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20여년 뒤 미국은 아프간 전쟁을 눈앞에 두고 과거 소련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하여 냉철한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 전략이 불분명하고 정보의 부재 탓이라고 꼽았다.
그 근거로...
첫번째, 수백년 동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아프간 사람들의 반 외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프간의 항전 의지를 과소평가한 점,
두번째, 침공의 정당성을 없어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과 서방이 아프간의 저항군을 후원하는 것을 막지 못한 점,
세번째, 아프간 특유의 혹독한 지형과 기후를 파악하지 못하여 혹한과 산악지대에 적합한 전술과 부대를 투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군은 대부분 훈련이 불충분하고 사기가 낮은 징집군이었으며 동유럽의 환경에 맞춘 대규모 기계화 부대는 아프간의 산악지형에 걸맞지 않아 경무장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들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어 막대한 돈과 장비만 낭비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아프간"에서 "베트남"으로 글자만바꾸어도 거의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소련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치룬 대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셈이었다. 공교롭게도 1970년대에는 미, 소, 중 삼대국이 하나같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한 나머지 주변의 약소국을 침략했다가 호된 댓가를 치루고 물러나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프간에서 소련군이 맞딱들인 최대의 장애물은 험준한 산악지형과 혹독한 기후 조건이었다. 아프간은 국토의 88%가 사막과 산악지대인데다 해발 고도가 평균 4천m에 달하는 북부는 공기가 희박하여 사람이 활동하기 어렵다. 게다가 겨울에는 영하 40도 밑으로 내려가 혹한의 동토에 맞먹을 정도이다. 반면, 평지는 영하8도에서 영상 2도로 비교적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는 등 계절별, 지역별 기후 차이도 매우 크다.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폭설이 내리는데 남부에서는 폭우가 쏟아진다.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데 중대한 장애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변변한 도로가 없고 소수의 병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커버해야 하는 소련군으로서는 헬기가 필수적이었지만 고산지대에서는 초속 12m가 넘는 강풍이 불기 쉽상이라 헬기를 운용하기 매우 위험하였다. 아프간 게릴라들은 바로 이런 곳을 은신처로 삼아서 소련군을 기습하고는 사라지기 일쑤였다.
소련군에게 있어서 아프간은 베트남의 정글보다도 훨씬 가혹한 환경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자신들이 직접 전투를 맡기보다는 현지 군대를 강화하고 KGB를 흉내낸 아프간 비밀경찰(KHAD, Khadamat-e Aetla'at-e Dawlati)를 조직하여 저항세력들을 진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르말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아프간 군 지휘부는 거의 마비상태나 다름없는데다 병사들의 태반은 달아나 무자헤딘에 가담하였다.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봉급을 더 올리고 강제로 신병을 징집했지만 탈영병만 연간 1만명이 넘는 등 사기는 엉망이었고 전투력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소련이 아프간군을 증강하면 할수록 오히려 무자헤딘을 돕는 꼴이었다. 결국 소련군이 전면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아프간군은 전쟁이 절정이 되는 1986년에 오면 최대 30만명에 달하였고 그 외에 8만명에 달하는 KHAD도 있었으나 태반은 서류상의 숫자에 불과하였다.
이른바 "판지시르의 사자(Lion of Panjshir)"라 불리는 아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soud, 1953~2001)는 아프간의 "응우엔지압"이라 할 만한 인물로서 소련군에게 가장 악명 높은 대표적인 저항군 지도자였다. 그는 아프간의 명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왕정 시절 아프간 공군의 대령을 지냈다.
냉전 시절 아프간 사회는 소련식 사회주의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에 반발하여 외세를 배척하고 이슬람식 전통을 고수하는 세력이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마수드 역시 카불 대학을 재학하던 중 부르하누린 라바니 교수가 조직한 무슬림 청소년단에 가입하였고 다우드 정권에 맞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파키스탄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하였고 이 때문에 과격파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였다.
덧붙여, 이 때 그와 함께 무슬림 청소년단을 이끌었던 많은 학생 지도자들은 훗날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대표적인 무자헤딘 지도자가 되었고 북부 동맹을 이끌게 된다. 그 중에서도 마수드의 스승인 라바니 교수는 소련군이 철수한 뒤 아프간의 새로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6년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카불을 버리고 북부의 파이자바드(Faizabad)로 철수했지만 여전히 UN과 국제사회에서 아프간의 정통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2001년 11월 미국이 아프간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자 라바니는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프간을 카스피해의 석유 자원을 파키스탄으로 운송하기 위한 전략적인 연결 통로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부시 행정부는 무시하고 대신 다국적 석유 회사 유노칼의 고문을 지낸 하미드 카르자이를 선택하였다. 그를 앞세워 미국에 고분고분한 친미 정권을 세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카르자이가 비록 나름의 명망은 있지만 아프간 국민들 사이에서 변변한 정치적 지지 기반이 없어 혼란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라바니는 카르자이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대신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겨주고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이후 평화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창 탈레반과 평화 협상을 벌이던 2011년 9월 20일 자택에서 알카에다의 자살 폭탄 테러를 당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1978년 4월 군부 쿠테타로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타라키의 공산 정권이 철권통치를 하면서 이슬람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과격한 사회주의 개혁을 강행하자 아프간 각지에서 시위와 반란이 일어났다. 파키스탄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던 마수드는 7월에 파키스탄과 인접한 누리스탄(Nuristan)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30여명의 추종자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근 주민들에게 카불의 친소 괴뢰 정권에 맞서 성전을 벌이자고 선동하였다. 이 때 그의 수중에는 고작 17정의 낡은 소총과 현찰 130달러가 전부였다. 이것이 장장 20여년 동안 소련군과 탈레반에 대항하여 판지시르 계곡에서 벌어질 투쟁의 서막이었다.
