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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나 박물관, 오름 위주로 제주를 느끼며 지내던 작년 4월, 운이 좋게 우연히 방문한 ‘제주 삼성혈’에서 춘·추 대제가 열리고 있었다. 한참 제를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울창하게 뻗은 녹나무와 팽나무, 벚나무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며 살랑이는 바람에 마음이 평안해짐을 얻은 평화로운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탐방일 아침, 눈을 떠 확인한 창밖은 따듯한 햇살 덕분에 바람이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날씨 또한 이번 탐방을 반겨주는 듯하여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제주 삼성혈(濟州 三姓穴)’은 고려사에는 모흥혈(毛興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탐라국의 개국신화에서는 시조(始祖)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신라 내물왕 18년에 良→梁 개성), 부을나(夫乙那) 삼신인(三神人)이 지중용출(地中湧出: 대지로부터 솟아오름)하여 탄생했다는 3개의 혈(穴)을 말한다. 이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이다.
제주 삼성혈 초입에 기둥 높이 300cm, 직경 30cm의 거대한 홍살문(혹은 홍문)과 그 옆을 지키는 수문장 돌 하르방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본래 홍살문은 궁전, 관아, 능, 묘, 원 등의 정면에 세우는 문으로 조선시대 목사 이수동에 의해 설치되었고, 기둥을 붉게 칠하고 상부에 나무살을 화살 모양으로 설치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악운을 화살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을 신성하게 여겼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주 삼성혈 입구 건시문(乾始問)을 지나 들어선 내부는 울창하게 뻗은 고목이 돌담 안으로 둘러 숲길을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삼성혈 비석군이 보인다. 삼성사 건립과 보존 및 운영에 공이 많은 제주목사 7명의 기념비를 비롯한 삼성후손의 기념비 7기, 삼성전 중건에 관한 비 2기가 세워져 있다. 교수님께서, 본디 비석은 공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선조의 공을 높이고 예를 갖추고자 후손이 세운 비석의 크기는 같거나 작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이곳은 되려 후손의 비석이 점점 커지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예로부터 제주민의 삶 속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하였다.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무속신앙이 생활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제주 삼성혈 주변에 제주 당 중에서도 가장 크고 대표적인 광양당은 “매년 봄과 가을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고기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신당이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꾸준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중종 21년(1526) 제주목사 이수동은 이곳에 표단과 홍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고 제단을 유교식 제를 지낼 수 있는 터를 마련하여 성역화하였고, 그 후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 이형상의 무불타파시책(巫佛打破施策)에 의하여 광양당은 사라지고 말았다.
비석 앞에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고양부’를 부르는 순서, 비석에 성(姓)이 아닌 성(聖)으로 새겨진 연유? 등이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는 억측(고을나가 벽랑국 첫째 공주와 결혼하여 먼저 부른다)을 믿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던 것이 너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세종이 학자에게 지시하여 기록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종에 와서야 완성되었고 그 고서에는 ‘양고부’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또한 정조 때 실제 부르는 순서로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목사 김명준은 정조에게 “고 씨의 세력이 가장 강하니 고양부로 할 것을 건의 드렸다.” 기록이 남아있고, 세 성씨 중 고 씨의 수가 가장 크기에 다수결로 정한다고 한들 결국 ‘고양부’일 것이라는 수치상의 판단도 내려본다. 삼을나 세 성인이 시차를 두고 용출 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크게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서열 매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질이 여기 반영된 것 같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숲길을 따라 전시관으로 향하였다. 전시관은 개관 당시의 시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주 조금은 조악한 ‘제주 삼성혈’ 신화를 설명하는 모형과 사진, 고문서, 제기 그리고 ‘홍화각’과 ‘홍화각기’를 볼 수 있다. 홍화각은 제주목사의 집무실 명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지 서예가인 한성부판윤 고득종(高得宗)이 직접 서사한 것이다. 본래 제주 목관아에 있던 것으로 이후 관아에 불이나 불타 없어질 위기를 맞았지만, 현판을 등에 지고 탈출한 이에 의해 보존되어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홍화각기’는 제주 목관아를 지을 때 만든 연유를 소상히 적어 남긴 기록이다.
