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애지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김용칠 성재봉
■ 외눈박이 씨앗 외 4편 / 김용칠
외눈박이 씨앗
늦은 오후 어둠의 기침소리가 장터에 요란하다
골목마다 축축 처진 채소들
여기저기 상처 난 어제의 모습을 잊은 채 널브러져 있다
햇살을 마주한 할머니는 비닐봉지에
멍에 같은 이파리를 자꾸만 밀어 넣고 있다
행인 두 사람이 살진 밤 어두운 사슬에 묶여 걷고 있는데
두 주먹 불끈 쥔 손 안에서 울음이 터지듯
바람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생각이 깊으면 멀어지는 것들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검게 그을린 씨앗에서는 감성을 잃은 피가 흐르고 있다
이파리에선 짙푸른 전설이 켜켜이 쌓이고
외눈박이 씨앗의 세포들 새벽시장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 둥근 살점들이 익어가면 지상의 무한한 생명들에게
새로움의 시작이 될 것이다
어쩌다가 부딪히는 찰나의 무한함이다
낯선 영혼의 씨앗으로 태어난 나는 외눈박이입니다
물 연꽃
어제를 배반하지 않은 해묵은 당돌함으로
여름의 표시이다
저 넓은 연못 위에 그 꽃이 피어나면
오렌지처럼 옷을 갈아입고 내부를 드러내 놓는다
짧고 뜨거운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아침에 서둘러 햇살처럼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한다
한 개의 백조 같은 알을 품기 위해 부풀어 오르는
출렁거린 몸부림 속에서
어떤 생각으로 피어 있을까
벌써 하얀 꽃이 푸른 그릇 속에서 열화를 견디고
물과 해의 순결한 손녀를 낳았구나
물의 관조에서 아름다운
그 가벼운 유혹의 색조가 없었다면 꽃잎들은
제가 하얗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바람이 채워주는 넓은 하늘과 진흙밭으로 뒤섞인
그때마다 입 맞추는 빛깔
여름의 손바닥보다 가시가 돋는 발톱
미망의 질투 물결로 휩쓸려 가며
반은 잠겨진 채 긴 뿌리가 건조되는 반대편에서
물 연꽃 그림자 위에
가슴 절반을 내놓고 있으리라
도시에서
그 얼마나 그리웠던가
당골네가 천년을 두들기는 그리움으로
이 가을 목청을 흔들대는 해자락에서
웅크린 채 울먹거리는 가을 낙엽들
도시에는 저마다 낯설은 꽃심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통통히 살찐 밤 고해를 하듯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 도시는 새로운 꽃 덤불 속에 피는 꽃심이다
지난해 어둠에 갇힌 듯
아직도 유성처럼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밤 풍경 창마다 마지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꿈속 사연들 알 수 없는 거품으로
메말라 죽은 사체들을 끌고
부활의 술을 뒤섞어 붓고 있을 것이다
도시는 세찬 물결만 없으면
넘치는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날을 기다리는 거다
나는 달무리에 걸린 촉각의 손마디에
鄕愁를 뿌리며
이 도시에서 우거진 푸른 숲 흔들리지 않는다면
비둘기처럼 날아오른 여행길 반려자처럼
춤추는 꽃심 살갗도 만지며
천년을 높이 들어 내 모든 시간을 정리할 것이다
루나의 이야기
첫 봄빛 발자국을 밟아보신 적 있나요
그도 가벼운 햇살의 몸짓들을
보드라운 송이로 피어나기 전에는 길 없는
길을 걸었답니다
그가 묻지 않았을 들판을 가로지르며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흔적을 남겨 놓았고
내가 지금 앉아 있는 황톳빛 들판에서 죽어가는
한 생명을 껴안고 있답니다
사랑은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연둣빛 세상이 지나가고
시든 푸성귀 같은 세상이 온다 해도
사랑은 늘
생각의 열쇠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
지난가을 기억이 나요
구름처럼 떠돌던 가을빛 피부 한 채를 거둬들여
침묵으로 단단히 묶어
시간 속에 걸어 두었답니다
언제부턴가 투명한 봄빛 사랑 마디에서 생명을 두드리는
아랫배가 팽팽히 불러오기 시작할 테니까요
고속 열차
어두운 골목을 지나
큰길 가에 서 있자 콜택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역으로 달리는 택시는 시간을 맞추기 위에 안달이 났다
