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2017년) 워크북 정리
제1장 선사시대의 전개와 고조선의 성립
1,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가 아닌 것은
①공주석장리 ② 서울암사동
③연천전곡리 ④ 상원검은모루
2.신석기 시대의의 생활 모습을 잘못설명한 것은?
①주먹도끼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였다
②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③농경과 가축사육이 시작되었다
④바닷가와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3,청동기시대의 생활모습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비파형 동검이 제작되었다.
②벼농사를 짓고 반달돌칼로 수확하였다.
③모계씨족사회가 시작되었다.
④복합적 사회 구조를 갖춘 정치체가 나타났다
4,청동기시대 사회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벼농사 보급으로 농업생산이 늘어 났다
②부족내부의 가족사이에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③취락과 취락사이의 전쟁이 잦아졌다
④지배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다.
5,고조선의 초기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아닌 것은?
?미송리식토기 ?빗살무늬토기 ?탁자식 고인돌 ?비파형동검
해석-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유물
6.고조선의 정치.사회에서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진국과 한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였다
?사우재산관 가족제도가 발달하였다.
? 순장 풍습이 있었다
?노비는 발생하지 않은 사회 였다
7.부여사회의 사회모습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농업과 목축으로 주요산업으로 삼았다.
②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③유목과 수렵사회의 전통이 풍습에 영향을 주었다
④형이 죽의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
⑧다음에 해당하는 고대사회는?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서 자리잡았다 -단궁 과하마반 어피로 유명하였다 -10월에 무천이라는(霽天)행사를 하였다 |
①부여 ②옥저 ③동예 ④고구려
9,삼한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한반도에 중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② 제정일치의 사회를 만들었다
③ 마한.진한 변환의로 이루어졌다
④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10.삼한 소국 가운데 ?날 신라로 발전한 것은?
① 목지국 ② 백제국 ③ 사로국 ④ 구야국
제2장 삼국성립과 발전
1)기원후 1세기경 활발한 대외정복을 통해 고구려의 국력을 신장시킨왕은 ?
①태조왕 ②산상왕 ③마천왕 ④동천왕
2)삼국의 발전과정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고구려는 4세기 초 랴오둥 진출을 꾀하였다
② 백제는 3세기 중후반 고이왕 때 크게 성장하였다.
③가야 연맹체는 대가야 중심의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④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왕때 집권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 5세기 고구려의 발전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독자적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②자기 나라를 천손국(天孫國) 이라고 인식하였다.
③부여를 병합하여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④한강 이남으로 남진을 추진하지 않았다.
4) 6세기 신라 진흥왕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은?
①한강유역차지 ②대가야 정복
③불교공인 ④함경도 지역 진출
5)삼국이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왕 중심의 통치조직을 새로 마련하였다
②각부의 독자성을 더욱 강화 시켰다
③각부의 지배자들은 국가 간리로 흡수하였다
④관등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 통치력을 넓혔다
6)삼국사회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신라는 골품제에 따라 사회 생활을 규제하였다
②신라의 화랑도는 계층 간 갈등을 완화 시켰다.
③고구려는 서옥제 혼인풍습이 있었다
④백제는 진대법을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7)고구려는 벽화의 걸작인 사신도<四神圖>가그려진 고분은?
① 장군총 ② 무용총
③ 강서대묘 ④ 무령왕릉
8) 다음 설명과 관련이 있는 사상은?
●고구려는 372년 테학을 설치하였다. ●백제에는 5경박사가 존재하였다 ●진흥왕 순수비에는<논어>의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삼국은 각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
① 유교 ② 불교
③ 도교 ④샤머니즘
9) 중국과 서역의 음악을 수용하여 창조된 고구려 음악은?
① 당악(唐樂) ②사자기(獅子伎)
③ 고려기(高麗伎) ④영고(迎鼓)
10) 645년 고구려를 침략한 당군을 막아낸곳은?
① 옹진성 ②안시성
③ 대아성 ④관산성
제3장 통일신라와 발해
1)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순서대로 전개한것은?
①나당동맹 ?백제멸망-고구려멸망-나당전쟁
②백제멸망-나당동맹?고구려멸망-나당전쟁
③나당동맹-고구려멸망-백제멸망-나당전쟁
④고구려 멸망-나당동맹-백제멸망-나당전쟁
2) 나당전쟁에서 신라군이 당군이 크게 물리쳐 전쟁주도권을 장악한곳은?
① 평양성 ② 사비성 ③매소성 ④요오성
3) 신라삼국통일의 한계로 볼수 있는 점은?
①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포웅하였다
②우리민족 형성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③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④통일 과정에서 외세를 이용하였다
4)통일 이후 신라 신문왕의 업적으로 잘못 설명한 것은?
①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②수도를 달구별로 옮겼다
③중앙과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였다
④귀족의 경제기반인 녹읍을 폐지하였다
5)삼국통일이후 수도의 지리적 역점을 보완하려고 지방중심지에 설치한 것은?
①6정 ②10정 ③9서당 ④5소정
6)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주민은 고구려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
②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웠다
③신라와 양립하여 남북국 형새를 이루었다
④세력이 커지자 “행동성국”으로 불렀다
7)발해의 대외교류를 잘못 설명한 설명한 것은?
①당에 유학생과 유학승을 파견하였다
②바닷길을 통해 일본을 왕래하였다
③신라와는 인적.물적 교류를 하지 않했다
④신라에 대한 경쟁의식을 가졌다
8)통일 신라사회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귀족들은 금입택에 살면서 별장을 소유하였다
②세금을 잘 거두려고 촌락문서를 작성하였다
③수도 금성에는 시장이 설치되었다
④농민들은 군역 의무를 면제 받았다
9)정토신앙을 보급하여 불교를 대중에게 전파했으며 일심사상을 내세워 불교 교리 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 신라 승려는?
①의상 ②원효 ③혜초 ④ 진표
10) 발해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묶은 것은?
가. 불국사 나, 석국암 다, 정혜공주무덤 라,정효공주무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제4장 고려 성립립과 발전
1)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있었던 일은?
①후고구려성립 ② 후백제멸방
③고려건국 ④ 신라항복
2)고려 대조 왕건의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역분전 제도를 설치하였다
② 지방 호족에게 성씨를 내주었다
③ 지방군현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④ 거란과 친교를 맺고 교류하였다
3)고려 초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이 아닌 것은?
①<시무28조> 시행 ② 과거제 실시
③ 노비안건법 실시 ④백관의 공복 제정
4) 고려 정치제도에서 감찰 업무를 수행한 기관은?
①삼사(三司) ②사관(史觀)
③어사대(御史臺) ④한림원(翰林院)
5)고려에서 5품이상의 관리를 우대했던 제도를 맞제 묶은 것은?
가.기인제도 나 사심관제도 다.음서제 라.공음전시법 |
①가. 나 ② 나. 다
③다, 라 ④ 라. 가
6)고려 전기 사회의 모습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정호충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관리가 될수 있었다
② 본관에는 주현,속현,부곡 등의 서열이 있었다
③ 부계와 모계를 등등하게 여기는 양측적 관계가 자리 잡았다.
④ 여성의 재혼은 엄격히 금지 되었다
7)고려 전기 대외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많지 않은 것은?
① 거란에서 담판하여 강동6주를 확보하였다
②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부정하였다.
③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공격하였다.
④ 외왕내제 체제를 취하였다
8) 고려 전기 사상에 대해 잘못 설명한 것은?
① 풍수지리사상이 유행하였다.
② 국가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지원하였다
③ 교종과 선종의 통합이 시도 되었다
④ 불교의 융성으로 유교는 배척되었다
9)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고려 전기 역사서술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① 삼국사기 ② 삼국유사
③ 칠대실록 ④ 고금록
10)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이 아니것은?
① 석불암 본전불
②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
③ 부여 재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④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제5장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1)고려 전기의 통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게 된 가장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
① 거란여진의 침공 ② 이자겸난
③ 묘청의 난 ④ 무신란
2)고려 무신정권 시기 최충헌이 실시한 정책결정.집행기구는?
① 도병마사 ② 교정도감 ③심목도감 ④정동행성
3)고려 무신란 이후 일어난 농민 천민의 봉기가 아닌 것은?
①원종,애노의 난 ② 망이.망소이난
③김사미와 효심의난 ④ 만적의 봉기
4)다음 빈칸에 들어갈 내용으로 맞는 것은
13세기 초부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크게 요동쳤다.( )이 성장하여 주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그여파가 고려에도 미쳤다 |
①말갈 ② 거란 ③ 여진 ④몽골
5)고려의 대몽항쟁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산성.해도 입보책으로 몽골기병에 맞섰다
②전쟁초기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③무신정권은 몽골과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삼별초 항쟁은 결국 진압되었다
6)고려 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지배세력은?
① 호족 ② 진골귀족
③ 문벌귀족 ④ 권문세족
7)공민왕 개혁에 맞지 않은 것은
①과전법실시 ②친원세력 숙청
③쌍성총관부 공격 ④전민변정사업
8) 고려말 신진사대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은?
① 불교 ② 풍수지리사상
③ 성리학 ④ 도교
9)무신집권기에 지눌이 송광사에서 창립한 불교결사는?
① 백련사 ② 수선사
③ 묘련사 ④ 임재종
10)고려 후기의 역사시술 가운데 단군 신화를 수록한 것은?
가.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다, 제왕일기 라. 사 략 |
①가. 나 ② 나. 다
③다. 라 ④ 라. 가
제6장 조선건국과 국가 운영
1)조선왕조 개창에 대해 잘못 설명된 것은?
① 원.명 교체기에 정세변화에 대응한 결과였다.
② 고려말의 잘못된 점을 사정하는 의미가 있었다
③ 건국 과정에 성리학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④ 건국 이후 농민은 왕권의 파악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2)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인 삼사(三司) 아닌 것은
① 사간원 ②승정원
③ 사헌부 ④홍문관
3)조선의 지방 통치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전국의 8도로 나누고 관찰사제를 시행하였다
② 고려시대에 비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③ 수령은 지방에 관련된 전반적 업무를 맡았다
④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여 행정 실무를 처리 하였다
4)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변천을 순서대로 나타낸 것은?
①과전법-직전법-관습관급제
②과전법-관수관급제-직전법
③직전법-과전법-관수관급법
④직전법-관수관급법-과전법
5)국가에 대한 백성의 의무가운데 공납(貢納)를 해당하는 나라는?
① 군역 ②요역
③ 대립 ④공물
6) 조선 초기 대외관계에서 조선이 사대(事大)를 취했던 나라는?
①명 ②여진
③일본 ④유구
7)조선 초기 양인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① 양반 ② 중인
③ 농민 ④ 공노비
8)세종때 편찬되어 농업발달에 이바지한 조선농사는?
① 농상집요 ② 농사직설
③ 동국정운 ④ 의방유취
9)조선전기 문화의 성격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보편적 문명을 조선의 특성을 결합시켰다
②다양하고 주체적인 조선문화를 만들었다.
③원.명의 문화를 모방하는데 그쳤다
④중국의 선진과학 문명을 수용하였다
10) 한글로 표기된 조선초기 저작끼리 묶은 것은?
가.용비어천가 나,원인천강지곡 다,경국대전 라,국조오례의 |
① 가,나 ② 나. 다
③ 나,라 ④ 라,가
제7장 조선 전기의 변화와 외세의 침략
1)조선 전기 사화(士禍)의 성격을 가장 잘설명한 것은
① 사람들 상화간에 일어난 분쟁을 가리킨다
② 사림들이 훈구세력을 박해한 사건이다
③ 훈구 세력이 사림를 정치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④ 훈구 세력이 내부에서 일어난 다툼이다
2)중종 때 도학정치를 주장했던 조광조가 화를 입은 입은 사화는?
①무오사화 ②갑자사화
③기묘사화 ④을사사화
(바로1번 문제 4대사화 요약을 참조)
3) 조선 전기 사림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훈구에 비해 새로운 가치와 사회를 지향하였다
② 국왕과 공신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는데 힘을 ?다
③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공론정치를 형성하였다
④ 현실문제 해결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4) 16세기 향촌사회의 변화로 잘못된 설명은?
① 국가는 재지 사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② 사족들은 장자를 우대하는 상속재도를 만들었다
③ 부계 중심의 족보와 동족마을이 나타났다
④ 결혼 뒤 거주 형태는 부계 위주로 변해갔다.
5) 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 만들어 활동한 조직이 아닌 것은?
① 향회 ②향약 ③관아 ④유향소
6)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명대 후기 요동지역에서 힘의 공백이 크게 나타났다.
② 명의 사민정책에 의해 왜구의 활동이 봉쇄 되었다.
③ 명중심의 책봉 -조공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④ 조선 내부는 훈구의 사림의 갈등으로 취약해 있었다.
7)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삼국에 미친 영향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명의 국력 소모로 만주의 여진족 세력이 확대되었다.
② 조선은 전지역이 전쟁터로 변하여 피해를 입었다.
③ 일본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문화적으로 성장하였다
④ 임진왜란 뒤에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지속되었다.
8) 병자호란당시 인조가 항전을 모색하며 45일간 항전했던곳은
① 한양 ②남한산성 ③강화도 ④ 삼전도
( )을 같이 하는 자는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예속으로 서로 어울이고 환난은 서로 구제한다 |
9)다음의 빈칸에 들어갈 가장적절한 말은?
①향사례 ②향음주례 ③향약 ④향회
10) 16세기 새롭게 재인식된 성리학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부계 남성 위주의 가족질서를 해체시켰다.
② 붕당중심의 사림정치를 전개되었다.
③ 서원과 향약에 기반한 향촌질서가 형성되었다
④ 기존의 체제 교학적 성리학을 번성시켰다.
제8장 조선 후기와정치 변동과 경제 발전
1)17세기 이후 붕당정치의 전개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인조즉위 이후 서인과 남인은 공존 체제를 구축하였다.
② 효종즉위 이후 (山林)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③ 각붕당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예학에서 성과를 냈다
④ 현종대 두 차례의 예송에서 모두 서인이 승리하였다
2) 국왕의 후원을 받아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은?
① 환국 ② 예송 ③담쟁 ④탕평
3)1728년 소론과 남인 일부가 영조의 왕위 계승과 노른 정권에 반대하여 일으킨 것은
① 경신환국 ②기사환국 ③이인좌난 ④홍경래난
4)정조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은
①규장각 설치 ②장용병설치 ③금난전권강화 ④화성축조
5) 17세기를 거치며 벼농사의 주된 경종법이 된 것으로 모를 키웠다가 옮겨심는방식은?
①이양법 ②간종법 ③근경법 ④시비법
6)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의 변화를 잘못 설명한 것은?
①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등장하였다.
② 고용 노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했다.
③ 정액 소작료 방식이 등장하였다.
④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7) 조선후기 지방의 정기 시장으로 크게 발달한 것은?
①시전 ②개시 ③후시 ④장시
8)조선 후기 부세체제의 변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영정법 시행 ② 비총제폐지
③대동법 시행 ④균역법 시행
9) 조선 후기 청의 연경에 판견된 사신은?
① 연행사 ② 송환사 ③쇄환사 ④ 통신사
10)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유형원은 균전제 시행을 주장하였다.
② 북학파는 상공업진흥과 기술혁신을 주장하였다.
③ 실학의 사회 개혁론이 제시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가 연구가 되었다.
④ 실학의 사회개혁론 대부분은 실제정책에 직접반영 되었다.
제9장 사회 변동과 심화의 농민전쟁
1)19세기 세도 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유력한 세도 가문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② 경화사족 가운데 몇몇 가문이 세도가문으로 득세하였다
③ 세도 정권이 아래 관직에서 매매가 성행하였다
④ 세도 가문은 의정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2)세도정치 시기의 세도가가 정치적 의도 관철을 위해 장악한 기구는?
①비변사 ②사헌부 ③사간원 ④홍문관
3)조선후기 신분제 변동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몰락한 양반은 사회,경제적으로 일반 농민과 비슷한 처지가 놓였다
② 중인들은 통청운동과 같은 신분상승 운동을 벌였다.
③ 노비제는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갔다.
④ 향반은 중앙정치에 활발히 관여 하였다.
4) 조선후기 17세기 후반이후 중앙정부와 향촌사회의 관계를 잘못설명한 것은?
①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② 수령은 부세운영에서 사족의 간섭을 크게 받게 되었다
③ 지역사회 세부까지 수령의 통지가 도달하게 되었다.
④ 여러지역에서 향권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였다
5)조선 후기 이양법 보급과 더불어 농민들이 결성한 공동노동조직은?
① ② 향회 ③두레 ④장시
6)19세기 세도 정치가 농민의 저항 방식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정권의 폭정중단을 요구하는 소청운동을 버렸다
② 탐관오리나 정부의 죄상을 폭로하는 쾌서을 붙였다
③ 위항 문학운동을 벌여 불만을 나타냈다.
④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항세 투쟁을 벌었다
7) 1811년 일어난 홍경래난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서북인에 대한 뿌리 깊은 지역차별에서 비롯되었다.
② 농민 봉기군은 전체 조선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였다.
③ 광산노동자들도 변란에 많이 참여 하였다
④ 평안도 지역상인, 향리,무사, 농민층이 연합하여 일으켰다
8) 조선후기 세금 제도인 삼정에 해당하지 않은 것은?
①전정 ②군정 ③환정 ④양곡
9) 조선 후기 안정복이 지은 사서로써 단군과 기자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정리 한책은
① 동사강목 ②성호사설 ③해동역사 ④ 언문지
10) 조선후기 문화의 양상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한글소설과 사설시조가 발달하였다
② 판소리와 탈춤이 인기를 끌었다
③ 진공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④ 동학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제10장 외세의 침입과 근대 변혁운동
1) 흥선대원군 개혁정책으로 맞은 것은?
①서양과 통상수교 확대
②호포제 실시
③서원 장려와 증설
④의정부 기능약화
2)1876년 조선이 일본에게 문호 개방하게 된 계기는?
① 병인양요 ② 신미양요 ③ 오페르트도굴사건 ④ 강화도 조약
3) 개항뒤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기구는?
① 통리기무아문 ② 의정부 ③ 비변사 ④삼군부
4) 조선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은?
①갑신정변 ②청일전쟁 ③임오군란 ④갑오개혁
5) 갑신정변과 주도했던 세력과 거리가 먼 것은?
① 서양 근대제도의 사상 도입을 주장하였다
②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개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③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④ 청에 대한 사대외교 단절을 주장하였다.
6) 개항뒤 조선사회의 변동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에 들어와 무역 활동을 하였다.
② 조산의 쌀 ,콩 등 곡물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③ 쌀 생산이 활발해져 국내 곡물가격이 낮아 졌다
④ 서양 면직물 수입으로 국내 면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7) 개항뒤 조산 정부가 농업개량을 위해 설치한 모범 농장은?
① 잠상공사 ② 우정총국 ③ 박문국 ④농무목축시험장
8)1894년 농민전쟁 당시 농민 자치 조직으로서 농민의 의사를 모으고 집행했던 기구는?
①교정청 ② 집강소 ③ 군국기무처 ④ 해상공국
9) 1894년 농민전쟁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① 급진개화 세력이 일본의 힘을 빌려 시도한 개혁이다
② 정부 개화정책에 반발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③ 농민들이 정부의 개항을 촉진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④ 농민이 주도가 되어 근대개혁이 추진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10) 19세기 말 역사적 사건들을 순서대로 맞게 전개한 것은
① 을미사변-삼국간섭-갑오개혁-아관파천
② 갑오개혁(1894)-삼국간섭(1895)-아관파천(1896)-을미사변(1895)
③ 삼국간섭-을미사변-아관파천-갑오개혁
④ 아관파천-갑오개혁-삼국간섭-을미사변
*2번답이 틀린 것 같습니다
제11장 주권국가 건설운동과 일제의 한국 강점
1)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독립신문발간 ② 독립문건설
③황국협회 결성 ④ 만민공동회개최
2)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① 구본신참(舊本新參) ② 보국안민(輔國安民)
③ 제폭구민(除暴救民) ④ 내선융화(內鮮隆化)
3)러일전쟁(1904)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책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한일 신협약 ②을미사변
③ 군대해산 ④을사조약
4) 일본 정부로부터 빌려 온 차관을 갚기 위해 전개했던 계몽운동은
① 만민공동회 운동 ② 독립협회 운동
③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 ④ 국채보상운동
5) 1907년 결성된 비빌결사 조직으로써 독립군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을
주장했던 단체는?
① 신민회 ② 보안회 ③헌장연구회 ④ 서북학회
6) 을사조약 뒤 활약했던 대표적 평민 의병장은
① 민종식 ② 최익현 ③ 신돌석 ④ 박승환
7) 을사조약 뒤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된 계기는?
① 아관파천 ②광무개혁 ③임오군란 ④군대해산
8)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사회 경제적 변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신분제가 사라지고 사회적 평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② 시전상인들이 근대상인의로 변신하려고 노력하였다
③ 활빈당은 지배층의 무능과 수탈을 비판하였다
④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체 금지 되었다
9) 개항이후 나타난 새로운 문예 경향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신소설 ② 신체시 ③ 탈춤 ④ 창가
10) (독사신론) 지어 근대 민족사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① 신채호 ②박은식 ③최남선 ④주시경
제12장 일제의 식민 지배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1)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설치한 신민통치의 최고기구는?
① 통감부 ② 중추원 ③ 조선총독부 ④동양척식주식회사
2) 1910년대 일제가 식민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실시한 것은?
① 토지조사사업 ② 산미증식계?
③조선공업화 ④ 신사참배
3) 3.1운동으로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광범한 민중이 참가한 항일운동 이었다.
②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③ 노동자들은 운동에 참가하지 않했다
④ 나라 밖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 3.1운동의 결과로써 상하이에 수립된 것은?
① 경학사 ② 신흥강습소
③ 신한청년당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
5)1920년대 일제의 문화 통치에 대해 잘못된 것은?
①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다.
② 보통경찰제도를 헌병경찰제도롤 바꾸었다
③ 집회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 할수 있었다
④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유력한 조선인을 포섭하려 하였다
6) 1920년 만주 독립군의 활동을 맞게 묶은 것은?
가,봉오동전투 나, 청산리 대첩 다,경신참변 라, 자유시 참변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가
7)1926녀 조선공산당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준비하여 일으킨 항일운동은?
① 물산장려운동 ② 민립대학 설립운동
③ 6.10 만세운동 ④ 자치운동
8) 1820년대의 농민운동으로 맞는 것은?
①원산총파업 ②암태도 소작쟁의
③광주학생운동 ④형평운동
9)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반일민족협동전선은?
① 조선노동공제회 ② 조선형평사
③ 연정회 ④ 신간회
10) 일제감정기 사회 변화로 만지 않은 것은?
①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고 위상이 낮아졌다
②서울은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건물들이 잘보존되었다
③경성은 남촌과 북촌이라는 이중구조를 띠게 되었다
④신여성이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제13장 대공황과 전시체제,민족해방운동과 사회변화
1)일제가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려고 일으킨 사건이 아닌 것은?
①만주사변 ②중일전쟁 ③태평양전쟁 ④ 남한대토벌
2) 1930년대 일제가 만주 진출의 토대를 만들려고 추진한 정책은?
①조선회사령 실시 ② 조산공업화 정책
③언론 출판 자유 허용 ④ 토지 조사사업
3) 1930년대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헌병경찰제실시 ② 경무관제도 실시
③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시행 ④ 조선 사상범예방구금령 시행
4)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내용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소작료 인하운동 ②신간회건설운동
③ 부역동원 반대운동 ④노동절투쟁
5) 1930년대 초 언론기관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은?
①물산장려운동 ② 광주학생운동
③민립대학설립운동 ④ 브나로드운동
6)1930년대 후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토지사업실시 ②창씨개명 실시
③ 황국신민서사 강요 ④ 신사참배 강요
7) 중일전쟁 뒤 일제의 강제동원 수탈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②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다
③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동원 하였다
④ 물자공출은 시행하지 않했다
8) 1944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반일 세력을 모아 낸 조직은?
