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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과 한(恨)의 정서
김동원 시인 · 평론가
시와 리듬
대저, 리듬은 천지와 함께 생겨났다.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은, 그 자체가 시의 무늬이자 악보이다. 광대한 우주 그 시간과 공간은 파동의 리듬이다. 해와 달은 허공 위에서 도는 신비로운 선율이다. 천지 만물은 음양의 리듬을 타고 오행으로 드러난다. 바람과 물은 무위의 은유이다. 매순간 모든 형상을 빌어 사물은 이미지로 재창조된다. 시는 말, 소리, 빛깔을 통해 생체리듬을 탄다.시는 상상력을 통한 성정(性情)의 발현이자 마음의 리듬이다. 리듬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상징이다. 하여, 삼라만상은 생로병사를 통해 저마다의 업(業)과 한(恨)을 푼다. 물소리도 천둥도 바람도 사람도,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풀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의 특성을 가슴 속 응어리짐을 풀어내는 가락, 즉 한풀이의 문화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푼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쓴다. ‘화풀이’, ‘분풀이’, ‘시름풀이’, ‘살풀이’, ‘원풀이(푸닥거리)’, ‘심심풀이’ 등 실로 다양하다.〈푼다〉는 것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깨끗이 지워 생의 근원으로 다시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상태, 즉, 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원귀(寃鬼)의 원(怨)을 풀어주는 것이 ‘한(恨) 풀이’다. 한국인은 생전이나 죽은 후에도 원한(怨恨)은 풀어야 하고, 또 풀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야만 원망의 상태에서 백지와 같은 순수한 생의 근원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령) 시 역시 인간 생사의 또 다른 한풀이의 가락이다. 의미와 마디로 이루어진 시는 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음보(音步)이다. 그 음의 걸음걸이에 있어 고대 중국에서의 상상은 실로 다채로웠다. 혹자(정재서)에 의하면, 도교에서는 신선이 허공을 걷는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환상적인 경지를 ‘보허(步虛)’라는 음악과 시로 표현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禹) 임금이 황하의 홍수를 다스릴 때 과로해서 비틀비틀 걸었다고 하여 ‘우보(禹步)’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인들은 달빛 속에 거니는 것을 마치 달 위를 걷는 것처럼 ‘보월(步月)’이라는 신비롭고 낭만적인 어휘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시의 특별하고도 환상적인 걸음걸이가 시의 리듬이다. 리듬은 시어의 맛과 행(lines)과 연(聯, la stanza)의 의미를 조화롭게 살려내기 위함에 있다. 하여 리듬은 성정(性情)의 발현이다. 리듬은 정서 ․ 의미와 함께 시의 근간을 이룬다. 리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서 율려(律呂) 의식과 함께 우리의 전통 사상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생명의 역동적 리듬은 수직의 시간과 수평의 공간 속에서 구조화된다. 시적 리듬은 정신적 개념이나 수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과 언어와의 순수한 교응이다. 동일한 형태의 행을 읽더라도 각 행에 따라 다른 의미와 리듬을 갖는 것은, 사람마다 감성적 운율의 리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의 형태적 행과는 다른 우리 영혼 속의 심리적 행을 만들어간다. 이런 시의 형식과 내용은 유기체의 리듬으로 되살아나 새로운 예술이 된다. 하여, 오규원은『현대시작법』에서 “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그것과 자유시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나 한시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 끝 ·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다. 그러나 “우리 언어는 음절 의식이 약해서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된다.” 창작을 할 때 운율 형성의 방법은 ‘의성어 ․ 의태어의 반복’,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의 반복’, ‘일정한 음절의 수를 반복’, ‘품사의 반복’, 종결형의 반복’ 등으로 크게 세분화 된다.즉, 운율은 행과 연의 최적의 배치를 통해 시어의 리듬을 음악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알고 보면 우주는 모두 리듬으로 연주 된다. 인간의 한(恨) 역시 물과 불의 형태로 신명의 가락을 푼다. 근 · 현대시는 표면에 뚜렷하게 규칙적으로 드러나는 정형시(외형률)와 일정한 규칙 없이 시어나 시구 속에 숨어 은근하게 느껴지는 자유시(내재율)로 율격을 만든다. 이 장에서는한국적 산문 율조를 가장 탁월하게 그렸다는 미당 서정주의「신부」, 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의 절묘인, 흘러내리고 (流), 한 바퀴 감아 돌고(曲), 힘을 주는 마디(節)를 지어서, 다시 풀어내는(解) 형식을 한의 정서로 흡수한 박재삼의「수정가」, 향토적 서정과 민요적 리듬으로 근대 서정시 백 년의 격조를 더한 박목월의「뻐꾹새」, 초야의 외롭고 쓸쓸한 조선 여인의 그늘과 고뇌를 눈물겹게 승화시킨 조지훈의「석문石門」, 향가의 고도로 정제된 표현과 기교를 흡수하여, 죽은 누이를 안타까이 부르는 송수권의「산문(山門)에 기대어」와 인간의 원형적 순수를 그린「여승(女僧)」을 중심으로 분석 감상해 보기로 한다.
