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산 -- 북한산
08시30분 집을 나섰다. 북한산의 조계종 사찰을 탐방하기 위해서 이다. 전철을 타고자 걸어가는 이곳은 주엽동이다. 주엽은 조선시대 중기 이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이름으로 한강으로 연결된 작은 개울물에 나뭇잎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아파트로 숲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 이 지역에는 신선이 내려올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강선降仙마을(주엽1동)이라 하였고 주엽 2동은 큰 글방이 있었다 하여 문촌文村마을로 불렀다. 이곳 강선, 문촌 마을은 새로운 마을을 뜻하는 새말 즉 신촌新村이라 불렀는데 신도시新都市로 개발로 되었으니 선인의 번뜻히는 예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엽역에서 전철을 탔다. 오래 만에 보는 전철안의 광경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산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 피곤에 겨워 졸고 있는 사람. 가만히 앞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자리가 없어 서있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스마폰을 검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마트 폰이 시대의 유행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교통수단에 탑승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에서 생각에 젖는다. ‘사찰 탐방’은 불교를 신봉하였기에 지금까지 산에 오르면서 절을 만나면 합장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사찰 방문에서 인간 다운 삶을 지향하는 불법을 배우고자 ‘사찰 탐방’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수많은 사찰이 있어 그 모두를 다 돌아 볼 수 없고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전통 사찰을 대상으로 찾아가되 타 종파의 이름난 사찰을 아울러 탐방하고자 한다. 절은 마음의 고향이다. 절을 찾아 가면서 잊고 있는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고 짧은 순간일망정 편안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우리들이 되돌아 가야 하는 곳이다.
생각이 많으면 시간은 순간이다. 벌써 전철은 목적지 구파발 역에 도착하였다. 구파발은 조선시대에 공문서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설치했던 역참인 파발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말들의 집합소인 파발 역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통의 요지이자 북한산 산행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09시16분 구파발역의 분수대 광장에 이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 산행을 위하여 북적댄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언제나 많은 등산객들로 산보다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예외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산행을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무겁고, 피곤함을 느낀다. 이럴 때에는 지체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이 몸의 컨디션을 찾을 수 있어 분수대 광장의 옆길인 계단을 산행의 초입으로 삼고 진관사로 향했다. 오늘의 들머리는 이말산이다. 이름도 생소한곳 으로 몇 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인터텟 검색 자료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진관 근린공원’이란 이름과 함께 공원이용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말산(△132.7m,莉茉山)은 매장 문화재의 보고이며, 이말이란 말리 茉莉또는 자스민이라 불리는 식물을 뜻하는데 그 이름이 붙은 유래는 알 수없다. 면적 98만3,791으로 구파발역 인공 폭포에서 입곡교 앞 북한산 국립공원까지 이어지며 조선시대에 한양 사람들이 성묘를 다녔던 곳이 바로 진관 공원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산빛이 푸르다. 짙은 녹음을 대하니 사람들이 집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녹음의 향기를 맛보며 걸어가는 길은 근린공원으로 변하여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정표까지 세워 놓았다. 이정표에서 안내한 배드민턴장을 향하여 진행하였다. 예전에 왔을 때의 이말산과는 많이 달라졌다. 곳곳에 이정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말산은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도성에서 십리 거리까지는 묘를 쓸 수 없었는데 이말산 일대가 성저십리 바로 바깥쪽이어서 분묘들이 많은 곳으로 은평구 일대에는 내시 상궁의 묘 50여기가 있다. 하여 등산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묘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내시, 상궁의 묘소를 느끼지 못하고 진행할 때 빛이 바랜 찢어진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말산은 매장 문화재의 보고
여기저기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 조상의 흔적
등산로에서 발견되는 돌무더기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조선 초기와 중기와 장묘 문화가 집중된 구파발 일대의 진관 근린공원과 기자촌 갈현 근린공원에는 그 직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고 왕의 특별한 신임과 사랑을 받았던 상궁들을 비롯한 내시들이 묘지가 즐비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저기 문인석의 잘린 목, 산사태로 절반의 흔적만 남아 아들 낳게 다고 갈아간 흔적이 선연한 동자상의 코, 어느 집 앞에 단체로 수집 전시된 석물들을 보면 마음의 서글퍼집니다.
