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897-1910, 독립운동시대 1910-1945
이 시대의 인물
이상설 - 신구한문에 통달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_ 김병기
이상설(李相卨, 1871년 1월 27일(1870년 음력 12월 7일) ~ 1917년 양력 3월 2일)은 조선의 문신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국외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및 설립에 이바지하였다.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5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생애[편집]18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본래 아버지는 이행우(行雨)였으나, 1876년 이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94년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에 접한다. 1900년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上野淸, 1854~1924)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편집하여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편찬하였다.[2]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외국 서적등을 참조하며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그는 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후 국권 회복,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한 달 동안 있다가 사직하였다.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논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 왕창동, 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서전서숙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07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1907년 7월 5일에 이상설이 만국평화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48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3]“
헤이그 밀사에 실패한 그는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 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사이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퇴위된 상태에 있는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었다. 이해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제국,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하여 러시아 제국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 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러시아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들의 정치, 사회 활동을 철저히 엄금했기 때문에 대한 광복군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로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전에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05년 을사늑약시 자결한 선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탁되는 1905년의 을사늑약시 자결한 선조들을 기억해야한다: 민영환(충정공), 조병세, 최익현 등 수많은 선조들이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자결
매천 황현(절명시), 김순흠, 유도발, 김택진, 이현섭, 김영상 등 수많은 선조들.
작위수락거절
병탄된 뒤 조선귀족 작위를 거절한 사람도 기억하자: 모두 8명 : 윤영구, 홍순형, 김석진, 한규설 유길준, 민영달 조정구 조경호. 그 중 김석진(자결), 조정구(자결시도)
1910년에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으로 김석진,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경호, 조정구, 유길준이다
독립운동가;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1924천왕도쿄암살실패, 1932 윤봉길 홍커우공원의거시 동일하게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못구함: 3의사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1946 7월 일본에서 유골회수후 국민장)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사 유해봉환 3열사 국민장, 효창공원 봉환
좌우익 모두 한자리
항일투사
유 인석(의병), 최익현(의병)
대한제국 1897-1910
최초 국가사업: 명성황후 장례식
고종은 대한제국 건국 2달후 최초 국가사업으로 명성황후 장례식을 어머어마한 비용을 들여 거행한다. 마지막 국운과 본인의 황제자리를 지키기위해 일부 자금을 독립자금으로도 지원하지만 상당한 금액을 외국은행에 예치하게 한다. 독일 등에 예치된 이 돈들은 결국 횡방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잃어버린다. 다 국민의 혈세가 아닌가. 1905년 외교관을 박탈당하고 결국 1910년 국권이 박탈되어 조선과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치욕과 고통의 일제강점시기를 거치게 된다. 나라가 망해도 많은 세도가들은 일본으로 부터 은사금도 받고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자손 대대로 잘 살고 있다. 참 한심한 노릇인 것이다.
1902-1905: 하와이 7천명정도 이민 사탕수수 노동
1904 년 멕시코 사탕수수 이민
1905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산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다시는 이런 매국인들이 생기지 않게해야 한다. :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을사5적이 나라를 팔아먹는 동안, 을사늑약시 죽음으로서 항거한 선조들이 계시다. 민영환, 조병세, 최익현 등 수많은 선조들이 자결한다.
1882. 한미조약으로 미국은 한국이 외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다고 조약에 서명했지만 1905년 러일전쟁후 일본이 한국을 그들이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수수방관함.
민족사관: 백암 박은식(임시정부 2대 대통령),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임시정부 3대 국무령)
백암 박은식(1859-1925 대한민국임시정부2대대통령,수반) 상해
-한국통사 1915, 대한독립운동지혈사 1919; 건국훈장1962, 1993동작구국립묘지봉환
석주 이상룡(1858-1932, 대한민국임시정부3대국무령,수반, 건국훈장1962) 만주
단재 신채호(1880-1936 민족주의사관의 최초의 한국고대사인 독사신론1908, 김원봉 의혈단선언 조선혁명선언 1923 조선상고사1922)1962건국공로훈장, 민중을 중심으로하는 사학, 여순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며 그를 반대하였고 8월에 시작한 6회 의정원회의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1919년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이다. ‘매국행위’인것이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3대 영웅전을 신채호
장지연, 안창호 김규식 김희산
독립운동평가, 민족반역자처리해야
드골: 다시는 민족반역자가 나오지 않게한다.
일진회: 송병준, 이용구
노론 당수: 이완용 (비서 , 이인직)
무관 야마가타, 강경론 당장 점령
문관 이토 국제여론고려 점령; 합의후 3개월후 처형됨
강경파가 일진회와 접촉하자, 급한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보내 사전협상한다.
이인직: 혈의누, 최초 근대소설, 이 내용은 경성일보 1935년에 데라우치백작에 관한 고마스 연재에서 나온다.
1911년 석주 이상룡 망명일기에서 한사군은 만주라고 표현 식민사관미리예견한듯 기록
신채호도 만주
식민사관: 쓰다 소키치, 이병도
한서:
“낙랑은 유주(지금 북경)에 속해 있다”
후한서: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사기: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갈석산, 수성현, 만리장성 세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곳은 중국쪽 갈석산이다. 갈석산은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이렇게 중국사서에 낙랑은 만주에 있다고 적었다.
갈석산은 구등황제산이라고하는데 많은 중국 황제들이 올랐다고 해서 부친이름이다.l 그중 진시황, 한무제 위조조 수양제 당태종 등이 있다. 워낙 유명한 산이라서 한반도내에 둘수 없는 산이다.