순수한 비극-서정주의「신부」
서정주(1915~2000)는 한국 현대시 백년에서 자신만의 독창적 사유와 방법, 리듬과 이미지로, 전통과 모더니티로, 흔히 ‘한국시의 정부(政府)’로 일컬어진다. 스물이 되기 전부터 미당은 사유의 고갱이를 ‘영원성’에 두었다. 삼라만상 일체가 하나 속에 수렴되는, 처음도 끝도 없는 연화 묘법(緣化妙法)의 세계를 꿈꾸었다. 미당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시의 행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시어를 농(弄)한다. 미당 예술의 요체는 “법이 없음을 가지고 법이 있음을 창조하고, 법이 있음을 가지고 모든 다양한 법을 꿰뚫어 버릴 수 있는 것”(김용옥,『석도화론』)이다. 우주의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미당 시의 행간은 저 아름다운 ‘빔(虛)’의 경지에 있다.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고보면, 시는 백자 달항아리처럼 ‘텅 빈’ 미학의 예술이기도 하다.
필자가 미당의 시「화사花蛇」를 접한 건 스물세 살 무렵이다. 징그러운 뱀의 혓바닥과 스무 살 여자의 붉은 입술을 원죄 의식의 강렬한 이미지로 뒤엉켜놓은, 미당의 시안(詩眼)에 나는 홀딱 반하고 말았다. 불덩이처럼 아랫도리가 뜨겁던 젊은 날의 나는 미당의「화사」를 통해, 원죄는커녕 오히려 교활한 뱀과 간부(姦婦)의 꾐이 어찌나 황홀했던지 모른다. 그것은 추함이 아니라 또다른 미(美)였으며, 욕정이 아니라 “푸른 하늘을 물어뜯는” 원시적 본능의 갈구였다. 이후, 미당의 전 작품을 탐독하면서, 그의 묘법에 마냥 홀렸다. 보는 형상을 움직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음대로 하는 신비로운 주술적 언어 감각은, 미당만이 가진 탁월한 신법(神法)이었다. 한편, 미당은 1939년(24세) 겨울 간도성 연길시에 소재한 양곡주식회사 지점 용정출장소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가, 이듬해 봄에 귀국한다. 그곳에서 친구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설화를 훗날「신부」라는 작품 속에서 오롯이 살려낸다. 60세 때 출간한 시집『질마재 신화』(1975, 일지사) 속에 수록된 이 시는, 한국인의 원형적 심상을 한의 정서로 꿰찬 절창이다.「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신발」,「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박꽃 시간」,「알묏집 개피떡」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작들이『질마재 신화』속에는 빼곡하다.「신부」는 저 아득한 안개 속에 사라진 슬픈 설화 속의 사랑을 애달픈 곡조로 노래한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신부新婦」전문
「신부」는 어리석은 한 남자의 오해로 빚어진 초야의 신혼 밤이 그대로 주검이 된 여인의 한(恨)을 읊은 시다. 미당은 시의 분명한 주제 의식은 물론, 행간 속에 놀라운 시적 감각과 사유, 그리고 독특한 리듬을 살려낸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않는반면,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천명의 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삶의 굴곡이 있고, 허구로 가득 차 있는가 하면, 영원성에 가 닿아 있는 상상력은 그야말로 천의무봉이다. 전라도 방언에 스며있는 어조와 음색, 장단과 강약을 미당만큼 잘 부려 쓴 시인도 드물다. 마치 서해 뻘밭 위에서, 밀물의 은빛 달빛 흐름에 맞춰 홀로 춤추는 듯하다. 한국 현대 서정시는 미당에 와서야 비로소 그 아름다운 시의 판도라 상자가 한꺼번에 열린 셈이다.
