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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대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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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성군 지부 지회 스크랩 t신라종보2호
청담 추천 0 조회 57 09.05.25 1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홍성농협 회의실

2002 홍성군박씨대종친회 및

             박완일교수 초청강연회 

홍성군지부장 인사                              

 존경하는 종친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하여 멀리 서울에서 오신 오능보존회 총본부 박재원 총회장님 박완일 교수님 충남본부에서 오신 박재완 도본부 회장님 그리고 종친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 보니 모두가 훌륭한 분들이시고 여력이 있어 종친회가 잘 될 것 같습니다 못난 자식이 조상을 모신다는 말과 같이 못난 제가 회장을 맡고 있어 나름대로 종보도 발간하고 모임도 키워 보고 싶은데 여러분들의 도움 없이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 합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종친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홍성에서 얼마 안 되는 성씨들도 1년에 한번 정도는 종친회를 한다고 몇 백 명씩 모이는 되 우리 신라왕손 박씨는 종친회 한번 제대로 못하나 하고 지난 2000년도 12월말에 읍면별 대의원 10명씩을 추천받아 위촉하고 100여명의 모임을 갖고 대의원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들이고 다음해에는 꼭 전체모임을 갖겠다고 약속한바 있습니다. 지난 2001년도 12월에 모임을 가지려고 하다가 읍면 분회장님들과 상의 끝에 구정 명절 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아 오늘 이러게 300여명의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종친사업이 어려운 까닭이 있습니다. 종친 단체는 한 핏줄 혈연이라는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쉬운 것 같으나 한편 어려운 까닭은 현대인 에게는 별 이득이 없고 종친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는 공이적인 계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종친회가 종친들을 위하여 아무런 도움이 없고 있으나 마나한 별로 가치 없는 무용지물의 단체라 하면 우리 박씨종친호l 뿐만 아니라 타성들도 거의 다 성씨별로 종친회를 구성할리 만무할 것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 없는 후손ㅇl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살수도 없습니다. 종친도 몰라보고 사는 자라면 부모에게도 별로 효성이 없을 것이며 형제 자매간 에게도 우애가  없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사회에서도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자기의 근본도 모르고 뿌리를 떠난 생활이 존재 할 수 있으며 또한 빛을 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 던 자기의 근본을 분명히 알고 보존하자는데 종친회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나 하나의 외딴 개체가 아니고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빛나는 업적과 유훈을 그리고 순후한 미풍과 예속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전승 하는 것이 오늘날 종친회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오늘이 곧 옛것이 될지라도 오늘을 사는 현대인으로서 우리의 조상을 찾아 슬기를 배우고 유업을 받들어 잊어져가는 자손들에게 전통적인 윤리관을 확립시키고 승화시키는 신라오능보존회 박씨종친회  홍성군 지부로 만들어 나갑시다. 오늘 이모임에 참석하신 일가 어르신 모든 분들 가정에 편안하시고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2월25일           

             사단법인신라오능보존회[박씨종친회]홍성군지부  

                                   지부장  박 영 오                               

                                 

                                                         군종친회장

총본부 이사장 격려사

 

