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식탁에 쓰일 좋은 그릇을 구워내는 가마 | ||||||||||||||||||
백우영의 몽당연필(5) P가 전해준 조선학교 이야기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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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다음 글이 기다려졌습니다. 마치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들으며 호기심어린 눈을 깜빡이던 어린아이처럼 저는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조선학교와 우리 동포들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동포 1세들의 강인한 정신과 혼이 살아있는 그곳에서, 2,3세들의 열정이 응집되어 이어져온 그곳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는지, 그 아이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래서 그 아이들의 눈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어떤 희망을 읽을 수 있는지, 그러한 궁금함을 안고 그의 글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민족의 희망.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곳에서 아이들은 남한, 북한, 일본을 아우를 수 있는 <건늠다리(징검다리)>, 진정한 피스메이커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낼 평화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공허함이 되지 않도록 이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하지 않을까요. P가 제게 아니 우리에게 보내온 마지막 글을 나눕니다.
어떠한 학생들이 자라는가 이제는 조선학교의 주인공들인 학생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학생들은 학교를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열심히 일하시는 동포들을 직접 보면서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학교가 좋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싹터요. 그러나 아무리 조선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각 가정에서는 평상시 일본 말로
생활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초급부 1학년 학생들은 처음 조선학교에 들어올 때 우리말을 거의 못합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아, 야, 어, 여’하며 우리말을 배우지요. 2학기가 되면 학교에서 초보적인 회화를 우리말로 하게 됩니다. 등교할 때 부모님께
‘다녀오겠어요.’하고 인사하고 집에 와서는 ‘다녀왔어요.’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하지요. 조선학교에는 <우리말 운동>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우리말 운동>을 해야 하니 우습지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말을 지켜나가겠다는 그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말 운동>이 없는 조선학교는 이미 조선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징표는 언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지도합니다. 그래서 수업은 영어와 일본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말로 해요. 본국 사람들에게는 일본말이 섞인 서투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말을 배우고 쓰는 12년간의 토대는 앞으로 사회에 나가 고향 사람들과 만나더라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춘다고 우리는 생각해요. 이제는 1세들이 거의 세상을 떠나시고 그 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지금은 2세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거든요. 9월이면 ‘경로의 날’이라고 불리는 기념일이 있는데 이날에 1세 2세 어르신들을 학교에 초청하여 노래도 불러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리기도 해요. 이 때 초급부 어린이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를 하나 소개할게요.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 통학길이 멀다고 어머니는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는 조선사람 우리 학교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 찬바람이 분다고 모두가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목한 우리 교실 우리 동무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통학길이 멀어도 찬바람이 불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동무(한국에서는 친구라고 한다지요.)들과 선생님들이 있는 우리 학교에 가는 어린 아이들의 씩씩한 모습을 노래한 곡이랍니다. 어르신들은 초급부 어린 아이들이 열심히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하시며 매우 기뻐하신답니다. 우리 학생들은 공부에서 뒤쳐진 동무가 있으면 서로 돕고 이끌면서 도와줍니다. 시험성적은 개인적인 점수를 가지고 경쟁하기도 하지만 학급의 평균점수를 가지고 겨루는 의식이 더 강합니다. 그러니까 시험기간이면 동무들끼리 여러 명 모여서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동무가 있으면 옆에 앉아있는 동무가 깨워주기도 하지요. 조선학교는 ‘지, 덕, 체’를 겸비한 인재를 키우려고 합니다. 넓은 지식과 건전한 도덕 품성, 그리고 건강한 체력을 갖추어야 사람이 똑바로 자란다는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공부도 열심히 시키고 도덕 품성에 대하여서도 지도를 하지요. 더불어 모든 학생들이 소조활동(클럽활동)에 참여할 것을 방침으로 하고 있어요. 공부나 운동 한쪽에 치우침 없이 모든 일에 100%이상으로 열심히 달라붙는 학생들을 키우고자 해요. 우리 학교는 지, 덕, 체 하나하나가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강한 사람’으로 키우는데 필요한, 서로 자극을 주는 요소로 봐요.
