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당선작]
■대상
노근 露根 / 서소희
햇살이 따갑다. 법당 앞마당에는 연등으로 하늘이 숨겨져 있다. 허공 가득히 만개한 꽃들은 밤의 점촉을 기다리며 하느작거린다. 몇몇의 사람이 꽃에 매달려 있다. 어디 사는 아무개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것이 된 꽃잎에 소망을 지펴 올리는 모양이다.
조롱거리는 오방색의 물결을 따라 나의 시선이 내달린다. 눈앞에 천인단애가 가로막는다. 커다란 돌산의 머리꼭대기는 나무로 무성하고 깎아지른 벼랑 가운데에는 컴컴한 작은 원형이 보인다. 오전이면 빛이 굴 안으로 들어가고, 점심 무렵이면 빛이 비껴나서 내부는 어둠에 잠긴다고 한다. 그곳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경주의 석굴암보다 시대는 앞서지만 발견된 시기가 늦어 ‘제2석굴암’이라고 불린다.
먼저 암벽 밑 참배객을 위한 터에서 절을 올린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자리는 하오의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인해 그야말로 찜질방이다. 석실의 입구로 가는 길은 몇 해 전부터 철문으로 닫아놓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마침 세존탄생일을 축하하며 그 문이 열려 있다. ‘이게 웬 인연인가’ 하는 마음으로 무량수불을 뵙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난간이 있기에 우리는 돌로 조각된 정등각자正等覺者를 친견할 수 있다. 그 고마움이 뭉클한 전류가 되어 가슴속을 찌르며 지나간다.
기암절벽의 자연동굴에 아미타불과 좌우보처로 관음·대세지보살님이 계신다. 가운데 좌정한 여래는 웃음기 없는 엄숙한 얼굴에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고즈넉하니 세속을 응시하는 듯하다. 석가모니께서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당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수인이 한반도에서 쓰인 예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합장을 한다. 주불의 손끝에 반질반질 윤기가 흐른다.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소원을 빌며 복을 받기 위해 묻혀놓은 흔적들이 또 다른 색깔이 되었나 보다. 고요히 삼매에 들었던 무상사는 생일잔치라는 명목을 얻어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당신을 알현하기를 희망하는 중생들이 애처로울 것이다.
낭떠러지 한가운데 위치한 척박한 동굴에서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천인사天人師를 조성했을까. 지금에야 세월이 좋아 무엇이든지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아주 어려운 공사였을 것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곳이 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방팔방에서 기도를 드리러 많은 사람들이 걸음 하리라는 사실을 분명 불사자佛事者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수직의 돌벽에 가로로 뻗은 녹색의 솔가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노근露根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소나무이다. 뿌리를 좁은 바위 속으로 겨우 비집어 넣고 당당히 서 있다. 그 모습이 범상치 않다. 비바람에 묻어 날아온 흙들이 얕은 틈 사이사이에 잡혀서 자그마한 더미가 되어 나무를 보호하는가 보다. 곡예사 같은 모습으로 바위에 의탁해 자신의 몸을 키워 온 소나무는 그 품세가 흔들리는 풍파에도 끄떡없다.
악착같은 삶의 애정과 억척같은 나무의 인고가 오롯이 전해져 온다. 여름날의 타는 듯한 뙤약볕과 겨울날의 매서운 추위를 그 궁핍한 상황에 맡기며 견디어 온 모양이다. 뚜렷한 사계절의 기후는 어린 초목을 더욱 더 강한 생존자로 만들었을 터이다. 여린 뿌리는 수분을 찾아 바위틈을 더듬어 버티고 설 자리를 확보하였다. 부족한 영양분으로 조금은 비틀거리며 꿋꿋하게 자신을 성장시켰나 보다.
드디어 소나무는 확연한 푸르름을 찾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연륜과 경험이 쌓여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흙을 이끼와 함께 공유하며 그 신록이 한층 더 선연하다.
무릇 뿌리란 흙속에 단단히 파묻혀 있어야 하는 것이 이치일 터이다. 주위의 자리가 평탄하고 흙들이 두터우면 뿌리는 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설사 비바람과 사람들의 잦은 발걸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그것은 일부분일 뿐이다. 감추고 있는 부분은 더 깊게, 더 넓게 땅속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노근은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특히나 단단한 벼랑에 위치한 생목은 뿌리의 모양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늘이 내리는 빗물과 기온의 변화로 생긴 이슬로 목마름을 해결하여야만 하는 처지다. 커다란 돌덩이가 뿜어내는 습기를 고마워하며 자존의 설자리를 위해 무단히도 노력해야만 한다. 거기다가 본래의 빛깔도 잃어버리는 법이 없어야 마땅하다.
