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륨>
커다란 강당이 우리반 교실이란다.
깡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선생님이 담임이셨다.
무용반 언니들을 지도하시는걸 몇차례 문 틈으로 구경했던일이
있기 때문에 낯익은 선생님 이셨으나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남자분이 무용안무를 하고 지도를 하시는게 그당시로선
생소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들에게 자상하거나 인자함이란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눈에 띄게 아이들을 편애하지는 않으셨다.
어린이 용어보다는 비교적 수준높은 딱딱함으로 수업 진행을
하셨던거로 기억되는데 공부하다말고 느닷없이 "책걸상 뒤로
밀어놔"며 명령을 하셨다. 커다란 손으로 강당에 놓여있던
피아노를 치시며 우리에게 발레 기본 스텝을 가르쳐주곤 했다.
쭈빗거리며 수줍은 모습으로 따라하는 우리들의 촌스런 모습을
어지간히 답답해 하시곤 했던것 같다.
나는 무용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무용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 눈치껏 상황판단을 하건데
그때의 무용반 학생들은 우리 1년 선배중에 내노라 하는 예쁜 부잣집
언니들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포기란 단어를 배웠는지 모른다)
우리 5학년 4반 출신들의 악몽같은 전설 한토막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한사람씩 차례대로 뺨다귀 세례를 받은
공포스런 추억이다. 그래서 나는 내자식들을 키울때 절대로 이유없이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어른입장에서 아이들을 몰아부치지 않는다.
이가 갈릴정도로 잘 실천하고 있는 덕목은 그때의 아픈 기억때문이다.
이제 완전히 지는 태양 대열에 서계실 담임선생님의 그 시절을
되돌아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나름대로 고뇌와 갈등이 많았을
그분의 결혼생활(이혼과 재혼) 과 그 당시엔 파격적인 무용가의 꿈을
접고 언어수준을 낮춘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려니 꽤나 현실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졸업한 몇년후 대전여상 영어선생님으로 전근 가셨다는 고개
갸우뚱 소식을 접했었다.
그후 동창회에서 그분이 미국에 사신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분의
적성(?)에 잘 맞는 환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이 가면 무엇이든 아름다운 추억이라던데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음은
유감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너그럽게 웃을 수 있을것 같은 담임선생님의
기억이 새로운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첫댓글 그 선생님 나도 기억난다. 요즈음 미국에서 여행가이드를 하시면서 즐겁게 보내시구 계시다는 소식들었는데....
엥? 여행가이드???? 적성살려 맘껏 춤추면서 지내실줄 알았더니..... 우쨌든 생생한 소식이구나
엄청 무서웠던 기억은 나도 남아 있어....샘도 사람이니 편애하는거 어쩔수 없을 거구......그러구 보면 난 샘들의 가정사를 전혀 몰랐는데 넌 참 많은걸 알고 있었던듯 싶구나...
어? 파도여사 다녀가셨구먼? 으응 그분 가정사? 우리동네 사셨어. 그리고 장녀인 근숙(우리동창)이가 우리 큰언니한테 피아노 레슨을 받았어. 하여간에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집 가정부 아줌마가 동네 아줌마들한테 듣고 왔는지 어땠는지 함께 살았던 친할머니한테 이야기 하는걸 내가 듣게 되었고......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그동안 여기 동창회 홈피 말고는 내입으로 발설했던 기억이 없는걸 보니 꽃님이도 참 어지간히 신통한 구석이 있는것 같다 그치?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