방문객이라면 전시관은 빼놓지 않고 둘러보는 곳인데 관리가 미흡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모형에 아쉬움이 남았다. 영상실에서는 삼신인의 용출과 탐라국으로 발전하여 고려말에 이르기까지의 신화적, 역사적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상영하여 남녀노소 모두 이해하기 쉽게 배려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 삼성인(三神人)이 지중용출한 삼성혈(三姓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신비함에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나가 목함을 열어보니 단아한 자태의 공주 세 사람과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길 “나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로,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서쪽 바라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성인이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신에게 고하여 세공주를 보내어 혼인에 이르게 하니 예식을 갖추어 국업을 성취하시라.”하였다. 이에 삼성인과 세공주는 혼인지에서 목욕재계를 마치고 혼인하여 신방굴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삼신인은 각자 정착할 생활 터전을 정하고자 한라산 중턱 사시장올악(오름)에 올라 화살을 쏘아 올려 제주를 삼분하였고 세공주가 가져온 오곡 종자를 심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촌락을 형성하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세웠다. **
주로 북방의 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적 신이나 1인의 강력한 통치가 주를 이루는데, 남방의 경우 통치자가 여럿으로 한 명에게 권력이 몰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니, 제주사람들은 척박하고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서 삶을 일구고 살아가기 위해 다툼과 독식이 아닌 화합과 공존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전시관을 나오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6호인 삼사석비를 마주한다. 영조 11년(1735년) 제주목사 김정이 탐라국의 시조인 고양부 삼신인이 벽랑국의 세공주를 배필로 맞아 각자 살 땅을 정하려고 화살을 쏘았다는 전설을 적은 비석으로, 제주목사 김정은 돌을 추슬러 모으고,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제주도에 현재 전하는 비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비석의 상태는 두 동강이 났던 것을 현재 접합하였고 글자는 모(毛)자가 마멸되어 있으나 나머지 글자는 완전한 상태이며, 외관상 복원 상태가 양호하다. 비는 김정의 시명(詩銘)을 그대로 새겨 놓고 있으며, 건립 시기와 건립자, 건립목적 등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에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제주 삼성혈 내부의 주 건조물로 삼성 시조(始祖)의 전패를 모신 삼성전(三聖殿)과 분향을 하는 삼성문(三聖門), 조선 순조 27년(1827) 건립하여 제향에 관한 일을 맡아 돌보는 전사청(典祀廳), 조선 헌종 15년(1849) 건립 후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숭보당(崇報堂)이 있다. 삼성에 대한 제사는 조선 중종 21년(1526) 제주목사 이수동이 제단을 세워 춘·추대제를 지내게 하면서부터다. 춘·추대제는 4월 10일과 10월 10일에 3 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 건시대제는 제주도민제로 거행한다.
마지막 장소인 신비한 성혈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수없이 내려도 쌀이거나 고이지 않는다. 이 중 하나는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인근 바다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셨다. 삼성혈 주변에 면면히 이어온 수백 년 된 고목들도 일제히 혈을 향하여 존경과 예를 표하며 경배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양팔 벌려 감싸 안은 형세이다.