넓은 대지에 근본을 세우지 못하고 단단한 바위 위에 명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소나무는 그 옛날 설산에서 수행하시던 싯다르타의 화신인 양 생각되어 심장 깊은 곳에서 아리함이 일렁인다. 석가모니와 절벽의 나무는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빛깔을 지켜내었다.
나는 어떠한가. 어쩌면 부족하지도 않은 조건에서 호강에 받힌 푸념을 하며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속의 허영을 속물이라 비웃으면서도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가 하면, 뭇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행동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싫은 사람이 있으면 침을 튀기며 험담하는 장면도 보인다.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색깔을 바꾸는 모습이 부끄럽다. 아마도 항마촉지인과 노근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지켜낸 삶의 진리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나에게 나투신 천공의 설법일 것 같다.
바위에 섰는 솔이 늠연한 것이 반가운지고
풍상은 겪어도 시드는 일 전혀 없다
어찌타 봄빛을 가지고 고칠 줄 모르나니
옛 시인의 노래 속 한 구절처럼 삶 속에 펼쳐지는 풍랑을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위에 우뚝 선 솔에게서 배우고 싶다.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정신을 항마촉지인의 숨은 뜻처럼 지켜가고 싶다. 창공에다 ‘기필코 나의 빛깔을 되찾으리라’ 새김질해 본다. 그리하여 원래의 감추어진 내면이 더 찬란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등 뒤로 순례객들이 늘어난다.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부처님의 상호에도 먹빛이 내린다. 나는 천년의 미소를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온다. 솔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칼을 날린다. 훈훈한 바람이다.
** 항마촉지인은 마군, 즉 악마들을 항복받는 손모양이라는 뜻이다.
■금상
암각화가 들려준 이야기 / 전미라
가을이 깊어간다.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일제히 흩날리는 억새꽃무리, 쑥부쟁이, 해국 등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눈부신 하늘이 비쳤다. 수천 년 세월을 거슬러 선사시대의 유적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길, 가슴이 두근거린다.
흥해 들판을 지날 때 선돌을 찾아보았다. 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은 높이 140cm 폭 85cm의 작은 바위이다. 거대한 바위를 상상했는데 약간 실망스럽다. 선돌의 아랫배가 유달리 불룩한 것이 마치 임신한 여성의 배와 닮았다. 그러고 보니 늘 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봤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조상들의 삶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바닷가를 벗어나 좁은 비포장도로를 달려 신흥리에 이르렀다. 마을 고샅을 돌아 좁은 길로 들어서니 신흥리 오줌바위라는 팻말이 보인다. 마을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자그마한 야산이다. 팻말이 있는 초입에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등성이가 거대한 바위들로 연결되어 있다. 바위는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누워 이곳을 오르내린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선사시대의 유물 중 그 시대의 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암각화가 아닐까?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윷판형 암각화, 별자리 모양, 고누판 등의 모습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고 불길에 휩싸였는지 그 흔적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아득한 선사 시대 그들은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움푹 팬 윷판 모양의 이 그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윷판형 암각화는 한반도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윷놀이 문화가 전래된 시기는 훨씬 이후이다. 또 이렇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윷놀이를 했을 리 없으니 단순한 놀이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길이 35미터에 폭이 4미터나 되는 거대한 윷판을 상상해본다. 윷말 대신 사람들이 직접 가서 앉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손으로 그림을 쓰다듬어본다.
가을 햇살을 받아 바위가 따뜻하다. 맞은편 산자락이 선명하게 보인다. 나지막하게 깔린 산자락 위로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다. 밤이면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아하, 이게 바로 이 그림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아닐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북두칠성의 운행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여름날 맞은 편 하늘에 펼쳐진 별자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거대한 자연의 변화 앞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별자리를 보며 우주의 비밀을 알고자 했나 보다. 그들 삶이 들려준 이야기를 찾아, 먼 후손은 또다시 길을 나선다.