토요일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많았고
한옥마을 찾는 관광객들인가 싶었다
빙하를 물고 떠다니며 왔는지 표백된 구름이 차갑고 더 하얗다
구름의 부피를 재며 푸른빛이 돋은 하늘이 무한히 높았고
나는 침묵을 목 안으로 넘기며 가라앉은 생각에 잠긴다
먼 역과 이곳의 역 사이에서
마음과 마음이 열차처럼 헐떡거렸다
경직된 다리를 펼치고 가끔 아픈 무릎을 만지며
차창 밖 햇빛을 쬐고 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싸그락거린 눈알이 계절을 게워내고
붉은 신음을 내는 눈꺼풀 갈색 나뭇가지 귀처럼
천 개 상처를 가진
동경의 봉우리가 나타났다 꽃이 환하게 피고
닫힌 망막의 질긴 뼈와 함께
노동에 갇힌 묵은 몸무게가 여백을 전신에 흩트려 놓는다
먼 길을 달려 도착하자 고속 열차역 건물이 하마처럼
입술을 벌린 채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김용칠_본명 김용만. 청주출생. (前)케이티앤지 근무. 문학의숲 사무국장 및 감사 역임.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 동인.
■ 닭발 외 4편 / 성재봉
닭발
기울어진 가세는 삶의 터전을
읍내에서 낙동강 칠백 리
제일 끝자락으로 내몰았다
빨간색 완행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삼십 리 비포장길을 달려야 했던
중학교 시절
낡은 차부에서의 야윈 닭발 튀김은
단돈 오십 원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마른버짐 가득한 아이의 탐미였다
마지막 발톱을 삼킬 즈음
늙은 소 같은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신
아버지와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토바이만 짖어댈 뿐
부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닭발은 못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박혔고,
가난한 들판의 노을은 붉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엄마의 눈물
아기가 눈 속 티끌베기로 눈물 흘릴 때
엄마는 보드라운 혀로 씻어 주었습니다
아기의 눈은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소년의 철없는 복숭아 서리가 들통났을 때
엄마는 주인 앞에서의 꾸짖음과는 달리
집에 돌아와 포근히 안아 주었습니다
소년의 마음은 선해졌습니다
청년이 모진 세상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할때
엄마는 별것 아니니 힘내라고 웃어주었습니다
청년의 심장과 머리는 튼튼하고 강해졌습니다
불혹을 훌쩍 지나 엄마를 찾은 어느 날
엄마는 아들을 만나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중년의 가슴은 먹먹해졌습니다
엄마의 숨겨진 눈물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최고의 여행
나의 학사모는
노을조차 가난하여
별과 달마저 울고 간 고향의 밤하늘이다
나의 학사모는
밤새 산통을 견딘
고향 늙은 염소의 메마른 수염이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와서
시든 파뿌리 같은 머리에 학사모를 눌러쓴
엄마의 백합 같은 말씀
생애 최고의 여행을 선물해준 아들아
고맙고 고맙다.
아픈 꽃과 나비
당신 손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입니다
그 고운 손을 처음 잡던 날
나는 봄 향기에 홀린 나비가 되었답니다
당신이 시들어 버릴까봐, 차마 향기를 잊어버릴까봐
힘들고 슬픈 날에도, 외롭고 지친 밤에도
나는 애오라지 당신 여린 꽃잎만을 부여잡고
무거운 날갯짓만 씀벅씀벅 해대었습니다
불어오는 서풍에 의초롭던 노을마저 슬퍼하던 어느 날
당신은 홀연히 날아든 건초염*으로 꽃가지가 아프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내 서툰 날갯짓의 근원이 당신의 아픔이었고
당신은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잡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빨리 나아 줄래요
이제는 내가 당신 손을 꼭 잡고 나풀나풀 날아서
저 외딴섬 가장 외로운 별에게도 당신의 향기를 전하겠습니다
당신 손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입니다.
