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 그의 조부 윤하헌 선생께서 지은 한옥으로 정면4칸 측면2칸의 기와집으로 앞에는 2칸 정도의 나무마루가 달린 전형적인 한국식 집으로 옆에는 곳간이 딸려있는 제법 큰 규모의 농가주택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이곳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나 1932년 4월 은진중학교 진학할 때 까지
15년동안 살았으며 가까운 용정으로 이사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 매도되었으며 그후 1981년에 허물어졌다
그뒤 윤동주 시인의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한 중국의 용정시 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1993년 4월 관광지로 지정하고 용정시 문련과 연변대학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1994년 8월 29일 생가를 복원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백두산을 찾는 한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코스로 용정시의 명동학교(현 대성중학교)와 함께 역사적인 장소로 손꼽힌지 오래된 장소다
이곳에는 관리인이 1명 있으며 생가옆에는 커피를 팔고있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있다
결론
윤동주 시인은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이 되었고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1934년 처녀작을 내놓은 때로부터 불과 8년의 짧은 시간동안[시인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비운의 시대에 불굴의 민족정신과 저항에 꺽이지 않았던 숭고한 정신을 한편의 시로 우리들 가슴에 두고 두고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