늘 접해 왔음에도 전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던 주변의 소중한 유물과 유산들, 우리 모두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안내문을 읽고 나서 이말산 곳곳을 둘러보아 안내문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오늘의 걷기가 사찰 순방에 목적이 있어 스쳐 지나가는 이말산을 아쉬워하며 진행할 때 등산로에 잘려나간 상석이 방치되어 있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들에게 상석을 가리키며 이말산에 대한 문화, 역사를 설명하는 문화 관광 해설사가 눈에 띠었다.
이말산의 말리는 말리화차(茉莉花茶), 자스민차 또는 향편(香片)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화차(花茶)로 이 산에 이말(莉茉) 즉 말리(茉莉)라는 식물이 많아서 생긴 이름 이라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없다고 하고 있다.
한 평생을 국왕의 총애만을 기대하며 독신으로 살았던 상궁, 그리고 왕의 남자 내시 이들은 죽어 묻힐 자리 한곳 없었을 것이지만 임금이 사랑이 있었기에 묻힐 자리 하나는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혹 누군가 이들의 묘소를 물으면 그저 ‘이 마을의 산에 묻었다’ 하여 이말산으로 불러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해 보며 하나 고등학교로 내려서 진관사로 향하였다. .
진관사로 진입하는 길목은 북한산 둘레길 개통과 더불어 많이 변하였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말끔하게 놓이고 아파트 대신 전통 한옥 마을로 변모하고 있었지만 기자촌 아파트, 가옥를 철거하여 가려졌던 비봉 능선의 장쾌한 산줄기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산행을 하기 시작부터 마음을 들뜨게 하는 곳이 되었다.
<이말산을 내려사 진관사 입구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전경, 응봉, 의상봉 능선이 보인다>
등산객들의 일부는 북한산 둘레길인 하늘 붕붕 길을 따라 걸어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진관사로 향하고 있다. 승용차도 갈 수 있는 널따란 길에는 승용차가 줄을 잇지만 스틱을 지팡이로 삼고 일주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나그네의 발걸음 같다고 할까 ?
이제 나이가 들은 탓인지 나그네로 살고 싶다. 아내와 함께 우리 땅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찰을 탐방하고, 산천과 벗을 삼으며 동해의 출렁대는 파도, 남해의 청정한 바다, 그리고 서해의 황토가 섞인 듯 누런 바닷물, 백두대간의 그윽한 자연의 세계를 걸으며 선인들이 삶이 서린 땅의 향기에 심취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땅의 향기를 찾아 이 땅을 걷고 싶다는 명제를 제어하여 어쩔 수없이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사찰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아내와 함께 반드시 이 땅의 명산 대천을 찾아 갈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극락교가 놓여있고 그 아래로는 맑은 계곡물의 흐른다.
수량이 풍부할 때 극락교란 이름처럼 별유천지別有天地를 절감할 수 있어 계곡 기슭을 따라 나무 계단을 설치하여 걸어갈 수 있게 정비하여 놓았다. 진관사 계곡은 아름답다. 계곡물의 넘쳐흐르면 그 아름다움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물이 말랐다 해도 계곡으로써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극락교를 지나 대웅전으로 향할 때 해탈 문이 있다. 번뇌 망상의 고뇌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 해탈이요, 그 경지가 지극한 즐거움을 뜻하는 극락이라면 해탈 문이 지나고 극락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이미 극락의 세계에 진입하였는데 여기서 또다시 해탈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라고 조금 배운 불교 지식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웅전에 이르니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연등이 가득하게 매달려 있다.
사찰은 시대의 스승이다. 세속을 벗어난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는 출가승이 머무르는 절은 깨달음이 있어 반야의 지혜가 충만 되어 있는 곳으로 세속의 번뇌 망상으로 고통속에 헤매이는 사람들을 청정한 불심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관사는 말이 없다.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라고 일컫는 진관사이며, 원효대사 창건한 천년의 전통을 지닌 고찰이며, 제국주의 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을 꽃피웠던 호국의 사찰로 자긍심 때문일까 ?