*힘줄을 싸고 있는 막에 생기는 염증, 몹시 아픔
오이도행 김밥 열차
휴일 아침
사당역 오이도행 첫 번째 승강장
까만 뿔테 안경의 남자는
삶은 우엉 빛의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팩에 고릴라 인형을 매단 여자는
김밥 네 줄이 담긴 까만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남자는 서울이 회색 공룡알 같다 하고
여자는 삼천포 죽방멸치가 짭쪼롬하다며
서로 각자의 긴말을 이어갔다
지하철에서 놀이동산의 청룡열차로 환승한 그들은
긴 수평선 너머 먼바다로 향하였다
열차는 사라지는 해를 따라가다가
미처 알지 못한 수평의 벼랑에서 급하강하였고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호흡에 김밥을 삼켰다
석양은 단무지 빛으로 물들었고
남자와 여자의 오이도행 김밥 열차에는
9월의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성재봉_경남 창녕 출신.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학박사(사회법 전공). 고용노동부 고용보험심사위원회 전문위원 재직 중. 2015년~풀꽃 시문학회 회원. 2022년 공직문학상 입선
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 김용칠 씨와 성재봉 씨의 시에 대하여
시는 삶의 지혜의 소산이며, 삶의 지혜는 이 세상을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사는 기술이라고 할 수가 있다. 기술이란 묘기이며, 묘기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언어의 예술이며, 언어의 예술처럼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이 모든 인간들의 최종적인 목표이며 행복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느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시인(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그의 지혜(언어)로서 이 세상의 그 모든 어렵고 힘든 일을 다 극복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지는 이번호에도 [외눈박이 씨앗] 외 4편을 응모해온 김용칠 씨와 [닭발] 외 4편을 응모해온 성재봉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외눈박이란 한쪽 눈을 잃어버린 사람을 말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이 깊으면 멀어지는 것들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는 최고급의 지혜를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낯선 영혼의 씨앗으로 태어난 나는 외눈박이입니다”, “한 개의 백조 같은 알을 품기 위해 부풀어 오르는” [물 연꽃], “이 도시는 새로운 꽃 덤불 속에 피는 꽃심이다”의 [도시에서], “사랑은 늘/ 생각의 열쇠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의 [루나의 이야기] 등, 김용칠 씨의 시는 ‘지혜의 꽃다발- 언어의 꽃다발’로 피어나기 위해 ‘외눈박이 씨앗’으로 기나긴 동면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성재봉 씨의 시는 ‘가족의 드라마’이자 ‘가난의 드라마’이며, 삶의 벼랑끝에서 온몸으로 쓴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낙동강 칠백 리 제일 끝자락에 살며 “단돈 오십 원의 닭발튀김”으로 허기를 달래던 중학생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한([닭발]), 아들의 “철없는 복숭아 서리가 들통났을 때” 꾸짖기 보다는 집에 돌아와 포근히 안아주던 [엄마의 눈물], 마침내 그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모를 씌워드렸을 때 [최고의 여행] 선물이라고 기뻐하셨던 어머니, 부부애의 진수인 [아픈 꽃과 나비] 등----. 가난은 삶이 벼랑끝으로 몰린 것을 말하고, 이 벼랑끝의 삶은 묘기가 된다. 산다는 것은 묘기이고, 이 묘기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가난은 시의 텃밭이고, 이 가난(고통)과의 싸움은 삶의 예술이 된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정진하고, 또 정진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 (글: 반경환)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 / 하록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보며