사서 '회남자‘: 동방의 끝, 갈선산을 지나면 조선이다
낙랑, 수성, 갈석산 일치하는 곳은 중국 화북성이다. 여기까지 고조선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내몽고의 적석봉은 석성이다 석성은 고구려성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벽돌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의 고조선조에 보면 동북공정에 공조하고 있다.
뉴라이트 (식민지근대화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회 사관 계승
임나일본: 쓰다 소키치,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2005년 김대중시절 한일역사연구보고서에 “고이왕이 조작이다, 풍납토성 1997년 13개 시료의 방사능측정으로 기원전 2- 기원후 2세기간 축성된 성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는데도 4세기 백제를 주장하고 있다.
식민사관,
식민국어학, 표음문자 한글기능상실 ,r l, pf, bv, 발음안됨, 해례본에 병서원칙으로 발음가능하나
1911 언문철자법, 1930 두음법칙 등으로 언어파괴
전 분야 종합적인 연구검토해서 역사 재정립하여 후손들에게게 물려주어야
좌우, 여야 문제가 아니라 전체문제다
고려인: 엣날에는 단군할아버지라고 했는데 선교사들이 와서 아브라함할아버지라고 한다
대종교:
1879년 오스트리아 유대인 시오니즘 계승하여 1948 년 아스라엘 독립실현함
식민사관 극복하는 독립운동 재시작해야
식민사관으로 창조력이 없고 남의것 배겨쓰는. 열등감, 의존감 등 식민사관 잔재다
정신적 독립되야 창조력 민족 미래 밝다
과학기술문명은 물질문명, 돈중시, 이것은 병든문명
(이승만시절 독립운동관련 훈장 2명: 이승만, 이시영)
애국자헌청
반역자 처단해야
1909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어 널리 알려져 일본제국주의가 사라지고 한중일 간의 평화가 왔으면 2차대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이 전쟁이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를 바꿀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린것이다 - 동운-
이토 저격 영상
9시 30분
7연발 단총 저격
6발 발사 중 3발 명중
9시 30분 절명
제국주의 부당성 세게 경고
안중근의사
1909.10.26 조선통감 이토오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응징함
이 토 대한제국시절 조선통감에 재직하면서 을사늑약강요, 고종강제폐위, 문화재반출 등 조선의 일본식민지화의 핵심인물이다. 안중근은 1907년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무력투장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그곳에서 의병을 조직해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여러 작전에 참가한다. 1909.2.7일 11명의 동지와 왼손 무명지를 자르는 단지회를 결성하고 이토암살계획에 들어간다.
한편 을사5적의 대표인 이완용은 이토 저격 다음날 순종에게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 10만원(약 30억원정도)을 하사하라고 압박해서 지불했단다. 이완용은 완전히 용가리 통배같은 놈이네.
거사 성공후 이토 저격 사유에 대한 심문에 안중근은 거침없이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말했다.
하얼빈 일본 영사관에 구금된 안중근은 그곳 일본 관리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고, 4~5일 뒤에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직접 신문을 받았다. 미조부치가 왜 이토를 해쳤느냐고 묻자 안중근은 거침없이 15가지 죄목을 적시했었다.
안중근이 지적한 이토의 15가지 죄
1. 한국의 민 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과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이는 죄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 (주석 5)
안 중근의 논리정연한 이토의 죄상 진술에 미조부치 검찰관과 기록을 담당한 일인서기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중근의 박식과 이토 죄상에 대한 상세한 진술을 들은 미조부치는 "지금 진술한 것을 들으니 당신은 정말 동양의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사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주석 6)라고 진정어린 말을 하기도 했다.
3월 25일 지바가 "내일 오전 중에 형 집행이 있을 것 같다"고 귀띔 해 주었다. 안중근은 25일에 형을 집행해 줄 것을 감옥 당국에 요청하였다. 천주교 신도로서 예수님의 수난일에 형을 받고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잡힌 날이 3월 26일이었다. 26일은 달(月)은 달라도 이토가 죽은 날이었다. 시간도 이토가 죽은 시간인 10시 15분경을 잡았다. 일제는 굳이 이날을 택해 안중근의 처형의 날로 삼았다. 이토를 죽인 보복의 심리에서였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
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
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
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6년 전 전봉준이 처형되던 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조선의 마지막 두 영웅을 보내는 날 하늘도 두 장부의 뜻에 감응하여 비를 내렸을까. 이날 안중근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상심으로 새벽을 맞았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싸늘한 감방에서 속절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아내가 섬섬옥수로 지어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마지막으로 시 한 수를 짓고 싶어 붓을 들었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처할지라도 기운이 구름과 같다.
안중근은 1908년 3월 21일 <해조신문>에 '긔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의거 전에 발표한 몇 편 안되는 글이라, 안중근의 생각(사상)을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귀보의 논설에서 인심이 단합하여야 국권을 홍복하겠다는 구절을 읽으매 격절한 사연과 고상한 의미를 깊이 감복하여 천견박식으로 한 장 글을 부치나이다.
대 저 사람이 천지만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아는 까닭이라. 그런고로 사람이 세상에 처함에 제일 먼저 행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단합하는 것이오, 둘째는 자기집을 단합하는 것이오, 셋째는 자기 국가를 단합하는 것이니 그러한 즉 사람마다 마음과 육신이 연합하여야 능히 생활할 것이오. 집으로 말하면 부모처자가 화합하여야 능히 유지할 것이오. 국가는 국민상하가 상합하여야 마땅히 보전할지라.