칠포 바닷가 주변의 암각화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20년 전이었다. 강산이 수천 번 바뀔 아득한 세월 동안 흙더미에 깔리고, 잡초에 파묻혀 가슴 속에만 묻어둔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지금부터 3천여 년 전 이 다에 살던 고대인들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그림들을 바위에 새겼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제사장이나 사냥감 등을 새기다가 차츰 기호나 상징으로 나타내었다. 칠포리 일대의 암각화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것이라 한다.
이곳 곤륜산 서북쪽 기슭 암각화군은 규모나 수량 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장 큰 바위면 4곳에 패형, 석검 등의 암각화 56점이 산재되어 있다. 패형 암각화는 아래위는 직선이고 옆이 곡선인데 가운데가 좁고 위아래가 벌어지는 형태이다. 그 사이 구간마다 구멍이 새겨진 똑같은 그림 여섯 개가 꽉 들어차 있다. 아득한 선사 시대 그들은 바위에 이 그림들을 새기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연구에 의하면, 선사시대의 신앙과 생활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주로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내용이라고 한다. 패형이나 단순화된 성기 모양의 그림으로 다산을 기원한다니, 저출산으로 고민인 요즘 우리도 이곳에서 조상들의 제사를 재현해보면 어떨까?
바위 주변 무성한 잡목들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들자 실패 모양의 그림이 한결 도드라진다. 세월 탓에 닳고 허물어졌지만,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보다. 뒷면에도 여러 개의 구멍으로 형태를 표현한 암각화가 있다는데, 내려가 볼 수 없어서 아쉽다.
계곡 주변에 핀 억새도 빛을 받아 은빛 물결을 출렁거린다. 이 억새는 수천 년 동안 피고 지며 암각화를 새긴 이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대부분의 암각화가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바람과 꽃들과 그림만이 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리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결 따라 억새꽃무리들이 일제히 맞은 편 산등성이로 고개를 돌린다. 나그네의 발길도 그곳으로 향한다. 차로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쌍두들에 제단 모양의 바위가 나왔다. 그동안 수풀에 가려져 있던 것이 몇 년 전 산불로 나무가 다 타버린 곳에서 삼천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세상에 드러났다.
사실 곤륜산 서북쪽 암각화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당시 제의가 있을 때면 의식을 집행하는 몇몇 제관들만 곤륜산 암각화에서 제의를 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식을 행하고 축제를 즐겼으리라. 달빛이 환한 바닷가 언덕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평안을 기원했던 이들의 춤사위가 수천 년 이어져 오늘날의 문명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곤륜산 아래 길 모퉁이를 돌자 바닷가 쪽 도로변에 커다란 바위가 눈길을 붙잡는다. 바위는 묵묵히 바다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도 몇 개의 그림이 보인다. 이 비위 뒤편 언덕 중간쯤에 몇 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는 걸 보아, 이 바위도 고인돌로 추정된다고 한다.
잠시 살펴본 후 또 다른 암각화를 찾아 나섰다. 가시덤불과 억새가 우거진 길을 헤치고 한참을 헤매도 좀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각화가 야산이나 계곡 틈에 방치되어 있어 훼손이 심각하다더니, 이제 그 흔적마저 사라지는가 싶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암각화가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이어왔듯이, 다음 세대 수천 년에 이르도록 문화의 향기를 전했으면 좋겠다. 암각화는 오늘도 우리에게 옛 이야기를 속삭인다. <끝>
■금상
지렛대 / 문경희
주산 구릉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관능적이다. 홑 것만 걸친 여인의 몸선 같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산의 굴곡은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젖무덤처럼 봉긋 솟아오른 능과 능은 산이 산을 업은 듯 웅대하고, 능을 감고 도는 황토색 속살은 전인미답의 처녀지처럼 은밀해 보인다. 인간은 유구하되 인간을 품어 안은 자연은 무구하기에 까마득히 사라져 간 한 나라의 역사를 아직도 저리 선연하게 적고 있는가 보다.
