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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불황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②기업가에게 사업상의 위기란 도약대와도 같다.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그 기업가는 한결 폭넓게 원숙해진다.
③ 난관은 정복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호암어록 기업은 사람이다’에서
입사 5년의 중견사원 K씨에게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삼성은 내 집입니다”라고 말한다. 몸을 담고 있는 기업체가 종업원의 ‘집’임에는 틀림없으나 ‘내 집’이라고 자부하며 가슴을 펴는 이 ‘내 집 의식’은 삼성맨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삼성을 가리켜 “사람을 잘 쓴다”, “인재의 보고(寶庫)”라고 하는데, 다음에 삼성그룹 총수이며 삼성물산 회장, 한국비료 사장인 이병철 회장의 ‘사람의 삼성’이라는 경영철학을 들어보자.
“기업인이라고 하면 흔히 자기일신(自己一身)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는 오해도 없지 않은 듯하나 참된 의미에서의 기업인이란 사업을 통하여 국가경제를 부강케 하고 국민경제생활을 윤택케 하는 사회봉사의 신념을 지닌 인간인 줄로 믿는다. 나는 어떤 사업을 경영하든 간에 그 사업이 사회복지 향상에 공헌하고 종업원들의 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 사업이 막대한 이익을 올린다 해도 사업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해왔다.”
삼성의 성장에는, 사업성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 앞을 내다보는 직관력과 더불어 사업을 담당해 나갈 수 있는 인적구성(인적자원조달), 즉 ‘사람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이 뼈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계수와 조직을 중시하는 이회장을 가리켜 ‘공부하는 경영자라기보다 공부시키는 경영자’라는 평가가 있다. 아랫사람들에게 테마를 주며 스스로 공부시켜서 본인을 계발시키고, 경영기획기능을 통한 합리적 근거 파악을 잊지 않는 것 등은 그가 밀고만 나가는 사업가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창간호(1966년 10월호)
02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강신호 동아쏘시오그룹 회장
‘박카스’라 하면 멋쟁이 서울의 신사로부터 시골의 갓 쓴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박카스란 원래 희랍의 주신(酒神)으로, 필자(강신호 당시 동아제약 전무)가 독일에 유학하고 있을 때(1956년 3월경) 공리양행(公利洋行) 함부르크 지점장 슈말후스 씨의 안내로 함부르크 시청 지하식당에 들른 일이 있는데 그때 식당 입구 양쪽에 한줌의 보리이삭과 포도송이를 들고 서있는 박카스의 커다란 석고상을 보고 떠오른 착상(着想)이 오늘날 박카스가 탄생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신제품의 구상에 몰두했었는데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약(藥), 즉 현대생활에서 꼭 필요로 하고 대중에게 널리 애용 받을 수 있는 제품을 찾아내던 끝에 결국 사람이 살아가려면 건강이 제일이겠고 따라서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많은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새로운 보건약품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이나 우리나라 몇 개 제약회사에서는 종합비타민제의 개발에 주력해서 광고도 많이 하고 있었고 또 소비자들에게도 인기가 괜찮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타민제란 제품상으로 별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일반 소비자에게 어떤 호기심이나 유행을 불러일으킬만한 제품은 안되었다.
박카스의 생산계획은 이러한 모든 시장동향과 제조기술상의 제반문제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어 착수하게 되었는데 그때 함부르크에서 본 박카스 신(神)의 이미지가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연상작용을 일으켜 상품의 이름과 또한 특징(효능)을 결정짓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박카스란 이름이 좋아서 히트했다고도 말하지만, 이런 성공을 이룩하기까지에는 생산, 광고, 판매 및 제품의 개발과정에서 허다한 시련(試鍊)과 희비(喜悲)의 숨은 이야기와 회사 직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출처: 강신호 동아제약 당시 전무이사 기고문 ‘박카스의 성장과정’│현대경영 창간호(1966년 10월호)
03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소신있는 상인!’ 현대경영이 1970년 구인회 낙희그룹(LG그룹) 회장이 작고했을 때, 부고 기사를 전하면서 썼던 평이다. ‘소신있는 상인’ 구인회의 일생을 살펴보면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즐겁고 낭만이 느껴진다. 아마도 전국을 무대로 하는 그의 정열적인 활동과,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는 혜안으로 점차 거대그룹의 수장으로 성장해가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
구회장은 18세에 친구들과 장근회(獎勤會)라는 협동조직을 만들어 황무지를 갈아엎어 신식농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팔아서 마을에 큰 이득을 남겼다. 그후 이 사업을 동료들에게 넘겨주고 진주시에서 포목상을 시작, 당시 많은 상인들처럼 부산이나 마산 같은 근거리 거래가 아니라 서울이나 일본 등지를 왕래하면서 통큰 거래를 수행했다. 몇 년 후에는 진주시의 모든 물류를 종합해서 취급하는 진주청과어류조합을 개설, ‘구인회상회’라는 주식회사를 만들었고, 1940년에는 진주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모습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존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창의성과 추진력을 발휘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기존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부산으로 진출한 구회장은 낙희화학공업사를 창립하고 화장품과 플라스틱을 생산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유명한 ‘럭키치약’을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지금의 LG그룹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구인회 회장이 회사를 이끌면서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인화(人和)였다. 항상 검소한 옷차림에 직원들과 함께 곰탕집에도 자주 가면서 인간적인 교류를 하며 활력을 불러 넣어주었던 것이 구회장의 면모다. 격변의 시기, 우리 경제에 활력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거리와 희망을 주었던 기업계의 거장. 그의 삶과 경영철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의 낙희(樂喜)란 고난 다음에 얻어지는 과실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출처: 낙희그룹 전 총수(前總帥)-구인회 회장│현대경영 1970년 2월호
04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정인욱 강원산업 창업회장
“1970년대는 비약(飛躍)과 팽창(膨脹)이 약속되는 연대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면서 성장에 도취하지 않고 자제와 인내로서 내적충실을 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원산업 정인욱 회장(당시 사장)이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하는 1970년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하게 된 공적서다. 1952년 정인욱 회장은 자신의 전공(와세다대 채광야금과)과 이상을 바탕으로 강원산업을 설립, 우리나라 탄광의 합리적 개발에 앞장서 국제적 수준의 탄광시설과 안전시설 건설로 화제를 모았고, 도시의 주택가를 방불케 하는 멋진 광부 사택을 마련함으로써 ‘인간우대의 경영’을 강원도 석탄굴에서 싹트게 했다. 석공(石炭公社) 총재로 부임했을 때에도 그 많은 외원(外援)의 유혹과 인사청탁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력성장’, ‘합리화’를 위한 신념일변도로 밀고 나감으로써 적자로 불하 대상이 되었던 석공을 당년에 흑자기업으로 전환시킨 놀라운 경영능력은 모든 기업의 모범이 되고 있다. 물론 정인욱 회장은 탄광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기계·골재·운수 등의 관련회사만 있을 뿐, 뚜렷한 성장산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업 명성이 화려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다. 그러나 남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든 손쉽게 앞질러 달려나가는 와중에서도 소걸음처럼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템포로 외길을 걸어온 정인욱 회장의 신념은 엉터리, 투기형, 사이비 실업가가 난무하는 이 땅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시대의 진짜 ‘참경영인’이었던 정회장은 모든 것을 ‘우리의 힘으로’, ‘우리 손으로’ 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관련산업 부문의 국산화에도 주력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석탄에의 집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서히 업종을 전환해가는 이상주의형 경영자의 ‘상(像)’을 제시해주었다. 그의 사업은 오늘날 삼표그룹으로 계승, 더욱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1970년 4월호
05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정진기 매일경제신문 창업주
“한국에서 꼭 일등 가는 신문을 만들고야 말 것이다.” 서울경제신문, 대한일보 기자로 출발한 정진기 창업주는 1966년 3월 24일, 매일경제신문사를 창간했다. 가장 짧은 기간 안에, 가장 성공한 신문사를 만든 비결은 그가 신문사 경영을 ‘저널리즘’과, ‘매니지먼트’의 원리를 융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진기 창업주가 1971년 현대경영에 기고한 ‘나의 리더십’이라는 글에서도 그의 선구적인 ‘신문사 경영론’이 잘 나타나고 있다.
“책임(責任)과 이윤(利潤)과 올바른 사회창조(社會創造)의 임무를 동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개개의 구성기구가 거의 독립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사원과 독자와 광고주와의 일체화(一體化)된 호흡을 기해야 하는 것이 신문사다. 수없는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 하는 표적이 되어야 하고, 책임과 능력과 창의로 현실을 직관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어쩌면 내일(來日)을 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지도 모른다. 5년 아니 10년 동안 창의와 성심과 인내로 일해 왔다고 하더라도 한번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 기업과 사회에 커다란 누(累)를 끼치는 결과가 되는, 철저하게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실행하며 자신이 감독해야 하는 특수성을 가진 곳이 신문사이다…..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산책 길, 그 아늑한 길모퉁이에 10여년을 정들여온 은행나무, 그 고고(呱呱)한 나무에 쏟은 애착은 호화롭지 않은 산책길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놓았다. 그런 어느 날, 은행나무가 동강 잘린 것을 보았다. 애처롭고 허허(虛虛)하여 가마니로 덮어주고 새끼로 동여매고 덮어주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죽고 말았다…..”
신문사 경영을 ‘책임’과 ‘이윤’과 ‘사회창조’라는 3대 가치 기준, 그중에서도 ‘책임’ 다음에 ‘이윤’을 먼저 생각한 그의 선구적인 경영철학이 돋보인다. 또한 철저하게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실행하며 자신이 감독해야 하는 신문사 경영의 사주(社主)로서, “어느 날 정들여온 은행나무가 동강 잘리고 가마니로 덮어주고 새끼로 동여매주었지만 결국 나무는 죽고 말았다”는 글을 보면, 고(苦)된 신문사 경영에서 52세(1929-81)라는 짧은 나이로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을 예지(豫知)했던 것은 아닐까?
출처: 현대경영 1971년 7월호
06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용주 전방 창업회장
내가 사업을 하게 된 동기를 말하면,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식산은행(殖産銀行:현 산업은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선 사람으로서는 희망이 전혀 없었다. 이외에도 일본사람 지배하에서 일하자니 여러 가지 민족 감정도 생겼다. 그래서 무엇이든 내 힘으로 해보고자 결심하고, 스물두 살(1926년)에 사업계로 뛰어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그때 경험한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용기가 나곤 한다.
자본도 적고 나이도 어리고 거기에 명예도, 경험도 전혀 없이 사업계에 뛰어 들었으니 모든 경쟁에서 뒤처질 수 밖에…..성실과 열의로서 두세 사람이 할 일을 혼자서 해낸 것이다. 그때 처음 시작한 사업이 지금 대한통운과 같은 운송업이었고, 내가 살던 지방이 포항이라 수산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상호는 내 나름대로 민족운동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삼일상회(三一商會)’로 붙였다. 포항 삼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철도운송과 수산물위탁사업을 본격 시작한 것이다. 당시 4-5년간 소운송업으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본격적으로 수산업에 손을 뻗쳤다. 그 당시 동해의 정어리 사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어업이었고, 함북·함남·강원·경북 등 4대 어획구역을 주름잡을 만큼 대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1년 회사가 소유하는 선박들은 일본군부에 징용되고 말았다.
전방의 뿌리는 1935년 설립된 가네보방적 광주공장이며, 해방 후인 1953년 전남방직주식회사로 설립되었고, 1970년 상호를 전방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용주 회장은, “자유당 10년은 비위에 맞지 않아 놀았고, 4.19 이후 참의원 의원이 되어 원내총무를 했다”면서 “자신은 모든 처세에 정면으로 나가지 다른 수단을 쓰지 않았고, 처음 월급생활을 하다가 맨주먹으로 사업계에 투신했는데 지금 계산으로 전혀 안된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낙망하지 말고 노력하면 반드시 광명(光明)이 온다”고 결론내렸다.
