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선계경 제2권
1.5. 진실의품(眞實義品)
1) 진실의의 두 가지(1)
어떤 것을 진실의(眞實義)라 하는가?
진실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성(法性)이고, 둘째는 법등(法等)이다.
2) 진실의의 네 가지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류포(世流布)이고, 둘째는 방편유포(方便流布)이며, 셋째는 정번뇌장(淨煩惱障)이고, 넷째는 정지혜장(淨智慧障)이다.
① 세류포
어떤 것을 세류포라 하는가?
세간의 법은 그 이름을 같이한다. 즉 중생이 땅을 보면 참으로 그것이 땅인 줄로 알며 결코 그것을 불[火]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은 진실로 불로 여길 뿐 땅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과 바람,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의복ㆍ음식ㆍ영락(瓔珞)ㆍ기물(器物)ㆍ기악(伎樂)ㆍ명암ㆍ남녀ㆍ사택(舍宅)ㆍ전업(田業)ㆍ고락(苦樂)이 모두 그렇다. 고(苦)는 진실로 고일 뿐 결코 낙(樂)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낙은 진실로 낙일 뿐 결코 고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 하여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한다. 세간의 모든 것은 예로부터 이처럼 이름과 모양이 전해 와서 저절로 아는 것이지 수집(修集)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세류포의 참된 뜻이다.
② 방편유포
어떤 것을 방편유포라 하는가?
예를 들면 세간의 지인(智人)이 먼저 헤아려보고는 다음에 경서(經書)의 내용에 맞추어서 논의하는 것을 방편유포라 한다.
③ 정번뇌장
어떤 것을 정번뇌장이라 하는가?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이 무루지(無漏智)와 무루도(無漏道)로써 번뇌를 깨뜨려 무애지(無碍智)를 얻는데 이것을 정번뇌장이라 한다.
번뇌를 깨뜨리기 때문에 지혜가 밝고 청정하며, 지혜가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신심(身心)에 걸림이 없다.
이것이 정번뇌장의 참된 뜻이다.
④ 정지혜장
다시 진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진실을 사제(四諦)라고 하는데 이른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이다.
이 사제를 보아서 참된 지혜를 얻는 것을 성문ㆍ벽지불이라 한다. 성문ㆍ벽지불은 오음(五陰)을 분별하여 관한다.
그래서 오음을 떠나서는 전혀 아(我)와 아소(我所)를 보지 않으며 12인연을 분관한다.
이 때문에 오음을 떠나서는 중생과 사부(士夫)를 보지 않는데,
이것이 정지혜장의 참된 뜻이다.
만일 지혜가 경계(境界)를 알지 못하면 지장(智長)이라 하며,
능히 지장을 깨뜨리고 경계를 아는 것이 정지혜장이란 이름의 참된 뜻이다.
참된 뜻이란 말하자면 부처님이나 보살이 모든 음입(陰入)ㆍ음계(陰界)를 깊이 보기 때문에, 아(我)는 아가 아니며[無我], 중생은 중생이 아니며, 사부(士夫)는 사부가 아님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정지장(淨智障)이라 한다.
모든 법계(法界)가 선설(宣說)할 수 없는 것임을 보며, 세제(世諦)를 알아 법계를 분별하며, 모든 법계의 진실한 성품을 아는 것을 무승혜(無勝慧)라 한다.
무승혜는 모든 장애를 깨뜨린다.
그래서 정지혜장 진실의라 한다.
3) 진실의의 두 가지(2)
진실의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有)이며, 둘째는 무(無)이다.
① 유(有), 세류포
유(有)는 이른바 세류포라 하는데, 세류포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과,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와 출법(出法)ㆍ멸법(滅法)ㆍ종연생법(從緣生法),
그리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차세(此世)와 타세(他世)의 기간[日月],
견문과 지식으로 얻은 각관(覺觀) 및 수집(修集)ㆍ수지(受持)에서 열반까지이다.
이것을 세류포의 유(有)라 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유란 법성(法性)을 말하는 것이다.
[무(無)]
무(無)는 세류포의 유(有)인 색(色)에서부터 열반까지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므로 무라 하는 것이다.
[유와 무]
중생들이 보기 때문에 유라 하며, 법성(法性)이 본래 없기 때문에 무라 한다.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말씀하신 유와 무는 이름의 진실이다.
