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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면(雲山面)
백제시대 여촌현(餘村縣)에서 신라시대에 여읍(餘邑)으로 다시 고려 초기에 다시 여미(餘美)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동남쪽으로 상왕산(象王山)이 있고 남쪽으로 가야산(伽倻山)이 있으며 역천(용장천, 조선시대 명칭은 大母川)이 상왕산 기슭에서 시작한다. 조선시대 4개의 주현군이 소속돼 있던 운산면은 연혁이 복잡한 지역이다. 현재의 안호리, 수평리, 팔중리, 고산리, 용현2리, 고풍리, 수당리, 용장리, 갈산리 등은 해미현 이도면 소속이었고 신창리, 용현1리, 태봉리, 원벌리, 소중리, 가좌리 등은 서산군 소속이었다. 성산리와 거성리, 원벌리, 소중리, 가좌리는 홍주목 운천면, 와우리는 면천군 마산면, 원평리는 홍주목 합북면 소속으로 나뉘는 등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적 뿌리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1896)에 따른 행정개편으로 1895년 대규모 합병을 거친후 1914년 행정 개편에서 해미군 운천면과 부산면, 이도면을 통합하여 지금의 운산면이 탄생하게 된다.
서산시 최동단에 위치한 운산면은 市 소재지로부터 1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당진군 정미면, 남으로는 해미면, 동으로는 예산군 봉산면과 당진군 면천면에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음암면과 접해 있다. 1973년 3월 12일 당진군 정미면 여미리가 편입되고 2007년 11월 9일 서정아파트가 갈산4리로 신설되어 현재는 19개 법정리, 30개 행정리, 128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574세대에 5,803명(2009. 5. 29현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운산(雲山)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내포 문화의 중심지인 가야산을 대부분 점하고 있는 운산면은 서산시의 관문으로 서해안고속도로의 서산IC가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2004년 국도 32호선의 완공과 더불어 최근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새로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많은 인구의 유입이 기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갖고 있는 운산면은 서산시 관내 최고의 문화지역이기도 하다. 국보 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하여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316호인 보원사지, 개심사 등 국가지정 문화재 9점, 도지정문화재 6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지역 최대의 청정 계곡인 용현계곡과 산림청의 용현 자연휴양림이 위치하고 있어 여름철을 비롯한 사계절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농업분야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어 서부지역인 가좌리와 소중리는 달래 및 쏙새 등이 유명하고 동부지역인 고산리와 수평리는 배추와 담배가 유명하며 와우리와 원평리 지역의 한우는 특급 육질을 자랑하며 인근 예산과 홍성 한우마을 등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상황버섯을 비롯한 2차 식품이 선보여 지역의 대표 특산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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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면 지도
餘美 古地圖 (1872년 제작분)
廣與圖 餘美部分
大東與地圖 餘美部分
東 與 圖 餘美部分
與 地 圖 餘美部分
海東地圖 餘美部分
가좌리(佳佐里)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가좌동리와 서산군 동음암면 남당리로 있던 곳이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좌동리는 해미군 운천면 상가리, 상리로 나뉘고 남당리는 변함이 없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가리, 상리, 남당리를 합치고 서산군 동음암면 고양동리 일부를 합쳐서 한마을로 합쳐지면서 홍주목 운천면 좌동리에서 이름을 따서 운산면 가좌동리가 되었다.