출처: 현대경영 1975년 11월호
07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회장
코오롱그룹의 설립자 오운(五雲) 이원만 회장은, 조선 중기 문인으로 영남학파의 대가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15대손이다. 회재 선생의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성리설이 되었다. 이런 유학적 배경으로 인하여 이원만 회장은 독특한 자신만의 사업철학으로 이른바 ‘상지상(上之上)’의 이론을 구축했다. 사업을 하려면 수평선(水平線)을 늘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수평선 위는 상(上)이고, 수평선 아래는 하(下)이다. 상(上)에는 상지상(上之上)이 있고 상지하(上之下)가 있으며, 하
(下)에는 하지상(下之上)이 있고, 하지하(下之下)가 있다.
① ‘상지상’은 국가도 잘되고 자기자신도 잘되는 사업
② ‘상지하’는 국가는 잘되고 자기자신은 잘 안되는 사업
③ ‘하지상’은 나라를 망치고 자기자신은 잘되는 사업
④ ‘하지하’는 나라도 망치고 자기자신도 망치는 사업이다
예를 들어 도둑질해서 수출하는 따위는 나라도 손해를 보고 자기자신도 손해가 되는 만큼 ‘하지하’가 된다는 것. 한국 최초로 나일론을 도입하고 생산한 코오롱의 나일론 사업은, 빨래로 인한 부녀자의 일이 줄어들고, 옷감이 질겨서 경제적이며, 수출로 나라가 부강해지니 ‘상지상’의 사업이라는 이원만 회장의 선구적인 외침에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이원만 회장은 또한 1960년대 초 ‘공업화냐, 농업화냐’ 하는 논의가 한창 진행될 때 정부 최고위층과 재계인사와의 연석회의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원이 없으니 농업국가로 가자”고 주장했을 때, 당시 책상을 걷어차고 “공업화에 주력해야 한다”며, “슬로건으로서는 농공병진(農工竝進)을 내세워야 한다”고 제창했다고 한다. 경제개발의 시대, 원로 경영자의 지혜가 담긴 획기적인 제안이다!
출처: 현대경영 1976년 2월호
08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형남 일신방직 창업회장
일신방직 창업자 김형남 회장은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대학을 마치고 1924년 20세의 나이로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켄터키 웨슬레안대학 화학과를 거쳐 뉴욕 프래트공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미국의 피혁공장에서 기술을 익힌 다음 26세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평양에서 피혁회사를 설립 운영하였으나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교육자인 형님이 계시던 목포로 내려가 책방을 경영했는데 상호를 ‘삼일서원’으로 내걸어 일제하에서도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1935년에 설립, 경영하던 전남 광주의 ‘가네보방직(鐘淵紡織)’이 전신인 ‘전남방직공사’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공장을 직접 재건하였으며, 1951년 ‘전남방직공사’를 불하받아 ‘전남방직주식회사’를 공동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1961년 ‘일신방직주식회사’로 분리독립하여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면방1위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모교인 숭실대학의 재건에 1956년 재단이사로 선임된 이후 1957년에 재단이사장으로 선임되어 대학 재건에 앞장섰다. 이후 1967년에는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1971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총장으로서 대학발전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특히, 1969년 국내 대학으로서는 최초로 컴퓨터를 도입하여 교육을 시작하는 등 오늘날 숭실대학교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기업가로서의 공장근무에서나 교육자로서의 대학근무에서도 그의 근면성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 공장에서는 장갑을 끼고 기계를 직접 수리하기도 하였고, 대학에서는 밀짚모자에 고무신 차림으로 정원을 직접 다듬기도 하는 등 일 자체를 취미로 삼았다. 자신의 좌우명인 “얼굴에 땀을 흘리고 밥을 먹는다(창세기 3장 19절)”를 몸소 실행하였기에 지금도 공장이나 대학의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현대경영 1976년 4월호
09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생각해보세요. 이 지구위에는 많은 나라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만, 추위가 닥쳐오는 나라들일수록 한결같이 잘 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업경영은 물론 한 나라의 경우에도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힘이 생기는 법이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산 정주영 회장이 그리운 이유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해보기나 해봤어’라고 꼭 꼬집는 우리의 영원한 경영멘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의 말이다. 정회장은 현대경영(1989년 10월호)에서 “우리나라가 처음 중동에 진출할 때도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모두 ‘이제 한국은 커다란 실패를 할 것’이라면서 비웃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본과 기술 경험이 없어도 성공했잖았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우리 국민은 저력(底力: potential) 있는 국민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렇다. 정회장이 옳았다. 우리 기업과 국민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그 저력은 아직도 건재하다. 항상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정주영 회장처럼,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던 정회장처럼, 우리는 희망을 안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정회장은 이에 앞선 1977년부터(현대경영 1977년 11월호) 한국기업의 국제화(글로벌화)를 통한 세계경쟁력을 강조했었다. 정회장은 세계시장을 상대로 해야만 불경기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불황타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경영자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와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 그 두 문제를 항상 예측하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경영자는 세계시장에서 모든 상품의 전망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하며 세계시장의 모든 경제정보망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경영자의 조건을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전, 정회장의 선견력과 지적 혜안으로 현대경영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은 주옥같은 어록이 길이길이 현대경영 역사의 바이블(Bible)로 남기를 바란다.
출처: 현대경영 1977년 11월호│현대경영 1989년 10월호
10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연수 삼양그룹 창업회장
민족지도자 인촌 김성수(金性洙), 수당 김연수(金秊洙) 형제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 김경중(金璟中) 형제를 알아야 한다. 김기중, 김경중 형제의 부력(富力)은 1915년 중앙학교, 1919년 경성방직, 1920년 동아일보사, 1922년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14년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쌀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김경중 씨는 쌀을 판 돈을 모조리 서울에 있는 일본제일은행의 지점에 예금했다. 당시 소장 경제학자인 홍성하(洪性夏) 씨는 쌀을 판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라고 거듭 조언했지만, 김경중 씨는 아랑곳없이 쌀을 판 돈을 은행에 계속 예금할 뿐이었다. 홍성하 씨의 경영철학이 초등산술이라면, 김경중 씨의 경영철학은 고등산술이었다.
김경중 씨는 전시 인플레 철학으로 ‘물귀즉천 물천즉귀(物貴則賤 物賤則貴)’, 즉 “물건이 귀하면 다시 천해지고, 천하면 귀해진다”는 논리로 풀었다.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나자 물가폭락의 사태가 벌어지자, 김경중 씨는 은행예금을 찾아내어 토지를 매입, 4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삼양사의 창업자인 김연수 씨는 때때로 당시 조선호텔 다음으로 고급식당인 서울역 구내식당에 선친 김경중 씨를 모시고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식당 종업원들은 식대의 반액인 1원만 청구하고 나머지 1원은 김연수 씨의 비서실에 별도로 청구했다. 1원짜리 점심이면 식사 대접을 받으나 2원짜리 식사인줄 알면 끝끝내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법을 썼다는 것이다. 미국의 록펠러도 시카고의 호텔에 머무를 때 가장 싸구려 방을 달라고 지배인에게 졸랐다. 어느 날 지배인이 “당신의 세 아들은 제일 비싼 방에 머무르는데 왜 싸구려 방만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록펠러가 대답했다. “나의 세 아들은 미국에서 으뜸가는 부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으나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두지 못했으니 도리가 없는 일 아니냐?” 부자의 길은 이처럼 엄격하다.
출처: 고승제 학술원 회원 ‘수당 김연수(秀堂 金秊洙)’ 편│현대경영 1979년 2월호
11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
“우리의 의식부터 개선하자! 유능한 인재의 채용보다도 이미 채용한 사람의 의식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기업경쟁력이다. 세계적 경제혼미 속에서도 우리 경제가 세계무대에서 낙오없이 성장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없었던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여 극복해야 할 시점에 서있는 것 같다.
기업경영의 경우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을 추구해 가기 위한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조직, 기술, 판매, 자금 등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의식구조를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개선하는 것이 기업의 능률성 및 생산성의 제고라는 점에서 더욱 시급하고 기본적인 선결문제가 아닌가 한다. 즉 한정된 요소를 갖고 최대의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긍정적으로 전환되어야 하겠다. 인간은 확고한 신념을 가질 때 모든 일을 자신과 열의로서 대하게 되며, 창의력을 발휘,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로 하면 아무리 작은 개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창조적 행동이며 혁신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식과 안목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 김승호 회장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이 보령제약 사장일 때 현대경영에 기고한 글이다. 그래서일까. 종로 5가 거리를 보령약국 거리로 만든 김승호 회장은 오늘날 제약을 기반으로 8개 계열사를 거느린 ‘토탈 헬스 케어 그룹’으로 성장했다. 2017년 새해 ‘창업 60년’을 맞이하는 보령제약그룹이 새로운 ‘제2창업 60년’으로 힘차게 나아감에 있어 김승호 회장의 위의 글이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사람(보령제약인)의 의식을 ‘긍정의 마인드’로 업그레이드시킨 김승호 회장은 훗날 ‘현대경영’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평생 고민했던 키워드로 ‘사람 인(人)’을 꼽았다. 기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또한 기업을 만든다!
출처: 김승호 보령제약 당시 사장 기고문(의식구조 개선)│현대경영 1981년 5월호
12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최종현 SK그룹 전 회장
SKMS(SK경영관리체계)를 세운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기업경영에 있어서의 일체감(一’フ感)’을 중시했다. 최회장은 1987년 학술연구원 발표회 강연에서 사람의 관리와 관련, 일체감을 조성하는 방법에는 최고경영자가 강압적으로 뜻을 모아 집행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런 방법은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나 또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거둘 필요가 있을 때에만 효력이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일체감은 구성원들이 많은 토의를 하고 합의를 통해 조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내용이다. 최회장은 특별강연에서 20여년(1987년 당시)간 기업경영을 해오면서 경험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자신이 찾은 해답을 이같이 설명해주었다.
첫째로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경영의 원칙에 대한 근본적 합의가 되어 있어야 일체감 조성과 경영성과를 이룰 수 있다. 경영방향을 ‘이익관리’로 정립하고 임직원과의 토론을 통해 일체감 조성에 주력한 결과 임직원 사이에 ‘이익 극대화’라는 공통 목표로 일체감이 형성되어 현재까지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업의 관료주의화를 타파하는 하나의 좋은 방식으로 ‘캔미팅’을 실시했다. 현대사회의 용어로는 ‘워크샵’정도로 풀이가 가능하겠다. 조직이 오래되고 커지면 관료주의화되고 경직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구성원 상하간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체감 조성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캔미팅’제도는 사장 이하 모든 직원들과 ‘사무실을 떠나’ 외부에서 화합을 갖는 제도이다. SK의 가장 굵은 뿌리가 된 최회장의 철학이다. 셋째로 경영용어의 통일을 들 수 있다. 선경(SK)그룹이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 서게 된 계기가 경영용어의 통일과 개선이라고 최회장은 분석했다. 경영자와 임직원의 일체감, 그리고 SKMS와 같은 경영용어의 통일과 개선이 SK그룹의 흑자경영을 가져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다.