진실을 중도(中道)라 하는 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중도이다. 중도를 무상도(無上道)라 한다.
이와 같은 중도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장애를 깨뜨려 없앴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지만,
보살마하살은 아무리 이 같은 중도를 배운다 하더라도 아직도 장애가 남아있기 때문에 일체지란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4) 보살의 지혜는 보리심의 인이다
보살의 지혜는 방편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因)이라 한다.
[보리심과 열반]
어째서인가?
보살마하살이 비록 중도의 지혜를 구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생사상(生死相)과 유ㆍ무ㆍ유포(流布)ㆍ무상불법(無上佛法)을 말하며, 비록 생사 중에 있다 하더라도 역시 능히 생사의 과환(過患)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음에 싫어하거나 뉘우침이 없다.
만일 생사의 과환을 모르는 이라면 번뇌의 맺힘을 풀 수 없으며,
만일 마음에 싫어하는 이라면 중생을 교화하고 불법을 옹호해서 속히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열반을 얻는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중생들을 교화할 수 없는 이라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하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이 생사 중에 있으면서 보리의 도리를 닦으면, 열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열반을 구하지도 않는다.
보살이 만일 열반을 두려워하는 이라면 보리의 도리를 구족하게 장엄할 수 없으며,
또한 무량한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찬탄할 수 없고,
열반이 있는 곳에 대해 믿고 기뻐하여 전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보살은 열반이 있는 곳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선방편ㆍ제일의의 공]
만일 보살이 열반을 구하는 이로서 그 열반을 곧장 얻는다면, 그 얻은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서 불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보살로서 생사의 과환을 깊이 보지 못하고 혹시 이를 싫어해 멀리 하면서 열반을 두려워하거나 열반을 구하거나 한다면, 이를 보살이 선방편(善方便)이 없다고 한다.
만일 보살이 능히 생사의 과환을 깊이 관찰하고 기꺼이 그 안에 처하여 열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이를 보살이 선방편이 있다고 한다.
선방편이란 제일의(第一義)의 공(空)이라고 푼다.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제일의공을 수집한 것을 보살계대방편(菩薩戒大方便)이라 하나니 여래의 무상지(無上智)를 얻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성품을 알다]
만일 이러한 보살계를 수집하여 진실지(眞實智)를 얻으면 모든 법이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음을 지견(知見)해서 모든 법의 성품[性]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법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해서 모든 법을 보매 그 마음이 평등하여 능히 크게 혜시(惠施)한다.
이 혜시의 인연으로 해서 세사(世事)를 잘 아는 것이니, 비록 세사를 배우더라도 마음에 싫어하지 않고 모두를 분명하게 알아서 커다란 염력(念力)을 얻는다.
비록 세사를 알더라도 교만한 마음이 없으니, 언제나 중생에게 인색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가르치고, 공교로운 방편으로 중생에게 세간의 일을 잘 가르친다.
이는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이런 세간의 일에 대해 성실한 마음으로 수집하되, 싫어함이 없다.
만일 중생이 고뇌를 당하는 것을 볼 경우,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증장(增長)시킨다.
보살이 이처럼 선법을 증장하고 교만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중생들에 대하여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보살이 이처럼 지혜를 증장하고 교만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중생들의 온갖 사견(邪見)을 깨뜨린다.
보살이 만일 세간의 삼매와 출세간의 삼매를 얻어서 자신의 덕을 나타내지 않고 남의 공양을 받지 않으면 세간법의 더럽힘을 받지 않는다.
[보살계]
보살이 이때에 무량 공덕을 성취하여 구족하는 것을 보살계라 하며,
보살마하살이 가진 선법이 모두 보리도로 회향(廻向)하는 것을 보살계라 한다.
과거의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모두 보살의 금계를 성취한 데서 연유한다.
현재나 미래의 보살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은 삼세(三世)의 모든 보살의 법을 수지(受持)하여 능히 불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의 도를 수행한다.
보리의 도를 위하기 때문에 신명을 아끼지 않는데, 신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계이다.
신명을 아끼는 이는 결코 보살의 금계를 얻을 수 없으며, 한 푼어치라도 재물을 아까워하는 이는 역시 보살의 금계를 얻을 수 없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몸을 받고 재물을 비축한다.
