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재경 영남대학교
기계공학과 동창회 세미나
제 목: 신라 범종에 대하여
발 표 자: 안 기 순 감사
일 시 : 2012년 6월 27일
범종의 개념
1. 범종: 청동합금으로 만든 범종(梵鐘).
2. 용도: 사찰의 종루에 걸어놓고 당목(撞木)으로 쳐서 시각을 알리거나
중생 제도(衆生濟度)의 목적으로 이용된다.
3. 분류: 범종은 불교공예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4. 국보급 동종: 경주 에밀레종(29호)과 상원사 동종(국보36호),
수원 용주사의 동종(120호), 성거산 천흥사 동종(국보280호) 4개
5. 신라시대 것으로 소실된 동종: 아진사 동종(745년), 월정사 동종(804년)
6. 보물급 동종: 서울 보신각(2호),
사인비구(思印比丘): 18세기(조선 숙종)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장인,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더하여 종을 제작했다 사인비구의 제작 동종 (11호 계열)은
포항 보경사(11-1호), 문경 김룡사(11-2호), 홍천 수타사(11-3호), 안성 청룡사(11-4호), 서울 화계사(11-5호), 양산 통도사(11-6호), 의왕 청계사(11-7호), 강화도 전등사의 범종(11-8호) 이다.
또 계룡산 갑사(478호), 부안군 내소사(來蘇寺)의 동종(277호), 양양의 낙산사(479호: 2005년 소실), 남양주 진접의 봉선사(397호). 합천 해인사(1253호).그 외 다수
7. 동종의 명칭
**음통은 우리나라의 종에만 있는 구조이다**
8. 밀납형 종 제작법
(제작자의 호칭은 무형문화재 주철장, 주성장, 주종장으로 불리운다)
1. 밀납(벌집에서 추출)을 녹인다.
3. 나무로 종의 골조를 만들고 새끼줄, 삼끈으로 칭칭 감고
그 위에 밀납을 바른다.
4. 2단계에서 생산된 밀랍 조각품들을 붙인다.
5. 밀랍으로 만든 종위에 미암석+황토흙+모래를 적당히
혼합해서 바른다.
3,4회 바른후 황토흙에 짚을 섞은 흙으로 재차 바른다.
두께를 주어 안의 내용물이 잘 보존되도록 한다
6. 열을 가열해서 밀랍으로 만든 원형을 녹인다.
7. 종의 높이 만큼 호를 파고, 그 안에서 종의 내형을 만든다.
8. 호 안에 있는 내형위에 외형을 잘 맞추어 고정한다.
고정이 끝나면 흙으로 잘 덮고, 쇳물이 잘 흐를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9. 쇳물이 종의 구멍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불순물과
이물질이 잘 섞이지 않게 하며, 쇳물이 골고루 잘 들어가기 위해
종 내부를 따뜻하게 해준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
1. 상원사: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성덕왕24년(705년)에 중창, 1946년 소실, 1947년 다시 지은 절.
2. 상원사 동종: 서기 725년 신라 때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아름다운 범종.
3. 범종각 사진
4. 유래
문수보살의 은혜에 보답코져, 좋은 종을 구하라는 세조대왕의 명에 의해 신라시대의 범종을 구했는데..... 이 범종은 원래 이름없는 사찰의 범종이었다가 숭유억불 정책으로 압수하여 안동부의 남문루에 걸고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어 오다가 특별히 간택되어 상원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5. 전설
무게753kG인 동종은 500명의 인력, 말100필로 죽령을 넘어 오다가 움직이질 않아 36개 종유 중 1개를 잘라 원래의 자리에 묻고 제사를 드린 후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6. 상원사 동종 사진
7. 없어진 종유 1개
8. 6.25 전쟁과 종의 보존:
1. 상원사의 경우
상원사는 온전했다. 27년간 수행하고 있던 방한암(方漢岩 )스님은 국군이 법당에 불을 지르려 하자 스님이 법당에 앉아 "나도 같이 불사르라"며 맞섰고, 국군은 결국 법당 문짝만 뜯어 연기를 냄으로써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고하여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2. 월정사의 경우
1948년 미천골 선림원터(禪林院址)에서 발굴되어 월정사 종각에 보존되어 오던 선림원 동종은 6.25때 1951년 흥남 철수 시에 8각9층 종각과 함께 불에 타 파괴되었다. 상원사종에 버금가는 신라의 동종 하나가 전쟁의 참화로 없어진 것.