마을에 가재가 많아 가재울이라 하였으며 아름다움을 도와주는 마을이라는 가좌리(佳佐里)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마을 남쪽 큰 연못이 있던 곳을 일컫는 남댕이(南塘)와 초분(草墳,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 놓은 뒤 이엉 등올 덮어 두었다가 2~3년후 뼈를 수습하여 땅에 묻는 장례 풍습, 말이 좋아 草墳이지 늙고 병든 사람을 구덩이 속에 내다 버린 고려장(高麗葬)이었던 듯함) 절차를 반 장례로 치러 초분을 설치했던 곳을 지칭하는 반장동(半葬洞, 지금의 가좌리 정미소에서 운산면 소재지로 가는 길쪽), 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모래로 이루어졌다 하여 부르는 모래고개(沙峴), 온천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온천굴 등 많은 지명을 갖고 있다. 현재는 96세대, 236명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산달래와 쏙새가 특산물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거성리와 함께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남댕이 마을에 있었다. 가마가 있던 곳이 불룩하게 솟아 있어 그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데 2~3기의 가마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수습되는 유물은 백자이며, 대접.사발.종지가 주종을 이룬다. 조선 후기 민간용 자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가좌리 및 원벌리, 상성리, 거성리 등 에서 생산된 자기와 옹기류는 당시에는 천수만을 통과하는 배가 토성(土城)이 있던 해미의 웅소성리를 지나 관유리 부근의 용유대(龍遊臺, 음암 7景중 하나) 인근까지 드나들면서 실어 날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좌리 마을풍경
대교천 용유대(龍遊臺)
갈산리(葛山里)
갈산리는 조선시대 해미현 이도면 회선동리와 좌세리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갈현리, 회선동, 산지동, 좌세리 등 4개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4개의 마을이 합쳐지면서 갈현리에서 葛자를 취하고, 산지동에서 山자를 따서 갈산리가 되었다. 갈산리 1구 산막마을 북쪽 은봉산(一名 안국산) 남동쪽에서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마제석검(돌칼)이 출토되었다. 검신(劍身) 중앙에 2줄의 피홈(血溝)아 있는 일단병식(一段柄式) 석검으로 출토지 주변 여미리가 기원전에 존재했던 부족국가 염로국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선사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은봉산(안국산) 동쪽 남동향 경사면에 산막 고분군 수십기(基)가 있었으나 유적 일대가 모두 개간되고 민가와 민묘(民廟)가 들어서 있다. 지금의 갈산리1구 새마을회관 입구에 세워진 새마을 표지석도 은봉산 산막마을 북쪽에 있던 고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것이라 한다. 고분군(群)은 지금은 모두 훼손되어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서남쪽으로 가좌리와 음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동암산(銅岩山)이 있다. 이곳 정상부에는 산성터(山城趾)가 있는데 남쪽으로 서산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된 성으로 추측된다. 성벽 둘레는 약 230m로 규모가 작은편이며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남벽의 높이는 약 2m, 상부의 넓이는 2.5~3m이며 당초 이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부는 지름 12m 정도의 평탄지대가 성안의 높이보다 약 10m 높게 조성되어 있고 동쪽으로 지름 6m, 깊이 1m 정도의 웅덩이가 파여 있다. 수습된 유물은 없으며 북쪽에 있는 전라산성(田羅山城)과 더불어 고대국가시대에 여미지역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학교 밑 가좌리와 갈라지는 곳을 삼거리라 부르며, 이곳에서 서북쪽(우희태집 옆)에 옛날 보(洑) 주변에 말 무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말무덤보(馬墓洑)가 있었다. 고풍리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논으로 개간되어 지금은 보(洑)도 무덤도 없다. 동암산에서 음암 탑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르티고개라 부른다.
갈산리 마을풍경
갈산리 삼거리 보호수 (운산성당 뒷편)
대철중학교
무르티고개에서 보이는 서산
거성리(巨城里)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하성산리와 거산리 지역과 서산군 동음암면 동거리,대교리 지역에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홍주목 운천면 지역은 해미현 운천면 상성리, 거산리, 하성리로 분할되고 동음암면 동거리는 해미군 부산면 동산리, 관기리, 동거리로 분할되었다. 또한 서산군 동음암면 대교리는 유산리, 기촌리, 석천리, 석정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운천면 하성리, 동산리, 거산리와 해미군 운천면 관기리, 서산군 동암면 석천리 일부를 합쳐 운산면 거성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과거 조세곡을 저장하던 성(城)과 조창(租倉)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창재산(倉載山, 倉城山)이라 불리는 지역에는 작은 성터와 성산(城山)이 있다. 가좌리 남댕이와 더불어 많은 와편들이 발견된다. 옛날 대교천의 지류인 거성천에 바닷물이 드나들어 주운(舟運)이 가능했기에 조창(租倉)이 운영될 수 있었다. 화산들, 벌들, 말들이 있었으며 서쪽으로 대교천이 흐른다. 사기점이 있다하여 사기점말, 거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말이 있다. 거성리에는 가맛터가 무수히도 많이 있었으나 지금의 축협 한우종자개량사업소 전신(前身)인 삼화목장이 들어서면서 당시의 도공들은 여주와 이천 등지로 뿔뿔히 흩어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민초(民草)들의 삶이란... 이때 이주한 동창 김연중의 친척들이 여주에 살고 있다.