①원산그룹 ② 경성 콤그룹 ③ 건국동맹 ④조선어학회
9)1940년 중국 총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군(軍)은
①한국독립군 ②한국광복군 ③ 조선혁명군 ④동북항일연군
10) 중일전쟁 뒤 전시체제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일반 남성에게 국민복 입도록 하였다
② 여성들의 복장은 통제하지 않았다
③ 학교을 병영화 하고 군사 교육을 강화 하였다.
④ 여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체육교육을 하였다.
제14장 해방과 분단
1.해방과 38선 분할 그리고 좌우익 대립의 격화
1)1945년 해방전후의 정세에 대해 장못된 설명은?
①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② 한국은 일본 패망 즉시 독립국가 수립을 보장 받았다
③ 미국은 한반도에 4대강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④ 한국은 배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되었다
2)1945년 8월15일 해방직후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한국인들이 조직했던 기구는
① 건국준비위원회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
③ 미소공동위원회 ④ 남조선 과도정부
3)해방초기 주요사건의 흐름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모스크바 3상회의 -제1차미소공동위원회 -4당캄파-좌우 합작운동
②모스크바 3상회의 -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좌우합작운동
③좌우합작운동-모스크바3상회의-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④좌우합작운동-4당캄파-모스크바3상회의-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4)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치지도자를 맞게 제시한 것은
가: 김 구 나, 김규식 다. 여운형 다, 이승만 |
①가,나 ②나,다 ③ 다,라 ④ 라,가
5)19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많지 않은 것은?
① 5?10 총선거는 한국 역사상 처음 실시된 보통선거였다
② 5?10 총서거는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③ 5?10총선거로 결성된 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하였다
④ 5?1 총선거에서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6)다음 중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있었던 일은?
① 모스크바 3상회의 ②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③ 5.?10총선거 ④ 농지개혁
7)한국전쟁의 주요사건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 인천상륙작전-1?4후퇴 -정전협상
② 인천상륙작전-정전협상-1?4후퇴
③ 1?4후퇴-정잔협상 -인천상륙작전
④ 1?4후퇴-정전협상-인천상륙작전
8)정전협상 의제가운데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던것은?
①국경선 문제 ②정전 감시 문제
③포로 문제 ④평화협정 문제
9)한국 전쟁기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닌 것은?
①국회 프락치 사건
②한국 인도교 폭파사건
③국방방위군 사건
④부산정치 파동
10)한국전쟁의 결과와 영향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전쟁으로 일반국민들이 큰피해를 입었다
②남한의 반공주의체제가 강화 되었다
③정전협상 체결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④북한의 김일성이 궐력을 강화 하였다
제15장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을 위한 대장정
1)한국전쟁이후 1960년대까지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1950년대 미국원조는 한국경제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②한국 정부는 대충자금 용도 결정에 결정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③정정협정 이후 대충자금의 대부분은 군사비로 사용되었다.
④1961년 이후 무상원조가 유상 차관으로 바뀌었다.
2) 1960년대 경제개발 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계기는?
가,정전협정 나,사사오입개헌 다,한일협정 라,베트남 파병 |
① 가, 나 ②나,다
③ 다,라 ④라,가
3)197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해 맞지 않은 것은?
①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②한미합동 경제위원회가 처음조직되었다.
③일부기업들이 재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④오일쇼크로 석유가격과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올라갔다
4)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한 사건은?
① 4?19혁명 ② 부마항쟁
③ 광주민주화 운동 ④ 6월항쟁
5)박정희정부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것은?
① 8?3조치 ② 한일협정
③베트남 파병 ④부산정치파동
6)1970년대 초반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완화되고 있었다.
② 미국정부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④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직선제가 시행되었다.
7)1987년 6월항쟁으로 결과로 이루어진것일은?
① 삼선개헌 ② 내각책임제 개헌
③ 대통령직선제개헌 ④ 유신선포
8) 1991년 남북한이 합의한 것으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에
접근한것은
① 7?4 남북공동성명 ② 남북기본합의서
③ 6?15공동선언 ④ 유신선포
9)198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3저 현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였다.
② 북방적책을 통해 공산권으로 시장을 확대하였다
③ 사회 민주화는 기업들의 창의력을 높였다
④ 금융위기를 맞아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였다.
10)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① 청년실업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② 한국인의 편균 수명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③ 외국인 증가로 한국사회의 다원화가 진행되었다.
④ “한류”가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사 (2017년) 워크북 정리
제1장 선사시대의 전개와 고조선의 성립
1,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가 아닌 것은
①공주석장리 ② 서울암사동
③연천전곡리 ④ 상원검은모루
공주석장리 - 공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①찍개·②긁개·③주먹도끼·④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 년전의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
서울암사동유적-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방사선탄소측정에 따르면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집터는 바닥을 둥글거나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로 팠으며 크기는 길이 5∼6m, 깊이 70∼100㎝ 정도이다. 집터 가운데에 돌을 두른 화덕자리도 보이며, 입구는 주로 남쪽을 향한다. 기둥구멍은 보통 4개이며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
연천전곡리: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한탄강·임진강 줄기를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전곡리 유적이 규모가 가장 크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1978년 처음 발견되어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견하였다. 그 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전곡리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상원검은모루:평양직할시 상원군 흑우리(黑偶里)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상원군 흑우리(검은모루 마을) 상원강 기슭 우물봉 남쪽 비탈에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기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으로, 단양 금굴 유적과 함께 우리니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동굴유적이다. 동굴의 길이 약 30m, 너비 약 2.5m, 높이 2m 정도로, 석기 및 30여 종의 동물화석이 발견되었다. |
2.신석기 시대의의 생활 모습을 잘못설명한 것은?
▶①주먹도끼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였다
②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③농경과 가축사육이 시작되었다
④바닷가와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3,청동기시대의 생활모습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비파형 동검이 제작되었다.
②벼농사를 짓고 반달돌칼로 수확하였다.
③모계씨족사회가 시작되었다.
④복합적 사회 구조를 갖춘 정치체가 나타났다
4,청동기시대 사회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벼농사 보급으로 농업생산이 늘어 났다
②부족내부의 가족사이에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③취락과 취락사이의 전쟁이 잦아졌다
④지배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다.
5,고조선의 초기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아닌 것은?
?미송리식토기 ?빗살무늬토기 ?탁자식 고인돌 ?비파형동검
해석-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유물
미송리식토기-(시대-선사/청동기) 미송리형토기는 청천강 이북의 평안북도와 자강도 지방에서 출토되는 민무늬토기의 한 종류이다. 1959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미송리의 동굴유적에서 전형적인 것이 발견되어 미송리형토기로 부르게 되었다. 이 토기는 달걀의 위아래를 수평으로 잘라낸 모습의 몸체에 밖으로 바라진 비교적 높은 아가리가 얹혀 있는 형태이다. |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 그릇 표면을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점·금·동그라미 등의 기하학무늬를 나타낸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라고도 한다. 또한 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있기 때문에 ‘유문토기(有文土器)’라고도 하며, 무늬 모양의 특징을 따서 ‘어골문토기(魚骨文土器)’ 또는 ‘기하학문토기(幾何學文土器)’라고도 부른다. |
탁자식 고인돌- 거의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성격에 대해서는 거석숭배(巨石崇拜)의 표현으로서 종교적인 제사기념물로 보는 견해, 원시사회의 씨족 공공활동장소로 보는 견해, 그리고 무덤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요동지방을 포함하여 여러 고인돌에서 인골과 부장품이 발견되는 예로 미루어 볼 때 주로 무덤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고, 기념물과 집회소의 성격을 겸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그 규모가 크고, 정교하게 축조된 고인돌의 경우, 일정한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집안의 지배 족장 무덤으로 볼 수 있다.해방전에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분포양상을 근거로 하여 분류한 고인돌 형식으로, 기반식고인돌(南方式支石墓)과 대조를 이룬다. 형태상으로는 지상에 4개의 판석형(板石型) 고임돌(支石)을 세워서 장방형(長方形)의 무덤칸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北方式)고인돌을 일컫는다.
이러한 형식은 최근에 중국 요동(遼東)지방에도 수십 여 기 이상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북한지방에서는 이 형식말고도 지하에 매장시설이 있고, 덮개돌만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개석식(無支石式)도 널리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어, ‘북방식고인돌’이라는 개념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이 인정된다.한반도 내에서 탁자식고인돌은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의 대동강, 재령강, 황주천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평안남도 용강군 석천산(石泉山) 일대에는 동~서 2㎞, 남~북 3㎞의 면적 안에 무려 12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 강원도 산악지대에는 고성과 춘천을 연결하는 북한강 유역을 한계로 탁자식고인돌의 분포가 끝난다. 서해안 지대에는 전라북도 고창에까지 이르고 있으나, 수원-용인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는 거의 없다. |
비파형동검-청동기시대의 무기, 경북 상주군 출토,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비파형 동검을 통해 당시의 주조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
6.고조선의 정치.사회에서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진국과 한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였다
?사유재산관 가족제도가 발달하였다.
? 순장 풍습이 있었다
▶?노비는 발생하지 않은 사회 였다
7.부여사회의 사회모습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농업과 목축으로 주요산업으로 삼았다.
②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③유목과 수렵사회의 전통이 풍습에 영향을 주었다
④형이 죽의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
고구려 부여 옥저 등예 삼한의 성립과 사회 제천행사. 풍습, 시험문제가 많이 나오니 참고시기 바랍니다 | |
고 구 려 | ①동맹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②서옥제:남자가 혼인후 일정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풍속. |
부 여 | ①매년 12월 영고하는 제천행사를 하였다 ②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등 수렵 사회에서 전통의 풍습이 있었다 ③왕이 죽으면 순장제도가 있었다 ④부여는 목축을 주요 산업으로 하였다 ⑤주요관직이름도 우가,마가,저가 구가라고 하였다. ⑥형벌이 엄격하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⑦도둑질을 하면 물건의 12배를 변상하였다 |
옥 저 |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백성을 다스렸다 ① 옥저는 민며느리 풍습이 있었다 ② 옥저는 고구려에 부속되어 해산물과 특산물을 바쳤다 ③가족이 죽으면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 가족공동 무덤에 안치했다 ⑧옥저는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
등 예 |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백성을 다스렸다 ①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②족외혼:동예의 혼인 풍습으로, 같은 부족 내에서의 혼인을 금지하였음. ③책화:동예(東濊)에서, 다른 씨족의 지역을 침범하였을 때 과하던 벌칙. 동예는 경제 독립체로서의 씨족들 간의 경계가 엄격하여 함부로 다른 지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를 어겼을 때는 노예나 마소로 변상하게 하였다 ④단궁,과하마,반어피가,특산품으로 유면하였다 ⑨등예는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
삼한의 성립과 사 회 모 순 | ①기원전3-2세기경 한반도중?납무에는 여러소국이 원만하게 연맹한 진국(辰國) 존재하였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철기를 소유한 고조선 사람들이 남으로 이주하면서 진국사회는 마한,진한 변한으로 나누어 졌다 |
②마한은 한강이남 서부의 50소국으로 진한과 변한은 각기 경상도 지역에 12개소국으로 이루어 졌다 마한 목지국 (目支國)의 진왕(辰王)이 삼한을 대표하여 중국과 교류하였다 삼한 소국과 읍락 신지,견지 읍차 부례라고 불린 지배자가 다스렸다 | |
③삼한에는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5월이면 씨를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떼를 지어 밤낮으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놀았다 10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국읍마다 천군(天君)을 두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고 또 신성한 곳인 소도를 두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은 죄지은 사람이 도망쳐 와도 잡으러 들아갈수 없었다 천군의 통하여 삼한사회는 제정이 분리 되었음을 알수 있었다 | |
④변한은 철을 낙랑과 왜 등예로 수출하였다.처음에는 목지국이 마한을 대표하였으나 3세기 후반 백제국이 성장하여 마한의 대표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진한과 변한의 대표은 경주의 사로국과 김해의 구야국으로 이들은 뒷날 신라의 금관가야로 발전하였다. |
⑧다음에 해당하는 고대사회는?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서 자리잡았다 -단궁 과하마반 어피로 유명하였다 -10월에 무천이라는(霽天)행사를 하였다 |
①부여 ②옥저 ▶③동예 ④고구려
9,삼한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한반도에 중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② 제정일치의 사회를 만들었다
③ 마한.진한 변환의로 이루어졌다
④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10.삼한 소국 가운데 ?날 신라로 발전한 것은?
① 목지국 ② 백제국 ▶③ 사로국 ④ 구야국
제2장 삼국성립과 발전
고구려 계 보 | 동명성왕(주몽)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봉상왕 - 마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왕 - 안장왕 - 안원왕 - 양원왕 - 평원왕 - 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
백제 계보 |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초고왕 - 구수왕 - 사반왕 -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비류왕 - 계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 의자왕 |
신라 계보 | 혁거세왕 - 남해왕 - 유리왕 - 탈해왕 - 파사왕 - 지마왕 - 일성왕 - 아달라왕 - 벌휴왕 - 내해왕 - 조분왕 - 첨해왕 - 미추왕 - 유례왕 - 기림왕 - 흘해왕 - 내물왕 - 실성왕 - 눌지왕 - 자비왕 - 소지왕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편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무열왕(태종, 삼국통일)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고려 계보 |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조선 계보 |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 - 연산군 -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 -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 경종 - 영조 - 정조 - 순조 - 헌종 - 철종 - 고종 - 순종 |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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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원후 1세기경 활발한 대외정복을 통해 고구려의 국력을 신장시킨왕은 ?
①태조왕 ②산상왕 ③미천왕 ④동천왕
태조왕- 고구려 제6대 왕(재위 53∼146).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는 등 영토를 넓혔으며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여 실질적인 국가의 면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산상왕:고구려 제10대 왕(재위 197∼227).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 사후 왕후 우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서울을 환도로 옮기고 한(漢)나라 평주의 하요가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자 그들을 받아들였다. |
미천왕:고구려 제15대 왕재위 300∼331.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固)의 아들이다. 293년(봉상왕 2)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 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머슴살이·소금장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300년봉상왕이 폐위당하자 국상 창조리(倉助利)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재위 기간 중 진(晉)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국제 정세를 이용해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302년현도군을 공격해 적 8,000여 명을 사로잡고, 311년요동 서안평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오랜 투쟁 끝에 각각 병합했고,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서방과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하였다. |
산상왕-고구려10대왕- 고구려의 제10대 왕. 고국천왕 사후, 왕비 우씨의 지원으로 형 발기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에는 198년 지안에 환도성을 쌓아 수도를 옮겼다. 한편, 아들이 없어 주통촌의 여자를 소후로 삼아 아들을 낳아 교체라 했다. 교체는 후에 동천왕이 되었으므로, 산상왕대부터 고구려 왕계의 부자상속이 확립된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제10대 왕.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며, 고국천왕의 둘째 동생이다. 고국천왕이 죽자 왕비 우씨는 밤중에 몰래 연우의 집에 가서 공모한 다음, 왕의 유명이라 거짓말하여 연우가 왕위에 올랐다. 형인 발기는 연우가 우씨와 모의하여 왕위에 오른 것에 분노하여 한나라 공손도 세력과 함께 왕궁을 포위했으나 연우의 동생인 계수에게 패했고 그 자신은 자살했다. 왕은 후에 우씨를 왕비로 삼았다. 이 사실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산다는 취수혼의 사례로서 유명하다. 고구려는 이후부터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다. |
동천왕-고구려11대왕: 동천왕이 재위한 3세기 전반기는 고구려의 대외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234년 공손씨의 배후에 위치한 위나라가 화친을 희망해오자 위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238년에는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위와의 긴장이 고조되어 242년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했다. 245년 신라를 공격했다가 248년에는 화친했다. 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환도성에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었고, 동천왕은 남옥저 방면으로 피신, 다시 북옥저 지방으로 피난했다. 후에 국토를 회복했으나 247년 서울을 동황성으로 옮겼다.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위궁(位宮)·소명(少名)·교체.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 소비(小妃)이다. 213년(산상왕 17) 태자에 봉해졌으며 부왕인 산상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
2)삼국의 발전과정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고구려는 4세기 초 랴오둥 진출을 꾀하였다
② 백제는 3세기 중후반 고이왕 때 크게 성장하였다.
③가야 연맹체는 대가야 중심의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④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왕때 집권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 5세기 고구려의 발전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독자적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②자기 나라를 천손국(天孫國) 이라고 인식하였다.
③부여를 병합하여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④한강 이남으로 남진을 추진하지 않았다.
4) 6세기 신라 진흥왕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은?
① 한강유역차지 ② 대가야복
③불교공인 ④ 함경도지역진출
한강유역차지: 진흥왕(재위 540~576) 시대의 정복적 팽창을 가져 왔다. 7세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기를 거쳐, 18세부터 정치 일선에 나선 진흥왕은 놀라운 정치·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화랑도를 개편하여 국왕에 직속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사정부(감찰 기관) 등을 설치함으로써 관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 정책은 6세기 들어 심각하게 전개된 고구려의 내분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돌궐에 대한 방어 때문에 남쪽 경계를 철저히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의 내분 때문에 대외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한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고구려 공격에 협조하여 백제가 한강 유역을 되찾자, 백제의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아 버렸다. 한강 유역의 획득은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신라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가 가져다주는 인적·물적 자원과 한강을 통한 수송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가 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신라가 위치하게 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 협공이라는 삼국간의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흥을 꿈꾸던 백제 성왕의 기세를 꺾은 진흥왕은 고구려의 함경도 남부 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쳤고, 가야마저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써 국력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진흥왕의 위대한 영토 팽창의 업적은 그가 세운 4개의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가 잘 말해 주고 있다. |
대가야복속-진흥왕 |
신랑의불교공인:(법흥왕)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불교 수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흥왕은 불교 수용을 추진하기 위해 전통 신앙의 성지인 경주의 천경림을 베고 절을 세워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 때 이차돈이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이다." 라고 하며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이를 중지하라 요구하자 법흥왕은 이차돈을 문책하여 처형시켰다. 그의 목을 베자 하얀 피가 한 길이나 솟고 꽃비가 내리었다. 이를 보고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를 반대하지 못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에도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
5)삼국이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왕 중심의 통치조직을 새로 마련하였다
②각부의 독자성을 더욱 강화 시켰다
③각부의 지배자들은 국가 간리로 흡수하였다
④관등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 통치력을 넓혔다
6)삼국사회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신라는 골품제에 따라 사회 생활을 규제하였다
②신라의 화랑도는 계층 간 갈등을 완화 시켰다.
③고구려는 서옥제 혼인풍습이 있었다
④백제는 진대법을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7)고구려는 벽화의 걸작인 사신도<四神圖>가그려진 고분은?
① 장군총 ② 무용총
③ 강서대묘 ④ 무령왕릉
③강서대묘요약 봉분의 직경 51.6m, 높이 8.86m에 이르는 대형 봉토석실분으로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이다. 널방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천장은 평행삼각고임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널방벽과 천장부의 석면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널방 벽화의 주제는 사신이고 천장부 벽화의 주제는 신선세계이다. 널방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는 세부묘사가 치밀하고 필치에 생동감이 있으며 채색이 화려하다. 널방 북벽의 현무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가운데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강서대묘는 널방의 축조방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벽화의 구상이 장대하고 기법이 세련되어 그 시기 고구려 건축기술의 수준과 회화기법의 발전 정도를 잘 나타낸다. 제작연대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
장군총: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의 용산[龍山, 또는 土口子山]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 |
무용총: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古墳).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角抵塚)과 나란히 있다. 기저(基底)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方錐形) 분구(墳丘)이며 높이는 3m 내외이다. 널방[墓室]은 약 3m 사방의 널방[玄室]과 가로로 긴 앞방[前室], 이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및 널길[?道]로 되어 있는데, 널방[玄室]의 바닥면에는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4장의 판석(板石)을 배열한 널받침[棺臺]시설이 있다. |
무령왕릉: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내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송산리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8) 다음 설명과 관련이 있는 사상은?
●고구려는 372년 테학을 설치하였다. ●백제에는 5경박사가 존재하였다 ●진흥왕 순수비에는<논어>의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삼국은 각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
① 유교 ② 불교
③ 도교 ④샤머니즘
유교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2117&cid=40942&categoryId=31464 |
불교: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4858&cid=40942&categoryId=31543 |
도교: 무위자연설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자 철학사상이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 ·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2688&cid=40942&categoryId=31604 |
샤머니즘: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이나 종교이다.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0743&cid=40942&categoryId=31536 |
9) 중국과 서역의 음악을 수용하여 창조된 고구려 음악은?
① 당악(唐樂) ②사자기(獅子伎)
③ 고려기(高麗伎) ④영고(迎鼓)
당악(唐樂) :요약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유입된 당나라의 음악과 송나라의 음악.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351&cid=40942&categoryId=32994 |
사자기(獅子伎)-「사자기」는 삼국시대 신라에서 연주된 가야금곡. 진흥왕 때 우륵이 지은 12곡 중 여덟째 악곡의 이름이다. 이 악곡은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5수 중 산예(?猊 : 사자의 일종)와 관계 있을 것으로 보이며, 사자의 가면을 쓰고 연주하는 사자무의 반주음악으로 추정된다. |
고려기(高麗伎) 요약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에 소개된 고구려음악. 일명 고려악(高麗樂). 고려기 또는 고려악의 '고려'는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왕조(高麗王朝)의 고려가 아니고 고구려이므로, 고려기 또는 고려악은 고구려음악의 옛날 명칭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음악이 『수서』(隋書)와 『당서』(唐書) 즉 『신당서』에서는 고려기로 기록됐고, 『구당서』(舊唐書)에서는 고려악으로 전한다.고려기는 수나라 개황(開皇 589~600) 때의 칠부기(七部伎)와 대업(大業 605~617) 때의 구부기(九部伎) 및 당나라 태종(626~649) 때의 십부기(十部伎)의 하나로 포함됐다고 『수서』 권15와 『신당서』 권21에 전한다. |
영고(迎鼓):초기 부족연맹체 국가인 부여(夫餘)에서 행했던 집단적 제천의식. '영고'에 관한 기록이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에 전한다.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 며칠 동안 계속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를 즐기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초기 부족연맹체 사회는 이전의 수렵생활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이미 농경사회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래서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천행사가 여러 곳에서 열렸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天)', 삼한(三韓)의 '농경의례(農耕儀禮)' 등과 같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였다. |
10) 645년 고구려를 침략한 당군을 막아낸곳은?
① 옹진성 ②안시성
③ 대아성 ④관산성
제3장 통일신라와 발해
1)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순서대로 전개한것은?
①나당동맹 ?백제멸망-고구려멸망-나당전쟁
②백제멸망-나당동맹?고구려멸망-나당전쟁
③나당동맹-고구려멸망-백제멸망-나당전쟁
④고구려 멸망-나당동맹-백제멸망-나당전쟁
2) 나당전쟁에서 신라군이 당군이 크게 물리쳐 전쟁주도권을 장악한곳은?
① 평양성 ② 사비성 ③매소성 ④요오성
3) 신라삼국통일의 한계로 볼수 있는 점은?
①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포웅하였다
②우리민족 형성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③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④통일 과정에서 외세를 이용하였다
4)통일 이후 신라 신문왕의 업적으로 잘못 설명한 것은?
①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②수도를 달구별로 옮겼다
③중앙과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였다
④귀족의 경제기반인 녹읍을 폐지하였다
5)삼국통일이후 수도의 지리적 역점을 보완하려고 지방중심지에 설치한 것은?