산빛은 푸르고 구름은 흘러간다. 말없는 청산은 꾸밈없는 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듯이 부처님의 말없는 미소에서 자기를 바로 볼 수 있을때 불보살의 참뜻을 새길수 있을 것이다.
大雄殿 柱聯
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은 온 법계에 충만하시어
普賢一切衆生前 일체 중생 앞에 널리 나타나시네
隨緣赴感靡不周 인연 따라 다다라서 두루 보살펴 주시고
而恒處此菩提座 항상 여기 보리좌에 계신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한 서원 구름같이 항상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渺難窮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人生難得),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佛法難逢)고 했다. 백천만겁년 동안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도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어느 생에 부처를 이룰 것인가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우리는 불도를 다 배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원력속에 살고 있지만 각자의 근기에 따라 볼보살의 가피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대웅전옆의 명부전, 나한전의 주련을 살펴보니 흘림체로 써 내려간 한자로 인하여 읽을 수 없었다. 눈뜬 장님이라고 할까 ?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지난날 학문을 게을리 한 탓으로 이 땅을 걸어가면서 절감하는 한계이다.
사찰을 탐방하면서 계속하여 접할 수밖에 없는 짧은 지식으로 인하여 사찰의 기행은 절에 왔다 가는, 다시 말해 절을 가본 적이 있는 정도의 탐방으로 진행하다가는 결국은 중도에서 그만 두게 되지 않을까 ? 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법당의 뜰을 내려서니 200여년이 지난 느티나무 2구루가 있었다. 오랜 세월 생명을 유지하여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써주는 글자조차 읽을 수 없고, 들려주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하는 삶의 무게는 어찌 이렇게 가벼울까 ?
허전한 마음으로 삼천사로 향했다. 극락교로 내려서서 좌측(동쪽)의 사모 바위 가는 길로 진입하였다. 이 길은 응봉능선으로 진입하는 길로 처음 산에 다니기 시작한 후 체력 단련을 위한 단골 등산로였다. 사모바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얼마나 빨리 갈 수 있느냐 ? 란 과제를 안고 체력 훈련을 하던 생각이 났다.
응봉 능선을 넘어서니 삼천사에 이르는 시멘트 도로가 있었고 맑고 아름다운 계곡의 물은 진관계곡처럼 메말라 바윗돌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위가 바탕이고, 물이 지혜라면 물이 바윗돌을 치며 흐를 때 계곡으로 찬탄하듯이 인간으로서 학문으로 머리를 채우지 않으면 진관사의 주련에서 보듯 어리석음만 남기고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삼천사에 이르니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라고 적어 놓았다. 적멸보궁은 석가세존의 진신 사리를 모셔 놓은 곳이다. 사리는 ‘한량없는 육바라밀 공덕으로 생기며, 또 戒, 定, 慧로써 勳修하여 생기는 것으로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가는 福田이 된다’ (불교 사전, 동국역경원, 이운허 지음)하여 사람들이 경배하고 받들어 모시고 있다.
하지만 부처에 대한 진정한 경례는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하고 佛心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법의 등불에 의지하고, 자신의 등불에 의지’(法燈明, 自燈明)하는 것이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는 행위가 될 것이다.
佛身이 법계에 충만하다는 주련의 가르침은 초파일 봉축을 위한 출렁이는 연등에서도 마애불에 예배를 올리는 불자의 모습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는 산빛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오로지 나의 가슴속은 번뇌 망상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삼천사 마애 불상>
삼천사에서 계곡 길을 따라 대남문으로 향했다. 계곡은 말랐다. 뒹그는 작은 돌멩이를 모아 돌탑을 쌓아 놓은 것이 계곡 곳곳에 눈에 띠었다. 등산로를 따라 진행할 때 부암동 암문과 비봉의 갈림길에서 문수사를 가고자 부왕동 암문의 등산로를 선택하였다.