만일 이 두 가지에 대해 인색한 마음을 가진다면 가짜 보살이지 참된 의미의 보살이 아니다.
보살이 만일 재물과 신명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면, 반드시 알라.
능히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으며,
능히 인욕(忍辱)을 행하며,
능히 진에(瞋恚)와 질투의 마음을 깨뜨려서 세상의 일을 잘 해결하는 방편을 분명히 알고,
능히 중생들이 가진 의심을 깨뜨리고
능히 스스로 보리의 인과를 증장하여 가지고 있는 여러 근[諸根]을 잘 조복해서 네 가지 전도[倒]에 치우치거나 동요되지 않으며,
능히 모든 법의 깊고 깊은 뜻을 풀이하고,
능히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얻어 구족하고,
오통(五通)과 사무애지(四無碍智)를 성취하고,
필경에는 능히 12인연을 보아서 보살의 일자지(一子地)에까지 이르게 되며,
능히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몸을 얻고 크게 자재한 무상열반을 얻어서 방편열반을 잘 열어 보인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는 것은 모두 금계(禁戒)의 인연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보살마하살로서 보살계를 성취하여 구족한 자는 능히 모든 중생을 노복으로 부릴 수 있다.
만일 중생으로부터 발악이나 욕설이나 구타나 겁탈을 당하게 되면 자심(慈心)이 생기고,
만일 중생들의 무거운 번뇌를 보게 되면 연민심이 일어나 중생들의 번뇌를 깨뜨려 주려 한다.
마음을 써서 여러 좋은 방편들을 생각하며, 중생들에 대하여 간사하고 왜곡한 마음이 없이 그 능력에 따라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베풀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미움이나 원한을 갖지 않는다.
중생들의 번뇌나 미움의 마음을 깨뜨리려 하기 때문에 그 방편을 생각하며, 은혜를 알아서 은혜를 생각한다.
구하는 이가 없어도 먼저 알아서 베푼다.
만일 자기가 가진 것을 구하는 자에게 베풀지 않으면 보살의 금계를 성취할 수 없다.
구하는 자가 세 번을 와도 베풀지 않으면 이를 범중(犯重)이라 한다.
범하지 않는 자는 방편으로써 좋은 말로 위로하여 구하는 자로 하여금 원한을 갖지 않도록 한다.
구하는 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난이며, 둘째는 사견(邪見)이다.
가난한 자에게 베풀지 않으면 곧 죄를 얻지만 사견에 대하여 베풀지 않는 것은 범(犯)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범하지 않는 것을 선행이라 한다.
선행의 보살은 법계가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며, 계의 성품[性]을 알고 세류포(世流布)를 안다.
세류포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이다.
[비유(非有)ㆍ비무(非無)]
색에서 열반까지는 진실이라 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 색이란 유(有)도 아니며 무(無)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반까지도 모두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닌 것을 어떻게 진실이라 하겠는가?
비유(非有)란 무엇인가?
중생은 거꾸로 알아서 색을 보고 나[我]라 하며, 열반까지를 모두 잘못 판단하여 나라 한다. 이것을 비유라 하는 것이다.
비무(非無)란 무엇인가?
세류포며, 허광(虛誑)이 아니며, 선설(宣說)할 수 있기 때문에 비무라 한다. 이런 것이기 때문에 비유며 비무다.
법을 말하는 것과 같이 유를 말한다면 한 법 가운데에도 무량한 이름이 상응하며, 이름이 무량하기 때문에 무량한 성품이 있다.
어째서인가? 하나하나의 법 가운데에 무량한 이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량명(無量名)]
어떤 이름을 무량명(無量名)이라 하는가?
예를 들면 색은 빛깔이란 하나의 법이지만, 또한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이고, 거칠고 미세하고, 볼 수 있고 볼 수 없고, 상대가 있고 상대가 없고, 껄끄럽고 매끄럽고, 가볍고 무거운 것 등을 말한다.
이런 이름들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말을 하는데 따라서 있는 것들은 한 법 가운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相)이 있다.
따라서 밝혀 말할 수 있는 것이 실로 무정성(無定性)이다.
말로써 말하기 때문에 세상에 유포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말할 것도 없고 진실성도 없다.