①6정 ②10정 ③9서당 ④5소경
6정: 6정(六停)은 544년(진흥왕 5년)부터 9주 5소경 체제가 정립된 685년(신문왕 5년)까지 신라의 지역 최고 군사조직으로서 행정조직의 기능을 겸하였고, 이후 9주 5소경 체제를 마련하는데 기반이 된 조직이다. |
10정: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중요한 중앙군이 9서당이었다면, 지방에 배치된 가장 중요한 부대가 바로 10정(十停)이었다. 10정은 통일신라시대의 9주를 기준으로 각 주에 1개의 정(停)을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만 한산주(漢山州)만은 지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국방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
9서당:통일신라시대의 핵심적인 중앙 군사조직. 국왕에게 직속된 부대로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전제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조직이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군사조직은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한 6정(六停)이었다. 그렇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그 기능과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군사조직을 설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앙군으로서의 9서당(九誓幢)과 지방군으로서의 10정(十停)이었다. 추가자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6162&cid=40942&categoryId=31749 |
5소경-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에 새로이 정비한 특수 행정구역. 왕경(王京, 지금의 경주)이 신라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향에 맞추어 설치되었다. 소경(小京)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설치되어 있었다. 일찍이 514년(지증왕 15)에 아시소경(阿尸小京)이 설치되었으며, 557년(진흥왕 18)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 지금의 충주)이, 639년(선덕여왕 8)에는 북소경(北小京, 지금의 강릉)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 전국적으로 통일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
6)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주민은 고구려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
②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웠다
③신라와 양립하여 남북국 형새를 이루었다
④세력이 커지자 “행동성국”으로 불렀다
7)발해의 대외교류를 잘못 설명한 설명한 것은?
①당에 유학생과 유학승을 파견하였다
②바닷길을 통해 일본을 왕래하였다
③신라와는 인적.물적 교류를 하지 않했다
④신라에 대한 경쟁의식을 가졌다
8)통일 신라사회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귀족들은 금입택에 살면서 별장을 소유하였다
②세금을 잘 거두려고 촌락문서를 작성하였다
③수도 금성에는 시장이 설치되었다
④농민들은 군역 의무를 면제 받았다
9)정토신앙을 보급하여 불교를 대중에게 전파했으며 일심사상을 내세워 불교 교리 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 신라 승려는?
①의상 ②원효 ③혜초 ④ 진표
의상-625(진평왕 47)-702(성덕왕 1). 신라시대의 승려. 화엄종의 개조이다. 당나라에 가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하였으며, 676년(문무왕 16)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사상을 펼쳤다. |
원효-617~686년까지 살았던 신라의 승려로서,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섬. 원효의 사상 - 깨달음을 얻기까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와 의상 661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마저 점령하기 위해 한창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였어. 배움에 목말라 있던 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은 부푼 꿈을 안고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어.
당시 당나라에는 현장 법사가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어가고 있었어. 당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은 신라에도 전해져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은 당나라 유학을 원했고, 원효와 의상 또한 현장 법사 밑에서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거야. 이들은 오직 부처를 향한 마음으로 경주를 출발했어.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어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걸어 충청남도 직산 지방에 이르렀어. 어두워져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돼.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달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원효는 그토록 원했던 깨달음을 해골물에서 얻었어.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책 쓰기에 몰두했어. 그는 일생 동안 150여 권의 책을 세상에 남겼어. 그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해. |
혜초-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
진표-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으며 속리산에 길상사(吉祥寺)를 짓게 했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
10) 발해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묶은 것은?
가. 불국사 나, 석국암 다, 정혜공주무덤 라,정효공주무덤 |
정혜공주무덤:(건립시기·연도발해시대 777년 )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있는 발해 제3대 문왕대흠무(大欽茂)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무덤. 돈화현 남쪽 약 5㎞의 거리에 있는 육정산(六頂山)의 고분군에서 1949년 8월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발굴 결과, 묘비와 함께 높이 62㎝인 2기의 돌사자도 출토되었다. 묘비는 규형(圭形)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90㎝, 너비 40㎝, 두께 20㎝로 주변에는 번초문(番草文)을 음각(陰刻)하고 상단에는 구름무늬〔雲文〕가 음각되어 있다.
문자는 21행으로 모두 725자인데, 파손 또는 판독하지 못할 만큼 손상된 문자가 많아 뜻을 분명히 밝힐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비문의 잔결(殘缺)로부터 40세로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에 죽은 공주에게 ‘정혜(貞惠)’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보력 7년 11월 24일에야 진릉(珍陵) 서원(西原)에 배장된 사실이 판명되었다. |
정효공주무덤: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 서쪽 용두산(龍頭山) 위에 있다. 용두산 꼭대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등성이로,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산등성이 중간의 작은 갈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고, 그 끝자락의 남쪽 기슭은 면적이 약 2천 ㎡에 이르는 평평하게 깎아 만든 작은 대지로, 정효공주묘는 바로 이 평평한 대지 중간에 있다. 무덤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복동하(福洞河)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해란강(海蘭江)으로 들어간다. 복동하 양안은 북쪽이 넓고 남쪽이 좁은 협곡분지이다. 그 사이에는 두도(頭道)~복동(福洞)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여 지나가며, 도로 양쪽에는 빽빽하게 집들이 있다 정효공주묘 발굴은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발굴 이후, 발해고고학의 또 하나의 대발견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묘비와 벽화는 매우 귀중한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학자들이 묘비와 벽화에 대해서 고증·연구를 하였고, 묘비와 벽화연구를 통하여 매우 발달된 발해문화, 그리고 발해문화와 당 문화의 밀접한 관계를 분명하게 서술하여, 발해사 연구를 매우 발전시켰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제4장 고려 성립립과 발전
1)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있었던 일은?
①후고구려성립 ② 후백제멸방
③고려건국 ④ 신라항복
후고구려성립-신라 말기 궁예가 세운 나라. 後 뒤 후, 高 높을 고, 句 글귀 구, 麗 고울 려 후고구려는 신라 말기 궁예가 세운 나라예요.통일 신라 말에 이르러 나라는 크게 혼란스러워졌어요. 신라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뜻에 따라 줄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심지어 왕을 죽이기까지 하였어요. 흉년과 전염병으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지요.이때 지방의 세력가들은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어요. 궁예는 신라의 왕족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승려로 살았고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해요. 궁예도 뜻을 세워 승복을 벗고 반란군의 장수가 되었어요. 궁예는 세력을 계속 키워서 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을 지배하는 후고구려를 세웠지요. 그러나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로 칭하며 포악한 정치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어요. 신하들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였어요. 왕건은 918년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겼어요. 935년에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936년에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답니다. 용례 : 궁예는 왕이 되어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정했습니다. |
후백제멸방: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금성(경주)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태조는 신라를 돕기 위해 출병하였지만, 대구 공산 전투에서 패하는 등 후백제군에 고전하였다. 그러나 고창 전투의 승리로 후 백제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경순왕은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이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자, 장남인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였으며, 왕건은 신검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을 데리고 나주로 달려와서 고려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장군 유금필 …… 등을 시켜 전함 40여 척을 가지고 바닷길로 가서 견훤을 맞이하게 하였다. 견훤이 들어오자 (태조는) 다시 그를 상부(尙父: 아버지처럼 높인다는 뜻)라고 불렀으며, 남쪽 궁궐을 주고 지위는 모든 관리의 위에 있게 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또한, 금과 은을 주고 노비 40명과 10필의 말을 주었다. - “고려사” - │도움 글│ 왕건은 귀순한 견훤을 크게 우대하였다. 이 때문에 후백제에서는 견훤을 따르는 세력과 신검의 세력 간에 분란이 심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왕건은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여 승리할 수 있었다. 견훤은 후삼국 통일 직후 병으로 사망하였다. |
고려건국: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왕씨(王氏)가 34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처음 왕건(王建)이 신라 말에 나라를 세워 분립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성종 때 중앙집권적인 국가기반을 확립시킨 후 문종 때 이르러 귀족정치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그러나 1170년(의종 24) 무신란(武臣亂)이 일어나 1백년간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다시 1백여 년 동안의 원나라의 간섭기를 거쳐, 14세기 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9세기 말 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다. 그 가운데 전라도지방의 견훤(甄萱)과 중부지방의 궁예(弓裔)가 세력이 가장 왕성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왕건은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지방의 호족으로서 궁예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935년신라의 귀부(歸附)를 받고, 이듬해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국호를 ‘고려’라 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중시, 북방을 개척해 국경선을 청천강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고구려계통의 발해유민을 받아들여 포섭하였다.태조는 대내적으로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는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을 쓰고, 기인제도(其人制度)와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실시하였다.호족세력을 억압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태조의 집권화정책은 그 뒤 광종의 훈신숙청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및 과거제의 실시로 나타났다. 경종 때는 전시과의 제정으로 집권체제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성종 때는 내외의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성종은 당나라 제도를 채용해 삼성육부의 중앙관제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한편, 지방호족들의 지위를 격하하는 향직을 개혁해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보게 하였다. 귀족사회 형성의 기반이 마련된 성종 이후 현종을 거쳐 문종에 이르는 사이에 고려의 정치기구와 토지제도 및 신분체제가 완비되어 절정기를 맞았다. 문종 때는 고려의 귀족정치가 절정기에 이르러 귀족문화가 난숙해지고, 경제적·정치적으로 국력의 신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이 축적되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인종 때의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종 때는 무신란이 일어나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 무인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문신의 귀족정치는 끝나고 새로이 무인들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이 때 무인집정을 정점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해 문신을 억압하고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각지에서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무신정권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설치하고, 막대한 사병을 양성해 무력기반으로 삼았으며, 광대한 토지를 집적해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1270년 몽골의 세력을 업은 원종과 그 일파의 거사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려 무인의 마지막 대몽항전인 삼별초의 저항(1270∼1273)이 끝나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두 차례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다. 또한 왕실은 원나라에 예속되어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왕실의 호칭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관제도 격하되고 직접 원나라의 관청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고, 또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가 설치되어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었다.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권문세족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세력이었다. 친원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에 앉아 정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을 중요시한 점에서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인 관직을 중시하는 새로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점차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가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인해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성세력인 권문세가과 대항하면서 정치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이들 신흥사대부세력과 결탁한 이성계에 의해 멸망되고 새 왕조로 교체되었다. 불교적 성향이 강한 권문세족은 친원정책을 주장하고, 기성질서의 유지에 급급하였다. 반면, 유교적 신흥사대부는 친명정책을 주장하고, 개혁정치를 요구하였다. 무인 이성계는 시대의 새 흐름을 간파하고, 신흥사대부세력과 결탁하였다.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중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해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을 공포해 새 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1392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을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신라항복-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신라 멸망(935년) 경순왕(敬順王, ?∼ 978년)은 신라 제56대 군주이다.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부(傅)이고 시호(諡號)는 경순(敬順)이다.그는 신라의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그러나 재위 8년만에 나라를 고려에 평화적으로 양국할 것을 결정하고,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사촌 누이인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등을 후비로 맞이 하였다. 한편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
2)고려 대조 왕건의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역분전 제도를 설치하였다
② 지방 호족에게 성씨를 내주었다
③ 지방군현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④ 거란과 친교를 맺고 교류하였다
역분전제도요약: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토지 분급제도./940년(태조 23)에 후삼국의 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조신·군사 들을 대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지급 기준은 관계와 상관없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도와 공로의 대소에 의거했다. 지급액은 얼마였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박수경에게 토지 200결을 주었다는 것이 역분전 지급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역분전은 고려시대의 토지분급제도인 전시과제도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
3)고려 초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이 아닌 것은?
①<시무28조> 시행 ② 과거제 실시
③ 노비안건법 실시 ④백관의 공복 제정
시무28조를 요약하면 982년 최승로 시무 28조 건의 982년(성종 1)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이해 6월에 성종이 경관(京官) 5품 이상자들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던 최승로가 올린 두 상서문 중의 하나이다. ? 불교에서 파생된 폐단과 사회문제 시정.? 민폐의 시정과 민역의 감소 등 집권층 사찰 지방호족세력 등에 의해 가혹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 ?신라 말 이래 문란해진 복식제도 신분제도 등의 정비 ?광종의 지나친 모화적 태도를 비난 중국에 대하여 긍지와 독자성을 가지고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의 현실에 알맞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 강조. ? 정치개혁의 성공 여부가 군주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수신 겸손 중시.위의 내용은 즉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목표하였다 |
4) 고려 정치제도에서 감찰 업무를 수행한 기관은?
①삼사(三司) ②사관(史觀)
③어사대(御史臺) ④한림원(翰林院)
①삼사(三司)호부(戶部)와 함께 고려시대 국가재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했던 중앙 기구.송(宋)의 삼사(三司)를 모범으로 하여 고려 성종(成宗) 때 설치된 삼사(三司)는 호부(戶部)와 함께 고려 전기부터 조선왕조 건국 직후까지 국가재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했던 중앙 관청이었다. 호부가 호구(戶口)와 토지와 같은 국가의 기본적인 재정 수입원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데에 비해서 삼사는 호부가 파악한 재정 수입원으로부터 수취한 전곡(錢穀) 즉, 부세(賦稅)의 출납 회계 업무를 관장하였다. 참고클릭-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548691393 |
②사관(史觀)요약-역사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관점 또는 가설 사관요약 참고클릭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5380 |
④한림원(翰林院)요약 왕족을 봉하는 책문과 신하와 백성에게 내리는 교서·장상을 임명하는 제고 및 왕의 회답인 비답 등 왕명과 표·전과 같은 외교문서를 왕을 대신하여 작성하는 직임을 담당했다. 이러한 직책상 한림원의 관원들은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뛰어난 인물들로 보임되었으므로, 왕명의 제찬 이외에 과거의 고시관이나 경연관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왕을 모시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여 옥당·신선지직이라고도 불렸다. 이 관청은 태조 때 태봉의 원봉성을 계승하여 설치되었고, 얼마 후 학사원으로 고쳐졌다가 현종 때 한림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원으로는 문종 때 재신이 겸하는 판원사, 정3품의 학사승지 1명, 정4품의 학사 2명, 시독학사 1명, 시강학사 1명, 직원은 4명으로 그중 2명은 권무였다. |
5)고려에서 5품이상의 관리를 우대했던 제도를 맞제 묶은 것은?
가.기인제도 나 사심관제도 다.음서제 라.공음전시법 |
①가. 나 ② 나. 다
③다, 라 ④ 라. 가
가,기인재도: [역사] 고려와 조선 시대, 지방 호족 및 토호의 자제를 중앙에 볼모로 데려와서 그 출신 지방의 행정에 고문(顧問) 구실을 하게 하던 제도.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신라의 상수리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
나,사심관제도: 요약>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그 지역을 통제하도록 한 제도 |
다.음서제: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과거를 치르지 아니하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 |
라.공음전시법:요약:고려시대 전지(田地)와 시지(柴地 :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땅)를 자손에게 세습하게 한 토지. |
6)고려 전기 사회의 모습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정호충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관리가 될수 있었다
② 본관에는 주현,속현,부곡 등의 서열이 있었다
③ 부계와 모계를 등등하게 여기는 양측적 관계가 자리 잡았다.
④ 여성의 재혼은 엄격히 금지 되었다
▶정호층:정호층은 신라말 고려 초의 지방세력에서 유래 합니다. 지방세력의 후예라는 얘기죠. 태조가 본관제와 토성분정 정책을 시행할 때 사성과 본관을 부여 받은 층을 말합니다. 이들은 고려 초기 지배질서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점에서 지배층의 범주에 속합니다 |
▶본관에는주현.속현.부곡:고려의 행정 구역은 주현, 속현, 향·부곡·소, 3등급으로 나뉘고 향·부곡·소의 주민들은 국가에 더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열악한 삶 속에 이사조차 가지 못하고 지역 차별에 신음하던 공주 명학소 주민들은 결국 난을 일으켰고, 항쟁의 불씨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훗날 만적의 난까지 영향을 미친다. |
7)고려 전기 대외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많지 않은 것은?
① 거란에서 담판하여 강동6주를 확보하였다
②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부정하였다.
③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공격하였다.
④ 외왕내제 체제를 취하였다
외왕내제체제: 외왕내제 체제의 성립[편집]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황제국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광종은 수도였던 개경을 황도(皇都)로 높여 부르고,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승격시켜 서도(西都)라 칭하였다. 고려는 초창기부터 임금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짐(朕), 임금의 명령은 조서(詔書), 임금의 호칭은 폐하(陛下), 임금의 아들은 태자(太子)로 정하는 등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뿐만 아니라, 묘호와 연호[2]를 사용하며 고려가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위협적이던 북방의 요나라 및 중요한 교역상대이던 송나라와의 외교마찰을 줄이기 위해, 외부적으로는 요, 송, 금 등에 국왕을 칭하기도 하였다.(사실 고대 한국에서의 대왕(大王)은 중국의 황제(皇帝)와 동격의 위상을 지녔다고 한다) 그 결과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물과 여진의 강동 6주를 획득하는 등 외교적 실익을 취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외왕내제 체제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간섭기에 접어들 때까지 3백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
외왕내제 체제의 붕괴[편집] 성종은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낮추었지만, 기본적인 황제국 체제는 변함이 없었다. 귀주 대첩 이후 전성기를 맞은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절정에 이르러 대국과의 외교관계를 주도하는 한편, 주변국과 제후국을 아울러 견고한 질서를 확립하였으며 체제 역시 더욱 굳건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기 이후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이자겸의 독단으로 금과의 형제관계를 맺고 이어 군신관계를 맺음으로써 외왕내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국 체제가 본격적으로 무너진 건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 때문이었다. 고려는 수십년간 초강대국 원나라의 대군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원나라는 고려의 태자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도록 하였으며, 원나라의 부마국에 걸맞게 고려의 체제를 바꾸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임금이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은 고(孤), 임금의 호칭은 전하(殿下), 임금의 아들은 세자(世子)로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또한, 원나라는 묘호에 조(祖), 종(宗)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전유물이라 하여 금지시키고, 대신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앞에 충(忠)자를 붙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외왕내제 체제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
별무반: 고려의 북변을 침범하는 여진을 정벌하기 위하여 1104년(숙종 9)에 설치했다. 고려에 대한 여진의 적대행위는 고려 문종대(1046~82)부터 고조되기 시작했고, 이후 동여진 완옌부[完顔部]의 강성과 비례하여 침략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숙종대에 들어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추진했는데, 오히려 여진 정벌의 임무를 띠고 출전한 윤관이 통솔하던 군사가 패했다. 이에 고려 정부는 보병으로 여진의 기병을 대적할 수 없었다는 윤관의 분석에 따라, 강력한 기병 편제를 갖추고자 별무반을 설치했다. |
8) 고려 전기 사상에 대해 잘못 설명한 것은?
① 풍수지리사상이 유행하였다.
② 국가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지원하였다
③ 교종과 선종의 통합이 시도 되었다
④ 불교의 융성으로 유교는 배척되었다
한국의 유교 : 고려시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어지는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
9)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고려 전기 역사서술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① 삼국사기 ② 삼국유사
③ 칠대실록 ④ 고금록
①삼국사기:요약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 삼국시대의 정사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6478 |
②삼국유사요약:1281년(충렬왕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내용『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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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칠대실록:칠대실록;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왕의 실록이다.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사초가 불타버려 현종은 황주량에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을 재편찬하게 하였다. 총 36권이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칠대사적기라고도 한다.고려시대는 국초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가 있어 태조 이래의 사실을 기록했으며, 10세기 말엽 광종 때 궁궐 안에 사관(史館)을 설치해 모든 사료를 보관하였다. 그러나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사관이 불에 타면서 이곳에 보존된 기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
④고금록:요약고려 후기에 허공(許珙)·원부(元傅)·이인복(李仁復) 등이 편찬한 역사책. |
10)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이 아니것은?
① 석불암 본전불
②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
③ 부여 재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④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①석불암 본전불: 신라의 경덕왕의 시대, 재상 금 오오시로(킴데손)에 의해 751년경, 건립되었다. |
제5장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1)고려 전기의 통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게 된 가장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
① 거란여진의 침공 ② 이자겸난
③ 묘청의 난 ④ 무신란
?이자겸난:요약 이자겸은 문종 때부터 80여 년 간 외척으로서 세력을 굳힌 경원이씨 가문의 출신으로 1122년 예종이 죽자 자신의 외손인 인종을 즉위시키고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반대파인 한안인 등의 일파를 살해·유배시켰다. 자제와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고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비로 들였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배경으로 전횡이 심했으며 사사로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인종은 1126년 이자겸의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에 밀려 실패했다. 이후 인종은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고 1127년에 척준경도 제거하였다.이자겸의 난으로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졌으며 귀족층의 분열·대립이 표면화되거나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되었다 |
?묘청의난:묘청의 난(1135년1월~1136년2월, 인종13) ①서경출신의 승려 묘청은 고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경의 지덕이 쇠약한 때문이라 며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 ②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고, 대화궁을 짓는 등 서경 중시. ③묘청은 1135년 정월 조광, 유참 등과 함께 국호 대위(大爲), 연호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天遣忠義)라 자칭하며 반란. ④김부식이 반란 진압.약 1년간 관군에게 저항했던 묘청의 군대는 1136년 2월 항복했다. |
?무신란: Ⅴ. 무신의 난(1170, 의종 24) -고려 의종이 1170년 8월 보현원에 행차할 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고, 젊은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등 모욕을 가하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이 문신을 학살. 02. 무신의 난의 원인 ①무반은 정3품인 상장군이 최고직이어서 승진이 어렵고 최고위직인 재추직은 문반이 독차지하는 구조(강감찬, 윤관, 김부식 모두 문신) ②고려 광종이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 문과만 시험제도 마련. ③목종(998) 문무양반 전시과 개정하며 무신의 품계를 문신보다 낮게 대우. ④현종(1014) 늘어나는 관료의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 몰수-무신 최질, 김훈 등이 반란 일으켜 관계자 황보유의, 장연우 귀양 보내고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피살. 03. 최씨 무단 정권의 수립(1196) -이의방ㆍ정중부ㆍ경대승ㆍ이의민으로 이어지던 무신 정권의 혼란기를 최충헌이 독재로 안정시킴.Ⅵ. 몽골의 침입(1231~1270) ①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등 최씨 4대(1196~1258)에 이어 류경(1258~1260, 문신), 김준(1260~1268), 임연(1268~1270), 임유무(1270~1270) 등이 무신정권 유지. ②최우 집권기에 몽골이 침입, 개경을 포위하자 최씨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해 대몽항쟁 돌입 ③집권층이 강화도에 피신한 동안 전 국토가 몽골의 병화에 시달리며 막대한 피해. ④무신정권을 종식시키려는 왕실과 문신이 힘을 합쳐 몽골에 조건부 항복하며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수도 환도.고려 시대, 무신들이 일으킨 몇 차례의 변란을 통틀어 이르는 말. 현종 때의 최질이나 김훈 등의 난과 의종 때의 정중부의 난 따위가 있다. |
2)고려 무신정권 시기 최충헌이 실시한 정책결정.집행기구는?
① 도병마사 ② 교정도감 ③심목도감 ④정동행성
①도병마사:고려시대 중요 사안을 심의·결정하던 국가 최고 회의 기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고관(추밀)으로 구성되었으며 국방상 중요한 문제와 국가의 정책을 협의·결정하는 기관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간섭하게 도평의 사사로 개편되어 국정 전반의 문제를합의했으며 조선초의 정부로 개편되었다. |
③심목도감:식목도감(式目都監)은 도병마사와 마찬가지로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관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법제나 격식등 대내문제를 담당하였다. 고려 정치의 귀족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구이다.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된다. |
④정동행성요약:고려 후기 원(元)에 의해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던관서. 시행일1280년(충렬왕 6) 폐지:1356년(공민왕 5) |
3)고려 무신란 이후 일어난 농민 천민의 봉기가 아닌 것은?