「신부」의 요체는 유교적 도덕관에 얽매인 여필종부의 희생과 굴종을 한(恨)의 미학으로 끌어 올림에 있다. 시간의 전개에 따라 서사적 기법을 취하고 있으며, 3인칭 시점이 특이하다. 마치 재담꾼이 옛이야기를 곁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독자들의 영혼을 파고든다. 혼례복인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는 음양의 조화와 젊은 신부의 고움을 상징한다. 초록과 다홍의 강렬한 시각적 대비는, 시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외롭게 앉아 죽어간 신부는 이 땅의 모든 비극적인 여인의 상징이며 은유의 이미지이다. 왜 미당은 신부를 첫날 밤 모습 그대로 원혼이 되게 했을까. 신랑의 무지에 대한 야속함일까. 아님, 양반 사대부의 일방적 허구에 일침을 놓은 것일까.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첫날 밤 신부를 통해 미당이 독자에게 제시한 극적인 장면은 “매운재” 로 남아 “폭삭” 내려앉는 모습이다. 한국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 사회의 그 무지함은 “초록 재와 다홍 재”로 상징화 되었다. 이런 설화 속 여인의 일생을 미당은 무척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억울했던 원귀의 원(願)을 풀어서, 죽은 후에는 원한(怨恨)없이 순수한 생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서정주는「신부」를 통해 비극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선線의 미학-박재삼의「수정가水晶歌」
한국 근대시의 운율은 7,5조의 리듬이 주를 이룬다. 이를 한(恨)의 정서 속에 버무려 독창적으로 뽑아낸 시인이 박재삼(동경, 1933~1997)이다. 그는 동경에서 태어나 4세 때 귀국하여 외가인 경남 삼천포시(지금의 사천시) 에서 정착한다. 1946년(14세) 삼천포 여자중학교에 사환으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초정 김상옥(충무 출생. 1920~2004) 선생에게 시조를 사사 받았다. 초정의 첫 시조집『초적(草笛)』을 필사하여 애송하면서 시조의 매력에 흠뻑 심취한 것도 이때이다. 1955년(23세)『현대 문학』 6월호에「섭리攝理」란 작품으로 유치환에 의해 시조에, 그해『현대 문학』11월호엔「정적靜寂」이 서정주에 의해 추천 완료된다. 아마 박재삼은 그 무렵 시조(時調)의 기본틀인 3·4, 4·4조의 율조와 미당의 시를 자기 방식대로 익힌 듯하다. 이후, 박재삼의 시는 정형적 틀을 유지하되 사설시조의 파격이 엿보이며, 동시에 자유시의 분방함과 판소리의 한의 가락까지 포괄하여 한국인의 원형 심성과 시법을 천착한다. 그는 또 시조를 통해 민족의 정신적 숨결과 율조를 계승하는 동시에, 흘러내리고 (流), 한 바퀴 감아 돌고(曲), 힘을 주는 마디(節)를 지어서, 다시 풀어내는(解) 흐름을 절묘하게 풀어낸다. 그의 첫 시집『춘향이 마음』(1962년, 신구문화사) 에는 이러한 시법이 무르녹아 있다. 한국인이 쓴 가장 한국적인 시집으로 찬사를 받은 이 시집은, 주옥같은 명시 30편이 수록되어 박재삼의 출세작이 되었다. 서정주가 신화와 주술적 무속 미학에서 한국인의 원형을 발견했다면, 박재삼은 한국 여인들의 그 서럽고 슬픈 삶에 묻힌 한(恨)의 이야기를 선(線)으로 그려내었다. 그의 홀린 듯한 몽환과 그리움의 애조는 춘향이란 여인에 감입되어 독자의 심금을 파고든다.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春香)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山神靈)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萬里)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春香)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박재삼,「수정가水晶歌」전문