슬프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참혹한 지경에 이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합병(不合病)이 깊이 든 연고로다. 불합병의 근원은 교오병(驕傲病)이니 교만은 만악의 뿌리라. 설혹 도적놈이 몇이 합심하여야 타인의 재산을 탈취하고 작비군도 동류가 있어야 남의 돈을 빼앗나니 소위 교만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자기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약한 자를 능모하고 같이 하면 다투나니 어찌 합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교오병에 약은 겸손이니 만일 개개인이 다 겸손을 주장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경하며 책망함을 참고 잘 못한 이를 용서하고 자기의 공을 타인에게 돌리면 금수가 아니거늘 어찌 서로 감화하지 않으리오.
옛 날에 어떤 국왕이 죽을 때에 그 자손을 불러 모아 회초리나무 한 뭇(묶음)을 헤쳐주며 각각 한개씩 꺾게 함에 모두 잘 부러지는 지라 다시 분부하여 합하여 묶어놓고 꺾으라 함에 아무도 능히 꺾지 못하는지라. 왕이 가로대, “저것을 보라. 너희가 만일 나 죽은 후에 형제간 산심(散心)되면 남에게 용이하게 꺾일 것이오 합심하면 어찌 꺾일 것이오.” 라고 하였다 하니 어찌 우리 동포는 이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리오.
오늘날 우리 동포가 불합한 탓으로 삼천리강산을 왜놈에게 빼앗기고 이 지경 되었도다. 오히려 무엇이 부족하여 어떤 동포는 무슨 심정으로 내정을 정탐하여 왜적에게 주어 충의한 동포의 머리를 베어 왜적에게 받치는가.
통 재 통재라, 분함이 철천(徹天)하여 공중에 솟아 고국산천 바라보니 애매한 동포가 죽는 것과 무죄한 조선의 백골을 파는 소리를 참아 듣고 볼 수 없네. 여보 강동(해삼위 지역, 저자) 계신 우리 동포, 잠을 깨고 정신을 차려 본국 소식 들어보오. 당신의 일가가 친척일가가 대한 땅에 다 계시고 당신의 조상 백골 본국강산에 아니있소. 나무뿌리 끊어지면 가지를 잃게 되며 조상 친척 욕을 보니 이내몸이 영화될가 비나이다.
여보시오 우리 동포, 지금 이후 시작하여 불합 이자 파괴하고 단합 두 급성(急成)하여 유치자질(幼稚子姪) 교육하고 노인들은 뒷배보며 청년형제 결사하여 우리 국권 어서 빨리 회복하고 태극기를 높이 단 후에 처자권속 거느리고 독립관에 재회하여 대한제국 만만세를 육대부주 혼동하게 일심단체 불러보세.(주석 9)
한 말에 유인석(柳麟錫)이란 선비가 있었다. 호를 의암(毅菴)이라 하고, 조선 철종시대의 거유 이항로(李恒老)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충주, 제천 등지에서 친일관료를 죽이고 일제와 싸우다가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했다. 뒷날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 의군도총재에 추대되어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유인석은 선비로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병하면서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유학자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결연하게 실천에 나섰다.
무 릇 우리 유학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고 몸은 귀중하니, 도(道)가 끝나려 하는 데 몸이 도와 함께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스스로 자결하여 뜻을 지킴(自靖遂志)이 정당하고, 도가 없어지려는 것을 참지 못해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떠나가서 옛 것을 지킴(去之守舊)을 말하는 것이니 이도 정당하며, 도는 동포와 함께 얻은 것이라서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거병(擧兵)하여 깨끗이 함(擧義掃淸)을 말함 또한 정당하다. (주석 1)
유 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는 유학자나 선비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망천하망국가(亡天下亡國家)의 위기를 당하여 이 땅에 생을 받아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주어진 선택이고 일변 의무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한 매천 황현은 <절명시>에서 “내가 여기 자결할 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거병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면암 최익현은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노구를 이끌고 직접 의병에 나섰다.
안 중근의 포로석방 조치는 의병전쟁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의 인도의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 안중근의 인도주의적 종교적인 일면이기도 하다. 그는 조국독립을 위해 의병전쟁을 하면서도 인명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다. 만국공법은 포로의 사살을 금하고 있었고, 전투중의 사살과 포로의 사살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피아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병을 살려서 돌려보낸 안중근에 대해 의병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적은 우리 의병을 잡기만 하면 참혹하게 죽인다. 우리도 저놈들을 죽일 목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잡은 놈들을 모두 보내준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냐.” 라는 ‘이유있는’ 항변이었다. 여기에 안중근의 답변은 차라리 철인(哲人)의 모습이다.
그 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 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이길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악전고투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열강의 호응을 얻어야 우리의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에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여러 말 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주석 3)
안중근이 하바로프스키에서 다시 연추로 온 것은 해가 바뀐 1909년 1월이다.
'병가상사(兵家常事)'라는 한번의 패전으로 언제까지나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구국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결행한 것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선혈로 기록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안 중근은 1909년 3월 5일 (음력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단지동맹을 결성했던 하리는 현재 크라스키노 쮸카노바 마을에서 훈춘방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대부분 의병출신인 '동의단지회' 맹원은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명단은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영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 등이다. 이날 12인의 애국자들은 왼손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 단지로 그리 되었다.
안중근은 단지한 12인의 피를 발(鉢)에 모아 직접 서천동맹(誓天同盟) 하여 결성하는 단지동의회의 취지문을 혈서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제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會)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안중근, <동의단지회취지문>.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취지문
오 늘날 우리 한국 인종(人種)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 하였으면 좋은 방법을 모르고 혹 왈(曰)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거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 러나 우리 동포는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會)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會友)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하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의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을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주석 9)
안중근은 이 '동의단지회취지문'에서 외국이 도와주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오로지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가 되어 생사를 뛰어넘어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했다.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는 "시모시자(是母是子)"란 제목의 기사에서 안중근 어머니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안중근씨의 어머니가 변호를 위탁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여 안병찬씨와 교섭할 때, 이곳 경찰서와 헌병대에서 순사와 헌병을 파견하여 수차 문초를 했는데 이 부인은 용모가 자약(自若)하고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물 흐르듯이 대답했다.
