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항일운동유적 답사
1.답사를 준비하며
우리나라의 근대는 슬픈 얼굴이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한 뒤 근대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였다. 여름방학 전에 역사동아리 진로체험 보고서 대회 요강을 보고 참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의 믿는 구석은 역사교사인 아버지다. 아버지께 참가의사를 말했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막상 참가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주제 선정이 막막했다. 신라의 수도 경주 아니면 백제의 수도 부여를 떠올렸지만 ‘왜 그곳에, 무엇을 보려고 가니?’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생각한 곳이 서울 정동. 정동은 아버지를 따라 두 차례 답사했던 경험이 있었다.
서울 정동을 답사할 거라고 말했더니 이번에도 아버지가 물었다. ‘정동은 왜 갈 건데?’ 나름 생각한 것이 있어 더듬거리며 몇 마디 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식민지가 됐는지도 궁금하고 윤동주나 안중근 같은 인물들도 알고 싶어서요.’ 대답을 듣고 아버지는 우선 책을 읽고 주제에 맞는 답사 장소 다섯 곳을 정해보라며 ‘교실 밖 국사여행’과 ‘답사여행의 길잡이-서울 편’을 내밀었다.
그래서 정한 답사장소가 덕수궁, 윤동주문학관, 안중근의사기념관, 태화관 터, 탑골공원이었다. 아빠는 이왕 덕수궁에 갈 거면 우리나라 근대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정동의 근대역사유적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선생 기념관, 그리고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준비한 인사동의 천도교대교당을 함께 답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루 동안 답사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정이었지만 짧은 방학기간 중에 하루 이상의 시간을 만들기는 힘들어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2.정동에서 만난 근대의 슬픈 얼굴들
1)덕수궁
오전 7시 30분 서둘러 서울행 기차를 탔다. 거의 1년 만의 서울여행이 설렌다. 지하철 1호선 서울시청역에서 내리자 아버지는 나보고 앞장서라고 한다. 안내판을 보며 겨우 지하철을 빠져나오자 비로소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덕수궁은 한가했다. 대한문 앞에서 확인사진을 찍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문 안쪽 안내판에서 덕수궁의 연혁을 읽었다.
‘덕수궁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다. 성종임금의 형님이신 월산대군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거처할 곳이 없자 이곳을 수리하여 머물면서 궁궐이 되었다. 광해군 3년 창덕궁의 수리가 끝나 임금의 거처가 옮겨간 뒤에 경운궁으로 불렀다.’
인조 이후 250여 년 동안 잊혀졌던 덕수궁이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897년이다.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오면서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아니라 덕수궁으로 환궁했기 때문이다. 그 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며(광무개혁), 을사조약과 한일강제병합을 겪으며 강제퇴위 당했고 경운궁도 퇴위한 고종의 호칭에 따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결국 승하했다.
근대의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면서 이곳은 대한제국시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아관파천 때는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대한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고종독살설에 분노한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덕수궁은 중화문과 중화전을 일직선으로 하고 그 뒤에 석어당과 즉조당, 준명전, 그리고 서쪽으로 서양식건물인 석조전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석어당에서 선조가 머물렀으며 나중에는 고종이 머물다 승하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석어당의 구조는 특이했다. 가운데 작은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작은 쪽방들이 둘러서 있었는데, 그것은 잠을 잘 때도 내시와 궁녀, 호위무사들이 왕을 지키고 시중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건물이라고 했고, 준명전은 왕의 집무실(편전)이라고 했다. 내가 궁궐 안에 서양식건물이 있는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궁궐에서도 서양식건축양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서양식 건물로는 국립미술관 덕수궁 분관으로 사용되는 석조전이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해방 뒤 미소공동위원회도 열렸다고 하니 근현대의 아픔을 모두 담고 있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2)배재학당과 육영공원 터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릉(陵)이 있어 정릉동으로 부르다가 나중에 정동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경복궁이나 육조거리와 가까워서 외국공사관들이 밀집했고, 1884년부터 입국한 개신교선교사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설립하면서 근대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덕수궁 입구에서 와플을 사들고 돌담길을 따라 정동으로 올라갔다. 덕수궁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에도 나오고, 아버지 세대에서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옛날에는 ‘연인들이 덕수궁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는데, 사실은 돌담길 끝에 가정법원이 있어 이혼부부들이 많이 걸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돌담길 끝 정동제일교회 앞 오거리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배재학당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근대학교다. 초기에는 학생모집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1886년 고종임금이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써주면서 학생들이 몰렸다. 배재학당은 개교 후 근대문물의 창구였고 개화파인물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기독교계통의 개화파인물인 서재필, 남궁억, 이상재, 이승만 도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3.1운동 때는 이필주목사를 중심으로 사전 모의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 독립신문을 비롯한 근대언론이 이곳에서 발행되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등 근대스포츠가 보급된 것도 배재학당을 통해서라고 한다. 배재학당은 1925년 일제의 강요로 문을 닫았고 그 전통은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이어졌다. 또 배재중·고등학교마저 1985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는 옛 건물만 남았는데, 그 가운데 동관을 수리하여 지금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 배재학당 답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방문했을 때가 마침 ‘수리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8월 말까지 공사가 진행된다는데 그 뒤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육영공원은 근대 이후 정부에서 설립한 최초의 ‘관립학교’다. 개항 뒤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근대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류를 위한 외국어전문가 양성이었다. 그래서 1883년 통역관양성소인 동문학을 세웠고, 1886년에는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의 건의에 따라 육영공원을 설립했다. 육영공원은 영어중심의 근대학교였다. 교사들도 미국인 헐버트와 길모어를 비롯해서 전원 외국인이었고 젊은 관료들과 양반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수업도 영어로만 했다. 육영공원이 있었던 곳에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때는 독일영사관과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있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3법원, 해방 후에는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자리 잡았다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우선 시원했다. 여름철에 답사를 하려면 더위를 식힐 곳과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필요한데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역할을 해줬다. 아버지는 이왕 미술관에 왔으니 그림을 보고 가자며 화가 천경자선생님의 그림전시실로 나를 이끌었다. 남태평양의 섬들을 자주 여행했다는 천경자선생님은 그림에서도 이국적인 냄새가 났다.