고려청자를 최초로 재현한 이천 고려도요의 지순택翁(1912~ )이 거성리의 도요에서 1930년 채취한 도석(陶石, 도자기를 제조할 수 있는 암석)으로 고려청자를 재현한 곳이기도 하다.
거성리 정류장
거성리 마을풍경
한우개량사업소(舊 삼화목장)
고산리(古山里)
해미현 이도면 고음곡리와 수철점리였던 곳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철점리가 없어지고 고음곡리가 두산리로 바뀌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고음곡리 일부는 수평리로 분할되고 남은 일부와 두산리를 합하여 고음곡리에서 古자를 취하고, 두산에서 山자를 취하여 고산리가 되었다.
고산리는 수평천의 원류점인 팔중리에서 수당리까지의 연속되는 계곡의 일부라 할 수 있지만 바로 접해있는 수평리보다 위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골이 넓게 퍼져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운산면내 전체에서도 예로부터 살기좋은 곳으로 인정받아 왔던 곳이다. 곰실과 솟점이라는 부락이 있으며 곰실마을은 고산리에서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곰과 같다하여 웅곡(熊谷)이라고도 부른다. 솟점은 마을에서 예전에 솥을 만들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옛날 곰실에 채(蔡)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어느날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 길은 가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곰이 나타나 으르렁 거리더라나... 놀란 채(蔡)서방 "내가 채실 곰서방이다"라고 했다나 워쨌다나...곰실 채서방인데...ㅎㅎ 채효석이 조상님이라지 아마두..
고산리 표지(곰실)
고풍리(高豊里)
고풍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군장동, 무릉동, 운곡리, 고색리 등 4개 마을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협곡으로 농토가 작고 토질이 메말라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의미로 풍년 풍(豊)자를 마을 이름에 넣은 것이라 전해진다. 예전에는 군장동이란 마을이 당나라에서 당진을 통하여 들여오는 물자를 이곳을 통하여 공주 감영으로 지나는 경로로 사용되어 크게 유명세를 탓지만 1975년 고풍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마을의 구전에 따르면 과거 이곳은 공주 감영으로 운반되는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어 군장동(軍藏洞, 軍莊洞)이라 불렀다 한다. 인접한 원평리에서 신라와 백제간의 주도권 다툼이 한창일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城이 발견되어 이를 뒷밧침하고 있으며 세월과 더불어 전설은 歷史로 바뀌었다. 수몰된 지역에는 맑고 큰 시내가 흘러 은어를 비롯한 수많은 어류가 회유하는 광경이 장관이었으며 물줄기를 타고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와 무릉도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다. 지명 또한 당연히 무릉동(武陵洞)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의 택지리에 의하면 "가야산(伽倻山)의 동남쪽은 토산이고 서북쪽은 돌산이다. 동쪽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동학(洞壑, 동쪽 골짜기)은 곧 상고때 상왕(象王, 부처)의 궁궐터이고, 서쪽에 있는 수렴동(水廉洞)은 바위와 폭포의 경치가 매우 기묘하여 아름답고 북쪽에 있는 강당동(講堂洞)과 무릉동(武陵洞)도 수석(水石)이 또한 아름다우며 아울러 마을과 아주 가까워 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 비록 가야산보다 못하나 또한 바닷가의 경치를 차지한 곳이다. 무릉동에는 여러대를 이어사는 부유한 집이 많다."라고 고풍리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호산록(湖山錄,고려시대 승려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의 시문집)에도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상왕의 능과 연관하여 고풍리의 남다른 풍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마을은 개나리골과 속벌들 사이에 있으며 북쪽으로 고풍저수지가 있다. 고빛, 무릉대, 음산말, 양지말이 있었다. 고빛은 고풍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지대가 높아 고비(고사리과)가 많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무릉대(一名 쉰즐바위)는 돈대 밑에 있는 마을로 예전 상왕(象王)을 묻은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음산말은 응달이 진다하여 생긴 이름이며 양지말은 양지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왕산(象王山, 해발 307.2m)이 자리잡고 있으며 문수산, 동암산, 옥녀봉, 안국산의 지맥을 이루고 있다. 상왕산은 백제가 신라와 싸울때 백제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풍저수지
새로 개통된 고풍터널
상성리(上城里)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였다.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 해미군 운천면 상성리, 성중리, 중리, 소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 마을로 만들면서 상성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소속으로 홍주목의 접경지역이었다. 운산면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의 농촌마을이다. 황새들, 지류지 등이 있으며 궁말, 상촌동, 새태, 이 있으며 새태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창밑은 마을에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 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성리 보호수
소중리(小中里)
조선시대 서산군 동음암면 동거리와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 일부 지역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거리가 해미군 부산면 소속으로 바뀌고 동거리가 동거리와 신기리로 나뉘었다.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는 상성리, 성중리, 중리, 소동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동거리와 해미군 운천면 중리를 합한 외에 해미군 운천면 소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 동리를 만들면서 소동에서 小자를, 중리에서 中자를 따서 운산면 소중리가 되었다.