출처: 최종현 SK그룹(당시 선경그룹) 회장 특강 ‘기업경영에 있어서의 일체감’│현대경영 1987년 3월호
13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회림 OCI 창업회장
‘마지막 송도상인(松都商人)’으로 불리우는 이회림 동양화학(현 OCI) 회장이 한국능률협회가 수여하는 1989년 ‘한국의 경영자’로 선정됐다. 송상(松商:개성상인)의 후예(後裔)로, 포목상의 점원으로 출발, 당대에 한국 50대그룹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시련과 영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낸 이회림 OCI 회장! 남이 싫다고 버린 분야에서만 반평생에 걸쳐 외길경영을 살아온 이회장의 기업역정(企業歷程)은, 작은 불황에도 엄살을 부리며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나약한 경영자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서울 중구 소공동 동양화학사옥 18층, 남산이 바라보이는 이회림 회장의 집무실에는 ‘지난역행난(知難亦行難)’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액자가 걸려있었다. 아는 것도 힘들지만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1959년 동양화학을 설립, 이회장의 표현처럼 ‘화학공업의 조미료’라는 소다회를 생산한지 어언 경영반세기,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안된다”고 했을 때, 아무도 하지 않는 분야를 찾아서 연구하고 개발하여 제품화해온 것이 오늘의 OCI그룹이 반석 위에 오른 비결이 아닐까?
물론 시련과 시행착오도 있었다. 달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바닷바람과 싸워 세운 공장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막대한 투자에 따른 부담 등의 시련이 바로 오늘의 OCI를 있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이회장의 경영스타일은, 언제나 어깨에 양복 상의를 턱 걸치고 너털웃음을 짓는 호방함과 함께, 한눈을 팔지 않는 집중력에 있다. 우리나라 화학산업이 채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선구적으로 동양화학을 일으켜 ‘한국의 듀퐁’ 가문을 만들었고, 화학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는 전혀 한눈을 팔지 않는 외곬인생을 살아왔다. 마지막으로 이회림 회장은 현대경영과의 인터뷰에서, 후학들에게 보내고 싶은 말로 “요령껏 살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똑같은 주문을 하고 싶다.
출처: 이회림 OCI(당시 동양화학공업) 회장 인터뷰 │ 현대경영 1989년 6월호
14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33, 55, 88.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의 키워드다. 1933년 출생하여, 55세인 1988년 코리아나화장품이 탄생했다. 55세에 화장품업계에 도전, 창업 5년만에 500대기업에 랭킹돼 한국 화장품사에 있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박을 터트린 유상옥 회장(1994년 당시 사장)을 현대경영이 만났다. “내 배가 아플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는 창업과 성장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니, 코리아나화장품의 창업정신은 오늘에 그대로 계승, 발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리아나화장품의 급성장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상품이 소비자에게 잘 맞아떨어졌다. 1990년 자체개발한 ‘아트피아’를 비롯한 상품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둘째는 뉴마케팅 기법을 썼다. 저희는 출발 시부터 ‘제값받기 운동’을 했고 타사가 외상장사를 해도 우리는 현금판매와 판매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했다. 셋째는 우리 사원들이 신나게 일했다는 점이고, 넷째는 소비자가 잘 밀어주었고 그 외에도 차별화한 광고를 통해 후레쉬(Fresh)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다섯째는 ‘1993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된 머드팩으로 단일품목 300억 시장을 형성하면서 머드팩이 일약 대한민국 명품이 됐으니 이제 세계의 명품으로도 자리매김해야 한다. 현재 세계적 화장품 메이커로 프랑스, 미국, 일본 순으로 들고 있는데 한국이 4번째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끝으로 코리아나화장품 창업 시 정한 저희 회사의 경영지침은 ① 스스로 일하는 회사, ② 신뢰를 쌓아가는 회사, ③ 소비자를 위한 회사이다. 이중에서 소비자를 위하는 방법이 CS(Customer Satisfaction)인데 저희는 벌써 지난 1990년부터 CS시스템을 만들어서 고객에게 직접 피부관리를 해주는 서비스센터를 전국에 가동시키고 있고, 뷰티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는데 미용교육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다.
유상옥 회장의 경영정신은 이제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2003년 화장박물관과 코리아나미술관 등으로 이뤄진 스페이스씨(space*c)가 그 중추다. 또한, 유회장은 40여년간 수집한 고미술품과 현대미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기부와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특색 있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좋은 CEO”라고 말하듯, 정도(正道)경영의 진수를 보여주는 셈이다.
출처: 현대경영 1994년 2월호
15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장한 종근당 회장
1941년 이종근 회장이 창업한 종근당은 지난 3/4세기 동안 ‘제약 외길’을 걸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제약회사다. 1994년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장한 회장은 “의식과 기업체질의 변화가 필요하다. 회사 운영의 기본 틀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각오와 함께 혁신경영에 돌입했다.
이장한 회장의 취임은 “오장육부를 빼놓고 하는 것이 영업이다”라는 신조로 제약회사를 일군 제약업계 창업주 세대에서 신학문과 경영이론으로 무장된 세대로 이동한 첫 번째 사례로 파악된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경영학을 거쳐 미조리주립대에서 언론학을 공부한 이회장은 취임 이후 1년여 동안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제약업은 어렵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85년 미조리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받고 귀국한 이회장은 1986년부터 종근당 자회사인 안성유리공업, 한국로슈, 한국롱프랑로라제약 등에서 제약기업의 경영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기를 골고루 다졌다고 한다.
이회장은 “CEO에게는 현장경영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 요구되는데, ‘경영학’ 전공에서 ‘언론학’ 전공으로 바꾼 것이 폭넓은 경륜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면서 “선친
(이종근 회장)께서는 송인상 회장님을 비롯한 한국능률협회 및 조찬회의 열성 회원이셨다”면서, “또한 현대경영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회장은 “종근당이 외국의 선진 제약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제약업을 핵으로 업종전문화를 이룩하는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첫째 경영의 분권화와 자율성에 의한 책임경영, 둘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 투자, 셋째 내실성장, 넷째 정보화 마인드, 그리고 다섯째 세계적인 제약사로 성장하기 위한 국제화 전략”을 새로운 과제로 제시했다. 기자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수 있었다.
출처: 현대경영 1994년 4월호
16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남승우 풀무원 사장
‘자기가 하는 일에 신념을 갖고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저의 정신적 지주이자 행동지침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현대경영 인터뷰 중에서
풀무원식품의 정신은 이웃사랑을 묵묵히 실천해온 풀무원농장의 고 원경선 원장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원원장은 농약이 대량으로 살포돼 폐해가 심각한 수입농작물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1975년 일본 ‘애농회’를 창시한 ‘고다니’가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로마클럽 보고서’를 보여주자 주곡생산의 중요성과 공해방지의 절박성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그 후 원원장은 ‘한삶회’를 설립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정농회’란 단체를 만들어 바른 농사법을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이같은 선각자의 노력이 오늘날 자연을 사랑하는 운동으로 발전돼 온 것을 소중한 교훈으로 생각하고 바른 먹거리를 만드는 기업정신의 바탕이 되었다고 남승우 사장은 말한다.
2016년 풀무원은 비재무적 성과를 평가하는 ‘ESG평가’에서 통합 A등급을 획득하여 지속가능경영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풀무원은 올해 평가에서 사회책임 A+, 환경 A, 지배구조 A 등급을 받아 국내 5대 그룹 계열사를 제외한 식품기업으로는 유일하게 통합 A등급을 획득했다. 국민의 건강과 위생을 책임져야 하는 식품회사는 일정한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으며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서는 식품회사로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남사장의 ‘원칙경영’ 방침이 이런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셈이다. 특히 ‘이웃사랑’이라는 창립정신에 따른 사회적 책임 부분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고객만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객이 진정으로 만족하고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이 우러나오는 경영이 돼야 한다는 남사장의 미래경영은, 바로 품질경영과 환경관리로 바른 먹거리를 책임지겠다는 풀무원의 경영철학이다.
출처: 남승우 풀무원(당시 풀무원식품) 사장 인터뷰│현대경영 1994년 9월호
17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
국내외 패션의 선두주자인 휠라의 뿌리는 신발산업부터 시작되었다.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이라고들 말한다. 좁은 국내 시장적인 발상에서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글로벌 마케터의 눈으로 본다면, 신발산업은 여전히 성장이 기대되는 유망 스타산업이다. 오늘의 휠라코리아의 뿌리인 라인실업을 경영하면서 에이전시의 역할을 하던 윤윤수 회장은 미국에서 휠라의 신발 라이센스를 갖고 있는 호머 알티스와의 만남을 갖게 되며, 이 만남이 휠라코리아 글로벌경영의 초석이 된다.
이탈리아 휠라는 그동안 휠라라는 신발 브랜드를 키운 공로로 호머 알티스에게 3천만 달러라는 역 로열티를 지급했고 신발에 대한 라이센스 계약은 윤회장에게 넘어갔으며 그 결과 1991년 휠라코리아가 설립된 것이다. 이탈리아 휠라는 휠라코리아가 휠라 의류 및 스포츠용품을 전량 수입·판매하던 (주)엑심을 인수할 때도 그동안 한국에서 휠라의 브랜드 이미지를 개척한 공로로 수입상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주었으며, 이는 윤회장에게도 똑같이 적용돼 세계무대에서 휠라 신발이 갖고 있는 명성에 걸맞는 대가를 지급했으며 이러한 일들은 비즈니스의 좋은 선례라고 할 것이다.
항상 “혁신과 고객만족은 낡은 얘기”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윤회장은 휠라코리아의 창업과 동시에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한다. 우월한 디자인과 월등한 품질을 전제조건으로 최고의 상품기획력이 첫 번째이며, 냉철한 상점의 선별, 철저한 A/S, 모든 매장의 전산화, 신속한 의사결정, 경영의 유연성 등 빠르게 변하며 국가개념이 희박해진 경제에 미리 대응한 윤회장과 휠라코리아의 경영철학은 패션뿐만 아닌 모든 산업계에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기업 모토로 “사업을 올바르게 키우려면 옆길을 가면 안 된다”는 윤회장의 경영방침과 함께 국가개념이 없는 세계경제에 우뚝 선 휠라코리아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해 본다.
출처: 현대경영 1994년 10월호
18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정휘동 청호나이스 회장
“2003년을 청호나이스의 해로 부르자!” 그해 청호나이스가 처음으로 얼음정수기를 공개해 정수기 업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얼음정수기가 일반화되자 2011년 청호나이스는 싱크대 위에도 올려놓을 수 있는 초소형 얼음정수기를 선보였다. 2014년에는 커피캡슐을 담아 정수기에서 바로 커피를 뽑을 수 있는 커피얼음정수기를 내놓았다. 국내 정수기 업계에서 누구보다 빠르고 임팩트 강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청호나이스의 선구적인 행보는 1993년 회사를 창립하고 이끌어온 정휘동 청호나이스 회장의 세계일등기술과 혁신경영에서 비롯된다.
정휘동 회장은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기술력을 그 무엇보다 강조해왔다. 정수기는 사람들이 직접 마시는 물을 공급하는 기기이기 때문에 안전성과 품질이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정수기의 정수과정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정수기는 중금속이나 세균 등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필터와 염소성분·발암물질·냄새를 제거하는 필터, 미생물을 살균하는 자외선 처리기 등 이삼중의 정수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에 따른 뛰어난 기술력이 없으면 고객에게 신뢰를 받기 어렵다. 1994년부터 미국과 일본 등 30여개국에 정수기를 꾸준히 수출하고 있는 것만 봐도 청호나이스가 얼마나 고객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월간현대경영은 1995년 처음으로 정휘동 회장과 인터뷰했을 때, 정회장이 얼마나 기술력과 혁신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당시 정회장은 다른 회사와는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청호나이스 정수기는 일반 정수기 제품과 다르다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어야 한다는 경영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경영철학은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하나도 빛을 바래지 않았다.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보석처럼, 정회장의 경영은 우리나라 경영계나 경제계에 귀중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출처: 정휘동 청호나이스 회장 인터뷰(품질은 기본, 고객만족만이 생존전략)│현대경영 1995년 3월호
19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바르게, 다르게, 다함께’.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3대 경영철학이자 좌우명이다.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기업이 ‘바르게’ 살아서 이윤창출이 될까?