" 이번에 중근이가 한 행동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밤낮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상에 있었으며 평상에 집에 있을 때도 매사가 올바른 생각뿐이고 조금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집안사람들도 숙연해서 몇 해 전에 자주 독립하려면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부터 갚자고 하는 국채보상금 모집 때도 중근의 아내는 물론 제수들이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까지도 내놓게 하고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함에 며느리들이 기꺼이 이 말을 따라서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며 안중근씨의 역사를 빠짐없이 설명하니 순사와 헌병들도 서로 바라보며 놀라고 말하기를 안중근이 한 일은 우리가 이미 놀라고 있지만 그 어머니의 사람됨도 한국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더라.(주석 7)
"이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백 범김구가 일본 밀정 스치다를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 곽낙원이 면회를 와서 한 말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한 김구의 어머니나 역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어머니의 말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쓴 대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다."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한 데는 어머니의 간절한 전언(傳言)도 크게 작용했다. 사형선고가 내린 날 안중근의 두 동생은 사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가 계신 진남포로 돌아왔다. 전후 사정을 보고드리자 어머니는 여순으로 가서 어미의 뜻을 전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중근은 큰 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의를 세웠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큰 일을 하였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라. 일본 사람이 너를 살려 줄 까닭이 없으니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한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 사형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네가 사랑하는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면 양반집 체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주석 8)
1910
1910.8.29 강제 병탄
독립운동은 국내 국외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 졌다
북쪽에는 원산 함흥 등 지역이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 두 도시의 지도자는 이주하였다.
경성지역에는 이재유가 유명했다.
작위자 명단
작위 반납하고 독립운동: 운양 김윤식 (온건개혁파) (1835-1922) 동도서기론(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2년형 받고 출옥후 죽음
이용직: 두사람은 독립청원서를 일본총독과 각처에 제출
이용직은 체포후 심문중에 만세운동 본부 소재지와 해후 조정자를 말하라는 심문관에게게 답하기를 ‘조선의 본부는 하늘에 있고, 이 운동의 뒤에는 2천만의 조선인이 있다’. 심문관은 이용직에게 ‘진정한 힘이 무엇이요’라고물으니 이용직(자작)은 ‘진정한 힘이라는 것은 오늘 너희들에게 보여주는 단결된 조선 사람들의 정신이다. 너희들은 군함의무력을 자랑하지만, 우리가 만세를 부르는 정신을 분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힘이다!“라고함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 1974)
조선귀족(朝鮮貴族)은 1910년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 제국 정부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봉작하고자 창출한 특수 계급이다.[1]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 제5조에 수반하여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 공포되면서 신설되었고,[2] 1947년 5월 2일에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일본어: 皇室令及附属法令廃止ノ件)에 의해서 폐지되었다.[3]
목차
1 형성
2 특권
3 통제
4 평가
5 수작 및 습작자 목록
6 같이 보기
7 주석
8 바깥 고리
형성
조선귀족회관 (1912년)
조선귀족회장 박영효
1910년 8월 29일에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종친, 문지(門地), 훈공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정된 고위급 인물들을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하였다.[2] 한일 병합 당시에 작위를 받은 76명의 수작자(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4]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았다.[5]
1910년에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으로 김석진,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경호, 조정구, 유길준이다.[6] 이들을 제외한 68명의 수작자는 같은 해 10월 7일에 수작영식(授爵榮式)[7]과 1911년 2월 22일에 작기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으며,[8] 1911년 1월 12일에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공채본권 교부식(公債本券交付式)에 참석하여 작기와 은사공채권을 수령하였다.[9] 1911년 9월 9일에는 일본의 화족회를 모방하여 박영효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조선귀족회를 설립하였다.[10]
특권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에 근거하여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향유할 권리(제5조), 법규로서 구속력을 갖는 가범(家範)을 제정할 권리(제9조), 작위 세습의 권리(제10조)를 보장받았다. 1897년의 칙령 제10호 〈서위조례〉(敍位條例)와 1926년의 칙령 제325호 〈위계령〉(位階令)에 의거하여 작위에 따라 위계를 하사받았다.[11] 공적인 의식에서의 좌석 순서를 뜻하는 궁중석차(宮中席次)를 작위와 위계에 따라 조선귀족에게 수여하였다.[12] 작위에 따른 대례복의 착용이 허용되었으며, 조선귀족의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学習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13] 조선귀족은 강점 초기에는 귀족원 구성에서 배제되었지만 1932년에 가서야 박영효가 칙선의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14]
조선귀족의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고자 일본 정부는 은사공채증권을 교부하였다.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되는 것이며, 연리 5%의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되었다.[15]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불하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16] 또한 조선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고자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을 공포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17]