총총 수 놓듯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 줌 숨
침묵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
우리 떨어지면 어딘가 닿기나 할지
나 절벽의 속살이 궁금해
우리 부딪히면 어딘가 금이나 갈지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눈부시도록
곳곳에 밤의 살점들이 쌓여 고개를 들 수 없어
저마다 두고 간 불의 그림자가 남아
오고
가고
밀려오는 비명과
쓸려가는 한탄과
지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선 여자가 손잡고
송이송이 울면서도
빛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숨 쉬듯 사라지는 벼락처럼
우리 부릅뜬 얼굴로 눈부시도록
소나기
간절함의 부피를 깨닫는 순간
우울함을 빼앗길까 몸을 사려 웃는다
아무도 나올 수 없게 세상을 잠그면
황폐하고 자유로운 작은 방
파란 피부의 내가 하나
저무는 땅
떨어지는 하늘
서슬퍼런 빛줄기를 고스란히 들쓰며
어서 와, 내 방에
색의 뭇매
사소한 사람들
자꾸 세상이 꺼져
숨 막히는 아득함이 더없이 아늑할 때
이렇게 쉽게 휘청대는 마음을
주섬주섬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멀찍이 웅크려서
위태로운 우울의 안전한 슬픔
우리가 가엾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 할까요
굳이굳이 여기 있다고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그 서투름
벼려온 악의조차 어설픈
우리는 전부 사랑으로 얽혀 있다
시선을 떼지 못한 사소한 실수로
희망
깃털로 만든 집
얼마나 포근하던지 따뜻하던지
꿈결 같았던 말엔 짜증이 났어
나는 다만 꿈속의 사람
숨을 쉬기엔 너무 희미한
불에겐 뿔이 있어서
너를 할퀼 수 있을 텐데
먼지 한 톨이 아쉬워 털지 않고 줍는다
불어 만든 달빛을 청량하게 식혀가는
나는 일월의 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독하게 외로울 거야
울지 말란 이야기가 의아할 거야
아 너를 사랑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행복해
그래도
하록_2014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이제부터 나는 북극곰을 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을 북극곰이라 부르겠다 외 4편 / 솔미숙
이제부터 나는 북극곰을 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을 북극곰이라 부르겠다
무너져 내리는 빙하를 보고는
겁에 질려 달려가는 사람들
사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후변화입니다
북극의 온난화는 세계평균보다
두 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갈수록 빨라지는
해빙에 따른 서식지 상실로
2008년 5월 미국멸종위기보호법에 의해
사람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2050년에 사람은
완전히 사라질지 모릅니다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은
북극곰들의 화석연료 사용과
북극곰들의 무분별한 산림벌목
북극곰들이 만들어내는 쓰레기입니다
북극곰들은 플라스틱과
비닐 같은 석유제품 사용과
에너지 사용 비료 사용 등을
최대한 억제해야만합니다
2050년에 사람은 멸종할 수도 있습니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십만 개의 푸른 부채가 진종일
날아라 날아라 날아라
마지막 백련 한 송이를 두고
바람을 일으켜 입을 닦고 있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다 저녁이 되어서야 드디어
푸드덕, 이쪽을 차고 오르는 소리
하얀 번뇌들, 깃털처럼 몇 떨구어 놓고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불교경전 천수경의 첫 부분으로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씻어내기 위해 외우는 일종의 주문.