역사란 시간의 뼈를 추스르는 일이다. 어제라는, 비활성화된 시간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읽어 내는 작업이랄까. 도도하게 흘러 왔을 세월의 허리께를 무처럼 숭덩 잘라 놓고 그 속에서 흥망성쇠의 지극한 파노라마를 들여다본다. 사라진 왕국을 일으켜 세우고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되살린다. 실존하지 않는 세상은 분명 가상이지만 이러한 작업을 두고 어느 누구도 가상이라 토를 달지 않는 것은 지나간 이들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기왓장 하나, 접시 한 조각의 힘인지도 모른다. 하여, 잠시나마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과거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모 단체에서 주관하는 가야 문화 탐방 길을 따라나선 참이다. 가야의 옛터를 두르고 그 후예로 살고 있으면서도 막상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실상을 떨쳐 낼 기회라 싶었다.
아라가야의 고장인 함안을 거쳐,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에 도착했다. 낙동강의 지류를 낀 비옥한 토지 위에 건국된 대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나름의 시대를 야심 차게 구가했던 철의 왕국이다. 그런들, 야로, 즉 쇠를 불리는 화로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 아직도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국가의 면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료조차 변변치 않은 탓에 신라에 편입되기 전의 오백여 년에 이르는 역사는 세월 속으로 밀봉되어버린 지경이란다. 실상을 증명하듯 대가야박물관과 주변의 고분군만이 그들의 오랜 역사를 담담히 쓰고 있다. 승자의 역사는 찬란한 반면 패자는 늘 승자의 그림자에 묻혀버리기 마련인 냉엄한 이치를 또 한 번 읽는다.
왕릉 전시관에 들었다. 규모나 꺼묻거리의 정도로 볼 때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위계(位階)를 가진 왕릉으로 추정된다는 지산동 44호 고분을 고스란히 복원해 놓은 곳이라니 죽어 넘는다는 이승의 문턱을 살아서 넘어 보는 셈이다. 땅 위의 영광을 땅속으로 대물림하듯, 무덤의 주인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과 가까이 거느리던 사람들까지 생사를 같이했단다. 죽음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를 구하기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고 보면 사십 명 이상의 순장자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는 무덤의 주인은 어쨌거나 대단한 사람이었던 게 틀림없다. 깔딱, 숨줄만 놓으면 될 것을 과외의 행장 탓에 지엄하기로 자자한 저승길이 족히 한나절은 지체되었을 법하다.
그런들 삶의 끝자락에서 맞닥트리는 세상은 입문의 절차가 꽤나 까다로웠던가 보다. 몸 뒤짐을 하듯 부도, 권력도, 지위도 추려내고 오로지 세상으로 출(出)하던 모습 그대로의 귀환만을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공수래공수거의 지엄한 계율을 그도 어쩌지 못했던지 사람은 간 곳 없고 바리바리 꾸려간 행장만 덩그러니 주인의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죽음만이 영원합니다.’
능선을 따라 200여 기의 크고 작은 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지산동 고분군은 버스 속에서 인솔자가 누누이 강조하던 죽음이라는 추상명사가 추상의 옷을 벗어 버리는 곳이다.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거대 묘의 군단을 보면 죽음이란 단연코 실제상황이다. 이 순간, 삶은 낭자한 죽음의 완연한 보색이며 지극한 정(靜)의 세계를 떨치는 소리요, 몸짓이다. 역사란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삶과 죽음, 생과 멸의 두 극점이 맞물리며 써내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터벅터벅 고분군을 들어서자 사방 낯익은 필치가 화폭처럼 펼쳐진다. 평범한 여인들의 나신을 과하리만큼 풍성한 곡선으로 그려 내었던 르느와르. 세상에 존재하는 선이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는 듯 사람도, 사물도 부드러운 곡각(曲角)의 조화 속에 가두어 버린 그의 손끝을 따라 내 안의 모서리도 얼마간은 지워지는 듯했다. 그런 르느와르의 나부(裸婦)들을 대가야의 역사가 스며 있는 엄숙한 터에서 읽는다면 불경의 죄로 엄히 다스릴까마는. ‘그림 속에서 가난한 자는 없다.’는 것이 르느와르의 지론이라면 이미 세상의 모든 잣대가 무의미해지는 이 공간이야말로 그를 읽어 내리기에 적격이 아니랴.
