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애(姜淳愛) - 뜻길에 서서 - 5. 강원도 복귀의 첨단에 서서
1 우리는 최정순(崔貞順) 씨와 함께 강원도지사를 면회하여 도청 직원들의 강연 청강의 허락을 또 받고 최창림(崔昌林) 씨를 초청하여 강연을 하였다. 강연은 크게 호평을 받게 되어서 춘천시 직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활동은 날로 발전하여서 재건촉진회회장, YMCA 총무, 목사, 대학교와 방송국까지 우리의 뜻을 전하였다.
2 제2군단(第二軍固)도 방문하였으나 군단장을 만나지 못하고 방첩대까지 가서 대장을 뵙기를 청하였더니 어느 장교에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라는 문책을 받았으나 장교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정훈참모와 방송국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기도 했다.
3 한번은 MRA운동의 지도자가 와서 도지사의 명의로 종교계 인사를 초청하였는데 여자로서는 나 혼자 뿐이었다. 도지사의 능숙한 인사가 있은 후에 개인소개를 하고 MRA지도자의 MRA의 동기와 목적을 들은 후 도지사는 “특히 오늘은 홍일점이신 강 여사의 말씀을 듣겠다”라고 하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4 나는 심장이 뛰는 것을 억제하면서 ‘말씀을 전할 때는 이 순간이다’ 생각하고 “원인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보아 또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하면서 말씀했더니 도지사를 비롯하여 모두 놀라면서 고차적인 철학강의를 하니 깨닫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5 그 후 재건촉진회 회장은 지역장회의 때면 우리 교회에 와서 좋은 말씀을 하고 갔으니 춘천일대는 도지사로부터 관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우리 식구인듯 하였다. 그래도 또 ‘어떻게 하면 강원도민 전체에게 강연을 듣게 할까?’ 하고 욕심이 더 생기는 것이었다.
6 그래서 다시 박지사(朴知事)에게 요청했더니 내무국장과 공보실장, 지방과장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니 이 사람들을 만나라고 하여서 매일 도청사무실을 출근하다시피 했다. 선생님께서 세계순회노정을 끝마치시고 돌아오시기 전에 이 일을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와 정성을 쏟은 결과 반대 하던 모든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야 말았다.
7 하루는 지방과장인 이석봉(季石峰) 씨와 같이 내무국장에게 간곡한 심정으로 역설을 하니 “아무리 해도 강여사의 정열에는 못당하겠습니다” 하면서 웃었다. 그 다음날 지방과장을 만나니 조용히 내적인 문제를 가르쳐 주면서 지사 비서실장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기에 곧 실장을 찾아갔다.
8 실장은 지사에게 보고하고 나오더니 즉시 내무국장을 부르고 지방과장을 불러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왜 남의 하는 일에 반대하는가? 못하면 할복자살이나 하라”라고 하며 “오늘 즉각 공문화해서 발송하라”라고 시달했다.
9 그러면서 또 공보실장이랑 있는데서 “나는 통일교인이야” 하고 두 손을 올렸다가 내리는데 그 모습이 꼭 순진한 어린애 같았다. 확실히 그는 자기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들의 애원이 하늘에 상달되어 하늘이 역사하신 것이 틀림없다.
10 이런 결정이 있은 몇 시간 후 댐이 무너져 홍수가 나서 큰 난리가 났다. 그럼에도 도청에서는 즉각 공문화시켰기 때문에 공문서가 교회에 전달되었다. 아차 할 순간에 역사와 섭리는 달아날 뻔했다. 그리하여 지역장들은 모두 승공강사로서 나서게 됐던 것이다.
11 1965년 10월 10일은 선생님께서 귀국하신 날이다. 1천여 명이 넘는 식구들이 운집하여 환영하였다. 귀국하신 후 곧 이어 전국순회노정에 오르시어 세계 40개국의 성지를 택정하시고 흙과 돌을 가져오신 것을 한국과 연관시키시는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 코스가 강원도였다.
12 춘천지구에서는 이미 선생님을 모시기 위하여 큰 방을 마련하였고 비품을 각 지역이 분담하여 훌륭히 꾸며 놓았었다. 선생님께서 오셔서 도청 뒷산에 자리 잡은 성지에 오르시어 말씀과 축도를 해주셨다.
13 선생님께서 떠나시는 날에 지생련씨가 선생님의 필적을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가 간청을 하니 쾌히 승락하시고 최정순씨와 그 따님, 생련씨와 박봉애(朴奉愛) 씨 따님에게 각각 휘호를 써 주시고 나에게는 단지 1자(字) ‘성(誠)’ 자를 써 주셨는데 그 뜻이 더욱 깊었다.
14 나의 몸은 회복되지 않아서 본부교회에 머물러 있다가 선생님께 허락을 얻어 대전 이상헌내과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약 보름 동안 치료받다가 이속장 댁에 머물면서 쉬기로 하고 한약을 복용하던 중 선생님께서 지방순회차 대전에 오셨을 때 나는 “자유로이 이 길을 가게 해 달라”라고 애원하였다.
15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거절하셨다. 이 때의 선생님의 표정은 정말 뵈올 수 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더 말씀을 못드리고 있으니 “더 쉬라”라고 하셨다.
16 또 한번 선생님께서 대전에 오셔서는 내가 치통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는 “나이가 들어가므로 늙느라고 그런다”라고 하시면서 안쓰러워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어버이의 심정을 체휼하였다. 이어서 위 이빨을 빼고 의치로 했더니 더 새로워졌으며 아름다워 보였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