챠강티메
나의 챠강티메는 어디에 있을까
흰빛이 섞인 붉은 모래 언덕
사람의 옷을 벗어던지고
오래 전 바람을 걸친 여인이
젖빛 낙타를 몰고 떠난 곳
나는 지금 시원을 찾아가고 있다
잠을 줄이고 허기를 즐기며
어제는 몸도 씻지 않았다
사막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어
수많은 저녁의 슬픔과 밤별과
오로지 눈물만이 마중물이 되어
바다의 기억을 꺼낼 수 있다
간절함이 더욱 태양을 달구지만
간절함마저 다 사라질 때
겨우 우리가 흘린 땀만큼
아프지 않은 아침이 올 것이다
툭하면 부서지는 모래더미 속에도
굳센 근육 하나 단단하게 품고 있어
끝내는 산을 지고 산을 넘는데
바람을 수영하는 푸른 하닥
멀리 사라진 우리의 곁이
맨 얼굴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 그리운 챠강티메는 어디로 갔을까
눈썹차양 아래 자신의 마른
그늘이라도 꼭꼭 씹어서
죽어가는 어린 것을 먹이고 있으려나
*챠강티메-몽골어로 하얀 낙타를 뜻하며 아주 귀하고 신성한 존재로 여김
*하닥-신에게만 바치는 푸른 천
꽃마리
동굴처럼 검은 쌀독에다 외롭게 가둬 키우던 짐승인가
그렇게 어둠만 먹여 키운 짐승인가
타닥 탁 탁 마른 콩깍지 타던 붉은 아궁이 속
활활 타는 불만 먹여 키운 짐승인가
무명 삼베적삼 시린 물에 빨아 널 때 팍 팍 방망이로 두드려
빈 밥그릇만 먹여 키운 짐승인가 밤새도록 흰 철쭉이 물어뜯는 것
가끔은 푸른 눈동자에 보랏빛 뿔이 유난히도 빛나던
어여쁜 엄마, 요즘 내 가슴이 왜 이리도 아프지?
내가 붙잡을 겨를도 없이 꽃길 사이로 사라진 건 분명
꼭 엄마만한 짐승이었어
이토록 질기고 뜨건 짐승을 눈물 울타리 단 한 번도 넘지 않게
어떻게 가슴 속에 품고 살았는가
열 개의 혓바닥으로 방바닥을 핥아대며
단추를 주워서는 싹싹 닦아 내 입에다 넣어주려 애쓰는 엄마
낡은 슬리퍼를 뜯어서는 고기라고 먹을 만하다고 어여 먹으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가 타는 엄마
자신을 다 잃어버리고도 엄마는 왜 이다지도 엄마인거야
꽁꽁 싸맨 저 보따리들은 다 어디로 갈 준비인거지
걸음마조차 불안해져서 점점 네발이 익숙해져가는
엄마 왜 그래 엄마가 왜 그래
참고 있는 계절이 물러터지기 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은 풀꽃 꽃마리를 보러 가야지
방금 짐승을 다녀온 엄마가 벗어놓은 짐승이 내게 꼭 맞는 걸
씹을수록 쓰디쓴 할매를 뱉어봐 자두맛 나는 사탕을 줄게
멀리는 못가 푸른 별꽃이 피어있는 저곳 거기까지만 같이 가줄게
내게는 아직 당신을 담아 품을 자궁이 없는 걸
나는 지금 티벳에 있다
어느 사원 마당 큰 나무 아래
손수 엮은 크고 작은 바구니를 두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차를 마시는
그들은 참으로 조용했다
큰 나무 아래 작은 나무 같았다
서로 가까이서 들고 내쉬는
숨으로 소통을 하는 것인지
너와 내가 하나인 듯 평온이 흘렀다
관광객들 끊임없이 들락거려도
어떤 커다란 짐승이 와서
수시로 볕을 헝클어 놓아도
타르쵸를 지나온 바람을 읽는 지
그들의 눈빛은 부처처럼 고요했다
색실을 섞어 땋아 내린 긴 머리와
예쁜 무늬 앞치마 옥빛귀걸이는
내게 또 하나 아름다운 경이었다
말없이 일어나 삼보일배 삼보일배
따라온 아이들도 말없이 삼보일배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듯
그곳이 나는 참 좋았다
두어 시간 나도 벙어리로 있다가
곁에서 그들과 숨을 섞다가
발길을 돌려 사원을 나오는 길
전생에 혹 내가 잃어버린 가사일까
딱 한 송이 피어있는 주홍빛 한련화
아쉬움에 오래오래 들여다 보았다
살짝 만져도 보았다 보드랍고 고운 그것
괜찮다 괜찮다 마음을 쓸어주는
티벳 대나무 피리소리 들으며
나는 지금 그곳에 있다
행여 삐끗하면 그곳을 놓칠까
햇살 아래 쪼그려 앉았던 그 자리
움직임도 죽이고 숨도 죽이고
파란 하늘 펄럭이는 룽다를 본다
마음에는 높고 찬 설산을 품고
땅인 듯 물인 듯 풀인 듯 꽃인 듯
평화로움으로 평화를 지키는
없는 듯 있는 그들을 느낀다
나는 지금 티벳에 있다
솔미숙_본명 박미숙
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 하록 씨와 솔미숙 씨의 시에 대하여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하고 그 꿈과 목표가 일치한다면 그 사회는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내가 나의 삶에 충실하고 그 꿈을 추구하면 공동체 사회는 나의 삶과 꿈을 다 받아주고,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마음을 위로해주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면 나는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한한 자부심과 함께, 나의 행복이 공동체 사회의 행복이 되고 우리 모두가 다같이 잘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공동체 사회가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으로 그 꿈과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는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삶과 