3)정동극장과 중명전
정동극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들어갔다. 아버지는 정동극장의 원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 ‘원각사’라고 했다. 원각사에서는 수많은 연극과 창극, 판소리가 공연되었다고 하는데, 판소리 명창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 명창 이동백이었다고 한다. 이동백선생은 1939년 은퇴공연을 한 뒤 부인을 따라 경기도 평택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이동백선생이 살았던 동네가 전에 우리가 살았던 동삭동현대아파트 뒤쪽 칠원2동이라고 해서 놀랐다. 정동극장 마당에는 이동백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옛날 사람인데도 키가 크고 얼굴이 또렷하여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동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덕수궁 안에 건립되었던 서양식건물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일제가 의도적으로 덕수궁의 영역을 줄이면서 담장 밖으로 밀려났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다. 을사조약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된 지위를 상실하는 식민지조약이었다. 최근에 수리했다는 중명전은 전에 왔을 때보다 깔끔했다. 문 앞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안내자는 이완용과 이하영 등 을사오적과 친일파들이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왜 민족과 양심을 팔아 부귀영화를 선택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아빠도 ‘네가 그 때 저 자리에 있었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아?’라고 질문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당연히 반대했겠죠’라고 말했지만 막상 현장에 있었다면 반대가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4)이화역사관과 손탁호텔, 러시아 공사관
이화학당은 1886년 스크랜튼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여학교다. 스크랜튼선교사는 두 분이다. 한 분은 스크랜튼 대부인으로 부르는 어머니이고 다른 한 분은 의사였던 아들 스크랜튼이다. 두 분 모두 한국의 근대역사에 크고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어머니 스크랜튼은 근대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스크랜튼 여사는 ‘조선의 여성들은 노예와 같다’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이화학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 후 명성황후 민씨가 ‘이화학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지금 같은 교명을 갖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설립 초기만 해도 이화학당의 학생모집은 쉽지 않았다. 부모들이 여성교육을 거부 했고 서양학교에 대한 나쁜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 설립준비 1년 만에 겨우 학생 1명을 입학시켰다. 이듬해는 7명의 학생이 입학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유명한 개화파 인사들의 자녀들까지 입학하면서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어렵게 시작했던 이화학당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끼친 여향은 매우 크다.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와 유관순 열사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아름드리 가로수가 있는 정동길을 따라 이화역사관 쪽으로 걸어갔다. 역사관 마당 한쪽에는 유관순열사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누구의 동상인지 몰라 무작정 달려갔는데 유관순임을 알고는 무척 반가웠다. 아버지는 ‘유관순도 너처럼 18살이었어’라고 한 마디 툭 던진다. 이번에도 가슴이 뜨끔했다.
역사관 입구 오른쪽 방에는 이화학당이 배출한 인물들이 전시되었다. 대충 흩어 봐도 역사책에서 한 번쯤 봤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1층 끝 방에는 옛날 교실이 재현되어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 옛날 교실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 학교 다닐 때의 추억일 것이다. 이화학당을 보며 지나간 역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우리 후손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이화백주년기념관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살롱이며 호텔이었던 손탁호텔 터다. 사실 손탁호텔에 대해서는 공부를 안 하고 왔던 터라 좀 생소했다. 손탁은 프랑스계 독일 여성인데 러시아공사로 조선에 온 베베르의 처형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손탁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똑똑해서 궁내부에 발탁되어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았고 고종이나 명성황후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조선이 친러비밀조약을 체결할 때는 막후역할을 잘해서 정부로부터 정동의 땅 1,180여 평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손탁은 이곳에 손탁살롱을 열었고 1902년에는 2층 양옥으로 손탁호텔을 지었다. 손탁호텔은 개화파들의 모임장소였고, 양식요리와 커피 등 서양음식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어려움을 겪었고 1909년 귀국했다. 주인을 잃은 손탁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이 매입하여 기숙사로 사용했다. 1922년에는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립했지만 이것도 1975년에 불타버려서 방치되었다가 2004년 이화백주년기념관을 신축했다.
이화여고 정문에서 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정동공원이다. 정동공원 위쪽에는 하얀색 첨탑이 보이는데 이곳이 러시아공사관 터다. 러시아공사관하면 떠오르는 연관검색어는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안전을 보장받았고 친일내각은 몰락했지만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열강의 이권탈취로 나라의 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 첨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데 기분이 묘하다. 국력이 약해 강대국에 휘둘리며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던 당시의 답답한 현실도 눈에 선했다.
첫댓글 글 속의 아버지와 아들
그 두분이 알아가는 근대이야기....
다음은 평택의 근대이야기를
읽고싶습니다.
평택사람들이 살아낸 근대의 그이야기 속에도 강대국의 힘이
작용했을터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