사람들이 오고가지 않은 아늑한 산길, 예전 같으면 호젓한 길을 만났다고 좋아하였지만 요즈음에는 유기견과 멧돼지의 출몰의 우려로 인하여 다소 두려움이 앞선다. 완만하던 등산로는 가팔라지고 가는 길에는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 앞길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산행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등산을 새로이 시작하였고 바윗길에서 무릎을 다친 적이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평소의 체력 훈련을 꾸준히 하였기에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대남문에 이르니 많은 등산객들이 식사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오른 대남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고 북적이는 등산객 또한 여전하였지만 곳곳에 출입금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샛길 등산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산림 보호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지만 보현봉에 이르는 등산로가 폐쇄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무분별한 사이비 종교들의 점령하여 산림을 더럽히고 많은 등산객들의 탐방으로 인하여 산림 파괴가 주원인이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산에 오를 수 없다면 비극이 아니겠는가 ? 더욱이 보현봉은 서울의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에 더욱 애석하였다.
구기동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씻으면서 점심을 먹었다. 컵라면과 쑥개떡이 오늘의 점심이다. 힘들이고 올랐고 짐심때가 되어 맛있게 먹고 문수사로 향했다. 대남문에서 문수사까지는 지척의 거리이다. 예전에 서너번 다녀간 적은 있지만 벌써 10여년이 지났기에 처음 오는 것과 다를게 없다.
大雄殿 柱聯
刹塵心念可數知 온누리의 티끌,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고
大海中水可飮盡 큰 바다의 물은 다 마실 수 있고
虛空可量風可繫 허공을 헤아릴 수 있고 바람도 얽어맬 수 있지만
無能盡說佛功德 부처님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문수사에서 바라본 보현봉>
문수사에서 바라보는 보현봉은 문수사의 압권이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보현봉을 바라보니 푸른 녹음이 감싸며 빛을 발산하고 있다. 보현 보살의 기운이 감도는 것일까 ? 문수봉 기슭에 자리하여 보현봉을 마주하고 있는 문수사는 양양 오대산 상원사, 고성 문수사와 함께 우리나라 문수보살 3대성지로 유명난 곳이다.
고려시대 神品 四賢의 한분이신 탄연스님께서 창건하였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백일기도하여 낳았다는 인연으로 이 대통령이 참배하여 문수암이란 써 준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득남과 절과 인연은 너무도 많이 들었기에 기이할 것은 없고 몇 년 전에 왔을 때 등산객들에게 비빕밥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에서 문수보살의 지혜로 다가왔다.
문수사에서 승가사를 가려면 대남문으로 되돌아가 문수봉 혹은 청수동 암문에 이르러 비봉 능선으로 진입하여야 하지만 길 없는 문수사의 산신각 뒤편의 바위를 넘어 문수봉에 이르렀다.
문수봉은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항상 동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보현봉과 마주하여 북한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보현봉에서 바라보는 문수봉, 문수봉에서 바라보는 보현봉은 천하 제일경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인지 언제 와도 문수봉에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바위를 타고 암벽의 묘미는 짜릿한 등산의 묘미를 배가 시켜 주고 문수봉에 이르기까지 바위가 빛어내는 조화, 그리고 문수봉의 위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그 멋을 글로써 표현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산천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곳인 문수봉을 넘어 비봉 능선으로 진입하여 승가사로 향했다. 비봉 능선은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의 하나이다.
비봉 능선 상에는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이 솟아있고 대남문에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신묘한 조화에 북한산에 빠져들게 하는 곳이다.
비봉 능선에 이르면 그 이름의 주인공인 비봉에 올라야 하지만 비봉의 기슭에 자리한 승가사로 향했다. 오래 만에
바위 능선을 걸은 탓인지 다소 피곤함을 느끼며 승가사에 도착하였더니 15시25분이었다.
불광사까지 갈 것을 계획하였지만 오늘은 승가사에서 사찰의 탐방을 마치기로 하고 승가사의 일주문을 지나니
‘민족통일 호국보탑’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의 이념을 기치로 내걸은 것이 특징을 이룬다. 신라시대의 원광법사께서 ‘세속오계’ 를 화랑의 정신 지침으로 내세운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國泰民安을 기원하고 있는데 승가사에서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서원을 세우고 호국보탑을 세운 것이다.
전통적인 탑은 부처님의 사리와 경전을 넣어 두었지만 호국보탑은 탑안에 부처님을 봉안하여 전통의 아름다움과 현대의 멋을 조화하여 탑을 조성하였다.