9. 신라 동종의 화학적 구성 성분: 대략 82Cu – 13Sn – 3.0Pb
종로의 보신각종
1.제야(除夜)의 종소리 와 33타종의 의미
"제야(除夜)"란 말은 '밤을 없앤다'라는 뜻이고, 옛날에는 새벽 4시 정각에 성문을 열며 매일 33번의 종을 쳤다.
"33"이란 불교의 '33천(天)' 즉 “33개의 하늘을 모두 활짝 열어 놓을테니까 모든 중생들은 활동을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새벽 4시에 울리는 33번의 종소리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신호”였다.
2. 옛날의 타종은
자정이면 모든 성문을 닫았는데, 이 때는 28번 종을 쳤으며 "인경[人丁, 人更]"이라 하였다. 이 "28"의 의미는 밤하늘 별자리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28번의 타종은 "정식으로 밤의 시간이 왔으니 모든 중생들은 활동을 중지하고 잠자리에 들어라"는 의미로 우주의 일월성신 이십팔수(28별자리)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 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큰 일 중 하나였다. 자시 축시 인시 등으로 불렀던 하루 12시간 중 밤에 해당하는 5시간,
이를 초경 이경 오경으로 나누어 각 경마다 북을 쳤다. 또 각 경은 다시 5점(오점)으로 나누어 각 점마다 징이나 꽹가리를 쳤다. 한 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 한 점은 24분에 해당한다.
3. 보신각의 타종
북, 꽹가리, 징소리는 모든 주민이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4대문이 닫히고 주민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밤 10시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새벽 4시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렸다.
이 때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은 경수소(警守所)에 구금하였다가 다음날 곤장형을 집행하였다
4. 해프닝
언젠가 어느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보신각 타종장면을 중계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여 33번 타종한다고 하는 해프닝을 벌인 적이 있었다.
5. 새해의 의미
1월 1일 0시만큼은 새해가 열리는 시간이라 하여 다른 날처럼 28번을 치지 않고 33번을 쳤다. 자정이라는 의미로 보면 28번을 쳐야 마땅하다. 제야의 종소리란 말 뜻은 그저 밤을 없애는 종소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굳이 종소리 숫자 33을 맞추려면 "새해의 종소리"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6. 최초의 종
보신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종각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의 일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14)에는 새로 대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 되어버렸다.
7. 원각사 종
그 후 다시 건 종은 원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으로 태조의 제 2비인 신덕 왕후의 능인 정릉의 능사에 있었다. 그 후 정릉사가 폐사되자 다시 원각사로 옮겼다가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보신각종은 정릉사종이라고 할 수 있다.
8. 보신각종
그 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판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다시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 하였다.
그렇게 종을 치던 전통을 이어받아, 1953년부터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제야의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제야의 종은 원래 불교의 행사로 각 절마다 음력 12월 31일 자정에 108번의 종을 쳤다. 하지만 보신각의 종은 33번 치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조선시대 새벽에 치던 바루와 같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 그 시각에 유서깊은 보신각종을 33번 울리게 된 것이다.
9. 새로운 종
지금의 보신각종은 조선시대 때부터 매달려 있던 종이 아니다.
선조 이래로 사용되어 오던 종도 오랜 병화와 재화로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자 균열 전파를 방지 처리를 하여 보관하고 있다.
1985년에 시민의 성금으로 문양만 현대식으로 에밀레종을 복제, 주조하여 그 해 8월 14일 보신각에 걸고 다음 날인 8월15일 광복절에 처음 타종되었다.
10. 옛 종의 보관
500년간 사용된 옛 종은 1988년 전문가들이 균열 양쪽에 미세 구멍을 뚫는 등 수리를 한 뒤 지금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건립된 종각 속에 보존되고 있다.
11. 해프닝
한 때에는 옛 소리를 원한다고 하여 TV에서 타종 모습을 중계하면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타임 맞추어 방영한 적도 있었다.
12.수난
보신각종도 일제에 의해 부평조병창으로 왔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다행히 녹여지지 않고 다른 많은 유물들과 같이 조병창터에 남게 되었다.
1950년9월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보신각과 그을린 종
1956년 복구된 보신각(뒤로 20m 옮겼다)
1960년대의 보신각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이전한 보신각 옛 종
지금의 보신각 종
**2005년4월5일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범종의 모습**
조상의 빛난 얼 “에밀레종”
1. 총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조상의 빛난 얼”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 미약하여 세계를 주도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후손들이 자산의 조상들이 이룬 빛난 위업을 모른다면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조상의 빛난 얼 중 최고의 걸작품은 역시 성덕대왕 신종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으로 불리는 이 종은 시작한지 약34년 만에 완성된 것이며 지금부터 약1200년 전인 서기771년의 일이다.