시끌벅적한 세상 소리들이 비켜 간 절해고도이듯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오래된 묵정밭처럼 기억에서 지워져 가는 일국의 처지를 대변하며 개망초가 무성한 봉분 위로 무심한 바람만 나지막이 깔린다. 어느 시인은 개망초를 두고 ‘아름다운 굴욕으로 내일을 산다.’라고 읊었으니 무너진 왕국에 대한 조문으로 이만한 꽃도 없지 싶다.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지워지는 일만 남았다 하더라도 대자연은 저렇듯 잊지 않고 철마다 꽃을 피워 그들의 깊은 잠을 위무해 주고 있으니 무작정 서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시간을 에돌아 먼 어제와 어제의 사람들을 만나본 오늘. 역사의 깊이가 한층 살갑게 다가온다. 강물처럼 시야를 벗어나 멀리 흘러가 버렸다고 해도 과거란 언제나 간단치 않은 현재를 든든히 괴는 지렛대가 아니던가.
■은상
나는 황룡사지를 간다
나는 경주의 황룡사지를 가고 가고 또 간다. 잔디 파릇해지고 유채꽃 피는 봄에도 가고, 새들 지저귀고 남풍 불어 즐거운 여름날에도 간다. 높푸른 하늘 활짝 열린 가을날에도, 거칠 것 없는 찬바람 들판 가로지르는 겨울에도 간다. 맑은 날이나 흐린 날에도 가고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에도 나는 간다. 한낮에도 가지만 달 밝은 밤에도 황룡사지를 찾아간다. 나는 황룡사지를 가고 가고 또 가도 지겹지가 않다. 갈 때마다 좋다. 늘 새로운 무엇이 그곳에 있다. 황룡사지는 나의 문화재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경주이다. 경주는 신라천년의 고도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삶터 가까이에서 일상으로 문화재를 접하며 살아간다. 내가 사는 집은 경주 남산을 바라보고 있고, 직장으로 출퇴근하면서 늘 문화재를 만난다. 오래전부터 경주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14년 전 나는 경주로 전근 오게 되었다. 사회학과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대학 때 불교 신행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경주의 문화재를 답사하는 기회를 자주 가졌다. 그리고 나의 일터가 학교이므로 제자들에게 그들의 삶터에 있는 문화재를 소개하는 교육활동을 일상적으로 해왔다.
나는 학생들과 다양한 문화재 체험활동을 했는데, 소풍날에 체험학습의 형태로 문화재를 답사하거나, 동아리나 클럽 조직을 만들어 지속적인 교육과정으로서 지역의 문화재를 이해하게도 하였으며, 방학 때는 체험학습단을 조직해서 집중 답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화재와 관련되는 교육과정에 이르면 언제나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고 조사해오는 것을 과제로 제시한다. 이 과제를 부여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특별히 자기문화재를 하나 선정하라고 주문한다. 경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자기 집 가까이 있는 문화재거나,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문화재를 하나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해올 것을 요구한다. 애정이 생길 때까지 여러 차례 거듭 답사할 것을 부탁한다.
나는 경주에 정착하기 6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처음으로 황룡사지에 들렀다. 한 스님이 주관하는 천룡사지에서의 수련회에 참여했다가 마지막 날 황룡사지를 답사한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는데 들판 가운데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는 황룡사지를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우리 문화에 대한 나의 짧은 지식은 황룡사지에서 무너져 내렸다. 이후 백제나 고구려의 다른 문화 유적에서도 황룡사지에 못지않은 거대한 유적지가 있음을 알게 되긴 했지만, 나는 그날 황룡사지의 회랑을 따라 걸으며 우리 고대 문화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했다. 당시 나의 머리에는 우리의 고대 문화는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기만 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날 답사 후 나는 황룡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90년대 중반에 한 방송사에서 황룡사를 영상으로 복원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수십 번도 더 보았다. 특히 제자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주고 싶을 때엔 항상 이 영상물을 보여 주었다. 내가 경주에 살고자 했던 열망의 원천이 바로 황룡사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황룡사엘 자주 간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여유를 즐기러 가고, 팍팍한 일상에 찌들려 쉬고 싶어도 황룡사지를 찾는다. 긴 회랑을 따라 걷거나 야트막하게 복원한 황룡사의 담에 올라 긴 시간을 투자해 걸으면서 그 규모의 크기를 즐긴다. 때론 남쪽 정문으로부터 차례로 중문을 거치고 경루와 종각터를 보고, 서라벌 땅에서 사람이 만든 건물로는 가장 높았던 황룡사 9층탑을 지나고, 장륙존상을 비롯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도열해 있던 금당을 지나고, 원효의 백고좌강회가 열렸던 강당을 가로지르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우물터에 이르러 이 물로 목축이던 천 년 전의 신라인들을 생각한다.