서쪽으로 성암저수지가 있으며 까치말, 동거리, 불당골, 황샘말, 식물원이 있다. 까치가 많이 산다고 까치말, 거리가 동쪽으로 길게 뻗쳤다고 동거리, 불당이 있다해서 생긴 불당골, 마을에 황샘이 있다하여 황새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소중리 1구 소동마을 중앙에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30m 안팎의 얕으막한 야산에서 마세석촉(磨製石鏃)이 밭을 개간하던 마을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화살촉 1점을 수습하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며 이 지역은 개간되어 지형이 심하게 변형된 상태여서 유적지를 확인할 수 없다.
소중리 입구
가루고개(운산, 해미, 소중리 세갈랫길)
소중리 마을풍경
수당리(壽堂里)
수당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의 일부분이었다.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묵리, 묵당리, 와평리, 장승동리, 하장리 등 5개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와평리, 장수동 등은 수평리가 되고 상흑리였던 상묵당리, 묵당리였던 하묵당리, 하장리, 하장수동리를 합쳐 하장수동리의 수자를 취하고 묵당리의 당자를 따서 수당리가 되었다. 1895년 하장동이라 이름한 것이 조선시대까지 한마을이었던 장생동리내의 아랫마을이 썼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모두 장수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상묵당리는 현재 동방맥이 산제를 올리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옛 산제당(미륵제)을 묵당이라 불러서 묵당리라 한 것으로 보인다.
부락으로는 산제당이 있어 당현동 또는 당째, 산에 바위가 많이 박혀 있다 하여 바위배기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가운데로 대방들천이 흐른다.
수당리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에서 15일 오전까지 장승제를 지낸다. 마을 뒷산에 임시로 산신단을 만들어 14일 밤에 산신제를 지낸 뒤 15일 아침밥을 먹기 전에 동방맥이와 북방맥이 장승제를 지내며, 아침밥을 먹고 나서 중앙맥이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은 제사 전날인 13일에 만들어 세운다.
수당리 마을풍경
수당리 보호수
수평리(壽坪里)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와평리, 상장수동, 상묵당리, 하묵당리, 하장수동이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와평리, 상장수동과 고음곡리의 일부를 합쳐서 상장수동에서 壽자를 취하고 와평리에서 坪자를 따서 수평리가 되었다.
부락으로는 전에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하여 와평리, 와동에서 왯벌로 이름이 변형되었으며,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롤 돌봐주던 원집이 있었다 하여 생긴 원마루, 뱀의 목 또는 장수의 목처럼 생겼다하여 장사목골이라는 명칭의 마을이 있다. 주변에 세용골과 원골 등의 부락이 있다.
또한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어 형태를 찾아 볼 수 없지만 점골 뒷편에 놓인 얀산 동쪽 하단부에 백자가마터가 있었다. 가마터 동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그 주변에 백자조각이 약 400평에 걸쳐 산재해 있다. 가마는 대부분 파괴되어 매몰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1기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사목골 뒤편에 있는 능선의 경사면 중상단부에는 고분군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매몰되어 형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송림과 잡목으로 덮여있는 완만한 경사지역으로 고분이 확인된 곳에는 민묘(民墓)가 들어서 있다. 확인된 고분은 2기(基)이나 몇기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도굴된 상태이고 민묘를 조성하면서 일부는 파괴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고분은 넓은 판석(板石)으로 양벽을 구축하고 대판석(大板石)으로 뚜껑돌을 삼았다고 한다.
또한 매년 음력 1월 14일~15일까지 문수산 서낭제를 지내는데, 마을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다음달 초하루로 연기된다. 1월 14일 오후 5~6시에 문수골 왜평 뒷산 공터에서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이튿날 해질 무렵에 마을 고개의 잣나무밭에서 서낭제즐 지낸다. 제관은 산신제에 2명, 서낭제에 4~5명이 참여한다.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예전부터 전해온 것으로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지내고 있다.