①원종,애노의 난 ② 망이.망소이난
③김사미와 효심의난 ④ 만적의 봉기
①원종,애노의난요약: 통일신라 말기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았고 지방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자연재해로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기를 든 세력으로 신라 정부에 정식으로 반기를 든 첫 사례로 기록된다.원종과 애노의 세력은 '초적'이나 '도적'이라 표현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표현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에서 보낸 군대와 대결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조직력과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뒤 그들의 세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곧 북원에서 양길이 궁예를 거느리고 강대한 세력을 떨친 것으로 보아 그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②망이.망소이난: 고려 후기에 천안을 비롯한 충청도 지역에서 공주 명학소민들이 신분제 타파를 목적으로 일으킨 봉기.망이·망소이 난은 무신집권기인 1176년(명종 6)에 충청남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등 농민과 천민들이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일으킨 봉기이다.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난의 여파로 1176년 3월에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던 홍경원이 불타기도 하였다. |
③김사미와효심의난 :요약 고려시대 1193년(명종 23) 경상도지역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주동하여 일으킨 농민항쟁 |
④만적의 봉기: 만적의 난(萬積-亂)은 1198년(신종 1년) 고려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이다 |
4)다음 빈칸에 들어갈 내용으로 맞는 것은
13세기 초부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크게 요동쳤다.( ④몽골 )이 성장하여 주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그여파가 고려에도 미쳤다 |
①말갈 ② 거란 ③ 여진 ④몽골
5)고려의 대몽항쟁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산성.해도 입보책으로 몽골기병에 맞섰다
②전쟁초기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③무신정권은 몽골과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삼별초 항쟁은 결국 진압되었다
성.해도입보책: 대몽전쟁기(對蒙戰爭期) 몽고침입에 대응하여 고려 정부가 군현민을 험준한 산성(山城)으로 입보(入保)시킨 정책. |
삼별초: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 민족기록화를 비롯하여 삼별초를 몽골에 항거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지만, 당시 제주도를 비롯한 삼별초는 몽골군을 막기 위한 거대한 장벽 환해장성을 쌓는 데 제주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기도 하고 민가 약탈을 일삼아서 지역 민중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민중이 여몽연합군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여 이들의 몰락을 기여했으니 자업자득 같은 면도 있다 |
6)고려 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지배세력은?
① 호족 ② 진골귀족
③ 문벌귀족 ④ 권문세족
①호족요약: 통일신라 말 지방에서 나타난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강한 세력. |
②진골귀족: 진골성골 신라시대에 귀족들 |
③문벌귀족요약:고려 초기의 지배계층/고려 초기의 지배계층으로, 주로 지방의 호족이나 개국공신들이 고위의 관직을 대대로 차지하여 문벌귀족으로 되었다. 문벌귀족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친족·처족 등의 음공에 따라 그 후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음서제도와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토지를 주는 공음전시(功蔭田柴) 같은 장치를 마련했다. 이 체제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 측면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문벌귀족 관료 사이의 균형이 깨어져 권력과 경제력의 독점현상이 나타났다. 권력 독점에 반발하는 신진관료의 대항으로 인해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다. 문벌귀족이 지배하던 사회는 위기에 처했고, 마침내 무인란(武人亂)으로 붕괴되었다 |
④권문세족요약: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로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門閥貴族), 조선의 양반사대부(兩班士大夫)와 비견되는 용어.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의 성립 시기는 대원(對元) 관계가 안정되는 충렬왕대(재위 1275~1308)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구체적으로는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여 발표한 교서에서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 하여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을 나열한 데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란 당시 고려의 최고 가문을 뜻하므로 그것은 곧 당시 지배세력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고려 전기 이래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새로운 관인층 또는 무신으로서 등장한 가문, 그리고 대원관계의 전개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한 가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원간섭기(元干涉期)에 들어 몽골어 통역관이나 원의 환관(宦官), 원에 보내는 매를 사육하는 응방(鷹坊)을 통해 출세한 사람들, 원 공주 출신 고려 왕비의 게링구〔怯怜口: 사속인(私屬人)〕, 국왕이 즉위하기 이전 원에서 숙위(宿衛)할 때 시종하고 돌아와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 대원관계 속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한 무신 등 여러 갈래의 신흥세력이 권문세족에 포함되었다. |
7)공민왕 개혁에 맞지 않은 것은
①과전법실시 ②친원세력 숙청
③쌍성총관부 공격 ④전민변정사업
①과전법실시: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국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비롯한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주도하여 실시한 토지 제도를 이르던 말.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공전(公田)을 확대하고 사전(私田)의 분급은 일정한 제한을 두었으며, 조선 초기 양반 관료 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었다. |
③쌍성총관부공격:요약:고려 후기 몽골이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에 설치했던 관청쌍성총관부는 총관과 천호를 조휘와 탁청의 일족에게 세습시켜 가며 100여 년 간 통치를 했다. 그런데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실시할 때 추밀원 부사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고려군에 협력해왔다. 그리하여 고려가 그 지역을 탈환하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했으며, 화주목을 설치했다. |
④전민변정사업:요약고려 후기 사급전(賜給田)과 농장의 발달에 따라 권세가들이 토지나 농민을 탈점함으로써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이들을 추쇄(推刷)·환본(還本)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등의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탈점된 토지를 본주인들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자들은 다시 양인으로 환원시켜 민생의 안정과 재정수취를 도모하는 전민변정사업을 했다. |
8) 고려말 신진사대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은?
① 불교 ② 풍수지리사상
③ 성리학 ④ 도교
성리학요약: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가지며,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질서를 갖는 것이다.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
도교요약: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 발생하여, 거기에 노장사상·유교·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518 |
9)무신집권기에 지눌이 송광사에서 창립한 불교결사는?
① 백련사 ② 수선사
③ 묘련사 ④ 임재종
①백련사요약: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만덕산(萬德山)에 있는 절. 이 절은 839년(문성왕 1)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것은 1211년(희종 7)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
②수선사요약: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개경의 보제사에서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출발했다. 그 뒤 지눌은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을 반포하면서 정혜결사를 결성했으며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근거지를 옮겼다. 1204년 최충헌 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왕실의 사액을 받으면서 그 명칭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최씨 정권은 자신의 정권에 적대적인 화엄종과 법상종 중심의 교종 세력을 배제하고, 수선사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재편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수선사를 주도하던 인물은 수선사 제2세인 혜심이었다. 최우가 수선사를 부각시킨 것은, 수선사가 간화선 위주의 선사상을 표방했음에도 기층민들이 믿고 있었던 정토신앙까지 수용함으로써 기존의 다른 종파에 비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일치의 완성과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사상적인 의미와 실천불교로서의 임무를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수선사의 불교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③묘련사:경기도 개성시 삼현리에 있었던 절. | 내용 고려충렬왕이 1284년(충렬왕 10) 그의 원찰(願刹)로 창건하였다. |
④임재종: 祖元禪師(조원선사 1226∼1286) 송나라때 임재종 스님, 자는 無學(무학), 호는 子元(자원), 명주 경원부 사람. |
10)고려 후기의 역사시술 가운데 단군 신화를 수록한 것은?
가.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다, 제왕일기 라. 사 략 |
①가. 나 ② 나. 다
③다. 라 ④ 라. 가
㉮. 삼국사기요약: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1174년(명종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
㉯,삼국유사요약: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 이후 이 책이 두루 유포되어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제왕일기요약:요약 1280년 이승휴가 저술하여 1287년에 왕에게 올린 책이다. 상·하 2권 1책이며,상권은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7언시로 읊었고,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1부 〈동국군왕개국연대〉는 전조선·위만조선·삼한·신라·고구려·백제·발해 등의 사적을 7언시로 엮었다. 2부 〈본조군왕세계연대〉는 고려 건국부터 충렬왕 까지의 역사를 5언시로 엮었다.>이 책을 쓸 당시 고려사회는 원에 복속한 시점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승휴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왕의 선정이 절대적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역대사의 교훈을 시로 기록했다. 단군을 민족의 공동시조로 삼은 점은 가장 큰 특징이다. 찬술된 해에 출간된 이후 1360년에 경주에서 중간, 1413년에 3간되었다. |
㉱.사략요약:고려 말 공민왕 시절 이제현이 지은 역사서. 고려말 공민왕 시절 1357년 이제현이 지은 역사서로, 고려 태조부터 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제현은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목왕 때는 개혁안을 제시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 몰락하고 새로운 권력계층이 신진사대부가 등장하게 되면서, 유교에 기반한 사관이 발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책이 이제현의 사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략은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바탕이 되어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합리주의적 사관이 반영된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합리주의적 유교사관에 기반한 ‘삼국사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
제6장 조선건국과 국가 운영
1)조선왕조 개창에 대해 잘못 설명된 것은?
① 원.명 교체기에 정세변화에 대응한 결과였다.
② 고려말의 잘못된 점을 사정하는 의미가 있었다
③ 건국 과정에 성리학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④ 건국 이후 농민은 왕권의 파악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조선의 왕조 - 조선의 개창 조선의 왕조에 대해 알아보자 1. 시대적 배경 ①고려시기는 거란·여진·몽고·홍건적·왜구에 의한 대외적 억압·충격이 그대로 국내 정치 상황 변화시키던 상황. ②몽고 간섭에 의한 고려의 국가 기반 붕괴 →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국가재정 붕괴-토지의 대부분을 권문세족·사찰이 차지. 농장이 증가하여 일반 농민이 극도한 궁핍 상태에 빠짐.③고려말기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노략질 → 민생의 어려움이 국가 존망의 위기에까지 이름. ④왕위 계승의 문제점 (무신정권기 - 몽고 간섭기 외압에 의한 왕위계승) → 공민왕 대 일시적으로 왕권·체제 회복. → 그러나 원·명 교체기라는 대외관계 속에서 공민왕 시해, 친명·친원을 둘러싼 신료들의 갈등, 최영·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 세력 등장 등 → 왕조교체 |
2.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①요동 정벌의 의미 (우왕 14년-1388 4월) ⅰ)결과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되는 결정적인 사건. ⅱ)직접적으로는 철령위 설치를 둘러싼 영토 분쟁 → 명과의 대외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밖에 없는 당시로서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치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 |
②고려말 대명관계 ⅰ)공민왕 5년(1356) 6월 반원정책 이후 사실상 대명 중심의 외교관계 지속. ⅱ)그러나 명으로부터의 다방면에 걸친 압력 ; 공민왕 17년 (1368) 명 건국 이후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시해, 우왕 책봉 문제, 명 사신 살해 사건, 순조로운 사신 왕래를 빌미로 막대한 공물 요구. →고려 지배 세력 내부에서 친원파, 친명파로 갈라져 갈등 발생 |
③철령위 설치 문제 및 최영 등의 집권 세력의 대응책 ⅰ)철령위 설치 문제 : 우왕 14년(1388)2월 사신 설장수가 "철령 이북은 원래 원 영토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도록 하라."는 명 황제의 명령 전달. ⅱ)최영 등의 집권 세력은 강·온 양면책 a.사신을 보내 철령 이북 지역 헌납이 역사적으로 부당한 일임을 요청 b.성을 쌓고 서북 변방으로 장수 파견 등의 몇몇 군사적 대비로 요동 정벌 준비 c.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자송을 처형하면서 일전불사 다짐. |
④우왕의 요동정벌 명령 ⅰ)이성계는 4불가론으로 반대. a.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 하는 것. b.여름철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c.온 나라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구가 틈을 노린다는 것. d.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가 질병에 걸린다는 것. ⅱ)그러나 최영의 확고한 요동 정벌 결의에 따라 8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주축으로 요동 정벌군 편성. ⅲ)요동 정벌과 더불어 고려 정부는 '홍무'연호를 없애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원나라 옷을 입게 함. → 홍무 연호를 없애면서 다른 연호를 내세우지 않고 실제로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요동정벌은 당시 고려로서는 필사적 저항. |
⑤위화도 회군 ⅰ)전면전 이전에 요동 정벌군의 좌우도통사는 '4불가론'을 바탕으로 회군 요청 → 그러나 최영이 이를 거부 ⅱ)결국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명분으로 전격적인 위화도 회군 단행, 성공. |
2)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인 삼사(三司) 아닌 것은
① 사간원 ②승정원
③ 사헌부 ④홍문관
①사간원요약:사헌부·홍문관과 함께 대간 또는 3사로 통칭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의정부제의 정비에 따라 문하부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사간원의 법제적인 기능은 간쟁·봉박으로서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후기까지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간쟁은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고, 봉박은 일반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그 대상은 그릇된 정치와 부당·부적합한 인사 등이었다. 국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중략) 사간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
②승정원요약: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
③사헌부:고려와 조선 시대, 정치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들의 잘못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탄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사헌대(司憲臺)를 고친 것으로, 1298(충렬왕 24)년과 1369(공민왕 18)년에 이 이름이 다시 사용되었다. |
④홍문관:옥당·옥서·영각이라고도 한다. 1478년(성종 9)에 독립기구가 되어 유학의 진흥 및 인재의 양성을 담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갑오개혁 때 관제개혁에 따라 궁내부 경연청, 궁내부 경연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96년에 궁내부 홍문관으로 이름을 바꿔 조선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홍문관의 기능은 궁중의 경서·서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것인데 성종 이후에는 감찰·언론 기능까지 포함되었다.홍문관 관원은 업무능력이 있고 가문이 좋은 인물을 제수했고, 의정부와 6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
3)조선의 지방 통치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전국의 8도로 나누고 관찰사제를 시행하였다
② 고려시대에 비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③ 수령은 지방에 관련된 전반적 업무를 맡았다
④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여 행정 실무를 처리 하였다
4)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변천을 순서대로 나타낸 것은?
①과전법-직전법-관습관급제
②과전법-관수관급제-직전법
③직전법-과전법-관수관급법
④직전법-관수관급법-과전법
과전법-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국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비롯한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주도하여 실시한 토지 제도를 이르던 말.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공전(公田)을 확대하고 사전(私田)의 분급은 일정한 제한을 두었으며, 조선 초기 양반 관료 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었다. |
?직전법:요약 토지의 수조권을 현직 관료에게만 나누어주는 제도이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을 토대로 했는데, 토지를 실제로 경작하는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지 못하고 관료들의 토지를 경작했다. 관료의 수와 세습토지의 면적이 늘어나면서 새로 관료가 되는 사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466년 직전법이 제정되었다. 직전의 조는 수조권을 받은 전주인 관료가 직접 거두었으나, 토지의 지급액이 줄고 수조권 행사가 재직기간으로 한정됨에 따라 수탈이 심해졌다.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가 실시되어 국가가 경작농민에게서 조를 거두어 수조권자에게 주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실상은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어 양반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직전법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 |
?관수관습제:직전세라고도 한다.1470년 직전제의 전조수취방식을 개혁하여 전조를 관에서 직접 수취하여 전주에게 지급하던 제도이다. 과전법·직전제에서는 토지를 분급받은 전주가 전객농민으로부터 전조를 직접 수취했다. 수조율을 법으로 정했지만, 실제 수취 과정에서 수조권자의 과도한 수취가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전주들의 수조권 행사에 제약을 가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그 하나로 시행한 관수관급제는 직전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대책으로 마련되었다. 직전의 전조를 전객이 직접 경창에 납부하고, 정부는 녹봉 지급 시 수조권자들에게 전조를 함께 지급하도록 했다. 전조의 수취뿐만 아니라 초가의 징수에서도 시행되었다. 이 제도가 전객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게 되자 공신전·별사전·사사전에도 확대 시행되었다. |
5)국가에 대한 백성의 의무가운데 공납(貢納)를 해당하는 나라는?
① 군역 ②요역
③ 대립 ④공물
①군역요약: 조선시대 양인에게 부과하는 국역의 일종.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정남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을 부과하는 방식에는 대상자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일정기간 군역에 복무하게 하는 방식과 토지지급 대신 정군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봉족 또는 보인을 지급하는 2가지 방식이 있다.조선에서는 후자의 방안을 활용했다. 원칙적으로는 노비·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군역을 지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각종 병종에따라 대우와 신분·재산에 따른 선발기준을 달리했다 |
②요역요약:국가의 필요에 따라 민(民)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하는 세의 한 항목이다. |
③대립요약:요약 조선시대 역(役)에 동원된 사람이 돈을 내고 사람을 사서 대신 입역(立役)시키는 일. |
④공물요약:요약 왕실 및 관청의 각종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징수하는 현물. |
6) 조선 초기 대외관계에서 조선이 사대(事大)를 취했던 나라는?
①명 ②여진
③일본 ④유구
유구:1335년(충숙왕 복위 4)에 태어난 유구(柳?)는 문과에 급제, 감찰어사로 벼슬길에 올랐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에게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먼저 이천에 이르러 음식을 장만하여 공민왕을 접대했다. 이후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우사의대부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
7)조선 초기 양인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① 양반 ② 중인
③ 농민 ④ 공노비
중인요약: 조선 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 |
공노비요약: 우리 나라 전통적 신분 사회에서 왕실과 국가 기관에 소속,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흔히 ‘공천(公賤)’이라고도 하였다.(생략) 공노비의 공급은 전쟁 포로·특정 범죄자가 대부분이었다. 정복 전쟁과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는 전쟁 포로가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전쟁 포로보다는 특정 범죄자가 주종을 이루었다.특히, 조선시대에는 반역 또는 난동, 강·절도(强竊盜)와 장도(贓盜) 및 강상(綱常)을 어긴 자나 간음·용간(用奸)·위조·유기·도망 등의 범죄자와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아 속공(屬公)했고, 그 소유 노비까지 관몰하였다. 따라서, 공노비가 되는 것은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의 한 방법이었다. |
8)세종때 편찬되어 농업발달에 이바지한 조선농사는?
① 농상집요 ② 농사직설
③ 동국정운 ④ 의방유취
①농상집요;1273년 원에서 편찬한 농서로 고려 시대 이암(1297~1364)은 원에서 수입하였다. 이책은 권1에 책의 서문과 경간(耕墾), 권2에 파종(播種), 권3에 재상(栽桑), 권4에 양잠(養蠶), 권5에 과채(瓜菜), 권6에 죽목(竹木), 약초(藥草), 권7에 자축, 끝에는 세용잡사(歲用雜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BR>이 책의 특징은 첫째, 원의 생산 수준과 경제 특징을 반영하였다. 뽕잎과 면화, 그리고 저마의 생산과 장려는 유럽과 아시아 간에 내륙 교통이 열린 뒤 비단실의 수요 증가에 따른 것이다. 둘째, 농서에 깔려 있는 농본 사상은 원의 통치가 유목 중시에서 농업 중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재배 작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저마는 동남아시아의 작물이고, 목면은 서역의 작물이지만, 중국 허난 성과 산시 성에서도 본토와 차이 없이 이익을 얻고 있었다. |
② 농사직설:요약:12엽 1책으로 되어 있다. 1429년에 엮은이들이 세종의 명을 받아 각도 관찰사들에게 경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업 기술을 듣게 하고, 이를 모아서 저술·간행한 것이다. 1656년에는 〈농가집성〉에 포함되어 간행되기도 했다. 편찬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농업관행을 조사하고 중국 농서를 참작하여 정리했다. |
③ 동국정운요약:1448년(세종 30) 세종의 명으로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 1448년(세종 30)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
?의방유취요약: 세종의 명으로 1437~39년에 북경에 사신과 역관이 파견되어 <내경>에서부터 당·송·원과 명초까지의 의서들을 폭넓게 수집하여 1442~45년에 집현전의 김예몽, 유성원, 민보화, 김문, 신석조, 이예, 김수온 등과 의사인 전순의, 김유지 등에 의해 365권으로 편찬·완성되었다. 그 후 세조의 명으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1465~77) 양성지의 주관 아래 유신과 의관이 함께 교정해 도합 266권으로 간행되었다.그러나 현존하는 <의방유취>는 국내본이 아닌 일본판인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가 다른 문화재와 함께 약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다른 보관본은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에 일본인 의사 기타무라가 <의방유취> 복간본 266권 2질을 선물용으로 보내오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었다 |
9)조선전기 문화의 성격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보편적 문명을 조선의 특성을 결합시켰다
②다양하고 주체적인 조선문화를 만들었다.
③원.명의 문화를 모방하는데 그쳤다
④중국의 선진과학 문명을 수용하였다
10) 한글로 표기된 조선초기 저작끼리 묶은 것은?
가.용비어천가 나,원인천강지곡 다,경국대전 라,국조오례의 |
① 가,나 ② 나. 다
③ 나,라 ④ 라,가
?용비어천가요약: 세종이 정인지·권제·안지를 시켜 짓게 했으며 1445년에 완성되었다. <용비어천가>는 해동 육룡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으로서, 〈주역〉의 건괘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바탕으로 뜻을 마음껏 펼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하는 것은 목판본이다. 총 125장이며 서사·본사·결사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1~16장)에서는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제시했고, 본사(17~109장)에서는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구체적 이야기로 실증했으며, 결사(110~125장)에서는 왕업의 영원한 지속을 기리기 위해 후대왕에게 규계 사항을 열거했다. 내용은 우리말 노래, 같은 내용의 한시, 자세한 주해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작품이고 전체 짜임이 서사적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어 문학사적 가치가 크다. |
?원인천강지곡:『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그의 아내인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하여 직접 지은 찬불가이다. 훈민정음 창제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점에서 한글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비록 3분의 1 정도만 남은 零本이나 이 책이 갖는 국어학적, 내지 출판 인쇄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는 점에서 국보로 승격할 가치가 있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로, 조선 전기의 언어와 어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
?경국대전요약:조선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해 만든 조선시대 두 번째 통일 법전 (중략)그리하여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서 그 시대를 규율하게 되었다. 오늘날 온전히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그 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을사대전』은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
?국조오례의요약:조선 전기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이 왕명을 받아 오례의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편찬한 책 |
제7장 조선 전기의 변화와 외세의 침략
1)조선 전기 사화(士禍)의 성격을 가장 잘설명한 것은
① 사람들 상화간에 일어난 분쟁을 가리킨다
② 사림들이 훈구세력을 박해한 사건이다
③ 훈구 세력이 사림를 정치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④ 훈구 세력이 내부에서 일어난 다툼이다
사화요약: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 |
①무오사화:요약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이에 연산군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다.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 등 훈구파는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②갑자사화: 요약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연산군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성종은 성종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1479년 폐비하고 사사했다. 임사홍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이와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을 보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고 성종 묘에 배사했다. 이어 연산군은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하려 획책하였고 폐위 사건 당시 이에 찬성한 자들을 찾아 제거했다. 폭력적인 사화 이후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와 폭정의 피해가 심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반격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
③기묘사화;요약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속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러자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
④을사사화; 요약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 사림파들이 화를 입은 사건들을 말하며 을사사화는 4대사화 중 하나다. 을사사화에는 외척 간의 갈등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외척인 윤원로·윤원형 형제가 조카 경원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려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 충돌했다.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윤씨 형제는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을 축출했다.홍문관과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사림파 관원을 파직시키고 윤임 등과 종친인 계림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
2)중종 때 도학정치를 주장했던 조광조가 화를 입은 입은 사화는?
①무오사화 ②갑자사화
③기묘사화 ④을사사화
(바로1번 문제 4대사화 요약을 참조)
3) 조선 전기 사림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훈구에 비해 새로운 가치와 사회를 지향하였다
② 국왕과 공신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는데 힘을 ?다
③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공론정치를 형성하였다
④ 현실문제 해결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4) 16세기 향촌사회의 변화로 잘못된 설명은?
① 국가는 재지 사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② 사족들은 장자를 우대하는 상속재도를 만들었다
③ 부계 중심의 족보와 동족마을이 나타났다
④ 결혼 뒤 거주 형태는 부계 위주로 변해갔다.
재지사족요약: 재지사족은 넓은 의미에서 품관층을 포함하여 향촌사회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배계급을 가리킨다. 사회적으로는 지방에서 혈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중앙 벼슬에 진출하거나 향리가 되기도 하고, 토지 소유를 통해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 |
5) 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 만들어 활동한 조직이 아닌 것은?