① 바르게:기업 경영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순리가 정직한 것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경영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바르게’ 사는 것을 지표로 삼고 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창출이지만, 기업을 바르게 운영하지 않고는 지속적인 이윤창출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바르게’만 강조한다고 해서 기업이 꼭 잘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특히 건설업 관련업종은 흥망성쇠가 심해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② 다르게: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김희근 회장의 선친 김인득 벽산그룹 창업자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김희근 회장도 ‘다르게’라는 가치관을 중시한다. 벽산건설 CEO로 있을 때 김회장은 국내 처음으로 봉인 입주청소를 실시했다. 벽산건설이 시공해서 입주하는 아파트에 당시 CEO와 전 직원이 참석해서 걸레를 잡고 변기를 닦는 일을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지막 행사로 ‘완벽하다’는 뜻의 봉인 스티커를 붙이는 이벤트를 가져 고객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성공했다.
③ 다함께: 김회장은 자신의 세 번째 신조인 ‘다함께’를 실현하기 위하여 회사 순익의 5%를 사회에 기부할 뿐 아니라, 일자리창출에도 부응, 대학생 인턴십, 탈북 대학생 멘토링, 장애인 고용, 예술단체 후원을 비롯, 음악, 미술, 문학 등 전방위적인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기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기업활동을 바르게 하여 이윤을 창출하고, 기업을 통하여 벌은 돈을 사회에 공헌하는 김회장이, 가정에서 정한 가훈(家訓)은 “작은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란다. 우리 모두 바르게, 다르게, 다함께 해피(happy)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출처: 현대경영 1995년 5월호
20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채수삼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회장
이 조그만 피조물을 둘러싸고 있는 역경이 커야 얼마나 크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괴로움에 허덕이고 자신을 스트레스 속에서 지치게 만드는 일이 많다.
‘역경과 좌절’에서 오는 가장 큰 선물은 ‘현명함과 돌파력’이다.
상상력을 지배하는 채수삼 회장의 성공에세이 ‘포도씨의 꿈은 와인보다 향기롭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려운 일이 생기고 스스로가 실패감에 빠질 때면 늘 “淡淡(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할 것입니다”라는 아산 정주영 회장의 좌우명을 떠올린다는 채회장. 또한 방에 걸려 있는 정주영 회장의 영정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섰다고 한다. 강하고 담대한 몸과 마음은 어떤 역경에 부딪히더라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현명함과 돌파력을 갖게 한다는 정신으로 지도자로서 필요한 극복능력을 발휘해왔다. 채회장은 과거 현대그룹에서나, 현재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에서나 무서운 기세로 뛰어오를 수 있었던 저력을 ‘공감대’로 요약한다. 부하직원이나 주위사람들로부터 날카롭고 까다롭고 꼼꼼하다는 평가와, 뒤끝이 없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그는 경영자의 리더십으로 ‘솔선수범’을 꼽는다. CEO는 일을 제일 많이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모체라 말한다.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채회장의 인재등용 원칙으로, 젊고 싱싱한 감각과 창의성이 넘치는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채회장은 젊은이들에게 “이루기 위해서는 멈추지 말라”고 당부한다. 올해의 마지막을 말하고 내일은 또 한해의 출발을 이야기해야 하는 시점이지만 “한결같은 마음가짐이란 어제의 토대 위에 오늘을 쌓고 그 위에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기에 더욱더 큰 믿음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멈추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필요한 시간이라고 채회장은 말한다.
출처: 채수삼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당시 금강기획 사장) 회장 인터뷰│현대경영 1995년 6월호
21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국민 식탁에 건강과 즐거움을 주자.”
동원그룹은 그렇게 출발했다. 바다식량의 개척자에서 세계적 종합식품회사가 된 동원의 히스토리가 이 한 문장으로 대표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인 바다를 내 것으로 만들고, 그 소유의 이익을 고객(국민)들과 부단히 공유하고자 힘쓰고 있는 동원그룹의 성장비결은 무엇일까.
현대경영 편집위원회는, 1995년 방송인 이숙영 씨가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을 만나 단독 인터뷰한 내용을 특집으로 실었다. “기업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환경적응업이라는 말처럼 기업의 경영혁신은 기업성장에 앞서 살아남기 위한 한 방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하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 거친 풍랑을 만나듯이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어려운 위기가 올 때도 있습니다. 동원도 73년, 79년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원양어업계의 많은 기업들이 원가상승과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는 그 시기에 우리는 전 직원이 합심하여 새로운 어법개발과 신어장 개척에 전념하고 수산물의 가공, 유통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버틴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이 지금의 동원을 만든 원동력입니다.”
그렇다.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듯이 어려운 위기가 올 때도 있는 법이다. 위기를 도전과 용기로 맞서 싸우는 바다맨들의 정신을 배우자. 바로 지금이 위기를 기회로 만든 김회장의 용기와 동원의 도전정신을 배울 때가 아닌가?
출처: 현대경영 1995년 11월호
22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준성 이수그룹 창업회장
한국은행 총재, 경제부총리 등을 지낸 김준성 이수그룹 전 회장은 금융인, 경제인, 문학인이라는 ‘세 얼굴’의 최고경영자였다. 김 전 회장은 생전에 펴낸 ‘두 대의 양말 기계가 놓인 풍경’이라는 자서전에서 “해방 직후 양말기계 두 대를 들여와서 양말공장 기계를 돌리던 첫날, 밤을 새운 뒤 새벽녘에야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보름달이 떠 있는 가운데 공장 창 너머로 두 대의 기계가 놓여 있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는 낭만주의 경제인이기도 했다. 국내 3대 양말공장으로 성공한 김 전 회장은 고향인 대구에서 대구은행 설립을 주도, 대구은행장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삼성전자 회장, ㈜대우 회장 등 재계와 관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우리 시대 경제계의 ‘큰 어른’이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인간상실’이란 소설을 현대문학에 발표, 문단에 등단한 그는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소설을 쓰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고 술회한다. 김 전 회장은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등 점차 그 어두운 점이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있다”며 그 제1차 환원대상은 주주와 종업원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서 “이수그룹 계열사 중에는 앞으로 공개해야 할 회사들이 많고 기업공개를 통해 얻어지는 모든 이익은 종업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겠다”는 선구적 경영관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김준성 전 회장은 바로 이런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발간한 ‘21세기문학’이라는 문예지에서 피력한 그의 경제관이 아직도 새롭다.
“바로 이런 우리의 노력에 다른 분들도 동참,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면 언젠가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한 밝은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는 대구은행장,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제인으로서도 유명했지만,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한국 자본주의의 미래를 걱정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출처: 현대경영 1997년 3월호
23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정진숙 을유문화사 창업자
IMF 사태로 인하여 국내외로 한창 어지럽던 1997년, 한국출판업계는 조용한 경사(慶事)가 있었다. 한국출판문화의 대부, 정진숙 을유문화사 사장이 ‘을유문화사 50년사’를 펴냈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해인 을유년(1945년)에 창립, 해방의 감격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뜻에서 을유문화사로 이름을 정한 이 출판사의 역사가 아직까지 우리사회 각계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숱한 양서의 발간을 통하여 민족문화와 한국문화를 창달해 왔기 때문이다. 을유문화사 사장뿐만 아니라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과 출판금고 이사장 등으로 활약한 정사장은 한국출판문화의 큰 어른이다.
일제시대 동일은행(조흥은행)에서 일했던 정사장은 해방이 되면서 새 사업을 생각하다가 민병도(전 한국은행 총재)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과 함께 출판업계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동인들은 오로지 ‘건국한다는 마음’만으로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바로 그 ‘건국한다는 마음’ 때문에 을유문화사의 역사와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945년 말, 을유문화사를 정식 발족시키며 을유문화사의 이념이 된 ‘을유문화사 출판의 지향’이라는 수칙을 만들어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영세성을 특징으로 하는 당시 출판업계에 경영이념을 제시한 것.
해방 당시 겉만 번지르르한 정치적인 수사와 구호성 공약들이 난무하던 그 시대상황에 비추어 을유문화사가 내건 수칙은 소박한 느낌을 줄지도 모르지만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그때 정한 수칙은 민족문화 향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와 그 실천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민족문화 복원을 위한 양서의 출판과 보급이라는 ‘나의 사명’은 끝났다고 정사장
은 말했지만 그의 신념은 계속되어야 한다.
출처: 정진숙 을유뮨화사 당시 사장 인터뷰│현대경영 1997년 10월호
24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조갑주 신송홀딩스 회장
신송은 역시 선구자였다. 오늘의 식품문화에는 당연시되는 무방부제·무사카린·저염이란 단어들은 1997년 장류업계의 뉴리더로 부상한 신송식품의 제품에 적용한 문구다. 장류 등 기초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풍조가 만연하던 당시, 뒤늦게 전통 장류식품사업에 뛰어든 신송은 장류업계 후발업체임에도 불구, 현재까지 그 입지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소비자에게 조금 더 좋은 제품을 공급코자 쉼 없는 연구와 노력을 기울인 결과 기존업체들을 제치고 장류업계의 뉴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신송의 역사는 무역업을 하던 대오산업에서 출발했고, 신송식품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천안공장의 준공과 함께 업계최초 TV광고, 자동화기계설비, 신제품개발 및 소비자의 취향에 따른 패키징디자인(Packaging Design)으로 ‘신송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당시 장류업계의 후발주자인 신송은 소비자에게 한 차원 더 높은 식탁의 풍요로움을 제공한다는 일념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업계최초로 무방부제·무사카린 제품과 저염간장 및 올리고당을 함유한 기능성 간장을 출시하여 국내 장류업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조갑주 회장이 말하는 신송바람의 최종 목표는 국가사회에의 기여이다.
“우리들이 하는 일로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보다 나은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자”는 사훈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개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로 고객의 기쁨을 극대화시키자는 뜻이다. 이는 개인과, 나아가 사회에도 기업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기업정신이 잘 나타난다.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효과 덕분에 신송의 직원들은 매달 한번 있는 아침 조회 시 이 사훈을 제창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조회장의 경영철학으로 탄생한 무방부제·무사카린·저염 제품들은 국내외 장류업계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과 사회의 건강까지 생각하는 신송의 미래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출처: 조갑주 신송홀딩스 회장(당시 신송식품 대표이사) 인터뷰│현대경영 1997년 12월호
25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한국 대표 ‘명품’ 아웃소싱기업 삼구아이앤씨. 구자관 사장은 자신의 직함을 책임대표사원이라고 주장한다. 고객과의 신뢰를 책임진다는 뜻의 대표사원이란다. 현대경영이 지난 1998년 IMF 외환위기 직후, 삼구아이앤씨의 구자관 대표사원을 만나 IMF 위기극복에 대한 해법을 물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모두가 움츠리는 불황일 때 같이 움츠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어려운 상황일수록 기업은 더욱 분발하여 경쟁력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채용규모를 늘리고, 광고를 활성화하며, 히트상품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1998년) 삼구아이앤씨의 경영목표는 움츠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경영목표를 ‘정면돌파’라는 구호로 함축하여 항상 가슴속에 새기고 다닙니다. 불황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고 그 끝이 빨리 보일 수 있도록 정면으로 돌파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처럼 IMF의 위기를 정면돌파로 넘어선 삼구아이앤씨는 오늘날 7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아웃소싱기업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기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업이 바로 사람인 셈이죠. 삼구아이앤씨의 기본 바탕은 인격존중에 있습니다. 현장직원일지라도 만나면 언제나 정중히 인사하는 게 회사의 원칙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는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임직원 모두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회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을 중심으로 신용과 신뢰로 똘똘 뭉친 삼구아이앤씨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그림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출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인터뷰│현대경영 1998년 7월호
26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강덕영 한국유나이티드제약 사장
“대감 집 마님은 좋은 일은 종들에게 시키고 수챗구멍은 본인이 뚫지요!”