수평리 마을풍경
신창리(新昌里)
서산군 동음암면 개심동리, 고창동리, 벌리도 되어 있었다. 이중 벌리는 현 원벌리의 전신인 홍주목 운천면 벌리와는 이름이 같아 같은 마을로 혼동하기 쉬운데 그 위치는 서로 아주 다른곳이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고창동, 동신리, 벌리 등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창동, 동신리, 벌리 등을 합쳐서 한 동리를 만들면서 동신리에서 新, 고창동에서 昌자를 합하여 신창리가 되었다. 개심사 어귀라 하여 동구말, 신창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붙여진 마을이 있으며 개심사가 있다. 개심사는 651년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 후 1350년(고려 충정왕2)에 처능대사가 중건하고 이름을 고쳐 개심사라 하였다. 조선 성종때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여러차례 중창불사(重創佛事, 낡은 건물을 고쳐 새로 짓는 일)가 행하여졌다.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린 기둥이 자연스런 미감을 드러내는 심검당(尋劍堂)은 자연스러운 미감을 그대로 살리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신창리 마을풍경
開 心 寺
안호리(安好里, 雁湖里)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안호리라는 이름으로 일관해 왔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리라는 마을이 분리되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안호리와 수리가 다시 한동리가 되면서 안호리가 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을 앞에 큰 방죽이 있기 때문에 안수리로 불린때도 있었으며 겨울이 되면 이 호수위에 기러기떼들이 날아들어 겨울을 지내다 돌아가는 바람에 기러기 안(雁)자와 호수 호(湖)자를 써서 안호리라 하였다. 한문 실력 변변치 않은 면사무소 직원이 雁湖里를 安好里로 바꿔놨으니 조상님 탓이나 해야지 원. 동쪽으로 대방들천이 흐르며 곡촌, 뒷겸말로 부르는 마을이 있다. 뒷겸말은 마을에 독 만드는 점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독경촌이라고도 부른다.
안호리 마을풍경
와우리(臥牛里)
해발 300m 이상에 위치해 있는 와우리는 조선시대에는 덕산군 외야면 슬치리였다가 1895년 해미군 부산면 우련리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개편에서 면천군 마산면 울사리 일부를 합하여 와우리가 되었다. 예산군과 당진군, 서산시의 3개 행정구역이 마주한 삼각뿔의 꼭지점에 위치해 있는 까닭에 군경계 확정시마다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와우리(臥牛里)는 말 그대로 소가 누워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징기스칸에 필적할 만한 위인이 태어날 명당터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단군전이 있어 봄,가을로 제를 지내고 있는데 과거 일제 강점기에도 제를 지내다 탄압을 받는 등 민족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1908년 나철(羅喆)이 단군의 영정을 다량으로 모사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는데, 이때 부졸(副卒)로 있던 김용학(金容學)이 관직을 버리고 와우리 모촌마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단군 영정을 모시고 천징궁(天眞宮)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천진궁은 남아 있지 않고 1987년 운산면에서 새로 건립한 단군전이 홍살문, 서재, 내삼문, 본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와우리 마을풍경
단 군 전 (檀 君 殿)
용현1리(龍賢一里)
조선시대 서산군 동음암면 갈동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갈산동, 보현동, 태봉동, 벌리 등 4개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갈동과 보현동 및 옛 홍주목 운천면 소속이었던 거산리의 일부와 해미군 이도면 강당리까지 합하여 갈동내에 있던 자연마을 이름인 용비동에서 龍자를 취하고 보현동의 賢자를 따서 용현리가 되었다.
용현2리(龍賢二里)
국보 84호 마애삼존불과 사적지 316호인 보원사지가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강당리로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용현1리와 합쳐지면서 용현리가 되었다. 이곳의 옛 지명인 강당동은 신라시대 한문학의 시조로 불리우는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893년에 7년간의 부성태수(現 서산군수)직을 마치고 가야산 산중에 위치한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데서 연유된 것이라 전해진다. 호산록 불우조에는 강당사는 一名 보원사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이곳 보원사에서 절밥 짓는 쌀뜨물이 10리밖 용장천까지 떠 내려와 시냇물이 쌀뜨물로 뿌옇었다 한다. 보원사의 절집 규모를 미루어 짐작케하는 이야기다.