〈춘향가〉는 18세기 중엽 이전에 불리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이 지향하는 것은, 춘향을 매개로 당대의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과 부도덕한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지이다. 그리고 양반층이 열녀를 내세워 남존여비 사상의 심화 확대를 꾀하고자 한 복합적 민중들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판소리〈춘향가〉는 현전하는 열두 마당 가운데 다섯 마당 중 하나이다. 한양의 양반 이한림이 남원 부사에 부임하면서〈춘향가〉는 시작된다. 사또의 아들 이몽룡은 이팔 청춘에 풍채는 당나라 시인 두목지요, 도량은 푸른 바다요, 문장은 이태백이라, 글씨 또한 왕희지니 천하 옥골선풍이다. 시흥(詩興)과 춘흥(春興)이 도도한 어느 날, 몽룡은 광한루에 놀러 갔다가 그만 기생 월매의 딸 춘향에게 폭 빠진다. 열여섯 춘향의 교태는 월궁항아(月宮姮娥)요, 설부화용(雪膚花容)이라, 그 어떤 장부가 꽃을 비껴 가리요. 하룻밤 만리성을 쌓은 몽룡과 춘향의 사랑도 잠시뿐, 동부승지의 교지를 받은 아버지를 따라 몽룡은 춘향을 데려가겠다는 약조만 남긴 채 서울로 떠난다. 이때 변학도의 등장은〈춘향가〉를 위기로 치닫게 한다.
박재삼의「수정가(水晶歌)」는 이몽룡과 이별해 살던 시기, 그를 향한 성춘향의 아득한 사랑의 거리, 어룽진 여인의 애틋한 심리를 파고든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며, 오매불망 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의 행위는 한(恨) 그 자체요, 조선 여인의 어깨 둘레에 서린 외로운 선(線)의 상징이다. 박재삼은 어떻게 이렇게도 전통적 가락의 특장을「수정가(水晶歌)」에서 잘 살렸을까. 말의 규칙적인 반복으로 생기는 가락을 툭툭 끊어서 쉼표(,)로 받아넘긴 절묘함에 그저 말을 잃게 된다. 3․4조, 4․4조, 나아가 7․5조의 변형을 마음대로 부려 쓰는가 하면, 이것이 도리어 불규칙의 규칙(성)의 음보로 되살아나 현대시의 내재적 율조로 변주된다. (‘―래’, ‘―까나’) 등, 시행의 첫머리나 끝자리에 규칙적으로 음이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음위율은, 그때까지 현대시에서 찾기 힘든 독보적 시법의 진경(眞景)을 펼쳐 보인다. 1956년(24세) 에 처음 발표된「수정가(水晶歌)」는, 1연의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春香)이 마음이 아니었을레.”를 통해 '몽룡’을 바람에, 춘향을 ‘물방울’로 환치한 은유는 깊다. 또한 시어 행간에 스며든 시적 화자와 춘향의 동일성은 박재삼의 수준 높은 경지를 잘 보여준다. 2연은 박재삼의 자연관이 실로 물아일체적이며, 무당과의 접신의 지경에 놀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내다보는 춘향의 애련을 통해, 조선의 산야와 나지막한 구릉을 흐느끼는 여인의 어깨선에 덧댄 시적 미학이란, 가히 무릎을 칠 만하다.
