浦項地方 基督敎 傳來史(2-27-01)
포항(浦項)은 고대로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영일군(迎日郡)의 일원으로서 발전하여 왔다. 동쪽은 영일만에 접해있고 삼면은 영일군에 둘러싸여 있다. 초기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석기(新石器) 시대 이래 인간이 거주하였고, 청동기(靑銅器) 시대에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졌던 증거가 인근의 오천읍과 흥해읍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물(遺物)․유적(遺蹟)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영일현(迎日縣)으로 개명되었으며 현종(1018년) 때에 이르러는 동경(東京, 오늘의 경주)의 속현이 된 적도 있었다. 후에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때에는 군사상의 요지가 되어 진(鎭)이 설치되어, 병마사(兵馬使)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였으며, 세종(世宗) 때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불리다가 뒤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면리제(面里制)가 발달하면서 포항지역도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순조(純祖) 32년(1832년)의 기록에 보면, 영일현 7개면 가운데 북면(北面)에 「포항리」(浦項里)가 보인다. 비교적 근대(近代)에 속하는 고종(高宗) 32년(1895년)에는 지방제도가 23부(府)로 개편되었는데 그때 영일현(迎日縣)은 영일군(迎日郡)으로 되어 동래부(東萊府)에 속하였다가, 다음해에 13도제(道制)의 실시와 함께 경상북도 영일군이 되었다. 해방 후 1949년 포항시(浦項市)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다음해에 6․25전쟁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3년 7월 휴전 후 오늘까지 공업도시로서만 아니라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급성장해 가고 있다. 그것은 1968년 이곳에 포항종합제철공장이 건설됨으로 다져진 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 2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 580 - 582)
이제 포항지방(浦項地方)에 전래된 기독교의 전래과정을 살펴보자. 「경상도」(慶尙道) 전체의 실질적인 복음전도의 선구자가 된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선교사의 발걸음이 포항까지 당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경상도 내륙지방의 선교지 답사 차 부산(釜山)을 출발 대구(大邱)와 상주(尙州) 안동(安東)을 경유, 의성(義城)․신령(新嶺)․경주(慶州)에 도착한 날이 1893년 5월 13일(토)이었으니(Baird of Korea. by Richard baird 1968 Okland P.35) 포항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땅에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닿은 지 8년 만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92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간행한 「사기」(史記)에 이곳 「포항지방」에 최초로 설립된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는 「선교사합동공의회」시대였던 1901년(辛丑)에 세워진 「괴동교회」인데「延日郡 槐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里人 朴君賢이 日本에서 信主하고 歸家하야 自己 家 挾室에서 禮拜하며 熱心 傳道하야 安鐘弼, 朴汶燦 外 男女와 兒童 數十人이 相繼 信從하야 禮拜堂을 新築하니 敎會가 遂成하니라. 其後 助師난 黃敬善 琴錫範 金順汝 金炳鎬 宋文壽 曺基哲 李春仲 諸人이러라.」(史記 上 P.90)고 했는데 이 교회가 현재 포항대송교회이다. 다음으로 「경상대리회」시절 1908년(戊申)에 설립된 교회가 「포항교회」이다. 「延日郡 浦項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金相五 等이 信主하고 熱心 傳道하야 建堂 立會하니라. 助師 黃敬善 金順汝 領袖 李贊裕 等이 視務하니라.」(史記 上 P 286-287)고 하였다. 이 교회가 포항시 중앙동 112번지에 있는 오늘의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이다. 배위량(裵偉良) 선교사가 경주를 지나간 루 12년 만에 미국 북장로교선교회 대구지부(Misson Station)에 부임해 사역하던 안의와(安義窩, Jame E. Adams)선교사의 발걸음이 포항에 정식으로 닿은 해는 1905년이었다. 지난(1995년) 6월 포항제일교회에서 간행한 「교회창립90주년 기념화보집」(1905 - 1995)에 의하면, 「1905년 아담스(James E. Adams:안의와) 목사와 서성오, 김상오가 이 고장에 와서 전도한 후 1906년 맹의와(孟義窩) 선교사가 포항지방 담당 순회 선교사로 왕래하면서 포항교회(浦項敎會)를 개척하였다.