때로 비 오는 날엔 이 터에 꽉 들어찼던 건물들을 상상하고 그 건물들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들과 함께 깊어져 가는 도랑을 따라 답사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금당의 부처님 자리에 앉아서 황룡사를 무대로 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진흥왕부터 선덕여왕조에 이르는 100여년에 가까운 황룡사 창건의 과정과 창건 후 화려하게 그 위용을 자랑했던 수 백년의 세월, 고려말 몽골군들이 쳐들어와 오랜 세월 문화적 자존심의 상징이었던 황룡사를 불태우던 시간과 이후 그 흔적조차 희미해져 가던 세월들. 지금 주춧돌의 흔적만으로 남은 오늘의 모습까지. 황룡사를 떠날 수 없는 목격자로서 자신을 투영해 보기도 한다. 한 재능 있는 작가가 있어 나의 상상처럼 윤회를 거듭하면서 황룡사를 목격하는 주인공을 창조한다면 멋진 작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황룡사에서의 내 상상을 일깨우는 문화재는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0년대 황룡사지를 발굴할 당시 조각조각 깨진 채 발견된 치미가 그것이다. 치미는 새의 꼬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지붕 위 용마루 끝에 얹는 장식물이다. 이 깨진 치미를 정성들여 붙인 결과,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크기와 무게는 황룡사 금당의 규모를 한없이 키운다. 치미로 말미암아 일어난 상상력은 나는 새가 앉으려다 떨어졌다는 솔거의 벽화를 상상하게 한다. 이 벽화는 위의 치미가 우람하게 선 금당의 어느 한 쪽 벽면에 그려져 있었으리라. 지금 이 금당 한가운데에는 장륙존상을 비롯 여러 불상들이 서 있던 자리가 뜨겁게 불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또 금당 앞에는 백제 장인 아비지가 온갖 공력을 들인 예순넷 기둥을 딛고 우뚝 선 황룡사 9층 목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목탑지의 중심에 놓인 심초석은 80여 미터 우람한 탑을 다시 세우기라도 할 듯이 흔들리지 않고 무겁게 앉아 있다. 나는 신라인이 되어 이곳 9층 목탑을 한층 한층 올라 본다. 마침내 9층 난간에 이르러 서라벌의 화려한 도성 곳곳을 내려다본다.
상상의 나래를 접고 다시 금당 뒤에 위치한 강당에 이른다.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옛 건물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그곳에서 당시 내로라하는 승려들 앞에서 금강삼매경론을 들고 부처님이 전하고자 했던 진리의 말씀들을 자신만만하게 설파하고 있는 원효 스님의 모습을 듣는다.
나는 오늘도 황룡사지를 찾는다. 이곳 넓은 터에 가득 퍼지는 햇살과 대지를 가로지르는 바람을 맞는다. 그 햇살과 바람의 숨결 속에서 천 수 백년에 걸친 옛 이야기들을 듣는다. <끝>
■은상
일월(日月)의 땅을 읽고 / 김동수
농촌이라고 하면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과 논밭이 떠오르고 어촌이라고 하면 파도에 일렁이는 고깃배와 수평선이 떠오르지만 산촌이라고 하면 선뜻 풍경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 봄이 늦게 오고 겨울이 일찍 오는 곳, 산촌이다.
산골에서 자라 산촌 풍경에 익숙한 나그네는 산골짜기로 돌아다니는 여행을 즐긴다. 한반도의 등뼈를 타고 남하하는 길, 영양 일월의 치마폭에서 하루의 고단을 뉘고 어둑새벽 서둘러 정상에 올랐으나 구름에 가려 해돋이를 보지 못했다. 내륙에서 해와 달을 먼저 볼 수 있다 하여 일월산(日月山)인데, 아쉬움을 선녀골 선녀탕에서 씻고 조지훈 생가와 이문열 고향을 돌아 산촌생활박물관으로 향했다.
영양이 산촌문화와 민간신앙을 이어온 고을이라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추’를 먼저 떠올린다. 나그네도 그랬다. 수비면에 있는 반딧불이생태공원에서 밤까지 기다려 기어코 개똥벌레를 본 적이 있지만 일월산 자락에 산촌문화와 민간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이 정도면 나그네의 호기심과 향수가 발동할만하다.