일체의 모든 법이 역시 이와 같다.
가령 색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실성(實性)이 있는 것은 응당 청ㆍ황ㆍ적ㆍ백에서부터 경중에 이르기까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만일 실성이 없다면 아직 유포(流布)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전해질 수 있다고 하겠는가?
유포성(流布性)이 있기 때문이니, 처음 비롯함이 없기 때문에 유포할 수 있다.
아직 색이 없을 때에도 유포가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인연으로 색이 없을 때는 유포하지 않는 것인가?
말하자면 유포가 능히 색성(色性)을 짓는 것이니, 어찌 유포하면서 색의 무량성을 짓지 못하겠는가?
이 때문에 법성(法性)은 선설(宣說)할 수 없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가 역시 이와 같다.
[불법을 멀리 벗어난 두 종류의 중생]
불법을 멀리 벗어난 두 종류의 중생이 있는데, 불제자(佛弟子)가 아니라서 영구히 불법을 잃는 것이다.
첫째는 색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에 진실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세류포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중생은 보살의 금계를 받아 지니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설사 받는다 하더라도 그 받은 것을 스승으로 삼지 못한다면 죄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얻지 못한다고 하는가?
실법(實法)을 비방하여 비법(非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비록 받았다 해도 결코 금계를 얻지 못한다.
만약에 금계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법 안에서 불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멀리 불법을 떠났다고 한다.
보살계란 입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입과 마음이 화합한 뒤에야 얻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중생은 도무지 실심(實心)이 없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만일 색에서 망녕되이 헤아려 집착을 일으킨다면 불법에서 보면 영원히 잃는 것이 된다.
만일 색이 곧 유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를 모든 법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중생은 영구히 불법을 잃는다. 이렇기 때문에 있느니 없느니 하고 선설(宣說)할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만일 오음(五陰)에 의한다면 나와 남[人]과 중생과 사부(士夫)가 있으며,
만일 오음이 없다면 이와 같은 이름들은 유포될 길이 없는 것이다.
색 또한 이와 같다. 색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명자(名字)가 유포된다.
그렇지만 진실의 법에는 유포가 없으며 진실법을 떠나서도 또한 유포가 없다.
어리석은 자가 모든 법이 공(空)하다고 말한다면 큰 죄를 얻는다.
만일 대승경전 속에서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했다고 해도 역시 큰 죄를 얻는다.
대승경전의 뜻을 잘 해석하지 못하고 교만심이 생겨서 내가 잘 해석한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망녕되게 생각한 것을 남들에게 널리 말해도 역시 큰 죄를 얻는다.
만일 모든 법의 법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세상에 유포될 수 있겠는가? 역시 큰 죄를 얻는다.
어째서인가? 모든 법을 비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비방하는 것은 곧 외도(外道)인 부란나(富蘭那) 등의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부란나는 모든 법의 법성이 없다고 했지만 불법 중에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만일 누군가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함께 지내고 함께 논의하면서 보살계를 펼치기에 적합한 이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함께 지내면서 보살계를 말한다면 큰 죄를 얻는다.
어째서인가?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이익되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에서 말하기를,
‘공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어째서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물질[色]을 나[我]라 말하고 나아가 식(識)을 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견(我見)을 가진 이는 불법을 파괴하지 않지만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불법을 영구히 파괴하여 없어지게 한다.
아견을 일으키는 사람은 삼악(三惡)에 이르지 않지만,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널리 남들에게 말하는 이런 사람은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아견을 가진 사람은 삼보(三寶)를 비방하지는 않지만 함부로 공을 말하는 사람은 삼보를 비방한다.
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중생을 속이지 않으며, 실성(實性)을 비방하지 않으며, 법성을 해치지 않으며, 중생을 해치지 않으며, 해탈을 획득해서 남들에게 금계를 훼범(毁犯)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법을 비방하며, 실성(實性)을 이해하지 못하며, 법성(法性)을 이해하지 못하며, 해탈을 방해하며, 여러 중생들과 함께 나쁜 지식(知識)을 짓는다.
자신이 계(戒)를 지키지 못하고 남들에게 금계를 범하라고 가르친다. 언제나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다고 선설(宣說)하기를 즐긴다. 그리하여 여러 중생들의 지옥을 증장(增長)시킨다.