청보라빛, 아른한 목소리- 박목월의「뻐꾹새」
소월에서 비롯해 목월에 와서 심화된 향토적 서정과 민요적 리듬은, 한국 근대 서정시 백년의 격조를 더한다. 이는 물론 향가와 시조, 한시 등 옛 시가에서 그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목월의 수작들은 정경교융(情景交融)의 묘(妙)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특히 ‘달’의 이미지가 돌올하다. 우리는 목월이 존재와 언어의 일치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전통시가의 정서와 음감을 내면화함은 물론, 고도로 압축된 언어와 행간 배열, 명사형 종결 어미 처리 앞에서 우리는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흡사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세련된 언어 감각은 목월 이전엔 찾기 어려운 특징이다. 탈속의 경지와 선(禪)의 세계, 신라 정신의 재현과 방언의 사용 또한 그렇다. 게다가 공감각의 미적 장치를 통해 불교 사상인 공(空)으로까지 그 밀도를 심화시켰다. 마치 그의 시는 소동파(북송 1037~1101)가 왕유(당 669~759)의 시를 보고 '그림 속 시가 있고(畵中有詩), 시 속 그림이 있음(詩中有畵)’을 연상하게 된다.
문청 시절 나는 목월 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시집『청록집』의「윤사월」,「나그네」,「청노루」등 그의 한국적 가락과 압축된 서정 묘사는 압권이었다. 초기 작품은 동양적 달관과 이상향이 정제된 형식미를 통해 여백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고향 경주를 배경으로 탄생한 시집『산도화』,『난·기타』속의「달」,「불국사」,「산도화」,「하관」,「사투리」,「사향가」,「뻐꾹새」는 신라 천년의 정신과 미학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중 후기의 시집『경상도의 가랑잎』은 사투리가 어떻게 시 속에서 토착 언어와 정서로 형상화될 수 있는지 밀도 높게 그렸다. 그는 자연의 시인이자, 생활 세계 내지는 종교적 시인, 그리고 인간의 운명과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의 시인이다. 스물 근처 목월에 미쳐 다닐 때 보았던, 벚꽃 핀 달밤에 바라본 불국사 거리는 한 폭의 수묵화였다. 대웅전과 극락전 오르는 길 좌우로 범영루와 자영루는 그대로가 시였다. 중앙 동쪽에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가 있고, 서쪽에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17계단)와 백운교(16계단)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이다.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은유의 연결고리는 깊다.「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돌계단 다리와 자하문의 순서를 자하문-청운교-백운교라 기록하고 있어 아래쪽에 있는 돌계단이 백운교이고 위쪽에 있는 돌계단이 청운교임을 알 수 있다. 홍예교 다리 아래는 극락정토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구품연지(九品蓮池)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 나는 목월의 가곡「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그 달빛 그림자 아래를 외롭게 서성거렸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박목월,「이별의 노래」가사 전문
1948년 서울로 이사 온 목월은 6·25 전쟁으로 인해 대구에 내려가 살았다. 1952년 봄 서울에 다시 올라온 목월은 자신의 시를 좋아하는 젊은 두 자매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으나 곧 결혼을 한다. 그 후, E여대 국문과를 다니던 동생 H양이 목월을 뜨겁게 사모하게 된다. 전쟁 직후 수도의 폐허 위에서 둘의 사랑은 깊어 갔다. 그때 목월은 39세 가장이었다. 자책과 갈등 속에 시인은 다가온 사랑 앞에 번민한다. 목월은 가까운 시인에게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의 '문예 살롱' 다방에서 친구 시인에게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그해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오자, 사랑에 빠진 둘은 모든 것을 버리고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가정과 한양대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둘은 제주도로 사라진 것이다. 그해 눈발이 날리고 겨울 어느 날,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둘이 살고 있는 제주 집을 찾아온다.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는다. 보퉁이 속에는 목월과 H양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런 여사 앞에서 H양은 감동하여 “사모님!”하고 통곡을 한다. 부인이 다녀간 며칠 후, 부산에서 여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둘을 설득한다. 그녀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제주항을 떠났고, 얼마 후 목월도 그 뒤를 따른다. 뱃전에서 H양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고 한다. 당시 이별의 장면은 함께 동행한 제주 제일중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던 모 시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목월의 애정 도피는 넉 달 만에 막을 내린다. 훗날 목월은 사랑했던 그녀에게「이별의 노래」를 지어 그 정표로 남긴다. 6연 24행의 이 시는 부분 발췌되어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참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이 곡은, 김성태 작곡, 박세원 노래로 불후의 명가곡이 되었다.(이형기,『자하산 청노루』)
서울로 돌아온 목월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집 반대쪽 효자동 종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한다. 그가 효자동 종점 하숙집에서 쓴 시가 아래「뻐꾹새」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나이는 들수록
한(恨)은 짙고
새삼스러이 허무한 것이
또한 많다.
