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화부문 당선작] 최해솔
나는 슈퍼히어로로 살기 싫다고!
"진짜 못 해먹겠다고!"
민지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쳤다. 영어 학원 가는 길에 또 사람을 구해 버렸기 때문이다. 민준이와 정신없이 노느라 학원 시간을 까먹어 급하게 뛰어가는데, 또 '찌릿'. 머리에서 그놈의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후 육교 위에서 사진을 찍던 여자가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짜, 왜 하필 지금이냐고! 나는 학원도 가지 말란 말이야?"
투덜됐지만 다리는 이미 육교 쪽을 향해 뛰고 있었다. 민지는 육교 위에 올라가서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조심하세요! 뒤로 떨어져요! 하...... 그냥 제가 찍어 드릴게요"
이미 수업 시간은 오 분이나 지나 있었다. 지각한 상황에 남의 사진이나 찍어 줘야 한다니. 민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헉헉......"
땀을 뻘벨 홀리며 잽싸게 뛰어서 학원에 도착했다. 역시나 선생님은 민지에게 왜 늦었냐고 물었고 민지는 노느라 시계를 못 봤다고 거짓말했다. 뭐 백 퍼센트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예지력을 갖게 된 후 벌써 스물네 번째 거짓말이다. 어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죄책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왜 좋은 일을 하고 죄책감까지 느껴야 해? 진짜 짜증 나!'
초능력이 생기고 나서 마음속으로 소리지는 날들이 늘어 갔다. 초능력이 생긴 지도 벌써 일 년. 4학년인 민지는 작년 초에 감자기 초능력움 갖게 되었다.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가던 중 우연히 담벼락에서 떨어지는 보릿빛 고앙이를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때, 고앙이 목에 걸려 있던 방울이 빛나면서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손에 딱지 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민지는 종이를 펼쳤다.
초능력이 실제로 있다고 믿으시나요?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습니다.
이제 당신이 초능력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항상 덜렁거리는 앞집 아줌마가 이렇게 오래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그건 다 초능력자들 덕분이죠
당신은 예지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순간 머리가 찌릿해지는 느낌과 함께 당신이 자주 가는 장소에서 곧 일어날 일이 보일 겁니다.
예를 들면, 맨홀 아래로 사람이 떨어진다든지, 누군가의 옷이 버스 뒷문에 끼인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에요.
안 믿기시나요?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참, 스마트폰은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전파는 예지력에 방해되거든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 주게 되실 검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항상수고하세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내심 믿고 싶긴 했지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새로운 보이스피싱 수법을 알려 주고, 아빠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도 하지 말고 자리를 피하라고 한다. 험난한 세상에서 철저히 남을 의심하도록 훈련받은 21세기 이린이 민지가 이런 시시한 쪽지 따위를 덜컥 믿어 버릴 리 없었다.
하지만 초능력이라니, 민지는 눈이 반짝 뜨었다.
'그럼 나도 스파이더맨이나 블랙 위도처럼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거야?"
초능력을 갖게 되더라도 떠벌리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미 여러 영화를 통해 배웠다. 민지는 입을 꾹 다물고 몸의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예지력은 어떤 느낌일까? 우주에 간 것처럼 몸이 붕 뜨고 눈앞에 미래가 보일까? 아니면 꿈을 꾸는 것 같을까?
민지는 쉬는 시간마다 눈에 힘을 주고알 수 없는 곳을 쳐다보며 집중했다. 처음에는 민지가 뭘 하는 건지 궁금해하던 민준이도 이틀이 지나자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옆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삼 일째 되던 날, 드디어 민지의 머릿속에서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느낌일지 내내 궁금해했지만, 생각보다 시시했다. 학교 앞 도로에서 자동차가 튀어나오자 한 할아버지가 놀라서 박스가 가득 담긴 리어카를 엎는 장면이 잡깐 머리를 스쳤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고, 민지는 선생님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정문 밖으로 달려 나가 할아버지와 박스들을 구했다. 학교 앞에서는 친천히 달려야 하는 것도 모르냐며 어른처럼 차를 항해 소리치는 것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어디서 튀어나와 구해 준 겨. 하마터면 오늘 주운 박스 다 엎을 뻔했구먼. 참 고마워.'
할아버지가 활짝 웃는 모습을 떠울리니 민지는 선생님에개 혼나는 와중에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건 벌씨 일 년 전 이아기이다. '찌릿'하는 느끼은 삼사일에 한 번꼴로 느껴졌다. 정해진 시간에만 그린 게 아니라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있을 때도, 심지어 민지가 오래동안 좋아한 승헌이에개 고백하러던 순간에도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죽거나 다칠 게 뺀해서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예지력 때문에 스마트폰도 늘 가방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만 잠깐 꺼내 쓴다. 중독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스마트폰을 달고 살던 민지는 이 상황도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짜증 나, 그놈의 찌릿! 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냐고!"
민지는 예지력 때문에 짜증 날 때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쳤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집에 민지 혼자 있기는 하지만 옆집에서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이상한 인체 실험 같은 걸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지는 혼자 있을 때도 자꾸만 눈치를 봤다.
짜증이 극에 달하면 민지는 그냥 잠들어 버리는 습관이 있다. 밤에 잠이 오든 말든, 숙제가 많든 적든, 일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민지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상태 그대로 이불을 덮었다.
'됐어. 옷 안 갈아입고 그냥 잘 거야. 사람 목숨도 구했는데 바깥옷 입고 침대에 눕는 게 뭐!'
민지는 곧바로 잠들었다. 민준이의 아이스크림을 홀랑 뺏어 먹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엄마가 집에 돌아와 민지를 깨웠다.
"민지야, 잠깐 나와 봐. 거실에서 얘기 좀 하자."
얘기 좀 하자는 엄마의 말은 언제나 무섭다. 민지는 미몽사몽간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략>
최해솔_1999년에 태어났다.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수료했다.
심사평 중에서 / 안미란(동화작가) 박숙경 이충일(이상 아동문학평론가)
「나는 슈퍼히어로로 살기 싫다고!」는 신인다우면서 아동문학다웠다. 평범하지만 줏대 있는 어린이 주인공, 장르물의 클리셰에 짓눌리지 않고 유쾌하게 전복해 내는 호기로움은 ‘우리 아동문학이 어떻게 장르물을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까’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만하다. 단편은 그 자체의 완결성과 완성도를 따지기 마련이지만 이 응모자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세계관의 확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어린이의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친근한 유머를 겸비한 신인 작가의 등장을 환영한다.
본선 논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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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능력이 생긴 민지, 처음엔 좋았으나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네요. 결말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