이렇기 때문에 무상불법(無上佛法)을 멀리 떠났다고 하는 것이다.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어떤 것을 공(空)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만일 비구나 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수공(受空)을 믿지 않고 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을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째서인가? 모든 법은 본성이 자공(自空)하여 인연공(因緣空)이 없다고 말하며, 모든 법이 또한 처소(處所)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처소가 없다면 어떻게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을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공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
어떤 것을 참으로 공의 뜻을 이해한다고 하는가?
만일 비구나 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모든 법에 성품이 없다고 하면 이것을 공이라 하며, 법은 또한 공한 것이 아니다 하면 이것을 공을 이해한다고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는 뜻을 해치지 않으며 삼보를 비방하지 않는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서 잘못됨이 없다고 한다.
[바른 이해]
어떤 것이 바른 이해인가?
예를 들어 색(色)을 말하는 색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습과 성품이 없다는 것을 분별하면 이것이 색공(色空)이며,
색이 진실로 세상에 유포했다고 하면 이것이 불공(不空)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색을 말하는 하나의 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이 두 가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법이기도 하고 공이기도 하니, 결코 심중에서 망령되게 헤아려 집착을 일으켜선 안 된다.
이것을 참으로 공의 뜻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에서는 게송[偈]으로 말하였다.
한 법이 많은 이름을 지녔지만
실법(實法) 중에는 없나니
법성(法性)을 잃지 않기 때문에
세간에 유포하여 간다네.
색(色)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색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은 많은 이름도 없으니, 많은 이름이 있는 것을 유포(流布)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잡장(雜藏) 중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유포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고 깨달아 아는 것으로 색명(色名)에서 열반명까지를 유포라 하는데,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끝내 이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유포성(流布性)이 있기에 물들어 집착함이 생긴다.
어째서인가? 무너뜨리고 전도(顚倒)하기 때문이다.
물들어 집착함이 있는 것을 전도라 하지만 여래는 모든 악견(惡見)을 이미 끊었기 때문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는다.
보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며, 물들어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정견(正見)이라 한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가전연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전연아, 나의 제자는 지정(地定)ㆍ수화풍정(水火風定)ㆍ공정(空定)ㆍ식정(識定)ㆍ무소유정(無所有定)ㆍ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계[此世]도 아니고 다른 세계[他世]도 아니며,
해도 아니고 달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며,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취하거나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각(覺)도 아니고 관(觀)도 아닌 것을 선정(禪定)이라 한다.”
[비구가 지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비구가 지정(地定)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비구는 지(地)에 대하여 지상(地相)을 짓지 않으며 각관에 이르기까지 각관상(覺觀相)을 짓지 않는다. 이것을 지정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각관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
만일 비구가 능히 이처럼 선정을 수집(修集)한다면 즉시 여러 하늘ㆍ석천(釋天)ㆍ범천(梵天)과 시방의 모든 부처님 및 대보살의 찬탄을 받는다.
다들 나무대사(南無大士) 나무대사 하지만 나는 도무지 너희가 무슨 선정에 있으며 무슨 선정을 수집하는지 모르겠다.
만일 지상(地相)과 지명(地名)에 물들어 집착한다면, 반드시 알라. 그는 이름이 불수공(不修空)이며,
만일 색(色) 중의 명(名)과 상(相)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름이 수공(修空)으로 유포되기 때문에 지상과 지명을 선설(宣說)한다.
만일 색상과 색명에 물들어 집착하면 증장상(增長相)이라 하며,
색상과 색명을 깨뜨리면 방사상(放捨相)이라 한다.
증장도 방사도 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상(相)을 수집하므로 지정(地定)에서 각관(覺觀)까지를 수행한 비구라 한다.
비구가 만일 이와 같이 선정을 수집하면 실상(實相)이라 한다.
실상이기 때문에 비구는 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법의 성품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비구는 언급하는 것이 없다.
만일 모든 법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말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만일 말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듣는다고 말하는가?
만일 말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법이 선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알 수 있기 때문에 말하여서 유포시키는 것이다.
5) 세류포와 관련된 오류
[세루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생기는 여덟 가지 오류]
어리석은 이는 세류포(世流布)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모든 법에서 여덟 가지의 오류를 일으킨다.