1908년 1월 5일 포항교회를 조직하여 중앙동 451번지에 초가3칸을 매수하고 교회당을 설치한 것이 오늘의 포항제일교회가 된 것이다」(포항제일교회90주년 기념화보집, 1995 김광웅편 포항제일교회 P.16)라고 한 것을 보면, 총회에 교회의 조직 보고가 있기 전의 과정을 자세하게 알려 주고 있다. 1910년에 이르러는 포항교회 신도들이 사립(私立)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립하여, 장차 교회와 민족의 기둥이 될 인재 양성을 목표로 육영사업(育英事業)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포항제일교회」의 최초당회조직에 관하여 <포항제일교회90주년 기념화보>(P 16)에는 『1908년 1월 5일 포항교회를 조직하여』라고 기록하였으나, 「한국교회사학회」에서 1968년에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에 의하면, <포항교회>의 당회조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는데, 「同年(1918년, 戊午)에 延日郡 浦項敎會 崔景成 宋文壽 等을 長老로 按手하여 堂會가 成立하다. 牧師 金炳鎬가 視務하였다.」(史記 下, 1968년 연세대학교출판부 P.221)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포항교회의 당회조직은 교회 설립후 만 13년만의 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포항교회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도 교회가 앞장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조국의 미래가 암담했던 일제치하의 그 어려웠던 시기에,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고장 주민들을 깨우친 것은, 사립 영흥학교라는 민족교육기관을 세워, 이 고장의 2세 교육을 주도한 것과 함께, 포항교회사(浦項敎會史)의 자랑스러운 한 사건으로 빛난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포항에서의 3․1운동 역시 이렇게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꽃이 피었다.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포항교회 장로 송문수의 연락으로 당시 영흥학교 교사 장운환 영수, 영흥학교 교감 최성경 장로, 이봉학 집사, 교인 이기춘 등이 회합 포항장날을 기하여 의거하려고 기도 했으나, 거사 직전에 일본 경찰당국에 발각되어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을 전부 압수당하고, 관계자들은 피신중 나중에 6명이 체포되었다. 이 소문이 시중에 퍼져나가자 3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쳐 수백명에 이르는 군중이 자발적으로 운집하여 만세시위(萬歲示威)를 벌리었으나, 왜경(倭警)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이날 밤 교인 수백명이 따로 모여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렸는데, 이를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도 동참하여 나중엔 1,000여명에 이르렀다. (포항제일교회90주년기념화보, P.21)
이에 놀란 일본 헌병대가 강력하게 시위대를 진압 강제적으로 해산시켰다. 이 사건으로 채포된 인사들은 대구 지방 법원 경주지청에서 다음과 같은 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 모두 투옥 되었다. 최경성(崔景成) 장로 8개월 송문수(宋文壽) 장로 6개월 이봉학 5개월 이기춘 5개월 장운환이 4개월 복역하고 나왔다.
이들을 기념해 세운 장사면 만세촌의 [3.1의거기념비] 가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1935년 7월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크게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믿음의 지조를 잘 지켰고 6.25때는 치열했던 포항전투로 전 시가지가 전투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으나 천우신조(天佑神助)로 포항제일교회만 유일하게 남아 당시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의 표지에 실린 적도 있었다. 이야 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긍휼의 은총이었다. 지금의 포항시에 편입이 되었지만 당시의 영일군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교회로는 포항시 흥해읍 칠포1리 570번지에 현존하고 있는 칠포교회이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911년(辛亥)에 “延日郡 七浦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敎友 幾人이 興海敎會로 來往 禮拜하더니 信者 漸加하야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를 分立하니 助師 黃敬善 朴汶燦과 領袖 金洪圭가 相繼 視務하니라”고 하였다.(사기 상p.303) 칠포교회는 전형적인 어촌교회인데 오늘날 한국의 농어촌이 겪고 있는 이농(離農) 현상과 도시화로 부흥에 어려움도 있지만 1995년 7월1일부로 인근 포항시에 편입됨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역사가 있는 교회이다.
3․1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되기 전 1917년(丁巳) 에 영일군 칠포교회 다음으로 일찍 설립된 한 교회가 있는데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 하권에 의하면 “同年(1917년)에 延日郡 德城郡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地方 助師 朴汶燦과 大田 領袖 李翼鎬가 熱心 傳道하여 信者 日增하매 草家 三間을 買하야 禮拜堂을 작정 領袖가 視務하였다”.(사기하p 220) 라고 하였는데 이 교회는 현재 청하제일교회이다.
이 지방의 세 번째로 세워진 교회로는 일월동교회인데 사기에 의하면 “同年(1920년) (庚申)에 延日郡 日月洞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本地人 鄭日用 林一圭 金東守 柳明五 林順鶴 卞斗七 等이 其 家族 二十餘人으로 合心 信從하고 長興敎會로 來往하며 傳道하더니 朴汶燦 牧師가 來하여 幾日 査經한 結果로 敎友 等이 新 熱心을 得하여 捐補하여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가 分立하다. 宣敎師 安義窩 領袖 柳明五 助師 梁讚彦이 視務하였다.”(사기하 p.222-223)라고 하였으며
같은 해에 또 마북교회도 설립되었는데 “同年 (1920년)에 延日郡 馬北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吳基周가 傳道하여 信者 多起하여 敎會를 始作하니 領袖 鄭基浩 執事 金日東이 視務하였다.”(사기하 p.223)라고 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세워진 가사리교회가 있는데 “同年에 延日郡 加士里敎會가 設立되다. 先是에 傳道人 吳基周의 傳道로 本里人 中에 新信者가 多數 增加하여 禮拜堂을 設立하니 宣敎師는 魏喆治요 領袖는 金錫鳳이 敎會를 引導하다. ”(사기 하 p.223)라고 하여 선교지부가 있는 대구로부터 상당히 먼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에 까지 복음의 사자들의 발걸음이 미쳐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전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이들 세 교회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21년(辛酉)에도 이 지방에 세워진 교회가 5개 교회가 있다. 그 가운데 첫 교회가 유계동교회인데 사기의 기록을 보면 “同年(1921년)에 延日郡 柳溪洞敎會가 設立되었다. 先是에 本處人 李聖鎬가 其 仲兄 翊鎬의 傳道로 信從후 도상호에게 傳道함으로 未久에 信者가 增加함에 九十圓의 捐補로 祈禱室을 新建하고 德城敎會로 다니더니 敎會가 分立된 後 牧師 朴汶燦과 助師 許澹이 奉職視務하였다.”(사기하p.225) 라고 하였다.
