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99. 한 여인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의심 많은 어느 여인과 관련하여 게송 99번을 설하셨다. 한 빅쿠가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법문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어느 오래된 정원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이때 의심 많은 성격의 한 여인이 정원에 들어왔다가 빅쿠가 좌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관심을 끌어 유혹하려 했다. 그래서 빅쿠는 깜짝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몸 전체에 표현하기 어려운 쾌감이 넘쳤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간다꾸띠에 계시면서 빅쿠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신통력으로 그에게 광명을 놓으셨다. 그러자 빅쿠는 이 빛이 부처님으로부터 온 것을 곧 알아차렸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 빅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여래의 아들이여, 세상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만 빅쿠는 그래서는 안 되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쾌락을 찾지 못하는 숲속에서 빅쿠들은 즐거움을 찾아야만 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Ramaṇīyāni araññani 라만이야니 아란냐니 yattha na ramatī jano 얏타 나 나마띠 자노 vītarāgā ramissanti 위따라가 라미싼띠 na te kāmagavesino 나 떼 까마가웨시노. 숲속이야말로 즐거운 곳.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곳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만이 여기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감각적인 쾌락을 찾지 않기에. Forests are delightful; where the world finds no delight, there the passionless will find delight, for they look not for pleasures. 댓글 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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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06. 사리뿟따 테라의 외숙부 이야기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사리뿟따 테라의 외숙과 관련하여 게송 106번을 설하셨다.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승원(죽림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사리뿟따 테라의 외숙부에게 당신은 어떤 공덕행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매달 일천 까와빠나(당시 인도의 돈 단위)에 해당하는 물품을 니간타스 고행자들에게 헌납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리뿟따 테라가 이렇게 말했다. “외숙의 스승은 외삼촌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어 외숙으로 하여금 그릇된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니간타스들은 자기 자신도 어떻게 브라흐마 천(天)에 태어날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천상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리뿟따 테라는 이렇게 외숙부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한 뒤에 부처님께 외숙이 브라흐마 천에 확실하게 태어날 수 있는 담마를 가르쳐 주십사고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브라흐민이여, 마음 집중법을 바르게 수행하는 빅쿠에게 한 주걱의 밥을 공양하는 것이 일천 까와빠나를 그대의 스승에게 올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Māse māse sahassena 마세 마세 사하쎄나 yo vajctha sataṁ samaṁ 요 와제타 사땅 사망 ekañca bhāvitattānaṁ 에깐짜 바위땃따낭 muhuttamapi pūjaye 무훗따마삐 뿌자예 sā yova pūjanā seyyo 사 요와 뿌자나 세이요 yañce vassasataṁ hutaṁ 얀쩨 와싸사당 후땅. 매달마다 백 년에 걸쳐 평범한 사람에게 일천 냥을 주는 것보다 신에게 백 년 동안 제사 지내는 것보다 일념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는 빅쿠를 찾아가 잠깐 동안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훨씬 낫다. If a man for a hundred years sacrifice month after month with a thousand, and if he but for one moment pay homage to a man whose soul is grounded (in true knowledge), better is that homage than sacrifice for a hundred years. 댓글 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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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11. 칸우꼰단냐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칸우꼰단냐와 관련하여 게송 111번을 설하셨다. 꼰단냐 테라는 부처님으로부터 수행에 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숲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좌선하여 아라핫따 팔라(arahatta phala, 阿羅漢果)를 성취했다. 그 뒤 테라가 제따와나 승원으로 돌아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여행하던 중에 날이 저물었다. 테라는 피곤한 몸으로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마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집중시켜 선정 삼매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도적 오백 명이 어떤 마을을 털어 도망치다가 테라가 선정에 들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매우 어두운 밤이었던지라 도적들은 테라를 나무등걸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테라의 몸에 자기들이 털어온 값진 물건들을 걸어 두었다. 그때 테라가 몸을 움직이자 그들은 귀신인가 싶어 놀라 달아나 버렸다. 얼마 후 날이 밝자 도적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테라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에 이르러 도적들은 그가 나무등걸이 아니라 빅쿠임을 알게 되었다. 테라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까이 오라고 도적들을 불렀다. 