용현리 계곡입구
용현리 마애삼존불(국보 84호)
원평리(院坪里)
조선시대 홍주목의 월경(越境) 접경지로 홍주군 합북면 북원당리, 남원당리, 영산곳리등 세마을로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원평리, 원상리, 의현리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산군 운산면 원평리가 되었다. 원평리는 옛날 네개의 길이 교차되는 교통 요충지로 서산지방에서는 가깝게는 당진군 면천면, 합덕지방의 예산군 봉산, 거덕, 덕산면과 멀게는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원평초등학교 자리에 원집이 있어서 이를 원당리라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원집이란 동화원(桐華院)을 말하는 것으로 군사들이 있던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어 관리가 업무를 보던 곳을 말한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려에 빼앗기면서 중국 당나라의 물품을 당진을 통하여 들여오게 통로로 당진과 안흥진(安興津)을 이용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당진의 대방들천의 채운리(彩雲浦)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원평리는 당진 채운리 대방들천의 채운포(彩雲浦)~용장리~고풍리~원평리~봉산~홍성~부여~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당시 고풍리에는 당나라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부여와 공주로 이송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야 했는데 산세와 도로가 험악하여 무장한 군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한때 마을 명칭이 군장동(軍藏洞)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원평리 보호수
원평리 버스정류장
원평리 마을풍경
원벌리(元伐里)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벌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벌리, 원금리, 장동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벌리, 원금리, 장동을 합하여 원금리의 원, 벌리의 벌자를 따서 원벌리가 되었다. 원벌리의 목장지대에 조성되어 있던 원금동마을에는 백자 가마터가 즐비하였었다. 목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이 일대의 약 200여평이 넘는 지역을 사기점말이라 부른다. 백자에서 옹기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동안 상성리, 거성리, 가좌리, 미럭벌, 여리미 등과 함께 요업(窯業)이 이루어진 곳이지만 현재는 유물을 찾아볼 수 없다.
원벌리 목장지대
태봉리(胎封里)
서산군 동음암면 갈동과 홍주목 운천면 장동 지역에 속해 있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산군 동음암면 소속이던 갈동이 해미군 부산면 소속으로 바뀌고 마을도 갈동, 보현동, 태봉동 등 4개 마을로 분할될 때 이 지역은 해미군 운천면 장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태봉동과 해미군 운천면 장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 마을로 만들면서 운산면 태봉리가 되었다. 마을이 태봉골과 문수골 사이의 언덕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태봉리 마을풍경 (↖왼편이 태봉산)
문수사(文殊寺)
팔중리(八中里)
조선시대 해미현 이도면 팔골리와 중산리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산리에서 이티리가 분할되고 팔골리가 팔곡리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팔곡리, 이티리, 중산리 등 3개 마을이 합쳐져 한마을이 되면서 팔곡리의 팔, 중산리의 중자를 따서 팔중리가 되었다.
팔중리 마을풍경
여미리(余美里, 餘美里)
백제시대 여촌현(餘村縣)에서 신라시대에 여읍(餘邑)으로 다시 고려 초기에 다시 여미(餘美)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당진 채운포에서 뱃길로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번성하였으나 이후 주운(舟運)의 발달과 더불어 쇠퇴하면서 해미현 소속이 된다. 조선시대 해미현 이도면 여미리에서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여미리와 이문리(이문안으로 불리웠음)로 분리되었다.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두동리 합쳐져서 서산군 정미면 여미리가 되었다. 1957년 11월 20일 정미면이 당진군에 편입되어 당진군 정미면 여미리가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서산군 운산면 여미리로 다시 편입되었다. 여미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시대의 염로국에서 시작된 이름이 변형된 것이다. 염로국은 백제가 멸망한 뒤 661년~663년까지 백제의 부흥을 위하여 일으켰던 백제의 제4왕도(王都)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을에 있는 전라산(田螺山)에는 고대국가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터가 남아있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후 삼국시대~고려~조선 까지 1,400여년 이상을 군현을 관장하는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유구한 역사와 뛰어난 풍수 탓으로 여미리는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며 문화재 및 민속자료들이 즐비하다.