이어서 상옥교회가 설립이 되었는데 “同年에 延日郡 上玉敎會가 設立되었다. 先是에 宣敎師 安義窩가 派送한 傳道人 吳基周가 本處에 傳道하여 敎會가 始作되니 設立者는 宣敎師 魏喆治이고 領袖는 鄭泰述이며 助師는 金炳圭이었다.”(사기하 p.225) 다행스럽게도 이 교회는 포항시 죽장면 상옥1리 929번지에 현존하고 있는 예장 통합측의 상옥교회이다.
또 한 교회는 용산교회인데 “同年에 延日郡 龍山敎會가 設立되었다. 先是에 傅龍煥 家에서 臨時 集會하다가 來久에 捐補하여 禮拜堂을 新建하니 領袖 千斗祿과 執事 金海千이 敎會를 引導하였다”(사기하p.225) 라고 하였으며
네 번째는 정자교회인데 “同年에 延日郡 亭子敎會가 設立되었다. 先是에 信者 幾人이 大坪敎會에 다니면서 本里에 傳道하여 禮拜堂을 新建하고 敎會가 分立하니 宣敎師 魏喆治와 領袖 朴永洙가 敎會를 引導하였다.”(사기하 p.226)라고 하였다. 이 교회가 포항시 죽장면 정자리 390의 3번지에 현존하고 있는 정자교회인데 예장통합측에 속해 있다.
다섯 번째로 같은 해에 세워진 교회가 중감교회이다. “同年에 延日郡 中甘敎會가 設立되었다. 先是에 本處人으로 先信하고 傳道한 者는 金元直이니 長興敎會에 來往하며 禮拜하더니 敎會를 設立하기 爲하여 金 六十圓으로 禮拜堂 四間 建築을 專擔하고 敎會가 分立되니 設立者는 宣敎師 安義窩이고 領袖 朴春睦과 助師 梁讚彦이 視務하였다.”(사기하p226)라고 하여 초기에 포항지방의 교세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전도자들의 열심으로 계속 발전되어 오늘의 이 지방 기독교회의 주초를 다져 나갔고 이것은 곧 성령의 사역이었고 그 열매였다.
포항지방 교회들은 대부분 예장 통합측 교회들이다. 앞서 언급한 포항제일교회 외에 비교적 큰 교회 가운데 몇 교회 발전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먼저 포항시 동빈동 1가 71번지에 있는 포항 북부교회(北部敎會)를 보면 해방 후 1946년 3년 6일 김광수 목사가 중심이 되어서 시작되었는데 같은 해 12월 31일 오근목 목사가 바톤을 이어 받아 1956년 7월31일까지 시무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그 사이 6.25동란이 일어나 교회 성장이 둔화되기도 하였으나 1964년 김광훈 목사가 제 6대 목사로 부임하여 만 12년간 목회에 진력한 결과 오늘의 발전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교회의 현 교세를 보면 대지가 1천1백평에 교회 건물이 연건평 1천3백평이나 되며 평균 출석교인 수가 1천4백명에 이르는 꾀 큰 규모의 교회로 발돋움을 하였다. 이 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추만호 오현식 두 목사와 신학생이 3명이나 있으며 이 교회가 개척한 교회로는 1976년에 양백교회, 1981년에 흥안교회 지곡교회등 세 교회가 있고 해외 선교에도 적극 협력하고 있다.
두번째로는 포항시 죽도 2동 610의 2번지에 있는 포항 중앙교회(中央敎會)인데, 이 교회 역시 해방 직후 1947년 10월 5일 당시 감리교 목사였던 방상식이 일제의 신사를 접수하여 시작한 교회인데 방 목사는 그의 장인 오중근과 장모 정용순의 협력을 얻어 같은 동네의 최치봉 양산연 유병선 등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경동노회로부터 포항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지교회 설립허가를 받았고 1949년부터 4월부터 정철수 목사 1950년 4월부터 김우일 목사, 1951년부터 오준성 전도사가 시무하였는데 오전도사가 195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아 이 교회 시무목사로 봉직하였고, 1952년 3월 3일 이 교회로는 처음으로 정진률, 이남덕 양씨가 장로장립을 받음으로 설립이후 처음 당회가 조직되었다. 이 교회 역시 10여년 동안은 큰 발전없이 지내오던 중 한때 초기 신자였던 최치봉으로 인해 교회가 둘로 나뉘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김우일 목사 부임 후 정용순 집사의 기도와 노력에 의해 원만하게 해결이 되어 하나가 되었고 1954년 2월28일 박창근 목사가 부임하므로 교회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일본 신사의 땅 600평을 당국으로부터 불하 받아 그가 시무한 4년 동안에 새 예배당을 건축해 포항시내에서 손꼽히는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현재의 교세를 보면 대지가 1,232평에다 연 건평 1,350여평의 예배당에 주일 아침 예배 출석인이 약 800명이나 된다.(한국영남교회사, 전성천편 p.330-332).