그들은 테라의 대담함에 놀랐으며, 그에게 굴복되어 용서를 빌면서 자기들은 테라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자 꼰단냐 테라는 그들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꼰단냐 테라는 칸우(나무등걸) 꼰단냐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테라가 새로운 빅쿠 오백 명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가 자기가 어떻게 빅쿠들을 데리고 오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 새로운 빅쿠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시었다. “빅쿠들이여, 무지하게 백 년을 살아도 그런 인생에는 참다운 가치가 없느니라. 이제 너희는 진리를 보아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니, 너희 인생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참다운 값어치가 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Yo ca vassasataṁ jīve 요 짜 와싸사당 지와 duppañño asamāhito 둡빤뇨 아사마히또 ekāhaṁ jīvitaṁ seyyo 에카항 지위땅 세이요 paññavantassa jhāyino. 빤냐완따싸 자이노.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무지하게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지혜롭게 마음을 고요히 닦는 것이 훨씬 낫다. And he who lives a hundred years, ignorant and unrestrained, a life of one day is better if a man is wise and reflecting. 댓글 4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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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16. 쭐레까사따까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브라흐민 부부 쭐레까사따까와 관련하여 게송 116번을 설하셨다. 사왓티에 한 부부 브라흐민이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단지 한 벌의 옷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쭐레까사따까(옷이 한 벌 밖에 없는 사람)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옷이 한 벌 뿐이었으므로 함께 외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낮에는 아내가 승원에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밤에는 남편이 가기로 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브라흐민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다가 즐거운 만족감이 충만하여 자기가 입고 있는 유일한 외출복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자 만약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공양하고 나면 자기와 아내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공양 올리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 이같이 하여 그는 초경과 이경의 밤 시간을 지나보냈다. 그러다가 삼경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약 그것을 걱정하여 공양 올리기를 주저한다면 나는 네 군데 낮은 세계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단 한 벌뿐인 이 옷을 과감하게 부처님께 공양하겠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옷을 부처님앞에 갖다 놓고는, 마음에 기쁨이 솟아올라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겼다!” 이때 꼬살라 국왕인 빠세나디가 이 법회에 있었는데, 그는 누가 큰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수행관을 불러 무슨 사건인지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국왕은 한 가난한 브라흐민이 단 한 벌뿐인 옷을 부처님께 보시하고 나서 자기를 이긴 것이 너무도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브라흐민이 한 장한 행동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그 브라흐민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 나는 그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다.” 빠세나디 왕은 곧 수행관에게 그에게 옷 한 벌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 브라흐민은 왕으로부터 옷을 받자마자 다시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다시 그 브라흐민에게 두 벌의 옷을 하사했고, 브라흐민은 또 그 옷들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이에 왕은 그 브라흐민에게 네 벌의 옷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그것도 또다시 부처님께 올렸는데, 이에 왕도 다시금 여덟 벌의 옷을 하사했다. 이같이 국왕으로부터 옷을 받는 즉시 그는 주저함 없이 부처님께 옷을 바쳤는데, 왕도 그에 따라 배로 보상을 해주어 그 옷은 마침내 서른 두 벌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브라흐민은 자기와 아내를 위해서 옷 한 벌을 남겨 놓고는 나머지를 모두 부처님께 아주 기쁜 마음으로 공양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광경을 다 보고 나서 왕은 이 브라흐민은 아주 어려운 일을 한 만큼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왕은 곧 사람을 왕궁으로 보내어 한 벌에 십만 냥이나 나가는 벨벳 두 벌을 가져오도록 하여 그것을 브라흐민에게 내렸다. 브라흐민은 그 값비싼 벨벳을 받더니 두 개의 우산 모양으로 만들어 하나는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간다꾸띠(응향각)의 침상 위에 놓아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집 앞에 놓아두어 빅쿠들이 탁발을 할 때 그 아래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날 빠세나디 왕은 제따와나 승원에 들렀다가 자기 눈에 익은 벨벳이 우산으로 만들어져 부처님의 침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왕은 그것이 자기가 브라흐민에게 내린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왕은 다시 그 브라흐민에게 일곱 가지 물건을 네 개씩 추가로 하사했다. 그것은 코끼리 네 마리, 말 네 마리, 남자 여자 종 각 네 사람, 심부름하는 아이 넷, 그리고 네 마을에서 걷는 세금과 현금 사천 냥이었다. 빅쿠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그 브라흐민은 착한 행동을 하자마자 금생에 그 보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만약 그 브라흐민이 단 한 벌뿐인 외출복을 초경에 공양했다면 그는 국왕으로부터 일곱 가지 물건을 열 여섯 개씩 보상받았을 것이니라. 그리고 그가 이경에 그렇게 했다면 그는 국왕으로부터 일곱 가지 물건들을 여덟 개씩 보상받았을 것이니라. 그런데 그는 마지막 시간에 공양했기 때문에 일곱 가지 물건을 네 개씩 받게 된 것이니라. 빅쿠들이여, 누구든지 공양을 하려면 첫 번째 일어난 환희한 그 마음으로 미련없이 해야만 하느니라. 