존경하는 홍성군 종친여러분 유서 깊은 이곳 홍성에서 오늘 종친여러분을 모시고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 합니다. 그리고 오늘 종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수고하신 박영오 회장님과 임원 여러분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우리 일가어른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우리는 신라 시조왕 이후 신라시대는 열 분의 왕이 나오시어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시고 다스렸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대마다 이름난 재상과 뛰어난 인물들이 끊이지 아니 하였으며 전국방방 곡곡에 우리 박씨가 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시조왕의 위대한 덕이 하늘에 닿아 그 음덕이 자손만대에 미쳤음이라 생각 합니다. 뿐만 아니고 근세에 와서 이 땅에 가난을 없애고 근대화를 이룩한 분도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이었습니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에 관해서는 왈가왈부하는 무리들도 없지 아니 하였습니다 마는 최근 각종언론기관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위대한 영도자이었음을 모든 국민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어른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습니다. 더욱이 우리들의 종친사업의 목적이 숭조와 애종과 육영임을 생각할 때 그동안 우리들은 그 어른에게 너무 소홀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종친회는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하는 추모 사업을 봉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추모 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당을 건립하고 내외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로 향사를 받드는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덕 있는 분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향사를 받듦으로서 그 분의 덕을 후세에 길이 기렸습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도덕이 땅에 떨어져 인륜은 무너지고 도의 정신은 없어 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참다운 도리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도의 정신을 바로 세워야하고 인륜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미구에 종친사업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자랄 수도 없고 근원이 없는 물이 흐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사람도 근본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발전도 번영도 기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종친어른 여러분들께서 아무리 근검절약하여 가정을 일으켜 세워다 하더라도 후손들의 정신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일생의 노고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추모 사업은 우리500만 박씨 성손들은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고 이 땅에 썩어가는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갰지만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종친어른 여러분 박영오 회장님을 중심으로 이곳 홍성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 사업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동참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건강과 가정에 신령하신 시조왕 할아버님의 음덕이 가득하시길 빌면서 격려사를 가름합니다.

 

                                     2002년 2월25일

                      사단법인 신라오능보존회[박씨종친회]총본부

                                     이사장  박 재 원   

                                                                        중앙회장

 


 
  朴氏 門中의 實踐三綱

 

[1] 崇祖 [받들자] 우리新羅王孫은 生命의 根源인 祖上의 大恩 을 잊지 말고 孝道와 奉祭祝에 精誠을 다하고 家訓을 지켜 빛내므로 崇祖에 우선한다.


[2] 愛宗 [사랑하자] 우리宗親은 萬派一原의 一家임을 銘心하고 一家끼리 믿음과 사랑으로 相扶相助의 美살려 和 睦團結하는 愛宗精神을 發揮하자


[3] 育英 [기르자]  우리王孫은 品位를 지키기爲하여 國家와 社會에 後進敎育에 힘써 훌륭한 人材養成에 最善을 다한다.

                                                                       홍성농협회의실
 

 

한국인(韓國人)의 성씨(姓氏)

성씨의유래 성씨는 어느때 어떻게 생겼나

 