세 번째로 송도교회(松島敎會)인데 이 교회는 이름에 풍기는 의미로는 어느 섬에 있는 교회인 것 같지만 실은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포항시 송도동 433의1에 있다. 이 교회 설립 역사를 보면 6․25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1952년 12월 2일에 이루어진 교회이다. 송도교회는 전란의 산물로 태어났으나 처음에는 작은 항구 도시의 형편과 함께 발전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68년 군사 혁명정부의 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대규모 포항 종합 제철 공장이 들어옴과 더불어 권무호 목사가 1969년에 부임해 옴으로 새로운 교회 부흥과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교회의 새 예배당 신축 당시에 있었던 이러한 숨은 이야기가 있다. 신자수가 증가됨으로 새 예배당을 지어야 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김두탁 최재원 박길수 세 장로가 여러 날을 두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예배당 부지를 물색하고 있는데, 그들이 지목하고 있는 땅이 불신자인 이정용(당시 제5토지개발주식회사) 사장의 소유 땅이었다. 세분의 장로가 기도로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이정용씨를 만나 토지 매입 교섭을 했는데 뜻밖에도 토지개발회사 쪽에서 공공부지로 교회를 세우겠다면 무상으로 기부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놀라운 기도의 기적을 체험하게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되자 교섭 위원이었던 장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자들도 크게 감동을 받아 새 예배당 신축 헌금에 적극 동참하는 계기가 되어 이 큰 일을 성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신자 유철부 성도는 남의 셋방에 사는 형편이었음에도 거금 일백만원을 바치는 일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당시 송도교회의 단합과 일치된 분위기가 어떠했던가를 가늠케 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1973년 7월19일 예배당 신축 기공 예배를 드리고 착공 1백일 만인 1973년 10월28일에 완공하여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드림으로 포항지역에 복음화의 기지로 발돋움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교세를 보면 대지 587평에다 건평 350평의 예배당에 신도수 1,756명에 이르고 있으며 주일 아침 예배 평균 출석인원이 800여명에 이르는 포항 지방의 굴지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본 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목사 1명 신학생 4명이 있으며 개척교회로는 영덕군 축산면 도곡교회가 있으며 해외 선교 협력 사업으로는 일본 대판시에 있는 금복교회(今福敎會)를 시무하고 있는 선교사 이병구(李炳球) 목사를 돕고 있다. (한국 영남교회사 전성천편 p. 333-4)
포항시내에 있는 교회로 또 한 교회는 포항시 해도동 430의 20번지에 있는 포항 동부교회(東部敎會)이다. 이 교회는 포항 시내에 있는 교회 가운데 비교적 역사 있는 교회로 알려진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교회는 1923년 10월 1일 유재기 전도사에 의해 괴동교회에서 분립하여 나가 세운 교회인데 처음에는 송내교회(松川敎會)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936년 오기주(吳基周) 장로의 주선으로 전 교인들이 헌금하여 새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나 1939년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44년까지 일제의 극한 압제와 박해로 강제 폐교흫 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일제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준비한 재목(材木)으로 송내면 경방단(警放團) 회관을 세운지 불과 1년 만에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예배당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1946년 봄에 김광수(金光洙) 목사의 주선으로 빼앗겼던 예배당 재목을 다시 찾아와 빈터 위에 예배당 건물을 다시 지었다. 1948년 1월 14일 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식과 허신술(許信述)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여 교회 설립 후 처음으로 당회(堂會)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하여 근근히 교회가 이어오던 중 6․25 전쟁을 맞이하여 교회는 발전할 여력이 없었고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1968년 이곳에 포항 종합제철공장(綜合製鐵工場)이 들어섬과 함께 급작스런 인구 증가로 교회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예배당이 있는 곳에 제철공장이 들어오게 되어 포항시 해도동에 새로 땅을 구입하여 당시 동촌교회 철거민 교인 일부와 함께 예배당을 건축하여 교회 이름을 발전적으로 송내교회에서 포항 동부교회(東部敎會)로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교회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1978년 현 위치에 34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연건평 398평에 이르는 아름다운 성전을 기공 1980년 8월 24일 완공하여 1984년 10월 21일 감격적인 헌당예배와 함께 김석이 장로 원로장로 추대식을 성대히 거행함으로 새로운 선교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그 동안 교회 부지도 확장되어 현재는 대지가 530평에 교회당이 연건평 400평에 교인수는 2,279명에 주일예배 평균 출석수 940명에 이르는 대교회로 성장하였다. 본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배광식 김달근 박승렬 등 3명의 목사가 있다.