대웅전에 이르니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자 하는 불자님 들의 염원이 담긴 연등이 가득하였다.
<승가사의 민족 통일 호국 보탑. 멀리 보현봉이 보인다>
大雄殿 柱聯
佛身普遍十方中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충만하시니
三世如來一體同 삼세의 부처님이 다르지 않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한 원력은 항시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渺難窮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네
부처님이 시방세계에 시방 세계에 두루 하고 계시니 물물物物이 비로자나불이요 두두頭頭가 화장세계華藏世界인데 중생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법은 깊고 깊어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불신佛身이 법계에 충만되어 있음을 자각한다면 바로 우리가 부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승가사는 조용하였다. 한낮임에도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데 사람들의 말소리 조차 다소곳이 주고받는다. 108 계단을 따라 마애불상에 이르니 신도 한분이 온 정성을 담아 예를 올리고 있다.
합장 예를 올리고 부처님을 마주 대한다. 덕스럽고, 인자한 형상을 기대하며 부처님을 뵙는 다는 설레는 마음이 한순간에 달아난다. 보물 제 215호 고려 초 조성한 뛰어난 불상이라고 하지만 속인의 눈으로는 고통에 허덕이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부처님은 32상 80종호의 형상을 지니시어 보면 볼수록 찬탄이 절로 나온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고뇌에 찌든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 불상의 모습에서 부처다움을 볼 수 없다면 어디에서 부처의 형상을 볼 수 있을까 ? 정녕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앉아 계신 절은 없는 것일까 ?
절을 갈 때 마다 느끼는 의문은 우리나라의 불상에서 부처의 형상을 볼 수 없다고 단정하고 한때는 합장의 예만 올리고 불상의 형상을 바라보지 않았은 적도 있지만 부처님의 덕성과 위용을 조각한 불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가는 곳마다 불상을 바라보면 부처님은 한결같이 깊은 고민에 빠진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들의 잘났거나 못생긴 얼굴이 바로 부처의 모습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불심의 지혜로 중생의 구제의 서원을 실행하는 사람이었기에 이 땅의 장인들이 부처님을 조각하면서 사람이 부처임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사람의 얼굴로 불상을 조각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사람이 부처임을 깨우쳐 준 불상 ! 승가사의 마애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어디에도 볼 수 있는 너와 나의 평범한 사람의 형상으로 천년을 넘어 지혜의 빛을 오늘의 우리에게 비춰주고 있었다.
<승가사의 마애불. 사람이 부처임을 일깨워 주었다>
승가사가 비록 산속에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의 한 동네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과 는 조금은 다른멋, 이를 테면 경건함과 고요함속에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과 사람의 가는 길 등을 사유하게 된다.
비록 내면의 관조가 내일의 삶의 현장에서 빛을 바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사색의 인간, 구도자의 삶으로 탈바꿈시켜 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승가사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북한산을 바라본다. 보현봉에서 문수봉으로 펼쳐지는 산등성이는 항시 다른 산세로 언제, 어디서 보아도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곳이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불광사를 향하고 싶었지만 오랜만의 산행으로 피곤함을 느끼고 구기동 계곡으로 하산하였다.
30대의 초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구기 계곡에 왔을 때 맑은 물이 계곡에 가득하여 한순간에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놓았던 구기 계곡이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윗돌이 뒤엉킨 계곡의 등산산로가 그때에는 그렇게 즐거웠지만 오늘은 지루하게 느껴진다.
16시32분 구기터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많은 등산객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질서 있게 한 줄로 서서 기다린 버스를 타고 불광역에서 전철로 환승하여 집에 돌아왔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안하다.
● 일시 : 2014년 4월26일 토요일 맑음
● 구간 : 이말산 – 대남문- 문수사 – 승가사 – 구기터널
● 소요시간
- 자 택 : 08시30분
- 구파발 : 09시16분
- 이말산 : 09시19분
- 진관사 : 10시20분
- 삼천사 : 11시10분
- 대남문 : 13시23분
- 문수사 : 14시00분
- 승가사 : 15시25분
- 구기터널 : 16시32분
- 자 택 : 17시40분
●총 소요시간 : 9시간10분(실제 소요시간: 6시간16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