이 종이 신종(神鍾)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의 소리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종이라는 의미이며, 세계의 유명한 종소리 경연대회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최근에 옛 종을 분석, 제작하여 보았지만 종소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사람이 대다수 이고 보면, 현대의 우수한 기술과 장비를 동원하여도 옛 종 하나를 제대로 못 만든다는 의미는 지금의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에밀레종의 제작은 설계 및 제작기술과 예술적 기교의 복합품인 동시에 종이 가지고 있어야 할 소리, 통상의 울림이 아닌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음향학적 특성과 사용적 측면에서 지금까지 약 1200년 정도의 사용 이력에서도 전혀 품질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믿기 어려운 천하의 걸작품이다. 아울러 외국에서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정교한 작품이다.
2. 명칭
성덕대왕신종, 봉덕사종, 에밀에종이라고 하며, 국보29호, 높이 3.75m, 지름 2.27m, 둘레7m, 두께는 위10cm, 아래22cm 무게 18.9톤, 제작기간 34년, 771년12월14일 제작, 국내 가장 큰 종, 종소리는 세계 최고의 걸작품.
3. 피로 설계
종은 당좌(撞座)로 타종해야 하고, 또 장기간 타종하면 충격반복하중이 그 부위에 작용하여 금속은 피로(Fatigue)를 일어키고 적은 타종력에서도 종은 균열(Crack)이 발생되는데, 이 균열은 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되게 된다. 종을 설계할 때, 소리의 세기를 고려한 타종력에 대하여 피로하중 이하로 설계해야 한다. 일반피로시험은 약100만회를 견디도록 설계하면 안전하며, 인장강도의 40-50%정도의 하중 이하로 사용하면 되지만, 신라시대에도 이 원리를 알고 있었을까?
4. 재료의 선택과 비율
종의 재료는 청동 합금(구리+주석:Cu+Sn)인데 주석은 소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주석의 양을 적게 하면, 종이 연해지고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지만, 반대로 증가시키면 단단해 지지만 취성이 증가하여 타종 시 깨어지기 쉬워 종의 수명이 짧아지는 결점이 있으므로 15%정도 사용했다고 추정되지만, 어떻게 계산하여 비율을 맞추었는지 불가사의하다. 또 당시 신라에서는 주석이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전량 수입했다고 추정된다.
인(P)은 탈산재로서 사용되었는데 적정량의 인을 첨가하면 우수한 재질이 되어 소리가 좋게 되므로 100-400 kg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이 비율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설에 의하면 어린 아기를 시주 받아 소리의 은은함, 애절함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지만, 뼛속에 인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양도 맞지 않고 동물의 뼈로 생각하여도 불순물이 없어야하므로 이는 불가능하다.
1998년 포항과학산업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인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5. 주조 방법
주조방법을 보면, 에밀레종의 무게는 19.8톤이므로 쇳물 보충분을 추가하면 24톤 정도가 된다. 통상 청동을 녹일 때는 용해로 속의 도가니에 넣고 또 뚜껑을 덮고 용해시킨다. 큰 용량의 도가니로는 많이 필요하게 되고 연속적으로 운반, 주입할 수 있는 공간과 인력도 준비해야 하므로 방대한 시설과 인력이 필요했으리라는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쇳물 주입구는 약10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는데, 주입 시 발생되는 가스를 배출시키는 기술도 어렵다. 그것은 가스의 배출이 원활해야 재료 내부에 기공이 없는 상태로 굳기 때문이다. 약10개의 주입구로 계산하면, 주입구 1개당 2.4톤씩 연속 주입해야 되며, 도가니는 100개 이상 사용되었다. 그리고 쇳물의 온도도 섭씨1000-1150도로 유지해야만 되는데, 그 당시는 온도설정과 유지 및 측정을 어떻게 하였을까?
6. 음향 기술
음향학적 기술은 오히려 지금까지 논의된 것보다 더욱 난이도가 높다.
즉 종소리는 타음, 원음, 여음의 3가지로 울리는데, 타종에 의한 일반 진동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로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에밀레종의 경우는 종이 가지고 있는 고유진동수와 타종시 발생되는 진동수가 합쳐져 공진 현상 즉 맥놀이 현상을 일어킨다. 종을 타종하면 소리는 좌우로 진동하고 상하로의 진동도 수반된다. 또 음통이 있어 소리가 되돌아오는 것과 바닥에서 반사되어 올라오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공진을 역이용하여 완벽한 조화가 일어나도록 설계되었다. 이 맥놀이 주기 2.7초로 사람이 숨쉬기 주기와 같아 느낌이 아주 좋다. 그렇다면 조상들이 난이도가 매우 높은 진동 특성에 관한 기본 지식을 알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국내 박물관의 음향 특성 시험 자료에 의하면 100점 만점에 에밀레종 86.6점 상원사 동종 65점, 보신각 신종 58.2점, 중국의 영락대종(43톤)42.3 으로 나타났다. 이것으로 세계 최고 불후의 명품이 된 것이다.
