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정발장군묘(忠壯公 鄭撥將軍墓)
조선 중기의 무신 충장공 정발장군묘(忠壯公 鄭撥將軍墓 1553∼1592)는 경기도 미산면 백석리 산34-1 에 위치한 경주정씨 제실의 서북쪽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50m가량의 9부능선에 동향(東向)하여 위치하며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으며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며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도굴과 훼손되고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고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어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했고, 과묵하여 선비의 풍모가 완연하였다. 특히 소학에서 얻은 바가 많고, 자라면서 그 형과 같이 독행인으로 뽑혔다 하니 그 행실이 얼마나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약관에 이미 사서와 오경을 통독하였으며, 아울러 손오병법에도 통달하였다.
부산진성의 항전은 처절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수하다가 죽어 갔다. 정발도 결국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무인답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성을 베개 삼아 호국의 귀신이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전황과 정발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발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이 있었고, 숙종 7년에는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이라 내렸으며, 그 자손을 녹용토록 하였다.
함께 죽은 소첩 애향과 종 용월은 부산의 동구 좌천1동 정공단에 합사되어 제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열녀 애향은 충렬사 의열각에도 모셔져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1766년(영조 42년) 부산청사 이광국이 순절지인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에 정공단을 세워 기일에 향사하고, 동래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진첨사 윤흥신과 함께 춘추로 제향하여 그의 넋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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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동호 기자와 함께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정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