만약 그가 망설인다면 이에 대한 보상도 적고 또 시간적으로도 느리게 그 과보가 나타나느니라. 그 밖의 다른 착한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니, 너무 느리게 선행을 하다 보면 병이 들거나 혹 죽게 되어 그 선행을 다 끝내지 못할 경우도 없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착한 일에서는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쁜 일에서는 훨씬 더 쉽게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Abhittharetha kalyāne 아빗타레따 깔얀에 pāpā cittaṁ nivāraye 빠빠 찟땅 니와라예 dandhaṁ hi karoto puññaṁ 단당 히 까로또 뿐냥 pāpasmiṁ ramatī mano 빼빠스밍 라마띠 마노 착한 행위는 급히 서두르고 나쁜 행위는 억제하라. 착한 행위에 느린 마음을 가지면 나쁜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기 쉽나니. If a man would hasten towards the good, he should keep his thought away from evil; if a man does what is good slothfully, his mind delights in evil. 불교와 뿐교저자최성문출판모과나무발매2021.05.19. 댓글 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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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22. 빌랄라빠다까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빌랄라빠다까와 관련하여 게송 122번을 설하셨다. 사왓티에서 온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부처님으로부터 들을 것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보시에 대해서 들었는데, 보시라는 것은 혼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여 함께 함으로써 공덕도 짓고 인연도 맺게 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부처님과 빅쿠 대중에게 자기 집에 오시어 공양을 받아 주십사고 청했다. 그래서 승낙을 얻은 그는 집에 돌아와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널리 이 소식을 전했다. “내일 아침에 부처님과 제자분들께서 우리 동네로 탁발을 오십니다. 여러분들은 물건이나 음식을 준비하여 공양을 올리시오. 그리하여 복도 지으십시오.” 이때 그 말을 들은 사람 중에 재산이 아주 많은 빌랄라빠다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복을 지으라고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런 시덥잖은 친구가 있나? 제 능력껏 공양하면 될 것을 가지고 분수없이 많은 수행자를 초대해 놓고서 동네 사람들에게 짐을 떠넘기다니!” 그는 그가 가져온 그릇에 쌀, 버터, 당밀을 아주 조금씩만 넣어 주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고맙다고 치하하면서 그로부터 받은 물품을 잘 분류하여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재산가 빌랄라빠다까는 자기 몫만 따로 분류해가는 것은 아마도 그가 자기 집에서 이것밖에 주지 않는다고 소문을 내어 자기를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이거니 여겼다. 그는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가 자기에게서 가져간 물품을 그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아보라고 일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그 사나이는 재산가 집에서 나온 것을 다른 것들과 골고루 섞었고, 그래서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주인에게 돌아가 이 같은 사실을 전했다. 그렇지만 주인은 그 말이 미덥지 않아 다음날 직접 공양 올리는 곳에 가보았다. 만약 그 사나이가 자기가 공양물을 적게 낸 것을 가지고 흉을 잡는다면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칼로 그를 처단해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부처님과 빅쿠 일행이 공양 올리는 장소에 도착하셨다. 그러자 사나이는 부처님과 빅쿠 대중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준비된 음식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음식은 모든 마을 사람이 협력하여 마련한 것입니다. 누가 많이 내고 적게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공양물에는 양의 많고 적음보다는 오직 정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에는 저희들의 신심과 보시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저희는 다만 모두가 평등하게 공덕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이 같은 말을 들은 빌랄라빠다까는 자기가 이 사나이에게 큰 오해를 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같이 착한 사람에게 자기가 나쁜 의심을 지닌 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결국 네 군데 낮은 세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나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사과했다. “여보, 좋은 친구여. 나는 당신을 나쁘게 생각했었소. 부디 내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오.” 이때 부처님께서 그 장면을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그 화해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된 것인지를 아신 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제자여, 아무리 작은 선행일지라도 계속해서 행하게 되면 마침내 큰 선행으로 발전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재산가 빌랄라빠다까는 소따빳띠 팔라(sotāpatti phala. 須陀洹果)를 성취하였다. Māvamaññetha puññassa 마와만녜타 뿐냐싸 na mandaṁ āgamissati 나 만당 아가미싸띠 udabindunipātena 우다빈두니빠떼나 udakumbhopi pūrati 우다꿈보삐 뿌라띠 dhīro pūrati puññassa 디로 뿌라띠 뿐냐싸 thokaṁ thokampi ācinaṃ 토깡 토깜삐 아찌낭 이것이 내게 무슨 영향을 미치랴 하여 작은 공덕 짓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조금씩 쌓아 큰 공덕을 만든다. 마치 방울씩 떨어진 물이 큰 독을 채우듯이. Let no man think lightly of good, saying in his heart, It will not come nigh unto me. Even by the falling of water-drops a water-pot is filled; the wise man becomes full of good, even if he gather it little by little. 댓글 10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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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27. 