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화뮤지컬음악 색계 "양조위, 탕웨이"

[넌!내친구]

관련영화 : 색, 계

<영화헤살 있습니다>  

                                그는                                                                                  

                                왜                                                                                     

                                그토록                                                                               

                                쓸쓸한                                                                               

                                눈빛을                                                                               

                                가진걸까                                                                           

 

                                아무도 믿지 않는 그가                                                         
                                아무에게도 보인 적 없는 잔혹함과 피로를 드러내보인 그녀를
                                며칠이고 굶은 야생의 짐승이 먹이를 탐하듯                         
                                탐하고, 탐하고, 탐하여                                                       
                                마침내 태고의 생물처럼 벌거벗은 채 하나로 엮인 후에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 그의 얼굴, 그의 눈빛은               
                                왜 그렇게                                                                         

                                텅,

                                비어 있는걸까.                                                                

   

 

결핍에는 탐닉이 따르죠.

 

식민지지배나 독재정권이라는 비뚤어진 시대는 어쩌면 "불안"의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니, 자유경제니 해도, 불균형과 불평등은 넘쳐나지만요-)
마치 한쪽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억지로 받치고 선 모양이랄까요. 권력을 쥔 자들은 언제 빼앗길까 하는 불안을, 억눌린 자들은 언제 숨통이 끝장날까 하는 두려움을, 반혁을 꿈꾸는 이들은 발각의 두려움과 혁명의 스릴을 함께 갖고 있겠죠.
그렇게 모두가 불안하고, 하여 지나치게 경계하는 시대는 생존을 위해 쏟는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져서 자연스레 결핍이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색,계>에서도 도처에 결핍이 나타납니다.

물자가 부족해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섭니다.
전쟁과 식민으로 고향을 빼앗긴 왕치아즈는 아버지에게마저 버림받습니다.
일제의 개노릇을 하고 있는 "이" 또한, 짙어지는 허무함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부족하면 채우려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래서일겁니다.
부인들은 밤낮없이 마작에 빠져있고, 청년들은 철모르는 달뜬 애국에 빠지고, 왕치아즈와 "이"는 서로에게(서로의 色)에 빠져듭니다.
그것은 차라리 탐닉입니다. 탐하고, 누리고, 가져도 - 불과 1초후에 다시 열렬히 원하게 되는 것.

 

 

 

 

 

역사와 사랑의 소용돌이 속, 인간을 보는 시선.

 

 

왜 그 두사람이어야 하는가, 란 질문은 이 영화에서는 의미없어 보입니다.
영화는 사랑이란 역사처럼 어찌보면 운명의 소용돌이라서,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니까요.
태어나고 살아가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듯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랑과 욕망의 이끌림엔 무력할 수 밖에 없다고요.
그건 어쩌면 그만큼 거대한 시류나 절대적인 본능에는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탓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격정의 남녀를 쫓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미세한 표정과 감정을 숨막히게 잡아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물과 가장 가까운 그 카메라를 통해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느꼈던 연민어린 관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작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풀샷과 신작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에서 같은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대가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연민어린 관조...
도시의 골목을 걸을 때는 도시를 볼 수 없지만 산 위로 올라가면 한 눈에 도시와 골목과 그 속의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끝나버린 연애를 몇 년후에 반추해보아도 알 수 있지요. 슬픔이든, 행복이든, 그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가 좀 더, 잘 보입니다.
그 바라봄의 거리에 연민이 더해져있습니다.
잭과 애니스, 왕치이즈와 "이"가 서로에게 미친듯이 뛰어드는 그 운명의 시작도
펄펄 끓는 마음을 속에 담고도 외면하는 삶을 사는 애니스가 온 영혼을 데여가는 것과
벌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어서 사랑하는 그를 죽이자고 계를 짜는 왕치아즈가 그 양날의 검으로 역시 갈기갈기 베여가는 것도.