1910년 당시 조선귀족에게 지급된 은사공채액[18]
작위 은사공채(엔) 이름
후작
(6) 504,000 윤택영
336,000 이재완
280,000 박영효
168,000 이재극, 이해승, 이해창
백작
(3) 150,000 이완용(李完用)
120,000 민영린
100,000 이지용
자작
(22) 100,000 고영희, 민병석, 박제순, 송병준, 이용직, 조중응
50,000 권중현, 김성근, 김윤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윤덕영, 임선준, 이근명, 이근택,
이병무, 이재곤, 이하영, 조민희
30,000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남작
(45) 50,000 조희연, 장석주, 유길준
25,000 김가진, 김병익, 김사준, 김사철, 김석진, 김영철,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남정철,
민상호, 민영기, 민영달, 민종묵, 민형식, 박기양, 박용대, 박제빈, 성기운, 윤용구,
윤웅렬, 이건하, 이근상, 이근호, 이봉의, 이용원, 이용태, 이윤용, 이재극, 이정로,
이종건, 이주영, 정낙용, 정한조, 조경호, 조동윤, 조동희, 조정구, 최석민, 한규설,
한창수, 홍순형
합계 4,529,000 76명
통제
1920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한 김가진
1911년에 습작하여 1913년에 실작한 윤치호
화족이 일본 궁내성의 감독을 받는 것과 다르게 조선귀족은 조선총독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으며, 조선총독은 일본 황실령 제15호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관한 건〉을 통하여 감독권을 행사하였다.[6]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는 1924년 10월 7일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조선귀족이 창출된 이래 일제강점기 동안 새로이 수작한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귀족 중에 승작한 자는 이완용(백작 → 후작), 송병준(자작 → 백작), 고희경(자작 → 백작)이 있다.[19]
수작자 중에 일부는 반일적인 활동이나 충순을 결여한 행위를 이유로 하여 작위가 박탈되거나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사준은 독일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원조를 받고자 비밀 조약을 체결하려던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20] 1915년에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상실하였다.[21]
김가진은 1919년에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하였던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20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22] 김가진의 작위는 박탈되지 않았으나 습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3]
이용직과 김윤식은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였다.[24] 습작자 중에는 윤치호가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3년에 작위가 박탈되었고,[25] 민태곤은 1941년 12월에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26]
마약, 도박 등으로 인한 형사범은 조선귀족으로서의 결격사유에 해당되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선고 받아 작위를 박탈당하였다.[26]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 받아 1912년에 예우가 정지되었다가 1915년에 해제되었다.[27][28] 조민희는 도박으로 파산을 선고 받고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조동희는 집안 내의 재산 분쟁으로 예우 정지와 해제를 두 차례 반복하였다.[29]
평가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있어서 효용가치가 높은 최상위 협력층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정체되고 무능력한 조선귀족을 적극적 협력자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많이 희석되었다.[30] 192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조선귀족들이 속출하자 조선총독부는 1929년에 창복회(昌福會)를 설립하여 궁핍한 조선귀족들을 지원하기에 이른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귀족들은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집필 활동을 통해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30]
조선귀족의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제1항에 의하여 당연범으로 처벌대상이 되었다.[32] 2004년 3월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수작 및 습작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였고,[33] 이에 의거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41명을 귀족 분야의 조사대상자로 심의하여 총 139명(이재면, 수작자 64명, 습작자 74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34]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작위 거부·반납자 및 상실자, 민족운동 참여자를 제외한 조선귀족 137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여 수록하였다.[35]
수작 및 습작자 목록
1910년 수작 거절 1910년 이후 승작 및 신 수작 실작
작위 수작자 습작자 변동 사항
후작 이재완(李載完) 이달용(李達鎔)
이재각(李載覺) 이덕용(李德鎔)
이해창(李海昌) 이덕주(李德柱)
이해승(李海昇)
윤택영(尹澤榮) 윤의섭(尹毅燮)
박영효(朴泳孝) 박찬범(朴贊汎)
백작 이완용(李完用) 이병길(李丙吉) 1920년에 이완용이 후작으로 승작
이지용(李址鎔) 이영주(李永柱) 1912년에 도박죄로 이지용의 예우 일시 정지
민영린(閔泳璘)
1919년에 아편 흡입죄로 작위 박탈
자작 송병준(宋秉畯) 송종헌(宋鍾憲) 1920년에 송병준이 백작으로 승작
고영희(高永喜) 고희경(高羲敬) - 고흥겸(高興謙) - 고중덕(高重德) 1920년에 고희경이 백작으로 승작
이완용(李完鎔) 이택주(李宅柱)
이기용(李埼鎔)
박제순(朴齊純) 박부양(朴富陽)
조중응(趙重應) 조대호(趙大鎬) - 조원흥(趙源興)
민병석(閔丙奭) 민홍기(閔弘基)
이용직(李容稙)
1919년에 독립청원서 제출로 작위 박탈
김윤식(金允植)
1919년에 독립청원서 제출로 작위 박탈
권중현(權重顯) 권태환(權泰煥)
이하영(李夏榮) 이규원(李圭元)
이근택(李根澤) 이창훈(李昌薰)
임선준(任善準) 임낙호(任洛鎬) - 임선재(任宣宰)
이재곤(李載崑) 이해국(李海菊)
윤덕영(尹德榮) 윤강로(尹强老)
조민희(趙民熙) 조중수(趙重壽) - 조용호(趙龍鎬)
이병무(李秉武) 이홍묵(李鴻默)
이근명(李根命) 이충세(李忠世) - 이종승(李鍾承)
민영규(閔泳奎) 민병삼(閔丙三)
민영소(閔泳韶) 민충식(閔忠植)
민영휘(閔泳徽) 민형식(閔衡植)
김성근(金聲根) 김호규(金虎圭)
남작 윤용구(尹用求)
1910년에 수작 거절
홍순형(洪淳馨)
1910년에 수작 거절
김석진(金奭鎭)
1910년에 수작 거절
한창수(韓昌洙) 한상기(韓相琦) - 한상억(韓相億)
이근상(李根湘) 이장훈(李長薰)
조희연(趙羲淵)
1915년에 파산으로 작위 반납
박제빈(朴齊斌) 박서양(朴敍陽)
성기운(成岐運) 성주경(成周絅) - 성일용(成一鏞)
김춘희(金春熙) 김교신(金敎莘) - 김정록(金正祿)
조동희(趙同熙) 조중헌(趙重獻) - 조원세(趙源世) 재산 분쟁으로 예우 정지와 해제를 두 차례 반복
박기양(朴箕陽) 박승원(朴勝遠) - 박정서(朴禎緖)
김사준(金思濬)
1915년에 조선보안법위반사건으로 작위 박탈