세 무리의 빅쿠들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세 무리의 빅쿠들과 관련된 세 가지 사건과 관련하여 게송 127번을 설하셨다. 첫 번째 무리 일단의 빅쿠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제따와나 승원으로 오던 중에 한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자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리려고 마을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다. 그때 마을의 한 집에서 불이 나 불꽃이 둥그런 모양을 그리면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을은 한 마리의 까마귀가 동그라미 불 속에서 날다가 날개가 불이 붙어 타다가 결국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빅쿠들은 그 같은 까마귀의 죽음이 어떤 악행의 결과였는지는 다만 부처님만이 아시리라 생각하며, 공양을 끝낸 다음 여행을 계속하여 부처님이 계신 제따와나 승원으로 부지런히 걸었다.그들은 부처님께 여행 중에 본 까마귀의 죽음에 대해 여쭙기로 했다. 두 번째 무리 또 다른 일단의 빅쿠들도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 승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우뚝 서더니 웬일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승객 가운데 누가 저주를 받아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두들 제비를 뽑아 보았다. 그 결과 선장의 아내가 저주받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러자 선장은 굳은 표정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여자 하나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이 죽을 수는 없지.” 이렇게 말한 선장은 모래가 든 단지를 자기 아내의 목에 매달아 그녀를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빅쿠들은 그 뒤로 여행을 계속하여 부처님이 계신 제따와나 승원에 이르렀다. 이 빅쿠들도 그 불운한 여인에 대해 부처님께 말씀드리고 그 여인이 전생에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그런 불행한 죽음을 당해야만 하였는지 질문하기로 했다. 세 번째 무리 또 다른 일단의 빅쿠들도 역시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제따와나 승원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지나던 마을 근처에 있는 조그만 승원에 들러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했다. 그러자 승원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로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곱 명의 빅쿠들이 그 동굴에서 그날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었을때 아주 큰 바위가 내려와 굴의 출입문을 막아 버렸다. 다음날이 되어 승원 사람들이 여행하는 빅쿠들을 찾아 굴에 가보니 굴의 입구가 꽉 막혀 버렸는지라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 돌을 치우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같이 하여 그 빅쿠 일곱 명은 꼼짝없이 그 굴속에 갇혀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이레 동안을 보냈다. 이레째 되는 날 바위는 기적적으로 스스로 움직여 굴 문이 열렸고, 마침내 빅쿠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일곱 명의 빅쿠들은 승원에서 굶주리고 지친 몸을 쉰 뒤 사왓티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제따와나 승원에 도착했다. 이들 역시 부처님께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하고, 자기네들이 전생에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그런 고생을 해야 했는지 질문하기로 했다. 이들 세 무리의 빅쿠들은 각기 승원에서 서로 만나 함께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각기 자기들이 여행 중에 겪었던 일을 보고 드리고 부처님의 대답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나서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첫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황소 한 마리를 가진 농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황소는 아주 게으르고 고집이 세서 농부는 황소를 잘 부릴 수가 없었다. 황소는 아무 데나 앉아 새김질을 하거나 잠만 자는 것이었다. 농부는 이 게으르고 고집 센 황소 때문에 여러 번 화를 냈다. 어느 날 농부는 황소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황소의 목에 볏짚을 감아 묶고는 그 볏짚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러자 황소는 목이 뜨거워서 펄쩍펄쩍 뛰다가 죽고 말았다. 이런 악행 때문에 농부는 지옥에서 오랜 동안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까지 그 과보가 남아 여러 형태의 몸으로 태어나 불에 타죽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애완동물로 개를 기르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어디를 가든지 늘 개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그 도시의 젊은이들이 이 여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비웃으면서 개를 쿡쿡 찌르며 웃어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인을 쿡쿡 찔러 대며 놀리기도 했으므로 여인은 창피하여 개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인은 개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단지에 모래를 잔뜩 채워 넣고 줄로 단지와 개의 목을 묶은 뒤 물에 던졌다. 그래서 개는 물속에서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악행 때문에 그녀는 여러 생을 통하여 니라야(niraya, 地獄)에 나서 고통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그 과보가 남아 물에 빠뜨려지게 된 것이었다. 세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목동 일곱 명이 채식을 하는 도마뱀이 언덕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곳에 뱀의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통로를 나뭇가지와 덤불 등으로 꼭꼭 막아놓고 떠나 버렸다. 이들은 집에 가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레를 보냈다. 그동안 도마뱀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일곱 목동들은 이레째 되는 날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해 내어 굴에 가서 구멍을 열고 도마뱀들을 풀어 주었다. 