시내에 있는 교회로서 이보다 앞서 설립된 교회로사는 대송교회(大松敎會)가 있는데 이 교회는 1907년 미국 북장로교선교부 대구지부 소속 맹의와(孟義窩, Edwin F. Mcfarland) 선교사가 영일군 대송면 장흥리에 세웠는데 당시의 교회 이름이 장흥교회(長興敎會)였다. 1915년 괴동에 사는 유정동 김병진 장옥분 이부감 등이 장흥교회에 출석하여 세례교인(洗禮敎人)이 되었으며 교회 봉사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1922년 큰 장마로 인하여 괴동에서 장흥까지 나가는데 많은 불편이 있었다. 동년 11월에 이르러서는 이부갑(李富甲)을 중심으로 하여 괴동 출신 교우 30여명과 합력하여 괴동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농촌교회로서 비교적 건실하게 성장해 왔으나 일제(一齊)의 박해로 어려움이 많았다. 해방과 6․25라는 혼란과 과도기를 거쳐 1969년 5월 5일 포항 종합제철 연관단지 부지 조성사업으로 인하여 장흥교회와 괴동교회가 다 함께 이전해야 하는 형편이 되어 두 교회가 협의한 끝에 양교회가 합하여 새로이 이룩한 교회가 오늘의 대송교회(大松敎會)이다. 대송면 제내2동에 대지 150평에 건평 34평의 교회 건물과 사택 1동을 지어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1983년 5월 29일에는 연차적인 계획하에 연건평 270평의 새 예배당 건축을 시작 현재 본당 1층 103평을 먼저 준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렸고, 현재의 교세는 교인 총수 1,000명에 주일예배 평균 출석 28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본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김해덕 최조웅 김상해 김재진 목사 등이 있다.(한국영남교회사 전성펀편, P.335)
포항 시외에 산재하고(영일군) 있는 몇 개 교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흥해읍 옥성1동 145번지에 있는 흥해교회(興海敎會)를 보면 현재 흥해읍내에 있는 흥해교회와 흥해중앙교회 및 흥해제일교회가 있는데 이 세 교회의 뿌리는 해방 전까지는 모두가 흥해교회였다. 일제 당시만 해도 흥해교회는 포항제일교회와 함께 영일군내에서는 가장 유력한 교세를 자랑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에서 한국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해 나감으로 은혜롭던 교회가 소란해졌고 거기에다가 업치고 덥친 격으로 6․25동란으로 인하여 예배당이 불탐과 더불어 이 지역 전체가 초토화됨으로 교회는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지금은 위의 세 교회 모두가 자립하고 있으나 그 중에도 흥해중앙이 가장 유력하고 흥해교회가 비교적 약한 편에 속한다. 흥해교회가 셋으로 나누어지기 전 흥해교회 연혁을 먼저 살펴보면, “延日郡 興海敎會가 성립하다. 先是에 金相淵이 大邱에 旅行하얏다가 福音을 듯고 믿은 後 傳道함으로 信從者 多한지라. 捐補하야 禮拜堂을 新築하고 助師 徐聖五가 視務하니라.”(조선장로회사기 상, P.136)고 하였다. 이는 공식 기록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의 전도사업이 1905년경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복음의 열매인 신자를 얻게 된 것은 그러부터 2년 만의 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대도교회와 포항교회가 먼저 시작된 후 흥해교회는 전도사 이기홍의 활동으로 이 마을 농부 이춘옥 김균옥 김선옥 등 세 사람의 신자를 얻게 되어 김균옥의 私家에서 첫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그 날이 1907년 8월 7일이었다. 그 후 일제의 심한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포항교회(오늘의 포항제일교회)와 함께 굳건하게 믿음을 지켰다. 이러했던 교회가 해방 후 소위 기장(基長) 등으로 흥해제일이 분립되었고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 모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제44쇠 총회의 분열로 흥해교회가 흥해중앙교회로 분립되는 아픔을 겪고 오늘에 이르렀다. 어쨌던 오늘에 와서 세 교회가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자립해 가고 있다.(한국영남교회사, 전성천편, P.337)
여기에서는 주로 포항(浦項)을 둘러싸고 있는 영일군(迎日郡) 지역에 있는 교회 발전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먼저 영일군 송라면 대전리 318번지에 있는 대전교회(大田敎會)를 보면, 청년 이익호가 경성(京城)에 유학가서 전도받아 처음에는 감리교(監理敎)에 입신하였는데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에 이성호 등 가족과 함께 예배드린 것이 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날이 1913년 3월 2일이었는데, 3.1 독립만세 운동으로 한창 나라가 시끄러운 때였다. 1914년 8월에는 이익호가 초대 영수(領袖)로 피선 되었으며, 1914년 9월 21일에는 초가삼간 한 채를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정하고 그후 안 화종 이용하 양씨가 장로장립을 받았다. 초대교인으로는 안덕환 안천종 안치종 김진수 등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충성을 다했으며, 일제시에는 안학용 이재석등이 교회를 지키며 신앙을 지켜 나왔다. 1987년 대지 3백평에 연건평 68평 규모의 새 성전을 지어 지역사회의 복음화에 이바지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안화종, 안학용, 안승락, 이학모, 안광성 등이 있다. (浦項老獪20년사(年史), 이척우편 포항노회 1990,p.142.한국영남교회사(韓國嶺南敎會史 전성천편 같은책p338))
비슷한 때에 세워진 또 한 교회는 영일군 청하면 덕성리 296번지에 있는 청하제일교회(淸河第一敎會)이다. 이 교회가 세원 진 초기의 모습을 보면 1914년 4월5일 덕성리 155의 3번지 가정집에서 오용관 영수와 정우용씨 외 5~6명의 초신자들이 함께 창립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1915년 2월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심령대부흥성회를 개최하였는데,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위한 특별헌금을 해 대지 60여평을 구입하여 교인들의 노력봉사로 그 위에다가 20평 규모의 초가(草家) 예배당(禮拜堂)을 건축하였다.