① 향회 ②향약 ③관아 ④유향소
향회요약: 조선시대 고을 단위로 운영된 회의체로, ‘향중대회(鄕中大會)’라고도 한다. 향약 · 향교 등에서 고을을 단위로 운영하는 회의를 모두 ‘향회’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나, 한국사 연구에서는 향약 · 향안(鄕案)에 기초한 회의기구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향약요약:조선 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또는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 중국 송나라 때의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추진되어 영, 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다. |
유향소요약: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웠던 향촌의 단위조직으로 유향품관이 모이는 장소를 뜻하기도 했지만 인적 조직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래 관청으로 설립되지 않았으나, 지방 군현의 업무를 일부 맡으면서 지방관청의 기구가 되어 이아로도 불렸다. |
6)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명대 후기 요동지역에서 힘의 공백이 크게 나타났다.
② 명의 사민정책에 의해 왜구의 활동이 봉쇄 되었다.
③ 명중심의 책봉 -조공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④ 조선 내부는 훈구의 사림의 갈등으로 취약해 있었다.
7)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삼국에 미친 영향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명의 국력 소모로 만주의 여진족 세력이 확대되었다.
② 조선은 전지역이 전쟁터로 변하여 피해를 입었다.
③ 일본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문화적으로 성장하였다
④ 임진왜란 뒤에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지속되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 전쟁을 위한 사회 · 군사정책 시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가 조선과 명나라 정복을 꿈꾼 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의 망상 때문만은 아니다.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든든한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한 실전에 강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전래된 조총각주1) 과 같은 신식무기가 이미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제조되고 있었기에 그가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다.
여기에 사절단이나 왜구, 밀정을 통해 조선, 명나라 등지의 국정과 사회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그로서는 침공에 앞서 일본의 사회제도를 개선 혹은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침공의 명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분을 찾는 데 고심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조선 국왕이 자신을 알현하러 와 조공을 바칠 것과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니 조선이 앞장서서 이에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일본의 속국이 되라는 요구였다. 가당치 않은 요구를 제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측의 답변 여부와 관계없이 사회 구조 및 제도에 변혁을 가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을 통일한 지 1년 만에 조선 침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무력의 우위를 확신해서가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시도한 경제 · 사회 및 군사관련 정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일본사회의 신분체제가 정비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에 나섰다. |
8) 병자호란당시 인조가 항전을 모색하며 45일간 항전했던곳은
① 한양 ②남한산성 ③강화도 ④ 삼전도
삼전도요약: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한곳 삼전도는 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예요.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어요.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었어요. 그러다 45일만에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되었지요. 인조는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의 황제 앞에 '삼궤구고두'를 올리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지요. 삼궤구고두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에요.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하였어요.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이경석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어요.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해요. |
( )을 같이 하는 자는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예속으로 서로 어울이고 환난은 서로 구제한다 |
9)다음의 빈칸에 들어갈 가장적절한 말은?
①향사례 ②향음주례 ③향약 ④향회
①향사례:예전에, 시골 한량들이 모여 편을 갈라 활 쏘는 솜씨를 겨루던 일 |
②향음주례:예전에, 고을 안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서 잔치를 벌여 예의와 절차를 지키며 술을 마시는 행사를 이르던 말 |
④향회;마을의 일을 함께 의논하기 위한 그 마을 사람들의 모임.부녀회는 향회의 소집을 촉구했다.조선 후기에는 농민층의 저항이 향회를 통해 집단적 행동으로 나타나곤 했다 |
10) 16세기 새롭게 재인식된 성리학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부계 남성 위주의 가족질서를 해체시켰다.
② 붕당중심의 사림정치를 전개되었다.
③ 서원과 향약에 기반한 향촌질서가 형성되었다
④ 기존의 체제 교학적 성리학을 번성시켰다.
성리학요약: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고려 말기 원나라를 통해서였다.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가지며,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질서를 갖는 것이다.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
7장1차 교정
제8장 조선 후기와정치 변동과 경제 발전
1)17세기 이후 붕당정치의 전개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인조즉위 이후 서인과 남인은 공존 체제를 구축하였다.
② 효종즉위 이후 (山林)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③ 각붕당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예학에서 성과를 냈다
④ 현종대 두 차례의 예송에서 모두 서인이 승리하였다
2) 국왕의 후원을 받아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은?
① 환국 ② 예송 ③담쟁 ④탕평
①환국:요약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해가며 정국을 주도했던 정치 행태. |
②예송:요약 기해예송(1차예송)과 갑인예송(2차예송)으로 2차례 전개되었다. 기해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만 2년인 3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왕가는 성종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처럼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규정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발생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그것이 갑인예송이다. 2차례의 예송은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면서 왕위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이었다. 예송은 주자학의 핵심내용인 종법을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적용하면서 예의 불변성을 강조한 송시열 등 주자정통주의와 국왕만은 예외라며 예의 가변성을 인정하려는 주자비판론자와의 사상적 대립이었다. |
③담쟁:권력을 잡기 위해 당파 혹은 정당들끼리 벌이는 싸움 |
④탕평:싸움이나 시비,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 조선 말기, 영조와 정조가 당쟁(黨爭)의 폐해(弊害)를 없애기 위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파 간의 정치 세력에 균형을 꾀하던 정책. |
3)1728년 소론과 남인 일부가 영조의 왕위 계승과 노른 정권에 반대하여 일으킨 것은
① 경신환국 ②기사환국 ③이인좌난 ④홍경래난
① 경신환국: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637 |
② 기사환국:요약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1688년 소의 장씨가 아들 균을 낳자, 숙종은 균을 원자로 삼아 명호를 정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봉했다.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이 이에 반대하자 숙종은 그의 관직을 삭탈하여 제주도로 유배하고,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많은 노론계 인사를 파직·유배했다. 이후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정읍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사약을 받았고, 김만중·김익훈·김석주 등은 보사공신의 호를 삭탈당하거나 유배당했다. 숙종이 중전 민씨가 원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중전을 폐비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던 이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 중전을 폐했다. 그뒤 6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10월에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립했다. 이렇게 서인이 집권 10년 만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국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
③ 이인좌난: 소론 강경파의 정권 탈환 모의-영조가 즉위한 지 4년, 소론계 강경파가 남인을 끌어들여 일으킨 무신란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붕당 간 정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숙종 말기부터 진행된 세자 대리청정과 세제 책봉 논란, 경종 독살설 및 영조의 왕위 계승 부당성 시비, 이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이 누적돼 반란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다. |
④ 홍경래난: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
4)정조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은
①규장각 설치 ②장용병설치 ③금난전권강화 ④화성축조
③금난전권강화:조선 후기 육의전(六矣廛)이나 시전상인(市廛商人)이 난전(亂廛)을 금지시킬 수 있었던 권리.일종의 도고권(都賈權)이다.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 서울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 도성 아래 10리까지)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 특권을 지킬 수 있도록 조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상업상의 특권을 말한다.그리하여 조정에서는 1791년(정조 15) 2월 신해통공(辛亥通共 : 정조 15년에 각 시전을 존속시키면서 도매 상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난전권을 금지시킨 조처. 즉,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게 도고권을 허용하지 않은 조처)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혁파하였다. 이로써 전폐(廛弊)가 바로잡아졌으며, 봉건적 특권상업 체제는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
5) 17세기를 거치며 벼농사의 주된 경종법이 된 것으로 모를 키웠다가 옮겨심는방식은?
①이양법 ②간종법 ③근경법 ④시비법
②간종법: 요약 밭에서 한 작물이 자라고 있는 동안 그 작물의 두둑 사이에 다른 작물을 함께 재배함으로써 1년 2작을 결합시키는 집약적 윤작기술. |
③근경법:근경법이란 밭에 작물을 재배하여 수확하고 난 이후에 곧바로 후속작물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방법으로 1년에 2번 또는 2년에 3번 작물을 재배하는 형태이다. 9월에 가을보리를 심어 5월에 수확하고 난 후, 그 밭에다 조나 콩 등을 심어서 9월경에 수확하는 방식이었다. |
④시비법: 요약토양이나 작물에 비료성분을 공급하여 농작물의 생육을 촉진시키는 농작법.농사를 지으면서 토양에 비료를 주는 시비는 옛날부터 시행되어 오던 농법이었다 |
6)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의 변화를 잘못 설명한 것은?
①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등장하였다.
② 고용 노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했다.
③ 정액 소작료 방식이 등장하였다.
④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7) 조선후기 지방의 정기 시장으로 크게 발달한 것은?
①시전 ②개시 ③후시 ④장시
시전;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 ‘전(廛)’이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성읍·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부터였다. |
개시: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 일본 등과의 교역을 위하여 변방 지역에 설치했던 대외무역 시장을 일컫는다. 본래 고려시대부터 각장(?場)을 중심으로 북쪽 변경 지역에서 외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시기별로 부침을 겪었다. 요나 금의 요구에 대해서는 고려가 각장 무역을 회피하려고 하였고, 원과의 교역에서는 육로를 통한 민간인들의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노걸대(老乞大)』와 같은 중국어 학습서 출판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 후 변경(邊境)이나 월경(越境)을 통한 사적인 대중국 무역은 조선과 명 양측으로부터 금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음성적으로는 지속되었다. 왜란 이전 16세기 중후반까지 평안도나 서울 상인들이 인삼이나 은, 유기를 가지고 요동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하였다.그러다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 · 군수물자의 조달이 급했던 조선의 요청을 명이 수용하여 ‘중강개시(中江開市)’라는 공식적 조선-명 교역장이 형성되었다. 중강개시는 양국 정부가 왜란 이전의 음성적 교역행위를 공식 승인, 양성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흥미롭게도 임진왜란 이후 개시에 대한 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게 된다. 조선은 잠상(潛商)의 작폐를 근절하기 위해 명에 중강개시의 폐지를 요청했지만, 명은 개시를 통한 이익을 고려해 그 존치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상인의 출입을 금하자, 명 요동도사가 사람을 보내 조선 측의 금지조치로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못했으니 의주부가 대신 배상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중강개시는 조선에의 원병 파견으로 피폐해진 요동의 경제상태를 호전시킬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며, 그 결과 중강개시는 이후 광해군대까지도 외교문제로 남게 된다. |
후시:조선 후기, 국경에서 상인들에 의해 사적으로 행해지던 무역시장. 조선 후기 대청무역인 연행무역은 처음에는 역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17세기에 들어 사상이 성장하면서 변화되어갔다. 사신행렬이 국경을 출입할 때 의주나 개성상인 등이 역관이나 지방의 관리와 결탁하거나 몰래 행렬에 끼어들어 청국 상인과 교역을 하게 되면서 17세기 중엽부터 만주 봉황성 책문에서 후시가 열렸으며, 압록강의 중강에서도 후시가 열렸다. 청에 왕래하는 사신의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후시무역도 1년에 4~5차례이며, 한 차례에 거래되는 은의 양만 10만 냥에 달할 정도였다. 후시무역은 17세기 말엽 크게 확대되었으며 조선정부도 세금을 징수하는 대신 국경의 후시무역을 사실상 묵인했다. |
장시:전통 시대의 시장이며, 조선 시대 때 크게 활성화된 것으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연 시장을 말한다. 조선 초기 농업 기술 향상으로, 일부 농민들이 먹고 남은 농산물을 팔기 위해 한양 부근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다. 처음에는 한양 부근에만 있었으나,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 순조 때에는 전국에 약 1,600여 개가 성행했다. 이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렸는데, 일정한 상인 집단이 5개 고을을 정해 차례대로 하루씩 이동하며 시장을 열었다. 이러한 장시를 5일장이라 부르는데, 보통 그 간격은 30리-40리 정도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상업과 농업이 더욱 발달하자, 마침내 매일 열리는 상설시가 발생하기도 했다. |
8)조선 후기 부세체제의 변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영정법 시행 ② 비총제폐지
③대동법 시행 ④균역법 시행
①영정법시행 ;작황에 따라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으로 징수하던 것을 인조 때 1결당 4두(최저)로 고정, 부족분 보충을 위해 수수료와 잡세를 부담시켜 크게 경감되지는 않았다. |
②비총제폐지:비총제의 효과는 신통치 않았고, 결국 1801년(순조 1) 내시노비 혁파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노비신공은 꾸준히 하락하여 그 부담이 일반 양역(良役)의 수준에 점진적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쇄관(推刷官) 파견을 통한 노비 확보가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자, 18세기 후반 조선 정부는 내시노비(內寺奴婢)를 대상으로 도 단위의 비총제(比摠制)를 채택해 추쇄관 하송을 금지하고 그 업무를 수령에게 위임하여 안정적인 노비공 액수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노비 비총의 효과는 신통치 않았고, 결국 내시노비 혁파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
③대동법시행:공납의 폐단(방납)을 막기위해 공납 대신 쌀을 내게 함. 가호단위 징수에서 농지크기를 기준으로 부과. 광해군부터 100년에 걸처 확대 실시, 선혜청이 공인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조달. 비정기적인 별공과 진상은 남아있었다 |
④균역법 시행: (영조)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줄임 부족분은 선무군관이라는 명예 관직을 부여하여 군포를 납부하게 하고, 부족분은 어세, 염세, 선박세와 1결당 2말의 결작미 징수로 충당 |
*호포법: 흥선대원군 집권기(고종)에 양반까지 군포를 내게 함. 상민과 양반의 구분없이 호당 2포씩 부과. |
9) 조선 후기 청의 연경에 판견된 사신은?
① 연행사 ② 송환사 ③쇄환사 ④ 통신사
② 송환사: 송환사라는 명칭은 포로송환사외에는 없슴 |
③쇄환사: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들의 주요 임무는 전쟁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것이었다.1607년과 1617년,1624년,1636년,1643년에 파견된 조선사절은 조선통신사라고 불리는데 특히 첫 세 차례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 송환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통신사의 직함 자체도 끌려간 사람들을 되돌려 오는사신이란 뜻의 ‘쇄환사(刷還使)’였다. |
④통신사: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 足利·德川幕府 등)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 |
10)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유형원은 균전제 시행을 주장하였다.
② 북학파는 상공업진흥과 기술혁신을 주장하였다.
③ 실학의 사회 개혁론이 제시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가 연구가 되었다.
④ 실학의 사회개혁론 대부분은 실제정책에 직접반영 되었다.
제9장 사회 변동과 심화의 농민전쟁
1)19세기 세도 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유력한 세도 가문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② 경화사족 가운데 몇몇 가문이 세도가문으로 득세하였다
③ 세도 정권이 아래 관직에서 매매가 성행하였다
④ 세도 가문은 의정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경화사족:경화사족(京華士族)은 한양과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이라는 일반적 의미 이외에, 특히 18세기 이후 서울[京華]과 지방[鄕村]의 정치·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화되는 경향분기(京鄕分岐)의 흐름에서 서울을 높이고 지방을 낮추던 풍조 속에 번화한 서울의 사족을 특별히 지칭하기 위하여 고안된 역사 용어이다 |
2)세도정치 시기의 세도가가 정치적 의도 관철을 위해 장악한 기구는?
①비변사 ②사헌부 ③사간원 ④홍문관
①비변사: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
②사헌부:조선 시대 3사 중 하나로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구.|사헌부는 조선 시대 중앙 통치 기구인 3사의 하나로,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었다. |
③사간원:사헌부·홍문관과 함께 대간 또는 3사로 통칭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의정부제의 정비에 따라 문하부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사간원의 법제적인 기능은 간쟁·봉박으로서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후기까지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간쟁은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고, 봉박은 일반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그 대상은 그릇된 정치와 부당·부적합한 인사 등이었다. 국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시정은 그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시비를 논하여 바른 정치로 이끌어가는 언론이었다. 인사는 부정·부당·부적합한 인사를 막아 합리적·능동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언론이었다. 이러한 사간원의 기능은 대개 사간원 단독으로 전개했지만, 사안이 중요하거나 사헌부·홍문관의 협조가 필요할 경우에는 대간합사나 3사합사로도 전개했다. 사간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
④홍문관: 옥당·옥서·영각이라고도 한다. 1478년(성종 9)에 독립기구가 되어 유학의 진흥 및 인재의 양성을 담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갑오개혁 때 관제개혁에 따라 궁내부 경연청, 궁내부 경연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96년에 궁내부 홍문관으로 이름을 바꿔 조선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홍문관의 기능은 궁중의 경서·서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것인데 성종 이후에는 감찰·언론 기능까지 포함되었다. 홍문관 관원은 업무능력이 있고 가문이 좋은 인물을 제수했고, 의정부와 6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
3)조선후기 신분제 변동의 모습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몰락한 양반은 사회,경제적으로 일반 농민과 비슷한 처지가 놓였다
② 중인들은 통청운동과 같은 신분상승 운동을 벌였다.
③ 노비제는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갔다.
④ 향반은 중앙정치에 활발히 관여 하였다.
통청운동: 조선 후기 관직 진출 과정에서 신분적 차별을 받았던 서얼 · 중인 등이 벌인 신분차별 폐지 운동으로서, 운동 과정에서 청직(淸職)으로 진출 허용을 주장했기 때문에 ‘통청운동’이라고 한다. |
4) 조선후기 17세기 후반이후 중앙정부와 향촌사회의 관계를 잘못설명한 것은?
①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② 수령은 부세운영에서 사족의 간섭을 크게 받게 되었다
③ 지역사회 세부까지 수령의 통지가 도달하게 되었다.
④ 여러지역에서 향권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였다
전정에서는 각종 부가세가 가장피해를 주었다 군역과 관련하여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거두는 황구첨정, 죽은사람에게 군포를 거두는 백골징포라는 말이있다. 모두 지독한 군포를 가르킨다.봄철에 환곡이라는 곡식을 보거나 받은적이 없는데 가을에 10분의1에 해당하는 곡식을 받아가는일도 있었다. |
5)조선 후기 이양법 보급과 더불어 농민들이 결성한 공동노동조직은?
① ② 향회 ③두레 ④장시
①서원: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이다 |
②향회:조선시대 고을 단위로 운영된 회의체로, ‘향중대회(鄕中大會)’라고도 한다. 향약 · 향교 등에서 고을을 단위로 운영하는 회의를 모두 ‘향회’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나, 한국사 연구에서는 향약 · 향안(鄕案)에 기초한 회의기구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④장시: 조선 시대, 지방에서 보통 닷새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 보부상이라는 행상이 있어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따위를 유통시켰다. |
6)19세기 세도 정치가 농민의 저항 방식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정권의 폭정중단을 요구하는 소청운동을 버렸다
② 탐관오리나 정부의 죄상을 폭로하는 쾌서을 붙였다
③ 위항 문학운동을 벌여 불만을 나타냈다.
④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항세 투쟁을 벌었다
③위항문학운동:주로 한시를 가리키는 개념이나, 넓게는 시조, 가사 및 전을 포함한 산문에 이르기까지 중인계층에 의해 창작된 모든 문학작품을 일컫는다.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중인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관과 경아전 등의 전문지식인과 기술직 중인이 주도한 것이지만 서얼과 승려, 하층민까지 참여했으므로 중인 이하 하층민을 위항인 또는 여항인이라 일컫던 예에 따라 위항문학 또는 여항문학이라고 한다. 위항문학은 17세기말에 성립되어 18, 19세기에 크게 융성했다가 개화기까지 지속된 것으로서 중인층 사회문화활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의해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중인층은 신분제약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의 학식과 재능을 문학에 쏟았다. 1712년에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에 48명의 시 230여 수가 실림으로써 초기 위항문학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7) 1811년 일어난 홍경래난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서북인에 대한 뿌리 깊은 지역차별에서 비롯되었다.
② 농민 봉기군은 전체 조선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였다.
③ 광산노동자들도 변란에 많이 참여 하였다
④ 평안도 지역상인, 향리,무사, 농민층이 연합하여 일으켰다
8) 조선후기 세금 제도인 삼정에 해당하지 않은 것은?
①전정 ②군정 ③환정 ④양곡
?전정:조선 후기 토지에 부과되던 모든 조세를 일괄하여 수취하는 일종의 전결세(田結稅) 수취행정제도. |
②군정:양인 농민을 주 대상으로 하여 군포(軍布)를 징수하는수취행정인 군정(軍政), |
③환정:환곡(還穀)을 분배하고 징수하는 수취행정인 환정(還政)과불어 삼정(三政)으로 불리었다. |
9) 조선 후기 안정복이 지은 사서로써 단군과 기자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정리 한책은
① 동사강목 ②성호사설 ③해동역사 ④ 언문지
①동사강목:조선 후기 안정복이 쓴 역사책. 단군조선-고려말까지를 다룬 통사이다. 20권 20책이며, 필사본. 편년체로 씌여졌으나,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형식을 따른, 전통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
②성호사설: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이 쓴 책.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문답집을 엮은 저술이다. 저자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독서하다가 느낀 점이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던 것을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해 편찬한 책이다. 30권 30책. |
③해동역사: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이 찬술한 기전체(紀傳體)의 한국통사.《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기전체로 기술했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한치윤이 원편 70편을,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속편 15권을 편술한 것으로, 한반도 서적 이외에 중국·일본 등 외국의 서목 550여 종에서 자료를 뽑은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 안정복의 <동사강목>과는 달리 단군조선을 인정하여 단군에서부터 편년체로 기술한 점, 역사를 분야별로 나누어 세기(世紀)·성력(星歷)·예(禮)·악(樂)·병(兵)·형(刑)·식화(食貨)·물산(物産)·풍속(風俗)·궁실(宮室)·관씨(官氏)·석 (釋)·교빙(交聘)·예문(藝文)·인물·지리 등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점, 흔히 안 다루던 숙신씨(肅愼氏)를 별개로 다룬 점 등이 모두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종래의 관찬사서(官撰史書)들이 취한 관료적인 편찬방법을 탈피하고, 역사와 지리의 합일을 꾀하였던 것이다. |
④언문지: 1824년(순조 24) 유희가 저술했다. 그의 문집 〈문통 文通〉 제19권에 수록되어 있다. 전체 구성은 서문과, 훈민정음 자모를 분류한 초성례·중성례·종성례의 4장으로 되어 있다 |
10) 조선후기 문화의 양상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한글소설과 사설시조가 발달하였다
② 판소리와 탈춤이 인기를 끌었다
③ 진공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④ 동학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제10장 외세의 침입과 근대 변혁운동
1) 흥선대원군 개혁정책으로 맞은 것은?
①서양과 통상수교 확대
②호포제 실시
③서원 장려와 증설
④의정부 기능약화
2)1876년 조선이 일본에게 문호 개방하게 된 계기는?
① 병인양요 ② 신미양요 ③ 오페르트도굴사건 ④ 강화도 조약
① 병인양요: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
② 신미양요:요약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6년 7월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일을 빌미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였고, 1871년 주청 특명전권공사 로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그들은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4월 23일 미국 함대가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했고, 이 격전에서 조선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미국은 조선이 교섭에 응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군사행동을 감행하려던 미국 측은 무모함을 깨닫고 5월 16일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결과 조선의 쇄국정책 및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
③ 오페르트도굴사건: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 독일의 상인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
④ 강화도조약: 조선 시대, 1876(고종 13)년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 조약.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따라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은 부산 외에 인천, 원산의 두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
■운요호 사건:조선 시대, 1875(고종 12)년에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일어난 충돌 사건.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던 일본은 배상과 함께 수교(修交)를 요구하였으며, 이듬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
3) 개항뒤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기구는?