이 같은 악행 때문에 그들은 함께 빅쿠가 되었다가 굴속에 갇혀 이레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지내야 했던 것이며, 그들은 이런 과보를 지난 열네 생을 거쳐서 받아온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한 빅쿠가 탄식했다. "아, 진실로 나쁜 행동을 범하고서는 그 과보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비록 하늘에 있거나 바다에 있거나 혹은 동굴 속에 있거나 간에 말입니다!“ 빅쿠의 탄식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빅쿠여, 실로 그러하니라. 실로 너의 말이 옳으니라. 비록 하늘에 있거나 바다에 있거나 혹은 동굴 속에 있거나 간에 악행의 결과가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세 무리의 빅쿠들은 모두 소따빳띠 팔라(sotāpatti phala. 須陀洹果)를 성취하였다. Na antalikkhe na samuddamajjhe 나 안딸릭케 나 사뭇다맛제 na pabbatānaṁ vivaraṁ pavissa 나 빱바따낭 위와랑 빠위싸 na vijjatī so jagatippadeso 나 윗자띠 소 자가띱빠데소 yatthaṭṭhito mucceyya pāpakammā. 얏탓띠또 뭇쩨이야 빠빠깜마 하늘 위도 아니요, 바다 속도 아니며, 산속의 동굴도 아니요, 그 어느 곳도 아니다. 악행의 결과를 피할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Neither in the sky nor in mid-ocean, nor by entering into mountain clefts, nowhere in the world is there a place where one may escape from the results of evil deeds. (by Acharya Buddharakkhita) 법구경 1저자거해 스님출판샘이깊은물발매2018.02.01. 댓글 4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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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33, 134. 꼰다다나 테라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꼰다다나 테라와 관련하여 게송 133번과 134번을 설하셨다. 꼰다다나 테라는 가정을 떠나 빅쿠가 된 이래 이상하게도 한 여인의 영상이 그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이 여인의 영상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는데, 정작 테라 자신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탁발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두 몫의 음식을 그의 받따에 넣어 주면서 “이것은 스님의 몫이고, 이것은 스님이 동반한 부인의 몫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렇게 빅쿠가 여인을 데리고 탁발까지 함께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서 빠세나디 국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계행이 청정치 못한 저 빅쿠를 이 나라에서 추방해 버리십시오.” 그래서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승원으로 가서 그가 있는 곳 주변을 감시하며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꼰다다나 테라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므로 문을 열고 나와 문에 기대어 섰다. 그때 여인도 그 테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테라는 국왕이 온 것을 알고 왕이 자기 방으로 들어오리라 여겨 기다렸다. 이윽고 왕은 테라의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방 안에서는 여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테라에게 물었다. “그 여인은 어디에 있는 거요?” 그러자 테라는 자기는 여인이이라곤 본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의심을 품은 왕은 잠시 테라를 밖에 나가 있어 달라고 요구했고, 테라가 밖에 나가자 왕은 샅샅이 방 안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여인은 없었다. 그런데 밖을 보니 여인은 테라 옆에 서 있었다. 그랬으나 테라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여인은 사라졌다. 그리하여 왕은 그 여인이 실제 사람이 아니라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왕은 테라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고 선언하고 테라를 매일같이 왕궁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올렸다. 다른 빅쿠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매우 당혹했다. 그래서 그들은 꼰다다나 테라에게 “계행이 없는 빅쿠여, 국왕은 그대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기는커녕 왕궁으로 오라고 초대를 했다지?”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꼰다다나도 지지 않고 그들을 향해서 “너희야말로 계행이 없는 자들이다. 너희들이야말로 여자들과 다니지 않았는가?”하며 대들었다. 결국 일단의 빅쿠들이 이 같은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했고, 부처님께서는 꼰다다나를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아들이여, 네가 지금 말한 대로 다른 빅쿠들이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을 너는 직접 본 일이 있느냐? 아마도 너는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네가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아니하냐? 너는 지난 생에 네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지금 저주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구나. 이제 여래는 왜 너에게 여인의 영상이 따라다니게 되었는지를 일러주리라. 너는 전생에 천상에 살고 있었더니라. 그때 빅쿠가 두 사람이 있어서 그들은 서로 강하게 끌리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느니라. 그런데 너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떼어놓으려고 여인을 가장하여 한 빅쿠의 뒤를 따라다녔느니라. 그때의 그 행위 때문에 지금의 네 뒤에는 여인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된 것이니라. 그러니 여래의 아들이여,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일로 다투지 말라. 너는 한쪽 가장자리가 찢어진 큰북처럼 늘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거라. 그러면 너는 마침내 닙바나(nibbāna, 涅槃)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Māvoca pharusaṁ kañci 마오짜 파루상 깐찌 vuttā paṭivadeyyu taṁ 웃따 빠띠와데이유 땅 dukkhā hi sārambhakathā 둑카 히 사람바카타 paṭidaṇḍā phuseyyu taṁ 빧이단다 푸세이유 땅. 사납게 말하지 말라. 사납게 말하는 자는 역습을 당한다. 악의에 찬 말은 실로 둑카의 원인이 되어 마침내 그에게 보복으로 돌아온다. Do not speak harshly to anybody; those who are spoken to will answer thee in the same way. Angry speech is painful, blows for blows will touch thee. Sace neresi attānaṁ 사쩨 네레시 앗따낭 kaṁso upahato yathā 깜소 우빠하또 야타 csa pattosi nibbānaṁ 에사 빳또시 닙바낭 sārambho te na vijjati. 