 

결국엔 운명 이후에 다가왔던 선택의 최후를 달게 받는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는 잭의 구애에도 우물거렸던 애니스는 잭이 죽은지 몇 년 뒤에야, 그것도 전화기로 비보를 듣게 됩니다.
나라도, 부모도 주지 않았던 사랑을 준 그를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왕치아즈는  결국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지구요.
민족을 배신하고 고문하고 죽였던 "이"는 생의 유일한 사랑에게 송두리째 속았고, 어쩌면 살면서 처음이었을지도 모를 진심어린 고백, 지켜주겠다는 약속 또한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이안 감독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고스란히 이들의 생을 아픈 시선으로 함께 합니다.

 

감독의 시선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애니스가 피묻은 잭의 셔츠를 간직하며 "I swear"을 읖조리는 장면이 그러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의 백미였죠)
<색, 계>에서 왕치아즈가 암살계획에서 그를 구해내는 것과 "이"가 왕치아즈에게 까맣게 속았다는 사실이 그러합니다.

 

그녀가 그를 죽이고 죄책감 속에 떠나는 것 또한 비극의 결말이 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그에게 심장을 관통당한 그녀. 그러면서도 의심을 거둘 수 없어 그의 진심을 담은 봉투마저 조직에게 넘겨버린 어리석은 그녀.
그런 그녀를 위해 무릎을 꿇고 진심을 담아 지켜주겠다고 하는 남자. 그 남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라와 동지가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주었는데요.
비겁하게 뒤에서 숨어 그녀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동지들과 집과 식량같은 기본적인 생계조차 버겁게 한 나라가,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그녀와 절친했던 여자친구는 그 날 이후 그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녀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게 분명할 정도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의 진실이었습니다.
사실 영화 내내 흐르는 긴장감과 갈수록 꼬여가는 계와 계략들로 그런 의심도 들었습니다.
"이"가 사실은 왕치아즈의 연극을 눈치챈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녀를 원해서 속아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내내 정적이었던 그가 도망칠 때 번개같은 움직임을 보여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숱한 암살 위협 속에서 실은 늘 떨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
그런 그가 왕차이즈에겐 너무나 허술했기 때문이예요.
일본군들이 몰려있는 술집에 부르는 것도, 자신이 근무하는 기지 앞으로 데려오는 것도. 의심많은 장관이 할 만한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래 할 테면 해 봐라. 뒷조사는 끝났다, 이미 다 알고 있다 같은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던 거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슬펐을 거예요.
그가 그녀에게 보인 눈물, 폭력, 탐닉. 그 모든 것이 진짜라는 사실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어차피 휘둘릴 회오리바람이라면,
끝내 비극으로 끝나버릴 사랑이라해도
눈을 멀게하는 진짜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자를 품에 안고도, 미칠듯이 욕망을 쏟아부은 뒤에도 한없이 텅 비어있던 그의 허무한 삶에 혹 의미를 찾는다면 피빛으로 빛날 진짜 사랑이요.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 <색,계>를 풀어보면 <계를 이기는 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색이 계를 이기는 경험을 한 것이라고요.

 

 

     

그 사람은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진짜 사랑. 진짜 욕망, 진짜 갈구.
그것을 보여준 "이"와는 다르게 왕치아즈는 허구와 진실 양쪽에서 허덕였습니다.
처음부터 연기, 를 하고 있던 왕치아즈는 친구의 말처럼 어쩌면 "귀부인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연극을 끝낸 뒤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
비오는 새벽거리를 청춘으로 뛰며 노랠 불렀던 것.
조금 더 큰 판에서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시작은 그것이었겠지요.
부인들과 밤새 마작을 하고 해변가에서 총으로 깡통을 맞추는 것으로 현실성이 주어질 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래서 막부인으로 분한 왕차이즈는 그 표정에 묘한 흥분을 감추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그 눈은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고 특히 "이"와 술을 먹을 때 보여주는 표정은 남주인공을 유혹하는 여주인공의 그것과도 같습니다.