7. 문양의 예술성
제작 형틀은 모래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표면을 이렇게 아름답게 하려면, 밀납(벌집)으로 주형을 만들어야 한다. 12만근(무게 27톤)의 종에 필요한 밀납은 재래식 벌통 2000개 필요하다.
에밀레종의 표면을 보면, 각종 문양과 비천상을 비롯한 아름다움은 가히 예술적 걸작품이다. 그러나 중국 종과 일본 종은 형태만 갖춘 것이지 아름다움과 소리는 우리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주형을 만드는 제조 공법의 차이에서 온 것이며, 우리 종은 밀납 주형인데 비해 일본과 중국은 회전주형으로 만들었으므로, 예술적 감각을 가미한 제조기술은 신라가 첨단기술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과거 일본인들이 우리 종을 그렇게 탐내고, 또 가져간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라시대의 일본이나 중국의 종 제작기술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이것은 첨단 기술국과 비 첨단 기술국과의 차이와도 같은 맥락이다.
8. 제작과 이전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시도했다가 혜공왕이 771년 제작하였다. 처음에는 봉덕사 봉안 - 1460년(세조6년) 영묘사 이전 - 홍수로 절이 없어짐-1506년 봉황대 옆 종각을 짓고 이전하여 일반용으로 사용 - 1915년 구 경주박물관 이전-1975년5월27일 현재의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9. 에밀레종의 복제
종의 복제품은 2번 있었는데 1986년 미국 건국200주년에 우정의 종으로 제작하여 LA 공원에 설치 기증하였다. 또 한 번은 1985년의 보신각 종이다.
복원 기술의 미비로 2번의 제작은 결국 복원이 아닌 모조품을 만들게 되었다.
10.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 위원회
박물관 종각의 하중 안전 시험을 위하여 포철의 강괴(28톤)로 하던 중, 종고리가 휘어져 버리는 사고의 여파로 1975년 종고리위원회를 설치하여 다시 제작하는 것으로 했다.
또 위원회는 종머리에 끼우는 쇠막대기(환봉)를 제작하려고 인천의 한국기계(현 대우엔진공장)에 의뢰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봉지름15cm로 제작하여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종의 구멍은 9cm이므로 결국 위원회에서는 제작을 포기하고 창고에서 옛 것(지름8.5cm 통쇠)을 힘들게 찾아서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11. 타종 중단
지금까지 1200년간 사용되어 온 성덕대왕 신종은 장기 보존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평가 조사를 하였다.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
조사 결과 특별한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아 재타종 결정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
문화제 관리위원회는 2004년9월 보존을 위해 중단 결정.
12. 또 다른 신종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종, 70년대 기증되어 지금도 사용하는 종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한진그룹 조중훈 올림”의 명문이 있다.
이 종은 두께가 일정치 않아 비스듬히(6시5분) 걸려 있었다. 결국 조사를 한 즉 같은 면 위치에서도 10cm - 5cm로 불균형하였고, 어떤 곳은 두께가 거의 없었다. 지금은 명문도 삭제하고, 균형도 바로 잡았다.(1991년)
후기의 글
약1200년 전, 우리나라 주변에는 첨단기술에 관한 한 경쟁 상대가 전혀 없었다. 이 기술은 조선 중엽 충무공 이순신 장군 시대까지는 유지되었다고 판단되지만, 그 후 4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기술 수준은? 또, 그 이유는?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우리 조상들이 기록문화와 정보공유를 등한시 한 것이다. 기록문화, 이것은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매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후손에게 전한다는 것은 기술 개발보다도 더욱더 중요하다.
혼자만의 기술은 그가 죽을 때, 기술도 따라서 같이 죽게 되므로 개발의 의의가 전혀 없다. 에밀레종도 기록문화와 공유의식의 결핍으로 첨단 기술로 제작되었지만 후손에게 전수되지 못한 결과, 지금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면, 단지 노력만 한다고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옛날부터 후손들에게 지식을 전하지 못한 것과 널리 공유하지 못한 것, 즉 기록문화와 공유문화를 재정립시키는 것이야말로 기술 선진국이 되는 첩경이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 경청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재경 영남대 기계공학회
감사 안 기순 드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