기자는 CEO의 리더십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말을 보지 못했다. ‘주인정신’으로 일하면 그것이 자신의 ‘무형자산’이 된다는 강덕영 사장의 경영철학과 같은 뜻일 것이다. 제약업계 영엉맨으로 일할 때는 ‘불도저의 신화’를 창조하고 고객이 아무리 거절해도 열 번, 스무 번 찾아가 OK를 받아낸 강사장의 꿈은 당차게 ‘한국인이 주인되는 다국적 제약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실패한 직원에겐 격려를 하지만 도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는 직원에겐 야단치는 강사장의 경영방식은 지금 한국유니이티드제약을 다국적 제약기업으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다. 강사장은 또한 직원들에게 전문인이 되라고 강조한다. 앞으로 인류의 20%만 생존을 하고 나머지 80%는 도태될 것이고 그 20%는 전문가 집단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전문가만 살아남고 아마추어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 직원 개개인의 전문성을 높여 회사 전체의 가치를 상승시키자는 강사장의 상생·지식경영은 제약업계뿐만 아니라 전 산업계에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강사장은 또한 “위기가 닥치면 오히려 담대해져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못한다’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다’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IMF도 한국유나이티드제약에겐 비켜갔다고 말한다. IMF 이후 부채비율을 줄이고 현금유동성을 높여 정책자금 등을 활용함으로써 금융비용을 줄이며 ‘수출’이란 한 우물을 파 외화획득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 국가홍보 역할까지도 톡톡히 해낸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강사장의 개척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앞으로 어떠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지속가능경영의 초석을 다졌다. 1%가 아닌 99%의 시장에 도전하는 세계화전략으로 세계 제약시장을 제패하는 그날이 가까워진 데에는 강사장의 주인정신·지식경영·개척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출처: 강덕영 한국유나이트제약 당시 대표이사 인터뷰∣현대경영 1999년 9월호
27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역사와 전통의 샘표식품은 우리나라 식품문화를 선도해온 선구적 기업이다. 1946년 창업주 박규회 사장이 서울 충무로 지역에 터를 닦고 장류 전문 제조업체로 출발한 샘표는 최초로 간장을 상품화했다. 간장은 집에서 담가먹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샘표간장은 이런 패러다임을 사 먹는 간장으로 바꾸게 한 대표적 제품이다. ‘샘물처럼 솟아라’라는 의미의 ‘샘표’는 현존하는 국내 상표 중 가장 오래된 상표로 공인되고 있기도 하다.
샘표의 핵심가치는 ‘구성원의 행복’과 ‘지역사회에 기여’이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 더 나아가 돈보다 더 중요한 부가가치를 전해주는 회사, 직원들이 높은 행복감을 느끼고 소비자들이 사랑하는 기업으로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시장에 한식과 그 재료를 널리 알리며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전통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샘표식품은 박진선 사장이 제3세 경영자로, 그만큼 경륜이 있는 민족 전통의 기업이다. 전통의 기업이 전통의 맛으로 세계화에 앞장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박사장의 젊은 기업으로의 이미지 대변신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70년이란 역사를 가진 기업인 샘표식품은 과거 한때는 젊은이들에게 친숙하지 못한 기업이었다고 한다. 박사장은 20대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젊은 기업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성공했다. TV광고에 신세대 스타를 출연시키고 젊은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위해 많은 행사를 후원했지만 가장 큰 성공요인은 젊은 기업으로 나갈 수 있는 회사분위기 개선작업과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제품개발 및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에 있었다.
음식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 박사장의 철학.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샘표는 전통식품 제조업체로서 음식 맛을 지키고 젊은이들과 함께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끊임없이 우리 맛을 연구하고 있다.
출처: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인터뷰│현대경영 1999년 11월호
28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최양하 한샘 회장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을 만들고 싶다.”
1970년도부터 우리나라 주거 환경 변화를 선도해온 한샘은 가구와 인테리어를 제공하는 기업보다는 공간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발전해 왔다.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을 만들겠다”는 최회장의 명품경영은 “한샘이 만들었으면 잘했겠네”라는 공감을 형성했다. 이러한 한샘의 발전과 성장은 그동안 성장의 장애요인이 되었던 ‘좋지만 비싼’이란 이미지를 ‘싸고 좋은’이라는 이미지로 전환시키면서 시작된다.
좋은 공간 창출을 위한 지식 투자와 자동화 시스템의 효율적 연구, 트렌드 변화에 따른 정확한 수요 예측 등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한샘의 급성장 그래프를 그려주었다. 하지만 최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싸고 좋은’을 넘어서 ‘훨씬 저렴하면서 최상급의 품질’을 목표로 우리 주거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고객감동 차별화’를 통해 ‘단골 고객 50%’라는 수치를 정하고, 무책임한 제조업 마인드를 버리고 영업·시공·AS사원의 역할을 극대화해 고객감동 경영을 제도화하며 최상급의 품질 유지에 힘쓰고 있다.
최회장은 경영철학을 사명이라 표현한다. 전화·인터넷이 개발되어 문명의 이기를 제공해준 것처럼 인류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 주거 환경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인류 발전에 공헌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고자 하는 한샘과 최회장의 목표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더 기대된다. 최양하 회장은 2000년 현대경영과의 인터뷰에서 ‘부엌가구에서 도시개발까지 World Best’가 목표라고 했는데, 2016년 현재 한샘은 가구와 인테리어의 선두주자로 이미 자리매김을 했으며, 가치있는 공간 창출로 이미 World Best는 달성되었다. 2020년까지 세계 500대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한샘의 목표는 최상급의 공간제공과 철저한 고객관리라는 최회장의 경영철학과 함께 가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2000년 1월호
29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홍완기 홍진HJC 대표이사 회장
홍진HJC는 30년간 오로지 헬멧이라는 한우물만 파온 기업. 고집스러울 정도로 헬멧만에 집중했던 홍진HJC는 세계 오토바이 헬멧 점유율 1위 기업이다. 2위인 이탈리아 ‘놀란’보다 2배나 더 크다. 가장 잘 나가는 히든챔피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글로벌 챔피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다. 어떻게 헬멧 하나만으로 735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회사가 되었을까. 홍완기 홍진HJC 회장은 그 비결로 ‘정도경영’을 강조한다. “한 가지라도 확실히 하는 고집이 HJC를 지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합된 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홍진HJC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의 외부자금을 빌리거나 지분을 매각하지 않았다. 한때 미국회사로부터 OEM 제의가 있었지만 이것도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자체 브랜드로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한때는 너무 깐깐하다고 여겨졌던 ‘홍완기식 정도경영’은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을 발휘했다.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 시절 키코(KIKO)※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홍진HJC는 1천억원 대의 적자를 내며 창사 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었지만, 그러나 세계점유율 1위라는 메리트와 현금 흐름이 좋은 알짜경영을 유지한 탓에 은행들의 출자전환을 유도하여 기사회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완기 회장의 정도경영 덕분이 아니었을까. 홍회장이 제창하는 정도경영은, 첫째 전 직원들에게 자기가 발을 내딛은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라는 것, 둘째 각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물을 서로 공유하라는 것이다. 정도경영 덕분에 직원들의 애사심, 단결력이 다른 회사보다 높다. 홍진HJC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기업이며, 가장 한국다운 기업이기도 하다. 정도경영은 지속가능경영을 창출하지만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안전경영이라는 것을 배워본다. 요샛말로 홍진HJC 홧팅!
※KIKO(Knock-In, Knock-Out):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할 경우, 약정환율에 파는 파생금융상품
출처: 홍완기 회장 인터뷰(헬멧의 선두주자, 자사상표 수출 세계 1위)│현대경영 2001년 1월호
30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전순표 세스코 회장
7평짜리 작은 사무실에서 직원이라야 ‘사장과 부인’ 2명뿐! 회사의 시작은 이렇게 단출했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농림부에서 과장을 지낼 만큼 촉망받던 공무원이 어느 날 갑자기 ‘쥐’ 잡는 회사를 차렸다. “전순표 씨가 미쳤다”, “쥐약을 사면 되지 왜 돈을 주고 쥐를 잡느냐”는 말을 수천 번 이상 들었던 전순표 회장은 밤낮으로 현장을 돌면서 수주를 얻고, 쥐 잡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의 집념은 고객을 감동시켰고, 결국 1천명의 방제기사와 10만여개 거래처에 해충박멸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시아 최대 전문방제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전순표 세스코 회장 이야기다. 전순표 회장은 실제로 국내 1호 쥐박사다. ‘한국산 집쥐의 생태 및 방제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제목을 보더라도 쥐와 쥐 방제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당초엔 공무원으로 시작해 ‘쥐잡기의 날’ 등의 아이디어를 낼 정도로 아이디어맨이기도 했던 전회장은, 공직생활로는 쥐 방제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본인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보다 효과적인 쥐잡기에 나섰다.
처음에는 ‘사기꾼’ 취급을 받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회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여겼기에 불평등 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95년 ‘63빌딩 쥐소동’ 사건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전회장의 세스코는 터닝포인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제 세스코는 5성급 이상 호텔과 식품공장, 백화점 등에서 8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모든 서비스 전달과정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매뉴얼화·전산화하여 고객의 만족을 이끌어낸 덕분이다. 이제 전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사회공헌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해충박멸에 힘을 쏟았던 인생을 앞으론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취지다.
“누구나 기피하던 3D업종일수록 첨단화하면 그게 바로 첨단사업이다”라는 말처럼 일의 본질에 파고드는 집념이 전순표 회장을 인간승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CEO의 진짜 교훈일 것이다.
출처: 현대경영 2001년 9월호
31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노시청 필룩스 회장
좋아하는 음식은 ‘마른 오징어’, 취미는 ‘산악오토바이 타기’, 존경하는 인물은 ‘에디슨’과 ‘아인슈타인’. 그는 누구일까? 자유분방하고, 쾌활하며, 즐거운 상상을 즐길 수 있는 ‘창조인간’이 아닐까. 창의성을 즐기면서 동시에 깊이 있는 공부도 좋아할 것 같은 능력자라는 생각도 든다. 나아가서 이런 창조적인 사람이 한 기업의 CEO라면 무척 즐거운 회사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노시청 필룩스 회장 이야기다.
본인 스스로를 ‘연출가’라고 표현하는 노시청 회장은 회사의 기본 콘셉트를 ‘기분 좋아지는 곳’으로 잡고, ‘파크 같은 회사’를 지향한다. 또한 세계최초로 인공태양(SIH) 조명기술을 개발하는 창의력도 갖고 있다. 다른 회사보다 업무전산화와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화를 누구보다 빨리 개발·도입해 신속하고 정확한 업무가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 LED 및 조명산업은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깊다”는 말처럼 스피드와 원천기술이 요구되는 난해(難解)한 사업이다. 조명에 관한 원천적인 기술이 부족하며 다른 선진국에 비해 창의성도 떨어진다. 또한 중국 LED회사들의 저가상품 홍수로 가격경쟁력에서도 점차 뒤처지는 실정.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고 고객의 니즈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노시청 회장은 필룩스의 핵심경쟁력을 ‘신속’으로 잡고 신속한 상황 파악과 신속한 의사결정, 유연한 대처를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런 신속한 필룩스를 뒷받침하기 위해 창의성과 자율성을 높이는 일을 고심했다.