장석주(張錫周) 장인원(張寅源)
민상호(閔商鎬) 민영욱(閔泳頊)
조동윤(趙東潤) 조중구(趙重九)
최석민(崔錫敏) 최정원(崔正源)
한규설(韓圭卨)
1910년에 수작 거절
유길준(兪吉濬)
1910년에 수작 거절
남정철(南廷哲) 남장희(南章熙)
이건하(李乾夏) 이범팔(李範八) - 이완종(李完鍾)
이용태(李容泰) 이중환(李重桓)
김병익(金炳翊)
1919년에 아편 흡입죄로 작위 박탈
민영달(閔泳達)
1910년에 수작 거절
민영기(閔泳綺) 민건식(閔健植) - 민병억(閔丙億)
이종건(李鍾健) 이풍한(李豊漢) 이종건은 작위 반납을 표명, 총독부에서 불허
이봉의(李鳳儀) 이기원(李起元) - 이강식(李康軾) - 이홍재(李弘宰)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1913년에 윤치호가 105인 사건으로 작위 박탈
이근호(李根澔) 이동훈(李東薰)
김가진(金嘉鎭)
1919년에 상하이로 망명·독립운동, 습작 불능
정낙용(鄭洛鎔) 정주영(鄭周永) - 정두화(鄭斗和)
민종묵(閔種默) 민철훈(閔哲勳) - 민규현(閔奎鉉) - 민태곤(閔泰崑) - 민태윤(閔泰崙)
이재극(李載克) 이인용(李寅鎔)
이윤용(李允用) 이병옥(李丙玉)
이정로(李正魯) 이능세(李能世)
김영철(金永哲) 김영수(金英洙) - 김용국(金容國)
이용원(李容元) 이원호(李原鎬) - 이창수(李彰洙)
김종한(金宗漢) 김세현(金世顯)
조정구(趙鼎九)
1910년에 수작 거절
김학진(金鶴鎭) 김덕한(金德漢)
박용대(朴容大) 박경원(朴經遠)
조경호(趙慶鎬)
1910년에 수작 거절
김사철(金思轍) 김석기(金奭基)
정한조(鄭漢朝) 정천모(鄭天謨)
이주영(李胄榮) 이규환(李圭桓) - 이경우(李卿雨)
민형식(閔炯植)
습작 불능
이항구(李恒九) 이병주(李丙周) 1924년에 이항구가 추가로 작위 수작
1919.3.1 만세운동
준비와 진행과정
삼일민세운동 준비위원 33인 대표는 태화관(당시 유명음식점)에서 모여 독립선언서을 낭독한다. 낭독후 일본경찰에 끌러가는 모멸감을 받지 않기 위해 자진해서 판사에게 가서 독립선언서를 제출한다.
독립선언서:
한국인이면 최소한 독립선언서를 한 번 읽어 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현대로된 내용을 적어본다:
“우리는 오늘 우리 한국이 독립국이며 한국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합니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이를 두루 밝히며, 영원한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백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이기에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오랜 억울함을 떨치고 일어나려면, 현재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땅에 떨어진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체면과 도리를 떨쳐 얻으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바로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천만 겨레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듯 굳게 결심하니, 인류 공통의 성품과 이 시대의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주의라는 창과 방패로 호위하고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싸우니 어느 강도를 꺾지 못하겠습니까!
물러가 일을 꾀하니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겠습니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학자들은 강단에서, 통치배들은 실생활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대로 닦아 온 찬란한 위업을 식민지로 삼아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이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배들의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침략, 강정이이었으므로 그 결과는 마침내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보십시오!
용감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뜯어 고치고,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원한과 분노에 쌓인 이천만 민족을 폭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가 갈수록 두터워진 결과,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겠습니까!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갈고 닦으며 키우고 기른 인도주의 정신이 이제 막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키고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찬란히 꽃피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더불어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억만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공약 삼장
하나.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하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합시다.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합시다.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 대표
손병의 김병조 나인협 이명룡 박준승 오세창 최린 길선주 김창준 양전백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한용운 이필주 권동진 양한묵 이종훈 박동완 정춘수 홍병기 백용성
권병덕 유여대 이종일 신혼식 최성모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이갑성 임예환 신석구
배제학당 교장인 휴신(한국명 신흥우)는 ‘한국의 재생’(1920)이라는 책에서 삼일운동을 목격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모자를 든 학생들, 하얀 옷을 입고 주름진 초록색 장옷을 걸친 부인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연장을 들고 있는 일꾼들, 고운 비단 두루마기를 바람에 날리는 양반의 자제들, 앙상한 손가락에 바짝 마른 팔뚝을 한 순박한 농사꾼들, 이마에 흰 천을 질끈 동여맨 몸체가 단단한 달구지꾼둘, 긴 담뱃대를 들거나 귀 뒤에 펜을 꽂은 부유해 보이는 상인들, 솜 넣은 바지를 입은 퉁퉁하게 생긴 남자 아이들, 혹은 나막신을 신고, 혹은 비단신을 신고, 서구식으로 옷을 입은 청년, 천차만별의 연령,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일체가 되어 흥분의 고가니 속에서 즐겁게 ‘만세, 만세,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외국인이 본 3.1일운동
1919.3.1일 만세운동이 발생한 직후 3월말에 한국에 도착한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영국여자화가는 그때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을 보왔다. 그녀의 저서(Old Korea)의 서문에 “한국인들은 폭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행진하며 태극기만 흔들고 만세만 불렀는데 일본군은 심한 탄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국인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에 나라를 잃었으며 황후는 피살되었다. 한국인은 고유의 복장을 못입게하고 학교에서는 일본말만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전통복장으로 걸어가는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엄청 뿌려지는 것도 보았다. 일본경찰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흰옷입은 한국인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라고 적고 있다.