① 통리기무아문 ② 의정부 ③ 비변사 ④삼군부
①통리기무아문: 1880년(고종 17) 12월 21일 변화하는 국내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외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정1품아문(正一品衙門) 관청. 역사적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한 뒤, 주로 대외관계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필요성에서 신설된 것이나 대외관계만을 전담하는 기구는 아니었다.이 아문이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나 설치 이유 또는 설치 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배경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1877년 11월에 일본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청나라의 총리아문 부속기관인 동문관(同文館)에서 전 해에 번역, 간행한 『성초지장(星?指掌)』의 내용을 빌려서 외교사무를 전담하는 대신의 필요성과 그 임무, 외국공사와의 관계, 사신의 상주문제, 외국기술의 수입 및 유학생의 파견 등을 조선정부에 종용하였다는 사실이다.또 하나는 신식무기의 수입과 그 제조법의 학습을 위한 교섭이 청나라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의 신설, 즉 이 아문의 신설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
②의정부:1400년 이방원의 주도하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의정부는 조선 전시기를 통해 법제적 기능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왕권의 강약과 왕의 자질, 의정부대신의 자질, 의정부와 6조·비변사·승정원·삼사 등과의 국정운영을 둘러싼 상호관계, 원상제, 당파·세도대신·외척의 정치주도 등과 관련하여 수시로 변천되었다. 1592년 이후 비변사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의정부는 형식적인 기능만 담당하게 되었다. 1864년 이후 비변사가 폐지되고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가 의정부로 귀속됨에 따라 의정부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895년 근대식 관제개혁에 수반되어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896년 내각을 의정부로 개칭하면서 다시 부활되었다. 이후 1907년 내각제로 개편하면서 소멸 |
③비변사: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
④삼군부:대원군 집정기인 1868년(고종 5) 3월에 복설되어 군사업무와 이에 필요한 재원을 총괄했던 최고 군령기구이다. 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본격화한 군비 강화와 그에 소요되는 재원을 모두 직접 장악하고 주도하기 위해 복설하였으며,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폐지되었다. |
4) 조선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은?
①갑신정변 ②청일전쟁 ③임오군란 ④갑오개혁
① 갑신정변:급진 개화파의 삼일 천하 갑신정변- 임오군란 2년 뒤인 1884년,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근대 자주 국가 수립을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일단 정변에는 성공했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군의 철수로 개혁 구상은 ‘삼일 천하’로 끝났다. |
② 청일전쟁: 1894년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톈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했다. 갑오농민전쟁이 진정된 후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으며, 7월 25일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청군은 후퇴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했으며, 이에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나 우금치에서 일본에게 패했다. 황해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진저우성과 뤼순을 점령했다. 청은 전쟁에 참패했고,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조선과 중국은 일본 및 열강의 수탈대상 및 분할 경쟁의 대상국이 되었다. |
③ 임오군란:1882년6월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부당한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고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빈민과 5군영의 폐지와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은 하급군병이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서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이에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으나 청군에 의해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이 진압되고 말았다. |
④ 갑오개혁: 조선 말기, 1894(고종 31)년 7월부터 1896(고종 33)년 2월 사이에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 개혁 운동을 이르던 말. 개화당(開化黨)이 정권을 잡은 이후, 총 세 차례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문물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쳤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고친 이름이다 |
5) 갑신정변과 주도했던 세력과 거리가 먼 것은?
① 서양 근대제도의 사상 도입을 주장하였다
②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개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③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④ 청에 대한 사대외교 단절을 주장하였다.
청의 양무운동:청은 난징 조약 이후 영국뿐 아니라 다른 서양 열강과도 조약을 맺으며 문을 열어 갔다. 그러나 청과의 무역이 기대한 만큼 늘어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서양 열강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제2차 아편 전쟁). 이번에도 청이 패하면서 개항장의 확대, 기독교포교의 인정 등의 내용을 담은 조약을 체결하였다(베이징 조약, 1860). |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일본도 문호 개방 이후 물가가 급등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이에 개국 정책에 반발하는 반막부 세력이 등장하였다. 하급 무사들이 중심이 된 이들은 처음에는 존왕양이<각주1) 를 주장하며 개국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군사적 탄압을 받고, 서양과의 충돌에서 패하고 난 뒤 개국 지지와 막부 타도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들은 결국 막부를 붕괴시키고 새 정권을 수립하는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서양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삼아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징병제를 시행하여 군사력을 정비하였다. 또한, 근대적 토지세 제도를 확립하여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문명 개화 정책도 시행하였다. 일본에서는 1870년대부터 서양식 입헌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이 전개되었다. 자유 민권 운동 세력은 메이지 정부의 강압적 정책을 비판하면서 서양식 의회와 헌법을 갖추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정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였지만, 서양의 선진적 정치 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여 입헌제 채택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은 민심을 철저히 배제한 채 정부 주도로 제정되었고, 천황에게 막강한 헌법상의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한계를 가졌다 |
6) 개항뒤 조선사회의 변동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에 들어와 무역 활동을 하였다.
② 조산의 쌀 ,콩 등 곡물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③ 쌀 생산이 활발해져 국내 곡물가격이 낮아 졌다
④ 서양 면직물 수입으로 국내 면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7) 개항뒤 조산 정부가 농업개량을 위해 설치한 모범 농장은?
① 잠상공사 ② 우정총국 ③ 박문국 ④농무목축시험장
①잠상공사:1884년 9월 고종이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농상(農桑)·직조(織造)·목축·지다(紙茶) 등의 분야에 관영회사를 설립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설립되었다.잠상공사에는 묄렌도르프(Mollendorf,P.G.)의 알선으로 상해에 거주하던 독일인 메르텐스(Maertens,A.H., 한국명 麥登司·麥登士)가 초빙되었는데, 여기에는 서양의 양잠기술을 들여와 국내에 보급, 양잠생산력을 높이려는 정부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메르텐스는 잠상공사 경리직(經理職)을 맡아 회사를 경영했는데, 이 때 그에게 지불된 봉급은 신금(薪金) 300원(元)이었다. 잠상공사는 상해에서 100만 그루의 뽕나무를 수입하여 인천·부평·서울에 심었다.인천의 뽕나무밭은 그 곳 농민의 시기전(時起田)과 시장(柴場)을 사들인 것이며, 특히 서울의 뽕나무밭은 왕이 구궁(舊宮)의 정원을 할애하여 마련하였다. 왕실의 이와 같은 관심 속에서 정부는 뽕나무 재배비용 3만원, 메르텐스 봉급 2만 원 등 모두 5만 원을 잠상공사에 투자하였다.한편, 메르텐스도 잠상공사 운영자금을 투자하였으며, 그 액수는 수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투자한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89년 문을 닫았다. |
②우정총국:1884년(고종 21) 설치된 우편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우정국이라고도 한다. 사적 제213호. 1882년(고종 19) 12월 행정직제의 개편을 통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내에 우정사가 설치됨으로써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시작되었다. 초대 협판에는 홍영식이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홍영식이 보빙부사로 미국을 방문, 미국의 우편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4년 3월 군국사무아문 안에 우정총국이 설치되었다. |
③박문국요약: 신문·잡지 등의 편찬과 인쇄를 맡던 대한제국기의 출판기관.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박문국에서 발행되었으므로 박문국은 한국 최초의 신문사라 할 수 있다. 1883년(고종 20) 8월 17일 외국어 교육을 담당하던 통리아문 동문학의 부속기구로 설치되었다.
민영목·김만식(金晩植) 등을당상관, 김인식(金寅植)을 주사,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오로[井上角五郞]를 고문으로 하여, 그동안 한성부 심문국에서 박영효(朴泳孝)·유길준 등에 의해 준비되어오던 근대신문의 창간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30일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박문국의 시설이 불탐으로써 폐지되었다.이후 1885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에따라 다시 설치되어 1886년 1월25일에는 〈한성주보 漢城週報〉를 창간하고 외국서적등도 출판했다. 박문국은 계속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1888년 7월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폐지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부속되었다 |
④ 농무목축시험장: 1884년(고종 21) 농업 개량을 위해 설치한 모범 농장. 1883년 12월 20일홍영식(洪英植)이 미국 시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설치를 건의한 바, 고종의 토지 하사와 재정 지원으로 적전(籍田)이 위치한 망우리에 설치되었다. 관리관은 훈련원 첨정 최경석(崔景錫)이었다. 1883년 9월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미국을 방문중일 때 이미 설치가 구상되고 상당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일행은 보스턴 박람회와 보스턴 부근의 월콧모범농장(Walcott Model Farm)을 시찰하면서 미국 농기구의 도입과 모범 농장 설치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각종 농작물의 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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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94년 농민전쟁 당시 농민 자치 조직으로서 농민의 의사를 모으고 집행했던 기구는?
①교정청 ② 집강소 ③ 군국기무처 ④ 해상공국
①교정청요약: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5월 동학 농민군이 철수한 뒤 6월 11일에 내정 개혁을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다. 일본 측의 내정 개혁에 대한 압박을 배제하면서 6월 16일에는 12개 조항의 개혁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친일개화파 주도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
②집강소:집강소(執綱所)는 조선 후기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호남 지방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 기구[1] 이며, 개혁 기구이다.전주 화약 이후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에 조직한 농민 자치 조직이다. |
③군국기무처:조선조 고종 31년(1894) 청일전쟁 때, 일본의 강압으로 설치된 관제 · 세제 · 학교 · 군사 · 산업 등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 관아. 모든 정사는 이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왕권보다 더 큰 세력을 가졌음 |
④해상공국 :1883년(고종 20) 보상·부상을 통괄 관리하고 외국상인의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기관. |
9) 1894년 농민전쟁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① 급진개화 세력이 일본의 힘을 빌려 시도한 개혁이다
② 정부 개화정책에 반발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③ 농민들이 정부의 개항을 촉진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④ 농민이 주도가 되어 근대개혁이 추진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1894년 농민전쟁: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투쟁 동학에 기반을 둔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으로 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 대항한 고부민란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키자 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는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남접·북접 연합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동학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이었다.1894년 농민전쟁·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
10) 19세기 말 역사적 사건들을 순서대로 맞게 전개한 것은
① 을미사변-삼국간섭-갑오개혁-아관파천
② 갑오개혁(1894)-삼국간섭(1895)-아관파천(1896)-을미사변(1895)
③ 삼국간섭-을미사변-아관파천-갑오개혁
④ 아관파천-갑오개혁-삼국간섭-을미사변
*2번답이 틀린 것 같습니다
갑오개혁: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 | 개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
삼국간섭: 청일 전쟁의 결과 1895년(고종 32)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遼東] 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국이 개입하여 청에 돌려 주게 한 사건.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영유하게 됨으로써 부동항을 획득하려는 의도가 좌절된 러시아가 중심이 되었고,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에 두게 하려는 독일의 의도가 합치하여 3국이 공동 보조를 이루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이들 3국이 공동으로 일본에 랴오둥 반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국 분할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처하여 일본은 러시아를 비롯한 3국과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해 5월 4일 랴오둥 반도 반환을 결정하고 5월 10일 조칙을 발표했다. 삼국 간섭으로 일본 세력은 후퇴했으나, 그 대신 3국 세력은 청으로부터 새로운 이권을 얻었으며, 조선에서는 친러 세력이 새로 일어났다. 이후 세계 열강이 중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것이 국제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
을미사변:1895년8월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 | 개설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 개설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
제11장 주권국가 건설운동과 일제의 한국 강점
1)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독립신문발간 ② 독립문건설
③황국협회 결성 ④ 만민공동회개최
독립신문발간:일제에 맞서 비밀리에 발간한 국내의 대표적 신문. 1919년 3월 1일 천도계의 보성사에서 창간하여 6월 22일까지 제36호, 8월 20일까지 제42호를 펴냈으며 종간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사장 윤익선, 편집인 이종린이었고 이종일·박연호·김홍규 등이 참여했다. 내용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될 것임을 알렸다.그러나 발간되자마자 이종일·윤익선이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보성사는 폐쇄당했다. 이종린은 몸을 피하여 경성서적조합 사무소에서 장종건과 상의하여 제2~4호를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 그뒤 이종린도 잡히자 장종건이 유병윤의 집에서 제6호까지 펴냈고 제9호부터는 김일선·장채국·장용하·강매·김유인·김옥영 등이 발간·반포에 적극 참여했다. 8월 29일에는 국치 특집호를 펴내기도 했다. |
독립문건설: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준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2][3]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사파진),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시공했고, 그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뒷편에 건립되었으며,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돌이 함께 남아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
황국협회결성: 황국협회는 1898년 정부가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투에 대항해 조선 상인들의 몰락을 타개하기 위해 조직했으나,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독립협회를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기도했다. 청일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던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투와 조선상인들의 몰락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부권력과 결탁하여 황권의 강화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특권상업체제를 복구하려 했다. 그리고 정부의 비호 하에 만민공동회에 습격해 독립협회원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때문에 서울 도성에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두 세력이 충돌·대치하게 되자, 정부는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시켰고 후에 황국협회도 해산되었다. 외세의존적인 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근대적 상업체제를 지향하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
만민공동회개최: 독립협회의 정치 활동 중 하나로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주도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와 연계 아래 전개되었으나 점차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만민 공동회는 자유롭게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고, 민권신장이 그 주요내용을 이루는 ‘헌의 6조’를 결의함으로써 독자적인 민중 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만민 공동회 운동이 강력해지자 정부는 주요 인사를 체포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민공동회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의식을 불어넣은 대중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2)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① 구본신참(舊本新參) ② 보국안민(輔國安民)
③ 제폭구민(除暴救民) ④ 내선융화(內鮮隆化)
대한제국광무개혁:아관 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는데, 대한 제국은 자주독립을 바라는 여론과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균형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899년에 선포된 대한국 국제에서는 대한 제국이 전제 국가임을 밝히고,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관리 임면권, 조약 체결권, 외교권 등의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켰음 광무개혁원칙:구본신참(舊本新參)→복고성과 개혁성의 절충, 위로부터의개혁 |
구본신참;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뜻입니다.즉, 옛 것에 중점을 두고요. 새로운 것은 필요한 것만 받아들인다는 보수적 성향의 개혁을 뜻합니다 |
보국안민: 나라님을 도와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동학 혁명 때, 동학 교도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의 구호를 내걸고 백성들의 지지와 궐기를 호소하였다. |
제폭구민: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동학 농민군은 제폭구민을 위한 것이었지 권력과 영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
내선융화: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 약칭: 반민족규명법 ) [시행 2012.10.22.] [법률 제11494호, 2012.10.22., 일부개정] 공포법령보기> |
3)러일전쟁(1904)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책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한일 신협약 ②을미사변
③ 군대해산 ④을사조약
러일 전쟁: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이 1896∼1898년 사이에 맺은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협정 및 로젠·니시(Rosen·西)협정 등이 바로 이것들이다.그러나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란(義和團亂)이 만주로 파급되자(1900),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영일동맹론과 러일협상론으로 대응 방안이 갈렸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추가내용참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7238 |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07년 6월 한국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고, 7월 24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신협약을 작성하여 한국정부에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었다. 공포된 7조약은 실제로 이미 이토가 한국의 정무 일체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명문화하고 권한을 다소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이 조약에는 비밀각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일제는 이 협약에 의거하여 1910년 강점할 때까지 사법권·행정권·관리임명권을 탈취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마지막 기반을 조성해갔다. |
을미 사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 |
군대 해산 ;1907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사건 군대 해산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탈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군대해산 이후 무장해제를 당한 대한제국 군대. |
을사 조약(을사늑약): 1905년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명칭에 대한 논란: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을사늑약의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체결 당시의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으며, 을사년(乙巳年)에 체결되었다고 하여 '을사조약', 또는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고 보호하기로 했다는 뜻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1904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이어 체결되었다고 하여 '제2차 한일 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서 자체에는 제목과 같은 공식 명칭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이 조약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불평등한 내용으로 체결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관인을 일본 관리가 훔쳐 찍었고, 협정에 임하는 양국의 대표에 대한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결여되었으며, 한국 고종 황제가 비준을 거부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천명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불법적이며 원천 무효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
4) 일본 정부로부터 빌려 온 차관을 갚기 위해 전개했던 계몽운동은
① 만민공동회 운동 ② 독립협회 운동
③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 ④ 국채보상운동
① 만민공동회 운동: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 집회로, 관료, 학생, 서민 등 각계각층이 모였기 때문에 만민공동회라고 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열강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자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하여 국권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립협회는 고종이 해산을 명령하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이듬해 초에 해산하였다. |
② 독립협회운동:요약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여 서구 시민사회를 체득하고 있던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 당시 독립협회는 고급관료들이 주도하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청의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독립협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어 국민 계몽 운동도 전개했다. 토론회의 주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로광장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자주 국권과 신체와 재산의 보호를 위한 민권 등을 요구하는 민의를 담은 내용을 정부에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는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의회 개설도 추진했으나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1898년 12월 해산했다. 창립과 발전과정 ①제1기(창립~1897. 8. 28) ②제2기(1897. 8. 29~1898. 2. 20) ③제3기(1898. 2. 21~9. 10)④제4기(1898. 9. 11~12. 25) |
③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보안회) 1904년 7월 13일 일본의 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단체. |
④ 국채보상운동: 외채를 상환하자는 국민의 자발적인 모금운동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인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맞아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가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나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2,000만 민중이 3개월 기한으로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마다 매달 20전씩 거두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설령 다 차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5) 1907년 결성된 비빌결사 조직으로써 독립군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을
주장했던 단체는?
① 신민회 ② 보안회 ③헌장연구회 ④ 서북학회
신민회: 안창호가 1907년에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단체 안창호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박은식·신채호·양기탁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로 교육구국운동, 민중계몽운동, 독립군 양성운동, 민족 산업 진흥운동 등에 힘썼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휘말려 해체되었다 |
보안회: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 | 보안회는 1904년 조직된 단체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해 저항하였다. |
헌정연구회:1904년에 발생한 러일전쟁에서 일제는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일의정서·한일협정서 등을 강요하는 등 점차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강화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준·양한묵·윤효정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의 정치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계몽단체의 하나인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근대적 국가의 특성을 헌정으로 보고 근대국가의 성격과 운영에 관한 정치교양을 쌓아서 앞으로 쟁취할 근대적 독립국가의 헌정에 관해 연구하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정치집회가 금지되자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방향을 바꾸어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키는 사회문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후신으로 1906년 윤효정·장지연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자강회를 설립했다. |
서북학회 :설립자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최재학 외 의의와 평가 서북학회는 1909년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
6) 을사조약 뒤 활약했던 대표적 평민 의병장은
① 민종식 ② 최익현 ③ 신돌석 ④ 박승환
민종식 :을사조약 반대운동 독립운동가 클릭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bird5519&logNo=120113236510 |
박승환 -대한제국 군대해산 명령에 항의 하고자 권총으로 자살 독립운동가 |
최익현: 을사조약(외교권박탈) 반대 독립운동가 |
(1905년 을사늑약:. 《황성신문》은 주필인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실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만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멈추겠는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로 끝을 맺으며, 을사조약을 맺은 정부 대신들을 도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조약을 맺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이 다섯 명을 을사5적이라고 부르며 매국노라 하였습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 전쟁의 확산 과정 |
7) 을사조약 뒤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된 계기는?
① 아관파천 ②광무개혁 ③임오군란 ④군대해산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 개설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
광무개혁:1896년부터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의 개명(開明)된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개설:1897년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 개혁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獨立協會)세력이 주도한 아래로 부터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 내용: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은 비록 외세의 종용과 간섭이 있기는 했지만, 1876년 개항 이후에 확산된 개화사상을 정책적으로 구현하고 동학농민혁명 이후엔 발생한 과제들을 수습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장(更張)사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성립된 정부에서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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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요약: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부당한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고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빈민과 5군영의 폐지와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은 하급군병이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서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이에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으나 청군에 의해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이 진압되고 말았다. |
군대해산:1907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사건. | 역사적 배경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킨 다음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탈취하였다. |
8)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사회 경제적 변동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신분제가 사라지고 사회적 평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② 시전상인들이 근대상인의로 변신하려고 노력하였다
③ 활빈당은 지배층의 무능과 수탈을 비판하였다
④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체 금지 되었다
활빈당: 1900년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
9) 개항이후 나타난 새로운 문예 경향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신소설 ② 신체시 ③ 탈춤 ④ 창가
신소설(新小說)은: 한국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성행한 소설 문학의 한 종류이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개화기소설(開化期小?)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
신체시: 신체시는 구체시(舊體詩)를 배제하고 서구의 시(poetry)에 해당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시에 해당되는 작품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대체로 1908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부터 1919년 〈창조〉 창간호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놀이〉 이전까지의 시를 가리킨다. 한국의 신체시가 가지고 있는 새로움의 요소는 형태적인 면에서 종래의 시가가 지녔던 고정된 운율로부터의 탈피이다. 신체시의 또다른 특징은 기존의 율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채택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최남선은 장르 의식의 결여로 자유시로의 발전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내용적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진취적 의욕과 낙관적 세계를 노래한 일종의 계몽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
창가: 개화기 시가 양식의 하나. 개화기의 한국 시가는 서구의 충격을 받아서 그 내용과 형태에서 고전시가와는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창가는 개화기 시가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양식으로 개화가사의 다음 자리에 위치하고, 다음 단계의 시가인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징검다리 구실을 하였다. 내용-창가라는 명칭은 개항과 함께 한국 사회에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가사의 뜻을 지닌다. 바꾸어 말하면, 시가 형식으로 창가는 서구의 곡조에 맞추어 지어진 가사 형식에 해당된다. 창가의 효시를 이룬 작품은 1876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경축가>이다. |
10) (독사신론) 지어 근대 민족사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① 신채호 ②박은식 ③최남선 ④주시경
신채호:요약 한말에 언론, 교육, 신민회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호는 단재, 일편단생, 단생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며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자이다.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세 때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9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2월 옥사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박은식:1898년은 그에게 전환기였다. 박은식은 서울로 올라와 애국문화운동에 열렬히 참여했고, 교육이 구국의 요체임을 주장하고는 《학규신론(學規新論)》을 지어 정부에 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서울 거리에 울렸다. 이즈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간행되자, 두 신문사에서 차례로 주필을 맡아 장지연, 남궁억 등과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박은식은 만주 땅에 있을 때에 앞에 말한 《몽견금태조전》을 비롯,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실기》, 《연개소문전》 등을 써서 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우리 민족의 웅대한 역사를 기술했다. 이 글들은 뒷날 이 지방의 자녀들에게 민족혼을 고취하는 교재가 되었다. 1912년에 박은식은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려 상하이에 정착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교민이 몇십 명에 지나지 않았고 신규식, 홍명희 등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박은식이 오자 그 총재로 추대했고 곧이어 교육기관으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운동을 벌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태동하기 전 상하이에서 청년교육언론 운동을 벌이면서 《안의사중근전》, 《이순신전》, 《이준전》 등을 저술했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에서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이름으로 완성했다. 그가 망해가는 나라의 역사를 썼기에 ‘통곡의 역사’라는 뜻에서 ‘통사’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사와 금사(金史)를 우리나라 역사라는 의식으로 이를 한글로 저술하여 우리 동포 자녀들에게 읽혔다.그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을 맞이했고 이어 임시정부가 태동했을 때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묵묵히 봉직하면서 동학농민전쟁에서 3·1만세운동까지 철저하게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엮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완성했다. 그의 회갑연이 베풀어졌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국통사》를 쓰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거니와 내가 비록 늙었더라도 건국사를 쓰고야 죽겠다.” 이 결의와는 달리 그는 끝내 우리나라의 건국사를 쓰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죽고말았다. |
최남선(崔南善) 굴절된 친일파 지식인-당대 3대 천재의 한 사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하면 우리는 흔히 천재를 떠올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동서고금의 서적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함)한 학자로, 부지런한 신문화운동가로, 논설을 쓰면서 신문사 사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많은 시조를 쓴 시조시인으로, 우리 역사를 줄기차게 쓴 역사학자로, 수많은 책을 모은 장서가로,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민족대표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살았던 당대에 3대 천재의 한 사람으로 꼽혔을 정도로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중략-시류에 타협하는 굴절된 지식인의 모습
1919년 봄, 나라 안팎의 정세에 힘입어 국내 인사들 위주로 일대 시위운동이 준비되면서 그에게도 일거리가 하나 주어졌다. 그의 문장력을 높이 사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한 것이다. 그는 웅혼한 문장으로 이 선언문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민족대표 서명 차례가 되자 학자로 남겠다는 뜻을 비치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 말고도 김성수는 사업을, 송진우는 언론을, 현상윤은 교육을 핑계대고 서명에 끼지 않았다.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뛰어난 한문투의 문장이었고, 그때로서는 참신한 감각을 지닌 용어가 구사되었다. 그러나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선언문으로서는 지나치게 온건했고, 또 지나칠 정도로 비폭력을 내세웠다. 이에 이 선언문을 맨 처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한용운이었고, 오늘날에도 그 온건한 내용과 함께 어려운 문투가 민중의 가슴에 와닿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는 이 글 말고도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 〈윌슨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의견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등의 공식문서를 썼는데, 이것들도 오늘날 한결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중략-이후 이들은 총독부가 거들어 이루어진 연정회(硏政會)에도 참여하고 조선자치론에도 찬성하고 나서는 등 총독부 정책에 영합하고 나섰다. 여기에 참여한 세력은 거의 민족주의 우파들로서 언론이나 교육계의 지식인들, 기업을 벌이고 있던 이른바 민족자본가들이었다. 추가정보-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5XX13000067 |
주시경: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한 우리나라의 국어학자(1876~1914) 개화 청년으로 성장하다 한글연구에 몰두하다 한글운동과 구국운동에 신명을 바치다 망명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사하다 개화 청년으로 성장하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인 ‘한힌샘’으로 지어 부른 것으로 유명했다. 우리는 그를 국문법의 창시자로 받들고 있으나 여느 사람들은 정작 그의 내력과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어느 정치가보다도 큰 공적을 쌓아 우리 겨레의 문자생활에 이바지했다. |
제12장 일제의 식민 지배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1)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설치한 신민통치의 최고기구는?
