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公 7年(紀元前 716年)
七年春, 滕侯卒, 不書名, 未同盟也. 凡諸侯同盟, 於是稱名. 故薨則赴以名, 告終, 稱嗣也, 以繼好息民, 謂之禮經. 夏城中丘, 書不時也.
칠년춘, 등후졸, 불서명, 미동맹야. 범제후동맹, 어시칭명. 고훙즉부이명, 고종, 칭사야, 이계호식민, 위지례경. 하성중구, 서불시야.
[解釋] 七年 봄 3월에, 7년 봄에 등후가 죽었는데, 경문에 그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그 등나라가 노나라와 동맹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제후가 동맹을 맺으면, 이에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제후가 죽으면 그 이름을 들어, 죽음을 알리고, 후계자들 지칭해서, 우호를 계속시켜 백성등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예의의 상법이다. 여름에 중구에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것을 쌓을 시기가 아닌데 쌓았다는 것을 적은 것이다.
齊侯使夷仲年來聘, 結艾之盟也. 秋宋及鄭平, 七月庚申, 盟于宿. 公伐邾, 爲宋討也.
제후사이중년래빙, 결애지맹야. 추송급정평, 칠월경신, 맹우숙. 공벌주, 위송토야.
[解釋] 齊나라 희공이 그 동생 이중년을 노나라에 보내온 것은, 애에서 맺은 동맹을 굳게 하기 위해서다. 가을에 송나라는 정나라와 화평하게 되어, 7월 庚申日에, 宿에서 동맹을 맺었다. 은공이 주를 정벌한 것은, 宋나라 때문에 정벌한 것이다.
初戎朝于周, 發幣于公卿, 凡伯弗賓. 冬王使凡伯來聘, 還戎伐之于楚丘以歸. 陳及鄭平.
초융조우주, 발폐우공경, 범백불빈. 동왕사범백래빙, 환융벌지우초구이귀. 진급정평.
[解釋] 처음에 융이 주나라로 조회하려 왔을 때, 공경에게 폐백을 바치니, 凡伯은 융을 귀빈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에 주나라 왕이 범백으로 하여금 노나라에 사신으로 오게 하여,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융은 초구에서 범백을잡아 데리고 간 것이다. 진나라는 정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十二月, 陳五父如鄭涖盟. 壬申, 及鄭伯盟, 歃如忘. 洩伯曰 : 「五父必不免. 不賴盟矣.」 鄭良佐如陳涖盟.
십이월, 진오보여정리맹. 임신, 급정백맹, 삽여망. 설백왈 : 「오보필불면. 불뢰맹의.」 정량좌여진리맹.
[解釋] 그래서 12월에, 陳나라 五父가 정나라로 가서 동맹에 참석했다. 12월 壬申日에, 오보가 정백과 동맹을 했을 때, 피를 마시는데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를 본 정나라 대부 설백은 말하기를, 「五父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동맹에 신뢰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정나라 대부 양좌가 진나라로 가서 동맹에 참석하였다.
辛巳, 及陳侯盟, 亦知陳之將亂也. 鄭公子忽在王所, 故陳侯請妻之, 鄭伯許之, 乃成昏.
신사, 급진후맹, 역지진지장란야. 정공자홀재왕소, 고진후청처지, 정백허지, 내성혼.
[解釋] 12월 辛巳日에, 진나라 임금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때 또한 진나라가 장차 문란해 질 것을 알았다. 정나라 공자 홀이 주나라 서울에 인질로 와서 있었는데, 진나라 임금은 그의 딸로 사위를 삼고자 요청하니, 鄭伯은 허락하여, 곧 성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