박물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굴피집과 너와집 그리고 귀틀집이 어우러진 야외 마당이다. 흙과 돌과 나무, 말 그대로 토속재료로 지어 화려하지 않은 무채색 풍경은 다소 심심해도 마치 벽에 걸린 수묵담채화 속으로 들어온 듯 나그네의 감성은 차분한 위안을 받는다. 그 시절의 생활도구들이 제자리에 있어 보따리 하나만 안고와 무위자연의 삶에 귀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산 비탈길 오르느라 등짝이 땀에 젖더라도 원래의 자리에서 보았으면 하는 욕심은 객기일까. 현란한 네온사인 사이 아스팔트 바닥에서 뜀박질하느라 지친 도시인의 향수이리라.
본관 안으로 들어간다. 산촌의 풍습과 생활도구가 밀랍인형과 함께 칸칸이 잘 전시되어 있다.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자치기 앞에 수줍게 누워 있는 풀각시 앞에서 나그네는 잠시 회상에 빠진다. 풀각시는 손재주가 있어야 맵시 있게 만든다. 나그네는 유년시절에 강아지풀로 다람쥐를 만들거나 자연물로 이것저것 만드는 손재주를 즐겼다. 찍어낸 플라스틱 인형이 어찌 풋풋한 재료로 한껏 손재주를 부린 풀각시의 맛에 비하랴. 생활도구의 크기나 맵시가 모두 달라 조상들의 손맛을 하나하나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그네를 사로잡은 건 민간신앙에 관한 기록과 유물이다. 황씨부인 설화는 귀동냥으로 들었지만 설화 주변에 얽힌 더 자세한 이야기는 ‘황씨부인당’을 들러보고서야 알았다. 영양고을을 품은 일월산은 음기가 강한 여산(女山)이며 그믐달 내림굿을 하면 영적 능력이 신통해진다고 하여 전국의 무속인들이 성산(聖山)으로 모신단다. 옛 불교 흔적인 석탑이 몇 남아 있지만 일월산은 황씨부인이 주신이어서 부처님을 모시지 못해 오래된 절이 없단다.
오래된 절에서 칠성할매를 모시는 칠성각이나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민간신앙이다. 불교가 우리네 민간신앙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일월산 자락의 민간신앙이 다른 종교에게 흡수되거나 짓밟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거니와 우리네 민간신앙의 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한다. 성황나무 아래 정화수 올리고 소원을 비는 아낙네는 우리네 어머니다. 실타래를 감아 집안에서 가장 높은 대들보 위에 모신 성주신은 우리네 할아버지요, 집안의 재물을 맡긴 구렁이나 두꺼비는 우리네 친구요, 집안을 기웃거리는 잡귀를 뾰족한 이빨로 쫓는 엄나무는 우리네 장난감이 아닌가.
부처님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일월의 땅이라서 우리네 토속문화가 이만큼이라도 남아있는가. 외래종교와 과학이‘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지만 생활에서 배척할 수 없음은 우리네 정서도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게다. 물아일체라는 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도 자연물의 하나기에 자연을 공경해야 내가 보호 받는다는 생각은 콩 심으면 콩 나는 소박한 진리가 아닌가. 영양고을을 무속의 땅으로 보지 말고 우리네 민간신앙과 전통 토속문화가 잘 보존된 땅으로 보고 이를 학문과 문화로 정리해 전승했으면 좋겠다. 과학을 믿는 시대지만 내면의 갈증과 길흉화복은 과학도 다 해결해주지 못하니 말이다.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전통문화공원으로 향한다. 흥부놀부, 해님달님 등 전래동화가 조형물로 서있다. 인당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바라보며 연꽃 위에 오롯이 서있는 심청이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러고 보니 지극한 효성을 민간신앙의 반열에 올려도 괜찮을 듯하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꿈꾸는 요즘 아이들이 커서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를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 연오랑 세오녀에서 해와 달을 읽은 우리네 선남선녀가 단오 나들이에서 연분을 쌓다가 칠월칠석 날 오작교에서 견우직녀의 이름으로 사랑을 고백하면 안 되나. 우리네 순박한 정서가 사라지는 게 아까워 나름대로 쓸데 있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네 민간신앙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물에서 해와 달을 거쳐 칠성별에 닿는다. 어쩌면 우리네는 별똥별처럼 떠돌다 지구별에 내려와 다시 별을 꿈꾸는 영혼들, 이 영혼들이 꽃을 피우고 고향별으로 떠난 자리에 사연 하나 없는 들 어디 있으며 설화 하나 깃들지 않은 골 있으랴. 나그네는 일월의 땅에서 아득한 칠성별 너머 자미원(紫微垣)을 떠올린다. 이상향으로 전해오는 별자리, 그래서 우리네는 그리움이 밀려오면 별을 보나보다. 혹시 여기가 자미원과 교감하는 플랫폼이 아닐까.