① 통감부 ② 중추원 ③ 조선총독부 ④동양척식주식회사
통감부요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자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형식상으로 대한제국의 내각회의를 거쳐 제2차 한일협약이 통과되었으며, 제3조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되었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수적인 폭력기구를 급격히 확대·강화해 무단통치 실현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헤이그 밀사 파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자결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체결되고 완전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
중추원: ①고려 시대, 왕명의 출납(出納),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 991(성종 10)년에 설치되었는데, 뒤에 추밀원(樞密院), 밀직사(密直司), 중대성(中臺省)으로 고쳤다. ②조선 초기,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 1400(정종 2)년에 삼군부로 고쳤다가, 1466(세조 12)년에는 중추부(中樞府)로 고쳤다. ③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의 어용 자문 기관. |
조선총독부요약: 초기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내정에 관섭하던 기구인 통감부를 계승하면서 한국 소속 관청을 축소 흡수해 급격한 변화를 피하는 과도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기관 통폐합 시 민생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주로 치안에 초점을 두었다. 신설된 총독부는 총독관방 외에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의 5부를 구성하여 각 부의 장을 장관이라 하고, 각 부에 국을 두어 칙임 국장을 두었다. 부속기관으로는 취조국·철도국·통신국·임시토지조사국·전매국·인쇄국을 두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직원이 사법과 치안 등 탄압 기구에 배치되었다. 일제 육해군 대장 출신의 총독의 지휘 아래 있던 총독부는 약탈 목적의 무단통치조직으로 전체주의적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했으며, 민족문화의 말살과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법'으로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한국내 설립한 국책회사. 일제의 한국농민 수탈의 선봉이 됨으로써 민원의 대상이었으며 현재의 서울시 중구 을지로2가 한국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다. |
2) 1910년대 일제가 식민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실시한 것은?
① 토지조사사업 ② 산미증식계?
③조선공업화 ④ 신사참배
토지조사사업: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 내용 일제 하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10년 우리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강점한 전후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한 제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다 |
산미증식계?: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으로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이다. 1920~25년 '산미증식계획', 1926~34년 '산미증식갱신계획', 1940~45년 '조선증미계획' 등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산미증식계획은 1920년에 15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실적이 매우 부진하자 1926년에 계획이 수정되었다. 산미증식갱신계획은 1926년에 12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1934년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조선증미계획은 1940년에 수립된 것으로, 전 시기의 자재난과 인력난으로 이 시기의 증산실적은 거의 없었다 |
조선공업화: 요약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정책.일제는 1920년대말 불어닥친 세계공황을 만주침략을 통해 모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북선개척을 통해 조선의 부원을 증진한다'는 명목하에 조선 북부일대에 침략전쟁을 위한 중화학 군수공업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확장함으로써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 농촌 내 과잉인구의 혁명 세력화를 방지하고 동시에 조선의 저렴한 노동력을 식민지 군수산업과 원료자원의 수탈에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고 이로써 식민지 지배체제의 재편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조선 북부 일대에 경금속공장, 화학공장, 군수품생산과 관련된 공장 등을 급속히 신설, 확장시켜갔다. 이와 더불어 화학군수공업 건설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북부지역의 교통망 정비·확충, 산림자원·지하자원·수력자원의 개발 등에 주력했다. |
신사참배:일제 강점기,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할 것을 강요하던 일.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다. 일제는 종교계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압력을 행사했다. |
3) 3.1운동으로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광범한 민중이 참가한 항일운동 이었다.
②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③ 노동자들은 운동에 참가하지 않했다
④ 나라 밖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 3.1운동의 결과로써 상하이에 수립된 것은?
① 경학사 ② 신흥강습소
③ 신한청년당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학사요약: 1907년 조직된 신민회 임원들은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하여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1910년말부터 1911년초에 걸쳐 가족 단위로 이주하여 1911년 4월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흉작으로 인한 운영난과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1914년 해산되었다. 그후 경학사의 조직경험은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는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
신흥강습소: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만주에서 운영된 대표적인 한인독립군 양성기관. 신민회의 임원이었던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등이 중국 만주로 이주해 1911년 자치단체 경학사를 조직하고 함께 세운 무관 학교이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경학사가 해체되면서 다른 조직인 부민단(扶民團)과 함께 장소를 옮기고 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해 이어갔다. 3·1운동 이후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김경천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성장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 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며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
신한청년당요약: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국제질서의 재편을 앞두고 이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1918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였고, 김규식, 서병호, 여운형 등이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의 결성목적은 대한민국 독립의 완성, 민족의 실력양성으로 전 인류에 기여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해 12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라는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다음 해 1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12월 1일에는 기관지 〈신한청년〉을 창간했다. 1923년 6월 이후 해체되었다. 해체의 직접적인 이유는 여운형을 비롯한 핵심세력의 일부가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정부이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중국 상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임시정부 하에서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국 국민당, 소련, 프랑스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과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계승 의지가 수록되었다. |
5)1920년대 일제의 문화 통치에 대해 잘못된 것은?
①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다.
② 보통경찰제도를 헌병경찰제도롤 바꾸었다
③ 집회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 할수 있었다
④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유력한 조선인을 포섭하려 하였다
6) 1920년 만주 독립군의 활동을 맞게 묶은 것은?
가,봉오동전투 나, 청산리 대첩 다,경신참변 라, 자유시 참변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가
봉오동전투: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
청산리대첩: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
경신 참변: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까지 합류시킨 대부대를 간도 일대에 투입시켜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몄다. 그 후 일제는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3·1운동 직후 만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과 무장 독립군부대가 편성됐으며, 여러 번 국내로 잠입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일제는 1920년 10월 중국 마적을 사주해 간도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독립군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산속 등으로 이동하자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현재 확인된 학살피해자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
자유시참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독립군 10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동만주, 북만주 지역 대한 독립군 세력이 위축되고, 독립군 3부를 기반으로 한 국민부가 민족주의 무장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이 사건은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
7)1926녀 조선공산당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준비하여 일으킨 항일운동은?
① 물산장려운동 ② 민립대학 설립운동
③ 6.10 만세운동 ④ 자치운동
물산장려운동:3·1 운동 이후 경성 방직과 같은 한국인 기업이 설립되어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였으며, 1923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가 대부분 철폐되자 일본 상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어 왔다. 한국인 자본가와 언론은 민족의 경제적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인 자본의 보호와 육성을 대중에게 호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조만식 등은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기하고, 자작자급을 위한 운동을 펼칠 것을 제창하였다. 이어 1923년 서울에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면서 물산 장려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지방에서도 자작회, 토산 장려회 등의 단체들이 조직되어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단연 등을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 |
민립대학설립운동요약: 1920년대 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 문화운동. |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영식, 이민재,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
자치운동: 실력 양성 운동 이후 분화된 민족주의 계열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타협하여 자치권과 참정권을 얻어내자는 운동을 벌임. 자치 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조선 사람들의 자치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벌인 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힘을 기르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실력 양성 운동이 민족주의 진영에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경제, 교육 등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과 계몽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실력 양성 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민족주의 계열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로 분화되었다.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경제적인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일제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며, 일제의 지배 하에서 참정권, 자치권 같은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광수, 최린, 김성수 등이 있다. 이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거세게 비판하였으며,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이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신간회를 결성하였다(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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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20년대의 농민운동으로 맞는 것은?
①원산총파업 ②암태도 소작쟁의
③광주학생운동 ④형평운동
원산총파업:요약 1928년 원산의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현장감독이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이 발생한 뒤 1929년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원산의 모든 산업, 운수기관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역량이 크게 약화되고 일제의 탄압으로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파업지도부를 잃은 반면 투항적 자세를 지닌 노동자들이 나타나면서 4개월간 계속된 총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원산총파업은 한국의 노동운동사상 처음으로 1개 도시 전체를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뜨려 일제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파업투쟁이었으며, 또한 노동자들의 연대성과 완강성을 잘 보여준 파업이었다. 이 사건은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암태도소작쟁의:요약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소작농민항쟁. 일제강점기 때 지주가 소작인을 구타하여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던 암태도사건을 실은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2년 4월 6일자. |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사회, 청년 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개됐고, 간도와 일본을 비롯해 국외로도 확대됐다. 이것이 학생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광주 학생운동으로,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다. ‘광주’는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광주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며, ‘학생’은 학생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
형평운동: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의 신분적·민족적 인권해방운동(한국사).]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평량자(平凉子: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張志弼)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학찬(李學贊)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하에 형평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사칙을 통해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할 것을 명시했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자, 1924년 2월 전국의 지사·분사 대표 3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전라도·충청도·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장지필 등 혁신파는 본사를 서울(경성)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해 내부 대립이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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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반일민족협동전선은?
① 조선노동공제회 ② 조선형평사
③ 연정회 ④ 신간회
조선노동공제회: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는 일제 치하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던 노동자·농민들이 권리 신장과 함께 일제 지배에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한 민족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노동 단체이다 |
조선형평사요약: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진주의 이학찬·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 등을 간부로 하여 조선형평사가 창립되었다. 창립 목적을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노선에 대한 갈등이 불거져 신파와 구파로 갈라졌다. 1931년 표면적으로는 구파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활동이 침체되었고, 1937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
연정회요약:1924년 〈동아일보〉 계열의 김성수·송진우·조만식·서상일·안재홍 등이 모여 민족운동의 노선을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는 독립의 전단계로써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실은 일제가 독립운동의 분열과 변질을 위해 이를 선동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보기 위해 〈동아일보〉에 이광수의 논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자 반발이 심했으므로 결국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의 결성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 사이토와 정치고문 아베가 자치론의 부활을 획책했다. 이후 자치론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거의 결성단계에 도달했으나 김준연과 안재홍이 아베가 이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 이를 조선민흥회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이 이탈함으로써 연정회 결성은 무산되었다. |
신간회: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
10) 일제감정기 사회 변화로 만지 않은 것은?
①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고 위상이 낮아졌다
②서울은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건물들이 잘보존되었다
③경성은 남촌과 북촌이라는 이중구조를 띠게 되었다
④신여성이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남촌과 북촌 :조선시대에 청계천 북쪽 일대를 북촌, 그 남쪽 일대를 남촌으로 불렀다.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양반의 자손이긴 하나 몰락한 사람들이거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 놀림을 받았던 불우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이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이 이 남촌 지역을 왜놈들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제13장 대공황과 전시체제,민족해방운동과 사회변화
1)일제가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려고 일으킨 사건이 아닌 것은?
①만주사변 ②중일전쟁 ③태평양전쟁 ④ 남한대토벌
만주사변: 만주 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Mukden Incident,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 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利權)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1931년 9월)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은 1932년 1월까지 동삼성(東三省)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1]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루는 것이었다. |
중일전쟁: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어 간체: 中?抗日??, 정체: 中國抗日戰爭, 병음: Zh?nggu? K?ngr? Zh?nzh?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본어: 日中?? にっちゅうせんそう)혹은 지나 사변, 서양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Second Sino-Japanese War)[2] 이라고 부른다. 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3]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년 9월 2일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중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 다리 사건(盧溝橋事件,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 즈음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
태평양전쟁:요약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되고자 했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해군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미국은 12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을 잡았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 대세가 기울어갔다. 1945년 미국은 오키나와 섬을 점령했으며, 도쿄에 대한 야간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도시를 공습했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했다. 1주일 뒤 일본 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조인되었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도 별도의 절차를 거쳐 항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
남한대토벌: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에 걸쳐 진행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의 반일의병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 1907년 군대해산으로 거세게 타오른 제3단계 의병전쟁이 가장 격렬한 곳은 전라남도였다. 이에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이 지역 의병을 진압했다.
제1단계 작전은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 제2단계는 고흥·광주·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도서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양민과 민가까지 살육·방화·약탈함으로써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의병장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전해산 등 23명은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보성·낙안·순천을 경유하는 광양·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했다. 이후 의병들은 만주로 옮겨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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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30년대 일제가 만주 진출의 토대를 만들려고 추진한 정책은?
①조선회사령 실시 ② 조산공업화 정책
③언론 출판 자유 허용 ④ 토지 조사사업
조선회사령 실시: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이후의 10년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한반도 전역을 전율(戰慄)의 상태에 두면서 한반도 경제의 제국주의적 재편작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이 작업에는 두 가지 큰 시책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지조사사업은 농토의 약탈과 농민수탈의 농업정책을, 다른 하나인 이 「회사령」은 일제식민지 상공업정책을 집약하고 대표하였다 |
조선공업화정책:일제는 1920년대말 불어닥친 세계공황을 만주침략을 통해 모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북선개척을 통해 조선의 부원을 증진한다'는 명목하에 조선 북부일대에 침략전쟁을 위한 중화학 군수공업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확장함으로써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 농촌 내 과잉인구의 혁명 세력화를 방지하고 동시에 조선의 저렴한 노동력을 식민지 군수산업과 원료자원의 수탈에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고 이로써 식민지 지배체제의 재편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조선 북부 일대에 경금속공장, 화학공장, 군수품생산과 관련된 공장 등을 급속히 신설, 확장시켜갔다. 이와 더불어 화학군수공업 건설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북부지역의 교통망 정비·확충, 산림자원·지하자원·수력자원의 개발 등에 주력했다. |
토지 조사사업-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
3) 1930년대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헌병경찰제실시 ② 경무관제도 실시
③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시행 ④ 조선 사상범예방구금령 시행
헌병 경찰제실시 -1910년 대한 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제가 실시한 것으로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도록 하여 무단 통치를 뒷받침함. |
경무관제도 실시:일제는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검거하는 데 효과를 본 '경무관' 제도를 조선에도 실시했다. 이것은 경무관이 사상운동 탄압을 전문으로 맡아 지방 경찰과 중앙의 보안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경찰이 통일적인 공조체제를 마련한 것은 조선 곳곳에서 혁명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사회주의운동도 생산현장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2년 '사상결찰망'을 크게 늘려 사회주의운동이 노동자, 대중과 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 |
4)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내용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소작료 인하운동 ②신간회건설운동
③ 부역동원 반대운동 ④노동절투쟁
소작료 인하운동:농민 운동 배경:토지 조사 사업·산미 증식 계획 등 일제의 경제 수탈과 지주의 과도한 수탈 농민조직:농민 조합을 기반으로 조선 농민 총동맹 결성(1927), 조직적인 농민 운동 전개 소작쟁의의성격:1920년대에는 주로 소작권 이동과 높은 소작료 반대 운동 → 점차 반일 민족운동으로 발전 대표적인소작쟁의:암태도소작쟁의(1923), 불이흥업 농장의 소작 쟁의(1929) 등 |
신간회건설운동:신간회 건설운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간회:신간회는 창립 후 각지의 독립운동가·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아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소 돌파 기념식을 개최했다. 신간회 지회는 1928년 2월 123개, 1929년 2월 144개로 급증했고, 해산될 무렵인 1931년 5월에는 124~126개였다. 그리고 회원수를 보면 1928년 2월 15일 현재 2만 여 명, 1929년 2월에는 3만 여 명, 1931년 5월 15일 해산시에는 3만 9,914명이었다. |
부역동원 반대운동;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던 고율의 소작료 인하뿐만 아니라 군수용물자 강제수매 반대, 공과금 납부 거부, 부역동원 반대운동 등을벌여서 일제의 전시 수탈에 맞섰습니다. |
노동절투쟁: 1930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투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을 겪은 바로 뒤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의 탄압을 뚫고 기념투쟁이 벌어졌다. 전주 합동노동조합 산하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념집회와 시위를 단행했다. 일제 경관이 해산을 명령하자, 노동자들은 격렬히 항의하며 주재소로 달려가서 유리창을 부수는 등 투쟁을 전개했다. |
5) 1930년대 초 언론기관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은?
①물산장려운동 ② 광주학생운동
③민립대학설립운동 ④ 브나로드운동
물산장려운동: 1920년 초에서 1930년대 말까지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응하여 국산품 애용, 민족 기업의 육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
광주학생운동;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
민립대학설립운동:1920년대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문화운동 |
브나로드운동: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계몽운동의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
6)1930년대 후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토지사업실시 ②창씨개명 실시
③ 황국신민서사 강요 ④ 신사참배 강요
토지사업실시 ; 일제는 조선 총독부가 토지와 지세를 효율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456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입하여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은 크게 보아 소유권 조사, 지형 지모 조사, 지가 산정, 토지 대장 작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10년 토지 조사국을 창설하고, '임시 조사국 관제'(칙령 20호)를 공포하였으며, 1912년에는 '고등 토지 조사 위원회 관제'와 '토지 조사령' 공포 등을 잇달아 단행하였다. 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목적은 지세 부담의 공평, 지적의 확정과 소유권의 보호, 토지 개량과 이용의 자유 보장, 생산력의 증진 등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질적인 목표는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조선 총독부의 지세 수입을 증대시키기에 적합한 토지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내에 토지에 관한 모든 것을 신고해야 하는데, 한국인은 절차상의 번잡함과 이민족의 강압적 지배 등의 이유 때문에 제대로 신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신고인은 서류 수속을 누락하거나, 도장을 잃어버리던가, 형식에 잘못이 있어 서면 접수를 기한 내에 하지 못하여 소유권을 잃어버린 경우가 있었다. 토지 조사는 일본 관헌과 지주가 중심이 되어 시행되면서 일본인과 지주에게 유리하고, 한국인과 영세 농민에게 불리하였다.토지 조사 사업은 결국 실제로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농민으로부터 전통적으로 형성된 여러 가지 권리를 빼앗고, 한 마을 또는 한 집안의 공유지였던 동중 또는 문중 토지를 국유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창씨개명 실시: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우리 고유의 성명(姓名)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를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조선총독은 미나미 지로(임기 1936-1942)로 역대 총독 중 가장 악명 높은 자로 알려져 있다.
■ 여자가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성(姓)을 유지하는 부계 혈통에 기초한 조선의 가족제도를, 가(家)의 칭호인 씨(氏)를 붙여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창씨'가 이 제도의 핵심이며, 조선총독부는 이것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 허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친일정권을 앞세운 단발령에 이어 ?성까지 갈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은그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 중 하나의 것에 불과하며,심하게는 민족말살 정책의 ‘완성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황국신민서사강요: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글.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국민정신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낭송이 강요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실천요강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아동용과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용·일반용의 2종류가 있는데 ■아동용은 "①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②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③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고 되어 있다. ■일반용은 "①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②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③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라고 되어 있다. 보급을 위해 아동용 100만 부, 일반용 20만 부를 인쇄·배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선전했다. 문안은 직업적 친일파인 이각종이 지었다고 한다. |
신사참배 강요: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要)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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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일전쟁 뒤 일제의 강제동원 수탈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②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다
③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동원 하였다
④ 물자공출은 시행하지 않했다
8) 1944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반일 세력을 모아 낸 조직은?
①원산그룹 ② 경성 콤그룹 ③ 건국동맹 ④조선어학회
원산그룹:일제시대 기업(1929년원산총파업) |
경성콤그룹:요약 1939~41년 대중조직 건설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이관술(李觀述) 등이 중심이 되어 경성·함경도·경상도에서 활동한 조직. |
건국동맹;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무렵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이수목(李秀穆)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연원 및 변천-이 단체는 1944년 8월 10일 국내의 사회주의자 일파들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여,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직하였다. 그 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이 가담하여 조직이 더욱 확장됨으로써, 위원장 여운형 산하에 여러 부서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맹원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과, ① 각인·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건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反樞軸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
조선어학회:1921년에 주시경의 문하생이었던 최두선, 임경재, 권덕규, 장지영 등이 모여 국어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된 민간 학술 단체. 1931년 조선어 연구회를 고친 이름이며 뒤에 한글 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
9)1940년 중국 총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군(軍)은
①한국독립군 ②한국광복군 ③ 조선혁명군 ④동북항일연군
한국독립군:1931년 창립된 민족주의 세력인 한국 독립당의 당군으로 중국군과 합작하여 동·북만주 지역에서 활약한 군대. |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족주의 세력인 한국 독립당은 항일투쟁의 적기가 왔다가 판단하고 한국 독립군을 창립하였다. |
한국광복군:1940년 9월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으로, 1946년 5월 환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에 창립된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 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조직되었다. 1940년 5월, 임시 정부 측은 중국 정부 장제스 주석에게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 국민 당군의 지휘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하였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이 준승은 한국 광복군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 협정이었다. 한국 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 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에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의 일부가 흡수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다. 또한,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 청년 훈련반과 한국 광복군 훈련반이라는 임시 훈련소를 운영하였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아시아 ·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1941년 12월 9일에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에는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 ·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시 정부 구미 외교 위원부 위원장인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1945년 4월 당시 광복군의 총 병력수는 339명이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
조선혁명군: 1929년 3월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洞) 거리의 국민부(國民府) 사무소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남만주일대의 유일혁명군정부인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당군(黨軍)으로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설립목적:친일인사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진입작전 전개에 의한 일제기관 파괴, 일제 관헌 및 악덕 부호 응징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즉 조선혁명군이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지주나 부호도 처벌하는 등 계급투쟁의 활동도 병행했음을 보여준다.
기능과 역할: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의 초기 조선혁명군 활동은 선민부(鮮民府) 등 일제 주구기관 및 친일파 처단, 국민부 의무금 징수 및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 반공활동 등에 집중되었다.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일본군과의 단독전투와 중국군과의 연합전투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29년 7월유하현(柳河縣) 추가보(鄒家堡) 전투와 1932년 1월양기하(梁基瑕)부대의 혈투 등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1932년 3월에서 7월에 걸친 흥경현(興京縣) 영릉가(永陵街)전투는 정규전을 벌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대승첩이었다. 당시 총사령 양세봉 병력 1만여 명은 중국의용군총사령 이춘윤(李春閏)의 병력 2만여 명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본·만주연합군에 크게 승리했다. 3월 초전에서 일본군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5월과 7월에는 공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일본의 대부대와 영릉가에서 접전하였는데, 당시 일본군에선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조선혁명군은 만주지방에서 독자적 조직을 유지하며 활약한 최후의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이었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10여 년간 고생하며 치열하게 일제와 항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조선혁명군의 투쟁은 1910∼1930년대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결산이었다. 또한 한중 연합작전을 통해 적지 않은 일·만군을 살상하고 만주 및 식민지 한국의 통치를 교란함으로써 강대한 일본 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의 활동반경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크게 증강된 일본군의 대부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무장독립투쟁상에서 의의가 크다 |
동북항일연군:1935년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 개설-1935년 제7차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에 따라 설립된 만주지역 항일무장운동 단체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정권 수립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를 강화하였고, 북한 국가 설립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의의와 평가-동북항일연군 제1로군과 제2로군에는 한인대원이 많았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중국인과 한국인의 항일연합전선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해방까지 군대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도 중국 측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 참여한 다수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는 강화되었고, 또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최현, 최용건, 김책 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이들은 1945년 해방 후 당과 군의 요직을 차지하며 북한 정권 창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
10) 중일전쟁 뒤 전시체제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일반 남성에게 국민복 입도록 하였다
② 여성들의 복장은 통제하지 않았다
③ 학교을 병영화 하고 군사 교육을 강화 하였다.