고급부 학생들도 100% 소조에 속하게 됩니다. 여러 종류가 있으나 크게 나누면 운동소조와 예술소조로 나누어집니다. 축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저는 축구 지도를 합니다. 축구부나 성악부, 무용부들은 아침에도 연습을 해요. 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하는데 여학생들은 식모님들의 일손을 돕기 위하여 설거지를 한답니다. 6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교실이나 각 시설을 청소하고 학급 끝모임을 마치면 일제히 소조활동 시간에 들어가요. 소조를 끝내면 경제적으로 곤란한 가정의 학생들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학생도 있습니다. 일본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소조 후에 또 학원을 다니기도 하구요. 모두들 제각기 자기 사정이 있으나 ‘소조’라는 집단의 활동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소조를 끝내고 자기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지요. 학원으로 나간 학생들의 저녁식사는 다른 동무가 식당에서 쟁반에 담아 따로 남겨 놓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은 주로 동포가 경영하는 불고기점에서 일을 합니다. 동포들은 우리 학생들을 따뜻이 맞아주면서도 학교교실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회교육’을 가르쳐줍니다.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음식은 어떻게 날라야 하는지 등등. 참으로 고마운 존재지요. 학생들은 여기서도 동포애를 느낀답니다. 졸업 후의 진로 문제를 놓고서 많은 고민을 하는 것도 고급부 시기의 특징입니다. 학생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한국의 청년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자기의 뚜렷한 꿈을 가지는 학생들은 그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은 당장 취직을 하기도 하고. 기숙사에서는 부모대신 교원들이 이러한 학생들의 고민거리를 들어줍니다. 사감교원들은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방과 후에는 소조지도를 하며 밤에는 부모가 되고 친형제가 됩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0년부터 <고교무상화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정치문제를 떠나 일본국내의 모든 고등학교나 고등학교에 준한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는 것이 원래 이 제도의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조선학교만 적용대상에서 배제되고 있어요. 일본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듯이 이것은 정치나 외교의 문제를 넘어서는 인권의 문제인거죠. 학생들은 가두에 나가 이 부당함을 알리는 홍보물을 배포하기도 하고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어요. 도쿄에서 진행되는 집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지요. 어느 날 우리 학생이 가두에서 선전활동을 하고 있을 때 한 일본 고등학교학생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정말 수고가 많아요. 나는 조고생들을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탕을 가득 넣은 봉지를 우리 학생에게 전해주더래요. 그 광경을 보던 우리 학생들은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몰라요. ‘역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요. 지난 2011년 ‘동일본대진재’ 때에도 자신의 점방이 다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위해 음식을 챙겨서 먼저 학교에 찾아와 주신 동포들이 계셨어요. 남과 북의 동포들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조선학교와 함께한다!”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힘과 용기가 되었는지! ‘동일본대진재’에 의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대지는 흔들렸지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키웠다고나 할까... 이렇게 보면 재일동포사회의 발전은 민족교육의 발전을 떼어놓고는 생각 할 수 없어요. 학교는 동포들에게 있어서 ‘집결거점’이고 ‘인재배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강조해야할 문제가 하나 있어요.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민족성은 결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가지고 그 누군가를 적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원, 학부모님들은 민족성을 심어주는 것과 함께 학생들이 일본과의 <건늠다리>가 되어주기를 바래요. 나아가서는 북과 남의 <건늠다리>가 되어주기를 바라고요. 우리 아이들은 우리말과 역사를 배우고, 일본말과 역사를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살아가며, 또한 영어까지 배우고 익혀 일본과 고향을 잇는, 나아가 세계를 잇는 귀중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재일동포들이 해방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는 증언자이기도 해요. 이는 일본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우리의 귀중한 재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조선반도. 그 자손들인 재일동포조차도 배제한다면 과연 일본은 누구랑 가까이 사귀자는 걸까요? 우리와 같은 존재에 대해서도 그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사이좋게 지내야만 진짜 “국제사회”로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간단치는 않겠지요. 그러나 민간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우리학생들은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는 자신의 글을 맺으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조선학교가 ‘잃은 것을 되찾는 과정에 생겼다가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되찾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는 동포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결코 사회 환경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일을 더 잘해야 되겠구나 하고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고 합니다. 다른 또 하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왔다는 것이지요.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서 세워진 조선학교. 세계에 유래가 없는 그리고 지금도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해외에 건너와 벌써 4세, 5세가 주역이 되는데 계속 자기의 교육체계를 갖추고 민족성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인미답의 이 길을 계속 걸을 것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그의 바람도 보내왔습니다. 조선학교는 아이들이 한국국적이든 일본국적이든 조선적이든 차별없이 가르치고 있으니 조선학교를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또한 지금은 정치적 긴장이 조성되어 남한과 재일동포들이 당당하게 교류를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앞으로도 함께 걸어가자고. 그리하여 남, 북 해외 모든 형제 학교 학생들이 교환유학도 하고, 그 학생들이 조선학교에 찾아와 함께 축구시합을 하는 그날을 꿈꾼다고. 제가 아는 P는 남, 북, 해외동포들이 골고루 한 팀이 되도록 하여 매우 유쾌한 축구경기를 진행할 것입니다. 전 후반 내내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웃음기 가시지 않는 얼굴로 운동장을 뛰어다니겠지요. 그 날 그 시합을 바라보는 많은 동포들은 어느 한 팀이 아닌 양 팀을 모두 응원해 줄 것이고, 그 응원의 함성 속에는 저와 같은 그저 평범한 이 땅의 아줌마 아저씨들도 제법 많이 눈에 띌 것입니다. 경기가 끝나면 승패를 떠나 다함께 서로를 토닥여주고 운동장에 둘러앉아 불고기를 구워 먹으며 다음은 서울에서 그 다음은 평양에서 그렇게 이어질 축구시합을 이야기하겠지요. 동포들이 말하는 ‘우리 학교’가 진정한 의미의 ‘우리 학교’가 되는 날이 바로 그날이 아닐까요? P의 글을 통해 제가 느낀 조선학교는 마치 좋은 그릇을 구워내는 가마와도 같았습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온 맘과 온 몸을 바쳐 그릇을 빚어내는 훌륭한 옹기장이와도 같은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70년을 이어 내려오며 우리의 빛깔과 우리의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분명 그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앞으로 이 세상의 ‘평화의 식탁’에서 귀하게 쓰일 그릇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귀한 이야기를 전해 준 P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P의 가족들과 이 땅에서 즐겁게 식사하며 ‘우리의 하나 됨’을 이야기할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백우영 ※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이 만들고 가꿔가고 있는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몽당연필”은 현재 서울시에 등록되어 있는 비영리 법인단체다. 일본 내 조선학교와 우리 동포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다양한 교류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배우 권해효가 그 대표를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