사람보 떼 나 윗자띠. 만일 자신을 조용하게 지킬 수 있다면 마치 깨어진 징이 소리를 내지 못하듯 할 수 있다면 그는 마침내 닙바나를 깨닫게 되고 사나움도 없어지리라. If, like a shattered metal plate (gong), thou utter not, then thou hast reached Nirvana; contention is not known to thee. 댓글 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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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42. 산따띠 장관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의 장관인 산따띠와 관련하여 게송 142번을 설하셨다. 어느 때 산따띠 장관은 국경의 반란을 평정하고 사왓티에 개선했다. 그러자 국왕 빠세나디는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많은 하사품을 내리는 한편, 그의 명예를 높여 주려고 화려한 연회를 베풀어 어여쁜 기생들로 하여금 그를 이레 동안 모시도록 해주었다. 왕이 베풀어 주는 이레 동안의 향연에 산따띠 장관은 매우 만족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겼다.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한 데다가 어여쁜 여인들에게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산따띠가 그처럼 향연을 즐기던 마지막 날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왕실의 코끼리를 타고 강변으로 목욕을 나갔다. 그는 그때 마침 탁발을 나오시던 부처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평소 같으면 내려와서 부처님께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던 그가 이 날은 만취하여 부처님을 무시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서 어디 가시느냐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그의 태도에 대해 미소를 지으실 뿐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에 아난다 테라는 부처님께서 왜 미소를 지으시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저 장관은 지금 저 모습 그대로 머지않아 여래를 찾아올 것이니라. 그때 그는 여래의 짧은 법문을 듣고 나서 아라한을 성취할 것이며, 아라한이 된 뒤 빠리닙바나(parinibbāna, 般涅槃)를 실현할 것이니라.” 산따띠 장관 일행은 이날 하루를 강변에서 목욕을 한 뒤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며 아주 즐겁게 보냈다. 그런 뒤 저녁때가 되자 마지막 밤을 어여쁜 기생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즐기려고 아늑하고 조용한 정원으로 갔다. 그날 춤을 출 여인은 산따띠가 사랑하는 기생이었는데, 그녀는 장관의 마음에 들려고 이레 동안 금식에 가까운 정도의 음식만 먹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 기생은 그날 저녁 열심히 춤을 추다가 그만 위장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치뜬 상태로 급사해 버리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사태는 산따띠 장관의 술기운을 확 걷어가 버렸다. 그는 어여쁜 여인을 잃어버린 데 대해 큰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망연자실했다.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커서 그는 어디든지 가서 마음의 의지처를 찾고 싶은 생각만 강렬했다. 그래서 그는 동행자들에게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 승원으로 가자고 독촉했다. 그는 승원에 도착하여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있었던 일을 부처님께 세세하게 말씀드렸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장관도 말문이 열려서 부처님께 이렇게 애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제발 저로 하여금 이 슬픔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 의지처가 되어 주시오. 그리하여 제가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선 말씀하셨다. “여래의 아들이여, 안심하라. 너는 너를 도와줄 스승을 바르게 찾아왔나니, 여래는 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스승이며, 너의 참다운 의지처가 되어 주겠노라. 장관이여, 네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나고 죽는 윤회를 거치면서 그 여인이 죽게 되어 흘린 탄식의 눈물이 이 세상의 모든 바닷물보다도 오히려 많으니라.” 부처님께서는 산따띠 장관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신 다음 게송을 읊어주시는 한편 설법도 해주셨다. 그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너는 여인에 대해 집착해 왔으나 이제 너는 마땅히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너는 미래에 다시는 그런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집착하려는 마음조차도 먹지 말라. 네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과 색욕은 조용히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너는 가만히 네 마음을 관찰하여 마침내 닙바나(nibbāna, 涅槃)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산따띠 장관은 즉시 아라한을 이루었다. 아라한이 된 그는 자기를 관찰해 보고 자기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빠리닙바나를 실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저의 시간은 다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써 응락하시었고, 산따띠는 하늘 높이 자란 야자나무만큼의 높이로 허공에 솟아오르더니 결가부좌를 한 채 불[火]의 삼매에 들어 그 자리에서 빠리닙바나를 실현했다. 그렇게 열반에 든 그의 몸은 자기 몸에서 나온 불의 기운에 의해 허공에서 스스로 불꽃에 휩싸여 화장되었고, 뼈는 사리(舍利)가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깨끗한 천을 펴서 그 사리를 모두 모으라고 하셨다. 많은 대중이 모인 어느 때 빅쿠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산따띠는 장엄스런 장식이 달린 장관의 관복을 입은 채 빠리닙바나에 들었습니다. 그를 수행자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브라흐민(속인)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그는 그 둘 모두로 불러도 좋으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Alaṅkaro cepi samaṁ cateyya 알랑까또 쩨삐 사망 짜떼이야 santo danto niyato brahmacāri 산또 단또 니야또 브라흐마짜리 sabbesu bhūtesu nidhāya dāṇḍaṁ 삽베수 부떼수 니다야 단당 so brāhmaṇo so samaṇo sa bhikkhu. 