그 첫째는 성류(性謬)이며, 둘째는 분별류(分別謬)이며, 셋째는 취류(聚謬)이며,
넷째는 아류(我謬)이며, 다섯째는 아소류(我所謬)이며,
여섯째는 애류(愛謬)이며, 일곱째는 불애류(不愛謬)이며, 여덟째는 비애비불애류(非愛非不愛謬)이다.
이 여덟 가지 오류 중 처음의 세 가지 오류가 곧 모든 오류의 근본이다.
성(性)에 물들어 집착하고 명(名)에 물들어 집착하여 유포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로부터 전전(展轉)하여 한없는 오류를 일으킨다.
아류와 아소류를 아견(我見)이라 한다.
아견은 다시 제견(諸見)의 근본이 된다.
이 두 가지의 오류는 교만을 따라 생기기 때문에 교만은 제견의 근본이다.
뒤의 세 가지 오류는 삼독(三毒)을 따라 생긴다.
이 여덟 가지 오류가 모든 맺힌 번뇌를 섭취하여 모든 중생을 삼유(三有)에 회전하게 한다.
어떤 것을 성류라 하는가?
만일 색이 색상(色想)을 짓고, 나아가 중(重)이 중상(重想)을 지을 경우 이것을 성류라 한다.
어떤 것을 분별류라 하는가?
만일 색을 분별하여 이것은 색이고 이것은 색이 아니라고 하며, 이것은 볼 수 있고 이것은 볼 수 없다고 하며, 이것은 대(對)가 있고 이것은 대가 없다고 하면 이것을 분별류라 한다.
어떤 것을 취류라 하는가?
만일 색 중에서 나와 중생ㆍ사부(士夫)ㆍ수명(壽命)을 보고, 옥사(屋舍)ㆍ사중(四衆)ㆍ군려(軍旅)ㆍ의식(衣食)을 보고, 연화(蓮華)ㆍ거승(車乘)ㆍ수목(樹木)ㆍ적취(積聚)를 보아, 이런 것들 속에서 각기 하나의 상(相)을 짓는다면 이것을 취류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아류라 하며 아소류라 하는가?
유루(有漏) 중에서 나와 아소를 취하며, 무량세 중에서 항상 나와 아소를 헤아리는데 집착하여 취하면 이것을 아류라 하며 아소류라 한다.
어떤 것을 애류라 하는가?
정물(淨物) 중에서 탐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것을 애류라 한다.
어떤 것을 불애류라 하는가?
부정물(不淨物) 중에서 진에(瞋恚)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것을 불애류라 한다.
어떤 것을 비애비불애류라 하는가?
모든 정물 및 부정물 중에서 탐에(貪恚)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것을 비애비불애류라 한다.
이상이 여덟 가지 오류이다.
[여덟 가지 오류를 알 수 있는 방법]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이 여덟 가지 오류를 알 수 있는가?
네 가지 일을 응당 추구해야 한다.
어떤 것이 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추명(推名)이며, 둘째는 추물(推物)이며, 셋째는 추성(推性)이며, 넷째는 추분별(推分別)이다.
어떤 것을 추명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오직 이름의 이름됨만 알고 이름의 사물을 보지 못하면 이것을 추명이라 한다.
어떤 것을 추물이라 하는가?
오직 그것이 사물이란 것만 알고 그 나머지를 모르면 이것을 추물이라 한다.
어떤 것을 추성이라 하는가?
이름의 유포함을 아는 것을 추성이라 한다.
어떤 것을 추분별이라 하는가?
이름에서 사물을 보지 못하고 사물에서 이름을 보지 못하면 이것을 추분별이라 한다.
6) 보살이 추구하는 것
[이름을 추구하는 까닭]
보살마하살이 어째서 이름을 추구하는가?
이름과 실명(實名)을 알기 때문에 이름을 추구한다.
보살이 체관(諦觀)하는데
만일 색(色)의 이름이 없다면 어떻게 색을 말하며,
만일 색을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색을 관찰하며,
만일 색을 관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이 이름을 알기를 추구한다.
[사물을 추구하는 까닭]
보살이 어째서 사물을 추구하는가?
만일 사물이 없다면 어디에 이 이름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 이름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모든 법의 성품을 알게 된다고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이 사물을 추구한다.