1979년 7월 6일 마수드는 정부군을 공격하여 첫번째 무장 봉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빈약한 무기와 강력한 정부군의 반격 앞에 여지없이 격퇴당하였다. 자신의 오합지졸 군대로는 잘 무장된 정규군을 상대로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그는 지형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수드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군의 침공 이후였다. 소련군이 아민 정권을 박살내고 카불을 점령하자 그는 투쟁의 대상을 소련군으로 바꾸고 외세를 몰아내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그의 군대는 난민들을 긁어모아서 조직한 1천여명의 오합지졸과 파키스탄을 통하여 입수한 한 세대 이전의 구식 리엔필드 볼트 액션식 소총 7백여정을 가졌을 뿐이었지만 소련군 보급 부대를 여러 차례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마수드의 거점인 판지시르 계곡은 카불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곳으로 살랑 고개(Salang Pass)와 인접해 있다. 소련군이 카불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려면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동맥로이기도 하였다. 살랑 고개의 좁은 간선도로를 따라서 보급물자를 잔뜩 실은 소련군 보급 차량들의 행렬은 길게는 수km에 달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소련군이라도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마수드는 주변의 산속에 매복해 있다가 소련군 보급 행렬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최선두와 최후미의 차량을 격파하여 꼼짝도 못하게 한 다음 습격하였다. 소련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일쑤였다.
마수드로 인하여 병참선을 위협받게 된 소련군은 1980년 9월 아프간 정부군과 함께 판지시르 계곡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산악지대에서 다람쥐처럼 움직이는 마수드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수드는 우세한 소련군이 나타나면 잽싸게 숨었다가 돌아가면 다시 나오는 식이었다. 또한 게릴라 전쟁을 하려면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공포와 보복으로 지배하는 대신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서 민심을 얻었고 이들을 통하여 소련군과 아프간 정부군의 동태를 속속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아프간 군 내부에도 마수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마수드는 며칠 전 또는 몇달 전에 이미 소련군의 작전을 파악하여 대비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80년 9월부터 1981년 9월까지 네차례에 걸친 토벌전은 별다른 성과 없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물론 잘 훈련되고 중전차와 무장헬기, 전투기를 보유한 소련 기계화부대를 상대로 정면 싸움은 자살 행위였고 무자헤딘의 사상자 또한 결코 적지 않았지만 소련군이 자랑하는 막강한 화력과 최신예 무기도 50~100여명 단위의 소규모로 분산되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자헤딘을 추격하는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약이 오른 소련군 지도부는 그리고리안(N.G. Ter-Grigoryan) 준장의 지휘 아래 기계화 부대와 공수 부대로 구성된 1만2천명에 달하는 병력과 항공기 26대, 헬기 104대를 판지시르 계곡에 투입하였다. 또한 주변의 모든 통로를 차단하고 인근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여 마수드의 게릴라들을 고립시켰다.
1982년 5월 16일 소련군 포병의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 폭격으로 시작된 제5차 토벌 작전에서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6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마수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릴라들은 소련군을 피하여 탈출한 후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소련군은 보다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버릴 생각으로 1982년 8월 제6차 토벌에 나섰다. 소련군 1만명에 아프간군 4천명이 전차와 무장헬기, 폭격기, 스페츠나츠까지 동원하여 소위 "search and destroy" 작전을 실시했지만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마수드는 길게 늘어진 소련군 대열을 습격하였고 아프간군의 반란을 선동하였다. 소련군의 사상자는 3천여명에 달했으며 1천여명의 아프간군이 탈영하여 마수드에게 가담하였다.
다음해인 1984년 4월 19일 소련군은 1만1천여명의 병력과 아프간군 2600여명, 항공기 200대, 헬기 190대를 투입하여 제7차 공세에 나섰다. Tu-16, Tu-22, Su-24 등 다수의 폭격기가 출격하여 판지시르 전역에 대한 맹폭격을 가하는 등 마수드의 게릴라들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 하였다. 마수드의 손실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전력을 보존한 채 파키스탄 국경으로 일단 물러난 후 소련군이 철수하자말자 다시 반격하여 700여명의 아프간 군 병사들을 생포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소련군은 이후로도 1984년 9월과 1985년 6월에 두차례 더 작전에 나섰으나 모조리 실패로 끝났고 결국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소련군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은 마수드만이 아니었다. 동부와 남부에서도 무자헤딘들이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1981년 말 소련 공산당 정치국 보고에 따르면, 카르말 정권은 국토의 15%미만을 통치하고 있으며 소련군이 주둔한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자헤딘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글씨체가 위와 아래가 달라서 보기가 불편하시다면 죄송합니다 ㅠㅠ...
글씨체를 바꾸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글씨체가 더 이상하게 되고 문단이 제 멋대로 괴상망측하고 흉칙하게
나뉘어져서 그냥 위는 굴림체, 밑은 Malgun체로 했습니다 물론 죄다 굴림체로 바꾸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너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구찮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