성씨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양을 받아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고대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서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呼稱)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 세력이 중앙귀족화 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이며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姓)은 초기에 왕실(王室)에나 귀족(貴族)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 산 의 명칭을 따라 사성(賜姓)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서민들은 성씨 사용은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文宗) 이후에서부터 보편화 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모두가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성씨(姓氏)의 득성과정(得姓過程)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1(三國史記 第十三卷 高句麗本紀一)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高)씨를 자기 성으로 하였으며 건국공신(建國功臣)인 재사(再思)에게는 극(克)씨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居)에게는 산실(山室)씨를 사성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1(三國史記 第二十三卷 百濟本紀 一)에는 백제의 시조(始祖) 온조(溫祖)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夫餘)씨로 하였으며,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기원전 57년경 양선(楊山) 기슭 나정(蘿井)옆에 있는 숲속에서 표주박 같은 커다란 알에서 탄생 했다 하여 표주박 박(朴)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65년 탈해왕 9년에 금성(金城)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금함(金函)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하였으며, 가야국 시조인 수로(首虜)도 42년(신라 유리왕 19년) 금관국(金官國) 북쪽 귀지봉(龜旨峰)에 떨어진 6개의 황금알(金卵)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三國史記第一卷新羅本紀)에는 신라 3대 유리왕 9년에 6부를 개정하여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양부)장 알평(謁平)에게는 이(李)씨를,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崔)씨를,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孫)씨를, 취산 진지촌(珍支村:본피부)장 지백호(地伯虎)에게는 정(鄭)씨를, 금삼 가리촌(金山加利村)장 기타(祇陀에게는 배(裵)씨를,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장 호진(虎珍)에게는 설(薛)씨를 사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北史)의 백제열전(百濟列傳)에 보면 사(沙)?연(燕)?예(?)?해(解)?직(直)?국(國)?묘(苗)씨등 8대성이 기록되어 있으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두 아들이 어머니 아유타국(阿踰他國)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성씨를 따서 허(許)씨라 하였고, 고려 왕건은 고려 건국 개국공신인 홍술(弘述)에게 홍(洪)씨를, 백옥(白玉)에게는 배(裵)씨를, 삼능(三能)에게 신(申)씨를, 복사귀(卜沙貴)에게는 복(卜)씨를 사성하여, 각각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沙兼)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성을 얻었는데, 주로 중국계통이 많았다. 괴산 점씨(槐山占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 우록(友鹿)계는 일본계통이고, 화산이씨(花山李氏)는 안남(安南)계통, 연안인 씨(延安印氏)는 몽고(蒙古)계, 덕수장씨(德水張氏)는 아랍계이며, 태씨(太氏)의 일부는 발해(渤海)계통이고, 임첨이씨(林川李氏)와 경주설씨(慶州?氏)는 위글계통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충주어씨(忠州魚氏)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원래 지씨(池氏)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친히 불러, 보고나서 어씨(魚氏)로 사성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목천현 성씨조(木川縣姓氏條)에 보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후 목천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태조의 미움을 사서, 각기 우(牛:소)?마(馬:말)?상(象:코끼리)?장(獐:노루).돈(豚:돼지)씨 등의 짐승이름으로 사성했는데 후에 우(于). 상(尙) 돈(頓). 장(張)씨 등으로 변성(變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씨(姓氏)의 사회적 의미(社會的意味)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신분계급의 상징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평등한 조건에서 누구나 갖게 됨으로써 인격존중의 /사회적 진보가 달성되고 사회적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성씨는 씨족끼리의 일체감 속에 자기를 귀속(歸屬)?확인시켜 안정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 민족유대(民族紐帶)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며, 사회적 지위의식(地位意識)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75년도 인구 조사에 의한 성씨분포도(姓氏分布圖)를 살펴보면, 김씨가 전체인구의 21.9%,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4대성이 총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순위 20위 안에 드는 성이 80%를 차지하고 35여개 성이 90%를 차지하여 실제적으로 우리나라에는 249개 성(姓) 중에 90여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160여개 성은 총인구의 1%에도 못 미치는데, 심지어 비(丕)?선(先)?간(間)?응(應)?포(鮑)?방(旁)?은(恩씨) 등은 전국을 통하여 1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

                                    

                                                                              고령박씨대종회장 

 


 

 

고 령 박 씨 (高 靈 朴 氏)

시조:박언성(朴 彦 成)본관 및 시조의유래(本貫 始祖由來)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 박언성(朴彦成)  본관 및 시조의유래 (本貫 始祖 由來)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시조(始祖) 박언성(朴彦成)은 신라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의 29세손 신라54대왕인 경?왕(景明王)의 팔대군(八大君)중 제이자(第二子)인 고양대군(高陽大君)이시다 본관(本貫)은 본래 고양(高陽) 령천(靈川) 두 지명(地名)을 합쳐 고양의 고(高)와 령천의 령(靈)을 따서 고령(高靈)이라하였다. 고령박씨는 고양대군의 후손(後孫)인 섬(暹)을 중조(中組)로한 사인공파(史인 公派) 환(還)을 중조(中組)한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연(連)을 중조(中組)로하는 (主簿公派)등 삼파(三派)로 대별(大別}하고 다시 15개 지파(支派)로 나누어져 있다. 역사의 인물로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현대인물(現代人物)