그 결과가 바로 감성조명 시리즈다. 감성조명은 주거 및 사무, 생산환경에서도 생활리듬에 따라 자연 빛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개발됐다. 이 시리즈는 최근 선진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실적호조와 함께 신성장동력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필룩스의 전 임직원들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전방위로 이끌어온 총감독 노시청 회장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노시청 필룩스 회장 인터뷰(세상을 밝히는 또 하나의 태양)│현대경영 2001년 11월호
32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박명구 금호전기 회장
조명산업처럼 ‘빛의 속도’처럼 광속(光束)으로 변화무쌍한 산업도 없을 것이다. 금호전기는 호황과 불황, 불황과 호황을 연속으로 맞이해왔다. 2009년 LED칩 제조회사 ‘더리즈(현 금호AMT)’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부채를 떠안게 되면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 LED업체들의 과도한 가격경쟁으로 금호전기를 포함한 한국LED 시장은 전반적으로 “이대로라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엄습했다.
지금 금호전기는 이 위기를 견뎌내고 다시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2016년 1분기 실적이 흑자로 돌아섰고, 미국 마운트버넌시와 아르헨티나 주요 도시 등에 LED 가로등 수주도 확보한 상태. 박명구 금호전기 회장의 지휘 아래 금호전기는 차츰 예전의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박명구 회장에게 이번 위기는 낯선 일이 아니다. IMF사태 이후 18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내던 어려운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1천명이던 직원들을 400명으로 축소해야 했던 아픔을 겪으면서 박회장은 회사를 살리고 재도약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는 CEO 중 하나다. 박회장은 내부 구조조정 등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신산업을 창출하는데 손수 나섰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IT조명. 외국계 구조조정 펀드 로스차일드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은 후, 박회장은 금호전기를 IT회사로 바꾸기 위해 CCFL(냉음극 형광램프)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 이외에는 제조기술이 없던 CCFL 사업을 국내 최초로 자체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면서 금호전기는 극적인 회생을 이루었다. 그래서 박회장에게 붙은 애칭이 ‘기업변신의 마술사’. 박회장의 현 목표는 2019년까지 매출 4천억원과 영업이익 400억원. “광속으로 변하는 시기에 빨리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온 그에게 지금의 금호전기는 어려운 시기이자 변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래서 위기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라고 하지 않는가?
출처: 현대경영 2002년 5월호
33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박철원 에스텍시스템 회장
인력경비업체로 출발한 에스텍시스템은 ‘사람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방재와 시설관리, 문서 보안 등 보안이나 안전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1999년 에스원에서 분사한 이래 에스텍시스템은 2015년 3천333억원 이상의 매출성장을 시현하고 있으며, 종업원도 5천명에 달한다.
이런 성과는 회사 출범 때부터 10년 이상 수장을 맡아왔던 박철원 에스텍시스템 회장의 경영 덕분이었다. ‘계획은 멀리 보되 실천은 한 걸음부터’라는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을 좌우명으로 하는 박철원 회장은 에스텍시스템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과거 20년간 삼성물산에서 경영전반의 업무를 경험했던 박회장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고품질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영체제의 구축과 함께 경쟁업체와의 서비스 품질 차별화를 강화하여 어느 업체도 따라올 수 없는 서비스 품질을 이룩했다. 교육과 인터넷 등의 사업영역까지 에스텍 서비스를 확장시켜 ‘토털 맨파워 서비스’를 실현한 것도 박회장의 성과다.
에스텍의 경쟁력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박회장은 특히 인재육성과 선발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직원들에게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아는 용기, 용서할 때 용서할 줄 아는 용기,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용기’라는 ‘참용기’를 직원들에게 전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또한 ‘10가지 정도(正道) 지키기’도 만들어 직원들이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에스텍맨의 십계명
① 우리는, 우리의 삶·우리의 가정·우리의 회사를 지킨다.
② 우리는, 모든 위기로부터 우리의 거래선을 지키며, 우리의 시장 우위를 지킨다.
③ 우리는, 우리의 서비스 품질과 경쟁력을 지킨다.
④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지킨다.
⑤ 우리는, 기본원칙과 법령·질서를 지킨다.
⑥ 우리는, 친절·겸손·예의범절을 지킨다.
⑥ 우리는, 친절·겸손·예의범절을 지킨다.
⑧ 우리는, 우리의 꿈과 미래를 지킨다.
⑧ 우리는, 우리의 꿈과 미래를 지킨다.
⑧ 우리는, 우리의 꿈과 미래를 지킨다.
출처: 현대경영 2002년 8월호
34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심갑보 삼익THK 상임고문
젊은 시절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심갑보 고문은 우연찮게 삼익THK와 인연을 맺어 상무이사, 전무이사, 대표이사 사장,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평생의 과업이었던 노사문제 전문가로서 한국경총 부회장, (사)노사공포럼 공동대표, 청송심씨대종회 회장 등을 지내며 자신의 전공(?)인 중소기업의 노사관계, 인재양성 등 경영지도에 여념이 없다. 심고문이 중소기업인들에게 강의할 때 단골메뉴가 바로 TV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이다. 심고문은 “동물의 세계에는 사자와 호랑이(대기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동물과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큰 동물들의 위험에서 지혜롭게 공생(共生)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중소기업들이 공연히 대기업 흉내를 내다가는 도산(倒産)하기 일쑤라고 일침(一針). 심갑보 고문의 강의 중에서 중소기업인들이 가장 관심이 높은 과목은 역시 ‘돈’에 관련된 ① 채무관리, ② 노사관계, ③고객만족(내부 및 외부), ④인재양성, ⑤ 최고경영자의 정보관리 등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비교해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인재양성을 꼽으면서 심고문은 ‘비료론’을 설파한다.
“퇴비와 같은 사람과 금비(화학비료)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능력이 있다고 금비를 뽑을 것이 아니라, 오래 헌신할 수 있는 퇴비를 뽑으라.”
마지막으로 심갑보 고문이 설파하는 ‘지도자의 리더십’ 이야기를 들어보자.
① 서양에서는 시저와 나폴레옹 등 ‘능력’이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② 중국에서는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덕’이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③ 한국의 경영자는 ‘능력’과 ‘덕’에다가 ‘도덕성’까지 겸비해야만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심갑보 고문의 리더십론을 오늘의 모든 경영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출처: 현대경영 2002년 10월호
35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변봉덕 코맥스 회장
딩동댕! 초인종이 울리면 현관문을 향해서 ‘누구세요?’라고 물어본다. 하지만 현관문 너머로 대답이 들리지 않거나 낯선 목소리가 들리면 긴장하고 문 열기를 머뭇거리게 된다. 현관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어폰(인터폰)의 출현은 이런 고민의 현대인에게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현대인들의 불안과 니즈를 일찌감치 깨닫고 사업에 뛰어들었던 이가 변봉덕 코맥스 회장이다.
1968년 중앙전자공업사 창립으로 시작한 코맥스는 전화교환기사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규모가 작고 대기업이나 권력기관(?)의 힘에 밀려 수주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결국 변봉덕 코맥스 회장은 전화교환기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도어폰 사업을 시작했다. 도어폰이 그동안 아무도 개척하지 않았던 새로운 통신사업이 될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결국 이 도어폰은 크게 히트를 쳤을 뿐만 아니라 홈네트워킹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변회장은 도어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비디오와 도어폰을 결합한 ‘비디어 도어폰’이라는 새로운 미디어폰을 만들어냈다. 이후 코맥스는 인터폰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 변회장은 당장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인터폰시장에 도전하였다. 미국과 일본의 인터폰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지금의 코맥스라는 회사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끈기있게 미래에 도전하는 ‘불패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변회장은 인터폰 시장 석권에 안주하지 않고 홈 IoT 서비스라는 전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있다. 코맥스는 “구글을 누르겠다”는 목표로 토종 홈 IoT 서비스를 개발 및 판매하는 일에 착수했다. 변봉덕 회장도 현재 IoT를 ‘열공’ 중이라고 한다. ‘불패’를 위한 도전정신이 계속 되는 한 코맥스의 미래는 여전히 밝을 것이다.
출처: 변봉덕 코맥스 회장 인터뷰(홈 오토메이션의 세계최강자)│현대경영 2003년 4월호
36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엄병윤 유라코퍼레이션 회장
‘깔라무스 글라디오 포르띠오르(Calamus Gladio Fortior)’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깔라무스 글라디오 포르띠오르! ‘붓끝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언론계 출신 인사가 경제계의 최고경영자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붓끝’이 ‘황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언론인의 자긍심(自矜心)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여기에 언론인 출신 인사로 뒤늦게 경제계에 입문, 오늘날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회사로 명성이 자자한 불세출(不世出)의 최고경영자가 있다. 유라코퍼레이션(YURA) 엄병윤 회장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현대자동차’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또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유라코퍼레이션’을 아는 사람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유라의 주력제품인 와이어링 하네스(Wiring Harness)는 자동차 각 부위마다 전기에너지를 공급하고, 각종 신호와 정보를 전달하는 자동차의 핵심부품으로, 자동차의 중추신경회로라고 말할 수 있다.
엄병윤 회장은 “자동차산업이란 선진국을 기준하는 잣대(尺)이며, 기계산업과 전자산업이 융합되는 산업의 꽃”이라면서 언론인 출신답게 “사람도 마음이 아름다워야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비로소 겉으로 나타나듯이 유라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안되는 ‘자동차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
운도 좋았다. 유라는 현대·기아차가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급부상하면서 유라의 외형도 2003년 2천억원 대에서, 10년 뒤인 2013년에는 1조원 대를 훌쩍 넘어섰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대한일보와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지낸 엄병윤 회장은 한국 언론계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계를 통틀어 언론인 출신 기업가의 ‘명예의 전당’에 모셔야 할 인물이다.
출처: 현대경영 2004년 1월호(당시 엄병윤 세원ECS 회장 인터뷰 기사)
37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박상환 하나투어 회장
상장회사로서 책임경영을 강조해온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에게는 올해 열린 하나투어 창립 23주년기념식(2016.11.1.일)이 의미있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투어 관계자와 자회사 대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진국 하나투어 대표이사가 직접 준법준수 프로그램 도입 선언문을 낭독했다. “공정거래 법규를 준수하고 위반행위의 사전 예방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여 투명하고 적법한 경영활동을 강화한다”는 것이 이번 선언의 취지다. 이번 행사는 평소 “기업은 공기와 같아 사유화할 수 없다. 특히 상장회사는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오던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의 책임경영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여행사에서만 36년 이상 일해온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은 한국여행업계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 해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박회장은 여전히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전략을 추구한다. 최근 면세점 사업과 비즈니스호텔사업, 문화공연 확대, 해외네트워크를 통한 글로벌 사업 등으로 하나투어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2013년 관광진흥유공자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2016년 ‘한국의 영향력 있는 CEO’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회장이 이런 영향력 있는 경영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도경영과 투명경영에 있다. 박회장은 2006년 현대경영과의 인터뷰 당시 “투자자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배려해야 할 의무는 CEO에게 있습니다. 이는 하나투어의 현실과 미래비전에 대한 신뢰를 파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투어는 창립 당시부터 투명한 회계와 예측가능한 경영을 통해 주주와 고객, 종업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경영체제를 구축해왔다. 기업은 계속기업이지 개인회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직원들과 CEO가 미래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박회장은 강조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모두에게 신뢰를 주어 십수년간 국내 1위 여행사라는 명예를 지켜낼 수 있었다.