이런 새벽에는
차라리 기도가 서글프다.
먼 산마루의 한 그루 수목처럼
잠잠히 앉았을 뿐……
눈물이 기도처럼 흐른다.
뻐꾹새는 새벽부터 운다.
효자동 종점 가까운 하숙집
창에는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모든 것이 안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혹은 사람의 목숨도
아아 새벽 골짜기에 엷게 어린
청보라빛 아른한 실오리
그것은 이내 하늘로 피어오른다.
그것은 이내 소멸한다.
이 안개에 어려
뻐꾹새는
운다
― 박목월,「뻐꾹새」전문
이별 후의 한 시인의 고뇌가 한 마리 길 잃은 안개 속의 뻐꾹새가 된다. H양과의 사랑의 불길 속을 지나온 목월만이 느꼈을, 참혹한 비애의 시가 된다. 목월은 새벽에 깨어서 울곤 했다. “창에는 /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 모든 것이 안개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 혹은 사람의 목숨도 / 아아 새벽 골짜기에 엷게 어린 / 청보라빛 아른한 실오리”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모든 것이 안개다. 위의 시구는 목월 시에 빠져 허우적대던 내 스물의 가슴을 온통 붉게 흔들어 놓았다. 뻐꾹새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애절한 감정이 아지랑이처럼 번져 있다. 시인은 한철 효자동에서 애정 도피 후 찾아온 사랑앓이로 지난 시절에의 회한에 잠긴다. 해질녘 인왕산 노을을 산책하며 고린도 전서 13장「사랑」을 읽으며 기도와 참회로 보낸다. 보랏빛 산정에 어둠이 깔리면 램프에 불을 켜고 H를 잊으려고 베개에 눈물을 적시는 밤이 많았다.「뻐꾹새」는 목월의 시집『蘭 · 其他』(1958년) 속에 수록되어 있으며, 울음이자 울림이다. 사랑의 폭풍이 지난 후에야 이런 명시가 탄생하나 보다.
사랑의 영원- 조지훈의「석문石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떠도는 걸까. 몸은 흙으로 혼령은 구만리 장천에 바람처럼 구름처럼 흩어지는가. 왜 사람은 이 아름다운 사랑을 남겨두고 이승을 떠나야만 하는가. 삶의 뒷문은 죽음인가. 그 무수히 돌아간 숨결이여! 눈물과 설움과 외로움이 붙드는 이승은 왜 이리도 좋은가. 대체 어떤 죽음이 제일 쓸쓸한 것일까. 하늘이 무너진다는 부모의 죽음인 천붕(天崩)일까. 아님, 그 피맺힌 응어리가 가슴 속 엉켜 지울 수 없다는, 자식의 죽음인 참척(慘慽)일까. 귀(鬼)들은 무엇을 타고 저 어두운 강을 건너는 걸까. 도솔천의 배일까, 요단강의 배일까. 그 배 건너갈 때 뱃사공은 어떤 곡조로 휘파람을 불까. 아, 아득한 안개 속에 사라진 저 슬픈 형상들을 다 불러 모으면 사랑이 될까. 피일까, 통곡일까, 절규일까. 그렇게 한 천년을 기다리면「석문石門」(시집『풀잎 단장』)이 열릴까.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여기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자락으로 이 눈물을 씻으렵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석문石門」전문
우리는 천년 애달픈 사랑의 곡조를 지훈의「석문石門」에서 듣는다. 이름 없는 풀덤불 속에 묻힌「석문」의 슬픈 사연은 천년이 지날 때까지, 저 바람이 우는 곡(哭)이요, 달과 강의 애달픈 무(無)의 울음소리이다. 사랑하는 이를 놓쳐버린「석문」속 황씨 부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바람에 흔들린 촛불 그림자였을까. 어쩌다 지훈은 초야에 홀로 된 그녀의 돌문을 열어본 걸까. '삐걱'하고 열릴 돌문의 소리는 상상 속에서 강렬한 신비로 다가온다. 그 희미한 촛불 앞엔 눈물 어린 처녀가 천년을 앉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이 아니면 결코 열리지않는 돌문 속에서 기다릴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첫날밤 옷고름도 풀지 못한 처녀의 가슴 속엔 한(恨)이 필 것이다. 흰 배꽃이 아니라, 난분분 난분분 그 붉은 복사꽃일 것이다.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눈물의 꽃일 것이다. 하여, 지훈은 그 넓고 서늘한 오라비 같은 넉넉한 도포 자락으로 처녀의 천년 유혼을 씻어주었다. 시「석문」속에서 슬픔과 죽음과 비감이 서린 서늘한 시가 비친다. 어리석은 한 남자의 오해를 통해 초야의 신혼 밤에 버림받은 여인은, 저 그리스 신화 속 수금의 천재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비극적 사랑과도 오버랩된다. 상징과 은유, 신화와 혼령의 혼잣말이 행간 속에 가득 찬「석문」은, 한을 상징한다.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줌 티끌로 사라지겠"다는 이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는, 차라리 곱다.