물론 다만 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금새 몸으로 - 말 그대로 몸으로 체득됩니다.
아마 그 때부터 왕치아즈는 절실해졌을 것입니다.
누구나 희생 뒤에는 어떤 것이든 획득할거라고 기대하니까요. 사실 인간이란 이기적인 존재라 조건없는 희생따위는 없는 걸지도 몰라요.
그것이 정서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무언가를 바라고 희생하는 게 아닐까요.
큰 희생 후에 이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주저앉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3년 후에 스파이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해결하지 못한 겁니다. 완결하지 못한 거예요.

일단은 그 이물감으로 왕차이즈는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걸거예요.
그러나 연극 속에서 맞딱들인 건 심장까지 파고드는 뱀같은 그의 욕망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점점 혼란스러워집니다.
총을 바로 곁에 두고, 무방비의 그를 아래에 두고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장면에서 그녀의 혼란과 갈등은 적나라하게 보여집니다.
죽일 수 있습니다. 암살이고 뭐고- 바로 그 순간에 총을 뽑아 쏘아버리면 임무는 완성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밀회를 즐기는 그들이니, 일이 벌어지고 난 뒤 나타나는 의협단도 있으니 뒷처리도 깔끔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망설입니다. 베게로 그의 얼굴을 가려버립니다.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그는 온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지릅니다.

 

그 순간입니다. 그를 죽이고 연극을 끝낼 시간.

 

그러나 그녀는 연극을 계속하기를 선택합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 이미.. 그녀의 배신(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결정난 건지도 몰라요.
그 순간 그는 친일파 장관 "이"가 아니라 공포에 질린 사내일 뿐입니다. 안고, 안고, 또 안아도 계속 안고 싶은 남자.
그것은 허구 속의 왕치아즈에게 다가온 진실이었습니다. 그의 욕망과 사랑을 바라보는 일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자신 안에서 충돌하는 목표와 속에서 타오르는 열망이었을 겁니다. 그 목표라는 것도 그래요. 그녀의 목표는 그를 유혹해 내는 것.. 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를 죽이는 것은 동료들의 몫이었지요. 그래요. 그렇게 자신을 속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그에게 더욱 파고들기를 바랬을 거예요.
좋은 정보가 되는 일얘기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당신이 어디를 왜가는지도 궁금하지 않아요. 다만 함께 있어줘요, 함께 있어줘요.
그저 평범한, 사랑에 빠진 여자가 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녀의 비극은 그것이었어요. 진실을 위해서 허구를 계속해야 하는 것. 연극이 아니라면 "이"를 만날 수 없는 그녀가 그 끝낼 수 없는 딜레마를 계속 안고 가야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겐 관객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와 어디에서 밀회를 나누든 놓치지 않고 보는 의협단. 그리고 연극을 하는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또다른 자아.

의협단에서 감정을 터뜨리며 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왕치아즈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실연 논란이 있을 정도로 리얼한 정사장면의 이유는 바로 저 대사 때문이구나, 싶었습니다. 막부인으로 있을 때 내내 연기를 하는 왕치아즈가 고급옷을 벗어던지고 그와 살을 부대끼는 그 순간에는 연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때만은 미칠 것 같은 혼란과 괴로움을 온통 열기로 바꾸어 그에게 몰입했던 것입니다.

진실과 허구.
그 사이에서 그녀가 미쳐버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대단하게 여겨질 정도예요.
이가 처음 말했던 것마냥, 그녀 안에는 정말 강한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아마 그녀는 그녀의 사랑을 구해낼 수 있었던 거겠죠.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이"를 살려낸 그녀는 아마도 두 세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자기자신을 스스로 구원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죽을 수 있는 알약을 버리고 동지들과 함께 무릎을 꿇은 그녀의 등은 그래서 그토록 꼿꼿했던 거겠지요.

 

 

그래요.
결핍과 보충이란 면에서 보자면 채워진 건 왕치아즈이고 더욱더 비워진 건 "이"인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표정 그대로, 아니 더욱 더 허허로운 표정과 영혼으로 살아갈 테지만, 왕치아즈는 그 욕망과 사랑을 가득 안고 떠나갔으니 말이예요.

 

두 사람 모두 눈물나게 슬프지만 아무래도 저는 왕치아즈 쪽입니다.
네, 그토록 쓸쓸한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