[성품을 추구하는 까닭]
보살이 어째서 성품을 추구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색성(色性)에서부터 나아가 열반성에 이르기까지를 알며, 색유포(色流布)에서부터 나아가 열반유포에 이르기까지를 안다.
어떤 것을 색성을 안다고 말하는가?
이 색성이란 거울 속의 모습ㆍ환술ㆍ변화ㆍ꿈ㆍ그림자ㆍ메아리ㆍ치열할 때의 불꽃 또는 물속의 달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을 성품을 추구한다고 한다.
[분별을 추구하는 까닭]
보살이 어째서 분별을 추구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름을 분별하고, 사물을 분별하고, 성품을 분별하고, 법을 분별하고, 비법(非法)을 분별하고, 유와 무, 시색(是色)과 비색(非色), 가견(可見)과 불가견(不可見)을 분별하면 이것을 분별이라 한다. 분별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이 때문에 보살이 분별을 추구한다.
[팔류를 깨뜨리는 까닭]
보살마하살은 팔류(八謬)를 깨뜨리기 위해 이 네 가지 일을 추구한다.
보살이 어째서 이 팔류를 깨뜨리는가?
팔류는 사견(邪見)을 증장(增長)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사견이 증장하기 때문에 번뇌가 증장하고, 번뇌가 증장하기 때문에 생사가 증장하고, 생사가 증장하기 때문에 십이인연이 증장한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을 수집하면 사견을 끊어 없애고,
사견을 끊어 없애면 번뇌가 없어지고,
번뇌가 없어지면 생사가 없어지고,
생사가 없어지면 십이인연이 멸함을 알고,
십이인연이 멸함을 알면 무상도(無上道)를 닦고,
무상도를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중생들의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오류를 능히 깨뜨리고 중생들이 능히 세류포를 알아서 진실의를 말하도록 가르친다.
만일 중생의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오류를 제거하여 없애면 대열반이라 한다.
능히 현세의 큰 자재함을 얻으며, 크게 신통함을 얻으며, 큰 방편을 얻으며, 큰 선정을 얻으며, 큰 일체지를 얻으며, 퇴전(退轉)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곳을 구하여 얻으므로 이를 대열반이라 한다.
큰 자재함을 얻으면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일을 성취한다.
그 첫째는 마음에 적정(寂靜)함을 얻는 것이며,
둘째는 세간의 일과 출세간의 일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처해 있어도 마음에 걱정이나 번뇌가 없는 것이며,
넷째는 여래의 깊고 깊은 비장(秘藏)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리의 마음을 깨뜨릴 자가 없는 것이다.
[마음의 적정을 얻는 까닭]
보살은 어째서 마음의 적정을 얻는가?
능히 현재 중생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적정을 얻는다.
중생을 조복(調伏)하여 불법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의 일과 출세간의 일을 분명히 알며,
중생으로 하여금 이근(利根)을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나고 죽는 가운데 처해서도 마음에 걱정이나 번뇌가 없으며,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해서 여래의 깊고 깊은 비밀스런 뜻을 받아 지니고 독송해서 분명히 알도록 한다.
법을 비법(非法)이라고 말하면 능히 불법을 더럽히고 멸하며,
범(犯)을 비범(非犯)이라고 말하면 축생의 여덟 가지 부정한 사물을 받는다.
이러한 악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여래의 깊고 깊은 비밀스런 뜻을 받아 지녀 해설한다.
비록 외도(外道)의 미세한 글을 알아서 그 뜻의 취지를 논하여 풀이한다 하더라도 결코 보리의 마음을 깨뜨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은 보살의 보리사(菩提事)를 섭취하는 것으로서
또한 오사(五事)라 하며, 또한 다섯 가지 공덕(功德)이라 한다.
[보리사란]
어떤 것을 보리사라 하는가?
능히 자신을 이익되게 하여 중생을 조복하고,
불법을 수지하여 보살이 닦는 금계(禁戒)를 깨뜨리지 않고,
보리의 마음이 결코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으며,
열심히 닦아 정진해서 사견(邪見)들을 깨뜨리고
삼승(三乘)의 도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을 성취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두 가지를 구족하면 하(下)라 하고,
세 가지를 구족하면 중(中)이라 하고,
네 가지를 구족하면 상(上)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