출처: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 인터뷰(공변자 무발전(恐變者 無發展))│현대경영 2006년 1월호
38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국동 코센코물류 회장
현대경영이 이국동 코센코물류 회장을 만난 것은 2012년 9월과 12월로 아직 대한통운 회장으로 있던 시기였다. 한국 물류산업만큼 다사다난한 업종이 없을 것이다. 항상 위험과 난관의 연속이며, 하나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연달아서 터진다. 그런 전쟁과도 같은 물류 역사에서 이국동이라는 이름 석자를 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대한통운 회장 시절 연간 택배 취급량 1억 상자를 돌파하였으며, 국내외 항만시설을 개발해 한국의 글로벌 물류가 한층 성장하는 계기를 닦은 사람이 이회장이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만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이회장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이국동 회장은 ‘사막경영론’을 주장했다. 이회장은 예전에 자동차 고장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갇힌 채 물 한 방울 없이 구조를 기다려야 하던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매섭게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사막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공포로 다가온다. 방향감각마저 사라지고,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버티고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회장은 “사막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이회장은 부산항(부산 신항)을 동아시아 국제물류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11년 한국항만물류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2012년 일본의 거대 물류회사 ‘센코’와 협력, ‘코센코물류’를 설립했다. 이국동 회장은 코센코물류의 ‘Vision 2020’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 물류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동북아 최고의 물류거점을 구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부산항신항배후물류단지협회장을 역임하며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으로 산업계를 지원하고 있다. 부산항에서 다시금 한국의 국제물류를 위해 살신성인하고 있는 이국동 회장. 그의 새로운 도전이 우리 경제계를 밝히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출처: 현대경영 2006년 9월호
39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학수 고려대교우회 회장·전 삼성그룹 부회장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만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누구를 만나고, 그 사람과 어떤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게 되는 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현대경영 50년의 대표 기고가요, 멘토였던 송기철 박사(고대 명예교수)가 이학수 고려대 교우회장과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 할 수 있다. 특히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뜻 깊은 인연일까. 송기철 박사가 고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이학수 회장은 경영대학 학생으로 재학하면서 송기철 박사의 수업을 들었다. 송박사는 이회장이 성실과 정직, 우직함을 기본으로 하는 상업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인물로 기억한다. 특히 이회장이 고대 학생회장으로 보여준 통솔력과 임무수행력이 매우 탁월했다고 한다.
이후 이학수 회장이 제일모직에 취직하여 송박사를 초청했을 때, 그가 보여준 순박함과 예의바름, 정성 등을 대하면서 송박사는 그가 앞으로 대성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이학수 회장은 한때 이건희 회장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로 삼성그룹 부회장으로서 명실공히 삼성의 제2인자로 오늘의 삼성그룹을 만드는데 초석(礎石)을 세웠다.
특히 그의 모교사랑과 은사사랑은 남달랐다고 송박사는 말한다. 모교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성심성의껏 도왔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사님을 모시고 사은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직접 백화점을 찾아가서 일일이 은사님들을 위한 넥타이를 골랐다는 에피소드는 그가 가진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으며,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인생관도 함께 느끼게 되는 모습이다. 최근 이학수 회장은 고대 동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고대 교우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을 만나고, 꼼꼼히 지원하는 일을 직접 맡고 있는 이학수 회장.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삭막해져만 가는 오늘 우리사회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출처: 현대경영 2007년 3월호
40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강보영 안동병원 이사장
① VISION-상상 그이상의 꿈을 가져야 한다.
② VENTURE-위험을 피하지 말고 모험을 선택하라
③ VITALITY-구호가 아닌 실행으로… 百見而不如一行
인구감소·취약한 산업기반·저소득형 경제 등으로 낙후된 경북 안동에서 세계적 의료네트워크를 안착시키며, 경영학의 새 역사를 써온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은 ‘잘하는 경영, 잘되는 기업’의 필승조건으로 3V를 제시한다.
강이사장은 이루고 싶은 ‘상상 그 이상의 꿈’을 가져야 한다고 첫 번째 성공조건인 Vision을 제시한다. “시간과 관념을 송두리째 바꿔야 합니다. 경북이라는 지역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어요”, “항상 ‘어디’라는 지리적 개념보다 ‘최고’가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찾아온다”는 것이 강이사장의 생각이며 세상을 보는 눈이다.
한계 없는 상상력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위기를 기회를 바꾸는 모험가 정신. 바로 두 번째 성공조건 Venture이다. 강이사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누구든지 해 내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누구라도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고의 병원을 실현하기 위해 확실한 비전과 과감한 도전으로 지속성장을 하고 있는 안동병원의 필승조건 세 번째는 바로 실행, Vitality에서 찾을 수 있다. 강이사장은 “생명체가 호흡하듯, 살아있는 조직이라면 끊임없이 새로운 혁신으로 실행해야 한다”며 百見而不如一行을 강조한다.
안동병원은 선도적으로 친절서비스 캠페인을 실현해 전국 의료계에 서비스 혁신을 주도하고 끊임없는 조직·경영혁신운동으로 고객만족과 의료품질 경쟁력 확보, 그리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Vision, Venture, Vitality. 강이사장의 3V경영은 ‘Localism to Globalism’, 세계 속의 안동병원을 만들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
출처: 강보영 안동병원 이사장 인터뷰│현대경영 2007년 4월호
41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최현만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의 면모를 들여다보면, 아무리 계속 그 속을 까도 새로운 내용물이 나오는 양파처럼 그 저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경영은 2007년 미래에셋증권 사장, 2012년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에 취임했을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심층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최수석부회장은 마치 ‘범생’처럼 의젓하고 차분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경영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날카롭게 철두철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한번 문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독수리 CEO’라는 별명 그대로였다. 미래에셋그룹의 창립멤버로서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미래에셋그룹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과연 그의 CEO 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부모님과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손위 누님인 최숙희 씨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광주고 시절부터 누님과 6년간 자취생활을 하면서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누님 숙희 씨에게 ‘불굴의 도전정신’과 ‘엄격한 자기관리’, ‘가톨릭’ 입문이라는 세 가지 소중한 가르침을 보물로 얻었다. 이런 굳건한 보물들이 항상 역경이 생길 때마다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고, 오늘의 ‘CEO 최현만’을 완성시킨 것.
“봄에는 벚꽃, 겨울에는 동백꽃,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꽃들은 그 종류만큼이나 꽃피는 시기도 다양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 적정한 시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위한 새로운 도전 앞에 나이는 무의미합니다. 목표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로 최선을 다한다면 아름다운 계절의 꽃이 만개하듯 목표를 이룰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미래에셋대우의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았다. 최현만의 새로운 계절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그가 피어낼 미래에셋의 새로운 꽃길을 다시금 기대해본다.
출처: 현대경영 2007년 8월호
42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안건준 크루셜텍 대표이사
우리나라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는 ‘갑을관계’라기보다는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처럼 보인다. 심할 경우에는 상전과 종의 관계마저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이야기다. 2001년 30명의 직원들과 크루셜텍이라는 벤처회사로 출발했던 안건준 크루셜텍 대표이사도 실망과 좌절의 시간을 견뎌온 백전의 CEO다. 이 가혹한 경영생태계 속에서 크루셜텍은 2015년 2천625억원의 매출액과 14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지난 3년간의 어려움을 다시금 이겨내고 또다시 도약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같은 저력 때문일까. 현재 벤처기업협회 수석부회장을 겸임하면서 한국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는 안건준 대표이사는 중소기업 CEO나 창업자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크루셜텍에게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은 고난이 있었다. 전년 대비 8배를 넘는 매출액을 기록하는 급성장을 시현할 때도 있었으나, 대기업의 독점요건에 묶여 투자 대비 절반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크루셜텍은 안정적인 중견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안건준 크루셜텍 대표이사의 이런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첫째, 경쟁의 울타리를 깨고 나오는 것이다. 크루셜텍은 일찌감치 세계를 상대로 마케팅영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 전 세계 OTP시장에서 80%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둘째, 기업의 우수한 기술과 인재를 지키기 위한 꼼꼼함과 신중함이다. 크루셜텍은 기업 내부에 특허전담팀과 법무팀을 따로 꾸리면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기술분쟁에 항상 대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도전의식이다. 특허경영과 기술경영, 인재경영을 강조하는 안대표이사는 전혀 새로운 시장과 제품개발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안대표이사의 쓰러져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은 많은 스타트업 기업과 창업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출처: 안건준 크루셜텍 대표이사 인터뷰(세계정복을 꿈꾸는 작은 거인)│현대경영 2009년 10월호
43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강경중 타라그룹 회장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영적인 안식처로 소개되는 ‘타라농장’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쇄전문기업 타라그룹은 수천억 이상의 매출을 거두고 매년 30% 성장 등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사양산업이라고 불리는 인쇄업에서 타라그룹이 이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질문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강경중 타라그룹 회장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한다. “기업인의 책무는 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며, 이는 기업인으로서 가장 큰 보람이며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강경중 회장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강회장이 정한 타라그룹의 근본 가치관은 지·덕·체(智·德·體) 문화다. 많은 교육과 독서로 지(智)를 쌓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활동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덕(德)을 쌓으며, 지속적인 체력단련으로 건강한 체(體)를 만드는 것. 이런 타라그룹의 고유한 문화가 현재 타라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타라그룹에서 주목할 제도는 전 직원의 ‘액션 다이어리 쓰기’이다. 개인의 다이어리를 쓰되 인터넷에 공개하여, 모든 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옆 동료의 고민과 집안사정을 알 수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취지를 직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여, 지금은 회사의 문화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액션다이어리는 직원들의 아이디어와 개선안도 담겨 있어 경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타라그룹은 IT가 접목된 우수한 인쇄기술 시스템을 바탕으로 미국으로 진출하는 등 글로벌 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레드오션으로 인식되고 있는 인쇄업을 브랜드화와 네트워크화, 시스템화 등으로 차별화하여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만든다는 포부다. 이를 위해 강회장은 오늘도 보다 새롭고 발전된 ‘타라농장’ 직원들과 함께 꿈꾸며 만들어가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2010년 4월호v
44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일하는 동안(2007-10)의 기록집인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해’가 발간되었다. 조회장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에서, ‘이명박 대통령’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 전경련 회장을 맡아 안으로는 전경련을 쇄신하고, 밖으로는 재계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에 조회장의 7대 자유시장경제 어록을 뽑아보았다.
① 돈은 겁쟁이다: 정치인들이 기업의 금고를 들여다보고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하는 나라에서 투자하기는 어렵다. ‘돈은 겁쟁이’라는 말과 같은 이치다.
② 조약돌 던지면 고기는 사라진다: 대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것은 기업 주변환경이 불확실하고 규제가 많기 때문이다. 연못 속 물고기 떼에 조약돌 하나만 던지면 고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돈은 물고기와 같다. 조금만 불안해도 투자하기 어려운 것이다.
③ 자본을 소중히 여기자: 자본을 존중하고 감싸주며 소중히 여겨 본인이 투자하고 싶은 의욕이 나게 해야지, 강압적으로 또는 윽박지른다고 해서 투자가 되지 않는다.
④ 미국 이상으로 규제를 개혁하자: 기업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미국보다 좋거나 동등한 수준으로 규제를 대폭 개혁해야 한다. 규제를 개혁할 수밖에 없도록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겠다.
⑤ 규제는 예외관리로 바꾸자: 그동안 원칙적으로 규제하고 예외적으로 일부만 풀어주던 규제방식을 벗어나, 원칙적으로 경영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만 예외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⑥ 오너경영의 책임성도 중요하다: 기업을 이끌어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영기술과 자질보다, 오너만이 가질 수 있는 ‘내 회사’라는 자부심과 책임정신이다.
