따서 탄수가 사는 탄골로 불리우다 숯골로 변했다고 한다. 둘째는 현재 태평동과 신흥동을 흐르는 냇물을 탄천이라 하는데 옥황상제가 삼천갑자 동방삭이를 잡기 위해 보낸 사자가 숯을 갈던 개울이라는 전설과 관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셋째, 여름 장마철이면 홍수로 인한 폐해가 심하여 농민들이 탄식하는 곳이라하여 탄천이라는 설이 있다. 넷째, 연료 채취장으로 숯을 구워서 서울로 보내던 곳에서 숯골 또는 탄리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숯골은 의령남씨·온양방씨의 세거지라고 전해진다. 의령남씨는 영의정 남재(1351∼1419)의 자손이 세거하였다. 재의 아들 경문은 탄리(숯골)에 거주하면서 의성군 지·예문관 직제한 간·태종의 무마 휘의 세아들을 두었는데, 지의 둘째아들 내첨사부정 칭의 후손이 세거함으로써 대체로 부정공파의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칭의 아들 변은 삭령군수이고 군수의 아들이 7형제인데 세웅은 병조참판·세형은 부사, 세평은 안성군수, 세준은 이조참판, 세측은 병절교위, 세건은 예조참판, 세언은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경문의 자손이 탄리를 본거지로 번성하고 인물이 배출되었다. 태평동 숯골에는 세준의 16대손 남기웅(1938년생)등이 세거하고 있다. 경주정씨는 도촌동 정광한의 8세손 협문의 장남 행발(1858∼1936)이 이주하여 5대손 수웅(1940년생)에 이르고 있다. 온양방씨는 온수군 방운의 15대손 관찰사 방순이 처음 살았는데 방순은 고려말 절의를 지킨 사람으로 동료인 이원령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해 왔던 중 붙잡혀 황해도 금촌서 죽음을 당했다. 그의 묘는 나라의 예장으로 현재 한미병원 자리에 부인과 합장되었었다. 성남시개발로 1969년 이장했는데, 부인의 유골은 흔적이 있으나 순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고, 유물만 있는 것으로 보아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장으로 지낸 것 같다. 방순의 차녀가 남경문에게 출가하면서 숯골에 남씨와 사돈지간이 되고 남씨네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방씨네는 대부분 상대원동 보통골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3. 일반현황 □ 동사무소 주소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3307번지 2호 □ 연 혁 。1971. 6. 1 :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 수진지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