교수님은 아버님께 전해 들은 탐라건국의 다른 설화도 이야기해 주셨다.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은 통일 이후 폭정을 일삼았다. 폭정을 견디지 못한 서불은 불로초를 찾겠다며 동남동녀 오백을 데리고 남쪽으로 출발하였다. 거센 파도와 풍랑을 만나 뱃멀미로 오래 고생하던 이들은 제주도에 정박하였고, 섬의 아름다움에 반해 새로운 대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상향의 국가를 건설하기에 땅이 너무 좁아 이내 포기하고 동쪽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 때 풍랑에 갖은 고생으로 괴로웠던 남자 셋이 배에 타지 않았다. 인원수를 확인하고 남자 신하 셋이 차지 않음을 알아챈 서불은 되려 그들도 살아야 하므로 여자 셋과 오곡, 우마를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역사와 설화, 구전과 제주어에 대한 이야기로 흠뻑 빠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리를 이동하여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한 삼사석에 도착하였다. 하루에 몇 번씩 이 길을 지나갔지만, 이 곳에 기념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너무 귀중하여 사람들이 왕래하지 못하게 돌담을 쌓아 보존하는 것인가..생활 터전을 정하기 위해 활을 쏘았고 그 화살이 꽂힌 흔적을 지닌 건국신화 전설이 깃든 삼사석이 쓸쓸히 팽나무와 지내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삼사석은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지름 55cm 정도의 현무암 2개로 이를 보호하는 석실에 모셔져 있다. 그 주변 현무암 담장이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삼사석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치 "내가 삼사석이다!"라고 말하는 느낌마저 드는 고양부삼성사재단에서 1998년 세운 '삼사석지(三射石址)' 표석이 있다.
"문화재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가치를 이해하고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후손의 역할이다. 더욱이 문화탐방해설에 관심을 갖고있는 우리는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전해야 하는 의무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재는 사람의 '손결'과 '숨결'이 함께 하여야 한다. 우리 일상에서 더 가깝고 친숙하게 문화재는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더물어 문화재를 소중히 대하는 시민의 의식이 필요하다. 문화재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시민들의 소양과 의식은 올라가고 일상에 녹아드는 문화재 향유와 보전이 가능하다 "는 교수님의 마지막 설명으로 이번 탐방은 끝이났다.
제주 삼성혈과 삼사석을 둘러보며 "과거는 현재이고, 미래는 현재의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로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더 깊게 다가왔다. 괜스레 비석을 한 번 만져보며 먼 과거 우리 조상의 손결과 숨결을 느끼고자 하였다. 회차를 거듭하며 아는만큼 보이고, 배우는 만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교수님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삼성혈 리플렛
문화재청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삼사석비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검색 (heritage.go.kr)
국립제주박물관 블로그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 무속신앙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네이버 검색 홍살문 : 네이버 통합검색 (naver.com)
네이버 블로그 제주도 사랑, 그리고 환경 사랑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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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하세요. 많은 자료를 찾으시고, 정리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잘 정리하셨네요. 역시 우리 회장님 !
아는만큼 보이는데 안보이는 부분까지 알게 만든 것 같네요. ^ ^
소소한 얘기부터
무게감 있는 얘기까지
재미있게 잘 쓰셨어요~
한마디 뿐만 아니라 한 시선 조차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와 열정의 눈빛이
참 곱습니다~^^
멋진후기 잘 봤습니다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나중에 또 찾아보며 익히겠습니다^^
다들 어찌 그렇게 잘 쓰는지요 잘 들었던 것 되새기고 있어요 감사해요
세세한 부분까지 정리해 주셔서 놓쳤던 부분까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마치 한편의 논문 형식을 보는듯 하네요!! 삼성혈에 대한 얕고 깊은 이해를 얻게되는 멋진 글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탐라는 삼성濟州을 남겼지요. 고목이 울창한 고즈넉한 유적지는 언제든 찾아가면 고요한 품에 안겨 쉬기 좋은 곳이었어요. 요즘은 조금 아니 많이 벅적이더군요. 삼을나는 다툼없이 지냈다는데 삼성을 부르는 순서로 오늘날까지도 갑론을박하고 비석은 점점 커지고, 내심 동남동녀 설화로 기울던 재미난 시간. 모처럼 요목조목 듣고 따져 본 그날의 후기가 꽃비를 맞는 것처럼 읽혀 즐겁습니다. '◡'✿
전당합각제헌누정, 만세(9,999세)까지 모두 올리고 싶었는데 내용이 길어져 다 담지 못하였습니다🥲 유익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