당진군과 경계를 이루는 여미리의 초막골 골짜기 안쪽에 십여 기(基)의 고분군이 밀집하였었다. 고분군 전방에는 신씨 사당이 있으며, 이 사당 동서쪽의 남서향 경사면에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은 도굴로 모두 파손된 상태이고 고분의 뚜껑돌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확인할 수는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인근 안국산(安國山, 一名 은봉산)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비자나무와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으며 1900년대초에 건립된 1,400여평의 유기방 가옥과 1,600여평 규모의 유상묵 가옥이 충청남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이문안(里門安) 이씨로 불리는 전주이씨의 집단 세거지로 정조의 넷째아들인 선성군(宣城君)의 후손이며 호조참판 이정방(李定邦)의 손자이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이진백(李震白, 1622~1707)은 조선조 최고의 명필가로 문장가 권필과 필적하였으며 해미읍성 진남문의 현판 편액 글씨가 이진백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진백의 아들 이택(1651~1719, 본관 全州, 字는 雲夢)이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후 선전관(宣傳官)과 고산진 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 훈련원정(訓練院正),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이후 家勢를 신장시켜왔다. 동창인 이철우, 이상구가 후손이다. 이택의 신도비는 큰말 중심부에 있으며 이상구의 父親이 쓴 漢詩碑도 있다. 이택 신도비 뒷편 약 100m 지점의 남향 경사면에 이택의 묘소와 1728년(영조 4) 건립된 묘비가 있다.
최근 농수산식품부에서 공모한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선정지로 확정되어 30억의 예산을 지원받아 농촌체험마을 조성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11년 완공을 목표로 체험 농가민막, 농가레스토랑, 옛날 방앗간, 이발소 등을 개설해 농촌의 정취를 느끼면서 머물 수 있는 관광형 테마 농촌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서산의 명소로 거듭날 여미리를 기대해 본다.
용장천 옆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전라도에 있던 수려한 지형이 설악산으로 향하다 시간이 늦어 운산 땅에 남았다고 하나 일부에서는 산의 형세가 소라의 모양을 하고 있어 "소라 라(螺)"자를 써서 전라산이라고 하였다. 태봉리의 "명종 태실" 및 고풍저수지 초입의 "쉰줄(50자)바위"와 더불어 운산의 3대 명당터로 회룡고조(回龍顧祖, 풍수에서 山의 지맥이 삥 돌아서 本山과 마주 보고 있는 형세)의 대표적 형세로 많은 풍수 입문자들이 풍수공부를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운산의 유명한 삼성(3姓, 용못 윤씨, 이문안 이씨, 서령 유씨)중 하나인 서령유씨 묘소가 있다.
여미리 신씨(申氏)사당
여미리 유기방 家屋
여미리 마을풍경
여미리 느티나무
여미리 비자나무
여미리 소나무와 석불입상
이진백(李震白)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는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 현판
안국사 삼존불과 배바위
용장리(龍獐里)
용장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항리, 묵현리, 장평리, 숙용평리 등으로 성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이 지역이 숙용평리, 묵현리, 장평리외에 용연리, 미륵리, 중리 등 3개 마을이 분할되어 7개 마을이 되었다. 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7개의 마을이 한 동리로 만들어지면서 용연리의 龍자와 장항리의 獐자를 따서 용장리가 되었다. 노루목, 먹고개, 미럭벌, 용못, 참샘, 쉰즐바위(一名 말등바위, 舞龍臺, 茂陵臺), 숫돌고개, 비석거리, 오리안들, 궁벌 등의 지명이 있다. 마을 지형이 노루목처럼 생겼다하여 노루목, 예전에 먹을 만들었다 하여 먹고개, 마을에 미륵불이 있다 하여 미럭벌, 용못은 마을앞에 있는 연못인데 용이 이곳에서 올라갔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지금은 메꿔져 논이 되어 있다. 먹고개는 대낮에도 산속에 들어가면 깜깜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묵현리(墨峴里)로 부르던것이 내포지방 특유의 발음으로 먹고개로 변한것이 아닌가 싶다. 미륵벌은 마을주민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이며 예전에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 이곳으로 들어와 옹기를 만들며 신앙을 지켜온 마을이다. 지금은 옹기 가마가 있던 자리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흔적만 남아 있다.
용장리 다리(一名, 제비둑 회다리)
용장리 버스정류장(차부, 車部)
용장리 마을풍경
용장리 마을풍경
강약방, 만물상회, 연풍옥, 마서방네 철물점...
용장리2구 버스정류장
여미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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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옜생각이 절로... 잘 보고가네~
자주 들려 댓글달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