누이와 여승, 혹은 인간의 원형적 순수 - 송수권의「산문(山門)에 기대어」,「여승(女僧)」
송수권의「산문(山門)에 기대어」는 1975년『문학사상』당선작이자, 첫 시집『산문에 기대어』(1980년, 문학사상사)의 표제시이다. 이 시는 신라 월명사의 10구체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연상시킨다. 향가의 고도로 정제된 표현과 기교를 흡수한 이 작품은 젊은 나이에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한 점과 훗날 새로운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한 점이 빼닮았다. 한편, 문학사상(1975년)에 투고한 송수권의 「산문에 기대어」 외 10여 편이 당선되기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문청 시절 그가 교사를 그만 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무위도식의 절망과 고통 속에 전전할 때, 어느 여관방에서 죽음에 내몰리기 직전에 원고지가 아닌 갱지에 써 갈겨 투고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갱지 여백에 주소마저 빠진 이 투고작을 문학사상 편집장이 갱지에 썼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버린 것이다. 마침 이어령 주간이 편집장의 책상을 지나다 휴지통에 처박힌 원고 뭉치를 문득 발견하여 펼쳐 본다. 하마터면 사장될 뻔한 그 속에는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주옥같은 명작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송수권을 ‘휴지통 시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런 연유에서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千)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 송수권,「산문(山門)에 기대어」전문
「산문(山門)에 기대어」는 어린 시절 어미를 여의고 가난과 외로움으로 극도의 빈혈을 앓다 스물넷의 나이로 자살한 남동생을 여성 화자로 바꿔 형상화하고 있다. “너의 죽음 위에 내가 살아서 복수를 하마. 놈을 거적때기에 말아서 파묻고 온 날 밤, 나는 술상에 빈 잔 두 개를 올려놓고 선소리를 내질렀다.” 「산문(山門)에 기대어」에 나오는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라는 구절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산문은 단순히 절(寺)문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즉, 이 시는 불교적 내세관과 인연설에 기초하여 죽은 누이에 대한 슬픔과 한을 새로운 소망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전통적 비가(悲歌)가 그렇듯, 이 시 또한 모든 생명의 무상성(無常性)을 바탕에 깔고 있다. 동백꽃의 옛 이름인 산다화(山茶花) 그림자를 ‘그리메’로 부려 쓴, 시인의 예민한 언어 감각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죽은 누이에게 건네는 독백의 혼잣말은 화자의 그리움과 애절함을 더욱 사무치게 한다. 「산문(山門)에 기대어」는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시의 가락을 만든다. “누이야 ~ 보는가”의 반복뿐 아니라, 1연의 ‘빠지다, 죽다’의 하강 이미지를 ‘일어서다, 살아오다’의 상승 이미지의 대구(對句)로 가락을 엮었다.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 “살아서 튀는 물방울”은 누이의 부활에 대한 화자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한 잔은 비워두고”라는 표현은 먼 훗날 다시 만날 누이를 위한 것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화자의 적극적 행동은 ‘강물’과 ‘못물’을 통해 재생적 공간으로 승화된다. 송수권도 밝혔듯, “누이야 아는가 /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든 / 눈썹 두어 낱이 /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은, 죽은 누이를 못물에 비친 눈썹을 통해 재회하고자 하는, 화자의 애절한 감정이 절묘하다. 그 외에도 송수권의 대표작「여승」은 개인의 정한(情恨)을 읊은 서정시의 백미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랍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송수권,「여승(女僧)」전문