박정희 대통령(朴正熙 大統領)은 육군대장(陸軍大將)으로 예편하여 제 5,6,7,8,9,代 대통령(大統領)을 역임하였다 서기 1717년 경북 선산(慶北 善山)에서 출생(出生) 하였다. 어사공파(御使公派) 지강공(直講公)의 후손(後孫)으로 군수(郡守) 성빈(成彬)의 아들이다. 1937년 대구사법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 하였다.  8,15해방 후 한국 국군 창설에 참여 1946년 한국육군사관학교(韓國陸軍士官學校;第二基)를 졸업하고 육군에 복무(服務)하는 동안 54년 육군포병사령관(陸軍砲兵司令官) 55년에 제5사단장(第五師團長) 60년에 육군군수기지사령관(陸軍軍需基地司令官) 등을 역임하였다. 61년 육군소장(陸軍少將)으로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을 주도(主導)하였으며 최고회의의장(最高會議議長)으로 2년3개월간 군정(軍政)을 맞게 되었다. 63년 육군대장(陸軍大將)으로서 전역(轉役)하면서 민주공화당(民主共和?)에 입당(入?)하여 5대 대통령에 입후보(立候補)해서 당선(當選)되었다. 대통령에 취임(就任)한 뒤 경제개발 오개녁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추진(推進)을 비롯하여 64년 국군월남파병(國軍越南派兵) 65년 한일협정(韓日協定) 비준 등을 세찬 반대(反對)를 무릅쓰고 단행(斷行)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는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재단에 바친 사람이다. 나의 행동은 후세 사가(史家)가 판단해 줄 것이다.] 라는 말로서 신념(信念)과 각오(覺悟)를 밝히고 민족(民族)과 국가(國家)의 발전(發展)과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를 위해 냉철(冷徹) 판단(判斷)과 과감한 용단으로 17년간 대통령의 책임을 청렴강직(淸廉剛直)하게 충실이 수행하여 민족중흥(民族中興)의 경제적 기반과 자주국방(自主國防)의 기초를 구축하는데 영도자(領導者)로서 최선(最善)을 다했다. 저술로서 [國家와 革命과 나]  [指導者의 길] [民族의 底力] 등이 있다.

 


                                                오능 일자제각
 

 

 

 

신라 제2대(朴氏2大王)남해왕

 

신라(新羅)제2대 (朴氏2代王)남해왕(南解王)

