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5 내가 이제는 이스라엘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였다.
그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큰 용사였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다. (1절)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노예로 붙잡혀온 작은 계집종이 있었다.
나아만은 그 작은 계집종의 말을 듣고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북이스라엘로 가고자 아람왕 벤하닷 2세에게 청한다. (4절)
대 아람제국의 군대장관이 식민지에서 노예로 붙잡혀온 작은 계집종의 말을 근거로 임금에게 나아가 북이스라엘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무엇이 그를 이렇게 낮추었을까?
문둥병이 걸렸기 때문이다.
또 그 말을 듣고 패전국의 왕에게 군대장관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반헤닷 2세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전에 벤하닷 2세는 아버지 벤하닷 1세로부터 가장 강성할때 아람의 왕위를 물려받아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태어날때부터 모든 사람들과 모든 주변국들이 자신과 아람국앞에 굽신거리며 벌벌 떠는 것만 보아왔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전쟁하는 것을 우습게 여겼다.
전쟁도 하기전에 모든 나라들이 아람에 굴복하여 왔으니 북이스라엘도 당연히 항복할거라고 생각하고 전쟁전날까지도 동맹국 왕들과 술을 마셨다.
그렇게 교만과 향락에 빠져 벤하닷 2세는 아벡전투에서 아합왕에게 거듭 패전하고 근동의 패권을 북이스라엘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이후에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다시 벤하닷 2세가 승리하게 되지만 왕하 5장의 내용으로 보아서 벤하닷 2세는 분명히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낮추었을까?
전쟁에 실패한 경험 때문이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한다.
나아만이 기대했던 것은 다른 주술사처럼 아픈 곳에 손을 얹고 부르르 떨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냥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그렇게 간단한 것이면 아람에 있는 큰 강에서 씻을 것이니지 요단강 같이 작은 도랑같은데서 몸을 씻으라고 하는게 나아만의 자존심을 어지간히 건드렸던 것 같다.
요단강은 우기가 아니면 강바닥이 드러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강이었다.
반면에 아람땅에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과 같은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강들이 있었다.
그런 강들같이 물이라도 많으면 목욕하는 광경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텐데
그래도 대 아람국의 군대장관이 물도 그리 많지 않은 요단강에 쭈그리고 앉아서 문둥병이 걸린 몸을 드러내고 몸을 씻는다는게 넘사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그 자존심을 내려놓는다.
문둥병이 아니었으면.....그가 어떻게 그렇게 낮아질수 있었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나아만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사의 말대로 불치병인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슴을 고백한다. (15절)
질병과 실패가 전능하신 하나님앞에 교만한 나를 낮추게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오히려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질병과 실패가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낮추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북이스라엘의 요아람은 아람왕 벤하닷 2세의 편지를 받고 고민을 하게 된다.
아니 문둥병이 어떻게 나을수 있단 말인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런 그 합리적인 생각에 스스로 갇혀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때가 많다.
요아람은 비록 금송아지 하나님이긴 하지만 겉모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실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히려 벤하닷 2세의 편지를 침략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보낸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7절)
게하시 같이 하나님의 임재의 기회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복음은 몇몇 목회자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성공의 수단이 되어있다.
겉은 멀쩡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혼이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같다. (27절)
반면에 나아만의 작은 이스라엘 계집종을 생각해 보라.
아직 어린나이다.
전쟁에 붙잡혀와 노예가 되었다.
아마도 부모는 전쟁통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후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곳이고 아합때부터 바알과 온갖 우상들이 성행하던 곳이다.
이 아이는 어릴때부터 그런 환경속에 자라다가 전쟁에 노예로 붙잡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람의 군대장관앞에서 이야기한다.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했으면 나아만이 그 어린 여자아이의 말을 믿고 벤하닷 2세에게 이스라엘에 보내달라고 했을까?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가장 믿음이 큰 사람은 아람에 노예로 붙잡혀 온 이 작은 여자아이일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다.
그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란 없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며 그의 언약과 사랑은 전쟁이니 나도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그는 지금 여기 내가 노예로 붙잡혀 있는 이곳에도 항상 함께 하신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요아람왕이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나아만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사람이 온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슴을 인정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깨끗함을 입는다.
누가 하나님앞에 진짜 문둥병자 일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과 중심으로 깊이 인정하는 것... 둘다 중요하겠지만
구지 겉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둘중에 하나님은 어느것을 더 좋아하실까?
이방사람 나아만이 아람에 돌아가서 림몬신의 신당에서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허용하신다.
나아만이 다니엘처럼 더 큰 믿음이 있었다면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 또한 거절하는 것이 더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현실의 제약으로 인해 마음에는 없지만 어쩔수 없이 우상의 전각에 들어가지만 그 마음중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비록 우리는 세상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온 세상 보다 크시고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과 그의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마음중심의 생각에서 이것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할때 나아만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들이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