소 브라흐마노 소 사마노 사 빅쿠 비록 그가 화려한 장관의 옷을 입었어도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감정을 다스려 도의 관찰을 이루었고 청정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에 대한 원한심을 버렸다면 그는 브라흐마나(아라하뜨)이자 사마나(출가 수행자)이자 빅쿠(比丘)이다. He who, though dressed in fine apparel, exercises tranquillity, is quiet, subdued, restrained, chaste, and has ceased to find fault with all other beings, he indeed is a Brahmana, an ascetic (sramana), a friar (bhikshu). 댓글 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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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48. 웃따라 테리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웃따라 테리와 관련하여 게송 148번을 설하셨다. 웃따라 테리(장로 빅쿠니)는 나이가 120세였는데, 어느 날 아침 탁발에서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빅쿠를 만나자 자기가 탁발해 온 음식의 일부를 빅쿠에게 공양을 올리겠노라고 청했다. 이때 생각이 깊지 못했던 그 젊은 빅쿠는 나이 많은 빅쿠니가 탁발해 온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몽땅 다 받아 버렸다. 그래서 늙은 빅쿠니 웃따라는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사흘간이나 반복되어 그 사흘 동안 웃따라 빅쿠니는 전혀 음식을 입에 대보지 못한 채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날을 두고 음식을 먹지 못하여 웃따라 테리는 몸이 많이 쇠약해진 것을 느꼈으며, 나흘째 되는 날 탁발을 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그 탁발 길에 웃따라는 좁은 길에서 반대편으로부터 탁발을 해오시는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웃따라는 부처님을 만나자 매우 공손히 예를 올리고 뒷걸음쳐 길을 비켜드렸다. 그러다가 까사 깃이 발꿈치에 밟혀 뒤로 넘어지면서 그만 머리를 다치고 말았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넘어진 빅쿠니에게 가시어 따뜻하게 위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은 이제 매우 늙어 있으며, 따라서 매우 불확실하오. 당신은 몸이라는 것은 때가 되면 마침내 무너지며,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나이 많은 빅쿠니 웃따라는 소따빳띠 팔라(sotāpatti phala. 須陀洹果)를 성취하였다. Parijiṇṇamidaṁ rūpaṁ 빠리진나미당 루빵 roganīlaṁ pabhaṇguraṁ 로가닐랑 빠방구랑 bhijjati pūtisandeho 빗자띠 뿌띠산데호 maraṇantaṁ hi jīvitaṁ 마라난땅 히 지위땅 이 몸은 세월 따라 낡아지는 것 이 몸은 질병으로 가득 차 있고 시들어 가는 것 이 몸이 부패하여 흩어질 때 생명은 끝나 죽는 것이다. This body is wasted, full of sickness,and frail; this heap of corruption breaks to pieces, life indeed ends in death. 댓글 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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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게송 153, 154.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감회를 읊으신 게송 이야기 여기에 나오는 게송 두 편은 싯달타 태자가 최정각을 이루시어 아라한, 또는 부처님이 되시는 순간의 장엄스럽고 영광스러운 감회를 토로하신 깨달음의 시이다. 이 게송들은 부처님께서 제다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아난다 테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싯달타 테자는 고따마(Gotama)의 가계로서 사끼얀(Sakyan, 석가) 족으로 캇띠야(Khattiya 혹은 Ksatriya, 왕족) 계급이었으며, 아버지 숫도다나 왕과 어머니 마야 왕비 사이에 첫아들로 탄생하셨다. 태자는 태어날 때 아주 특출한 아기로서의 신비롭고 기적적인 면을 보인 바 있었다. 이는 태자가 단순히 금생에만 공덕을 쌓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긴 세월을 두고 많은 공덕을 쌓아 왔고,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태자에게는 태자로서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릴 영화가 보장된 탄생이었을 지라도, 그보다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과, 그 과정에서 만나는 엄청난 고통과 번민, 노쇠와 불합리가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태자는 나이 스물아홉이 되던 해(그때는 결혼하여 귀여운 첫아들을 얻고 있었는데)에 진리를 찾기 위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왕실의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수행자가 되었다. 수행자 고따마는 그 후 진리를 찾기 위해 육 년 동안 갠지즈 강의 기슭을 따라가며 당시의 유명한 모든 수행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통달하였다. 그러나 끝내 궁극적 목표였던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었다. 그는 엄격하고 규칙적이며 맹렬하게 육신을 학대하는 고행자로서의 길을 가려고 초인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관습에 불과한 것이었고, 형이상학적이어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태자는 고행을 버리고 자기만의 길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리라 결심했다. 이때 태자는 지나치게 호화롭게 감각적 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지나치게 자기를 학대하며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 둘을 다 버리고 중도(中道)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가장 평화롭고 고요하며 지나침이 없는 이 중도만이 현실에 부합하는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이 중도(中道, Majjhimapatipada)를 가게 되면 완전한 평화인 닙바나(nibbāna, 涅槃)에 이르게 되는데, 중도는 구체적으로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聖道, Ariya-atthangika-magga)로써 설명되었다. 팔정성도는 다음과 같다.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봄. 모든 현상에 대해 무상과 무아의 실상.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 바르게 생각을 함. 정어(正語, Sammāvācā) - 바르게 말함. 거짓, 험담, 이간질, 비방을 안 함. 정업(正業, Sammākammanta) - 바르게 행동함. 선업을 쌓는 것. 노예, 무기, 술, 독약, 관에 시체 담는 것을 취급 안 함. 정명(正命, Sammāājīva) - 바른 직업에 종사함. 