「여승(女僧)」은 누구나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형적 순수함의 상징이다. 백석의 「여승」 이후, 송수권만큼 ‘여승’을 고귀하고 청초하고 외롭고 순결한 이미지로 변주한 예도 드물다. 「여승」의 시적 상황은 고뿔 앓는 사춘기의 소년이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고깔 쓴 여승”이 염불 외는 것을 훔쳐보는, 첫사랑의 체험적인 시다.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호기심과 여승의 종교적인 염결성을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황홀한 마음”, “낮달의 포름한 향내”로 연상한 비유는 출중하다. 특히 “포름한 향내”는 삭발한 앳된 여승의 윤기 나는 머리의 ‘시각의 후각화’로, 시적 화자의 함축적이고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곱고 애잔하게 클로즈업한다. 특히, 이 시의 백미는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압지요”라는 구절 속에 함축되어 있다. 소년의 풋풋한 사랑을 비껴가는 여승의 내면적 심리가 암시로 잘 나타난다. 암시야말로 상징과 비유를 넌지시 깨우쳐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며, 시어의 뜻을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러 분위기를 풍긴다. 심리학에서 암시는 직접적 행동을 불러일으키며 상당한 최면 효과도 지닌다. 아니나 다를까, 송수권은 바로 그다음 시행을 통해 소년의 심리적 행동을 직접 유발하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로 ‘여승’에게 더이상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까움과 성스러움으로 승화시킨다.
하여 “송수권의 전통주의는 한국 근대시에 잠재하고 있는 모더니티 지향성과 근대 지향성의 대립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응답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와 기법의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에 연결된 것이다. 혹자는 그의 전통주의를 시대착오적인 것, 혹은 낡은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간주할지도 모른다. 근대를 지배하였던 저 거대한 계몽 담론들조차 도도한 해체의 물결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대에, 이미 지나간(혹은 청산된) 구시대의 낡은 정신을 붙잡고 감읍에 빠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 김영랑, 백석, 서정주, 박재삼 등 한국시에 등장했던 전통주의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 근대시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주의적 작품 창작을 통해 이 시인들이 자기 시대의 문제 즉 근대성의 위기에 대해 미학적 저항을 시도하였다는 점일 것이다.”(남기혁,「경계 너머에서 울려오는 전통의 목소리」중에서.) 송수권은 참으로 질박한 농투성이 상(像)이다. 그의 얼굴상(象)은 통나무에 새긴 것 같은 굵은 주름의 전통적 탈을 연상시킨다. 미당 서정주의 ‘한국인의 원형’ 시법을 배우되 그곳에 함몰되지 않고, 박재삼의 한국 여인의 정한(情恨)을 익히되 그 늪에 빠지지 않은, 자신만의 시 속에 한국인의 민중 의지를 오롯이 끌어안음으로써, 송수권은 70년대 한국 서정시의 한 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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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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