1929년 정우용이 장로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었으며, 1950년에 변성학이 장로장립하게 되어 당회가 보강되었고 1958년 8월에는 구 예배당을 매각하고 덕성리 296번지에 1백50여평의 대지를 새로 구입하여 50평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1987년 11월28일 1백50평 규모의 붉은 벽돌조 현대식 예배당을 다시 건축, 오늘에 이르렀다. 같은 청하면 유계동 466번지에 있는 유계교회(兪谿敎會)가 있는데 이 교회의 성립된 과정을 살펴보면 1917년 2월 이상호, 이성호, 양인이 이웃에 있는 대전교회에 나가면서 예수를 믿고, 시작한 교회인데 이들이 힘을 합쳐 이듬해 1918년 3월1일 유계리 김금호씨의 초가(草家三間)를 26원에 매입하여 그 자리에 초가 삼간을 새로 신축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유계교회가 시작되었다. 1931년 2월에는 교회가 부흥되어 그 예배당을 배나 되는 6간으로 증축하기에 이르렀고, 1937년 5월7일 이상호를 장로 장립하여 당회가 처음 조직되었다. 1964년 5월17일 유계리 446번지에 새 교회를 건축하여 자리를 옮겼으며 1979년 12월 29일 본동 471번지에 건평 64평규모의 아담한 현대식 예배당을 세 번째로 신축하여 봉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으로는 영일군 신광면 토정2리 208번지에 있는 신광교회(新光敎會)가 있는데 이 신광교회는 일제 말엽에 모정동의 권천금, 이분선, 김유곤, 김용도 권유암 등과 흥곡동 마조리의 정인식이 흥해교회(興海敎會)로 래왕 하면서 신앙생활에 힘썼다. 한번은 주일(主日)날 자기 논에 물이 들어와 모내기를 해야 할 차례인데도 이를 거절하고 예배당에 갔는데, 그날 저녁때 소낙비가 내려 논에 물이 가득 채워진 것을 동래 사람들이 보고, 하는 말이 저 사람들은 하늘에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농이 섞인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부인 집사외 40여명이 신광교회 설립을 결의하여 1946년 토정동에 건평20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착실하게 성장해 갔다. 1950년 12월 경북노회(慶北老會)로부터 장로 2인 허락을 받아 정인식, 김용도 양씨가 1953년 4월 초대장로로 장립받고 시무하게 되었다. (浦項老獪 20年史 이척우편 같은책 p.135) 1954년 박석규 목사가 교역자로 부임 경동노회(慶東老會) 안에서는 최초로 중등교육기관인 성경구락부(聖經俱樂部)를 교회안에 설립하여 교사에 김광호와 이북출신 상이군인이었던 김제건을 채용하여 박석규 강귀란 부부는 형제처럼 그들을 돌보며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배회하고 노는 청소년들을 모아 성경과 함께 중등과정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교회의 대사회 이바지는 말할것도 없고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모였던 강귀란은 불교인이었던 모친 손구만에게 전도한 결과 어머니뿐만 아니라 큰오빠 강대하, 박귀선 부부까지 믿고 기독교인이 되는 일도 있었다. 이교회 출신 교여자로는 김유곤, 김명하, 최윤해, 김하률 목사가 있다. 또 한 교회는 신광교회와 거리관계로 같은 신광면 마조리에 세워진 마조교회(馬助敎會)가 있는데, 이교회는 1952년 정인식 이범영 사공규 김중선 김운선 박위득 오순악 등이 중심이 되어 마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 40평의 예배당을 마련 하였으며,이곳에서도 성경구락부(聖經俱樂部)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와 계몽운동을 펼쳐나가면서 교회의 기틀을 다져갔다. 이 교회 출신 교역자로는 공병옥 목사 정희율전도사, 정희백 구세군사관들이 있다. 같은면 기일동에도 기일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954년 5월20일 박석규 조사의 부친 박두만(朴斗萬) 장로의 인도로 최분출씨 댁에서 강용준, 편춘선, 편창곤, 강용준, 박길수씨 등이 모여 예배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1958년 기일동 192의 3번지의 가정집을 이천우가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삼고, 박석해 조사가 시무하였다. 이곳에서도 성경구락부를 개설하여 무산아동 2백여명에게 종교교육과 함께 초등교육과 과정을 무료로 실시하여 전도의 문을 열었다. (한국영남교회사 전성천편, 같은책 p.340. 포항노회 20년사 이척우편 같은책 p.140)
영일군 기계면 내단 1리 185번지에 있는 내단교회(內端敎會)의 형성과정을 보면 1911년 안강읍 창말교회로 출석하던 이장영(李章榮), 신기석등이 주동이 되어 그들이 살고있는 기계면 내단동에 초가 3간을 얻어 예배처소로 삼음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그 후 약 20여년 동안 큰 발전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꾸준한 노력으로 이기영, 유영희, 양만찬, 김태조, 김성대, 오기주, 박두만, 유수택, 도해선, 이도수 등의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지방교회로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신기석 가족들이 오랫동안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는데 1930년 그가 작고하자 그의 유족 전체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었다. 1929년 박성식 영수(領袖)가 20여평의 건축을 도맡아 이룩했고, 또 이무렵 오랫동안 기독교를 반대하던 박두만이 부인 이화당과 함께 기독교에 귀의 신자가 되었다. 