그녀는 또한 “...일부 열린 마음을 가진 일본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그 미술을 존경하고 심지어 숭배하고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국의 역사가 일본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또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탁월한 그림, 도자기, 조각 등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나는 일본이 훔쳐간 이 귀중품들을 다시 본고장인 한국으로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일본에서도 오래 살았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간 이 엘리자베스 키스화가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눈이 아니라 외국인의 눈으로 직접보고 느낀것을 적은 것이다. 이 글만 봐도 일제가 한 만행이 드러나는 것이다.
1932 윤봉길
윤봉길 두 아들에게 남긴 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일제의 역사 왜곡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5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 불태웠다, 또한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사편수회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1938년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일본의 사학자인 하라타사카에루는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하여, 한국과 관계가 있는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핵심작업이었던 것이다.
최 근 우리역사회복을 위한 충격적인 실화가 소개되었다. 다름아니라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 사서 분류 작업을 하였던 박창화님(朴昌和;1889∼1962)의 증언이 최기철박사님(崔基哲;1910∼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 의해 공개되었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이제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수많은 단군시대이전의 고사서를 수십만권을 압수 소각하면서 일부 중요한 상고사의 고문헌을 문화적,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아마 은밀히 보관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http://www.aljago.com/history_data/1_8.html
일 본이 조선의 뿌리 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왜곡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마니시 류(금서룡)이다. <조선사> 편찬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이마니시 류는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 제는 강탈한 조선사 문헌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조선의 시원 역사를 말살 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삼 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이로써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인류 창세사의 건국 이야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한낱 신화의 인물사로 바꾸어 버렸다. 국國을 인因으로, 글자 하나를 변조함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첫 번째 나라인 환국桓國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 류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 자를 因자로 바꿈으로써 환국桓國에서 뻗어나간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자도 허구의 인물로 부정되어 버렸다. 한민족의 7천 년 상고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혀 버린 것이다.
http://www.aljago.com/bbs/zboard.php?id=book_1_01&no=76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민 수탈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소작농민들을 수확품을 대량 수탈해 간다. 많은 농민들은 수탈에 견디지 못하고 농토를 잃고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는 이가 많았다. 이에 동아일보는 1922.10.29기사에 '동척은 각성하라'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토지는 농민의 생명이니, 동척은 제국주의의 시재착오적 정신을 조선에서 행하지 말라"라고 비판한다. 무서운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는 이런 논설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정부인데도 이러한 글을 못쓰는 언론사가 많으니 어찌 민족의 미래가 있겠니.
농촌계몽운동 탄압
국민의 820%이상이 농민인데 소작료인상과 수탈로 가난이 대물림되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난다. 청년회, 노동단체, 언론 등 여러단체들에 의한 문맹퇴치를 위한 문자보급운동 등도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대말에는 중단되고 만다.
음악탄압
조선 500년 전통을 이어온 궁중음악과 종묘제례악 연주도 일제시대에는 단 한차례밖에 못했다. 1938.10.8 경성부민관(서울시의회건물)에서 였다. 대중 음악회가 민족혼 부활로 대중집회로 이어질것을 염려해 일제는 금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궁중악사들은 우리의 음악을 지키려 피나는 노력을 했단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우리의 종묘제례약이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단다.
1990
고종칙령 41호: 독도 영토선언
독도에는 동도와 서도가 있다. 독도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의 지증왕 본기에 신라시대 지증왕 13년 우산국(울륭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기 50페이지 세째줄에도 기록이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독도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울륭도 주민의 세금부과등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주민들을 육지로 많이 이동시킨다. 이 시기에 일본어부들은 주민들이 떠난 울륭도 독고에 와서 당시 많았던 물개사냥을 많이 해갔다.일본어부들이 함부로 와서 불법 어로를 하니 당시 주민인 안용복이라는 용감한 조선인이 일본어부와 싸우다가 납치되어 일본으로 잡혀간다. 안용복은 기지를 발휘하여 자기가 조서의 공무원이라고 주장하여 오히려 잘 대접을 받고 온다. 이후 여러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일본에 가서 잘 대접받았다 한다. 나중 사실이 밝혀져 조선당국은 안용복을 국제사기꾼으로체포한다. 용감하게 독도를 지키려던 안용복은 범죄인이 된것이다. 지금은 독도 지킴이 상징인물이 되어 있다.
조선말 고종은 41호 칙령을 통해 울륭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독도(죽도-동도, 석도-서도)의 행정관리지역으로 선포한다. 일본은 러일전쟁,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조약을 근거로 독도를 강탈한다. 1945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 영토로 돌아 온다. 여러 고문서의 기록, 고종칙령 41호, 실효적으로 우리기 지배하고 있는 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땅이다.
잃어버린 간도
간도협약1909
압 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간도땅은 우리것이었다. 만주지경인 압록강 북쪽은 서간도이고 송화강 토문강 동쪽은 연길이 있는 북간도라고 한다. 명나라는 이 지역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연변지역이 발원지인 만주 여진족 출신의 청나라가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숙종때 청나라는 자신들의 고향인 간도땅을 달라고 한다. 조선은 반발하고 그래서 두나라는 사신들이 만나 국경선을 정한다. 백두산 정계비로 조선영토를 압록강아래와 토문강 동남쪽으로 정한다.고종때 청나라는 다시 북간도 지역을 달라고 한다. 청나라는 토문강동남쪽이아니라 두만강 이리고 우긴다. 그런데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만주철도 부설권과 탄광채굴권취득대가로 북간도땅을 청나라에 넘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긴 조선은 힘도 못쓴다. 일본은 남의 땅을 마음대로 팔아 먹은 것이다. 연변지역은 북간도지역은 아직도 우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나라가 망해 땅을 잃어버린것이다. 엄연히 이건 국제법상으로 불법이므로 다시 찾아 와야 한다.