남해왕은 시조왕(始祖王)의 맏아들이시니 처음에 차차웅(次次雄)은 혹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말하기를 이는 방언 (方言) 으로 무당을 이르는 것으로 사람들이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는 까닭에 두렵게 공경하므로 드디어는 존장사(尊長者)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하였다 한다. 시조왕의 아들 적자(嫡子)이다 그는 키가 크고 성품이 심후(深厚)하여 지략이 뛰어났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  재위(在位) 20年이요 수(壽)는74세시다 릉(陵)은 시조왕릉과 같은 곳 묘좌(卯坐)이다 원년(元年) 을축(乙丑)에 왕비 김씨를 봉하여 운제왕후(雲帝王后)를 삼으시고 다음왕비 석(昔)씨는 아루왕후(阿婁王后)라 하다 2년 병인(丙寅) 정월(正月)에 시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四時)로친히 제사하실새 왕의 누이동생 아노(阿老)로 제사를 주장하게 하다 5년 무진(戊辰)에 왕께서 석탈해(昔脫解)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로 그의 아내로 삼게 하시고 7년 경오(庚午) 서기10년 7월에 탈해에게 대보(大輔)라는 벼슬을 주고 군국정사를 맡겼다  상고하건대 탈해(脫解)는 파사나국(婆娑那國) 사람이다 그 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여(女國王女)를 왕비로 삼았는데 아기를 밴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니 왕이 (사람으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마땅하다)하니 왕비가 명주로 알을 싸서 궤속에 넣어 배에 싣고 축수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무사히 가거라)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김해에 가니 해변(海邊)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서 건지지 않으므로 전전해서 진한(辰韓)에 오니 늙은 할머니가 새기로 끌어 당겨서 궤를 열어보니 아기가 있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는데 장성(長成)하였다 궤가 처음 올 때 까치가 따라와서 지져 기므로 까치 작(鵲)의 조(鳥)를 떼어내고 석(昔)으로 성(姓)을 하고 궤를 풀고 나았다 해서 탈해(脫解)로 이름하다 탈해가 얼굴이 빼어나고 명랑하여 지식이 뛰어나서 나무하고 고기 잡아서 할머니를 잘 봉양(奉養)하니 할머니가 (너 모양이 뛰어 났으니 마당이 공부해서 입신양명(立身揚名) 할지어다 라고 하니 탈해가 학문에 더욱 힘쓰고 겸하여 지리(地理)에 정통(精通)하여 월성(月城)에 거주(居住)하였다. 다음에 기사(己巳)에 마한(馬韓) 이 망하다 11년 갑술(甲戌) 서기14년에 왜인(倭人)들이 병선(兵船) 백여 척이므로 해변에 침입하여 민가(民家)를 약탈하므로 왕은 육부병(六部兵)을 출동(出動)시켜 막아냈다. 이때 낙량(樂浪)에서는 서라벌(徐羅伐)의  허점(虛點)을 틈타서 급히 금성(金城)을 공격(攻擊)하므로 사세가 위급하였다 그런데 밤에 유성(流星)이 적(賊)의 진영(陣營)에 떨어지니 적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알천상유(閼川上流)로 퇴진(退陣)하여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도망가니, 이때 육부병(六部兵) 천명이 적을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 알천(閼川)까지 따라갔다가 돌무더기를 보고 적의 수가 많은 것을 알고 퇴진(退陣)을 중지하였다. 15년 기묘(己卯)년에 북명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印)을 얻어 와서 올리다. 상고하건데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북(北) 동부여(東扶餘)를 칠 때에 길에서 북명(北溟)사람 괴유(由怪)를 만났다 하니 북명(北溟)은 국내성(國內城) 부근(附近)의 땅일 것이다 20년 갑자(甲子) 9월에 왕께서   훙서(薨逝)귀족의 죽음을 말함)하시니, 태자유리(太子儒理)가 왕위에 오르다. 왕이 임종(臨終)에 태자유리와 탈해(脫解)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 박씨(朴氏)와 석씨(昔氏) 두 성씨(姓氏)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으라 하시고 돌아가셨다.

                                                        

                                                박정희대통령내외분

신라오릉보존회에서

             박정희대통령사당건립키로

     박정희 대통령 추모사업 봉행 추진위원회구성

  발기문  發 起 文

 