일월의 땅을 주마가편으로 읽고 그 향기를 허투루 말하면 일월신에게 야단이라도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루 고단을 뉘라고 해가 자리를 비킨다. 곧 산마루에 달이 뜨고 산촌 사람들의 꿈길에 별들이 반짝이리라.
문화·역사의식 입체적으로 표현돼야 / 제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심사평
대구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에는 전국에서 299편이 응모하여 수필에 대한 최근의 관심을 입증하였다. 수필대전은 문화체험을 소재로 경북의 관광 이미지를 높이고 공모전을 문화행사로 발전시키려는 목적성을 가진 수필공모전이다. 여러 신문사에서 연말에 주관하고 있는 신춘문예가 순수수필의 문예성을 선별하는 것이라면 대구일보사의 수필대전은 관광 체험의 기록성과 수필의 문예성 함양이라는 목표를 지닌 참신한 기획력이 돋보인다. 이런 공모전은 신문이라는 언론매체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진흥 정책, 그리고 참여자의 문학성을 동시에 반영한 행사로서 공모전의 새로운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리라 기대된다. 따라서 심사방향은 설정 취지에 맞게 문화체험이 지닌 공감성이 어떻게 수필이라는 문학작품에 응축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예심을 통해 선정된 100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주제의 응집성과 체험의 진실성을 바탕으로 1차 독해를 통해 60편을 선정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진지한 토론을 거쳐 문화체험의 참신성, 체험의 감동성, 주제의 표현력을 중심으로 2차 독해를 거쳐 40여편을 선정하였다. 다음으로 문화체험이 신변성으로 떨어지지 않고 관광지가 지닌 향토성과 미적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10여편의 상위 당선작을 골랐다. 최종적으로 기존의 기행산문과 차별화되는 참신성과 문장력을 평가하여 대상과 금상, 은상 동상을 선정하였다.
몇몇 작품을 평하면 대상을 받은 서소희의 ‘노근’은 제2석굴암 바위에서 목격한 나무를 성찰하여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는 석굴과 나무와 자아를 일치시킨 해석력이 돋보였으며, 금상을 받은 전미라의 ‘암각화가 들려준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칠포리 암각화를 통해 세월을 뛰어넘는 인간의 삶을 자연으로 표현하였다, 문경희의‘지렛대’는 대가야의 고분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무한성을 간파한 통찰력이 각각 돋보였다.
심사를 마치면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선 우수한 작품이 많아 선작에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당부 드리고 싶은 점은 관광체험을 단순히 서술하거나 반대로 관광수필이 단순한 여행기여서는 안 된다는 우려 때문에 인위적으로 가족사나 개인사를 끌고와 문학적 의미화에 치중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적인 여행기나 가족이야기는 관광체험 수필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보다는 관광지를 남다른 시선으로 답사하되 문화의식, 역사의식, 자연애, 인간애가 입체적으로 어울린 문화체험을 표현하도록 부탁한다.
박양근 심사위원장·문학평론가
‘제1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자 명단.
△대 상= 서소희(대구)
△금 상= 전미라(포항), 문경희(부산)
△은 상= 김동수(대구), 김인곤(경주), 김동수(충남 서산)
△동 상= 박시윤(대구), 정경자(대구), 권영시(대구), 이미경(대구), 정영숙(울산)
△장려상= 박태칠(대구), 한범희(충북 단양), 박화선(울산), 최옥연(울산), 장재화(경남 양산), 허효남(대구), 김희자(대구), 강산숙(수원), 사공원진(대구ㆍ학생), 박은혜(경북ㆍ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