1933 구석기 유물 연구 금지
하지만 일제는 발굴의 궁극적 목표를 <조선사 왜곡>에 두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석기 유물 발굴이다. 1933년 그들은 함경북도 동관진에서 동물 화석과 함께 구석기 유물도 발굴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선사시대의 상한을 <금석병용기>라고 강변하면서 왜곡하고 있던 일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어 결국 발굴과 연구 자체를 금지시켰다.
일단은 조사를 하여 구석기 시대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무슨 소리냐? 여기에 어떻게 구석기가 존재하느냐? 덮어라! 그렇게 된 거죠.
1937년.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 강제이주
옛날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중심지인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는 타슈켄트, 우리의 경주같은 곳은 부카라(Bukhara)이다. 부카라는 역사박물관 도시로 불리우며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카라는 산스크리트언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다. 부카라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이슬람사원인 칼란모스크(Kalan Mosk)가 있다. 그곳에는 실크로드의 길잡이 역할은 해온 'Kalan Minaret'라는 '사막의 등대' 탑이 있다. 마을에는 대대로 이어오고 있는 대장장이가 특이한 가위를 만들고 있다. 이집의 할아버지는 왕을 위한 칼을 만들었단다. 현재 그 손자가 아버지로 부터 가업을 계속 배우고 있다. 이 가게 옆에 한 할아버지는 나무로 만든 빵무늬도장, 빗을 직접 만들어서 가판에서 팔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장인이라고 한다.
인근에 왕궁이 있었던 아르크(Ark)성이 있다. 지금은 무너진 잔해만 남아있는데 1920년 재정러시아의 폭격으로 무너졌단다. 역사학자인 한 할머니가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가이드를 해주고 있다. 이전에 왕앞에서 뒷걸음으로 나왔다고 설명해준다.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무카라 사람들은 진솔하고 착하고 정이 많고 민족애가 강한 사람들이다. 우즈베키스탄 문화중 임금앞에서 사람들이 한것처럼 지금도 며느리가 시어머니앞에서는 뒤로 걸어서 나온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했었다. 그 문화가 우즈베키스탄에는 남아있다.
우즈베키스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 민족인 고려인들이 16만명이나 살고 있다.
1937년 러시아 스탈린은 연해주 고려인 18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중 16만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된다. 지금은 그 후손들이 4-5세대까지 내려왔다. 국가가없어진 민족은 가족과도 헤어지는 강제이주를 당한다.이주과정에서 상상할수없는 고통을 격어야 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은 주로 수도인 타슈켄트에 많이 살고 있으며 타슈켄트에서 차로 20분거리에 있는 '뽈리따젤'이라는 마을에 가면 고려인 집단거주지가 있다. 김, 박, 이, 최, 손씨 등 한국인 성을 가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학교에 가면 대부분이 고려인 아이들이다. 고려인이 사는 집에 가면 앞마당에 배추, 무우,파 등을 심서서 키운다. 닭도 키우도 개도 있다. 아직 생존해 있는 2세대 어른들은 밥을 먹을때 앉아서 밥상에서 먹는다.
그런데, 많은 고려인들은 생계와 자녀 교육을 위해 부모들이 한국이나 러시아로 일하러 떠나서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증고조 때 강제이주로 친지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고 지금은 생활과 자녀교육을 위해 또 부모자식이 헤어져 살고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운명의 고통은 몇대를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이들 중에는 아주 옛날부터 우리의 땅을 지키면 살던 후손도 있고 일제탄압에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한 후손도 있을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사랑한 어른들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뜨거운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일제
1905 을사늑약, 매국 세력
천도교 민족종교
일진회: 당수 이용구, 송병준, 한일합방 청원서 제출
노론의 당수는 이완용
일본군부 강경파: 청일 러일전쟁 승리후 강경파
이토 히로부미: 문관, 국제여건 고려후 합병주장
이완용 비서인 이인직이 사전에 협상함: 조선인 귀족제, 보상예산확보후 매국함.
이인직의 혈의 누 가 근대소설로 내용은 청일전쟁시 청군에서 일군이 조선여인 구해주는 소설 일제합리화 소설.
귀족 작위 76명중 왕족외 64명중 남인은 0 북인 2, 소론 6, 노론 56명임
당시 국제정세, 일영조약, 미국과 태트라조약 등 일본강력한 시대, 일본항복 예상못함
양명학자 집단이주
강화도양명학자 만주로 이동 흥도천으로
우당 이회영 만주로
남인 이상룡 김대만 경사도 쪽 만주로
절명시 매천 황현 자결
1911 4월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한사군: 만주서쪽
후한서, 삼국지 기록
석주 이상룡 망명일기, 1911, 한사군 만주서쪽, 삼권분립주장, 민주공화제, 3.1운동으로이어짐
성호 이익 만주서쪽주장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양명학 ) 만주서쪽주장
박정희: 김재규
수문제: 양재
시저: 부르투스 , 너마저
김종필, 오히라 합의: 위안부문제, 인간목숨을 합의할 대상아님
조선양반사대부, 현재 학벌카르텔 동일
민족사관: 박은식, 이상용, 신채호, 정인보(납북)
식민사관: 한사군 한반도로 동북공정 동일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