이 교회는 동일서당(東一書堂)이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오상태 선생이 당시 보통학교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종교교육과 학교교육을 시키다가 후 (1941년)에는 박석규 선생이 가르치던 중 교회가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이웃교회와 병합되므로 폐교되고 말았으나 그동안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1942년에는 이 교회 교인 일부가 화봉교회로, 다른 일부는 기계교회로 옮겨 다니게 되어 그후 13년동안 문을 닫게 되었다. 1956년 3월 이기영 집사가 중심이 되어 20평 규모의 기와집 예배당을 신축하여 다시 교회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65년 5월 26일 신기언 집사가 장로가 되어 조직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 교세가 불어나므로 1978년 12월7일 50여평의 현 예배당을 신축 헌당하였다. 이로부터 3년후인 1981년엔 정태현 이성형 장로장립과 정재현 황용수 최상각 집사 안수와 오경득 황금출의 권사취임식을 계기로 확실한 성장의 토대를 구축했다. 출신 교역자로는 박석규, 이주삼 목사와 정원식 전도사가 있다. 다음으로 영일군 기계면 현내리 473-2에 있는 기계제일교회의 설립과장을 보면 당시에 세도가 당당했던 이진사(李進士)댁이 있던 기계 현내동에는 월성이씨(月城李氏)만 400여호나 살고 있었고 그래서 이 일대에는 반상사상(班常思想)이 짙어 유림세력이 강한데다가 온갖 구습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고장이라고 기독교복음이 전파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가 설수 없었을 뿐 만 아니라, 전도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마을에 김진영, 이성근, 하원일, 최복만, 정노미, 최순례 등 교인은 있어도 예배처소와 설교자가 없어 안두화 (Rev. Edward A. Adams. 安斗華)선교사가 박두만을 영수로 임명하여 내단교회에서 기계교회로 파송하였다. 이 마을에 전도를 계획한 이는 구학문(漢學)에 능하고 반촌풍습에 익숙한 몇몇 중견층 신자들이었다. 즉 박두만, 심능한과, 청년으로 최복만, 도해선 등이 자주 이 마을을 드나들면서 직접간접으로 복음전도에 힘쓰게 되어 1935년 무렵에 이진사댁(李進士 宅) 손계퇴와 그 외에 이사곡, 이보문, 이남우가 믿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하여 교회를 설립하게 된것이 오늘의 기계제일교회의 전신 기계교회였다. 이들은 교회를 건축할려고 하였으나 필요한 자금조달이 어려워 궁리 끝에 당시 죽장면 가사에 있었던 기도실(祈禱室)을 헐어서 이곳에 옮겨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큰 양반 동리에 초라한 예배당을 지어서는 여러모로 불리할것 같아 이들은 각지로 모금운동을 계획했다. 특히 박두만 영수는 김두환 집사의 협력을 얻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박두만 영수는 김두환 집사의 자전거뒤에 타고 지방순회를 하며 모금을 했다. 김두환 집사는 해방직후 교회를 지키다가 좌익들에게 피살 순교자가 되었다. 이들은 1년여의 노력으로 1935년 말에 이 마을 한복판에 30여평의 큼직한 와가 예배당을 세우게 되었으며 이러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선에 있는 많은 교회들을 일제당국은 통폐합하기로 정책을 세웠다. 기계면에서도 기계교회를 폐쇠하고 화봉교회로 병합할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봉직하고 있던 전도사가 강압에 못이겨 승인서에 서명한 후에도 박두만 영수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여 많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일로 인하여 여러날 논란이 계속될 때 이 교회의 무보수 여전도사였던 이종교씨가 지혜를 내어 “이 집은 원래 개인 소유였소, 그러므로 이 집을 절대 헐 수는 없소”라고 강하게 주장하여 교회폐합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이 전도사(傳道師)는 월성이씨였고 온 동리가 그를 옹호하여 도왔기 때문에 일본 경찰당국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해방이 되자 이마을 이진사댁 손부 이맹규(향단댁)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이 교인이 되기에 이르렀고, 적지 않은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 후손 중에 이척우 목사, 이춘우 장로, 이상정 장로, 이정자 전도사, 등이 있다. 끝으로 포항 지방에 전래된 성결교회(聖潔敎會)의 발전과정을 살펴 보도록 하자. 장로교(長老敎)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 3대 개신교파(改新敎派)중 한 교파로 발돋움한 성결교로서 경북지방에서는 교세가 약한 편이다. 1993년에 간행한 [포항성결교(浦項聖潔敎會]요람에 의하면 “1932년 8월6일 오태상 전도사와 18명의 성도가 포항지역에 성결교회(聖潔敎會)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에 기도로 포항시 대흥동(大興洞)에 포항교회(浦項敎會)를 세워 복음을 전한 것이 포항 교회의 시작이다.”(포항성결교회 요람, 박상영편, 1993년, p.21-22).라고 적고 있다.
1915년 6월 경주 성결교회(聖潔敎會)가 설립된 이래 실로 17년 만에 뒤늦게나마 이곳 포항 땅에 성결의 복음 씨앗이 떨어진 것이다. 1937년 5월 7일 5년 만에 죽도동에 24평 성전을 지어 이전하기에 이르렀고, 그해 7월 20일 설립자 오태상 전도사가 사임하였다. 이어서 양이록(梁以祿) 전도사, 유도택 전도사를 거쳐 1943년 9월 박장동 전도사가 시무할 때 일제 탄압이 치열하게 되어 그해 9월 10일 교회를 떠나게 되고 성결교회는 재림 교리가 일본 국시에 어긋난다고 몰아붙여 같은 12월 29일에 성결교단이 강제 해체됨과 아울러 복음의 어린 새싹이 미쳐 꽃도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교회의 문을 닫고 말았다.