四百 五十만 박씨성손(朴氏姓孫) 여러분 올해는 신라(新羅) 시조대왕(始祖大王)께서 나라를 세우신지 二千 五十八年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시조대왕께서는 보령(寶齡) 十三歲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추대를 받아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으니 우리 박씨(朴氏)라는 성(姓)이 탄생한지 二千七十年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지난 二千여년 동안 우리 박씨는 신라(新羅) 시대에는 열 분의 왕이 나오셔서 二百 三十 三年間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으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세대마다 이어졌을 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우리 박씨가 살지 않는 곳이 없고 그 수가 四百 五十만을 헤아리고 있으니 우리 시조대왕의 크신 덕(德)이 하늘에 닿아서 열선조(列先祖)님 들의 음덕(蔭德)이 자손만대에 미쳤음이라 하겠습니다. 이 어찌 숭조(崇祖)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 박씨는 비록 본관(本貫)이 다르고 파(派)가 다르다 하더라도 시조대왕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형제(兄弟)가 되고 부자(父子)가 되니 어찌 애종(愛宗)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나라에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워 太平聖代)를 희구(希求)하였고 사가(私家)에서는 가묘(家廟)를 두어 번창을 기원 하였으며 유림(儒林)에서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세워 덕(德) 있는 사람을 기렸습니다. 비록 세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전도(顚倒) 되었다하나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理致)마저 바뀔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단법인(社團法人) 신라오릉보존회(新羅五陵保存會;박씨대종친회)가 그 목적을 숭조(崇祖)와 애종(愛宗)과 육영(育英)에 둔 것도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이치(理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이치(理致)란 자연(自然)의 법치(法則)과 같아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당이 지키고 행 (行)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도덕(道德)이기 때문에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복(福)이 됨을 말해 줄뿐 강요 하거나 제재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박씨성손들도 숭조(崇祖)하고 애종(愛宗)하여 스스로 도덕(道德)을 널리 실천하고자 법인(法人)을 설립(設立)하여 반세기(半世紀) 가까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는 저간(這間)의 사정에 의하여 우리가 꼭 했어야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박정희대통령(朴正熙 大統領)의 추모사업(追慕事業)입니다 존경하는 박씨성손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박정희대통령은 일찍이 우리가 사당(祠堂)을 짓고 영정(影幀)과 위패(위패)를 봉안(奉安)하여 매년(每年) 향사(享祀)를 받들었어야 마땅한 어른이 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만약 우리 세대에 그일을 하지 못 한다면 앞으로 어느 시대에 누가 그 일을 하리라 기대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사단법인(社團法人)  신라오릉보존회(新羅五陵保存會;박씨대종친회)는 2000년 3월 9일 정기총회에서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의 추모사업(追慕事業)을 봉행추진위원회(奉行推進委員會)로 모든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박정희대통령 추모사업 봉행추진위원회 명의로 은행계좌를 개설하므로 서 전국 어디서나 추모 사업에 필요한 성금을 (지로) 로 송금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현금을 취급하지 않음으로서 성금 관리에 있어 공신력(公信力)을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금을 보내신 분은 그 이름이 자손대대로 남을 수 있도록 현판(懸板) 동판(銅版) 비석(碑石) 봉성록(奉誠錄)등에 각명(刻銘) 하기로 하였습니다. 四百 五十萬 박씨성손(朴氏姓孫) 여러분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의 사당(祠堂)에 기와 한 장을 올리고 벽돌 한 장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박정희대통령 추모사업 봉행에 모두 적극 동참(同參)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번 추모 사업은 그 뜻이 추모 사업을 하는데 에만 그치지 않고 성손(姓孫)들의 가슴속에 사라져가는 숭조(崇祖)의 정신을 고취(鼓吹)하고 애종(愛宗)의 마음을 일깨워서 사백 오십만 우리 성손(姓孫)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종친간에 일가(一家)의 정분(情分)을 더욱 더 돈독히 하자는데 에 있습니다. 이 뜻 깊은 일에 한 분의 성손(姓孫)도 빠지시는 일이 없고 또한 성손(姓孫) 여러분들의 성금이 한 푼도 잘못관리 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조기에 달성할 수 있도록 우리 추진위원 일동은 심혈(心血)을 다 할 것입니다.

                                          2001년  월   일      

  박정희대통령 추모사업봉행추진위원회(朴正熙大統領 追慕事業奉行推進위원회)

추진위원 일동(推進委員 一同)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총본부모임

 

총본부소식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홍성군지부 박영오지부장님이 2001년 2월 27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대연회장에서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총본부 정기총회가 전국 시 군지부장이 총본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 예산결산 심의 정관개정 및 임원개선이 있었다. 총본부 이사장 박치현회장이 임기만료하고 고문으로 계시던 박재원씨가 신임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앞으로 4년간 보존회를 이끌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총본부모임

 

도본부소식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충남본부 정기총회가 2001년 3월 12일 대전유성 성산회관에서 있었는데 이날 정기총회에서 감사보고 및 임원개선이 4년 만에 있었다. 선출된 임원은 도본부회장에 박재완 전임회장이 연임되었으며, 부회장에 박천규 아산시지부장, 박종섭 릉전참봉, 박영오 홍성군지부장 3분, 감사에 박원종 예산지부장, 박종수 공주지부장 2분이 선출되어 앞으로 4년간 도본부를 이끌게 되었다.