⑦ 기업은 국민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은 국민의 믿음직한 버팀목이 돼야 한다. 대기업은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전경련 회장 재임 시,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보다 더 해박한 논리와 열정으로 자유시장경제론을 설파하던 조회장의 경영어록은, 오늘을 사는 후학들에게 ‘자유시장경제의 대장전(大章典)’으로 알려야 할 의무를 느낀다.
출처: 현대경영 2012년 3월호
45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모영기 동원대학교 총장
직무를 익히기 위해 재교육이 필요 없는 학교, 산업의 메인스트림으로 도약하는 학교, 동방의 으뜸으로 발전하는 학교. 모영기 동원대학교 총장이 만들어가고 있는 동원대학교의 비전이다. 2011년 취임한 모영기 총장은 방송통신대 설립과 고교평준화, 사립학교연금관리공단 설립 등 실력과 내공을 두루 갖춘 교육계의 뛰어난 리더다.
모총장은 자신만의 교육철학과 스피드경영으로 단기간내에 동원대의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그 결과 동원대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4년 연속 교육역량강화사업 대학에 선정되는 한편, 2012년 창조캠퍼스 대학, 산학협력 선도 대학 등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취업정보화, 대학특성화, 정보화, 학생중심 복지, 국제화 프로그램 등 모든 분야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고 있다. 모영기 총장은 이같은 대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바탕으로 직무능력이 탁월한 동원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히 모총장은 LTT(Learn Today Lead Tommorow)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학생들의 취업과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나 강좌와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첨단 교육기자재 시설을 갖춘 디지털 캠퍼스를 구축했다. 국제교류 프로그램도 개발하여 해외명문대학과 자매결연을 통해 해외 유학 및 해외문화탐방, 외국대학 편입학 등 국제화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모영기 총장은 자랑하는 동원대 인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 특성화된 교육과정운영으로 갖추어진 맞춤형 인재
2. 교육정책에 있어서 학생중심대학 시스템으로 갖추어진 특성화된 인재
3. 국제적 감각과 국제실무가 뛰어난 글로벌 인재
4. 인성이 갖추어진 인재
“지식은 지구를 지배하지만 상상력은 우주를 지배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어 다양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며, 모총장은 사회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한 동원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출처: 모영기 동원대 총장 인터뷰(동원대 인재 왜 강한가) │ 현대경영 2012년 4월호
46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최근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일본에 있던 이 보물을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이는 다름아닌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지극한 마음으로 사회공헌을 위해 힘써온 윤동한 회장이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기업가는 그저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활동가라는 사실을 윤회장은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공부하는 CEO’로도 유명한 윤회장은 사람을 좋아하고, 일을 좋아하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밑바탕은 사랑이다. “경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 둘째,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경영자입니다.” 현대경영과의 인터뷰에서 윤회장이 했었던 말이다.
윤회장의 경영원칙은 느리지만 우직한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우보천리’(牛步千里)다. 스피드를 강조하는 시대에 무슨 말인가 싶지만, 연매출 5천억원 규모의 글로벌 ODM회사로 성장했으며, 국내 화장품 ODM 1위 회사, 2015년 매출 1조 클럽에 진입한 회사로 한국화장품산업의 Top of Top을 유지하는 한국콜마의 실적에 입을 다물게 된다. 이는 직원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독려한 회사 분위기 덕분이다. 욕구와 자긍심을 채워주고 직원들이 ‘실패할 수 있는 기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온 것.
“‘하늘은 재능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유한 능력이 있습니다. 고유한 능력을 어떻게 찾아내어 거기에 적합한 일을 주는 것이 경영자의 사명이죠.”
“사람이 오래 머무는 기업” 한국콜마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고 맡기는 윤회장의 리더십은 난국에 처한 경영계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2012년 12월호
47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은 평사원으로 시작하여 회장까지 오른 ‘샐러리맨의 신화’로 일컬어지는 경영의 거장이다. 1960년 일동제약에 입사한 이회장의 한때 별명은 ‘아로나민 부장’. 고객 앞에서 직접 약을 먹거나 주사를 놓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일동제약을 국민제약회사로 올려놓았던 그의 열정은 지금도 경영계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후 1984년 일동제약 사장에, 1994년에는 일동제약 회장에 선임되면서 이회장은 그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는 이금기 ‘신화’의 제1막에 불과했다.
1997년 일동후디스를 지휘하게 된 이회장이 먼저 시작한 일은 남양유업 인수였다. 그 과정에서 ‘아기밀’이라는 브랜드와 노하우를 함께 받아들이면서 일동후디스의 품질과 영업력을 높여갔다. 당시는 IMF 외환 위기 시절로 모든 기업이 신음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이회장은 오히려 고품질 유아식 전략으로 파격적인 전략을 내놓았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여도 아이에게 먹여야 할 이유식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높아질 것이라 예상한 것. 이회장의 탁월한 안목은 1999년 이유식 시장 점유율 20%라는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동후디스는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로 일동후디스만의 기술력을 탄생시켰고, 이제는 유럽식 이유식에서 탈피해 ‘후디스 아기밀’과 ‘트루맘’, ‘산양분유’ 등 한국형 프리미엄 종합이유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금기 회장의 ‘신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회장은 ‘인간존중’과 ‘목표·책임감’이라고 답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상호존중과 임직원 간의 조화가 남다른 기업문화를 만들어낸 것. 이회장은 늘 평사원들에게
“앞으로 여러분이 회사에서 생겨날 부서의 임원과 부서장이 될 것이니 항상 꿈을 가지고 일하라’고 늘 격려해왔다. 실제로 지금 회사 간부의 대부분이 평사원 출신이다.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이회장의 리더십이 일동후디스를 ‘레전드 회사’로 도약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출처: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 인터뷰 │ 현대경영 2013년 1월호
48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장순흥 한동대학교 총장
착한 교육과 착한 세상을 꿈꾸는 섬김의 리더십 장순흥 한동대학교 총장. 그가 꿈꾸는 착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말을 잘 듣고 잘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장총장이 말하는 착함은 지성과 인성, 영성을 두루 갖춘 것을 말한다.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올바른 교육을 통해 창의력과 다양성을 발전시키는 능력자인 셈.
“누가 좀 더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많이 얻느냐가 아닌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서 봉사하고 도와주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교육체제를 그런 방향으로 바꾸고, 학생들의 마음의 자세도 그런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당시 월간현대경영과 인터뷰했을 때 장총장이 말한 교육철학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장총장은 취임시 10대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첫째는 지역경제 발전과 지역 인재양성 등의 지역발전 프로젝트이다. 둘째는 통일을 준비하는 통일한국 프로젝트, 셋째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 등 어려운 곳을 섬기는 아프리카 프로젝트, 넷째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창업 프로젝트이다. 또 다섯째는 금융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한 스마트 파이낸싱 프로젝트이며, 여섯째 IoT시대의 테스트 베드를 만드는 ICT(정보통신기술) 프로젝트, 일곱째 미래시대를 준비하는 차세대 자동차 및 로봇 프로젝트, 여덟째는 신재생 에너지를 개발하는 지속가능한 에너지·환경 프로젝트, 아홉째 차세대 의식주 프로젝트, 끝으로 건강·복지 프로젝트이다.
이를 위해 한동대는 학생들에게 혁신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있다. 100%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과정(GM·IT·UIL)을 운영하고 있으며, 무(無)감독 시험으로 대표되는 정직성 교육을 최초로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최초로 자유학기제를 시행하여 학생들이 현장을 바탕으로 한 문제발견 및 해결능력을 키우는데 힘쓰고 있다. 그 결과 대학특성화사업 등 주요 정부 재정 지원 사업에 선정됐고,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포항공대와 함께 소형대학으로 A등급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동대가 꿈꾸는 착한 교육과 착한 세계가 몹시 기대된다.
출처: 장순흥 한동대 총장 인터뷰(세계를 섬기는 인재 키운다) │ 현대경영 2014년 6월호
49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박규호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 대표이사 사장
① 의사결정에 있어서 확실한 주인정신을 가지고 일하라.
②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전기자동차 & 충전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변화를 뒤쫓지 말고 트렌드를 미리 읽고 리드하라.
③ 업무에 대한 열정(Passion)을 가지고 임하라.
④ work fun! 즐겁게 일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자는 평소의 소신을 공유하라.
파리기후협약 이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에너지 신산업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정부의 에너지 신산업 정책과 맞물려 전기차 보급의 확산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KEVCS)는 이런 정부의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전력과 민간기업이 힘을 모아 2015년 8월 설립됐다. KEVCS 초대 대표이사로 선출된 박규호 사장은 2024년까지 전국에 전기차 홈충전 인프라를 9만여호에 설치하는 등 한국전기차충전산업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전기차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전후방 연관효과가 큰 신성장 사업 영역이다. 박규호 사장은 에너지 정책과 전기차 보급, 충전인프라 구축이라는 삼위일체가 완성될 때 시장 확대를 일으키는 선순환 구조가 확립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이를 위해 박사장이 KEVCS의 경영 비전을 ‘고객중심 경영’으로 삼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임직원 모두에게 도전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전력 부사장으로 오랜 기간 경영자의 길을 걸어온 박사장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두 가지로 정리해 설명했다. 첫째, 중장기적으로 명확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인격을 갖춰야 하며, 많은 정보와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서 통찰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둘째, 모든 구성원들이 조직의 비전과 목표를 향해 한 방향으로 정렬하여 나아가게 하며, 구성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동기부여와 적절한 성과 보상을 해야 한다.
출처: 박규호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 사장 인터뷰│현대경영 2016년 1월호
50 현대경영 ‘명예의 전당’│김정근 SK가스 사장
현장을 거치지 않은 자는 CEO의 자격을 지니지 못한다고 한다. 직접 경험을 통해 현장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리더로서의 자이 없다는 이야기다. 최태원 SK 회장 역시 관계사 사장들에게 늘상 현장경영을 강조해왔다. 이런 SK의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해온 모범CEO가 바로 김정근 SK가스 사장이다.
1983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에 입사한 김정근 사장은 감사와 국내 영업업무를 수행하면서, SK가스 영업본부장과 SK가스 가스사업부문장을 거쳐 지금에 이른 정통파 SK맨이다. 탄탄한 현장경험과 SK가스에서의 오랜 노하우를 토대로 현 SK가스를 국내 LPG시장점유율 1위로 입성시킨 공신 중 하나라 하겠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월간현대경영은 지난 2016년 6월 김정근 사장을 ‘100대기업 CEO 표준모델’로 선정하기도 했다.
김정근 사장이 올해 적극 추진한 중점과제는 LPG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해외트레이딩 사업의 경쟁력 강화, PDH사업의 안정적 운영을 통한 석유화학사업 진출이었다.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김사장은 일본의 명투수 오타니 쇼헤이(Otani Shohei)의 ‘목표달성표’를 즐겨 이야기한다.
최종 목표를 위하여 구체적인 8개 목표를 설정하고, 다시 그 8개 목표 하나하나를 달성하기 위해 또 다시 8개의 세부목표를 설정한다. 이처럼 김사장도 오타니 쇼헤이의 목표달성표의 핵심에 ‘고객’을 놓고 디테일하고 철저한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경영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SK어드밴스드의 울산 PDH 공장이다. 이 공장은 SK가스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쿠웨이트의 석유화학회사들이 함께 출범시킨 합작법인이다. 중동 자본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사례가 되기도 하는 이 공장에서는 연간 70만t의 LPG(프로판)를 원료로 60만t의 프로필렌 생산이 가능하다. 이런 CEO의 사업 다각화와 추진력을 바탕으로 SK가스는 미래성장기업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출처: 현대경영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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