1946년 11월 20일 광복 이듬해 가을 교우 박정조씨 댁에 모여 포항교회 재건예배를 드림으로 포항지방의 성결교회가 재출발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6월 정기범 전도사가 본교회에 부임 교회와 교인들을 정비해 나갔다. 1951년 3월 16일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다시 상원동 505번지에 대지 81평을 구입하여 교회를 이전해 발전의 발판을 구축했다. 1954년 5월 6일 정재학 목사가 초대 목사로 부임하였고, 그해 5월 6일 정재학 목사 위임식 및 박정조 김능관 양씨의 장로장립식을 거행함으로 처음 당회가 조직되어 이때로부토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1961년 5월 26일 손상기 전도사가 시무할 때 대흥동 548번지에 대지 95평을 새로 구입하여 1962년 5월 20일 55평의 새성전을 신축하였으며 1969년 10월 신일웅 목사 시절 흥해(興海)에 교회 묘지용으로 산야 5,200평을 구입하였다. 1972년 4월 20일 박정광 장로장립 및 3명의 권사취임이 있었으며, 1977년 10월 박상영 목사가 부임함으로 본격적인 성결교회의 동해안 시대가 열리었다.
1979년 8월 30일 교세의 신장으로 성전 증축공사가 이루어졌고, 그해 10월 9일 이태호 장문현 장로장립식과 4명의 권사취임이 이루어졌으며, 1981년 11월 8일 현대식 새성전 신축부지로 조옥근 집사가 300평 대지를 교회에 헌납함으로 포항성경교회의 새시대가 열려지게 되었다. 1982년 2월 21일 성전 신축부지로 200평을 더 구입하였으며 그해 3월 1일 역사적인 성전 신축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 포항시 대도동 63의 5번지에 새성전을 마련 예배당을 이전하였으며 11월 27일 교회 설립 50년 희년 기념예배 및 성전 봉헌식과 함께 조옥근씨 장로장립식을 거행하여 포항지방에 성결교회의 전진기지로 성결의 깃발을 올릴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1990년 5월 22일 박상영 목사 위임식과 이태호 장로 명예장로 추대식이 있었으며, 1992년 10월 8일 교회창립 60주년 기념예배를 드림으로 포항성경교회의 동해안 시대를 열었다. 현재의 교세는 6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다.
포항성결교회를 모체로 하여 이 지방에 설립된 교회를 살펴보면,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가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있는 장사리교회인데(정찬선 목사 시무), 이 교회는 1961년 9월 14일 최순화 전도사에 의해 시작되어 어촌교회로서의 선교적인 사명을 다해가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교단내 교역자 수양회 장소로, 혹은 초교파적으로 수양회로 장소로 대여하여 교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993년도의 표어는 <성결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라는 목표 아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전도에 힘쓰고 있다.
다음으로는 포항시 환호동 495번지에 설립된 사랑의 교회인데(오종길 목사 시무), 이 교회는 1985년 6월 27일 창립되었다. 현재 오종길 목사의 인도로 <잃은 양을 찾읍시다>라는 목표로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을 다하고 있다.
또 포항시 송도동 394의 3번지에 있는 영일교회가(이강열 목사 시무) 있는데, 이 교회는 같은 해 10월 21일에 설립되었다.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는 교회 목표를 정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자 힘쓰고 있으며 1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발전해 가고 있다.(경북지방회 제44회 1993년, 동해 감찰회 보고서 P.79)
세 번째로는 비교적 최근에 설립된 몇 교회들이 있는데 먼저 포항시 두호동 253호에 1988년 12월 12일에 설립된 대흥교회와(안석철 목사 시무) 포항시 창포동 611의 8번지에 1990년 2월 12일에 설립된 영광교회(이상배 목사 시무), 포항시 상도동 18의 200번지에 1991년 2월 19일 설립된 상도교회(송정용 목사 시무)가 있고, 포항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영일군 흥해읍 남성1동 318의 6번지에 1992년 12월 3일에 흥해교회(유승대 전도사 시무)가 설립되었으며, 포항시 대흥동 548번지에 1992년 12월 17일에 설립된 늘푸른교회(김완식 전도사 시무)와 포항시 학잠동 111의 20번지에 1993년 11월 2일에 설립된 동해교회(최재곤 목사 시무)가 있는데 이 교회는 주변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전도에 힘쓰고 있으며, 1994년 12월 12일에는 경북지방회의 동해감찰회에서 오천동에 오천성광교회(이성남 전도사 시무)를 개척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북지방회 제44회 동해감찰회 보고서 1993년, P.80-81 참고)
장로교 선교구역이었던 포항지역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사중복음의 기치를 내건 성결교회가 21세기를 맞이하는 환태평양 시대의 중심이 될 대한민국 동해안의 요충지 포항에 우후죽순처럼 이곳 저곳에 성결교회가 설립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장로교회들과 함께 선교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경계할 일이 아니라 시대적(時代的)인 소명이라고 생각된다. 성결교회와 함께 신생교회로서 침례교회와 구세군이 포항지방에서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이미 설립되었거나 개척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모든 교단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