                                                            도본부모임



 

 

                                                             홍성읍 분회소식

 

홍성읍 분회는 2000년 9월 13일 홍성로타리클럽 회의실에서 사단법인 신라오능보존회 박씨종친회 홍성군 홍성읍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선출에 회장 박영덕 부회장 박태원 총무 박세규 감사에 박삼화씨를 회원만장 일치로 선출 하였다 회원은 사업인과  공무원, 회사원으로 40대 후반에서 60대로 패기 있고 역량 있는 분들 40명을 정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날 홍성군지부장 박영오씨의 격려사에서 앞으로 여러분들은 신라오능 춘분 추분 대제에 동참하여 숭조사상을 높이고 회원 상호간 권익보호 및 애경상조시 친목단합하고 장학사업 및 효자효부 표창을 박씨종친 모두의 운영발전을 위하여 다함께 노력하며 홍성에서 가장 모법이 되는 종친회로 만들어 나가자고 격려 하였습니다

박영덕 분회장님께서 홍성읍 분회를 2000년,2001년도를 잘 운영하셔서 분회의 자금도 500만원 이상 확보하였으며 친목단합으로 모법이 되는 종친회로 이끌고 계십니다.

 

금마면 분회소식

 

금마면 분회는 지난 2001년 3월 20일 대교회관에서 임원개선이 있었다. 그동안 박종완 분회장님께서 팔순을 마다하고 분회장을 맡아 5년간 운영하시다 노환으로 회장직을 그만 두시게 되어 박종은 분회장님께서 회원들의 추대를 받아 분회장에 취임 부회장에 박용수씨 총무에 박갑순씨로 임원 개편 후 70~80대 회원을 50~60십대 회원으로 증가하는 한편 새로운 활기로 회원 상호간 친목단합에 힘쓰고 계시다.   


홍동면 분회소식

 

홍동면 분회 분회장 박용문씨는 2002년 2월 15일 홍동 제일식당에서 홍동면분회 창립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창립 및 분회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홍성군 박씨종친회 및 박완일교수 초청 강연회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고 2002년 2월 25일 행사 후 다시 분회모임을 개최키로 했다.


장곡면 분회소식

장곡 면분회 분회장 박창수씨는 1995년 장곡면분회를 40명의 정회원으로 창립하시여 일사분기로 모임을 갖고 회원 간에 친목 단합하여 매년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신라오능 추분제에 부부동반으로 참배 하는 등 분회에 천만원의 자금도 확보하고 있어 홍성군 지부에서는 모법이 되는 분회로 알려져 있으며 2002년 종친회 모임에 우수 분회장으로 선정돼 군지부장의 표창을 받게 됐다.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회갑(回甲):六十에 저승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 안계시다고 여쭈어라

고희(古稀):七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이르다고 여쭈어라

희수(喜?):七十七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부터 노약{老?}을 즐긴다고 여쭈어라

산수(??):八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이래도 아직은 쓸모 있다고 여쭈어라

미수(米?):八十八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쌀밥을 더 먹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졸수(卒?):九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서둘지 않아도 된다고 여쭈어라

백수(白?): 九十九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때를 보아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황금 같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해마다 피는 꽃은 같다고 하지만 사람은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어찌 사람과 세상뿐이랴 올 해핀 꽃도 잘 살펴보면 작년에 피던 꽃은 아니다 연년 세계만물은 유전하고 있다 모든 것은 물과 같이 흐르며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발을 씻을 수 없는 것이다 흐르는 물이 다르듯이 발을 씻는 나 자신도 늘 변하고 있다 인생을 응시하고 인생의 진실을 생간하면 인생에 있어서도 모든 기회는 한번 밖에 없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 만나면 내일은 흘러가 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오늘로서 영원한 것이다 똑같은 하루가 다시는 있지 않다 만약 하루를 헛되이 보내면 그것은 영원히 헛된 자국을 찍고 흘러가 버리는 것이지 또 다시는 올수 없다 마치 이 순간순간을 최후의 것인 양 생각 하라 그와 동시에 어떠한 순간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더 높은 곳이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에 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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