정정진(正精進, Sammāvayāma) - 바르게 노력함. 정념(正念, Sammāsati) - 바르게 마음 집중을 수행함. 정정(正定, Sammāsamādhi) - 바르게 삼매(三昧)에 듦. 여기에 제시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은 수행자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당연한 길이자, 최상의 길로서, 사회의 길이며, 인류의 길인 것이다. 누구나 이와 같이 치우침 없이 바르게 살아감으로써 진리가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싯달타 태자는 이 같은 진실을 깨달으셨다. 태자는 이같이 위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극히 평이한 진리를 얻으신 다음 그날 저녁 때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에 으뜸가는 깨달음(Bodhiñaña 혹은 Sabbannutañaña)을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성취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날 밤 초경(7~10시)에 과거 전생을 아는 지혜인 숙명통(pubbenivasānussati, 宿命通)을 성취하셨고, 이경(10~12시)에는 모든 물체의 막힘과 거리의 장애를 받음이 없이 보실 수있는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을 성취하시었다. 또 삼경(12~3시)에는 중생들이 태어나고 죽은 윤회의 법칙을 일어나는 순서와 사라지는 순서에 따라 자세히 아셨다. 그리고 새벽 네 시경 먼동이 터오는 즈음 당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을 관찰하는 지혜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四聖諦, cattāri ariyasacāni)를 깨달으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다. 고성제(苦聖諦, dukkhâriyasacca) : 고통의 현존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集聖諦, dukkhasamudayâriyasacca) :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 멸성제(滅聖諦, dukkhanirodhâriyasacca) : 고통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âniyasacca) :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진리. 이와 같이 모든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는 그 이외에도 성스러운 진리의 특성에 관한 지혜, 진리의 활용에 필요한 지혜, 진리를 활용하여 결과에 달성시키는 지혜, 일체 현상의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를 다 갖추시게 되어 이때부터 완전하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며, 고따마 붇다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12가지 관점에서 명확하고 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부처님이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스스로 성취하신 분으로서 모든 인간계와 천상계, 그리고 브라흐마 세계까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으뜸가는 성인이시며, 스승이요, 붇다이시며, 아라한이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을 이루시는 순간 다음 게송 두편을 읊으셨다. Anekajātisaṁsāraṁ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ṁ anibbisaṁ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ṁ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ṁ 둑카 자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1)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dukkha, 苦)였네.(2) Looking for the maker of this tabernacle, I shall have to run through a course of many births, so long as I do not find (him); and painful is birth again and again.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ṁ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taṁ visankhataṁ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nkhāragataṁ cittaṁ 위산카라가땅 찟땅 taṇhānaṁ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3)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4) 이제 모든 서까래(5)는 부서졌고 대들보(6)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nibbāna, 涅槃)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But now, maker of the tabernacle, thou hast been seen; thou shalt not make up this tabernacle again. All thy rafters are broken, thy ridge-pole is sundered; the mind, approaching the Eternal (visankhara, nirvana), has attained to the extinction of all desires. <주1> 집을 짓는 자 : 집은 인간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을 가리킨다. 그리고 집을 짓는 자, 즉 목수는 욕망, 갈망, 애착, 집착 따위를 비유하신 것이다.] <주2> 이 게송의 의미 : ‘연등불 밝은 빛 여래(dīpaṁkara)께서 나에게 너는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신 이래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고자 백방으로 힘썼다. 집을 짓는 자를 찾으려면 지혜(paññā)가 있어야 하고, 지혜는 깨달음으로 얻어지며, 깨달음을 통하여 집을 짓는 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윤회에 시달렸고, 크나큰 방황과 고통을 겪었다.’는 뜻이다. 이런 방황과 고통의 결과 문제의 근원을 밝혀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번뇌를 뿌리 뽑으신 감격은 다음 게송에서 토로된다. <주3> 집 짓는 자를 봄 : 내적 현상 관찰의 지혜를 통하여 모든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갈망임을 봄. 그러나 그 또한 하나의 현상일 뿐 실체가 없이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함. 그러므로 그 조건의 출입문인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잘 다스리면 번뇌를 쉬어 해탈하게 된다. <주4> 집을 짓지 못함 :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망을 쉬었으므로 깜마(kamma, 業)가 남지 않아 다시는 사대 오온의 몸과 마음을 받지 않는다. <주5> 서까래 : 번뇌를 가리킴 <주6> 대들보 : 근원적인 어리석음, 무명(無明)을 가리킴. 댓글 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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