꿈만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버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인들이 방법적인 부정 정신을 통하여 도덕과 윤리와 역사와 전통을 비판할 때에는 이 ‘비판의 힘’으로 공동체 사회를 개선하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을 응모해온 하록씨와 [이제부터 나는 북극곰을 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을 북극곰이라 부르겠다] 외 4편을 응모해온 솔미숙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하록 씨의 세대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이지만, 그러나 그의 슬픔과 좌절과 절망은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그 “벼랑의 바닥을 궁금”해 하면서도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삼으려는 ‘희망의 찬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저무는 땅/ 떨어지는 하늘/ 서슬퍼런 빛줄기를 고스란히 들쓰며// 어서 와, 내 방에/ 색의 뭇매”의 [소나기],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독하게 외로울 거야/ 울지 말란 이야기가 의아할 거야// 아 너를 사랑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행복해/ 그래도”의 [희망], “밀려오는 비명과/ 쓸려가는 한탄과” “빛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의 [눈부시도록]의 시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시는 삶의 의지의 초점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어떤 고통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록 씨의 시가 사회 역사적인 토대를 잃고 자아 성찰과 내면의식으로 침잠해 있다면, 솔미숙 씨는 문명비판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인간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구도자, 즉, 언어의 사제로서의 ‘시인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북극곰을 인간화시키고 인간을 북극곰으로 변용시킨 ‘역발상의 상상력’은 2050년 ‘인간이 멸종된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담고 있으며, 하루바삐 무분별한 벌목과 화석연료 사용과 쓰레기의 오염으로부터 이 지구를 구원해내야 한다는 역사적인 사명과 의무감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이 인간을 품어 기르는 것이지, 인간이 자연을 낳고 품어 기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길은 구도자의 길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하얀 낙타를 찾아가는 [챠강티메], 중증 치매의 엄마와 함께 “작은 풀꽃 꽃마리”를 보러가고 싶다는 [꽃마리], 시와 삶, 혹은 종교와 삶이 일치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꾸고 있는 [나는 지금 티벳에 있다] 등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모든 학문과 역사와 정치의 예비학은 비판이며, 이 비판이 없는 사회는 나치와 스탈린 체제처럼 꿈과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현대 사회는 자본독재의 사회이며, 이 자본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사라진 사회이고, 그 결과로서, 민주화의 탈을 쓴 독재체제가 뿌리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하록 씨의 시는 참으로 맑고 깨끗하고, 참으로 아름답고 슬프다. 이에 반하여, 솔미숙 씨의 시는 건강한 문명비판과 함께, 역사 철학과 존재론적 성찰이 더없이 무르익어 감미롭다고 할 수가 있다. 하록 씨는 역사 철학적인 사유를 넓혀 가야 할 것이고, 솔미숙 씨는 ‘역발상의 상상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시인의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인의 길은 구도자의 길이고, 그 멀고 험한 길에 무한한 행운이 깃들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글 반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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