④ 여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체육교육을 하였다.
제14장 해방과 분단
1.해방과 38선 분할 그리고 좌우익 대립의 격화
1)1945년 해방전후의 정세에 대해 장못된 설명은?
①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② 한국은 일본 패망 즉시 독립국가 수립을 보장 받았다
③ 미국은 한반도에 4대강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④ 한국은 배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되었다
2)1945년 8월15일 해방직후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한국인들이 조직했던 기구는
① 건국준비위원회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
③ 미소공동위원회 ④ 남조선 과도정부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그해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건준은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중앙조직 간부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여운형·조동호·최근우 등의 조선건국동맹 계열, 안재홍·이규갑·권태석 등의 신간회(新幹會) 계열, 정백 등의 장안파(長安派) 조선공산당 계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직 개편에 따라 점차적으로 조선건국동맹 계열과 장안파 조선공산당 계열이 강화되었고, 신간회 계열이 이탈하여 좌파가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들이 중앙조직의 지시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치안을 관장했다. 1945년 8월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건준이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대부분의 건준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계속했다. 건준은 8월 25일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선언에서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국가건설의 준비기관과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집결체로서 결성되었음을 밝혔다.
강령은 ①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가지를 채택했다. 중앙 건준의 간부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문제나 토지문제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시킨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중앙 건준 간부들의 구성 및 이념적 지향을 살펴볼 때 건준에는 자유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공존했고, 조직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중도세력과 좌파를 망라하고 있었다.
또한 건준은 지부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준은 국민들의 지지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반민주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적인 정권예비기관이었다. 건준은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10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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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다 결국 좌초되었고, 한반도는 남북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배경 ▶1943년 제1차 카이로 회담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다.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3개 연합국이 참여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리다. ▶1946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으로 반공을 선포하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기본 구성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얄타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F. D. Roosevelt)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20~30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소련 수상 스탈린(I. V. Stalin)도 신탁통치라는 기본 구상에 동의했다. 앞서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제안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유보하고 ‘적당한 절차를 통해’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안이 결정된 바 있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구체적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확정되었다.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셋째,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정부가 공동으로 조선을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3상회의에서 미국은 국제연합(유엔)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제안했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두 가지 방안을 절충한 것이 4개 항의 결의서였다.
이 결의안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 방안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경과에 따라 신탁통치를 완화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장치로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3상회의의 결과가 처음 국내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수립 방안보다 신탁통치안이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각 정파와 국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우익 진영은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의 적화야욕에 따라 제2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이라고 선전하며 곧바로 신탁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찬탁론자는 곧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귀국한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 등은 1946년 2월 17일 신탁통치 반대 비상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반탁 운동을 통해 우익 세력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해 나갔다. 좌익은 초기에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임시정부 수립안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결국 3상회의의 결정안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은 우익 세력의 국민회의에 맞서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발족시켰다. 이후 좌익과 우익은 각각 민전과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찬탁과 반탁으로 격렬히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한국 내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가 참여한 가운데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인 정당과 사회단체를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팽팽히 맞서면서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협의 대상으로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 자명했고,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소련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등이 참석했다.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안에 반대한 정당,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에 반박했다. 결국 양국은 4월 18일 ‘3상회의 결의에 지지를 표명하는 서명을 하면, 반탁 행위를 했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으로 삼겠다’라는 취지의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면서 서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우익의 한국독립당은 협의 참가는 곧 신탁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협의에 참가할 수 없다며 반발했고, 한민당도 협의는 가능하지만 신탁은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4월 27일 특별성명을 통해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우익 진영은 공동성명 5호를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련이 “하지의 성명은 공동성명 5호의 합의 내용에 벗어난다.”라며 반박했다. 특히 소련은 미국이 남한 쪽의 협의 대상으로 제시한 20개 정당, 사회단체 가운데 민전 소속 정당, 단체는 세 개뿐으로 나머지는 3상회의의 결정을 반대하는 우익 세력이라는 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조선부녀총동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의 단체들이 제외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 미국은 소련이 제시한 북한 쪽 협의 대상에는 우익 단체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은 파괴적 폭력 단체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또 38도선 철폐 문제와 남북 간 경제적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대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립 목적에 벗어나는 문제라며 거부했다. 미소 양국의 이견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5월 6일 휴회 상태에서 결렬되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우익에서는 반공, 반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승만은 6월 3일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졌으니,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라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반면 좌익의 민전에서는 6월 10일 6·10만세운동 기념 시민대회 등을 통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이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촉구했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단독 정부 수립 주장까지 나오자 여운형과 김규식은 7월 하순 남북 분단을 막고 중도적인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좌우익 인사 다섯 명씩으로 좌우 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어 10월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좌우합작의 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 처벌조례 성안 등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미 군정이 12월 좌우 합작위원회와 한민당 인사를 중심으로 하고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자,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파는 남한만의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며 좌우 합작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미 군정은 지역 유지들의 간접 선거를 통해 우파 중심의 입법의원을 구성한 데 이어 1947년 2월에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고, 5월 17일에는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앞서 입법 의원들은 1월 신탁통치 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협의 대상의 좌우 비율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련은 또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소련은 남한 측 등록단체 425개를 118개로 줄이고, 반탁운동을 벌이는 정당, 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반탁운동은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며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 회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소련의 반대 속에 한반도 문제를 미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우세한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결국 10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최종 결렬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약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그리고 상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위에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정부 체제였으나, 운영 기술이 미숙하여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 수합을 위해 국민대표회(1923)가 소집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 등을 추진하였지만, 침체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으로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상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江, 1939)·충칭(重慶, 1940) 등지를 차례로 이동하며 기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 있는 동안(1940∼1945)에는 상해시대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성과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와 같이 한때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27년 동안 전개한 활동과 그간의 세계사를 고려하면 영고성쇠의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017 |
남조선 과도정부요약:1946년 미군정청이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잠정적으로 설치하였던 집행부. 1946년 3월, 「군정법령」제64호로써 군정청 기구의 국(局)을 부(部)로 개칭하면서 군정청 기구가 대체로 확립되고, 이를 전후하여 각 부처장에는 한국인이 채용되어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하였다. 그 해 9월 미군정 당국은 부장회의 석상에서 군정장관 러치(Lerche, A. L.)의 특별발표를 통해, 군정하의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 발표에서 미국인은 고문으로 남아 부결권만 행사하며, 종래 한미 양국어로 사용하던 문서는 한국어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조처가 단행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1947년 2월 한국인 부처장을 통괄하는 민정장관에 안재홍(安在鴻)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군정 2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1946년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을 의장으로 하는 관선 45명, 민선 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여, 당면한 제반 법령을 한국인들의 손으로 제정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사법부 대법원장에 김용무(金用茂)와 아울러 미군정이 이른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갖춘 통치기관이 성립된 셈이었다.
6월 「군정법령」제141호에 의한 38선 이남 지역의 입법·행정·사법 각 부문의 재조선미군정청한국인기관(在朝鮮美軍政廳韓國人機關)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부르기로 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미군정이 점차로 이양되는 절차를 밟았으나, 실권은 거부권을 가진 미국인 고문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과도정부는 기구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현실적인 기구개혁안을 작성하고 이를 실시하였다.
한편 7월에는 당시 미국에 있던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서재필(徐載弼)을 한미인최고의정관(韓美人最高議政官)으로 맞이하여 군정의 고문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군정의 조선인화에 더욱 진전을 보게 되었다.
남조선과도정부의 기구로는 종래의 13국 6처를 13부 6처로 하는 동시에, 인사위원회와 중앙경제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그 동안 군정장관도 경질되어 1946년 12월에는 소장 아놀드(Arnold, A. V.)의 뒤를 이어 소장 러치가, 1947년 10월에는 러치의 사망으로 소장 딘(Dean, W. F.)이 뒤를 이었다. 과도정부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자동 소멸되었다. |
3)해방초기 주요사건의 흐름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모스크바 3상회의 -제1차미소공동위원회 -4당캄파-좌우 합작운동
②모스크바 3상회의 -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좌우합작운동
③좌우합작운동-모스크바3상회의-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④좌우합작운동-4당캄파-모스크바3상회의-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모스크바 3상회의:요약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 |
4당캄파:1945년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①한국민주당, ②국민당, ③조선인민당,④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4당 캄파’에 반대했어요./결국 3상회의의 결정은 반탁운동 진영과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진영 간에 대립을 격화시켜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정치 세력 간의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4당 캄파가 조직되었으나 합의가 나온 다음날 임정의 일부 정치인이 이 회합에 참여하여 합의문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그 직후 한국민주당은 반탁의 입장을 견지할 것을 발표했다. 좌우 세력 간의 대립을 막고 좌우 통합을 통해 통일된 민주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
제1차미소공동위원회: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다 결국 좌초되었고, 한반도는 남북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
좌우합작운동:요약 1946년 김규식·안재홍 등 중도 우익 정치 세력과 여운형·백남운 등 중도 좌익 정치 세력이 손잡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활동. 19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무기 휴회로 들어가자 좌우익 단체의 반목이 극도에 달했다. 이에 민주 통일 전선의 구축을 목표로 6월 14일 미군정 정치고문 L. 버치 중위의 지원 하에 김규식·여운형을 각각 대표로 하여 좌우 합작 위원회가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좌파는 7월 27일 합작 5개 원칙을 발표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의 지지를 표명했고, 우파는 7월 29일 합작 8개 원칙을 발표하여 반탁 입장을 취했다. 좌익측의 빈번한 불참으로 결렬된 좌우 합작 위원회는 신탁 통치 문제와 토지 문제에 대한 좌우익 간의 심한 의견 대립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규식·안재홍 등 중도 우익 정치 세력과 여운형·백남운 등 중도 좌익 정치 세력이 손을 잡은 좌우 합작 운동은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좌·우익 양 세력의 반대와 미군정의 정략적 고려 때문에 실패했다. |
4)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치지도자를 맞게 제시한 것은
가: 김 구 나, 김규식 다. 여운형 다, 이승만 |
①가,나 ②나,다 ③ 다,라 ④ 라,가
5)19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많지 않은 것은?
① 5?10 총선거는 한국 역사상 처음 실시된 보통선거였다
② 5?10 총서거는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③ 5?10총선거로 결성된 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하였다
④ 5?1 총선거에서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6)다음 중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있었던 일은?
① 모스크바 3상회의 ②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③ 5.?10총선거 ④ 농지개혁
모스크바 3상회의:요약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 |
건국준비위원회조직: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
5.?10총선거: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 의원 총선거.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1947년 10월 이후 결렬되고, 이후 미국에 의해 한국 문제가 국제 연합(UN)에 상정되었다. UN에서 한국 문제는 미국의 총선거 실시 주장과 소련의 외국군 동시 철수 주장이 대립되었다. 결국 UN 감시하의 총선거가 결정되어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구성되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부터 임무에 착수했으나, 소련군이 북한 지역 입경을 거부하여 북한에서는 총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선거는 남북 협상파 및 중도파의 불참 속에서 1948년 5월 10일 강행되었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국민에게 주어졌으나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일제 때 판관·임관이었던 자들에게는 선거권 또는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선거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로 치러졌으며. 선거 결과 모두 198명이 당선되어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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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요약 한국의 농지개혁은 8·15해방을 계기로 실시되었으며, 일제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일반농지는 정부가 수립된 후에 분배되었다. 1948년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에 농지개혁 실시를 규정함으로써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공포되었고 1950년 3월 10일에는 이 법의 개정법이 공포되었으며, 3월 25일 농지개혁법 시행령, 4월 28일 시행규칙이 공포됨으로써 농지개혁은 본격적인 실시단계에 접어들었다.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와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했다. 농지개혁은 1968년 3월 13일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으로 일단락되었다 |
7)한국전쟁의 주요사건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 인천상륙작전-1?4후퇴 -정전협상
② 인천상륙작전-정전협상-1?4후퇴
③ 1?4후퇴-정잔협상 -인천상륙작전
④ 1?4후퇴-정전협상-인천상륙작전
8)정전협상 의제가운데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던것은?
①국경선 문제 ②정전 감시 문제
③포로 문제 ④평화협정 문제
9)한국 전쟁기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닌 것은?
①국회 프락치 사건
②한국 인도교 폭파사건
③국방방위군 사건
④부산정치 파동
국회 프락치 사건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검거되고 기소된 사건.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들이 기소된 이유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이 되지 않은 암호문서를 근거로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역사적 배경
결과-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제거됨으로써 국회의 대정부 견제기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1950년 9월까지였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공소시효가 1949년 8월 말까지로 대폭 단축시키는 개정안이 1949년 7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의의와 평가-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6월 6일에 발생한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습격사건과 6월 26일에 발생한 김구 암살사건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에서 제거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해방 직후부터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려는 흐름 역시 거의 끊기게 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헌법을 능가하게 되는 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6576 |
한국 인도교 폭파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漢江人道橋爆破事件)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민간인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개요-정부는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있던 둘 밖에 없던 다리였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4] 한강대교(인도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5]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책임 소재-한강 철교의 폭파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최창식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당시 지휘계통상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은 하우스만 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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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은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최초에 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육군 준장에 임명한 뒤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부사령관에는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대령으로 특별 임명된 뒤 보직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또한 야당 내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국당계 인사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입대 기피현상 증가 및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하게 된다. |
부산정치 파동-요약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이 공포되기까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1950년 5.3 총선거 결과 국회는 60%이상의 무소속의원들이 당선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직 연임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기반 확충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장택상은 발췌개헌을 추진하여 통과시켰다. 1952년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
10)한국전쟁의 결과와 영향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전쟁으로 일반국민들이 큰피해를 입었다
②남한의 반공주의체제가 강화 되었다
③정전협상 체결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④북한의 김일성이 궐력을 강화 하였다
제15장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을 위한 대장정
1)한국전쟁이후 1960년대까지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1950년대 미국원조는 한국경제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②한국 정부는 대충자금 용도 결정에 결정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③정정협정 이후 대충자금의 대부분은 군사비로 사용되었다.
④1961년 이후 무상원조가 유상 차관으로 바뀌었다.
2) 1960년대 경제개발 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계기는?
가,정전협정 나,사사오입개헌 다,한일협정 라,베트남 파병 |
① 가, 나 ②나,다
③ 다,라 ④라,가
정전협정: 6·25 전쟁에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정전 협상 결과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협정. 정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체결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 협정은 판문점에서 체결되었으며, 6·25 전쟁의 정지와 평화적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 행위와 모든 무장 행동을 완전히 정지시키기 위해 체결되었다.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고 중국에도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자, 무력 통일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국이 1950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는데, 애치슨 라인에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였다.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세를 역전하였지만, 중공군이 참전하여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중국군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여 정전 협상을 시작하였다. 정전 협정은 양측의 대립으로 1953년에 가서야 체결되었다. |
사사오입개헌: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1954년 제1공화국의 3대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사사오입이란 1954년 11월 27일에 국회개헌안의결정족수의 산정에 1인 이하의 수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해석하에 개헌의 가결을 선포하였다. |
한일협정: 1965년 6월 22일 조인되고 12월 18일 발효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협정. 한·일 협정은 '청구권·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을 말한다. 한·일 협정은 전후 미국에 의해 구상된 동북아시아 평화 체제의 구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기본 조약과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그러나 한·일 협정은 일제 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해 일본 측의 공식 사과가 한마디도 없었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가 35년간 강탈해간 한국의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어업 문제에서는 평화선이 철폐되고 일본 측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 수역이 설정되었으며, 기선저인망 어구의 사용이 허용되어 어자원의 남획이 방치되었다. |
베트남 파병: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주한 미군의 베트남 파병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총 4만 7,872명(년 합계 34만 6천여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여 회의 군사 활동을 수행하였다. 미국은 한국군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 일부 군수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하였고,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한국 상품의 수출을 지원하였다.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발생한 전쟁 특수는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지만, 수많은 전투 병력이 파병되어 이중 5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고엽제 피해자 문제, 베트남 한국인 2세 문제, 민간인 살상 문제 등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하였다. |
3)197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해 맞지 않은 것은?
①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②한미합동 경제위원회가 처음조직되었다.
③일부기업들이 재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④오일쇼크로 석유가격과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올라갔다
4)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한 사건은?
① 4?19혁명 ② 부마항쟁
③ 광주민주화 운동 ④ 6월항쟁
4?19혁명:1960년 4월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했다. 4월 혁명, 4·19의거라고도 한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를 정권 비호세력인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자, 4월 19일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당일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000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했고, 허정의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
부마항쟁:[정의]: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개된 시민과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역사적 배경]:1970년대 후반 유신 체제는 억압의 강도를 더해가고 경제적 위기와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지배층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는 지역 경제의 침체로 지역민의 생활이 위기로 치닫는 한편 민주화 운동의 발전으로 지역 내 민주 세력의 성장과 결속이 강화되고 있었다.
[경과]: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 교내 시위에서 발화되었다. 10월 15일의 부산대학교에서는 신재식과 이진걸을 중심으로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시위는 이튿날 다시 시도되었고, 이는 부마 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10월 16일 오전 10시경 경제학과 정광민이 앞장 선 시위는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
광주민주화운동:요약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 |
6월항쟁: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4·13 호헌 조치[1]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5)박정희정부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것은?
① 8?3조치 ② 한일협정
③베트남 파병 ④부산정치파동
8?3조치:( 8·3긴급금융조치 八三緊急金融措置) 1972년 8월 3일 공포된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 제15호로 실시된 조치.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기업은 자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고 채권자에게 이를 분할상환 또는 출자로 전환시키고, 둘째, 금융기관은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을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하며, 셋째, 정부는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 및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에 20억 원을 출연하며, 넷째, 정부는 산업합리화자금을 기업에 장기저리로 대여하여 세제상의 혜택을 주는 등 총 7개의 긴급명령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대통령의 내각지시사항으로서 금융기관의 금리인하, 환율 안정, 공공요금 인상 억제, 물가상승 억제, 예산규모 증가 억제 등이 제시되었다.
요약하면 이 조치는 기업에 방대한 규모의 금융 및 조세상의 특혜를 베풂과 동시에 강력한 물가억제책을 천명한 것이다. 그 결과 사채신고액(채권자 신고액이 3,555억 2,000만 원, 채무기업 신고액 3,450억 6,000만 원) 중 3,203억 원이 동결되었고, 금융기관의 단기고리대출금 2,000억 원이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되었으며, 500억 원의 산업합리화자금이 풀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제면에서도 감가상각률의 할증률의 인상 및 국내자원이용 기업의 법인세·소득세의 투자공제율 인상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또한 물가안정시책 차원에서 지시사항 외에 8월 5일 모든 주요상품가격의 동결조치가 발표되었다 |
한일협정: 1965년 6월 22일 조인되고 12월 18일 발효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협정. |
베트남 파병: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주한 미군의 베트남 파병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이루어졌다 |
부산정치파동:요약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이 공포되기까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1950년 5.3 총선거 결과 국회는 60%이상의 무소속의원들이 당선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직 연임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기반 확충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장택상은 발췌개헌을 추진하여 통과시켰다. 1952년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0883a |
6)1970년대 초반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완화되고 있었다.
② 미국정부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④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직선제가 시행되었다.
데탕트정책:미국과 소련의 긴장 완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1972년 5월 미국 닉슨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모스크바 회담 결과 [미·소 관 계의 기본] [SALT] [ABM조약]이 조인되었고, 1973년 6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방미시 핵전쟁 방지협정이 체결된 이래 두 나라는데탕트 정책을 추진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때 미·소 [위기 관리 외교]는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 후 소련의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무기 원조 및 쿠바군 파견, 해군력 증강 등으로 미국은 소련이 데탕트 정책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 뒤, 1979년의 카터·브레 즈네프 회담 결과 [SALTⅡ]가 조인되었으나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데탕트는 붕괴되었다. 1985년 제네바, 1986년 레이캬 비크, 1987년 워싱턴, 1988년 모스크바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간에 미·소 수뇌 회담이 개최됨으로써 협조 노선이 정착되어 새로운 데탕트 구축을 형성했다. |
7)1987년 6월항쟁으로 결과로 이루어진것일은?
① 삼선개헌 ②내각책임제 개헌
③ 대통령직선제개헌 ④ 유신선포
삼선개헌: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문호를 열어 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삼선 문호를 열어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이 3선개헌으로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의 문호가 열렸으며, 유신체제로까지 연장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사진은 1969년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 |
내각책임제 개헌: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발췌 개헌안 통과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 개정.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
대통령직선제개헌 : 6·29 선언(六二九宣言)은 1987년 6월 항쟁에 굴복해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며 여당의 실질적인 대선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6월 29일 발표해 일반적으로 6.29 선언으로 부른다. 배경과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본다. 추가자료-http://oldconan.tistory.com/36386 |
유신선포:(유신 체제)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겨우 이긴 데다 5월 총선에서 야당의 약진(신민당 89석), 밖으로의 긴장 완화의 분위기, 그리고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공포하고,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 을 발동하였고, 이는 유신 체제로 이어졌다. |
8) 1991년 남북한이 합의한 것으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에
접근한것은
① 7?4 남북공동성명 ② 남북기본합의서
③ 6?15공동선언 ④ 유신선포
7?4 남북공동성명: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동시에 발표했던 성명이다. 중상비방 및 무장도발 금지,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의 합의사항도 포함되었다. 공동 성명의 발표 배경은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와 국내의 정권 안정 및 명분 추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 성명은 통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그러나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며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절대시했던 통일 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남북기본합의서:1990년9월 4일부터 5차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1991년 12월 13일 체결한 합의서. 1990년대 초 북한은 경제적인 파탄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북한의 국제연합(UN) 동시 가입과 남북 고위급 회담을 수락했다.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남북은 1991년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서 1992년 2월 19일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는 위의 기본 합의서 외에 정치, 군사 및 교류, 협력의 분과 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합의서는 서문과 남북 화해, 남북 불가침, 남북 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등의 4장 25조로 구성되었다. 합의서는 분단 46년만에 남북한 정부 당국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 합의로 통일에 대비하는 획기적인 이정표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6?15공동선언: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공동 선언.
2000년 6월 15일 공식 발표되었다.?6·15 남북 공동 성명은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남북 정상이 머리를 맞대어 이끌어 낸 합의라는 점에서 이 성명이 갖는 정치적 무게는 종전의 남북 '당국' 간 합의들의 그것을 크게 뛰어넘는다. 내용적 측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측이 그 동안 사실상 기피해 오던 자주적 통일 원칙을 재천명한 것과 남북 정상이 상대방의 통일 방안인 연방제안과 2체제 2정부의 남북 연합제안의 공통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이를 수용할 뜻을 분명히 한 데 있다. 두 정상이 8·15 남북 가족·친척 방문단 교환과 남측의 비전향 장기수 북송을 비롯해 경제·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남북 교류 활성화에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6·15 남북 공동 성명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군비 축소 등의 군사적 대립 완화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
유신선포:(유신 체제)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겨우 이긴 데다 5월 총선에서 야당의 약진(신민당 89석), 밖으로의 긴장 완화의 분위기, 그리고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공포하고,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 을 발동하였고, 이는 유신 체제로 이어졌다. |
9)198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3저 현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였다.
② 북방적책을 통해 공산권으로 시장을 확대하였다
③ 사회 민주화는 기업들의 창의력을 높였다
④ 금융위기를 맞아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였다.
IMF에 구제 금융신청-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1997년 12월 3일 ~ 2001년 8월 23일)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1997년 12월 3일에 이루어졌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다.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은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다. 추가자료클릭- |
10)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① 청년실업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② 한국인의 편균 수명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③ 외국인 증가로 한국사회의 다원화가 진행되었다.
④ “한류”가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